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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쓴 글인지는 몰라두 쪼금 기분 나쁜내용두 있네요....그냥 이런 견해두 있구나 하고 읽어 보세요....
1.송골매도 다시 듣자
요즘 산울림이 다시 뜨고 있다.
그들의 정규음반을 구하기도 쉽지 않은(보통 베스트 음반들이 많이 깔려있다, 니미),
나온지 20년이 다 돼가는 옛 음악이지만
이들은 새로이 "한국의 비틀즈"로 평가받으며 재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한국 락음악의 빙하기였던 70년대말-80년대초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숱한 명작들을 생산했고,
대중음악 가사에 두번째 혁명을 이루었으며 (첫번째는 70년대 초의 일련의 포크 음악인들),
삼형제가 멤버 교체 한 번없이 12장(모두가 3인의 음반인 것은 아니지만)의 음반을 통해
거의 항상 성공적인 성과를 이루어냈다는 것은 세계에 내놓을만한 자랑이다.
자, 그러나 한번 더 생각해 보자. 과연 그 당시에 산울림밖엔 없었는가?
물론 당장 떠오르는 이름으로 또하나의 명장 사랑과 평화가 있다.
그리고? 김수철의 작은 거인이 있고, 조하문의 마그마가 있다.
(작은 거인의 2집과 마그마의 유일한 음반은 지금 현재 한국 대중 음악계의 대표적인 희귀음반이자,
물론 명반이다. 이게 왜 다시 안나오는지, 화난다.) 그리고 끝?
전혀! 유수의 캠퍼스 밴드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작 은 거인과 마그마 외에 주목할 만한 음악적 성과를 남긴 그룹은 결코 많지 않은데,
그중 활주로와 블랙 테트라도 있다. 바로 이 두 캠퍼스 밴드의 핵심 멤버들 이 모여 만든 그룹이 송골매.
배철수를 중심으로 팀이 짜여져 일단 두 장의 음반을 냈고,
3집부터 구창모가 싱어로 가담해 산울림을 잇는 당대 최고의 인기그룹으로써 한국 락의 명맥을 이었다.
산울림이 비틀즈에 비교된다면 송골매는 이글스에 비유될 수 있을까?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이름까지 비슷하다.)
구창모 중심의 인기 그룹이었던 송골매를 염두 에 둔다면 그렇다.
그러나 송골매의 역사는 크게 세 시기쯤으로는 나누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먼저 구창모 이전의 송골매로 1, 2집이 거기에 해당된다.
구창모가 가담한 3집과 4집이 2기, 그리고 구창모가 나가고
다시 배철수를 중심으로 재구성된 5집부터 9집까지가 3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1기와 3기, 특히 1기의 송골매이다.
여기에서의 중추는 물론 배철수이며,
이 대목에서 송골매는 이글스가 아니라
저 60년대의 C.C.R.과 80년대의 다이어 스트레이츠에 비유되게 된다면 과찬일까?
그러나 어쩌다 마주친 그대와 모두 다 사랑하리를 먼저 떠올리시는 분들은
조금 더 주의를 집중하여 3기의 하늘 나라 우리 님과 새가 되어 날으리와 모여라를,
다시 1기와 2기에 걸친 빗물, 바람, 한줄기 빛을,
그리고 보다 거슬러 올라가서 세상 만사, 탈춤,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물론 몇몇 곡 은 송골매 이전의 것이지만) 등을 떠올려 보시기 바란다.
특히 그들의 초기 사운드는 바로 건강하고 진솔한 젊음의 사운드,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로선 상당히 탄탄했던 배철수와 김정선의 트윈 기타 시스템,
그리고 키보드와 베이스와 드럼의 단순하지만
락의 핵심에 바로 다가서는 연주와 특히 배철수의 구수하고 걸걸한 목소리는
15년쯤이 지난 지금에도 솔깃하다.
특히 1기의 몇몇 곡에서 추구했고, 다시 3기에서 이어졌던
"한국적인 가사와 가락"에의 추구는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하늘 나라 우리 님과 새가 되어 날으리를 비롯, 마라도 등의 가사와 선율은
외국의 그 어느 대그룹들로부터도 들어보지 못한 것이며,
아직까지도 딱히 이들을 대체할 만한 이름을 찾기 어렵다.
