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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50:23 감사의 유익 2014.11.16
오늘은 한국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지키는 추수 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의 본래의 의미는 일 년 동안 농사를 지어 얻은 곡식을 거두어들인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농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일 년 동안 농사해서 수확한 것을 하나님에게 감사드린다는 의미보다는, 일 년 동안 나를 지켜 주시고 나를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것이 추수 감사주일의 의미입니다.
이런 감사절이 되면 “불경기로 이렇게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어떻게 감사할 수 있어! 또는 회사 사정이 좋지 않아서 보너스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감사할 수 있어”라고 말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경 살전 5:18 절에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는 명령이기 때문에 무조건 감사하라고 하면 “감사한다고 내 안 좋은 상황이 달라집니까? 감사한다고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어요?”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반론에 대해 확실하게 말씀 드릴 수 있는 것은 감사하면 상황이 달라지고 감사하면 유익이 있습니다.
옛말에 “안 되면 조상 탓, 잘되면 내 탓”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일이 뭔가 안 되어 갈 성싶으면 곧바로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탓합니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비난하면서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처럼 몰래 살짝 빠져 나가버립니다. 이렇게 비겁하고 야비한 모습은 아담 때부터 있어온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남을 향하여 마구 날리는 원망의 말은 바로 바로 자신을 향해 쏘는 화살이 된다는 점입니다. 옛날에 작전을 아주 잘 세우는 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장군이 세우는 작전은 늘 화창한 날에만 승리할 수 있는 작전입니다. 전투를 앞 둔 그 날도 화창한 날이었고, 병사들은 싸우기 전부터 승리를 확신하면서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비가 오는 바람에 그만 패하고 맙니다. 그러자 장군은 하늘을 욕하면서 일제히 하늘을 향해 활을 쏘라고 병사들에게 명령합니다.
결국, 그 화살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하늘을 향해 날린 화살은 결국 자신의 머리위로 떨어집니다. 이렇듯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것은 자신을 욕하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잠 19:3“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감사에도 수준이 있습니다. 1차원적인 감사는 조건부(if)적 감사입니다. 만약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되거나 더 많이 갖게 되면 감사하겠다는 감사입니다. 2차원적인 감사는 무엇을 받았기 때문에(Because) 감사하는 감사입니다. 돈을 벌어 감사하고 합격하여 감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3차원적인 감사는 불행을 당해도, 힘들어도, 어려워도, 절망가운데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감사하는 수준입니다. 이것이 범사에 감사하는 감사입니다.
감사함은 벽에다 던지는 공과도 같아서 언제나 자기에게도 돌아와 자신에게 유익을 끼칩니다. 우리는 어떤 감사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할까요?
1. 감사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오늘날의 표현으로 말하면, 감사로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입니다. 똑같이 예배를 드리지만 어떤 성도는 감사함으로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립니다. 이런 성도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예배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만드는 예배가 됩니다. 왜냐구요? 바로 감사로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똑같이 예배를 드리지만,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불평과 짜증과 마지 못해서 드리는 예배라면, 이것은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지도 않고 축복의 통로가 되지도 않습니다.
시 69:31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요? 값비싼 황소를 감사 없이 드리는 것보다는 작은 예물이지만 감사로 드리는 것이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성도님이 40일 금식기도를 합니다. 40일 금식기도는 목숨을 걸어야만 할 수 있는 대단한 용기입니다. 어떤 분이 매달마다 500만원이라는 아주 큰 금액을 십일조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것은 아주 대단한 일입니다. 아울러 자신의 시간도 빠듯하게 쪼개어 생활하는데, 밤낮으로 교회에 와서 청소를 하고, 식당 봉사를 하며 수고를 하는 모습 또한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런 아름답고 유익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감사로 하지 않고 불평과 원망으로 그 일들을 한다면 아무 유익이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동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난 주간에 암울한 통계 자료가 하나 발표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나라 실업률에 관한 내용입니다. 정부가 밝힌 10월의 공식 실업률은 3.2%입니다. 하지만 통계청에서 밝힌 실업률을 보니 사실상 10월 체감 실업률은 10.1%라는 점입니다. 전문가들은 “일할 만한 연령대에 있는 사람 중 일을 하고 싶은데도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비율이 10%를 넘고 있다는 얘기다”라고 분석했습니다. 안타까운 취업전선의 모습입니다.
