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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혼:일부다처제
(말2:14-15)
2006/10/01
오늘날 결혼제도는 위기를 맞고 있다. 위기 중 가장 신랄한 것은 남녀가 결혼을 한다는 것 자체에 대하여 회의를 가지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이라는 제도에 매여서 자유를 구속받아가면서 살아야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자유를 구속 받으면서 살아야 할 결혼 제도란 인간에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남녀평등을 넘어서 인간의 자유와 모든 속박에서 해방을 주장하는 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한다. 이들은 결혼이라는 제도는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생각에는 결혼 제도가 인위적인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것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서 결혼 제도를 벗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신 인간의 사랑과 성적인 욕구와 사회적인 욕구 즉 함께 있고 싶어 하는 욕구를 위해서는 마음 맞는 사람끼리 합가하여 생활하면 된다는 것이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매이지 말고 같이 생활하다가 헤어져야 한다면 자유롭게 헤어질 수도 있고,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면 계속해서 함께 생활해도 되는 형태의 자유로운 합가를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들의 자유에 속하는 문제이지 사회 제도가 이런 것을 구속할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들은 결혼을 하든지 합가를 하든지 이런 것들은 개인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국가가 간섭을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국가가 결혼신고를 받고 이혼을 허락하고 하는 것도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일에 대하여서는 국가의 간섭을 받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극단적인 사고 같지만 이런 식의 사고가 구라파에서는 상당히 진행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시작될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우려를 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도 결혼은 하지 않아도 되며, 꼭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많은 젊은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때 자연스럽게 위와 같은 생각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이런 현상은 결혼제도를 도전하는 대단한 진보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오늘은 중혼(plural marriage)을 생각해 보자. 중혼이라면 일처다부도 될 수 있고 일부다처도 될 수 있는데 중혼 중에서도 아직도 쉽게 볼 수 있는 일부다처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 주변에는 지금 외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일을 하면서 생활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이슬람권의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이들에게서 일부다처의 풍습을 듣게 된다. 이슬람은 아직도 일부다처제가 사회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한 사람이 4명까지 아내를 둘 수 있다고 한다. 돈이 많아서 여러 아내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이렇게 4명까지 아내를 두어도 그 사회는 아무런 허물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 이슬람은 세계에서 막강한 세력으로 번창하고 있는 형편이다. 아프리카, 유럽, 중동, 동남아와 중국과 우리나라까지 들어와 있다. 그러므로 일부다처제는 아직도 일부이기는 하지만 전 세계에서 인정되고 있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몰몬교도 한 때 일부다처제를 인정했다. 초대교주였던 요셉 스미스에서 시작하여 다음을 이었던 버리검 영에 와서는 아주 일부다처제가 공개적이고 광범위하게 시행되었다. 이렇게 하여 일부다처제는 반세기 동안 말일성도 교회에서 시행되었다. 지금은 이것이 몰몬교 내에서도 금지 되었으며, 그런 사람은 교회에서 출교시킨다고 한다.
몰몬교에서 그들이 일부다처를 주장하게 된 경위는 대략 이렇다. 일부다처는 구약 성경에 보편적인 현상이더라는 것이다. 아브라함, 야곱, 사사들, 다윗, 솔로몬, 그 외의 이스라엘의 열왕은 여러 명의 아내를 두었고, 심지어 제사장들도 여러 명의 아내를 두었더라는 것이다. 사무엘의 아버지 제사장 엘가나나 여호와야가 같은 사람들은 여럿 아내를 두었다. 구약에서 이렇게 행한 것을 몰몬교에서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명령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그들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명령한 것으로 믿고 그렇게 일부다처를 시행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박해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 동안 그들은 일부다처를 행하였다고 Turley라는 사람은 말한다.
그러다가 정부의 반대와 일반인들의 일부다처제 반대 운동에 직면하자 미국 동부에서는 몰몬교도의 일부다처제 아내들이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 여인들은 일부다처제 결혼을 하는 것을 종교적인 원리로 삼을 권리가 있다고 하면서 시위를 하였다. 1870년 1월에는 수천 명의 여인들이 솔트레이크 장막성전에 모여서 일부다처 금지법에 대항하여 맹렬하게 항의하기도 했다. 참으로 금지법을 지지하여 반대 운동을 했던 사람들을 놀라게 한 사건이었다. 여성들을 남자의 압제에서 해방한다고 일부다처제를 반대하던 여인들은 얼마나 놀랐겠는가?
