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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문화의 이해 최종 보고서
문화인류학과 202011167 최상원
<1. 철원의 인문환경과 자연환경>
1. 철원의 인문환경
1-1. 교통
철원은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여 예로부터 관북 지방과 기호 지방, 관서 지방과 강원도 영서 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다. 일제강점기에 서울 용산역에서 강원도 철원역을 거쳐 원산에 이르는 경원선 철도가 개통되었고, 철원과 금강산의 내금강역을 연결하던 금강산선도 운행되었으나 남북 분단으로 단절되었다. 이로써 경원선은 신서면의 신탄리역을 종점으로 하여 운행되었으며, 1963년 신서면이 연천군에 편입되면서 철원 지역에는 50여 년간 철도가 운행되지 않게 되었다.
이후 2000년대에 들어서서 경원선 복원이 추진되면서 철원읍 대마리에 옛 철원역을 대체하는 백마고지역이 신설되어 2012년 11월에 개통되었다. 현재의 경원선은 서울 용산역에서 경기도 의정부시·양주시·동두천시·연천군 지역을 거쳐 철원읍의 백마고지역까지 운행된다.
도로교통은 일반국도 3·5·43·47·56·87호선이 지나가며, 모두 북한 지역까지 이어지도록 지정되었으나 남북 분단에 막혀 철원군을 실질적 종점으로 한다. 국도 3호선은 경남 남해군 미초면에서 경북~충북~경기도~서울시~경기도 연천군을 거쳐 철원군 철원읍으로 이어진다. 국도 5호선은 경남 거제시 연초면에서 대구시~경북~충북~강원도 원주시~횡성군~홍천군~춘천시~화천군을 거쳐 철원군으로 이어진다.
국도 43호선은 세종시 아름동에서 충남~경기도~서울시~경기도 포천시를 거쳐 철원군으로 이어지고, 국도 47호선은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서울시~경기도 포천시를 거쳐 철원군으로 이어진다. 국도 56호선은 철원군 김화읍에서 화천군~춘천시~홍천군을 거쳐 양양군 양양읍으로 이어지며, 국도 87호선은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에서 철원읍으로 이어진다. 이 밖에 일반 지방도 387호선(남양주~가평~포천~철원)과 463호선(화천~철원), 464호선(철원군 갈말읍~철원읍) 등이 지나간다.
1-2. 관광
최전방 지역이다 보니 안보관광의 명소이며, 안보관광이 아니어도 자연 경관이 아름답기 때문에 꽤 많은 사람들이 관광을 온다. 한탄강 유원지, 한탄강 은하수교, 한탄강 물윗길, DMZ 생태평화공원, DMZ 두루미 평화 타운, DMZ 평화의 길, 매월 대폭포, 고석정, 삼부연 폭포, 직탕 폭포, 순담, 송대소 주상절리, 학저수지, 용양늪, 도피안사, 철원향교, 철원 수도국 터 급수탑, 철원 노동당사, 철원평화전망대, 소이산, 제2땅굴, 백마고지 전적지, 구철원 시가지, 백마고지역, 철원역, 월정리역 태봉국 유적 등의 관광지가 있다.
1-3. 철원의 특산품
철원 오대 쌀과 현무암 공예품
철원 오대 쌀은 휴전 이후 인적이 끊긴 비무장지대(DMZ)에서 흘러드는 청정한 물과 해발 250m 고지대의 신선한 바람, 기름진 황토와 흙, 깨끗한 자연환경이 그대로 보존된 천혜의 무공해 청정지역에서 재배, 생산되고 있다. 또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유일의 현무암 지대인 철원의 현무암은 제주도 돌보다 무겁고 단단하며, 다공질 현무암을 자연색 무늬 색상을 그대로 현대감각에 맞게 관상용 또는 식생활에 사용 할 수 있도록 제작 판매하고 있다.
맷돌과 철원토마토, 그 외 특산품, 철원 쿨 포크
철원의 깨끗한 산과들에는 철원 오대 쌀 외에도 오이, 토마토, 느타리버섯, 오리 등을 이용한 친환경 농법 쌀, 잡곡류 등의 농산물과 강원도 최고의 사육규모를 자랑하는 돼지를 필두로 한 청정 돈육, 한우 등의 축산물과 맷돌 등의 현무암공예품, 삼지구엽초 등의 특산물이 생산되고 있다. 철원 쿨 포크는 두루두루 몸에 좋은 위생적인 돼지고기라는 의미이며, 연교차가 66도까지 차이가 나는 청정철원지역에서 생산된다는 뜻이다.
2. 철원의 자연환경
철원군은 강원도 영서 최북단 평야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군 전역이 수복지역으로 군사분계선과 접하고 있다. 철원의 동쪽은 양구군과 접하고 있으며, 남쪽은 화천군과 경기도 포천군에 접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휴전선이 지나가고 있다. 동경 127* 07‘ ~ 128* 53’, 북위 38* 06‘ ~ 38* 18’에 위치하며 면적은 823.91km
에 달한다.
철원군의 지형은 크게 동부지역 고지대, 중부지역 평야, 서부지역 구릉지로 나누어진다. 고지대인 동부에는 태백산맥과 광주산맥의 영향으로 흰바우산, 적근산, 대성산, 복주산, 금학산, 명성산 등의 고산들이 솟아있다. 중부지역에는 여러 번의 화산 활동으로 용암이 분출해 거대한 용암지대가 형성되어 지금의 넓은 평야를 이루었다. 서부지역은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발달한 추가령구조곡이 있다.
철원군의 중앙부 용암대지에는 한탄강이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흐르면서 그 지류인 남대천을 합류하고 임진강으로 흘러들어간다. 한탄강은 하방침식이 왕성하며, 곳곳에 화강암과 주상절리와 수직단애가 발달하였다. 강원도 중부 내륙에 위치한 철원군의 기후는 한서 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로, 연평균 기온은 10*C 내외이고, 1월 평균기온은 -3.4*C, 8월 평균기온은 24.4*C 내외이다. 철원군은 바람받이 지형으로 지형성 강우가 야기되어 우리나라 3대 다우지역에 속하며, 특히 여름철에 강우량이 가장 많은 지역이다.
<3. 철원의 역사>
3-1. 철원의 지명 유래
철원이라는 이름은 쇠두레라는 말을 한자로 표기한 지명으로서 쇠가 많이 나는 고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3-2. 선사시대
선사시대 때부터 이 지역을 중심으로 사람이 거주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유적은 비교적 많은 편이다. 1978년에 이웃 지역인 경기도 연천군 전곡면 전곡리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굴, 조사되어 수십만 년 전에 한탄강을 끼고 인류가 거주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최근에는 철원군 내의 한탄강변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되었다.
3-3. 신석기 시대
신석기시대에도 사람이 거주했음은 당시의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고 있음을 보아 짐작할 수 있으며, 청동기시대에는 토성리의 토성(土城)과 여러 곳에 산재해 있는 고인돌을 통해 이 지역에 성읍국가(城邑國家)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의 유물로 민무늬토기·간돌도끼·간돌칼·돌화살촉·별도끼·돌창 등이 철원읍·동송읍·원남면 등에서 출토되었다. 철기문화가 싹트기 시작한 초기철기시대에는 연맹왕국을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당시 이 곳에는 진국(辰國)이 형성되어 그 속에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3-4. 삼국시대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영토로 둥글 ‘원(圓)’ 자를 써서철원(鐵圓) 또는 모을동비(毛乙冬非)라 칭하다가, 통일신라에 흡수된 뒤 경덕왕 때에는 철성군(鐵城郡)으로 개칭되었다.
3-5. 후삼국시대
이후 901년(효공왕 5년)송악(松嶽)에서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弓裔)가 905년에 이 곳으로 도읍을 옮겨 풍천원(楓川原)에서 13년간 통치를 하였다. 상술했듯이 후삼국시대에는 궁예가 태봉의 수도로 삼았으나 이 시기의 유적지들은 대부분 현재 비무장지대에 위치해 있어서 쉽게 갈 수 없는 상황이다. 특히 태봉국 철원성은 성 가운데에 군사분계선이 지나가기 때문에 조사도 이뤄지지 못하는 상황이다. 정확한 위치는 경원선 월정리역 정면으로 안보관광으로 갈 수 있는 월정리전망대에서 원래 보이는 위치지만 2022년 기준으로 69년 간 자란 무성한 숲에 가려져 못 보는 상황이다.
