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퀼라 역본
아퀼라는 소아시아의 폰투스 출신으로 유대교인이 된 사람으로서, 랍비 아키바의 지도를 받으면서 130년경에 히브리어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했는데, 극도로 직역을 했다. 전체 역본은 남아 있지 않으며, 다만 인용된 부분들과 오리게네스의 '헥사플라'(Hexapla : 6개 언어 대조성서)에 그 단편이 남아 있고, 카이로의 고본 서고에서 나온 재활용 양피지(palimpsests : 한 번 쓴 양피지를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쓴)에 단편이 남아 있을 뿐이다.
테오도티온의 개정본
그리스어 번역본의 2차 교정이 70인역을 개정한 것인지, 아니면 70인역 외에 다른 그리스어 역을 개정한 것인지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2세기 후반에 테오도티온이라는 사람이 개정했다. 히브리어 음역의 빈도수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심마쿠스의 역본
2세기말 심마쿠스가 번역했다. 번역자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번역은 우수하지만 영향력은 미미했다. 히에로니무스가 그의 불가타 역에서 심마쿠스의 번역을 활용하긴 했으나, 오늘날 그의 번역은 '헥사플라'를 통하여 단편만이 알려져 있다.
오리게네스의 헥사플라
여러 가지 상이한 번역판을 갖게 된 3세기에 이르러서 성서 본문에 대해 서로 다르게 이해함으로써 혼란이 생겼다. 230~240년경에 카이사리아에서 활동하던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오리게네스가 '헥사플라'를 편집했다. 히브리어 본문, 히브리어 본문의 그리스어 음역, 아퀼라 역, 심마쿠스 역, 70인역, 테오도티온의 개정본을 평행으로 편집하여 비교해볼 수 있게 했다. 오리게네스의 주요관심은 70인역이었다. 그는 70인역 본문을 히브리어 본문과 비교하여, 히브리어 본문에는 없는데 70인역에만 있는 첨가된 본문에는 의구표(疑句標)를 했고, 히브리어 본문에는 있는데 70인역에 그 본문이 번역되어 있지 않은 곳에는 다른 그리스어 번역에서 그 부분을 가져와서 70인역에 삽입시키고 앞뒤에 의구표를 붙여 놓았다. 의구표란 고사본의 의심스러운 본문이나 재생시킨 본문을 표시하던 단검표(+), 마이너스표(-), 나누기표(÷), 별표(*) 등을 일컫는다. 헥사플라의 원본은 600년경까지는 존속되었던 것 같으나, 오늘날에는 단편만 남아 있다.
70인역 성서 사본들과 인쇄본 사본
편의상 파피루스 사본, 대문자 사본(Capitalletters : Uncials), 필기체 소문자 사본(Cursive script : Minuscules)으로 나뉜다. 파피루스 사본의 수는 수백 개에 이르고, 크기는 다양하며, 70인역이 형성되던 초기에서 7세기 중엽의 것까지 있다. 특히 이집트에서 발견된 〈신명기〉 파피루스는 기원전의 것이다. 파피루스에 씌어진 것이 아니고 양피지나 가죽에 씌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쿰란에서 발견된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의 단편 조각 사본들, 그리고 나할 레베르에서 발견된 그리스도교 형성 초기시대의 두루마리 사본도 중요한 고대 사본들이다. 가장 중요한 파피루스 사본은 구약에 속하는 9권의 단편들을 보여주고 있는 11개의 코덱스로 되어 있는 체스터 비티 파피루스이다. 이 사본이 만들어진 것은 2~4세기경이다. 그후 300여 년 동안 파피루스 본문들이 급증했고 현재 200여 개의 사본들이 남아 있다.
