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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론] 미국 기독교의 역사 (상)
History of Christianity in the United States
초기 식민지 시대 ~ 18세기
북미 대륙에 기독교(Christianity: 가톨릭+개신교)가 들어온 것은 16세기 초와 17세기에 진행된 유럽인들의 북미 지역 식민지화와 더불어서였다. 스페인, 프랑스, 영국은 로마 가톨릭(Roman Catholic, 천주교)을 들여와 자신들의 식민지인 뉴 스페인(New Spain), 뉴 프랑스(New France), 매릴랜드(Maryland)에 각각 보급했다. 반면 북유럽인들은 개신교(Protestantism)를 들여와 매사추세츠만(灣) 식민지(Massachusetts Bay Colony), 뉴 네델란드(New Netherland), 버지니아 식민지(Virginia colony), 캐롤라이나 식민지(Carolina Colony), 뉴펀들랜드 앤 래브라도(Newfoundland and Labrador), 로워 캐나다(Lower Canada, 하[下]-캐나다: 오늘날의 퀘벡[Quebec])에 보급했다.
개신교 교파들 중에서는 영국 성공회(Anglicanism), 침례교(Baptist Church), 회중교회(Congregationalism: 조합교회), 장로교(Presbyterianism), 루터교(Lutheranism), 퀘이커교(Quakerism: 종교 친우회), 메노파 교(Mennonite), 모라비아 교회(Moravian Church)가 가장 먼저 오늘날의 미국 땅에 정착하면서, 자신들의 신앙을 새로운 나라에 전파시켰다.
오늘날 미국 내 기독교인들의 대부분은 전통 개신교(Mainline Protestant: 주류 개신교), 복음주의(Evangelicalism), 로마 가톨릭의 3가지 범주로 구분될 수 있다.
1. 초기 식민지 시대
스페인은 1565년 오늘날의 플로리다(Florida) 주, 세인트 어거스틴(St. Augustine) 같은 지역들에서 북미 최초의 정착지들을 건설했기 때문에, 종국에는 미국 영토가 될 이 지역에서 최초의 기독교인들은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었다. 하지만 이 지역은 점차 확장되어 1776년에는 영국의 13개 식민주(Thirteen Colonies)를 형성하게 되는데, 영국 국교회(Church of England: [역주] 1534년 창립. 전세계 성공회의 모태)의 탄압을 피해 종교적 자유를 얻고자 했던 개신교도 정착민들로 인해 개신교 인구가 다수를 점하게 된다. 이들 정착민들은 주로 이스트 앵글리아(East Anglia) 지역에서 온 청교도(Puritans)였고, 특히 청교도 혁명(English Civil War, 잉글랜드 내전: 1642~1651) 직전에 많이 이주했다. 일부 성공회 교도들과 가톨릭 신자들도 있었지만 수적인 면에서 훨씬 미치지 못했다. 영국에서 온 사람들 중에는 개신교도들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미국 혁명(American Revolution) --- 이 기간 내에 미국 독립 전쟁(American Revolutionary War: 1775~1783)이 포함됨 --- 무렵에 이르면, 영국 식민지(미국의 13개 주 + 캐나다 지역) 거의 전체가 개신교 지역으로 변했다.(주1)
1.1. 스페인의 선교단
현재의 미국 영토에 가톨릭이 처음으로 전파된 것은 종교개혁(Protestant Reformation: 1517년) 직전의 일로서, 스페인 정복자들(Spanish conquistadors)과 정착민들이 현재의 플로리다 지역(1513년) 및 남서부 지역에 들어오면서부터이다. 성 미카엘(St. Michael)이 기록한 바에 따르면, 미국 땅에서 최초의 기독교 예배는 플로리다의 펜사콜라(Pensacola)에서 진행된 가톨릭 미사(Catholic Mass)였다.(인용각주 필요) 스페인인들은 자국의 선교 시스템을 통해 스페인령 플로리다(Spanish Florida: 1513~1763 및 1783~1821)에 로마 가톨릭을 전파시켜고, 이후 선교단은 조지아와 캐롤라이나로도 확장됐다. 그리고 스페인은 마침내 오늘날의 텍사스, 뉴멕시코, 아리조나, 캘리포니아에도 선교단을 설치했다. 후니페로 세라(Junípero Serra: 1713~1784)는 캘리포니아에 일련의 선교단들을 설치했는데, 이 선교단들은 중요한 경제, 정치, 종교적 기관들이 됐다.(주2) 뉴멕시코(New Mexico)에서 시작하는 육로가 개척되자 1776년에는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됐고, 1781년에는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 LA)가 식민지로 편입됐다.