취업에 성공한 사람을 두고 하버드 대학에서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일자리를 얻게 된 사람들 중에 85%는 태도 때문에, 15% 똑똑함과 지식 때문에 합격했다고 합니다. 취업면접관들은 얼마만큼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면서 적응해 나가는 능력을 보았다는 점입니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인간의 마음 중에 가장 쉽게 늙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곧 감사하는 마음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감사를 의도적으로 훈련하지 않으면 쉽게 입술에서 잊히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바로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감사는 훈련이요 반복되는 습관을 통해서 우리 몸에 적응되고 생활 속에 장착되는 것입니다.
파월 콜린이란 분이 있습니다. 1991년 걸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영웅이며, 4성 장군으로 당시 다국적군 총사령관으로 활동했던 분입니다. 지금은 정치에서 은퇴하였지만 당시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파웰은 뉴욕 흑인 빈민가 출신으로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입니다. 17세 되던 해 여름방학에 음료수 제조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아르바이트 첫날, 똑같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백인 학생에게는 기계 앞에서 콜라를 담는 일이, 흑인인 그에게는 걸레질이 맡겨집니다. 그래도 파웰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훗날 그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때 나는 최고의 청소부가 되기로 마음 먹었고, 그래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열심히 걸레질을 했습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는 마지막 날에 파월이 감독관에게 말합니다. “제게 충분한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독관은 청소일이지만 성실하게 감당하는 파웰을 눈여겨 보았고, 다름 방학 때에 다시 파웰을 아르바이트생으로 고용합니다. 이때 파월은 콜라를 채우는 기계 앞에 앉을 수 있었고, 그 다음 해에는 부감독으로 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뉴욕 빈민가 출신의 한 흑인 소년이 오늘날의 빛나는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불평하지 않고 감사하며 최선을 다한 삶의 태도에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떠한지 나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나는 감사함으로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나의 예배를 살펴야 합니다. 나는 감사함으로 하나님에게 봉사를 하고, 나는 감사함으로 하나님에게 헌금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가 드리는 감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앞 뒤 가릴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23절 다시 한번 더 보십시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하반절에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이 말은 “감사의 모습을 올바르게 실천하는” 이 뜻입니다.
감사함을 올바르게 실천하는 성도에게 주어지는 또 다른 복이 무엇입니까? 하반절에 보면,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말씀합니다. 즉 감사함으로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는 놀라운 약속을 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내용입니까? 우리가 그냥 쉽게 넘어가고 대충 대충하면서 넘어가는 그 감사의 모습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그리고 그 감사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총이 임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여기서 구원이란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그런 영적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구원은 누리가 세상을 살면서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힘들어 난관에 봉착되었을 때에 그 위기에서 벗어나는 구원을 말합니다. 지금 힘든 과정을 겪고 있나요 그러면 하나님에게 바로 감사하십시오. 그 감사로 통해서 나를 인도하고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2. 감사하면 인생은 행복해집니다.
눅17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갑니다. 그 때 어울려서 구걸하며 생계를 꾸려나가는 한센씨병(문둥병) 환자 10명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는 제사장에게 가서 병에서 건강해졌다는 것을 확인받아라고 말합니다. 이에 10명의 나환자들이 제사장을 찾아가다가 자신들의 몸이 나은 것을 확인합니다.
눅 17:15절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자신의 몸이 완전히 나은 것을 보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에게 돌아갑니다. 15절 하반절에 <돌아와>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누구에게로 돌아갔다는 말입니까? 에수님에게로 돌아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돌아간 이유가 무엇이에요?
