1. 불보는 생사가 없는 우리의 참모습을 의미한다
– 윤재철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불보에 귀의한다는 것은 부처님에게 귀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에게 왜 귀의한다고 하는 것입니까?
- 한마디로 진리를 깨달아 생사를 벗어난 우리의 참모습을 찾아준 분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이 진리를 깨닫는 과정을 이중표님의 『불교란 무엇인가』 27쪽-29쪽에서 발췌 요약합니다.
붓다는 이천 육백여 년 전 인도의 카필라성에서 수도다나왕의 태자로 태어나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말합니다. 그는 우리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생사의 고해를 윤회하는 고통스러운 존재라는 사실과 마주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인 채 하루하루 눈앞의 순간적인 쾌락을 추구하거나, 기껏해야 도움을 줄 전지전능한 신을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이러한 우리의 현실이 극복될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의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기 위해 사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연 죽어가는 우리의 인생이 극복할 수 없는 절대적인 사실인지, 아니면 생사를 벗어난 의미 있는 인생이 있는지를 스스로 확인해 보기로 했습니다. 죽음에 도전한 것입니다. 6년 동안의 갖은 고행과 명상 끝에 그는 태어남과 죽음이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보통 육신을 들어 나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할 때도 이 몸이 태어난 것이고, 죽었다고 할 때도 이 몸이 죽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몸은 이렇게 생멸이 있으므로 ‘참 나’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이 ‘참 나’일까요? 하지만 마음도 쉴 새 없이 생겼다가 사라집니다. 따라서 마음을 생사가 없는 ‘참 나’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것을 ‘참 나’인 줄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생멸에서 자신의 생사를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을 밝히는 교리가 십이연기(十二緣起)입니다.
이런 거짓된 나를 벗어나면 우리와 이 세상 모든 것은 결코 태어나서 죽어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본래 생멸(生滅)이 없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깨닫고 보니 우리는 모두가 부처님이더라고 말합니다.
불보(佛寶)는 이렇게 본래 생사가 없는 우리의 참모습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생사를 다음처럼 노래합니다.
生也一片浮雲起(생야일편부운기)
태어난다는 것은 한 조각의 뜬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死也一片浮雲滅(사야일편부운멸)
죽음이란 한 조각의 뜬구름이 사라지는 것이다.
싯다르타는 지금까지 나라고 생각한 것들이 뜬구름과 같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리고 구름이 생겨서 사라지는 푸른 하늘은 생멸이 없듯이 허망하고 거짓된 ‘나’가 사라지면[無我] 바로 그것이 생사가 없는 ‘참 나’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다음 시를 읽겠습니다.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 윤재철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술값은 쟤들이 낼 거야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귀에 대고 소곤거린다
그때 나는 무슨 계시처럼
죽음을 떠올리고 빙긋이 웃는다
그래 죽을 때도 그러자
화장실 가는 것처럼 슬그머니
화장실 가서 안 오는 것처럼 슬그머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할 것도 없이
빗돌을 세우지 말라고 할 것도 없이
왁자지껄한 잡담 속을 치기배처럼
한 건 하고 흔적없이 사라지면 돼
아무렴 외로워지는 거야
외로워지는 연습
술집을 빠져나와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 걸으며
마음이 비로소 환해진다
이 시에서는 죽음을 존재의 종말로 보지 않습니다. 벗들과 술을 먹다가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술값은 쟤들이 낼 거야”처럼 가는 것입니다. 왁자지껄한 속에 있다가 왁자지껄한 상태는 그대로 놔두고 ‘살짝 가는 것’, 슬쩍 혼자가 되어 새로운 연기적 조건의 계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있음(有)과 없음(無), 생사를 무시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있음과 없음은 분명하게 나누어지지만 대립은 아닙니다. “화장실 가는 것처럼 슬그머니/ 화장실 가서 안 오는 것처럼”일 뿐입니다.
또 ‘있음’을 중심으로 생에 집착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무상한 세계에서 생과 사, 탄생과 소멸이 매 순간 함께 하는 과정이듯 죽음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할 것도 없이/ 빗돌을 세우지 말라고 할 것도 없이/ 왁자지껄한 잡담 속을 치기배처럼/ 한 건 하고 흔적없이 사라지면 돼.”
그렇다고 죽음을 무시하고 가볍게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존재의 종말’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작별임이 분명합니다. 새로운 연기의 계기로 생각하고 변합니다. “아무렴 외로워지는 거야.” 두려워하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외로워지는 낯섦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외로워지는 연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삶의 형태를 보면 하나같이 왁자지껄하게 있다가 혼자가 되는 것의 반복입니다. 술집에서 벗들과, 일터에서 동료들과,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있다가 빠져나와 집으로 가거나 잠에 듭니다. 죽음도 연기의 세계에선 워낙 그런 형태로 있습니다. 그렇다면 왁자지껄한 공간에서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술값은 쟤들이 낼 거야”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줄 알면 됩니다.
그래서 이중표님도 다음처럼 말했을 것입니다.
“죽음이란 허망한 자기 존재를 마음속에 만들어놓은 사람들에게만 존재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 존재의 가능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죽음은 모든 자유의 종말입니다. 죽음 앞에서 자기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법계와 함께 연기하는 법신(法身, 연기하는 나로서의 무아)에게 죽음은 인연이 변하는 하나의 사건일 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새로운 행위가능성을 추구하는 하나의 새로운 계기일 뿐입니다. 작자는 없지만 업보는 있으므로 죽음을 통해 사라지는 것은 망념에 의해 취착된 허망한 존재일 뿐, 법계와 함께 연기하는 법신은 항상 법계와 함께합니다. 죽음이란 하나의 착각일 뿐 법신에게 종말은 없습니다.”(『불교란 무엇인가』 344쪽)
이럴 때 “생의 고통을 만들어내는 본원적 고통”으로부터도 “빠져나와/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 걸으며/ 마음이 비로소 환해진다”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허망하고 거짓된 ‘나’가 사라지면[無我] 바로 그것이 생사로부터 해탈한 자유로운 존재입니다.부처란 이렇게 생사로부터 해탈한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우리가 불보에 귀의하는 것은 우리도 부처님처럼 생사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입니다.
-오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