(주2) Norman, The Roman Catholic Church an Illustrated History (2007), pp.111~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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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알타 캘리포니아(Alta California) 지역에서 스페인 선교사들이 최초의 세례식을 갖는 장면을 필사한 그림. 종교 분쟁을 겪고 있던 영국과 달리, 스페인은 자발적으로 북미 대륙으로 이주해올만한 자국민들이 없었고, 멕시코 등 중미 지역의 관리에도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에, 북미의 서부 지역 영토에서는 원주민들을 개종시켜 동화시키는 정책을 사용했다. |
1.2. 프랑스의 식민지
* 이 부분의 추가적인 정보는 '프랑스의 미대륙 식민화'(French colonization of the Americas) 항목을 참조하라. |
프랑스 식민지의 경우 디트로이트(Detroit), 세인트 루이스(St. Louis), 모빌(Mobile), 빌록시(Biloxi), 배톤루지(Baton Rouge), 뉴 올리언즈(New Orleans)에 항구가 설치되자, 이 항구를 통해 가톨릭이 전파됐다. 17세기 말에 영토, 종교, 상업적 목적을 겸비한 프랑스 탐험대들이 미시시피 강(Mississippi River)과 [미국의] 멕시코만 연안(Gulf Coast)에 거점을 마련했다. 최초의 정착촌들이 생겨나면서, 프랑스는 북미 대륙의 광활한 면적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며 상업적 제국의 수립을 천명했고, 그 영토는 멕시코만에서 캐나다에 이르기까지 확장됐다.
프랑스령 루이지애나(French colony of Louisiana)는 원래 미시시피 강 양편 유역 전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 오늘날의 미국 주들 가운데 그 광활한 지역에 포함되는 주들은 루이지애나(Louisiana), 미시시피(Mississippi), 아칸소(Arkansas), 오클라호마(Oklahoma), 미주리(Missouri), 캔자스(Kansas), 네브라스카(Nebraska), 아이오와(Iowa), 일리노이(Illinois), 인디애나(Indiana), 미시간(Michigan), 위스콘신(Wisconsin), 미네소타(Minnesota), 노스 다코타(North Dakota), 사우스 다코타(South Dakota) 주이다.
1.3. 영국의 식민지
* 이 부분의 추가적인 정보는 '영국의 미대륙 식민화'(British colonization of the Americas) 항목을 참조하라. |
오늘날 미국 땅이 된 북미의 영국 식민지 대부분에는 17세기부터 사람들이 정착했다. 이들 이주민 남녀들은 1517년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들의 신자들이었고, 유럽에서 종교탄압이 자행될 때 종교적 타협을 열정적으로 거부하고 박해를 피해 유럽을 탈출한 사람들이었다.
1.3.1. 뉴잉글랜드 식민지
영국에서 '청교도 혁명'(잉글랜드 내전: 1642~1651)으로 이어질 분쟁이 발생하자, 훗날 '순례자들'(Pilgrims 혹은 Pilgrim Fathers)라 불리게 되는 일군의 사람들이 피난처를 찾아 떠났다. 그들은 1620년 매사추세츠(Massachusetts)의 플리머스(Plymouth)에 있던 플리머스 식민지(Plymouth Colony: 영국령 플리머스)에 도착해 정착했다.