3-6. 고려시대
그리고 918년에는 왕건(王建)이 이 곳에서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였다. 고려 태조 때 동주(東州)라고 하였고 1254년(고종 41년)에 이르러 철원현으로 개편되었다. 후에 철원목으로 되었다가, 1310년(충선왕 2년)에 철원부로 되었고, 1390년(공양왕 2년)에 경기좌도에 속하였다.
3-7. 조선시대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1434년(세종 16)에 강원도에 편입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1432년 호구수 351호 770명, 시위군 62명이었다. 군사제도에 있어서는 오위도총부 예하 의흥위(義興衛)의 좌부(左部)에 속한 회양진(淮陽鎭) 내에 편입되어 있었다. 역마제(驛馬制)에 있어서는 《증보문헌비고》 여지고(輿地考)에 의하면 전국의 역로 중 제2로로서, 양주의 누원(樓院), 포천의 파발막(擺撥幕)·만세교(萬歲橋), 영평(永平)의 양문역(梁文驛), 철원의 풍전(豐田)을 거쳐 김화로 이어지며, 연천·철원·평강으로 연결되는 길도 있었다.
봉수로(烽燧路)는 김화의 소이산(所伊山)에서 봉수를 올리면 철원의 적골산(適骨山)에서 받아 경기도 영평의 미로곡(未老谷)을 거쳐 서울남산으로 전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서울을 점령한 왜군의 제4진이 동두천을 거쳐 철원·평강·김화를 점령한 뒤 함경남도 안변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피해가 극심했으나 곧 관군과 의병들의 활약으로 수복되었다.
병자호란 때에는 적이 서울을 침입하는 통로가 되었는데, 당시 철원지역 옆의 김화 자모산성(慈母山城)에서 적과 대치하던 관찰사 홍명구(洪命耉)가 순절했으며, 철원의 정방산성(正方山城)에서는 성이 함락되자 김응해(金應海)가 분을 못 이겨 자결했다가 부하들의 응급구호로 소생했으니, 모두 이 지방과 관계있는 충신들이다.
1746년(영조 22) 춘천부에 있던 강원도병마방어사부(江原道兵馬防禦使府)를 철원으로 옮기고 관하에 3부(춘천·회양·이천)·6현(금성·김화·낭천·평강·양구·안협)을 두었다. 1778년(정조 2)에 편찬된 《철원군읍지》에 의하면 행정구역은 동변면 등 9개 면으로 호구수 3,604호 1만5147명(남자 8,101명, 여자 7,046명)이었다.
3-8. 근대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철원군으로 고쳐 춘천부에 속했다가 다음 해 강원도에 소속되었다. 1907년 군대해산과 함께 전국에서 의병봉기가 일어나자 철원에서는 김규식(金奎植)·안상근(安尙根)·유학근(兪學根) 등이 활약하였다. 이들은 다른 의병군과 협조해 1907년 9월 20일 의병 100여 명이 갈말면 지포리에서, 3월 16일 철원 서북 10리 지점에서, 4월 1일 의병 50여 명이 지포리에서, 1910년 8월 10일 의병 13명이 토성리에서 각각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1907년 11월 14일에 일본군은 철원군 지방에서 의병들과 관계된 마을의 집 22채를 소각시키기도 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 군에서는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3월 10일부터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날 철원읍에서 박연서(朴淵瑞)·박용철(朴容喆) 등을 중심으로 2,000여 명이 만세운동을 했으며, 3월 11일에는 갈말면 토성리와 문혜리에서 1,000명이, 4월 8일에는 내문면 독검리에서 최재명(崔在明)·최재청(崔在淸) 등이 주동이 되어 700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러한 시위에 대해 일본헌병과 보조원들의 발포로 많은 주민이 죽임을 당하거나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1931년 4월 철원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41년 10월에는 경기도 삭녕군 내문면·인목면·마장면이 철원군으로 편입되었다.
앞서 설명했듯이 철원은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여 예로부터 관북 지방과 기호 지방, 관서 지방과 강원도 영서 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다.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원래의 지역 특성에다가 경원선과 금강산선이 분기되는 교통이 요지라 엄청나게 발전했으며, 특히 철원 평강 평야의 젖줄로 불린 봉래호저수지가 1923년 완공되면서 강원도를 대표하는 곡창지대이자 경원선 연선의 주요 대도시로 거듭났다.
실제로 1935년까지는 도내 최대의 도시였고, 해방 직전인 1944년 당시까지만 해도 당시 철원읍은 춘천읍에 이어 강원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만약에 분단과 전쟁이 없었으면 1950~1960년대에 군에서 시로 승격하거나 강릉시, 원주시, 춘천시와 함께 강원도 4대 도시로 발전하거나 강원도 북부권(이천군, 평강군, 회양군, 김화군 등)의 중추도시 역할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잠재력이 높은 곳이다.
3-9. 현대
광복과 함께 38선 이북지역으로 들어갔다가북한이 남침을 준비하는 지역인 철의 삼각지대에 속했으며, 북한 강원도의 도청 소재지이기도 했으나, 1946년 함경남도 원산시, 문천군, 안변군을 강원도로 편입하면서 원산시로 도청이 옮겨가고 북한 입장에서 최전방 지역에 해당되어 몰락하기 시작했다.
1950년 끝내 6.25 전쟁이 터지면서 폭격을 받게 되었고, 전쟁이 중반을 넘어가자 북한군과 국군은 철원·김화·평강 일대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를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전투를 벌였다. 이로 인해 철원역과 당시의 시가지는 흔적만 남기고 모두 파괴되었으며, 지금은 폐허가 된 철원 노동당사만이 지키고 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면서 이전의 1읍 9면 중 지금의 철원읍·동송읍·갈말읍·신서면(연천군)은 수복되었으나 어운면의 일부는 비무장지대로 들어갔고, 북면·묘장면은 일부가 북한으로, 내문면·인목면·마장면은 일부가 비무장지대로 있고, 대부분은 북한지역으로 되었다.
<4. 철원과 분단>
4. 분단의 역사
철원용암대지를 원동력으로 6.25전쟁 이전까지만 하여도 상당히 번성한 도시를 이루었던 철원, 한반도의 허리에서 남과 북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던 이곳은 1930년 당시에 춘천, 원주, 강릉의 견줄만한 규모의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이 한반도를 강제로 점령하면서 철원은 번영과 동시에 심한 수탈과 착취에 시달려야만 하는 아픈 역사를 가진 지역이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한반도가 북위 38°선을 기준으로 남한과 북한으로 분할됨에 따라 철원은 누구보다 큰 아픔을 겪게 된다. 북한 공산치하에 들어서게 되었고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강원도 최대의 곡창지대를 놓고 남한과 북한이 치열한 격전을 벌임에 따라 번성했던 철원은 완전히 파괴되어 버린 것이다.
특히 6.25 전쟁 때 보급물자를 모아놓은 장소에서 유래한 철의 삼각지대(철원, 평강, 김화)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철의 삼각지대란 철원·김화를 저변으로, 평강을 정점으로 한 삼각지대의 군사적인 호칭이며, 신고산∼평강으로 이어진 추가령지구대를 통과하는 경원선과 5번국도가 이 지대에서 철원-연천-의정부-서울, 김화-포천-의정부-서울과 그 밖의 여러 곳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6·25전쟁 당시에는 북한군과 중공군이 나진·성진·원산항에 양륙된 군수물자와 각지에서 동원한 병력을 이 지대에 집결시킨 뒤 전선에 투입한 공산군 최대의 중간 책원지였다. 이러한 이유로 ‘철의 삼각(Iron Triangle)’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작전이 이 지대 일대에서 펼쳐졌다.
이제 그 번성했던 도시의 흔적은 민통선 내부와 그 이남 지역에 폐허로 남겨진 몇몇 건축물을 통해 살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건축물들은 일제강점기의 수탈을 겪은 이후 북위 38°선과 현재의 DMZ로 인하여 북한과 남한의 통치를 모두 받아온 수복지역의 특수성을 반영하는 중요한 근대문화유산이 되어버린 것이다.