대문자 사본들은 4~10세기에 나온 것들로서 모두 코덱스(책 모양)로 되어 있다. 괄목할 만한 것들로는 4세기의 바티카누스 사본(Codex Vaticanus : 〈구약성서〉 전체), 4세기의 시나이티쿠스 사본(Codex Sinaiticus : 〈구약성서〉 일부), 5세기의 알렉산드리아누스 사본(Codex Alexandrianus)이다. 이 셋은 본래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다 포함한 것들이었다. 이밖에도 성서의 일부만 보여주고 있는 사본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예언서를 보여주고 있는 6세기의 마르칼리아누스 사본(Codex Marchalianus)은 값진 것이다.
필기체 소문자 사본은 9세기 이후부터 나타난다. 11~16세기에 1,500여 개의 사본들이 발견되었으나 그들은 모두 같은 본문을 반영하는 사본들이다. 비록 후대의 것이지만 좋은 본문을 간직한 대문자 사본을 베낀 것일 때에는 가치가 있다. 가장 먼저 인쇄된 70인역은 '콤푸루툼 학파 대역 성서 '(1514~17)이다. 이것은 1522년에 비로소 유포되었으므로, 1518년에 베네치아에서 나온 알다인판(版)이 실제로는 맨 처음에 나온 인쇄본이라고 할 수 있다. 1587년 로마에서 식스투스(교황 식스투스 5세) 판이 나왔고, 19, 20세기에 들어서서 여러 가지 비평적 편집본들이 나왔다.
콥트어 역본들
그리스도교가 그리스어권 밖으로 퍼져가면서 그곳 언어로 성서가 번역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콥트어 성서이다. 3세기말 4세기초에 번역된 것으로 보이며, 번역 대본은 그리스어 성서이다. 부분적으로는 고대 라틴어 역본과 유사성도 보인다.
아르메니아어 역본
5세기초까지 아르메니아 민족 교회는 그동안 문학과 예배 의식에서 그리스어와 시리아어를 함께 사용해왔으나, 성 메스로프 (361~439)가 아르메니아어 알파벳을 만들어 아르메니아 민족 문학의 기반을 닦았는데, 이때 성서도 아르메니아어로 번역되었다 (- 아르메니아 문학). 첫 번역은(414경) 시리아 역 페시타(Peshitta)를 대본으로 번역했고, 곧 이어서 개정했다. 현재까지 전해져오는 최종적인 공인 번역은 70인역을 대본으로 하여 번역된 것이지만 여기에도 페시타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그루지야어 역본
아르메니아의 전승에 따르면 그루지야어 역본도 메스로프의 번역이었다고 한다(- 그루지야 문학). 그러나 그루지야어 〈구약성서〉의 가장 오래된 부분인 〈시편〉도 5세기 이전으로 소급해 올라가지는 않는다. 사본들은 그리스어 역본이나 아르메니아 역본에 근거해 있다.
에티오피아어 역본
4, 5세기경에 에티오피아에 그리스도교가 자리잡으면서 성서 번역이 시작되었는데, 최초의 것은 70인역을 대본으로 하여 번역되었다(- 에티오피아 문학).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사본은 13세기의 것이다. 14세기 이후의 사본들에는 아랍어 역과 콥트어 역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많은 부분이 히브리어 본문과 일치하고, 70인역 본문과는 큰 차이를 나타낸다.
고트어 역본
고트족은 오늘날 슬로바키아와 불가리아로 알려진 지방에서 살았다. 4세기 중엽 그리스도교 선교사였던 울필라스 가 고트어 알파벳을 발명하여 성서를 번역했다(→ 고딕 문학). 〈구약성서〉 번역은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극히 일부 단편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다 없어졌다. 그리스어 역을 대본으로 번역했다. 고트어로 기록한 문헌이라고는 성서 단편적 사본뿐이다.
