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광주일고(왼쪽)와 광주자연과학고(옛 광주농고) 교정에 세워져 있는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 <광주드림 자료사진>
|
애석하게도 이 날은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하다. 해방 직후부터 광주에선 이 날을 기념해 왔지만 10월유신 이후로 줄곧 묻혀져 그저 몇몇 사람들이 역사를 추억하는 시간쯤으로 대접받아 왔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금년부터는 작은 변화가 있었다. 지금껏 `학생의 날’로 부르던 것을 `학생독립운동 기념일’로 이름을 바꾸고 국가기념일로 지위도 격상됐기 때문이다. 실제 이 운동은 국가적으로 기념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전국 190여 학교에서 5만명이 넘는 학생들이 참여했고, 그 규모면에서 10년 전에 일어난 3·1운동 이래로 가장 큰 항일운동이었기 때문이다. 또 이 운동이 1929년 우리 고장에서 처음 시작된 것을 생각하면 광주 사람들에겐 특별한 감회가 있을 법하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 학생독립운동을 기억나게 할 만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광주일고·수피아여고·광주자연과학고(옛 광주농고) 등의 교정에 기념탑이 세워져 있고, 광주일고 옆에는 기념관이 있으며, 광주-나주간 통학열차에서 일어난 사건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점을 상기시키기 위해 나주에 기념비가 있는 정도다. 하지만 옛 기록을 현재의 장소와 대차대조표를 그리듯 비교해 보면, 우리 주변엔 당시의 운동과 관련된 공간이 많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이 운동의 뒤에는 `성진회’라는 비밀결사가 있었는데 이 비밀모임에 참석했던 학생들은 회합을 가진 직후에 사진을 찍었다. 비밀결사라는 은밀한 성격과 어울리지 않게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이 왠지 젊은이들다운 호기를 느끼게 해주지만 이 한 장의 사진은 당시 학생들의 영혼을 만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한 장의 사진을 찍은 곳은 춘원사진관이란 곳이었다. 사진관은 당시 명치정 4정목에 있었는데 해방 뒤에 그려진 시내지도를 보면 지금의 금남로4가 81번지의 어디쯤이 아닐까 싶다. 사진관 주인은 광주에서 사진을 다루던 아주 초창기의 인물이었고, 그 솜씨나 서비스도 원로 사진작가들이 기억할 만큼 수준급이었다고 한다. 또 그 자제분이 오랫동안 금남로와 대인동에서 같은 이름으로 사진관을 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아 아쉽다. 한편, 성진회 결성을 주도했던 장재성이 운영했던 학생소비조합과 빵집은 얼마전 조성된 금남공원, 다시 말해 옛 한국은행 광주지점 터에 있었다. 이 가게는 `김기권문방구점’이란 간판을 내걸고 뜻있는 학생들이 모여 토론과 공부를 했던 곳이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이 소비조합과 도로를 두고 마주한 곳에 옛 광주지방법원(옛 광주은행 본점자리)이 있었다. 이 어울리지 않는 두 건물의 관계는 광주학생운동의 주역이던 장재성에게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장재성은 꼭 1년 뒤쯤인 1930년 10월 이곳의 법정에서 누이동생 장매성과 함께 재판을 받을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학생독립운동이 몇몇 주도자들에 의해 진행됐던 것은 아니었다. 얼핏 사소해 보이는 사건들이 민족적 울분과 갈등을 키워나가면서 많은 학생들로 하여금 일제 폭압에 저항하도록 만들었다. 그 중 하나가 한 농부가 개를 태우는 광경을 놓고 조선인과 일본인 학생 간에 일어난 언쟁이 몸싸움으로 비화된 운암역 사건이었다. 사건의 무대가 된 운암역은 운암동 1190번지 일대에 있었다. 분명 60년대까지 `북광주역’이라 불리며 열차가 섰던 곳인데 동네 토박이들조차 언제 역이 사라졌는지 기억하는 분이 없다. 필자가 몇 년 전 방문했을 때도 옛 흔적을 더듬기 곤란한 상태였는데 열차가 정차하면 승객들이 물통을 들고 달려가 받아마셨을 정도로 물맛이 좋기로 유명했던 샘터 주위엔 수초들만 무성했던 기억이 난다. 마지막으로 역사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에 익숙한 비주얼 세대에게 영화 한 편을 소개한다. 50여 년 전에 이 운동을 영상으로 담은 작업이 있었다. <이름없는 별들>이란 영화가 그것이다. 감독은 김강윤이었고, 극본은 최금봉이 썼다고 한다. 최금봉은 함평 대동면에서 태어났고 부친이 한말 의병활동을 했으며, 그 자신도 한쪽 눈을 잃고 사는 등 고단한 생애를 살았던 분이었다. <이름없는 별들>은 기록영화가 아닌, 극영화였다지만 사실성을 최대한 살리려 했던 것 같다.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광주일고 학생들이 단역배우로 출연하고, 시내 아스팔트 위엔 흙을 뿌려 옛 신작로를 재현했다고 한다. 학생독립운동 30주년이 되는 1959년 11월2일 시내 동방극장(현 무등극장)과 광주극장에서 일종의 시사회라 할 수 있는 `시험전야제’를 열고 그 다음날 전국에서 개봉했다. 하지만 영화는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해 곧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던 것 같다. 다행히 그 필름이 현재 광주일고 옆 역사관에 보관중이란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듯하다. 사실이라면 언제가 우리 모두가 볼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