이후 '순례자들'보다 더 큰 규모의 청교도들(Puritans)이 1629년 400명의 정착민 인구로 매사추세츠만 식민지(Massachusetts Bay Colony)를 수립했다. 청교도들은 영국에서 온 개신교도들로서, '영국 국교회'가 갖고 있던 요소들 중 자신들이 수용불가한 로마 가톨릭의 잔재들이라 여긴 내용을 신대륙에서 개혁하고 정화하길 바랬다. 그후 2년 이내에 2천명의 정착민들이 추가로 당도했다. 1630년 초에는 최대 2만명에 달하는 청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잉글랜드에서 미국으로 건너왔다. 대부분은 뉴잉글랜드에 정착했지만, 일부는 서인도 제도(West Indies)까지 진출했다.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청교도는 "회중교회 내 분리 반대파"(non-separating Congregationalists)에 해당했다. 청교도들은 독실한 종교성과 사회적 유대감이 강한 동시에 정치적으로 혁신된 문화를 창조했고, 그것은 오늘날의 미국에도 보존되어 있다. 그들은 신대륙이 "구세주의 국가"(redeemer nation)로 봉사할 수 있기를 바랬다.(인용각주 필요)
살렘 마녀사냥 재판(Salem witch trials)이란 1692년 2월부터 1693년 5월 사이에 영국령 메사추세츠 지역의 카운티(county: '주' 바로 밑의 행정구역 단위)들인 에섹스(Essex), 서퍽(Suffolk), 미들섹스(Middlesex)에서 마법(witchcraft)을 행했다고 고발당한 이들을 카운티 재판소가 기소하여 지역 치안판사들(magistrates) 앞에서 진행한 일련의 심리들을 일컫는 말이다.
(사진) 길레스 코레이의 압사형 장면을 기록한 필사화. 32개의 바윗돌이 그의 배 위에 놓여지자, 내장이 입으로 빠져나온 후 즉사했다고 한다. 그는 아내와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죽어야만 했다.
이 사태로 150명 이상이 체포되어 투옥됐고, 심지어 더 많은 사람들이 고발을 당했지만 당국의 공식적인 기소절차를 면했다. 법원 2곳은 29명에게 마법을 사용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했다. 고발된 이들 가운데 여성 14명과 남성 5명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또한 [아내를 위해 묵비권을 행사하던] 길레스 코레이(Giles Corey: 1621~1692)는 자백을 강요하는 압사형(crushing, 壓死刑)에 처해졌고, 무거운 바윗돌들에 깔려 죽임을 당했다. 고발당한 이들 중 최소 5명은 감옥에서 사망했다.
1.3.2. 버지니아 식민지
법령에 따라 버지니아 식민지에 '영국 국교회'가 설치된 것은 1619년이었고, 영국 당국이 22명의 성공회 사제들을 파견한 것은 1624년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이 교구(parish)의 설치 이유는 관리의 급료 및 도로 건설과 빈민구제 등 식민지 지방 정부에 소요될 재원인 지방세를 이 교구를 통해 징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버지니아 식민지에는 주교가 존재한 적이 없으며, 속인들로 구성된 지역 교구회의(vestry)가 이 교구를 관리했다.(주3) 영국(=잉글랜드)에서와 마찬가지로, 버지니아 식민지에서도 교구가 지역적 중요성을 갖는 단위가 됐다. 이 교구는 영적으로는 교구목사(rector)의 지도를 받았고, 행정적으로는 지역 공동체에서 일반적인 존경을 받고 있던 위원들로 구성된 교구회의가 관리했다. 신자들이 모두 예배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전제 하에 충분한 접근성이 필요했기 때문에, 전형적인 교구는 통상 3~4개의 교회들로 구성됐다. 또한 교구들이 재정 자립을 위한 "글리브"(glebe)라는 교구 농지를 소유하는 것도 전형적인 일이었다.(주4)
목사들에 따르면, 식민지 주민들은 보통 예배 시간에 산만하고 무관심했고, 지루해 했다. 목사들은 신자들이 예배시간에 졸거나 속닥거리면서, 잘 차려입은 여성에게 추파나 던지고 왔다갔다 한다면서 불평했고, 최대로 나은 경우에도 창밖을 바라보거나 멍하니 허공이나 주시한다고 기록했다.(주5) 넓은 지역에 산재한 식민지 주민들을 담당할 목사들의 수가 너무 적어서, 목사들은 교구 신자들에게 <성서>보다는 <성공회 공동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를 이용해 각 가정들에서 개인적 기도와 예배를 보도록 장려했다. 이러한 일은 독실한 성공회 신자들로 하여금 불만족스럽게 여겨지던 공식적인 교회 예배에서 벗어나 능동적이고 진지한 종교적 삶을 접할 수 있도록 인도했다. 사적인 경건함에 대한 강조는 신자들을 기성 교회에서 벗어나도록 한 제1차 대각성 운동(First Great Awakening: 1731~1755)의 문을 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주6)
(주3) Edward L. Bond and Joan R. Gundersen, The Episcopal Church in Virginia, 1607–2007 (2007).