전쟁은 하나의 땅을 둘로 갈라놓아 한때 북적였던 도시도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 철원은 2015년 기준 전체 인구수 47,537명으로 일제강점기 80,479명에 비해 약 40% 감소하였으며, 6.25전쟁 직후 (21,335명)에 비해 2배 이상 증가하였다. 또한, 철원군 내의 철원읍의 인구수는 번성했던 1930년대에 15,458명이었지만 현재, 약 1/3가 줄어 5,412명으로 그 수가 대폭 감소 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현재, DMZ 내 마을에서 가장 많은 가옥수가 있는 마을은 강원도 철원군 근북면 금곡리이다. 하지만, 오래 전 근북면 금곡리만큼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던 마을이 아니, 그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던 제 2,3의 금곡리 마을이 있었다. 과거의 철원읍 구 시가지는 외촌리, 사요리, 관전리, 중리, 월하리가 있었고, 김화읍 구시가지는 읍내리, 생창리가 존재했었다고 한다.
앞서 설명했듯이 철원군은 전 지역이 수복지구다. 수복지구는 6·25전쟁 전에는 북한 땅이었다가 전쟁 후 남한 즉, 대한민국으로 편입된 지역을 말한다. 3년간에 걸친 치열한 전쟁으로 철원지역은 초토화되어 인구 2만 명이 거주하던 구 철원읍 시가지는 잿더미로 변했고, 그곳에 살던 주민들도 80% 이상이 뿔뿔이 흩어졌다. 철원의 현대사는 삶의 터전과 주민, 기록이 모두 사라지는 역사적 공백기였다.
1953년, 전쟁은 휴전되었지만 철원지역 주민들은 자기가 살던 옛 고향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곳에는 휴전선이 그어지고 DMZ(비무장지대)와 민통선(민간인통제선)이 설정되어 군인과 군부대만 들어섰다. 세상이 바뀌고 체제가 바뀌어도 38도선이나 휴전선에 묶여있는 철원군의 운명은 바뀐 것이 없었다. 자신의 농토를 되찾는 데만 20여 년 세월이 필요했고, 마을 출입이 자유로워진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한반도 중앙부를 가로지르는 38도선은 우리 민족의 자주적 의사와는 관계없이,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전후처리 문제해결을 위해 미국과 소련의 군사·정치적 편의에 의해 그은 선이다. 휴전선(군사분계선, Military Demarcation Line)은 1953년 7월 27일 22시를 기해 ‘싸움을 잠시 쉬기로 하자’고 미·소·중 강대국의 합의로 그어진 선이다.
그 길이는 249km(155마일)로 서해안의 임진강 하구에서 동해안의 간성 북방에 이른다. 남북은 휴전선 옆으로 또 하나의 선을 그어 쌍방이 군대 주둔이나 일체의 무기 배치, 군사 시설 설치를 금지하도록 약속하고, 남과 북으로 각각 2km씩 폭 4km 완충지대를 만들어 비무장지대(DMZ: Demilitarized Zone)라 이름 붙였다. 서해안에서 동해안까지 약 990㎢(3억 평)에 달하는 방대한 땅이 비무장지대란 이름으로 갇혀 있다. 비무장지대 외곽에는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 철책선이 쳐져 있고, 남방한계선 바깥으로 5~20km 남쪽에는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졌다.
1954년 2월, 미 육군 제8군단 사령관은 민간인 귀농을 규제하는 귀농선을 설정하고, 휴전선 일대 군 작전과 군사시설 보호 및 보안 유지를 목적으로 민간인 출입을 금지시켰다. 서해안에서 동해안까지 휴전선을 따라 총 면적 1,528㎢에 이르는 또 다른 띠가 형성된 것이다. 경기도 강화·김포·파주·연천, 강원도 철원·화천·양구·인제·고성 등 소위 접경지역의 213개 리가 이 띠 속에 갇혔다. 1958년 6월부터 휴전선 방어 임무를 한국군이 담당하게 됐고, 한국군은 군 작전이나 군사보안상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출입영농과 입주영농을 허용했다. 그리고 귀농선은 민간인 통제선(민통선, Civilian Control Line)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수복 초기에는 미군정이 새롭게 건설한 민통선 밖 정착촌에 머물며 일일출입허가를 받은 후에야 자기 농토에 들어가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그런데 농사일이 바쁜 농번기철에는 출입허용시간을 연장해 달라는 주민들의 요구가 빈번했고, 군부대는 적과 대치하고 있는 형국에서 작전상 불가하다고 맞섰다.
안보가 최우선인 1960~1970년대에는 모든 주민과 관공서가 관할 부대장의 눈치만 봐야 했다. 어떤 이는 자기 논에 조금이라도 물을 더 댈 욕심에 몰래 움막을 짓고 논에서 하루, 이틀 목숨 걸고 숙박하기도 했다. 그런 일이 빈번해지고 주민들의 요구가 비등하자 군 당국 에서는 농번기에 한해 일시적인 체류를 허가하였다. 그러나 자기 농토가 있는 남자들만 일정한 장소에 모아놓고 군 천막에서 유숙하는 형태였다. 이들은 일주일이나 열흘 간격으로 민통선 밖 집으로 나와 식량을 조달하거나 식구들을 만나곤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거주하는 동안은 군인과 똑같이 아침저녁으로 점호를 받으며 강력한 통제를 받았다.
전쟁의 상흔이 가라앉고 체제가 안정되면서 주민들의 고향 입주에 대한 열망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이에 정부에서는 휴전선 인근 수많은 황무지와 유휴지를 개척해 농지확장은 물론 식량증산이라는 과업을 완수하고, 첨예한 남북 대치상황에서 국가안보체제도 강화하고 대북심리전 우위를 확보할 요량으로 민북마을(선전마을)을 건설하게 된다.
민북마을은 민통선북방마을의 준말이다. 민북마을은 일반적으로 전략촌이라고 통칭되는데, 실제로는 각 마을의 입주배경에 따라 명칭이 조금씩 다르다. 그 명칭으로는 초창기 ‘자립안정촌’과 이후에 가장 많이 건설된 ‘재건촌’, 박대통령 집권 후반기에 파주 대성동과 철원 유곡리 두 곳에만 시범적으로 건설된 ‘통일촌’ 등이 있다. 민북마을이 크게 3부류로 구분되는 기준은 조성시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마을 조성과정에 정부가 얼마나 깊숙이 주도적으로 개입했는지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시기적으로는 뒤로 갈수록 정부의 행정 및 재정 지원이 확대된다.
철원군에서는 1959년 철원읍 월하리 72세대를 필두로, 1960년 관전리 32세대, 근남면 마현1리 66세대, 1968년 철원읍 대마1리 150세대, 대마2리 97세대, 근남면 마현2리 60세대,1970년 김화읍 생창리 100세대. 1973년 김화읍 유곡리 60세대, 1974년 갈말읍 동막리 50세대, 정연리 120세대, 1979년 동송읍 이길리 68세대, 양지리 100세대 등 총 14개 민북마을을 조성하여 975세대를 입주시켰다. 그러나 초기 입주과정에 너무 근시안적으로 공사해 문제점이 노출되고 주택이 노후화되면서 1970년대 후반 전체적으로 보수를 하게 된다. 그리고 1979년, 대대적인 민북지구 취락구조 개선사업이 완수되면서 민북마을은 당시 언론이 ‘전쟁의 상처를 딛고 새롭게 도약하는 문화촌’이라 칭송할 정도로 발전한다.
그렇게 개척과 성장의 상징으로 각광받았던 민북마을이 이제 4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커다란 시련이 닥치며 일대 전환기를 맞고 있다. 오로지 잘 살아보겠다는 개척정신으로 터전을 마련한 입주 1세대들은 이미 2/3 이상 별세했고, 2세대들은 농가소득 저하로 고전하고 있다. 이농현상 심화로 마을인구는 격감했고, 급격한 노령화로 노동력이 부족하다. 마을에 아기 울음소리가 그친지 오래고, 40대 노총각이 마을마다 즐비하며, 대부분의 마을 초등학교는 폐교되었다. 빈집이 늘고 폐가가 방치되어 황량함마저 감돈다.
1960~1970년대 입주 초기 아무도 찾지 않던 황무지를 지뢰를 헤치며 목숨 걸고 개간해 문전옥답으로 만들어 놓았더니 수십 년이 지나서 어느 날 불쑥 땅임자라며 나타낸 불청객으로 인해 마을엔 편지풍파가 일었다. 정부에서는 사유재산권 문제라며 적극 개입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땅을 빼앗기는 일이 속출했고, 2004년 전방을 휩쓴 부동산 광풍이 사태 해결을 더욱 꼬이게 만들었다.