물론 그들에게서 암울했던 당시 시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그건 산울림도 사랑과 평화도, 작은 거인도, 나아가 조동진과 정태춘도 마찬가지였음을 감안하자.
산울림이 경쾌하고 다양한 시도들을 통해,
사랑과 평화가 경륜으로 무장한 탄탄한 사운드를 통해
각자 주체할 수 없는 젊음과 락의 열기를 배출했다면
송골매는 소박하고 진솔한 사운드로 그렇게 해나갔던 것이다.
사랑과 평화가 공중분해되고 산울림이 잦아드는 동안, 송골매도 어쩔 수는 없었다.
구창모의 영입과 인기 팝그룹으로의 지속적인 경도는
당시의 여러 비극 중의 또하나의 비극이 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구창모의 탈퇴 이후 그들은 시련을 감내하고 다시금 새로운 활동 을 펼쳐나갔으며,
1기의 소박하고 직선적인 느낌이 다소 수그러드는 대신 연륜과 깊이를 첨가함으로써
다시금 좋은 음악들을 창작해 내었다. 그러한 작업이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한물간 스타" 정도로 취급되는데 그쳤던 당시의 열악한 문화지형이 아쉬울 따름이다.
구창모는 탈퇴 후 희나리 등 몇 곡을 "히트"시켰다. 김수철의 못다 핀 꽃 한송이,
조하문의 이 밤을 다시 한번과 더불어 한때 잠깐 대학가요제 출신의 인기가수들의 퍼레이드가 이어졌다.
특히 그룹 싱어 출신의 솔로 가수 붐이란 것은 80년대 중후반의 멤버들이
90년대 초반에 그대로 반복한 것이기도 하였는 바,
외국의 경우 60-70년대의 명장들이 80년대에 팝스타로 "활약"한 것과 정확히 같은 상황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무슨 거창한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철저히 상업화된 대중 음악 판도에의 굴종, 내지는 타락이랄 밖에.
다만 김수철이 그러한 자신을 극력 부정하며 국악(그 자신의 말로는 "우리 소리")과
양악의 접목을 통하여 불멸의 성과를 이루었던 데 반해,
나머지 대개의 음악인들은 퇴물 가수로들 전락해 가고 말았다.
아니, 그건 그나마도 낫다. 90년대초에 반짝했던 숱한 싱어들은 전락이란 말이 붙을 겨를도 없었으니까.
차라리 미련 없이 DJ 자리로 옮겨 최대한 괜찮은 음악들을 틀려고 노력하는
배철수의 선택이 백배 현명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그들의 옛명곡들을 다시 한번 유심히 들어보실 것을 권한다.
2.송골매?
아래 글(앞페이지의 글)을 읽고 두 가지 이유에서 몇 마디 거들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는 송골매를 비롯한 70 년대 80 년대 초 그룹 사운드 얘기라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몇몇 밴드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기 때문이다.
날 잘 아는 사람은 내 취향을 알겠지만, 나는 항상 지구상의 모든 음악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유독 70 년대 말, 80 년대 초까지의 국내 그룹 사운드 음악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다.
내가 왜 그때를 좋아하냐며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의 형이 당시 고등학교, 대학교를 보낸 탓에
집에서 허구헌날 그런 음악만 들었던 바, 당시 국민학생에서 중학생까지의 유년기를 보낸 나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고문이자 세뇌 교육이었으며, 그 여파로 인간이 이모양 이꼴로 망가져버린 것이다.
아무튼, 송골매의 이야기를 몇 마디 해보겠다.
우선 아랫분(앞페이지 글을 쓰신분)이 올린 글에서 주관적인 관점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이라고 판단되는 몇 부분에 대해서는 수정이 필요할 것 같다.
아마도 글 올린 분도 기억력에 의존하여 쓴 것 같은데,
그로 인하여 착오가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특별히 어떤 부분을 지적할 것은 아니고 멤버라든가 뭐 기타 등등에 관한 것이니
이 글을 읽고 비교해보면 될 것이다.
송골매는 잘 아시겠지만 항공대의 활주로와 홍익대의 블랙 테트라가 만나서 이루어진 그룹 이다.
그 배경에 대한 얘기를 잠깐하겠다.
