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13장1절-34절
열왕기상 12장은, 르호보암 왕이 백성들의 민의를 외면하고 젊은 신하들의 말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흐트러진 민심이 마음을 다잡아 일어설 수 있었던 기회를 아쉽게 놓쳐버린 모습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각 당마다 대선 후보를 선출하느라 정치계는 선거 분위기로 무르익어 있습니다. 새누리당에서 박근혜 후보가 뽑히기 전에 비박(非朴) 후보들이 뭉쳐서 한 차례 선거를 중단하고 파행으로 치달을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번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선출에도 모바일 투표에 의혹이 있다며 투표 자체를 잠정 중단하는 파행의 위기가 닥쳤습니다. 어떻게 보면 문재인 후보가 최소한 과반수가 넘을 만하게 압도적으로 경선에 앞선 것은 아니었지만, 비문(非文) 후보들 편에서는 한 번 브레이크를 걸어서 독주체제를 견제해보려는 심산이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람 간에 또는 집단 간에, 심지어 국가 간에 늘상 자기중심 이익추구로 인해 힘의 대립과 주도권 쟁탈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나 단체 속에 균열이 생기고 점점 커지면 나눠지고 분열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분열과 반목, 편 가르기에 대해 ‘양심적인 소리’라고 귀 기울일 만한 존재가 없다는 점입니다. 불교계에도 고승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개신교는 신앙적 껍데기만 남은 국회조찬기도회 모임처럼 여겨집니다. 그나마 가톨릭에서 바른 말하려고 애를 써는 듯하나 예전 같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 또한 한 나라요 한 뿌리였던 이스라엘이 두 나라가 되고 두 개의 지파처럼 분열되어 가는 혼란한 정국 속에서 두 선지자의 등장을 통해 개혁을 열망하는 자들에게 여운이 남는 교훈을 던져줍니다.
다윗을 이어 왕이 된 솔로몬은 아버지처럼 영토 확대와 국위를 선양하는 듯했지만, 우상을 숭배하는 범죄로 하나님을 멀리하고 백성에게는 과중한 부역과 세금을 지게 하여 결코 성군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신기한 것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또한 그의 아버지처럼 ‘그의 아버지의 길’(왕상 15:26)로 행하여 범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하실 때 그리고 그 아들이 아버지의 길을 따라 악을 행할 때 가만히 팔짱을 끼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때마다 선지자를 보내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셨습니다. 르호보암 왕이 아버지 솔로몬 왕의 뒤를 따라 백성의 고혈을 짜낼 때 하나님은 실로 사람 아히야 선지자를 여로보암 앞에 보내었습니다.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의 열 지파의 후원을 등에 업고 왕이 된 사람이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개혁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도 왕이 되자 백성들이 좋아하는 인기 있는 왕이 될지언정 하나님의 뜻대로 따라 사는 개혁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대신에 벧엘에다 제단을 쌓았고 거기다 하나님 대신 금송아지를 숭배함으로 나머지 열 지파의 민심을 사로잡기에 급급했습니다. 신학도 없고 본질도 없는 개혁이었고 편리한 자기 식 신앙추구였습니다
본문 1절에는, 제사장도 없고 오로지 왕 스스로가 제단에 나와 분향하면서 종교적 매커니즘으로 사람들의 눈과 귀를 흐리게 만듭니다. 개혁자로 보낸 그가 개혁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2절에서 하나님의 사람, 즉 선지자를 개혁의 대상이 된 여로보암에게 보냅니다.
“제단아, 제단아.” 어디선가 제단을 향해 큰소리로 부르짖는 선지자의 소리에 여로보암 왕은 깜짝 놀랍니다. 그러자 4절에 보면, 여로보암이 손을 뻗어 ‘저 놈 잡아라’고 숨 가쁘게 고함칩니다. 그러나 그 순간 당황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여로보암 왕이었습니다. 자신의 손이 마비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후에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반성도 하지 않은 채 선지자를 통해 자신의 원래 정상적인 손으로 돌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추태는 성경 기자에 의해 부끄러운 샘플로 남게 되었습니다. 열왕기상 15장 34절 말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아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
여로보암 왕 이후 북 이스라엘 왕들이 한결같이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갔다는 말은, 개혁자 여로보암이 신앙의 개혁을 이뤄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열시키고 세속적 신앙으로 격하시켰다는 표현의 다름 아니었습니다.