현대에 들어와선 민북마을 근처에는 통일 대비 평화신도시 기반 조성 움직임이 분주하다. 비록 일부구간이긴 하지만 일제강점기 철원의 번영을 이끈 경원선 철도 연장 복원사업도 한창이다. 지난 2008년 9월, 양지리 평화전망대에서는 환경부와 강원도가 ‘DMZ 생태평화비전’을 선포하며 DMZ 생태평화공원 조성계획을 구체화했다. 2009년부터 공사가 시작된 철원평화문화광장도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고 6·25전쟁의 산물이자 냉전의 상징인 DMZ를 남북이 어떻게 활용할지는 향후 초미의 관심사다.
민북지구 개척이 철원군 재건이고, 민북마을 변천사가 철원의 현대사다. 6·25전쟁의 산물인 휴전선과 DMZ, 민통선 그리고 그 안에 건설된 민북마을 모두 시대의 산물이고 역사의 산물이다. 일부 마을은 급격한 인구감소와 노령화로 활력을 잃어가고 있고, 빈집이 늘어 폐허화되고 있다. 그리고 개척의 주인공들인 입주 1세대들마저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고 있어 이제 민북마을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 하는 일대 전환기를 맞고 있다.
4-1. 마현1리 재건촌
마현1리는 1959년 가을 추석에 불어 닥친 사라호 태풍으로 인하여 발생한 경상북도 울진이재민 66세대를 정책적으로 이주시킨 경우다. 1960년 4월 4,일 울진초등학교에서 고향 친지들의 환송을 받은 후 23대의 군 트럭을 타고 횡성~춘천~화천을 거쳐 500여km(1,400여리)를 지나 3박 4일 만에 도착했다.
그리고 최전방 철책 아래 황무지에서 철통같은 감시 하에 천막생활을 하며 변변한 장비도 없이 손수 농지를 개간했다. 4월 7일, 도착한 이들을 반긴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아닌 억새밭만 무성한 황무지와 60개의 군부대 천막이었다. 도착 후 12일 만에 4·19가 터져 지원을 약속한 도지사와 군수는 모두 교체됐다. 행정기관의 보호나 지원은 전혀 없었고 주민자치회에서 협의해 농지를 분배하고 삶의 터전을 닦았다. 입주 1세대 중 현재 생존해 있는 남자는 이제 1명뿐이다.
그런데 철원군에서 가장 척박한 오지로 통했던 마현리가 최근에는 토마토, 오이, 파프리카의 고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예전에 논 면적이 적어 소득이 낮았던 산간 마을이 이제는 대규모 하우스 원예농업으로 번성해 부촌이 되었다. 마현리 승리전망대에 오르면 금강산 가던 철길을 또렷이 볼 수 있으며, 화천으로 통하는 말고개에는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하고 있다.
4-2. 유곡리 통일촌
1973년 경기도 파주 통일촌과 같은 날, 동시에 입주한 유곡리는 파주 통일촌 80세대보다 20세대가 적은 60세대로 구성됐다. 1970년대 이스라엘의 ‘기브츠’를 모방해 만든 유곡리는 전선 방위는 물론 유휴경지 활용을 목적으로 대북한 우위성을 입증하기 위해 건설된 선전마을 통일촌이다. 북녘 오성산이 코앞에 보이는 유곡리는 이전의 재건촌과는 달리 정부가 직접 나서 가구당 500만 원 이상의 거금을 지원할 정도로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며 전략적으로 만든 인공마을이다.
당시 5군단 예하부대에서 지원자를 모집했을 때 집과 논밭을 무상으로 2만여㎡(6,300평) 분양한다기에 많은 후보자가 몰려들어 자격심사가 까다로웠고, 선발된 사람들은 한 달 전부터 정신교육과 영농교육 등 집체교육을 받기도 했다. 입주 초기 입주민들은 매일 저녁 군보안부대원들의 점호를 받으며 생활하였고, 군 출신과 일반 농민 출신 간에 이질감으로 마을 대소사를 결정함에 있어 심각한 갈등을 겪기도 했다.
갈등이 발생한 이유는 마을의 초창기 리더쉽은 장교 출신 주민들의 서열에 의해 결정되었고, 직업군인 출신 주민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당연시되었다. 이들은 민간인 출신 주민들에 대하여,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서열의식을 이들에게 적용하였다. 주요 지위가 추천제로 결정되었다는 점이 이를 용이하게 만들었다. 군 출신 주민들은 스스로를 “배운” 엘리트로 간주하는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역연고 입주민들에게는 위화감을 주었으며, 이들이 겪었던 사회심리적 고충이 상당했다.
그러나 1982년부터 93년까지 시행된 ‘수복지역 소유자 미복구 토지의 복구 등록과 보전 등기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입주민들은 피땀 흘려 개간한 옥토를 모두 원소유주에게 돌려줘야만 했다. 입주할 때 정부에서 인정한 경작권만 믿고 소유권 없이 개간한 토지를 두고 나중에 나타난 소유권자와 벌이는 소유권 분쟁은 유곡리 주민들에게 끝없는 좌절감을 맛보게 했다. 이런 와중에 2000년과 2005년 민북마을을 휩쓴 부동산투기 광풍으로 유곡리 주민이 소유한 유곡리 땅은 이제 30%도 채 안 될 정도로 줄어들고 말았다.
4-3. 대마리 향군촌
대마리는 남북 간 체제 경쟁과 대립이 극에 달했던 1968년 민통선 북방지역 농지개간과 정부의 재건촌 건립 계획에 의거, 반공정신이 투철한 제대 군인과 지역 주민 위주로 선발해 150세대가 입주한 경우다.
주민들은 낮에는 농지개간에 힘썼고 밤에는 안보일선에서 총을 들고 적의 동태를 감시했다. 농지를 개간할 때 지뢰와 폭발물로 인해 팔다리를 잃고 불구자가 된 이도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구호나 보상의 손길을 뻗치지 않았다. 오로지 그들끼리 피땀 흘리며 똘똘 뭉쳐 난관을 이겨 나갔다.
그런데 어렵게 농토를 일구어 자리를 잡자 이번에는 개간한 농지의 원소유자들이 나타나 토지소유권을 주장했다. 전쟁으로 지뢰밭과 황무지로 변해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이제 와서 내놓으라는 것이다. 농지경작권을 인정해줄 테니 걱정 말고 입주를 하라고 권유했던 정책책임자들은 지금 아무 말이 없다.
그동안 국가인권위원회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국회, 청와대에서도 토지소유권 분쟁에 대해 관심을 보였지만 아직 뚜렷한 해결책이 나오고 있지 않다. 마을 안쪽 공원 개척비에는 ‘피 흘려 찾은 땅, 피땀 흘려 개척했다’라고 적혀 있다. 대마리 마을회관에는 정면에 ‘자립갱생(自立更生)’이라는 큰 현판도 걸려 있다. 이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지만, 우리가 언제 누구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느냐’는 마을주민들의 강력한 의지 표명이다.
4-4. 철새마을 양지리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 마을 북쪽 6km 지점에는 휴전선과 제2땅굴이 위치하고, 마을 뒤편에는 내수면적 3㎢(338.85ha) 규모의 철원군에서 가장 큰 저수지, 토교저수지가 있다. 일제강점기, 금강산 가던 철길 정식역이 위치할 정도로 부촌이었던 양지리는 철원군에서 가장비옥한 토질을 자랑한다. 6·25전쟁 후 오랜 기간 일일영농출입을 하다가 다른 지역보다는 늦은 1979년, 29㎡(9평) 단독주택에 두 가구씩 모두 100호가 입주했다.
그러나 다른 민북마을과 마찬가지로 젊은이들이 도시로 빠져나가면서 인구감소와 노령화가 심해지고, 현재는 75가구가 살고 있다. 초창기 보급된 주택은 너무 비좁아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반씩 나눠 쓰던 것을 대부분 한 채로 개조하였다. 한때 학생 수가 100여 명이 넘던 양지초등학교는 이미 오래전에 폐교되었고, 지금은 철새탐조 체험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양지리의 별칭은 ‘철새마을’이다. 철원평야의 젖줄 역할을 하는 토교저수지는 매년 다양한 종류의 겨울 철새들이 찾아 들어 철새탐조 관광객들로 붐빈다. 매년 10월 중순부터 이듬해 3월까지, 쇠기러기 30만 마리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이곳엔 천연기념물인 두루미와 재두루미 1,000여 마리와 독수리 300여 마리가 월동한다.