활주로나 블랙 테트라 모두 78 년에 대학가의 각종 행사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특히 TBC 해변가요제 에서 두 팀 모두 수상한 것이 계기가 되어 양 팀의 멤버가 친해졌다고 하는데
확인한 적 없으니 믿거나 말거나고,
기타 등등 각종 축제에서 인기를 모으고 다녔다.
아마도 78 년은 이 두 그룹의 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종의 라이벌 관계도 되었을 것이고 그것이 선의의 경쟁도 되었을 것이다.
어쨋거나 저쨋거나 그렇게 잘 나가던 두 팀의 경쟁은 78 년 대학가요제에서 은상을 수상한 활주로가
판정승한 것으로 끝난다.
이 시기에 두 팀은 레코드 취입도 나란히 하는데,
활주로가 한 장, 블랙 테트라가 2 장을 취입하였다.
( 후에 블랙 테트라는 다음 기수가 한 장을 더 취입하였다. )
서클활동을 하는 학교 그룹은 대부분 기수라고 해서 일년 정도의 활동을 하기 때문에,
78 년이 끝나버리자 두 팀은 사실 상 해체 해야될 운명이 되었다.
이 때, 활주로는 팀을 정비하여 송골매라고 이름붙이고,
블랙 테트라는 사막 오장이라는 팀으로 개편된다.
잠시, 이 때의 양 팀 멤버를 살펴보자. ( 엔트리 넘버 !! )
우선 활주로는 78 년 활동 멤버가 배철수, 김종태, 지덕엽, 박홍일 4 명으로 구성되었었다.
( 이는 78 년 음반을 기준으로 하는 말임 )
송골매로 팀이 개편되면서, 두 명이 교체되는데 김종태, 박홍인 대신 이봉환, 이응수가 들어온다.
각 파트를 살펴보면, 이응수 Bass, 지덕엽 Guitar, 이봉환 Organ
그리고 우리의 호프 배철수는 Drum 과 Vocal을 맡았다.
이들이 낸 송골매 1 집은 본인의 애청 음반 중의 하나인데,
특히 산꼭대기 올라가, 세상 만사, 길지 않은 시간이었네, 지금 내마음,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가 담겨있는
A 면만 주로 듣는다.
( 말이 나온 김에 활주로 앨범도 살펴 보자.
활주로 앨범에서는 처음부터 사랑했네, 탈춤 - 대학가요제 은상 수상곡 -,
이빠진 동그라미 등이 좋아하는 곡이다. 특히 이빠진 동그라미를 무지 좋아한다. )
굳이 송골매의 기수를 나눈다면 크게 4 번의 멤버 교체가 있었기 때문에 4기로 나누고
1기를 여기까지로 잡으면 될 것 같다.
블랙 테트라의 멤버를 살펴보면 구창모(V), 김정선(G), 김국현(B), 권오승(O), 오승동(D)으로 구성되었었고
(그들의 첫번째 앨범에 근거),
권오승이 빠지고 박현우(G), 이계형(O)이 활동한 적 (그들의 두번째 앨범에 근거) 도 있는 것 같다.
아무튼 이들도 78 년이 지나면서 해체되는데,
구창모는 혼자 솔로하겠다고 절에 들어가 버리고
(믿거나 말거나) 나머지 멤버가 사막 오장이라는 팀을 만들었다.
사막 오장도 판을 한 장 내었는데 아쉽게도 판에 멤버가 안 써 있어서 누가 누군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얼굴 생긴 것과 작사 작곡으로 때려맞춰 보니 김정선, 오승동, 김국현, 권오승인 것 같다.
어쨋거나 활주로와 블랙 테트라는 해체되고 각각 송골매와 사막오장으로 팀이 바뀐다.
두 팀 모두 79 년도에 판을 내었는데,
왜 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 안 된 것 같다.
게다가 송골매의 팀이 와해되는 분위기였고, 그래서 배철수와 이봉환은 궁여지책으로
블랙 테트라의 멤버들을 찾아나섰다.
그래서 사막 오장의 김정선과 오승동이 가담되었고, 수소문 끝에 입산수도하던 구창모를 데려왔다.
(믿거나 말거나)
그리고 김상복이라는 베이스 주자가 들어오는데,
본인의 기억에는 아쉽게도 김상복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전혀 자료가 남아있지 못하다.
