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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장 무리 것들을 샅샅이 살펴서라 以閱衆甫
사실 이 장은 그냥 넘어 가고 싶습니다. 너무 어려워서.. 무슨 암호를 해독하는 것도 아니고, 압축 파일을 푸는 것도 아닌데... 장님 코끼리 만지기가 이만큼 답답할까!!
깨달아 봤어야 알지요. 지성과 지능으로 풀 수 있는 한계가 있습니다. 감각기관의 경험으로 제한된 지성과 지능이 결코 풀 수 없는 문제는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것은 감각이 확대된 복잡한 다차원이라기보다, 억지로 추상하자면 마치 0차원인 듯 싶습니다.
중학교 때, 후줄그래 한 과학교실에서, 물상 선생님으로부터 4차원이란 개념을 배울 때가 떠오릅니다. 두께도 길이도 없는 '점'의 1차원과, 그리고 역시 두께는 없지만 길이만 있는 선, 면의 2차원, 그리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두께(높이), 가로, 세로 길이가 있는 3차원이란 개념을 설명해 주신 적이 있었지요. 그래서 3차원 사람이 4차원을 경험하는 건, 마치 바닥을 가로와 세로로 기어다니기만 하던 2차원 세계의 개미가, 갑자기 공중에서 훌쩍 나타난 우리 손가락을 경험하는 것과 같을 것이란 말씀이셨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그 개미를 이해 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 개미의 황당함조차 개미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최소한의 높이 즉 두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즉 낮은 차원의 3차원적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하다는 걸 알겠습니다. 우리 감각은 삼차원에 갇혀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지각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0차원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수학적 추상으로 우리는 위치만 있는 점이나, 면적만 있는 평면과 정지된 공간을 개념화 할 수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머리 속에 그려진 개념이고 추상일 뿐이지 '실재'하는 게 아닙니다.
거듭 살펴 보아도 거듭 모르기만 합니다......
孔德之容. 惟道是從. 孔;클, 빌, 깊을 공 惟;오직 유
공덕지용. 유도시종. 是;옳을, 바를 시 從;거느릴, 인솔할 종 잘못됬음 따를 종임
道之爲物, 惟恍惟惚. 恍;어슴푸레, 분명하지 않은 모양 황
도지위물, 유황유홀. 惚;의식이 희미한, 아찔한 홀
惚兮恍兮, 其中有象. 象;코끼리, 본보기, 외면에 나타난 현상, 전조, 조짐 상
홀혜황혜, 기중유상.
恍兮惚兮, 其中有物. 物;물건, 만물, 사물 물
황혜홀혜, 기중유물
窈兮冥兮, 其中有精. 窈;어둡고 깊을 요 冥;어두울 명 精;대낄 정
요혜명혜, 기중유정.
其精甚眞, 其中有信. 甚;정도가 지나친, 심할 심 眞;채울, 꽉 찰 진
기정심진, 기중유신. 信;믿을, 몸 신
自古及今, 其名不去, 以閱衆甫. 閱;문안에서 벗겨 헤아리고 조사할 열 衆;무리, 많을 중
자고급금, 기명불거, 이열중보. 甫;겨우, 비로소, 클, 많은 모양, 남자의 미칭美稱 보
吾何以知衆甫之狀哉? 以此. 狀;모양, 꼴 상=像(형상, 모양상)
오하이지중보지상재? 이차
지극한(큰, 빈?!) 덕은 담아 가고, 오직 도는 바르게 거느릴 따를뿐이다.
도가 어떤 물건(의 형태)을 이루어 가면, 오직 어슴푸레, 오직 아찔할 뿐이니.
흐릿하네! 어슴푸레 하네! 그 가운데 현상(조짐)이 있다.
어슴푸레 하네! 아찔하네! 그 가운데 (어떤) 물건이 있다.
희미하네! 어두 침침하네! 그 가운데 정精(정기? 정수? 맑은 마음? 생명의 본질)이 있다.