이어지는 16절에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16절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예수님에게 감사하려고 다시 돌아간 것입니다. 이 사람이 돌아갈 가족이 없고 자신의 몸이 나은 것을 보여 주어야 하는 주변 사람이 없는 외톨이라서 예수님에게 돌아온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 사람에게도 돌아가야 하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가정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가장 먼저 취한 행동이 예수님에게 돌아가서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렇게 아름다운 감사의 모습을 보이는 이 사람에게 예수님이 보여 주신 축복이 무엇입니까? 19절 보세요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9명은 고침을 받고도 다 제 갈 길로 가버렸습니다. 10명이 고침을 받았지만 9명은 감사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다시 예수님을 찾아온 그 사람에게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언합니다. 예수님에게 돌아와 감사를 드린 이 사마리아사람은 나병에서 고침을 받을 뿐 아니라 구원까지 받는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에 감사를 드리는 사람이 받는 복입니다. 내가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게 되면, 그 결과로 내가 더 많은 은총과 은혜를 받아 누린다는 점입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하나님 나라의 일반적인 법칙이 여기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모습입니다.
삼상 2:30에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해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만 강조하다 보니까,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을 바라는 사람을 조금 신앙이 미숙한 사람들이라 평가 절하합니다. 하나님에게 감사해서 더 많이 복이나 받으려고 하는 수준 낮은 신앙인으로 취급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감사함으로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고상한 인격을 가지고 품위 있는 신앙을 유지한다고 세상 사람들 눈치나 보는 그런 감사를 드리고, 그렇게 교회생활하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본인만 피곤해 집니다.
미국 버지니아주에 작은 시골에서 가난한 집안에 어머니와 아들이 살고 있었답니다. 그 아들은 편모슬하에서 불평하지 않고 감사하며 힘겹게 공부를 하여 프린스턴대학에 입학합니다. 그리고는 수석으로 졸업하면서 졸업식 날 학생 대표 연설을 맡게 됩니다.
어머니는 졸업식장에 입고 갈 변변한 옷이 없어 졸업식 뒷자리에 숨다시피 앉아 아들의 연설을 지켜봅니다. 아들은 연설의 말미에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이렇게 영광스러운 졸업장을 받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이 돌보신 결과입니다. 또한 저 때문에 온갖 고생을 다해 가면서 학비를 마련해주신 어머니의 은덕입니다.”
청중들이 일어서서 박수를 보내자, 아들은 총장이 자신의 목에 걸어준 금메달을 들고 구석에 숨은 듯이 앉아 있는 어머니에게 갑니다. 그리고는 메달을 목에 걸어 드리고 “엄머니 정말로 감사해요”라고 말합니다.
감사를 알고 감사한 생활을 한 이 젊은이는 후에 변호사가 되었고, 마침내 모교인 프린스턴 대학교의 교수가 되고, 총장자리까지 올라갑니다. 그로부터 8년 후에는 뉴저지주 지사가 되었고, 다시 2년 후에는 유명한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자가 됩니다. 그가 바로 미국의 28대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입니다. 남북전쟁이후로 최초로 남부 출신으로 미국 대통령이 된 분이며 후에는 노벨평화상까지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감사할 줄 아는 자에게 길이 열립니다. 감사하면 더 행복해 집니다. 사람들이 누구나 다 가지기를 소망하는 행복이 있습니다. 행복은 어떻게 주어지나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행복은 소유에 정비례하기 보다는 감사에 정비례한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뜻입니다. 행복이란 내가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행복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적게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감사할 때에 더 크고 진정한 행복이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저런 갖가지 구실을 붙여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웰즈가 “완전한 교회를 찾지 마라. 찾을 수 없을뿐더러 찾아낸다 하여도 당신이 그 교회의 교인이 될 자격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듯이 완전한 교회는 세상에 없습니다. 누구 때문이라는 불평을 하기 보다는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힘들어 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면 불평과 불만은 사라지고 감사함만 넘치게 됩니다.
요즈음 경기가 안 좋아 힘들다고 원망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내 사정이 아무리 안 좋아도 전기가 없이 생활하는 20억 명의 사람들보다 났습니다. 식수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 비위생적인 물을 마셔야만 하는 10억보다 났습니다. 아무리 내 수중에 돈이 없다고 해도,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12억 명보다는 내 형편이 났습니다. 감사의 안경을 끼면 감사거리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병원에서 산소 호흡기를 사용하는 비용은 하루 30만원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 것에 비하면 나는 날마다 돈 한푼 안주고 공짜로 산소를 들이마시니 감사할 수 있습니다.
1년 365일 매순간마다 감사를 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지만,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더 감사함에 우리의 모든 것을 매어 맡기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