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삼국지 18
(평설 인물삼국지)
제1권 천하대란
7. 하진
인물평: 어리석어 나라를 망친 백정 출신의 대장군
한나라 멸망의 단초는 하진에서 시작되었다. 후한 말기 대장군이 되어 국권을 장악했으나 그는 국가를 운영할 기본적인 능력도 갖추지 못했다. 그가 백정출신으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후한 시절 신분이동이 비교적 쉬웠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후한 조정의 난맥상을 드러내는 한 예이기도 하다. 후한 말은 환관과 외척 간의 권력투쟁으로 얼룩진 시대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환관들에 의한 국정 농단이 극심했던 때였다. 환관세력의 도움으로 외척이 된 하진은 대장군이 되어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자 사족세력의 대표를 자임하던 원소의 부추김을 받아 환관세력의 제거에 나섰다. 하진은 외척과 환관 간의 극한적인 세력 다툼을 촉발시켰다. 이로 인해 십상시의 난, 동탁의 난, 산동반군의 봉기가 연달아 일어나고, 한나라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하진(何進)은 원래 남양군 완현 출신으로 소, 돼지를 잡아 팔던 백정 출신이었다. 그의 부친은 장사를 통해 제법 재산을 모았던 것 같다. 늘그막에 맞아들인 후처와의 사이에서 딸을 하나 낳았는데 용모가 몹시 아름다웠다. 일찌감치 장사에 뛰어든 하진은 나름대로 세상의 이치에 문리가 텄다. 황실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을 맺게 된다면 일반 백성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특혜와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진은 용모가 뛰어난 배다른 누이동생을 이용해 한 밑천 잡아보려 했다.
하진은 가산을 기울여 환관들에게 접근했다. 하진은 동향 출신의 중상시 곽승(郭勝)과 끈을 댈 수 있었다. 곽승의 주선으로 하진의 배다른 누이동생은 궁중에 입궁해 귀인(貴人)이 되었다. 하귀인이 영제의 총애를 받게 되자, 하진은 보상을 톡톡히 받았다. 백정 출신임에도 낭중에 임명되었고,곧이어 호분중랑장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나가 영천태수가 되었다. 하귀인이 황후가 되자 하진은 내직으로 들어와 시중, 장작대장을 거쳐 하남윤이 되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영제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군권을 맡겼다. 하진은 대장군이 되어 도성을 방어했다. 하진은 이 공으로 열후의 신분에 올랐다. 배다른 동생 하묘(何苗)는 거기장군이 되어 형제가 나란히 군권을 장악했다.
하진의 권력은 영제가 후사문제에 의심을 품자 한때 흔들렸다. 영제는 당연히 장남을 태자로 책립할 생각이었으나, 유변을 몇 번 본 후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유변이 사람됨이 경박하고 위엄이 없어 황제로서의 자격이 부족해 보인 반면에 궁중에서 자란 유협은 나이가 어렸음에도 총기가 있고 행동거지가 신중했다. 동태후가 여러 차례 영제에게 유협을 태자로 삼을 것을 권유했다. 영제는 아직 젊었으므로 급하게 결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궁중은 장남 유변을 지지하는 하태후와 차남 유협을 미는 동태후의 양파로 나뉘어졌다. 유변과 하태후에게는 대장군 하진이란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다. 영제는 만일에 대비해 동태후의 조카인 동중(董重)을 표기장군에 임명해 상호 견제하게 했고, 친위부대인 서원8교위를 창설하면서 소황문 건석(蹇碩)에게 하진을 감독하게 했다.