그 정精이 더욱 가득 차면, 그 가운데 진실, 믿음(몸?)이 있다.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러, 그(德, 道, 象, 物, 精, 信) 이름(분별, 앎=明) 사라지지 않으니,
(이는) 무리(德, 象, 物, 精, 信?) 것(甫, 다양성)들을 샅샅이 살펴서라
내가 어떻게 무리 것들의 꼴(정형)을 알았겠는가? 이(閱? 名? 道?!)로써 이네
孔德之容. 惟道是從. 지극한(큰, 빈?!) 덕은 담아 가고, 오직 도는 옳게 거느릴 뿐이다.
孔은 보통은 빌 공으로 쓰입니다. 사전에 찾아보니 특히 노자 도덕경에서 클 공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원래 孔은 어린애(孑혈)와 젖이 나오는 구멍으로 깊은 구멍, 일반적으로는 '정도가 심한'의 뜻이라고 합니다. 크다는 뜻 외에도, 매우 심하다, 공허하고 헛되다, 깊다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용容은 집( , 갓머리)과 입(谷=口)처럼 많은 것을 담아 넣는 뜻과 谷곡이 古文에서 公공과 통하여 종묘 따위의 공공관장에서 경건하고 조신한 모습을 말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얼굴-모습의 뜻도 있지만, 꾸밀, 담을, 받을-잘 들어주고, 포용하고, 용서하고, 안존하다, 조용하다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그래서 공孔은 '지극한' 덕으로 그래서 '큰 덕'이라고 볼 수도 있고, 뒤에 용容자의 형용과 잘 어울리는 '공허하고 깊다'는 뜻으로 풀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유도시종惟道是從은 유시종도惟是從道(오직 이는 도를 따를 뿐이라), 또는 惟道從是(오직 도가 이를 거느린다)라 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굳이 이렇게 표현되었을까 궁금합니다. 그래서 시是와 종從의 쓰임을 보니, 시是는 부사로 '옳게, 바르게'로 쓸 수 있고, 종從은 어떤 것을 따르고, 쫓다란 뜻이기도 하지만, 어떤 것을 따르게 하고, 쫓게 하는 즉 '거느리고 인솔한다'는 타동사로도 쓰일 수 있다고 합니다. 도가 덕을 따르는 것 같지는 않고, 여기선 확실히, 덕을 건사하는 도를 일컫는 것 같습니다.
한편 앞 절의 '之'의 쓰임이 따라 이 문장 전체의 해석이 달라 질 수 있는데, 容을 굳이 '얼굴, 모습'으로 풀은 주석가들의 견해로는 ~의, 소유격의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큰 덕의 모습은 오직 도를 바르게 따르는 것이다'라 합니다. 저는 다만 여기 之의 쓰임이 뒤에 나오는 道之爲物에서 쓰인 之와 같다면 소유격보다는 진행형으로 ~가면서, ~지면으로 풀 수 있다고 보고, 德, 道 각각의 역할이나 작용을 말하는 것으로 풀었습니다. 이렇게도 볼 수 있는 근거는 51장에 '道生之, 德畜之라, 도는 살리는 것이고, 덕은 쌓는 것이고'라는 구절에 있습니다. 이 장의 쌓는 축畜은 담아 주는 용容과 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道之爲物, 惟恍惟惚. 도가 어떤 물건(의 형태)을 이루어 가면, 오직 어슴푸레, 오직 아찔할 뿐이니.
할 위爲는 '있지도 않은' 코끼리를 길들이는 것에서,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짓고, 만들고, 가장하고 체하는 것이고 행위, 동작을 하는 것이고, 무언가를 위하고, 위하여 꾀하고 행하고, 돕는 것입니다. 여기에 무엇이 되다, 일정한 형태가 이루어지고, 당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도道가 물物을 '지을' 수도 아니면 '物' 자체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황恍은 일단 마음(심방변 )의 작용인데, 광光이 뚜렷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분명하지 않고 어슴푸레 하고 정신이 착란한 모양이라고 합니다. 홀惚도 역시 심방변으로 시작하여 마음의 상태, 작용을 뜻하는 데, 홀忽이 '흐릿한 상태'를 나타내는 의태어로 특히 '의식'이 희미해지다, 아찔해지다란 뜻입니다. 흐릿하여 유무가 분명하지 아니한 모양, 미묘하여 헤아릴 수 없는 모양이고, 멍하니 있고 도취된 모양입니다. 구태어 恍惚을 비교하자면, 둘 다, 분명하지 않은 것을 본 것(心)인데, 恍은 대상 적 측면이 惚은 특히 주관적, 인식 주체의 의식적 측면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즉 인식하는 대상과 주체 모두 분명하지 않은, 분리되지 않은 주객이 혼동(?) 또는 혼재된 상태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惚兮恍兮, 其中有象. 아찔하네! 어슴푸레 하네! 그 가운데 현상(조짐)이 있다.