흑흑. 다만 뚱뚱한 몸에 별다른 재스쳐도 없이 베이스만 치던 모습이 기억난다.
이렇게 만들어 진게 송골매 2 기가 된다. 그리고 2 년여~~~
이들이 실력을 갈고 닦은 후 낸 음반이 전설 속에 전해 내려오고 있는 송골매 2 집이다.
이 음반은 산울림에 필적할 만한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음반 이자,
어느 곡 하나 빼놓을 것 없는 그야말로 명곡으로 수놓아져 있는 명반이다.
(많이 듣던 전모씨의 말투지? )
스매시 히트를 기록한 이 음반에는 불후의 명곡 어쩌다 마주친 그대, 모두 다 사랑하리 등이 수록되어있고,
과거에 불렀던 우리들, 세상만사, 내 마음의 꽃/길지않는 시간이었네 등이 리메이크 되어있다.
어쨋거나 저쨋거나, 이 음반은 무지 잘 나갔고,
이들은 하루 아침은 아니지만 암튼 가요계의 스타가 되었으며,
무교동 수많은 나이트 클럽의 황태자가 되었다.
이들은 갈채 등과 같은 대학생 소재의 영화에도 출연하고,
CF 에도 출연하고, 아무튼 무지 무지 잘 나가게 된다.
그리고 처음 본 순간, 빗물, 아가에게, 한줄기 빛, 승무 등등의 인기곡을 낸 3 집과 ,
난 정말 모르겠네 등이 수록된 4 집까지 이들의 인기 행진은 끝을 모른다.
그러나, 83 년이 넘어가면서 국가적 정책으로 인하여
수많은 무교동의 나이트 클럽들이 하나 씩 망하거나 업종 변환이 이루어지는데,
우리의 그룹 사운드들도 타격을 맞지 않을 수 없었다.
( 이에 대한 긴 얘기는 다음에 하겠다. )
그런 분위기 속에 송골매의 활동도 위축을 당하는데,
결국 구창모는 저물어가는 그룹 사운드 황금기를 뒤로 한 채 솔로 선언을 한다. (짠짜자잔~~~)
남은 멤버들은 하늘 나라 우리님 등이 담긴 5 집을 내고 송골매는 살아있다고 자신하지만,
6 집의 실패로 인하여 팀은 또 다시 해체 직전까지 간다.
결국 오승동, 김상복이 송골매를 탈퇴하여 "신"이라는 그룹을 조직하고,
송골매는 위대한 탄생 출신의 이건태와, 부활 출신의 이태윤, 그리고 이종욱 등을 끌어들인다.
( 이 때에 대한 사건 전말에 대해 본인의 다이어리 속에 메모를 해놨으나 흑흑 분실하여 찾질 못했다.
누구 내 다이어리 좀 찾아줘요~~ 꺼이꺼이 )
그리고 낸 7 집에서는 새가 되어 날으리 등이 인기를 누렸고 8 집에서는 고추 잠자리,
외로운 들꽃 등이 히트를 했다.
그럼 뭐하나, 여전히 밥을 굶는데...
그러던 송골매에게 부활의 기회가 찾아왔으니, "자니윤 쑈"였다.
송골매는 자니 윤 쑈의 백 밴드로 출연하여,
배철수가 가끔씩 썰렁한 말로 잘 웃기는 바람에 주목받기 시작한다.
그걸 계기로 배철수의 음악 캠프 진행을 맡게되고
그 즈음 해서 낸 음반이 이들의 마지막 히트곡 "모여라"가 담긴 9 집이다.
9 집이 잘 떠 주는 바람에 12 년이라는 그룹 역사의 마지막을 멋있게 장식한 듯 보였다.
배철수는 노래 부르는 거 보다 DJ 에 재미를 붙이고, 금상첨화로 이쁜 여자 PD 분과 결혼에 꼴인하게 된다.
결혼 생활이 사람을 어떻게 바뀌는가 확인하고 싶은 사람은 배철수가 자니윤 쑈에 출연할 때의 모습과
최근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알 것이다. 정말 장족의 발전을 하고 있다.
어쨋거나 저쨋거나 시간은 흐르고 바람난 배철수 덕분에 송골매는 해체된다.