이른 아침 쇠기러기 수십만 마리가 먹이를 찾아 저수지에서 차올라 비상하는 모습은 장관이다. 토교저수지는 철원평야 안전영농기반 구축 및 농업용수 공급을 위하여 조성되어 일명 ‘전천후보(全天候洑)’로 불리기도 한다. 1968~1978년 10년간에 걸쳐 만든 대규모 인공저수지로 저수량 약 1만 5,000톤이며, 양지리와 대위리·장흥리·오덕리 일대의 농경지에 관수를 하고 있다.
최근 주민들은 겨울철새를 활용해 본격적으로 생태마을로의 변신을 시도해왔다. 그 결과, 2000년 도 친환경 우수마을 선정, 2002년 도 새농어촌건설운동 사업자 선정, 2003년 환경부 생태우수마을 지정, 2004년 농림부 녹색농촌마을 선정 등 희망의 불씨를 키워냈다.
주민들은 늘어나는 관광객을 맞이하기 위해 두루미펜션 등 숙박시설과 자연생태학습원까지 만들었다. 이곳에선 특히, 도시 학생들의 여름철 농촌체험과 겨울철 두루미학교 체험활동이 활발하다.
시류에 맞춰 농가소득을 창출하기 위해 시도한 생태마을로의 성공적 변신은 다른 민북마을에 귀감이 되고 있다.
마을 북쪽 전방지역에는 제2땅굴과 월정리역, 철원평화전망대, 철새두루미관 등이 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로 유명한 월정리역에는 분단으로 끊겨버린 철도와 녹슨 철마가 덩그러니 남아 있고, 모노레일을 타고 오르는 철원평화전망대에서는 궁예왕의 웅지가 서려있는 태봉국도성 터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드넓은 평강고원도 볼 수 있다.
마을 서쪽에는 아이스크림고지 삽슬봉이 있는데, 이 아이스크림고지는 6·25전쟁 때 수 많은 포탄에 산이 아이스크림같이 녹아내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4-5. 충절의 고장 생창리
북으로 성재산과 계웅산이 에워싸고 남으로 화강이 흐르는 생창리는 고구려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김화군의 중심지였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10만 대군에 맞서 용전분투했던 홍명구공과 유림장군의 충절이 깃들어 있고,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은 금강산 가던 길에 그들의 충절을 기리고자 화강백전을 남기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여러 마을이 병합되어 생창리로 개칭되었고, 1953년 수복되면서 옛 김화군 대신 철원군 김화읍으로 바뀌었다. 이후 남북 체제 경쟁이 한창이던 1970년 10월 30일, 재향군인 100세대가 입주하여 재건촌을 건립해 오늘에 이르렀다. 그리고 현재는 다른 민북마을과 마찬가지로 이농현상으로 인구감소와 노령화가 심각하다. 폐허가 된 빈집과 폐교된 운장초등학교의 썰렁한 모습이 민북마을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생창리는 구 김화권의 중심지다. 일제강점기 때 인구 1만의 황화철산지인 김화는 행정구역마저 철원군에 병합된 채 사라졌으나 정신은 살아있다. 6·25전쟁 직전까지 마을 바로 옆에 김화군청이 있었고 김화권의 중심부로 영화를 누렸다. 당시 경원선과 금강산 전철을 통해 원산의 수산물과 철원의 쌀을 교환하는 등 남북을 연결하는 물류통로로 주목을 받았던 마을이기도 하다.
한편, 현대사의 아픈 상흔을 간직한 마을이기도 한데, 인공치하 북한 정치보위부 건물이 있었던 동굴, 끊겨진 암정교 등은 안보교육의 산 교육장 역할을 하고 있다. 6·25전쟁으로 마을을 떠난 이후 1970년대 초, 이 마을에 입주한 주민들은 현재 97가구 350여 명으로 넉넉하지 못한 논과 밭을 경작하며 살아가고 있다. 최근 하우스농사가 성행해 토마토와 오이 생산이 늘어 농가소득이 증대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의 진격로였고, 병자호란 때는 청군의 남진로였으며, 6.25 때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였지만, 변함없이 굳건히 서있는 마을이 생창리다. 생창리 마을 주변에는 성재산성, 어수정, 전골총 등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다. 마을 주민들은 이런 역사적 전통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주민들은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끊어진 금강산 전철의 연결로 옛 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일대 전환기를 맞은 민북마을에 대한 정부차원의 대책 마련도 기대하고 있다. 생창리 토박이인 한 어르신은 “생창리 마을은 조용하기만 한 최북단 작은 마을이지만 남북교류시대가 시작되면 북녘 땅을 한달음에 내달릴 수 있는 약속의 땅”이라며, “대다수 주민들은 머잖아 번영했던 옛 김화군의 중심지로서 명성을 회복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였다.
<5. 철원의 생업>
5-1. 철원오대쌀
철원오대쌀은 강원도 철원군을 대표할 만큼 전국적으로 유명한 지역 특산물로, 농촌진흥청에서 개발한 품종인 오대벼로 수확한 쌀이다. 철원군은 너른 평야가 형성된 지역으로, 6·25전쟁 당시 김일성이 철원 지역을 빼앗기고 사흘간 울었다는 이야기가 전할 만큼 토양이 기름지다. 게다가 철원 지역은 일조량이 많으면서 일교차도 큰데, 이런 지리적 특성이 추위에 강하고 재배 기간이 짧은 오대벼의 특성과 잘 맞아 고품질의 쌀 생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농업은 해방과 6·25전쟁 이후에는 식량의 양적 생산에 집중하였다. 1970년대가 되자 식량자급률이 높아졌고, 이에 따라 농촌진흥청에서는 질적 생산에도 눈을 돌려 품질과 맛이 뛰어난 좋은 쌀에 대한 연구개발을 시작하였다. 그러한 노력은 거듭된 품종개량 끝에 1982년 오대벼의 개발로 이어졌다. 오대벼는 주로 강원도에 심었는데, 특히 철원 지역의 자연환경이 오대벼의 육생 조건에 적합하였다. 철원군에서는 오대벼 보급을 점차 확대하였는데, 2018년을 기준으로 농지의 95% 이상이 오대벼를 재배할 정도가 되었다.
철원오대쌀은 1992년에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이 발표한 식미 검정 결과에서 전국 제일의 밥맛으로 평가되었고 2005년 제8회 전국 쌀 축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등 각종 쌀 평가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2005년 철원오대쌀은 지리적표시제에 등록번호 제13호로 등록되었다. 철원오대쌀이 유명해진 것은 1995년대 초에 미곡처리장이 건립되면서 쌀의 품질이 높아지고 상품성이 커지면서부터이다. 이후 철원 오대쌀은 대한항공 기내식과 매일유업 맘마밀에 2003년 기준 연간 700톤을 납품하면서 소비자들에게 인지도와 신뢰도를 높였다.
5-2. 철원오대쌀 생막걸리
강원도 철원 지역의 ‘철원오대쌀’은 전국적인 유명 쌀 브랜드 중 하나인데, 바로 이 철원오대쌀로 빚는 막걸리가 철원오대쌀 생막걸리이다. 현무암이 만든 철원의 점질토양에서 자라는 오대벼는 무기질 성분이 많고 조직이 치밀하며 천알무게가 타 지역의 쌀보다 무거운 25.6g인데, 추위에 강하고 재배 기간이 짧다는 특성 때문에 일조량이 많으면서 일교차도 큰 철원의 기후와 궁합이 맞는다. 철원에서는 이런 철원오대쌀과 비무장지대의 청정한 물을 이용하여 빚은 ‘철원오대쌀 생막걸리’를 2000년대 후반에 브랜드화하였고, 2018년에는 철원군농민회영농조합법인에서 ‘대작’이라는 독자 브랜드를 만들어 출시하였다.
앞서 설명했듯이 철원오대쌀 생막걸리는 2000년대 후반에 브랜드화되었는데, 2018년부터는 철원군농민회영농조합법인에서 ‘대작’이라는 독자 브랜드로 출시하고 있다. 또한, 2020년에는 '대작'의 원주를 증류하여 빚은 소주와 약주인 '모을동주'를 출시하였다.