고대 라틴어 역본
2세기 중엽 라틴어 역 〈구약성서〉가 북아프리카와 갈리아 지방에 유포되고, 3세기 초에는 로마에도 유포된 흔적이 있다 (- 라틴 문학) . 아프리카의 로마 점령지에 살며 라틴어를 쓰던 유대인들이 번역한 것을 그리스도교에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다. 원본도 히브리어가 아니고 그리스어 역이다. 고대 라틴어 역본은 '라틴어 옷을 입은 70인역'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70인역과 관계가 깊다. 고대 라틴어 역본에는 오리게네스가 개정하기 이전의 70인역의 상태가 반영되어 있으므로 본문비평에 있어서 고대 라틴어 역의 비중이 크다. 3세기까지 여러 종류의 라틴어 역들이 유포되고 있었다. 그 번역이 하나의 번역본에서 나온 개정판들인지, 처음부터 독자적으로 번역된 것들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382년경 교황 다마수스가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고대 라틴어 역본들을 정리했다.
불가타 역본
신학적 토론과 예배의식에서 사용되는 통일된 본문이 필요하게 되자, 다마수스가 이 일을 유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 에게 맡겼다. 히에로니무스는 라틴어와 히브리어 실력을 고루 갖춘 그리스도교 성서학자였다. 그는 3종류의 라틴어 〈시편〉 개정판을 낸 바 있다. 첫번째 개정은 70인역에 근거하여 개정되었으므로 '로마 시편'이라고도 한다. 2번째 개정은 팔레스타인에서 펴낸 것인데, 헥사플라 70인역에 입각하여 라틴어 역을 히브리어 원문 쪽에 가깝게 개정했다. 갈리아 지방에서 특히 인기가 있었으므로 갈리아 시편이라고도 한다. 후에 이 시편이 불가타 역에 그대로 들어간다. 3번째 개정은 어떤 의미에서는 개정이라기보다는 새로운 번역이다. 히브리어에서 직접 번역된 것이지만 널리 유포되지는 못했다. 이것을 준비하는 동안 히에로니무스는 고대 라틴어 역을 다만 그리스어 역에 근거하여 개정한다는 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히에로니무스는 라틴어 성서를 히브리어 원문 성서에서 직접 번역하기 시작했는데, 390년에 시작하여 405년에 끝냈다. 그러나 이미 서방교회에서는 그리스어 70인역이 굳게 자리를 잡고 있었으므로,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 역은 처음에는 교회 안에서 정착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그의 라틴어 번역이 70인역의 내용과도 달랐고 고대 라틴어 역과도 다른 곳이 많았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읽어오던 본문과 다르다고 하여 오히려 라틴어 역의 권위가 도전을 받았다.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지도자는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 역 성서로 인해 그리스 교회와 라틴 교회가 갈라지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걸렸지만 결국 히에로니무스의 새 라틴어 역은 우수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8세기에 비로소 그의 번역은 라틴어 불가타가 되어서, 종교개혁 때까지 서방교회의 성서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그후로도 상당 기간 고대 라틴어 역과 히에로니무스의 불가타 역을 손으로 베껴서 보급하는 과정에서 번역문에 많은 변화가 가해져 일종의 종합 본문이 되고 말았다. 손으로 베끼는 과정에서 본문의 변화까지 겹치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8, 000여 개의 사본들 사이에 이독 현상이 많이 나타난다. 중세기에 불가타 역 회복을 위한 몇 번의 시도가 있었으나 번번이 실패하다가,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 에서 불가타 역을 공인하게 됨에 따라 개정본의 필요성이 더 절실해졌고, 15세기 중엽부터 인쇄술이 발달하자 번역 본문을 정착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식스투스판이 광범위한 지지를 받지 못했으므로 교황 크레멘스 8세가 1592년에 새 판을 간행했는데, 이것이 로마 교회 의 공인 불가타가 되었다.