그 후에도 정부는 이 제도 시행을 법으로 금했고, 종교지도자들이 투옥되고, 교회 자산들이 몰수 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4대 수장 Woodruff는 주의 환상과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법에 금지된 어떤 결혼도 삼가야 한다고 선언했다. 만약 이것을 삼가지 않으면 많은 남자들이 감옥에 갇힐 것이며, 성전에 수종 드는 일도 끊어지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이런 선언을 했었다. Woodruff가 이런 선언을 한 것도 1890년대 말경이니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된 셈이다.
그리고 지금 수장인 Gordon B. Hinckley가 ‘말일성도 교회는 일부다처제 시행과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그렇게 하는 사람은 교회의 멤버가 아니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코 일부다처를 시행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고 말했다. 이로서 그 교회는 이 제도를 완전히 배격한 것으로 생각 된다. 비교적으로 최근에 일부다처를 완전히 배격했다고 할 수 있다.
개신 교회의 어떤 장로도 실수하여 다른 여자를 알게 되었다. 그런 후에 그 여자를 버릴 수도 없고, 그래서 고민하다가 아브라함도 여러 여인과 결혼하여 살았으니, 자기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그렇게 살기로 했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과연 신자는 이런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신자도 일부다처로 살 수 있을까?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첫째, 성경의 대 원리는 일부일처가 대 원리이다. 말라기 2:14-15은 결혼제도의 중요한 원리를 제공하고 있다. “너희는 이르기를 어찜이니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찍이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짖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이 창조 때에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합하여 하나 되게 지으셨다는 것,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지으신 이유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함이라는 것, 그리고 이러한 결혼은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이다.
먼저 ‘하나님이 창조 때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지으시고 이 둘이 합하여 하나 되게 하셨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나누지 못할 결혼 연합은 일대 일로서 연합하는 것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연합하여 하나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도 계시적인 뜻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한 남자가 여러 여자와 살도록 지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원리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일대 일로 하나 되어 한 짝을 이루어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슬람이 여럿 여자와 결혼하여 살도록 한다든지, 몰몬교가 그렇게 했던 것은 하나님의 뜻과 배치된다. 적어도 몰몬교는 성경의 대 전제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여 구약의 일부다처를 하나님의 명령으로 오해하였었다. 사람은 이런 어리석은 일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리고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지으신 것은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함이라고 했다. 여기서 “경건한 자손”이라고 번역된 말은 ‘하나님의 씨’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한 아이를 얻기 위해서’라고 번역한 성경도 있다. 그러나 ‘경건한 자손’이라고 번역된 것이 좋을 것 같다. 자손이란 비록 단수 명사이지만 집합적으로 취급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자손 속에 모두가 들어 있는 대표단수로서 말이다. 그렇다면 일단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즉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얻기 위해서 둘이 합하여 하나 되도록 지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일부일처의 연합은 신실함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일부다처는 복잡하고 나누어짐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일부일처로서 하나님께 신실을 되새겨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결혼 제도가 하나님과 사람의 언약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결혼제도는 단순한 인간의 제도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피조된 인간의 사랑의 관계를 반영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인간이 만든 제도라기보다 하나님이 계시를 담은 하나님이 내신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제도 속에서 일대 일의 연합이 계시 반영에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결혼할 때 결혼의식은 어떤 형태를 띠든지 간에 일대 일의 연합은 계시 이해를 위해서 중요하다. 그리고 하나님이 계시를 위해서 인간에게 이 제도를 주셨다.
따라서 일부일처가 성경의 대전제라는 것에는 틀림 없다. 그리고 이런 대 전제를 생각할 때 결혼제도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남자가 높고 여자는 종속적인 것이라는 따위의 생각은 여기에 끼어들 틈이 없다. 하나님의 계시를 반영하는 제도 앞에서 두려움과 숙연함을 느낄 뿐이다.