5-3. 철원 토마토
토마토는 강원도 철원군의 특산물로 지정된 가지과에 속하는 한해살이 과일채소이다. 철원군은 현무암 기반의 평야 지대로, 농지가 배수가 양호한 특성이 있어 토마토 재배에 유리하다. 이런 철원 지역의 토양과 지리적 특징은 토마토 재배에 적합한 환경이다. 철원군은 토마토를 특산물로 지정하여 시설 재배를 지원하면서 판매하고 있다. 주로 철원군 근남면, 철원군 서면, 철원군 갈말읍 등에서 토마토를 재배하고 있다.
2016년 강원도 철원 지역에서는 약 190㏊의 과채류 농지 가운데 약 155㏊의 농지에서 토마토를 재배하였고, 생산량은 약 9,631.9톤이었다. 철원군은 2019년 5월 산업통상자원부의 스마트 특성화 기반 구축 사업에 최종 선정되어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철원군과 철원 플라즈마 산업기술연구원이 공동으로 ‘나노 소재 기반 연계 플랫폼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나노 소재 기반 연계 플랫폼 사업에 3년간 국비 60억 원, 지방비 36억 원 등 총 96억 원 규모의 재원이 투자된다. 철원 플라즈마 산업기술연구원과 지엘비젼이 개발한 양자점 식물 생장 조명을 이용하여 토마토 등의 농작물의 재배 방식 고도화를 위한 기술 연구 개발을 수행하고 있다. 앞으로 개발되는 기술은 토마토를 비롯한 농작물에 적용되어 철원군의 토마토 생산성 향상과 농가 소득 창출에 기여하도록 계획하였다.
5-4. 철원 파프리카
파프리카는 강원도 철원군의 특산물로 지정되어 시설 농업으로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는 특용 작물이다. 피망에서 매운맛을 빼고 단맛을 더해 개량한 파프리카는 겨울에는 경상남도 진주시, 전라남도 화순군·영광군, 전라북도 김제시 등 남부 평지 지역에서 주로 재배가 이루어지며, 여름에는 강원도, 경상남도 합천군, 전라북도 남원시 등의 고랭지 농업을 실시하는 지역에서 주로 재배된다. 강원도 철원 지역에서는 철원군 근남면·김화읍·서면에서 주로 생산하며, 그해 7월부터 시중에 유통되기 시작한다. 파프리카는 생식으로 먹거나 소스나 조미료로 만들어 요리에 활용된다.
파프리카는 중앙아메리카가 원산지이며, 한국에서 재배되는 파프리카는 네덜란드에서 수입한 품종이다. 강원도 철원군에서는 재배 초기는 파프리카를 수출용으로 생산하였기 때문에 재배 면적이 넓지 않았다. 철원군은 1997년 파프리카 재배 면적이 4㏊밖에 되지 않았으나, 일본의 파프리카 소비량이 늘어남에 따라 1999년 파프리카 재배 면적이 52㏊로 확대되었다.
2000년대 이후에는 국내 소비가 늘면서 재배 면적이 급속도로 확대되었고, 2011년 약 35㏊였던 재배 면적이 5년 만인 2016년에는 약 159㏊로 5배로 급성장하였다. 2015년 하반기 가락시장에 유통된 파프리카 중 평균 39%(8월의 경우, 51.8%)의 물량이 강원도 철원군에서 출하되었다. 2015년 철원군에서는 해외에 파프리카를 830톤을 수출하였으며, 약 200만 달러의 수출액을 기록하였다.
<6. 철원의 오일장>
6-1. 신철원 전통시장
- 요약
신철원리는 1945년 해방이 된 후에 북한에 편입 되었다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수복되었고 1954년 6월부터 민간인들이 살기 시작한 지역이며 원래는 지포리에 속했던 곳인데 철원읍에 있는 철원군청이 이곳에 설치됨에 따라 분할되었다. 신철원시장은 1954년 이후에 지역주민들의 생활필수품을 물물 교환하기 위해 자생적으로 생겨난 시장으로. 인근에 산수가 빼어난 명성산(922m)이 있어 사시사철 등산객들의 왕래가 잦다.
소재지 : 철원군 갈말읍 신철원리 697
장날 : 매월 3일, 8일 (5일간격)
취급품목 : 오대쌀등 농산물, 청정육, 의류, 잡화, 주방기구, 어물 등 각종 생필품
주차장 : 94면 공영주차장
문의전화: 신철원시장번영회 033-452-3389
- 개설, 제원, 건립 경위
신철원 전통시장은 철원군청 부근에 있는 강원도 철원군의 주요 전통시장이다. 신철원시장번영회가 관리하며, 5일에 한 번씩 정기시장이 열린다. 3일·8일·13일·18일·23일·28일에 장이 열리고, 농수산물, 육류, 과채류를 판매하는 점포들과 식당들이 운영되고 있다. 신철원 전통시장은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신철원리 718-3에 위치해 있으며, 약 3,000㎡ 규모에,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로 조성되어 있고, 공영 주차장을 갖추고 있다.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신철원리는 6·25전쟁 후 수복되어 1954년 6월부터 민간인이 신철원리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거주민들이 필요한 물건들을 서로 교환하기 위하여 신철원 전통시장이 자연적으로 형성되었다.
- 변천
강원도 철원군의 신철원 전통시장은 1954년 이후 세워진 전통 5일장을 모태로 하여, 1975년 도시계획 정비로 시장 건물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대형마트가 들어선 2002년을 기점으로 신철원 전통시장을 찾는 방문객 수가 점차 감소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에 강원도 철원군은 시장 상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2006년 강원지방중소기업청의 지원을 받아 아케이드 설치, 개량 및 편의시설 확충 등 재래시장 시설 현대화 사업을 진행하였다.
또한 2008년에는 신철원시장번영회와 철원군이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한 시설현대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총 12억 2500만 원[국비 7억 3500만 원, 지방비 3억 6750만 원, 민자 1억 2250만 원]을 들여, 외벽 창호 공사, 가스·전기·소방 공사 등을 진행하였다. 2017년에는 중소 기업청[현 중소벤처 기업부]의 골목형 시장 육성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총 4억 8000만 원의 예산을 지원받아 특화상품 개발, 문화 공간 조성, 상품 진열 개선, 핵심 점포 육성, 먹거리 개발 등의 시장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신철원 전통시장만이 지니는 특색과 상품, 디자인 등의 다양한 분야의 특화를 시도하고 있다.
- 구성, 현황
신철원 전통시장 내의 일부 점포와 식당은 상시 운영되며, 장이 서는 날에는 시장 내에 매대를 조성하여 지역 주민들에게 상품을 판매한다. 주요 업종으로는 농수산물, 청정육, 의류, 잡화, 주방용품, 과일을 판매하며, 시장 내에 다수의 식당이 있다. 2019년 기준으로 건물 내에 51곳의 업체가 입주하고 있다. 매년 8월부터 10월까지 지역 상권과 전통시장을 활성화를 목표로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저녁 신철원전통시장과 인근의 용화천 수변길에서 야시장을 열고 있다.
6-2. 와수 전통시장
- 요약
옛날 이 고장에는 기와공장이 있어 대부분 기와집이었다 한다. 이를 고을 원님이 부임 때 산마루에 올라 지역을 살피니 바다는 없는데 석양에 비치는 지붕들이 마치바다 물결치는 듯이 보인다하여라 불렀다 한다. 와수리장은 1954년 이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교통의 요지로 강원도 화천과 경기도 포천(이동면)으로 가는 길목에 있으므로 교통량이 많은 곳이다. 와수리장은 시장터가 장방형(사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고정상가가 시장터를 에워싸고 있다. 시장바닥에는 시멘트포장이 되어있으며 시장 면적도 넓기 때문에 이동 상인들이 천막치기에 편리하다.
소재지 : 철원군 서면 와수로 184번길
장날 : 매월 1일, 6일 (5일간격)
취급품목 : 오대쌀등 농산물, 청정육, 의류, 잡화, 주방기구, 어물 등 각종 생필품
주차장 : 50면 공영주차장
문의전화: 와수시장 번영회 033-458-9688
- 개설, 변천
강원도 철원군 서면 와수리에 있는 철원의 전통시장이다. 5일장으로 매월 1일, 6일, 11일, 16일, 21일, 26일마다 장이 열리고 있으며, 현재 와수시장 번영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와수 전통시장의 명칭은 시장이 있는 지역의 이름인 와수리에서 차용하였다. 와수 전통시장은 김화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시장으로 공식적인 기록은 없으나, 철원군청에서는 1954년 이후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와수리가 해방 후, 북한에 편입되었다가 6·25전쟁 이후 수복되어 와수리 일대에 1954년 5월 이후 민간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
- 구성, 현황
와수 전통시장의 시장터는 장방형으로 형성되어 있다. 시장의 주요 취급 품목으로는 오대쌀 등 농산물들과 청정육, 의류, 잡화, 주방 기구, 어물 등 각종 생활필수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4년 3년간 와수시장을 중심으로 재래시장 현대화 사업을 실시하였다. 2004년에는 하수도 정비 및 정화도 공사를 시작하였고, 2005년에는 2층 증축 및 아케이드를 설치하였다. 2006년에는 비가림 시설을 설치하였다.