황제의 의도를 간파한 건석은 여러 환관들과 함께 하진을 서량으로 보내 반란을 토벌하게 하자고 건의했다. 하진은 황건적의 난 이래로 군권을 장악해 기반이 탄탄했다. 게다가 하진은 사족의 대표를 자처하며 호시탐탐 환관세력의 제거를 노리고 있는 원소와 작당했으므로 매우 위험했다. 영제는 건석의 건의를 받아들여 하진에게 서진을 명령했다. 하진은 먼저 원소를 동쪽으로 보내 서주와 연주의 병사를 징발한 후에야 출병할 수 있다고 핑계를 대며 출정시기를 연기했다. 이런 분위기였기에 동탁도 군대의 지휘권을 놓지 못하겠다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진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영제가 급서했다. 하진은 드디어 천하의 대권을 쥐게 되었다. 백정 출신으로서 대단한 성공이었다. 그러나 하진은 장삿속에는 밝았지만, 국정을 운영할 능력은 없었다. 자신의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사족세력과 손을 잡기 원했던 하진은 원소의 사주를 받아 환관세력의 주멸에 나서게 된다. 무모한 원소의 손에 놀아나던 어리석은 하진은 결국 몸은 패망하고 국가는 위기에 처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만다.
하황후(何皇后)와 동태후(董太后)
영제(靈帝) 유굉(劉宏)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다. 첫째 아들은 유변(劉辯)으로 영제의 두 번째 황후인 하황후 소생이었다. 둘째 아들은 유협(劉協)으로 왕미인(王美人)의 아들이었는데 훗날 헌제(獻帝)가 되었다.
하황후는 하진의 배다른 동생으로 키가 크고 늘씬한 미인이었다. 하황후와 그녀의 모친 무양군(舞陽君)은 천한 백정 출신이었으므로 미신에 약했다. 하황후는 황자 유변이 궁중에서 자라면 횡액을 당할 것이라는 도사들의 말에 유변을 도사 사자묘의 집에서 양육하게 했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유변을 사후(史侯)라고 불렀다. 유변은 도사의 집에서 제멋대로 자라 사람됨이 경박하고 제위계승자로서의 기본적 소양을 갖추지 못했다.
유협을 낳은 왕미인은 조부가 오관중랑장을 지낸 양가집 규수 출신이었다. 매우 아름다운 미인인데다가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났으므로 영제의 총애를 받아 임신을 했다. 하황후는 질투심이 지나칠 정도로 강했으므로 평소에 다른 후궁들이 몹시 두려워했다. 왕미인 역시 하황후의 보복이 두려워 자발적으로 약을 먹고 낙태를 시도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다. 왕미인이 황자 유협을 낳자, 질투심에 눈이 먼 하황후는 왕미인을 독살했다. 영제가 분노해 하황후를 폐출하려 하였으나 왕보, 조절 등 하진과 가까웠던 환관들이 거금의 재물을 바쳐 위기를 모면하게 해 주었다. 영제는 왕미인이 비명횡사하자 노래를 지어 그리움을 표현하기까지 했지만 재물 욕심이 앞섰던 모양이었다. 태어나자마자 고아가 된 유협은 동태후가 맡아 키웠으므로 동후(董侯)라 했다. 동태후는 영제의 친모였다. 재물을 몹시 밝혀 영제가 매관매직을 공식화하도록 사주했다고 한다.
하황후와 동태후는 서로 사후와 동후를 태자로 삼으려고 암투를 벌였다. 영제가 갑자기 죽자 사후 유변이 제위에 올랐고 하황후는 태후의 자격으로 임조청정하게 되었다. 동태후가 정사에 참견하려 들 때마다 하태후가 매번 이를 제지했다. 동태후가 성을 내며 욕설을 퍼부었다.
“네가 지금 기고만장해 뵈는 것이 없는 모양이구나. 네가 오라비를 믿고 그러는 모양인데, 내가 당장 표기장군 동중을 시켜 하진의 목을 베어오라 해야겠다.”
하태후는 분을 삭이지 못한 채 물러나왔다. 하태후가 이 말을 하진에게 전했다. 하진은 즉시 동중을 죽이고 동태후를 폐출했다. 얼마 후 동태후는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거짓말
삼국지연의를 보면 하진이 환관들을 전멸시키려는 계획을 세울 때 조조가 원소와 함께 그의 참모로 활약하고 있다. 심지어 조조는 옥리 몇 명을 시켜 환관의 우두머리만 제거할 것을 권유하기도 한다. 사실 조조는 하진과 원소의 모의에 전혀 가담하지 않았다. 조조가 환관의 집안 출신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연한 일이다. 조조는 하진의 무모한 계획을 냉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