상象은 코끼리 상입니다. 역시 장님 코끼리 만지기입니다. 정말로 코끼리가 있습니다..(^^) 그 가물가물 흐릿하고 아찔한 가운데, 어렴풋하게 코끼리가 있답니다.....
상象이 긴 코를 지닌 코끼리 모습을 '본 뜬'(象形) 글자라는 게 아주 재미있습니다. 이 글자를 만들어 낸 사람은 그렇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이 글자를 쓰던 사람들은 코끼리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있기는 한데, 어딘가 있기는 하다는 데, 실재로는 알 수 없었던, 본 적이 없었던 상상의 동물이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아마, 실재 있는 모양, 모습, 형태를 의미하는 것보다는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 개념이나, 어떤 현상, 조짐, 전조, 또는 실재 있는 모습을 본 뜨고, 보여 주는 것으로 쓰였습니다. 여기에 상象의 의미를 아름 할 수 있는 실마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상(image)입니다.
恍兮惚兮, 其中有物. 어슴푸레 하네! 아찔하네! 그 가운데 (어떤) 물건이 있다.
그 어슴푸레 하고 아찔한 가운데, 물物이 있습니다. 물物은 특히 부정이 씻긴(勿; 나쁜 물건을 불로 태우거나 그슬러, 부정을 씻다) 산 제물인 소에서 '물건'의 뜻이라고 합니다. 만물-온갖 물건, 사실-사물, 무리-종류, 재물 등의 뜻으로 쓰입니다. 암튼 앞서 말한 象보다는 뭔가 잡히는 게 있습니다. 이제 無에서 有로 넘어 온 겁니까?
窈兮冥兮, 其中有精. 희미하네! 어두 침침하네! 그 중에 精(정기? 정수? 맑은 마음?)이 있다.
요窈는 구멍(穴혈, 구멍)이 어둡고 깊다(幼유는 幽유와 통하여, 빛이 희미하다)에서 그윽하다, 깊고 고요하고 심원하다, 얌전하고 정숙한, 어둡고 희미한 이란 뜻입니다. 명冥은 어떤 장소(日=口)에 양손으로( 공) 덮개를 덮다란 뜻에서 어둡다, 시력이 약하고, 그윽하고, 어려 유치하고, 어두운 밤이며, 저승, 황천의 뜻도 있습니다.
여기선 정精도 매우 어렵습니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精, 氣, 身 즉 생명의 정기精氣일까요. 아니면, 쌀(米)을 깨끗이 깍아(靑)낸 대낄, 맑을 정의 개념으로, 정수精髓할 때 그 정수입니까? 자해를 보면 또 '맑은 마음'의 뜻이라고 합니다.. 상象, 물物등과 관련되는 것만 분명합니다. 그리고 다음에 또 나오는 眞, 그리고 信과 관련 있을 겁니다. 어쩐지 샤크티(sakti) 즉 '생명의 힘'도 떠오릅니다.
其精甚眞, 其中有信. 그 정精이 더욱 가득 차면, 그 가운데 진실, 믿음(몸?!)이 있다.