본문에는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이 보낸 개혁자가 개혁의 대상이 되어버렸다는 교훈과 더불어, 그 타락한 왕 여로보암을 용기 있게 찾아가 훌륭하게 자신의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했던, 이름 모를 하나님의 선지자에 대해 덧붙일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무명의 하나님의 선지자는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금식 정도가 아니라 단식을 하는 상태였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물이라도 마시면 어느 정도 굶더라도 견뎌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마저 마실 수 없다면 사람은 곧 극한상황에 처하여 매우 고통스러워하게 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은 그때까지 물도 마시지 않고 있다가 한 나이 지긋한 자칭 선지자를 만나 그의 거짓말에 속아 하나님께 일시적으로 서원한 내용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18절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우리는 이 노인 선지자가 왜 거짓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사명을 잘 감당했던 그 무명의 선지자는 결국 사자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엄중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에는 바로바로 기적과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는데,
첫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사람 목숨도 파리 목숨으로 처리할 수 있는 왕의 권위 있는 손이 순간적으로 마비되었다가 풀려난 사건이고,
둘째는 바로 그 놀라운 기적을 행한 당사자 하나님의 선지자가 얼마 있지 않아 사자에게 죽임을 당하되 사자가 그 시체를 먹지 않고 눈을 멀뚱거리며 우두커니 그 자리를 배회하고 있었다는 사건입니다.
물론 그가 타고 가던 나귀를 사자가 잡아먹지도 않았고 나귀 또한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나이 든 선지자가 왜 거짓말을 해서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음에 빠뜨렸는지 몇 마디 대화를 통해 잘 알 수는 없으나, 이 노 선지자가 2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 무명의 선지자에게 전하는 장면과 30, 31절에서 이 무명의 선지자를 위해 예의를 갖춰 장례를 치르는 모습을 보건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은 분명하다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솔로몬과 르호보암의 죄를 깨우치려고 여로보암과 여러 선지자를 보내시고, 여로보암의 세속적인 신앙모습을 지적하고자 무명의 선지자를 보내셨으며, 그 무명의 선지자가 하나님 말씀을 용감하게 잘 전했으나 자기 스스로 하나님과의 약속의 말씀을 지켜내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본문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32절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제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 개혁을 외치는 자야말로 그 누구보다 하나님 말씀을 멸시하여서는 안 된다는 교훈입니다. 비록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국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고 우리도 모르게 비판하고 목소리를 높인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 자만심이 그 자리서 죽임을 당하고 즉결처분을 당하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개혁된 교회는 계속해서 개혁 진행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처럼 선지자의 직접적인 기적과 심판이 오늘날 우리들 삶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오히려 우리 속에 하나님의 인격적인 양심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 시대에 ‘양심적인 소리’가 점점 없어지므로 사회가 더욱 혼탁해지고 있는 것처럼, 우리 안에 성령께서 지금도 천둥소리처럼 ‘쿵쾅’거리는 음성으로 우리의 양심을 두드리시는 그 하나님의 인격적인 가까이하심에 오늘도 조용히 귀 기울이는 이 아침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사람의 주님...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들이 얼마나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언급해서 사회를 비판하고 남을 판단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쓰임 받던 자들이, 심판의 전달자가 오히려 심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 오늘의 메시지임을 깨달으면서 우리 스스로 더욱 겸손해지기 원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속에서 지금도 쿵쾅거리며 우리의 양심을 두드리고 깨우치고 계시는 성령님의 인격적인 가까이하심에 우리들이 마음 열고 받아들이기 원하오니,
이 하루도 주님과 동행하는 하루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