둘째, 이상에서 두 번째를 생각할 수 있다. 일부다처제가 생긴 이유는 인간과 하나님과 연합이 깨어진 것 즉 타락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타락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과의 연합 관계가 어두워졌고, 그래서 여러 명의 아내를 두고 서로 사랑을 질투하며 싸우는 싸움의 관계를 가지고 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처다부 현상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일부다처 제도는 비정상적인 제도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이런 제도를 구약 시대에는 허용하여 두셨을까? 그것은 인간 사회 전체가 그것을 죄악현상이라고 생각을 하지 못하니 선민이라도 그러한 죄악현상을 그냥 두고 살도록 허용하였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일찍이 창세기 4장과 6장에서 일부다처의 모습을 보게 된다. 너무나 이른 시기에 이미 인간은 타락의 현상을 자기 가정에서 가지고 살았던 것이다. 싸움과 투쟁의 모습을 보면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이후에도 인류가 보편적으로 취하게 된 가정에 대한 가치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인류는 일부다처 현상에 대하여 그것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오리려 관용하고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일부다처는 타락한 현상임에 틀림이 없다. 이것이 보편화되고 문화로 발전한 것이 오늘날 이슬람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슬람의 일부타처 현상은 옛날의 타락상이 종교라는 보수성 때문에 변하지 않고 계승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부다처는 좋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을 사회가 문제시 하지 않을 때 그것을 그대로 허용하여 두셨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 영광이 그 사회에서 가리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구약 시대 때에 일부다처를 문제시하지 않은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셋째, 그러면 오늘날 기독신자도 사회가 이것을 문제시 하지 않는다면 일부다처도 수용할 수가 있는가? 기독 신자는 원리상 이것이 하나님의 큰 정신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배격하는 것이 옳다.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계시의 원리를 따라서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특수한 사회에서 사회가 이것을 문제시하여서 하나님을 욕하지 않는다면, 허용할 수는 있을 것이다. 마지못하여 어쩔 수 없는 경우 복잡한 관계를 가지고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그런 경우를 허용할 수는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도 불과 50년 전에는 이런 것을 종종 볼 수 있었다. 큰 마누라, 작은 마누라를 데리고 사는 사대부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바른 것은 아니다. 인간이 약하여 죄악과 환경을 이기지 못하여서 그것을 허용할 뿐이지, 그것을 추구하고 당연시 하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은 대 원칙을 알고 그것을 따라 살도록 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넷째, 혹시 어쩔 수 없이 일부다처로 살게 된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런 사람을 천당 못 갈 사람으로 생각하거나 배격해서는 곤란하다. 아브라함을 받으신 하나님이 오늘날도 받지 않으실 리가 없다. 그러므로 사회나 국가가 이런 것을 문제 삼지 않은 상황이라서 이것 때문에 하나님이 욕먹지 않는다면 그리고 설령 국가나 사회가 이런 사람들을 욕한다고 할지라도 기독교는 이들도 믿음의 테두리 속에 들어오도록 허용은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고치는 것이 더 큰 악을 야기하는 것이라면 어쩔 수 없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허용하고 그런 사람도 믿음이 테두리 내에서 살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도덕 종교가 아니라 계시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국가의 법이나 사회적이 관습보다 더 위에 있는 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 땅에서 한 번 저질러 놓은 것을 다 해결할 수가 없다. 이 땅에서 죽어야 다 청산 된다. 그러므로 지고 가야 할 죄악의 흔적은 죽는 날까지 지고 가야할 것이다. 어쩌다가 일부다처의 상황에 빠진 사람이 있다면 죽는 날까지 그 짐을 지고 가는 것도 신앙 안에서 허용은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사람이 교회 밖으로 배격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교회의 지도자의 자리에 있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면들을 잘 고려해 보기 바란다. 기독교는 시대와 상황을 뛰어 넘는 원리를 가지고 있는 계시 종교이다. 일부일처가 기독교의 대 원리이지만, 이 세상에서 완전히 정리 되지 않는 인간의 죄악의 흔적을 죽는 날까지 용인하고 신앙 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일부다처의 사람이 예수를 믿지 못한다고 하지 않는다. 또 여러 아내를 가진 이슬람 교도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든지 할 때에 그들의 가정의 틀을 깨지 않고 우리는 받아들일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부다처의 이슬람도 회개할 때 그들은 그대로 받고, 그 다음 세대는 일부일처로 결혼을 하도록 지도하여서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틀을 가지고 있다.
예수 믿는 도리는 이렇게 큰 틀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도덕에 매이고 제한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기독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