심甚은 웬만큼 심한 게 아니라 정도가 지나친 심함이랍니다. 그러니까, 정精이 참으로 찌~인 하면, 그 중에 신信이 생깁니다. 진眞은 솥(鼎정; 세 발 솥)에 숟갈(匕비)로 물건을 채워 담는 모양에서, 채우다 의 뜻이고, 신信과 통하여 속이 꽉 차있는 진짜, 진실의 뜻이라고 합니다. 신信은 왕편에서 찾으면 미쁨이라고 잘 몬 알아먹는 뜻부터 몸 신까지 나와 있습니다. 자해로는 발언(言)이 미덥지 못한 데가 있으면 형(刑=辛신, 바늘, 형벌의 뜻)을 받을 것임을 맹세하는 모양에서 '진실'의 뜻이라고 합니다. 어떤 주석가들에 따라서는 '믿을 만하다. 정말 진짜라 믿을 만하다'라는 뜻으로 새겼습니다. 대체 '믿음'이라 무엇일까요? 사실 뭐든 믿기만 하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귀신도, 도깨비도 믿는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 만큼이나 실재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다면, 아무리 엄연하고 자명한 '나의 존재'도 절대로 의심스러운 것이 됩니다. 안 그러면 왜 우리가 그렇게 불완전한 감각기관을 빌어 '그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 검증하려고 야단이겠습니까? 그렇다면 마음을 '지나치게'아니 참으로 '꽉 채우면', 그 존재 - '나 있음'을 믿을 수 있다, 확신할 수 있다, 진실해 진다는 뜻일까요?
自古及今, 其名不去, 以閱衆甫.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러, 그(德, 道, 象, 物, 精, 信) 분별(이름, 앎=明)이 떠나지 않으니, 이는 무리(德, 道, 象, 物, 精, 信)의 것들(甫, 다양성?)을 샅샅이 살펴서라.
명名은 이름 부르다, 이름짓고, 이름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이름을 부르고, 이름짓고, 붙이고 하는 게 뭘까요. 우리는 사물의 이름을 '알'때 사물을 안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름과 '앎'은 같습니다. 즉 이름 명名은 곧 밝을 명明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도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거고, 또 앎을 넘어서 있습니다. 즉 주체와 대상의 이원적 인식과정을 초월해 있습니다. 그래도 무지無知와 지知가 있다면, 아무래도 지知쪽의 '앎'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상적 앎은 아니지만, '앎'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명名 또는 명明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명明은 늘 우리와 함께 있었습니다.. 과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스스로'(自) 미쳤습니다. 한번도 우리를 떠난 적 없었지만 우리가 통 모르는 겁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중衆을 잘 살펴서야만 비로소 가능합니다. 중衆은 주로 사람들의 무리를 지칭합니다. 여기서 저는 앞서 나열한 도道를 포함한 덕德, 상象, 물物, 정精의 무리로 봅니다. 보甫는 너른 경작지(田), 논밭에, 모- 풀의 싹( 철)을 심다 에서 넓고, 크다 의 뜻이고, '씨'라는 뜻에서 남자의 미칭美稱, 부르는 남자의 이름, '많은 모양' 에서 다양함의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무리 '것'들로 볼 수도, 아니면 무리의 '다양함'으로 풀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부사로, 겨우-근근히, 비로소-처음으로 의 뜻일까요? 열閱은 문門 안에서 일일이 헤아리고, 벗겨서(兌태=算산, '헤아리다', 脫과도 통하여, '벗기다') 조사하다란 뜻입니다. 아주 자세히 살피는 것입니다. '탐구'라는 말이 적합합니다.
道 자체는 볼 수, 알 수 없지만 道에서 나오는 것들은 우리가 '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거꾸로 그것들을 살펴서, 그것들이 나오고, 들어가는 곳을 살펴서 역으로 道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吾何以知衆甫之狀哉? 以此. 내가 어떻게 무리 것(다양성)들의 꼴(정형)을 알았겠는가? 이(閱? 名? 道?)로써 이네.
상狀은 개(犬)의 여러 가지 모양( 장=像, '모습'의 뜻)에서 일반적으로 모양, 꼴, 정형, 형용하다-형상, 정상을 형용하다 의 뜻입니다. 이 차此가 어렵습니다. 바로 위의 '샅샅이 살피는 것'(閱)일까요? 아니면 그 결과인 이름(名) 곧 분별, 앎(明)인가요? 아니면 이 모든 것들의 궁극적 원인인 道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