시리아어 역본
시리아 교회가 가지고 있던 시리아 역 성서는 '페시타'(단순한 번역)라고도 알려져 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 누가 언제 번역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번역은 본래 1세기경에 번역되었던 것 같고, 그것은 메소포타미아의 아리아베네 지역에 있던 유대인 사회에서 번역하여 사용했던 것 같다 (- 시리아 문 학).페시타는 문체도 다양하고 채택한 번역 방법도 다양하다. 모세5경 부분은 마소라 본문과 아주 가깝지만, 다른 부분은 70인역과 가깝다. 마소라 본문과 가까운 본문은 유대교인들이 번역한 것이고, 70인역과 가까운 본문은 그리스도교 쪽의 개정일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5세기 시리아 교회가 네스토리우스파 (동시리아)와 야코부스파(서시리아)로 나뉘면서 페시타의 본문사도 2갈래로 갈라진다. 네스토리우스 교회는 고립되어 있었으므로 그 교회가 간직하고 있던 사본이 덜 손상되었을 것으로 본다. 6세기초에 마북의 감독 필록세누스 가 70인역의 루시아 개정본을 근거로 페시타를 개정했다. 617년에는 헥사플라에 들어 있는 시리아어 역을 텔라의 주교인 파울루스가 헥사플라 70인역에 근거하여 개정했다. 지금 단편만 남아 있는 팔레스타인 시리아 역은 에데사의 야코부스(708 죽음)가 새롭게 개정한 것이다. 현존하는 페시타 사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442년에 나온 것이다. 완전한 형태로 보존된 4권의 코덱스는 5~12세기 때의 것이다. 아직 비평적 편집본은 없으나, 국제구약학회가 준비하고 있다.
아랍어 역본들
최초의 것으로서 가장 중요한 역본은 사디아 벤 요세프 (892~942)가 히브리어에서 번역한 것으로서 히브리어로 씌어진 아랍어 역본이다 (- 아랍 문 학) . 이 번역은 이집트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아부 알 하산이 이것을 대본으로 모세5경을 번역했으며, 11~12세기에 아랍어 역 사마리아 5경으로 받아들여졌다. 또다른 아랍어 역 사마리아 5경은 아부 사이드가 13세기에 번역한 것이다. 히브리어에서 번역된 다른 여러 번역들 중에 10세기에 야피트 이븐 알리가 번역한 것이 가장 주목할 만하다. 946년 스페인 코르도바의 그리스도교인이었던 벨라스케스의 아들 이삭이 복음서를 라틴어에서 번역했다. 아랍어 역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사본으로는 16세기에 번역된 것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보관되어 있다. 19세기의 것으로 파리와 런던에 있는 '대역성서'(Polyglots)에 아랍어 역이 보존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아랍어 역 사본들은 히브리어·그리스어·사마리아어·시리아어·콥트어·라틴어 중에서 번역된 것 등이 함께 전해져오기 때문에 번역판들마다 큰 차이를 보인다. 그런 만큼 아랍어 역은 본문비평 자료로서는 큰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19, 20세기에 개신교와 가톨릭이 번역한 현대 아랍어 역들이 있다.
후기 및 현대 역본들 (영어)
위클리프역본들
飜譯이라 부를 수 있는 최초의 영어 번역 성서는 '위클리프 역'(Wyclif's Version : 1382)이다. 이것은 영어로 번역된 최초의 성서이다. 영국에 그리스도교가 들어간 지 1,000여 년 만에 번역된 것이다. 그는 일반신도들에게 읽힐 목적으로 성서를 번역했다. 그를 일컬어 '종교개혁의 새벽별'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와 함께 번역한 사람으로는 허포드의 니콜라스가 있다. 니콜라스는 〈구약성서〉 번역을 맡았으나 후에 추방되었다. 위클리프 는 1380년에 〈신약성서〉를 번역했고,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완역은 1382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인쇄된 성서가 아니고 손으로 쓴 성서이다. 후에 J. 퍼비가 '위클리프 역'을 전체적으로 개역했다(1388). 위클리프는 1384년에 죽었다. 그러나 44년 후인 1428년에 그가 성서를 번역했다는 이유로 그의 묘가 파헤쳐지고 그의 시신이 화형당했다. 위클리프가 번역한 성서는 나온 지 33년 후인 1415년에 불태워지고 말았다. 당시 교회는 신도들이 성서 읽는 것을 금했었다. '위클리프 역'의 단점으로는 그것의 번역 대본이 성서 원어인 히브리어나 그리스어가 아니라 라틴어 불가타였다는 점, 이미 낡은 번역이었다는 점, 고어투성이었다는 점, 독자를 별로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윌리엄 틴들 의 역본