(주4) Philip Alexander, Bruce, Institutional History of Virginia in the Seventeenth Century: An Inquiry into the Religious, Moral, Educational, Legal, Military, and Political Condition of the People, Based on Original and Contemporaneous Records (1910) pp.55~177.
(주5) Jacob M. Blosser, "Irreverent Empire: Anglican Inattention in an Atlantic World," Church History, Sept 2008, Vol. 77 Issue 3, pp.596~628.
(주6) Edward L. Bond, "Anglican theology and devotion in James Blair's Virginia, 1685–1743," Virginia Magazine of History and Biography, 1996, Vol. 104 Issue 3, pp.313~340. |
1.3.3. 로드 아일랜드와 펜실바니아의 종교적 관용
성공회 출신 청교도 신학자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 1603~1683)는 종교적 관용, 교회와 국가의 분리(정교분리), 영국 국교회와의 완전한 단절을 설파하다 '메사추세츠만 식민지'에서 종교활동 금지를 당했다. 이후 그는 로드 아일랜드 및 프로비던스 식민지(Colony of Rhode Island and Providence Plantations 혹은 Rhode Island Colony)로 이주했고, 미국 최초의 침례교(Baptists) 교회인 미국 제일 침례교회(First Baptist Church in America)를 세웠다. 로드 아일랜드 식민지는 청교도 사회로부터 종교적 박해를 피해온 이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던 지역이었다.
북미의 식민지로 온 이주민 중 일부는 유럽에서 금지당하거나 박해를 당하던 형태의 기독교 신앙과 관련하여 종교적 자유를 추구하고 있었다. 북미 대륙에는 국교(state religion, 國敎)도 없었고, 실제로 아직 정부도 수립돼 있지 않은 상태였다. 또한 모든 기독교인들을 아우르는 중앙의 권위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식민주들의 종교적 관행은 다양한 양상을 보였다.
종교 친우회 (=퀘이커교)(Religious Society of Friends: Quakers)는 지도자였던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를 중심으로 1652년 잉글랜드에서 시작됐다. 퀘이커 교도들은 성공회(=영국 국교회)로부터 현저한 이탈을 과감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잉글랜드에서 심각한 탄압을 받았다. 이러한 공포정치로 인해 종교친우회 신자들은 난민의 처지가 됐고, 1670년 미국 땅 뉴저지(New Jersey)로 이주했다. 당시 뉴저지는 공식적으로 '뉴 네델란드'에 속해 있었고, 퀘이커 교도들은 이곳에서 빠른 속도로 기반을 닦아나갔다.
퀘이커교의 지도층 인사 윌리엄 펜 (2세)(William Penn: 1644~1718)은 영국의 찰스 2세(Charles II: 1630~1685, [재위] 1660~1685)가 자신의 아버지 윌리엄 펜(William Penn: 1621~1670)에게 진 빚을 이용하여 1681년 펜실바니아 식민주(Province of Pennsylvania 혹은 Pennsylvania Colony)를 설치했다. 그러자 더 많은 퀘이커 교도들이 종교적 자유를 획득할 기회를 찾고자 했다. 1685년까지 최대 8천명 가량의 퀘이커 교도들이 펜실바니아로 왔다. 퀘이커 교도들은 일부 종교적 신앙과 관행 면에서 청교도들과 유사했지만, 청교도들이 사회의 종교적 통일성을 강제할 필요성을 주장했던 것과는 차이를 보였다.
펜실바니아 거주 독일인(Pennsylvania Germans)은 "펜실바니아 네델란드인(=더치)"(Pennsylvania Dutch 혹은 Pennsilfaanisch Deitsch)이라고 부정확하게 불렸다. 그것은 이들이 사용하던 독일어 명친인 "펜실바니아 도이치"(Pennsylvania Deutsch)란 말을 오해하여 붙인 명칭이다. 펜실바니아 지역 최초의 독일인들은 1683년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 도착한 이들이다. 이들은 독일의 크레펠트(Krefeld)에서 왔는데, 메노파 교도들과 일부 네델란드 퀘이커 교도들이 포함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 종교에 대한 자신들의 지지 정도 --- 및 국가 공무원들이 모든 시민을 위한 종교적 자유(freedom of religion)라는 미국 혁명의 명령과 상반되지 않는 범위에서 종교를 지지하는 것이 어느 정도 범위여야 하는가 --- 에 관해 적절한 역할을 찾아보려 노력했지만, 이 문제는 아직까지도 미국 사회에서 논쟁의 여지를 가진 문제로 남아 있다.
