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토요일(1/19)에 어머니를 모시고 어떤 결혼식에 다녀왔습니다..
30여년전..
제가 초등학교 시절에 저의 외갓집에 놀러가면
항상 어울리던 친구의 조카 결혼식이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그 친구가 외지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그 이후 한번도 만나지 못하고 엇그제 만났습니다.
그 친구를 만나니 옛일이 아스라히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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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때 저는 방학이 되면 거의 항상 외가댁에 갔습니다.
거의 방학내내 외가에서 살았습니다.
외할머니/외할아버지는 물론 그 외 여러 사람이 어린 제게는 모두 아주 만만(?)했거든요..
증말 외갓집에만 가면 제가 왕이었습니다.
외갓집은 그 마을에서는 최고로 부농이었습니다. 머슴도 많았지요..
엇그제 결혼식에서 만난 친구는 외갓댁의 앞 집에 살았습니다.
소여물을 끓여서 소에게 먹였는데 제가 가면 여물 끓이는 것은 거의 제 담당이었습니다.
불장난하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저는 소죽 끓이는 것이 무척이나 좋았습니다.
근데 방만 뜨거워지고 소죽은 끓지않았지요... 아시는 분은 알겁니다.
담배랑 고추농사를 대단위로 하였고 수확한 고추와 담배를 건조하는 건조실이 있었고
여기에서는 석탄으로 불을 땠는데 외할아버지께서 이건 절대로 못 만지게 하시더군요..
불의 양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따라 상품의 질이 매우 달라지기 때문에....
불장난을 좋아하던 저는 외갓집의 닭장을 홀랑 태워서
닭장 안의 닭들을 몽땅 통구이닭으로 만들어버렸고
급기야는 외가집 사랑방의 초가 집 지붕을 태워서 결국 지붕 개량을 하게 만들었지요..
마당 한쪽 귀퉁이에 디딜방아도 있었고 마당 한 가운데에는 우물도 있었는데
우물바가지로 물을 긷는 것은 상당(?)한 기술이 필요했습니다...
대문 밖 큰 마당에는 소가 묶여 송아지랑 한가로이 놀고 있었고 연자매도 있었지요..
청포도 덩굴이 있었고 엄청 큰 대추나무가 대문 밖에 서 있었습니다.
대추를 따려면 올라가서 흔들어야되는데 그러다가 떨어지기도하고..
여름에 마을 앞 개울에서 멱도 감고
실잠자리 잡으려다 물에 빠져서 고생도하고
겨울에는 쥐불놀이 하면서 논에 쌓아둔 볏집을 홀랑 태우고...
외할머니께서는 고추장을 만들때 조청을 만들어서
외손주 줄 것은 따로 보관해 두었습니다.
제가 음청 좋아했거든요..
제천시내에서 살고 있던 저는
제천역 근처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두어시간 가량을 가서
뱃터란 곳에 다다르면 버스와 함께 배를 타고 강을 건넙니다.
청풍강(남한강줄기)을 건너서 청풍 읍내의 한벽루를 지나서
시오리정도 미류나무가 끊임없이 서 있는
한(큰)길을 따라 계속 버스타고 가면
청풍면 단리란 곳이 나오고 그곳에 외갓집이 있었습니다.
85년쯤인가...
충주댐이 건설되면서 청풍면 거의 대부분이 수몰 되었습니다.
결국 외갓집 동네인 단리는 그때 같이 수몰되었고
그 마을 사람들은 할 수 없이 대대로 이어져오던 삶의 터전을 떠나
여기저기로 뿔뿔이 떠나갔고
저의 외갓집도 제천시내로 이사를 왔지요...
떠나온 그 다음 해 이 맘때쯤이었을 것입니다.
외할아버지께서 저를 데리고 어딘가로 가시더군요
충주호에 이르시더니 여기가 어딘줄 알겠느냐?고 저에게 물으시기에 잘 모르겠다고 했는데...
곰곰이 주변의 산천을 보고 저~앞 물 속에서 툭 삐져 나온 대추나무를 보니
옛날 외갓집을 향해 뒷산에서 내려 가는 그 위치에 제가 서 있더군요..
아~~
단리구나... 외갓집이구나... 묘한 감정이 일었습니다..
왜?
외할아버지께서 일부러 저를 데리고 거길 가셨을까요..
외할아버지/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신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마음이 전해져 옵니다.
칠십 평생을 한 곳에서 농사만 지으시던 분들이
어느 한순간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고향산천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그 옛날 청풍면 단리의 외갓집 풍경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갈 수도 볼 수도 없는 그 풍경이 생생하게 살아옵니다.
충주호의 물을 다 퍼내면 그 광경을 볼 수 있을까요..
이십여년이 지난 지금 왜 외할아버지/외할머니의 마음이 전해져 오는 것일까요..
잘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