윌리엄 틴들은 먼저 〈신약성서〉 번역에 착수하여 1525년 쾰른에서 그것을 인쇄하여 4절판으로 출판했다. 보름스로 쫓겨간 다음 그곳에서 신약을 8절판으로 출판하여 3,000부를 몰래 영국으로 들여 보냈다. 일반신도들은 그것을 읽으려고 샀고, 워럼 대주교는 불태워버리려고 그것을 사들였다. 〈신약성서〉 번역을 마친 틴들은 곧바로 〈구약성서〉 번역에 착수하여 1530년 히브리어 성서에서 번역된 모세5경이 나온다. 그의 친구 G. 조이가 〈구약성서〉의 나머지 부분을 번역했는데, 〈시편〉에서 〈애가〉까지만 히브리어 성서에서 번역했고, 〈이사야〉는 라틴어 역에서 번역했다. '틴들 역 교정본'이 1535년에 나왔지만 아직 〈구약성서〉는 완역되지 않았다. 드디어 1536년 10월 6일 틴들은 교살되고 화형당했다. 틴들은 7개 언어에 능통했으며 특히 그리스어에 능통했고 문장과 문체에도 유능한 학자였다. 1611년에 나온 '제임스 왕 역본'의 80%가 틴들의 문체라고 한다. 그의 평생 목표는 평신도들에게 그들이 읽을 수 있는 그들의 언어로 번역된 성서를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마일스 커버데일의 번역본
1535년 10월에 나온 최초로 인쇄된 영어 성서이다. 번역자 마일스 커버데일은 함부르크에서 틴들을 알게 되었다. 그의 번역은 유럽 대륙 취리히에서 인쇄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을 헨리 8세에게 봉헌했으며, 독일어 역과 라틴어 역 성서를 번역했다. 틴들의 〈신약성서〉와 모세5경도 참고했다고 한다. 커버데일 역은 틴들의 번역에 크게 의존하면서 아직 틴들이 완성하지 못한 부분을 독일어 역과 라틴어 역에서 거듭 번역하여 완성시켰다.
토머스 매튜 역본(1517)
틴들 역의 또다른 교정판이다. 1517년 유럽 대륙 안트웨르펜에서 인쇄된 것으로 생각된다.
- 큰 성서(La Grande Bible : 1539)
커버데일이 맡아서 펴낸 것으로, 틴들-토머스 매튜 역본(1537)의 재교정판이다. 이것을 '큰 성서'라고 하는 까닭은 판형이 유난히 컸기 때문이다. 1539년에 완성되어 성직자들에게 배포된다.
제네바 성서 (1560)
틴들의 번역 성서가 나오면서 1525~39년은 성서의 번역과 개역이 활발하던 기간이었다. 왕실 쪽에서의 묵인이 이런 번역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헨리 8세 때부터 가톨릭 쪽의 압력으로 번역이나 개역이 금지되기 시작한다. 틴들의 이름으로 된 성서 번역은 모두 금지되었고, 노동자나 여성은 성서를 읽는 것이 금지되었다. '큰 성서' 외에는 모든 성서가 금지되었고, '큰 성서'도 상류계급 사이에서만 읽혀졌다. 1547년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개신교도인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하자 일반 백성에게 성서를 보급하고 개방하는 일이 다시 시작되었다. 당시 대주교였던 크랜머가 이 일을 적극적으로 하게 되자 타국으로 떠났던 종교개혁자들도 귀국했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치세 기간이 짧았고, 그의 뒤를 이은 메리 여왕은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과 성서학자들이 약 300여 명이나 순교했다. 대주교 크랜머도 이때 순교했다. 커버데일은 유럽 대륙으로 피신하여 제네바로 갔다. 제네바는 신학자 테오도르 베자와 장 칼뱅 의 고향이다. 칼뱅의 동서였던 윌리엄 위팅엄이 존 녹스 에 이어 제네바의 잉글랜드 교회 후계자가 되었는데, 바로 이 사람이 '제네바 성서' 발행에 가장 책임이 컸던 인물이다. 제네바 성서는 1560년에 완역되었다. 이 성서가 나오기까지 위팅엄을 도왔던 인물이 바로 커버데일 역을 냈던 커버데일이다.