1.3.4. 매릴랜드 식민주
영국의 식민주들에 가톨릭이 전래한 것은 잉글랜드에서 온 제수이트(Jesuits: 예수회[Society of Jesus]) 정착민들이 1634년 매릴랜드 식민주(Province of Maryland)를 설립하면서부터다.(주7) 매릴랜드는 북미의 영국 식민주들 가운데 가톨릭 교도가 지배적인 세력을 형성한 매우 보기드문 지역이었다. 하지만 1646년 '청교도 혁명'(잉글랜드 내전: 1642~1651)에서 의회파(=청교도)가 승리하고 왕당파가 패배하면서, 메릴랜드 식민주에는 가톨릭 교육을 금지, 앤드류 화이트(Andrew White: 1579~1656)를 비롯한 유명 제수이트 인사들의 본국 송환, 클래버톤 매노(Calverton Manor)에 있던 가톨릭 학교를 파괴하라는 내용의 엄격한 법률이 시행됐다.(주8) 매릴랜드 식민주 역사의 대부분 시기에 제수이트 교도들은 비밀리에 가톨릭 학교를 운영했다.
상당한 종교적 불관용의 시대, 특히 영국의 여타 식민주들에서 종종 대단히 전투적인 개신교 정서가 표출되던 것에 비해, [개신교도들의 정착을 허용했던] 매릴랜드는 종교적 관용(religious toleration)의 매우 드문 사례에 속한다. [개신교도들의 정착을 허용한] <매릴랜드 종교 관용법>(Maryland Toleration Act)은 1649년에 선포됐다. (기독교의 범주에 들기만 한다면) 종교적 다양성을 인정했던 이 법률은 종교적 관용을 명시적으로 규정한 최초의 법률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법률은 미국 수정헌법 제1조(Amendment I)의 선구자로 간주되고 있다.
영국 스튜어트 왕조(House of Stuart)의 국왕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를 증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백성들은 달랐다. 17세기 내내 영국에서 가톨릭 교도들은 학대 당하고 박해 받았다. 조지 캘버트(Sir George Calvert, 볼티모어 경 1세[First Baron Baltimore]: 1579~1632)는 "[영국의] 로마 가톨릭 형제들을 위한 피난처를 찾아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1632년 찰스 1세(Charles I: 1600~1649, [재위] 1625~1649)로부터 펜실바니아와 버지니아 사이에 위치한 매릴랜드 땅의 소유권(=임차권)을 획득했다. [하지만 조지 캘버트의 사망으로 이후 그의 장남인 세실 캘버트(Cecil Calvert, 볼티모어 경 2세[Second Baron Baltimore]: 1605~1675)가 권리를 이어받아 계속해서 사업을 추진했다.] 1634년, 캘버트 가문 소유의 범선들인 "아크"(Ark: '노아의 방주'란 의미) 호와 "더브"(Dove: '비둘기'란 의미) 호가 첫번째 정착민들을 태우고 매릴랜드에 도착했다. 승선 인원은 대략 200명 정도였다.
이후 매릴랜드에 [개신교 이주민들이 대폭 늘어나] 로마 가톨릭 인구는 점차 더욱 소수로 변해갔다. 이 때문에 17세기의 나머지 기간 동안, 로마 가톨릭 교도들의 지위는 등락을 거듭했다. 영국에서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 1688~1689: 친-가톨릭 정책을 펴던 제임스 2세[James II, 재위-1685~1688]를 축출하고 '권리장전'을 통해 완전한 입헌군주제를 성립시킨 사건)이 끝난 후, [아일랜드에 적용됐던] 영국 형법(penal laws)은 로마 가톨릭 교도들의 선거권, 공직 임용, 가톨릭 교육 및 공개적인 신앙행위를 박탈했다. [미국 독립전쟁(1775~1783)을 포함하는] '미국 혁명'이 발생할 때까지 매릴랜드의 로마 가톨릭 교도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주류에 대한] 소수 반대파로 남아 있었지만, 자신들의 신념에 충실했다. 미국 혁명기에 13개 식민주를 통틀어 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전체 인구의 1%도 되지 못했다. 하지만 2007년 미국 내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들의 수는 총인구의 24%가 됐다.