이태윤은 세션 활동을 하다가 위대한 탄생에 들어가게 되고,
이봉환은 요즘 무슨 팀을 만들어서 TV쇼 백밴드를 하고 있으며,
이종욱은 사랑과 평화에 잠시 머물렀었고,
김정선을 비롯한 나머지 멤버는 예전의 송골매 멤버를 규합하여
신 송골매를 조직했다가 대마초 사건으로 작년인가 TV 뉴스에 잠바로 얼굴 가린 채 게스트 출연한 적 있다.
앞서 송골매 활동을 위의 글을 다 읽었으면 알겠지만,
활주로 멤버가 주축이 된 1 기 ( 1집 ),
구창모, 김정선 등과 함께 만들었던 2 기 ( 2 - 4 집 ),
구창모가 나간 후의 3 기 (5 - 6 집 ), 멤버 교체 후의 4 기 ( 7 - 9 집 )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사운드를 잠깐 살펴보면, 1 기 때에는 활주로 때의 사운드가 여전하게 남아있다.
무엇보다 이는 지덕엽의 영향이 큰 듯 한데, 그가 타 그룹의 기타에 비해서 매우 개성있었다고 생각된다.
2 기의 활동에서는 전 멤버의 팀웍이 매우 뛰어났던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구창모의 비중이 높게 보이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보컬리스트인 것 같다.
1 기에서 드럼을 쳤던 배철수가 2 기 때부터는 세컨 기타를 치는데
사실 TV 쇼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기억으로는 그가 기타를 왜 들어야 했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뽀대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구창모가 탈퇴한 3 기에서의 전체 사운드는 2 기 때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지만,
배철수가 보컬을 맡았다는 특징이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때의 히트곡 "하늘 나라 우리님" 은 빼놓을 수 없는 명곡이다.
요즘의 스타일로 편곡해도 기가 막힐 것이라 생각되는 곡이다.
4 기에서는 전체 사운드가 화려해졌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리듬 파트의 보강이 눈에 띄게 팀 사운드를 바꾸어놓았는데
매우 안정적이면서도 개성있고 화려한 사운드를 보인다.
아쉽게도 앨범 수록곡들이 좋지 않아서 큰 히트를 하지 못했지만
사운드에서는 가장 안정되어있다. 한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난 김정선의 기타를 매우 싫어했다는 점이다.
송골매 초기나 끝까지 그다지 달라진 것도 없고 그렇다고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만 그만하게 했던 것 같다.
반대로 송골매의 초기 사운드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사람으로
지덕엽씨와 함께 이응수, 나원주씨를 손꼽을 수 있다.
활주로 출신인 이들의 콤비 로 만든 곡들은 우리 고유의 것에 소재를 두고 있는 것이 많다.
앞서 올라온 글에서 언급되었던 곡들 대부분이 이들의 곡이다.
현재 지덕엽씨는 MBC PD 로 근무한다는 얘기들었고,
이응수씨는 지구 레코드에 근무하시는 걸로 안다.
어쩌다가 글이 횡설수설했는데, 70 년대 말, 80 년대 초까지 인기 그룹이었던 송골매와,
이들을 비롯한 수많은 그룹들이 망해갔던 그 비하인드 스토리는 다음 기회에 해야겠다.
그리고 7-80 년대의 그룹 출신 보컬리스트가 솔로 가수로 독립하게 된 배경과
8-90 년대의 그것은 사실 배경이 다르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왜냐면 7-80 년대의 밴드와 지금의 밴드들의 이상향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것은 7-80년대에 캠퍼스 그룹이 급부상한 배경과 8-90 년대의 밴드들이 성공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배경이 다른 것과 유사하다.
이에 대한 나의 생각은 한참 길어질 것 같아서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겠다.
그점을 읽는 회원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 긴 글 읽어주신 것에 감사하며,
편의상 경어를 생략한 것도 이해해주시길.
3. 처음부터 사랑했네
활주로의 음반은 이것이 유일무이하다.
81년에 발매된 것으로 돼있고, 지금도 가끔 황학동에서 LP로 찾을 수 있지만
상태가 너무 안좋은 경우가 대부분인데,
마침 97년 10월에 지구 레코드에서 CD로 리마스터링까지 해서 재발매했다.