제네바 성서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영어 성서로서는 처음으로 절 구분이 되었다는 점인데 로베르 에티엔이 그의 그리스어 〈신약성서〉에 적용했던 절 구분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제네바 성서는 큰 성서의 교정판이다. 틴들의 공헌이 그 기초를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구약은 히브리어 본문과 라틴어 역 본문에 따라 철저히 교정된 것이다. 〈신약성서〉는 주로 틴들 역의 교정이다. 이 성서는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봉헌되었다. 엘리자베스는 1558년에 즉위했고, 개신교 편을 강하게 들던 왕이었다. 제네바 성서가 당시 교회에서 '큰 성서'를 대신하지는 못했지만, 일반신도들 사이에서는 널리 유포되었다. '감독성서'(1568)가 나올 때까지 이 두 성서가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제임스 왕 역본이 나올 때까지 제네바 성서는 140여 회나 판을 거듭하면서 출판되었다.
올리버 크롬웰 장군과 그의 군대가 바로 이 성서를 읽었고,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에서 신대륙 북아메리카로 간 청교도들, 존 버니언, 셰익스피어, 심지어는 '제임스 왕 역본'을 낸 제임스 왕도 바로 이 제네바 성서를 읽었다. 제네바 성서의 〈신약성서〉는 1557년에 나왔으며 〈구약성서〉와 〈신약성서〉가 다 번역되어 나온 것은 1560년이다. 이것이 로마자로 인쇄되고 절 구분이 된 최초의 영어 성서인 제네바 성서 초판이다. 로렌스 톰슨(1539~1608)이 1576년에 제네바 성서의 신약을 교정하여 내놓았다. 주로 베자의 라틴어 역 〈신약성서〉(1565)와 비교하여 교정했는데, 이 교정도 1615년까지 45판이나 판을 거듭했다. 이것을 흔히 제네바 톰슨 성서라고 한다. 톰슨이 교정한 제네바 성서를 유니우스(1545~1602)가 계속 교정하여 1592, 1594, 1596년에 나왔다. 하이델베르크대학교 교수인 유니우스가 〈요한의 묵시록〉의 주석을 내면서 제네바 톰슨 성서의 묵시록 부분을 교정하여 〈요한의 묵시록〉 교정을 합친 제네바-톰슨-유니우스 성서가 1603, 1606, 1607년에 출판되었다.
감독성서
교인들 사이에서는 제네바 성서가 읽히고, 교회의 강단에서는 '큰 성서'가 읽히고 있었다. 제네바 성서의 우수성을 잘 알고 있던 대감독 파커는 '큰 성서'를 교정하여 기존의 두 번역성서를 대치하고자 했다. 교정 작업에 대거 참석했던 이들이 감독들이었으므로 이것을 감독성서라고 부르게 되었다. 〈구약성서〉 본문은 제네바 성서 그대로이고, 〈신약성서〉 본문은 파커 대감독 자신이 많이 교정했다.
두에랭스 성서
(1582/1610)로마 가톨릭 측에서 번역해낸 일상어역이다. 프랑스 랭스의 앨런 추기경이 시작했고, 본격적 작업은 두에대학교 히브리어교수였던 그레고아르 말르탱 이 맡았다. 〈신약성서〉가 1582년에 나왔고, 〈구약성서〉도 곧이어 완역되었으나 출판 비용이 없어서 지연되다가 대학이 랭스에서 두에로 옮긴 뒤인 1609~10년에 출판되었다. 그래서 〈신약성서〉는 랭스 〈신약성서〉로 알려졌으나, 〈구약성서〉·〈신약성서〉는 두에 성서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