전통시장을 이용하는 소비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50면의 공영 주차장이 설치되어 있으며, 비가림막도 설치하여 시장을 원활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시설을 갖추고 있다. 와수 전통시장은 2019년 현재 1일, 6일마다 장이 열린다. 장날은 노점 50여 개 이상이 영업을 하며, 장날이 아닌 날은 고정 상가만 영업한다. 와수 전통시장의 홍보를 위하여 요리 대회, 막걸리 빨리 마시기 대회, 초정 가수 공연 등 다채로운 행사도 진행하고 있다.
6-3. 동송 전통시장
이평리는 1945년 해방이 된 후에 북한에 편입 되었다가 1950년 한국 전쟁으로 수복되었고 1954년 6월부터 민간인들이 살기 시작한 지역이다. 동송 전통시장은 1954년 이후에 지역주민들의 생활필수품을 물물 교환하기 위해 자생적으로 생겨난 시장으로 철원에서 생산되는 각종 농, 특산물을 구입할 수 있는 철원군에서 가장 큰 시장이며 인근 경기도 포천시 주민들도 다수 이용할 정도로 규모가 크다.
소재지 : 철원군 동송읍 이평로 47번길
장날 : 매월 5일, 10일 (5일간격)
취급품목 : 오대쌀등 농산물, 청정육, 의류, 잡화, 주방기구, 어물 등 각종 생필품
주차장 : 208면 공영주차장
문의전화: 동송시장번영회 033-455-2230 / 동송인정시장 033-455-6262
- 개설, 건립 경위
동송전통시장은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이평리에 있는 전통시장이며,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영업한다. 시장을 찾은 고객들의 편의를 위하여 철원군 이평리 동송 전통시장 주변에 약 2,000㎡ 면적의 동송시장 공영 주차장을 설치하여 운영 중이다.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이평리는 1945년 광복 이후에는 북한이 점령하고 있었으나, 1950년 6·25전쟁 이후 수복되었고 1954년 6월부터 이평리에 민간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이평리 주민들은 필요한 물건들을 교환 형식으로 거래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동송 전통시장이 형성되었다.
- 변천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이평로 47번길에 있는 동송 전통시장은 철원군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시장이며 경기도 포천시 지역 주민들도 자주 이용하는 전통시장이다. 공식적으로는 동송 전통시장과 동송 시장으로 분리되어 있는데, 이는 시장을 운영하는 협회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이평로 47번길 16 일대에 있는 동송 시장은 1953년 6·25전쟁이 휴전된 이후, 생활 기반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을 때 지역 주민들이 생활필수품을 교환하기 위하여 형성한 자연 시장이다. 현재 5일장, 10일장으로 매월 5일·10일·15일·20일·25일·30일에 열리며, 동송 시장 번영회가 직접 관리한다. 철원 동송 전통시장은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이평로 47번길 19 일대에 있으며, 2007년 동송 전통시장 상인회의 주도로 개설되었다.
- 구성, 현황
동송시장에는 19개의 직영 점포와 14개의 임대 점포가 있다. 동송 전통시장에는 72개의 직영 점포와 58개의 임대 점포가 있으며, 철원군의 지역 특산물뿐만 아니라 농산물, 육류, 해산물 및 다양한 생활필수품을 구매할 수 있다. 강원도 철원군에서는 2004년부터 동송 전통시장을 대상으로 시장 활성화 사업을 위한 협의체를 구성하여 사업을 추진하였고, 2007년에서 2012년까지 동송 전통시장 시설현대화 사업을 진행하였다.
현대화 사업으로 시장 길과 오폐수관, 가스 배관, 점포 간판, 소방·전기시설 등을 정비하고, 가로등과 아케이드를 설치하였다. 또한, 시장 건물 2층에 공동 화장실과 고객 쉼터를 마련하였고, ‘2013년 전통시장 및 상점가 시설현대화 사업’을 하여 주차장을 조성하였다. 2019년 7월 30일, 강원도청 및 강원경영단체연합회 등 관련 기관의 관계자 250여 명이 동송 전통시장을 방문하여 ‘오늘은 돈 쓰는 날! 돈 들고 모이자!’ 라는 슬로건 아래 소비 촉진 캠페인을 개최하였고, 소비 촉진 캠페인의 일환으로 장보기 행사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6-4. 동송 전통시장은 상설시장인가?
동송 전통시장은 총 250여 개의 점포가 영업하고 있는 철원 최대 규모의 재래시장으로 1981년 개장했으며, 상설 점포와 동시에 5, 10일마다 5일장이 운영되고 있다. 이 시장은 전통 5일장과 상설 점포가 동시에 존재하는 시장이다. 그래서 5일장이 열리는 5일·10일·15일·20일·25일·30일에 시장을 방문하지 않더라도 상설 점포가 존재하기 때문에 아무 문제없이 시장을 둘러보면서 물건 구매가 가능하다.
6-5. 화천군
사진을 봤을 때 철원의 오일장을 방문하는 타 지역 사람들의 분포는 강원도 화천군과 경기도 포천시가 생활권으로 볼 수 있다. 와수 전통시장은 김화읍에 있는 시장인데 근처에 있는 와수 터미널과 강원군 화천면 상서면에 있는 다목리 버스터미널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화천에 살고 있는 일부 주민들이 5일장을 방문하기 위해 다목리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와수 터미널로 온 뒤, 근처에 있는 와수 시장과 와수 전통시장을 방문하는 이동경로가 예상된다.
6-6. 연천군
경기도 연천군은 강원도 철원군 남서쪽에 있고, 경기도 내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행정구역으로 5일장도 두 개(연천 5일장, 전곡 5일장)밖에 없을 정도로 굉장히 작은 지역이다. 이곳은 철원과 붙어있는 행정구역이지만 버스터미널이 연천읍과 전곡읍에만 존재하고 버스로 방문할 수 있으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이동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6-7. 포천시
경기도 포천시는 강원도 철원군 남쪽에 위치한 행정구역이다. 5일장이 4곳, 시장이 3곳이 있을 정도로 행정구역이 넓다. 포천시 자체가 경기도 내의 기초자치단체 중에서 면적이 3번째로 넓은 만큼 인구가 분산되어 중심 상권이 빈약한 편이고, 지역을 대표하는 핵심 상권이 없다. 그래서 대부분 의정부시로 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한탄강 북쪽에 있고 포천 시내가 철원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는 포천시 간북면의 경우엔 상대적으로 가까운 철원 동송시장을 많이 방문하게 된다.
<7. 철원의 의식주>
7-1. 철원의 의생활
- 개설
강원도 철원군에서 의생활은 식생활, 주생활과 함께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의생활은 기후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생활양식에 따라서도 제약을 받는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을 통하여 들어온 양복과 양장이 서서히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6·25전쟁 이후로는 나일론을 소재로 하는 의복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박정희 정권에서 전개된 ‘새마을운동’, ‘신생활 재건운동’은 의복에도 영향을 끼쳐 남성 복장으로는 작업복 스타일의 ‘재건복’을, 여성 복장으로는 ‘신생활복’을 간소화한 의복으로 권장하였다. 그 결과, 양장이 일상복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한복은 의례를 치르는 때에만 입게 되었다. 최근에는 의례를 치를 때에도 한복을 입는 일이 드물다.
- 종류
철원군에서 과거에 전통적으로 입었던 옷은 한복이다. 한복은 언제 입느냐에 따라서 평상복, 예복, 상복 등으로 구분할 수 있으나 근래에는 대체로 예복이나 상복, 혹은 제례복으로만 입는다. 누가 입느냐로 구분할 수 있는데, 먼저 남자 의복으로는 바지, 저고리, 마고자, 두루마기, 도포, 토시, 버선, 대님, 행전 등이 있다.