(지구 레코드는 그래도 불량심은 아니다. 이런 식의 재발매 음반은 싸다. 나는 신나라에서 7200원 주고 샀다.)
이전에도 글을 올린 적이 있지만, 나는 배철수의 노래가 나오는 송골매를 아주 좋아한다.
따지고 보면, 활주로 1장과 송골매 9장, 총 10장에 걸쳐 구창모의 보컬이 들은 음반은 2-4집까지
3장밖에 안되지만, 배철수는 그만한 위치에 비해 턱없이 평가를 덜 받는 경우같다.
아무래도 멜러디컬한 것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취향에 덜 맞기 때문이어서일까...
(그러나 서정적이고 멜러디컬한 것을 좋아하는 한국의 전통은 결코 오래된 것이 아니라는 점은
한번 짚을 필요가 있다. 국악이 어디가 어떻게 멜러디컬하단 말인가.
더구나 옛날의 국악--국악에도 시대에 따른 변화가 엄연히 있다--일수록 덜 서정적이라는 사실.)
그러나 락의 핵심에 스트레이트하게 대쉬하는 면에선, 산울림보다도 나은 게 활주로-송골매다.
물론 배철수만의 역할로 설명할 순 없다. 대개의 좋은 곡들은 그의 작품이 아니고,
이응수(초기 송골매의 베이스) 작사가 대부분이며,
작곡은 라원주(송골매 멤버들의 오랜 친구? 하여튼 멤버는 아님)나 이응수,
지덕엽(초기 송골매의 기타) 등이 쓴 것이다.
이들의 작사 작곡 능력도 길이길이 기억해야 하리라.
언제나 텁텁하고 (정말로) 한국적인 배철수의 목소리,
80년대 초반, 그러니까 70년대 대학가의 낭만이 다 가시지 않던 시절의
그 고색창연한 기타와 건반 사운드,
국악적인 요소를 전혀 어색하지 않게 적재적소에 배치해넣은 가사와 곡들.
특히 국악 퓨전적인 면에선 산울림은 이들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송골매의 1-3집, 5집 등도 좋고 애청하는 음반이지만,
새로 뒤늦게 구입한 활주로의 음반도 괜찮다.
사실을 말하자면, 송골매의 음반보다는 좀 떨어진다.
좋은 곡이 "반밖에 안된다." 이 음반에는 그 유명한 탈춤 외에,
우리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또하나의 쾌작 이빠진 동그라미,
그들 사운드의 전형을 보여주는 처음부터 사랑했네,
그리고 10분이 넘는 대작 탈(이 곡은 송골매 8집인가에서 리메이크되었다) 등이 수록되어 있다.
어디까지나 취향이겠지만, 어지간한 모던 락 계열 음반들보다 나는 이쪽이 훨씬 낫다.
아니, 취향을 배제하고 말해보자면, 모던 락 계열 음반들은 12000-17000원은 할 것이다.
두 배 값이다. 그런 음반을 한 장만 덜 사고 활주로와 송골매 초기 음반(1-3집)을
딱 두 장 구해서 들어보기 바란다. 실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1집에는 산꼭대기 올라가, 세상만사,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네 등이 있고, 2집에는 바람, 어쩌다 마주친 그대,
모두 다 사랑하리 등, 3집에는 한줄기 빛, 빗물, 처음 본 순간, 아가에게, 바람(리메이크) 등이 들어있다.
내 경우는 통틀어 송골매 1집을 가장 첫손에 꼽겠다.
(구창모 목소리는 마음에 안들거든.)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전반은 캠퍼스 밴드의 전성시대였다.
졸업생과 재학생이 섞인 산울림이 시장 안에서 하나의 이정표를 세우는 동안
재기 넘치는 기타리스트 김수철이 이끈 작은 거인은 두 장의 앨범을 내 놓으며
진지한 수용자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수도 없이 난립한 특권적인 등용문을 통해 대학의 아마튜어 음악 청년들은
기약없는 무명 생활의 통과제의를 생략할 수 있는 특혜를 부여받았다.
그대로 그렇게의 피버스, 그때 그 사람의 심수봉과 돌고 돌아 가는 길의 노사연뿐 만 아니라
나중에 방송진행자로 이름을 드높이게 되는 왕영은과 주병진도 이 끝없는 명단에 포함된다.
