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교회(浸禮敎會 - Baptist Church)
1. 역사적 기원
「기독교회사」, 윌리스턴워커 著, 송인설 譯,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pp. 611-613
① 영국의 분리(分離)주의 운동
침례교는 청교도의 한 종파로서, 창시자는 스미스(J. Smyth, 1570?∼1612)로 알려져 있다. 그는 1608년 국교회의 압박을 피하여 게인스버러(Gainsborough) 회중교회 회원들과 함께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망명했는데, 1609년 자신과 다른 지체들에게 몰을 쏟아서 세례를 시행함으로 최초 침례교회의 시작은 언제부터냐에 대한 질문은 침례교회 교회사가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되는 문제다. 신약성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침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회개의 침례를 베풀던 시기를 신약교회인 침례교회의 출발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중세 가톨릭 교회의 내부 개혁세력인 루터나 칼빈의 개혁교회운동에 비견해 외부 개혁세력의 중심이었던 재침례교파에서 시작됐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역사적인 근거에 의하면, 기독교회사에 침례교회란 이름이 정식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1644년쯤 영국침례교회의 발현에서부터다. 물론 유럽대륙 내에서 활동하던 재침례파 중 일원인 네덜란드의 재침례파 성도들이 영국으로 건너와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침례교도의 영적인 선조는 신약성서 시대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이다. 교회사에서는 감추어져 있는 신약성서적 표준과 모범을 이어온 일단의 무리와 종교개혁 시대 상당한 개혁 세력을 구축하며 역사 속에 등장했던 재침례파에서 그 영적 계승을 볼 수 있지만 침례교도란 공식 이름의 발단은 이때부터라고 보는 견해가 정설이다. - 침례교회의 시작, 총회안내, 기독교 한국침례회 홈페이지
의 침례교회를 탄생시켰다.
② 영국 침례교회
스미스의 사후(死後) 헬위스(T. Helwys)와 머튼(J. Murton)은 귀국하여 1612년 영국 땅에 최초의 영속적인 침례교 회중교회를 설립했다. 아르미니우스적 견해를 가진 그들은 “일반침례교”로 알려졌다. 그 후 제이콥(H. Jacob)은 영국 국교회에서 분리되지 않은 채, 제도화 된 회중교회적 교회들의 범국가적 체제를 이루려고 노력했다. 제이콥은 1616년 사우스워크에서 한 교회를 설립했고, 이것은 최초로 회중교회주의 교회로 존속되었다.
그런데 1630년대에 제이콥의 교회에서 갈라진 일부 그룹은 신자의 세례가 성경적 규범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들은 영국에서 제 2의 침례교 노선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특수 혹은 칼빈주의적 침례교”라고 불렸다. 그 이유는 피택자에게 국한된 특수 혹은 제한 속죄를 믿었기 때문이다. 1641년 그들은 침례(immersion)를 세례의 정당한 형태로 받아들였고, 그때부터 이것이 영국의 모든 침례교에 퍼져 나갔다.
③ 미국 침례교회
미국의 최초 침례교회는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 1603경~1683)가 1639년 로드 아일랜드주의 프로비던스(Providence, Rhode Island)에 세운 침례교회와 잔 클락(John Clarke) 이 1644년에 뉴포트(Newport)에 세운 침례교회이다. 1707년에는 필라델피아 침례교 연합이 조직되었다. 초기 식민지 미국에서 영국과 마찬가지로 침례교회는 박해를 받으며 성장했다. 대표적 박해의 사례로, 하버드대학교 초대 총장인 헨리 둔스터는 유아세례를 거부한다는 이유만으로 총장직에서 면직되고 그 식민지에서 추방되기도 했다. 그러나 양심의 자유와 정교분리의 정신으로 제퍼슨의 초기 미국 헌법의 기초를 이루는데 지대한 영향을 준 침례교회는 미국의 건국과 더불어 박해에서 벗어나 무한성장 할 수 있었다. 현재 미국 남침례회는 단일교파로는 개신교 중 세계에서 제일 큰 교파이며 가장 많은 해외 선교사를 파송한 교단이 되었다. 침례교회의 시작, 총회안내, 기독교 한국침례회 홈페이지
2. 한국 침례교회
「침례교의 특징과 전개」(논문), 네이버 지식 iN
① 펜윅(Mr. Malcolm C. Fenwick)
펜윅은 1889년 캐나다의 독립선교사로 내한하였다. 그는 1894년에 한국순회선교회를 조직하고 1896년에 원산을 중심으로 침례교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펜윅은 재정적으로 선교지원을 받지 못하는 독립선교사로 활동하였으나 독자적이며 독창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당시에 만주와 간도(間道)까지 선교사업을 확장하였을 정도로 그의 선교에 대한 열정은 남다른 것이었다. 1905년 제1회 총회를 가지면서 보급되어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총회”와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총회”의 두 그룹이 있었다. 이후 이는 “동아기독교”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② 해방 이후
동아기독교는 1949년 제9회 총회에서 교명을 대한기독교침례회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이 총회를 계기로 대한기독교침례회는 미국남침례회와 손을 잡고 많은 변모를 겪었다. 1952년 42회 총회에서 대한기독교침례회는 다시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으로 교명을 바꾸었다. 문제는 미남침례회의 선교 지원을 받으면서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은 서서히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내분이 표면화 되어 새로운 교단 기독교한국침례회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 분열로 인해 특히 기독교한국침례회 측은 선교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다. 그러나 1968년 4월 소장파(小壯派) 목사들의 추진에 의해 두 개의 교단이 통합되어 “한국침례회연맹”이라는 교단이 출현하였다. 1976년 교명을 다시 “기독교한국침례회”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에는 이밖에도 대한기독교침례회, 한국성서침례회, 그리고 대한선교침례회연합회라는 침례교 교단이 있다. 지도자 양성기관으로는 침례교 신학대학이 있다.
3. 침례교의 교리
① 반(反)신조주의 - 인간이 제정한 어떤 신조에도 매이기를 거절한다.
② 직해(直解)주의와 율법주의 - 칼빈주의적 침례교회는 신약을 해석함에 여자적(如字的)이며, 신자의 생활이란 율법에 매인 생활이라고 본다.
③ 유아세례를 거부한다. 침수(浸水) 세례가 교회의 흥망에 관계되는 중요한 것이다.
④ 인간적인 지도적 지위는 없으며 모든 교제가 완전한 영적 민주주의이다.
⑤ 만인(萬人)제사장주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