(주7) Fitzpatrick, Edward A.; Nevils, William Coleman (January 1936). "Miniatures of Georgetown, 1634 to 1934". The Journal of Higher Education (Ohio State University Press) 7 (1): pp.56~57.
(주8) Nevils, William Coleman (1934). Miniatures of Georgetown: Tercentennial Causeries. Washington, D.C.: Georgetown University Press. pp. 1–25.. |
1.3.5. 반(反) 가톨릭주의
미국의 반-가톨릭주의(Anti-Catholicism)는 '종교개혁'(1517년)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종교개혁은 가톨릭 교회의 오류 및 방종이라고 여겨진 내용들을 교정하려는 노력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따라서 개신교는 로마 가톨릭의 성직 위계질서에 대한 강력한 반대 입장을 지니고 있었고, 특히 교황권(Papacy 혹은 popedom: 敎皇權)에 대해서는 더욱 더 그러했다. 영국 식민주의자들(=정착민들)은 이러한 종교개혁의 입장을 신세계로 그대로 옮겨왔다. 개신교도들은 영국 신민주의자 중 압도적 다수였고, 그들은 로마 가톨릭 뿐만 아니라 영국 국교회까지도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영국 국교회는 로마 가톨릭의 교리와 관습들을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신교도들이 보기엔 영국 국교회의 개혁이 불충분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의식주의'[Ritualism] 항목도 참조하라).(인용각주 필요)
청교도들을 비롯한 많은 수의 영국 식민주의자들은 영국 국교회에 의해 박해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으므로, 미국의 초창기 종교 문화에서는 개신교 교파들이 보다 극단적인 반-가톨릭 편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모시그노 엘리스(Monsignor Ellis)는 자신의 저서에서 당시에 보편적이었던 반-가톨릭 편향성이 "메사추세츠에서 조지아에 이르기까지 13개의 식민주 전체에서 왕성하게 자라났다"면서, 식민주 헌장들과 법률들에 로마 가톨릭에 관한 특정한 금지조항들이 들어 있었다고 적었다.(주9) 엘리스는 또한 성공회(=영국 국교회) 사제들과 청교도 목사들이 상호간의 차이와 갈등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공통적인 적개심을 통해 단결할 수 있었다고도 적었다.
(주9) Ellis, John Tracy (1956). American Catholicism. |
1.4. 알래스카의 러시아 정교
* 이 부분의 상세한 내용은 '러시아의 미대륙 식민화'(Russian colonization of the Americas) 및 '러시아령 미국'(Russian America) 항목을 참조하라. |
러시아 상인들이 알래스카(Alaska)에 정착한 것은 18세기였다. 1740년 알래스카 해안에 정박한 한 러시아 선박에서 동방 정교회(Eastern Orthodox Church: 공식표기-Orthodox Catholic Church)의 성찬예배(Divine Liturgy, 성체의례)가 행해졌다. 1794년 러시아 정교회(Russian Orthodox Church)는 알래스카에 공식적인 교단을 설치하기 위해 선교사들을 파견했다. 훗날 성자로 추앙받게 되는 알래스카의 허만(St. Herman of Alaska: 1750~1836)도 이 선교단 속에 있었다. 러시아의 선교단의 노력으로 많은 수의 알래스카 원주민들이 정교회 신앙에 귀의했다. 러시아 정교회는 알래스카에 교구를 설치했고, 그 첫번째 주교는 알래스카의 인노센트(St. Innocent of Alaska 혹은 St. Innocent Metropolitan of Moscow: 1797~1879)였다.
