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스더 1:1-12
찬송가 545장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에스더서는 유대인들이 부림절에 읽는 책으로, 부림절의 기원을 설명해 줍니다. '부림(פֻּרִ֨ים)'이라는 이름은 '제비'를 뜻하는 히브리어 '부르(פּוּר)'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에스더서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단어입니다. 하만이 유대인들을 몰살시키기 위해 시행할 달을 선정하기 위해 제비(פּוּר)를 뽑았는데, 이 때 사용된 단어가 '부르'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그 계획이 실패하고 유대인은 구원받았습니다. 이 반전의 사건을 기념하여 모르드개가 부림절을 제정하고, 이를 지키게 했습니다.
부림절은 아달월 14-15일 양일간 지켜졌습니다. 오늘날에는 하만의 간계에서 구원된 13일에는 금식으로 준비하고 14일 저녁 별빛이 보이기 시작하는 때부터 회당에 모여 15일까지 집회를 갖고 에스더서 전체를 낭독한다고 합니다.
에스더서에는 독특한 점이 있는데,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주라는 언급은 일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율법, 언약, 제사에 관한 용어도 없습니다. 족장들과 연관된 이야기도 없습니다. 반면 이방 왕 아하수에로는 167절 중 190번이나 언급됩니다. 이런 점은 에스더서에서 신학을 논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에스더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그 안에 신학적 메시지가 가득하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비록 하나님의 이름은 명시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에스더서에는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예를 들어 모르드개가 왕의 암살 음모를 알게 된 것, 왕이 잠을 이루지 못해 모르드개의 공로를 알게 된 것, 하만이 모르드개를 처형하려고 준비한 교수대에 자신이 달리게 된 것 등입니다. 이런 사건들이 서로 연결되어 반전이 일어나고 결국 유대 민족은 죽음의 위기에서 구원받습니다. 겉으로는 우연처럼 보이지만,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에스더서의 핵심 구절인 에스더 4:14A에서 모르드개는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명확한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동과 무관하게 그분의 계획을 이루실 것임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에스더서는 겉으로는 하나님의 부재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이 일상 곳곳에 담겨 있는 신학적 메시지가 풍성한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일하고 계십니다. 기적과 표적이나 예언 없이도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고 구원하십니다.
그 이야기가 잔치라는 주제로 펼쳐집니다. 에스더서는 잔치로 시작해서 잔치로 끝납니다. 왕 아하수에로가 벌이는 두 번의 잔치(1:3; 1:5), 왕후 와스디의 잔치(1:9), 왕후 에스더의 등극 잔치(2:18), 하만과 왕의 잔치(3:15), 모르드개의 승진 잔치(8:17), 에스더의 두 번의 잔치(5:4-8; 7:1-9), 유대인의 두번의 부림절 잔치(9:17, 19; 9:18) 총 10번의 잔치가 나옵니다. 이는 앞으로 이야기의 흐름과 권력의 이동을 보여주는 겁니다. 처음은 이방인의 잔치로 시작되지만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는 잔치로 마무리 됩니다.
오늘 말씀은 앞 3번의 잔치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는 에스더가 등장하게 된 배경이 되는데, 와스디의 폐위 사건은 단순한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에스더가 왕후가 되어 유대인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사건이라는 걸 말해줍니다.
아하수에로 왕 때에 있었던 일(1)
(1) 이 일은 아하수에로 왕 때에 있었던 일이니 아하수에로는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백이십칠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라
당시 페르시아 제국을 다스리던 왕은 아하수에로였습니다. 그는 역사 속에서 크세르크세스(Xerxes, 헬라식 이름, 485-465년)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인도에서 구스까지, 오늘날 파키스탄과 북부 수단에 해당하는 광대한 127개의 지방을 다스리는 강력한 왕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이 허락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많은 유대인들은 여전히 페르시아 제국 내에 머물며 아하수에로의 통치 아래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매우 고단하고 불안정했습니다. 유대 민족은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 안에서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작은 존재였으며, 그들의 생존은 늘 위태로웠습니다. 제국의 법과 통치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유대인들은 조심스럽게 생활했지만, 작은 실수나 오해에도 가차 없는 처벌이 따랐습니다. 이들은 이러한 불합리한 상황 속에서도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힘조차 없었습니다.
에스더서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이름은 명시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그분의 섭리와 유대 민족에 대한 보호는 사건의 전개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1절에서 사용된 "이 일이 일어났다"는 히브리어 표현은 이야기를 시작할 때 흔히 쓰는 문구 중 하나입니다.