특히 왕영은과 함께 해변가요제에서 "여름"으로 대상을 받았던 "징검다리"는
"뭉게구름", "님에게" 등의 아름다운 노래로 오랫동안 사랑을 받았었다.
물론 1회 대학가요제 그랑프리 팀인 서울 농대의 샌드페블즈나
TBC 젊은이의 가요제의 출품곡 연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린 연세대 밴드 라이너스 같이
아마튜어 교내 밴드로서의 성격을 버리지 않은 팀도 없지 않았지만
이 가요제들을 통해 스타덤으로 쾌속 진군하려는 야심은
곧바로 캠퍼스의 노래 문화를 상업적으로 유도하게 했다.
그러나 가장 선연한 주목을 모은 두 팀은 바로 배철수와 구창모가 각각 보컬을 맡은 항공대의
밴드 런 웨이(RUN WAY)와 홍익대의 블랙 테트라(BLACK TETRA)였다.
이들은 1978년 동양방송이 주최한 제1회 해변가요제에서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와
구름과 나를 출품하여 단번에 스타덤에 오른다.
이 두 팀을 주축으로 6인조로 재편성된 송골매는
1982년 어쩌다 마주친 그대(구창 모 작곡)와
모두 다 사랑하리(김수철 작곡), 빗물을 터뜨리면서
산울림 이후 주류 시장에서 성공한 첫번째 밴드가 된다.
이들의 연승 행진은 무서웠다. 세련된 서구 창법의 구창모와
질박하고 무뚝뚝한 스타일의 배철수가 벌인 이인삼각의 이미지는
바로 이 밴드의 원동력이었고, 또한 분규의 먼 원인이기도 했다.
결국 네번째 앨범을 발표한 뒤 구창모는 홀로 떨어져 나가 희나리를 성공시켰고,
나머지 다섯명은 "구창모가 없는" 송골매의 운명을 떠맡았다.
하지만 통산 다섯번째가 되는 1985년의 앨범을 통해 송골매는
하나의 훌륭한 한국의 록 밴드임을 스스로 증명하면서 주위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그 선제탄 은 하늘나라 우리님.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의 작곡자로,
록과 우리의 전통적인 서정을 결합하는데 특출한 재능을 조용히 빛내 온 라원주가 제공한 이 노래는
앨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마라도와 함께 송골매의 전화위복을 또렷하게 주장한다.
화려한 도약과 수식을 배제한 낭송조의 선율 진행은 이들이 소녀 팬들의 아우성으로부터 벗어나
이 땅에서 록 음악을, 혹은 밴드를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되묻는 성찰의 작업이나 다름 없었다.
6집의 어부사시가와 7집의 처용은 이와 같은 맥락의 연장선이다.
구창모가 탈퇴하면서 시장에서의 송골매의 상업성이 퇴조한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이들은 1990년까지 아홉장의 정규 앨범을 끈질기게 발표함으로써
명실 상부한 80년대의 밴드로 이름을 새겼다. 그것은 바로 "스타"가 아닌 "밴드"의 승리였다.
하지만 급속하게 진행된 대학음악문화의 상업화는 "광주"를 경험하며
"반미"의 구호를 가슴 속에 새겨 넣은 80년대 대학 세대로 하여금
록과 록 밴드를 "타락한 제국주의 문화" 혹은 "서구 추종의 소비 문화"로 인식하게 하는 역기능을 낳았다.
통기타를 기반으로 하는 대학의 노래서클(서울대의 "메아리"가 대표적이다)이 현실의 모순과 동행하며
당국의 탄압과 대학 동료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동시에 받았다면
캠퍼스의 록 밴드는 "어용"의 낙인을 받으며 "자신의 땅에서 유배당한 자"의 처지가 되고 만다.
서구에서는 영원한 동지의 관계로 발전해 온 록과 포크가
이 땅에서는 이상한 대립 아닌 대립의 위상으로 설정되는 아이러니가 연출된 셈이다.
첫댓글 오빠한테 컴플렉스 있는 사람이 썼나봐요.
저두 그렇게 생각해요...오빠 목소리가 어때서...좋기만 하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