2. 18세기
현재의 학자들은 1700년 이후의 미대륙 식민주들에 고도의 종교적 에너지가 있었음을 확인하면서, 18세기의 미국인들이 최초 정착민들이 가졌던 신앙에 관한 열정을 지속시키지 못했다는 널리 유포된 관점을 반박했다. 어떤 전문가는 당시의 종교가 "변화를 겪었다기보다는 상승세"에 있었다고 했고, 또 다른 전문가는 1700년 이후 "종교적 삶에 활력이 고조되고 있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또 다른 전문가는 여러 식민주들에서 종교가 "과열 성장"(feverish growth) 상태에 있었음도 발견했다. 교회출석률에 관한 통계 및 교회의 조직구조 역시 이러한 견해들을 지지해준다. 1700~1740년 사이 식민주들의 총인구 중 75~80%가 교회에 출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급격히 곤두박질치고 만다. 1780년에 이르면, --- 노예들과 아메리카 원주민(Native Americans, 인디언)을 제외한 --- 식민지 거주 성인들 중 교회에 출석하는 비율은 10~30%에 지나지 않았다. 노스 캐롤라이나(North Carolina)가 4%로 가장 낮았고, 뉴 햄프셔(New Hampshire)와 사우스 캐롤라이나(South Carolina)가 공동으로 가장 많은 출석률을 보였지만 그 비율은 16%에 지나지 않았다.(주10)
(주10) Carnes, Mark C.; John A. Garraty with Patrick Williams (1996). Mapping America's Past: A Historical Atlas. Henry Holt and Company. p.50. |
2.1. 대각성 운동
복음주의(Evangelicalism)의 출현 연대나 그 특성을 정의하는 일에는 곤란이 따른다. 학자들은 자각적 운동으로서의 복음주의가 17세기 중반까지도 출현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아마도 제1차 대각성 운동(First Great Awakening: 1731~1755) 그 자체의 시기까지도 출현하지 못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복음주의의 근본적인 전제는 개인의 회심(conversion)이며, 그것은 [성경] 말씀(the Word)의 설교를 통해 죄(sin)의 상태에서 "거듭남"(born again: '새로 태어남'[new birth])의 상태로 변화하는 것이다.
'대각성 운동'이란 1730~1740년대 북동부 지역 개신교의 부흥운동(revival movement)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1세대 청교도들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공개적으로 묘사 가능한 방식의 회심 경험을 체험해야만 한다고 요구했다. 하지만 그들의 계승자들은 영혼의 구원 면에서 좋은 수확을 거두는 데 실패했다.
'대각성 운동'을 시작한 사람은 메사추세츠의 전도사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였다. 그는 1세대 정착민 '순례자들'이 지니고 있던 엄격한 캘빈주의(Calvinism, 칼뱅주의)의 뿌리로 회귀하고자 했다. 영국인 전도사 조지 화이트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와 여타 순회 설교자들은 이 운동을 계속하면서, 식민주들을 돌아다니며 드라마틱하고 감성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설교했다.
에드워즈의 추종자들 및 여타 유사한 종교적 독실성을 가진 설교자들은 스스로를 "새로운 빛"(New Lights: 뉴 라이츠, 신파)이라고 불렀고, 자신들의 운동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을 "낡은 빛"(Old Lights: 올드 라이츠, 구파)이라고 불렀다. 양측은 자신들의 관점을 홍보하기 위해 대학들을 설립했는데, 장로교 신파가 세운 프린스턴 대학(Princeton University: 1746년 개교)이나 윌리엄스 대학(Williams College: 1793년 개교)이 그러한 사례에 포함된다. '대각성 운동'은 '사상 최초의 진정한 미국의 사건'(first truly American event)이라고 불린다.
대각성의 지지자들 및 이 운동의 복음주의적 교파 연합세력인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Methodism)는 1800년대 최초의 10여년간 미국 최대 개신교 교단들이 됐다. 1770년 무렵, 침례교는 북부와 남부 모두에서 빠르게 성장했다. 이들은 북부 지역에 브라운 대학(Brown University: 1764년 개교)을 설립하기도 했다. 대각성 운동으로 인해 이 운동의 반대파가 되거나 혹은 자동으로 반대파로 구분되어진 교파들로는 성공회, 퀘이커교, 회중교회가 있다.
2.2. 미국 혁명
* 이 부분의 추가적인 정보는 '미국 혁명'(American Revolution) 항목을 참조하라. |
미국 혁명은 일부 교파들을 갈라놓았다. 두드러진 교파들로는 사제들이 영국 국왕에 대한 충성 맹세를 해오던 영국 국교회(=성공회), 그리고 전통적으로 평화주의(Pacifism, 반전주의)를 주창했던 퀘이커교가 있다. 일부 지역들에서는 [전쟁으로 인해] 목사들이 부재하고 교회들이 파괴되어 종교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여타 지역들에선 종교가 번성하고 있었다.