첫번째 잔치(2-4)
(2-4) 당시에 아하수에로 왕이 수산 궁에서 즉위하고 왕위에 있은 지 제삼년에 그의 모든 지방관과 신하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니 바사와 메대의 장수와 각 지방의 귀족과 지방관들이 다 왕 앞에 있는지라 왕이 여러 날 곧 백팔십 일 동안에 그의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내니라
아하수에로 왕은 수산 궁에서 왕위에 올랐습니다. 수산 궁은 페르시아 왕들이 겨울을 보내는 곳으로, 넓이가 약 4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도시였습니다. 그곳은 페르시아 궁전 중에서도 가장 화려하고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아하수에로 왕의 성공과 영광을 상징하는 장소였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통치 3년 차에 그곳에서 페르시아(바사)와 메대의 장군들과 귀족, 각 지방관을 초대해 180일 동안 잔치를 열었습니다. 이 잔치는 단순한 축제가 아니라, 그리스를 침공하기 위한 군사 전략을 논의하고 준비하는 회의였습니다. 아하수에로가 왕위에 오를 당시 페르시아는 서쪽 국경에서 그리스와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다리오 왕은 이를 점령하려했으나 패배했습니다. 그 그리스를 아하수에로 왕이 침공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는 제국의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고 제국의 강대함을 확인시켜주며, 그들의 충성과 지지를 얻으려 했습니다.
두번째 잔치(5-8)
(5-8) 이 날이 지나매 왕이 또 도성 수산에 있는 귀천간의 백성을 위하여 왕궁 후원 뜰에서 칠 일 동안 잔치를 베풀새 백색, 녹색, 청색 휘장을 자색 가는 베 줄로 대리석 기둥 은고리에 매고 금과 은으로 만든 걸상을 화반석, 백석, 운모석, 흑석을 깐 땅에 진설하고 금 잔으로 마시게 하니 잔의 모양이 각기 다르고 왕이 풍부하였으므로 어주가 한이 없으며 마시는 것도 법도가 있어 사람으로 억지로 하지 않게 하니 이는 왕이 모든 궁내 관리에게 명령하여 각 사람이 마음대로 하게 함이더라
180일의 잔치가 끝나자, 아하수에로 왕은 수산 궁에 있는 백성을 위해서도 7일 동안 잔치를 열었습니다. 이는 귀족들만을 위한 것이 아닌, 신분에 상관없이 수산 궁의 모든 주민들을 초대한 축제였습니다.
잔치가 이루어진 곳은 왕궁 후원 뜰이었습니다. 정원에는 백색, 녹색, 청색 휘장을 자색 가는 베 줄로 대리석 기둥의 은 고리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이 휘장들은 따가운 햇살을 막기 위한 장식이었는데, 최고급 염료로 물들여져 잔치의 분위기를 고조 시켰을 겁니다. 또한 그곳에는 순금과 은으로 만든 소파도 있었습니다. 바닥은 화반석, 백석, 운모석, 흑석 등 값비싼 돌로 이루어진 모자이크로 포장되어 있었습니다. 모두 페르시아의 부와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한 장식이었습니다.
왕은 금잔에 음료를 제공했는데, 이 잔들은 페르시아 행사 때 사용되는 특별한 잔으로, 각각 다른 디자인으로 제작된 예술 작품이었습니다. 왕궁에 보관된 어주는 말할 것도 없이 최고급 술이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술을 마시는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각자 원하는 대로 즐기고 마실 수 있게 했습니다. 이러한 풍부한 음식과 음료의 제공, 배려는 아하수에로 왕의 관대함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세번째 잔치(9)
(9) 왕후 와스디도 아하수에로 왕궁에서 여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니라
아하수에로 왕의 아내였던 와스디는 왕궁의 여인들을 위해 별도의 파티를 열었습니다. 당시 페르시아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함께 잔치를 즐기기도 했지만, 여인들은 남성 중심의 술자리에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남성 음주 파티에는 눈을 즐겁게 하는 여성 댄서들이 참여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와스디는 여성들만을 위한 별도의 잔치를 주최했던 것 같습니다.