미국 혁명은 미국 내 그 어떤 교단보다도 특히 영국 국교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왜냐하면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 영국 국왕이었기 때문이다. <성공회 공동기도서>에는 국왕을 위한 기도 내용이 들어 있었고, 신(=하느님)에게 "그의 수호자가 되어 주시고, 그에게 모든 적들을 무찌르는 승리를 안겨달라"는 간청도 들어 있었다. 1776년 당시 여기서 말하는 "모든 적들"이란 미국 성공회의 친구들과 이웃들 뿐만 아니라 [독립전쟁에 참전했던] 미국 병사들을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영국 국교회 및 그 수장(=영국 국왕)에 대한 충성은 미국의 명분에서 보면 반란죄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애국적 성향의 미국인 성공회 교도들은 <성공회 공동기도서>의 신앙 내용 중 지나치게 근본적인 부분들을 혐오하면서, 이 기도서가 정치적 현실에 부합하도록 개정했다.
이러한 움직임의 또 다른 결과는 미국 최초로 독립적인 성공회 교회가 설립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스스로를 로마(가톨릭 및 영국 국교회)로부터 이탈시키는 데 안간 힘을 쓰는 과정에서, 그 명칭에 "개신교"(Protestant: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을 집어 넣어 '미국 성공회'(Protestant Episcopal Church: 직역-'개신교 성공회 교회')라고 불렀다. 여타 지역의 성공회 교도들은 자신들이 지닌 영국 국교회의 본성 때문에 지나치게 두드러질 정도로 용어 사용에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 여타 성공회 단체들은 '개신교'라는 용어를 보다 즐겨 사용하던 급진적 개혁자들과 대척점에 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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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존 트럼벌(John Trumbull: 1756~1843)의 유화 작품 <독립 선언>(Declaration of Independence) |
2.3. 메사추세츠 : 교회와 국가 논쟁
영국에서 독립한 미국의 주들은 각각의 주들의 통치 방식을 확정한 [주별] 헌법들을 제정하지 않으면 안 됐다. 1778~1780년의 3년 동안, 매사추세츠 주의 정치적 에너지는 유권자들이 수용할만한 헌법의 초안 마련에 소요됐다. 가장 논란이 된 이슈들 중 하나는 주 정부가 교회에 재정 지원을 해야 할지의 여부였다.(역주: 미국이 독립하기 전 13개 식민주들 가운데 조지아, 사우스 캐롤라이나, 노스 캐롤라이나, 버지니아, 매릴랜드, 뉴욕 식민지에서는 영국 국교회가 주 국교로 자리잡고 있었고, 매사추세츠, 코네티컷, 뉴햄프셔에서는 청교도 신앙을 제도화한 회중교회가 주 국교로 자리잡고 있었다. 반면 로드아일랜드, 펜실베이니아, 뉴저지는 종교 자유를 누렸다.)
이 정책을 지지하는 측은 회중교회 목회자들과 대다수 신자들이었다. 당시 매사추세츠에서 회중교회는 주의 국교였고, 그에 따라 식민지 시대에 공적인 재정 지원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대각성 운동기에 강력하게 성장한 침례교도들은 교회가 국가의 지원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자신들의 전통적 신념을 끈질기게 고수했다.
메사추세츠 주 '제헌 회의'(Constitutional Convention)는 회중교회의 입장을 지지했고, 제3조에 납세자가 선택한 회중교회에 일반적인 종교세를 지원토록 규정했다.(역주: 매사추세츠 주는 이 조항을 1833년에 폐기하여 가장 늦게 폐기하는 주가 된다) 이 조항이 유권자 3분의 2의 지지를 얻었는가에 관한 근본적인 의문이 남아 있었지만, 1780년 매사추세츠 주는 이 헌법 조항을 공포했고, 이후 여타 주들도 적절한 시점에 이 조항을 채택했다. 이러한 종교세 법률은 코네티컷(Connecticut)과 뉴햄프셔에서도 효력을 발휘했다.
1788년,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명이었던] 존 재이(John Jay: 1745~1829)가 뉴욕 주 의회(New York State Legislature: [역주] 상,하원 양원제임)에 대해 주요 공직자들(office-holders)이 "민간 부문은 물론이고 기독교계의 모든 일들에서" 외부적 권리들을 포기하도록 의무화할 법안 제정을 촉구했다.(주11)
(주11) Kaminski, John (March 2002). "Religion and the Founding Fathers". Annotation - the Newsletter of the National Historical Publications and Records Commission 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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