갈등(10-12)
(10-12) 제칠일에 왕이 주흥이 일어나서 어전 내시 므후만과 비스다와 하르보나와 빅다와 아박다와 세달과 가르가스 일곱 사람을 명령하여 왕후 와스디를 청하여 왕후의 관을 정제하고 왕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그의 아리따움을 뭇 백성과 지방관들에게 보이게 하라 하니 이는 왕후의 용모가 보기에 좋음이라 그러나 왕후 와스디는 내시가 전하는 왕명을 따르기를 싫어하니 왕이 진노하여 마음속이 불 붙는 듯하더라
잔치의 절정인 제칠일에 술에 취한 아하수에로 왕은 왕후 와스디를 불러 그녀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자 했습니다. 일곱 명의 내시를 보내 와스디를 데려오게 했습니다. 일부 해석에 따르면, 왕은 와스디가 왕관만 쓰고 나체로 나타나기를 요구했다고 합니다. 유대 전통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등장합니다. 또 다른 해석은 와스디가 왕이 자신을 소유물로 여기는 것을 거부한 것으로 봅니다.
이유야 어쨋든 와스디는 왕의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이에 왕은 크게 분노했습니다. 이는 왕에게 모욕이었고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전쟁터에서 부하들을 통제해야 하는 상황에서 궁전 안에서조차 자신의 명령이 통하지 않는다니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불붙는 듯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일곱 귀족들의 조언을 구해, 왕후 와스디를 폐위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므무간의 제안을 따라 모든 여성이 남편을 존중해야 한다는 법령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왕이 자신의 공적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왕은 가정조차 통제할 수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 됩니다. 가장 높은 권력을 가진 자가, 세계를 재패하는 이방 왕이 자신의 아내를 파티에 나오게 하지도 못하는 무력함을 보였습니다.
와스디의 폐위는 결과적으로 에스더가 왕후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어쩌다보니 이어진 것이 아닙니다. 모르드개의 고백(4:14)처럼 하나님은 유대인의 놓임과 구원을 위해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은 세상 통치자들의 행동조차 자신의 계획을 이루는 데 사용하신 겁니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결국 이름 없는 유대 소녀인 에스더가 바사 제국의 왕후가 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이렇게 에스더서는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믿음이 있어도 우리는 매일 불확실성을 마주하게 됩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옳은 선택인지, 지금이 하나님의 때인지, 직장을 옮겨도 되는지 알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의 음성이나 계시를 들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확하게 말씀해주시면 ‘아멘’ 하고 따라가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답을 듣지 못할 때 우리는 답답함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실까?" "이 상황을 모르고 계신 걸까?" 이러한 의문들이 마음을 채울 때,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고, 마치 숨어 계신 듯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때일수록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세상 속에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구름에 가려진 태양이 여전히 빛나고 있듯이, 하나님도 우리 삶 속에서 숨은 듯 일하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세상이 너무 커 보이고, 강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복잡한 상황과 그 안에 만연한 악이 때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습니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충성을 요구하고, 마치 우리가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세상의 요구에 굴복하고 물들게 됩니다. 이젠 부와 권력,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 잘 사는 길이라 말하는 세상의 논리를 부정하기란 쉽지 않고, 그 유혹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마치 세상이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주관자는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분의 섭리에 따라 모든 상황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진정한 주권은 하나님께 있으며, 그분은 모든 것을 미리 예비하시고, 결국 하나님의 뜻과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의 시야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섭리를 신뢰할 때, 우리는 좌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아니더라도, 내 때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일을 기어코 이루실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삶의 아이러니와 우연처럼 보이는 일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발견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의 삶 속에 개입하고 계십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는 영적으로 어두워 갈 길을 찾지 못하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주께서 저희 인생을 붙들고 있음과 이끌어 가심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구원자 되신 주님을 더욱 의지할 수 있도하게 도와 주옵소서. 우연과 아이러니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고, 감사와 찬양으로 살아가게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언급이 없지만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드러납니다. 교우님께서는 인생 속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응답이 없을 때, 어떻게 그 시간을 이겨내고 계십니까?
2.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들이 에스더에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룹니다. 교우님의 삶 속에 우연처럼 보였으나 나중에 하나님의 계획인 것을 깨닫게 된 경험이 있습니까? 만약 있다면, 이를 통해 하나님의 어떠함을 깨달았는지 나눠주세요.
3. 아하수에로 왕은 자신의 강력한 힘과 부와 권력이 과시합니다. 교우님의 삶 속에서 세상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이 충돌할 때 어떻게 하나님께 바라볼 수 있을지 서술해 보시기 바랍니다.
4. 아하수에로 왕의 군림 속에도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어떤 일을 이루어 가시고 있는지 적어 보시기 바랍니다.
(작성: 김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