현재는 도포 정도만 제사를 지낼 때 간혹 입는다. 여자 의복으로는 저고리, 치마, 배자, 단속옷, 장의, 적삼, 버선 등이 있다. 자녀들이 혼인할 때 어머니들은 한복을 입는 경우가 가끔 있다. 아이 의복으로는 아이가 태어나기 직전에 배안에옷[배냇저고리]를 만든다. 배냇저고리는 깨끗한 무명이나 아버지의 옷을 활용하여 만든다. 배냇저고리에는 옷고름을 따로 만들지 않는다.
- 변모
의복의 종류를 나눌 때에 소재도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의복의 소재로는 모시와 삼베, 명주와 목화 등이 쓰인다. 강원도에서는 목화를 많이 재배하지 않았으나 삼베와 명주는 많이 생산하였다. 의복을 스스로 만들어 입었던 과거에는 집집마다 직물을 짜는 도구들이 있었다. 밭에서 키운 삼을 삼베로 짜기 위해서는 돌갯[돌꼇], 물레, 베틀 등의 기구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합성섬유를 활용한 옷들이 대량으로 생산되면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의복을 만드는 일은 거의 사라졌고, 직접 만들어 입기보다는 가게에서 사서 입는 식으로 변화하였다. 요즈음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혼인을 치르는 경우를 제외하면 예복으로 한복을 입는 경우도 많이 사라졌다. 상복의 경우도 검은색 양복 등으로 대체되면서 간략하게 건, 상장, 완장 등만을 찰 뿐이다. 제례복의 경우에도 시제 등의 행사를 제외하면 전통적인 의복으로 갖춰 입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7-2. 철원의 식생활
- 철원의 주식, 부식
전통적으로 철원군 주민의 생업은 대부분 농업이다. 농업에 종사한다고 하더라도 주거지에 따라 식생활에 차이가 있다. 평야지대의 농업 주민은 쌀농사를 많이 지으므로 주식은 쌀밥을 먹는다. 현재 산간지대 주민의 주식은 쌀밥이지만, 과거에는 밭작물을 활용한 음식을 주식으로 삼았다. 감자·밀·보리·옥수수 등의 밭작물은 중요한 식량이었다.
이 가운데 감자는 그대로 쪄서 먹기도 하지만, 작은 감자와 병든 감자는 썩혀서 가루를 만들어 그 가루로 떡을 하거나 가루 채 쪄서 먹기도 하였다. 옥수수도 쪄서 먹지만, 말려서 감자·쌀·보리쌀에 섞어서 먹기고 하고 가루를 만들어 가공하여 먹기도 했다. 또한 칡뿌리를 캐 찧어서 녹말을 내어 먹는 경우도 있었다. 부식은 무·배추 등 집에서 경작하는 것도 있지만, 도토리·도라지·더덕·버섯·기타 산채로 충당하기도 하는데, 이 가운데 경제성이 있는 식물은 시장에 팔기도 하였다.
- 철원의 대표음식
철원의 식생활을 대표하는 것은 쌀이다. 철원 평야는 강원도 내 제1의 평야로 현무암이 풍화된 비옥한 토양을 지니고 있어 논농사에 적합하다. 여기서 재배되는 쌀은 ‘철원오대쌀’이라는 브랜드로 전국에 유통된다. 또한 이를 가공하여 만드는 철원 오대쌀 생막걸리는 철원을 대표하는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약초로 활용되는 삼지구엽초도 철원을 대표하는 음식 가운데 하나이다. 철원의 깊은 산속 음지에서 자라는 삼지구엽초는 이름 그대로 한 나무에 3개의 가지와 9개의 잎이 나는 독특한 약초이다. 옛날 진시황이 먹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으며 잎을 채취하여 차를 끓여 먹는다.
- 철원의 도구와 변모
식생활에 필요한 용기는 목기나 질그릇을 많이 썼지만, 지금은 대개 시장에서 플라스틱, 사기, 유리 등으로 만든 그릇을 사서 사용한다. 철원을 대표하는 음식 가공 도구인 맷돌은 주문 제작해서 판매하기도 한다. 그리고 수익 작물의 재배로 식생활의 변화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산간 특유의 지리 풍토적 조건으로 감자나 옥수수보다 훨씬 경제성이 좋은 작물을 재배하여 높은 수익을 올려 주식 작물은 전혀 재배하지 않고 쌀을 주식으로 삼는 산간 주민도 많아졌다.
7-3. 철원의 주생활
- 개설
철원 지역의 주택은 생활의 근거로 풍토적 조건과 생활양식에 따라서 그 모양과 구조를 달리한다. 강우량이 많은 철원 지방은 비와 추위를 막기 위하여 지붕의 경사를 급하게 만든 반지하식 가옥에서 출발하여 지상에 돌과 흙으로 담을 쌓아 지은 토담집으로 변모하였다. 그 후에는 나무와 볏짚을 사용하여 초가집을 짓고 살았다. 이곳 사람들은 집을 지을 때 집의 정면이 남쪽을 향하도록 하고, 집의 형태는‘ㄱ’자 형으로 지었다. 그러다가 ‘ㄷ’자 형태로 다시 변화하였다. 초가집에서 기와집으로, 다시 양옥으로 변모하였다.
- 철원의 전통가옥 구조
철원군의 일반 주택에는 안방, 건넌방, 윗방, 마루방, 부엌, 사랑방 등이 있다. 중류 이상의 규모가 큰 주택에는 일반 주택에 있는 공간 외에 행랑방, 청지기방, 창방과 각종 광이 있다. 또 독립된 건물인 별당과 사당이 있는 경우도 있다. 주택은 북부형 주택, 남부형 주택으로 구분된다.
북부형은 내분형으로 한 지붕 안에 부엌, 안방, 윗방, 아랫방 등을 포함한 양통형 또는 전자형(田字型)이라고 부르는 구조로 되어 있다. 남부형은 겹집이 아닌 외줄 집으로 겉으로 뻗어가는 외연형이다. 이렇게 철원군이 북부형 주택과 남부형 주택으로 구분된 이유는 철원이라는 지역 자체가 굉장히 넓고 영동 지역보다 영서 지역이 집의 양식이 다양하고 주택 양식이 겹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집이라고 하여 부엌이 붙은 안방 하나만의 빈약한 주택도 있다. 전통가옥의 재료는 나무와 흙·돌·회·기와·짚 등이 있다. 가장 중요한 재료는 나무이고, 그 가운데서도 적송이 매우 중요하다. 기와와 짚으로 만든 지붕 외에 너와집과 굴피집도 있다. 1960년대 지붕 개량 등을 하면서 슬레이트 지붕이 보급되기도 하였다. 근래에는 서양식 주택이 들어왔고, 아파트 등이 늘었다.
- 그 외 건물
철원 노동당사는 광복 이후 북한 정권이 세운 건물이다. 1946년 초에 북한 정권 하에서 착공하여 지상 3층에 대지면적 3,115㎡[942.29평], 건축면적 386㎡[117평], 연면적 1,118㎡[338.4평], 연건평 1,917㎡[580평] 규모의 건축물로 신축하였다. 조적식 기둥 및 벽체로 수직재를 이루고 있으며, 보 및 글라브는 철근 콘크리트 수평재로 수직재와 결구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천장은 목조 삼각형 지붕 틀을 사용한 흔적이 있다. 입구의 1층에 원기둥 두 개를 세워 현관을 두었으며, 그 위에는 아치로 장식하여 정면성을 부각하고 있다.
<8. 철원의 관광>
관광명소
8-1. 철원9경
- 고석정
조선 초기 임꺽정의 활동무대로 널리 알려진 전설 있는 국민관광지이다. 1977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된 고석정은 한탄강 중류에 위치한 철원구경의 하나로 강 중앙에 10m 높이의 거대한 기암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이 특이한 남한 대륙의 유일한 현무암 분출지이며 조선조 초기 임꺽정의 활동무대로도 널리 알려져 있어 많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 곳에서 상류로 약 2km 지점에 직탕폭포와 하류 약 2km 지점에 순담이 위치해 있으며, 또한 철원DMZ 평화관광안내센터가 있어 평화관광도 함께 할 수 있는 관광의 최적지이다.
- 매월 대폭포
철원군 복계산 매월대 정상에서 동쪽으로 1㎞ 정도 위치에 있는 폭포로 철원 9경 중 하나이자, 철원의 3대 폭포에 속한다. 매월당 김시습의 호를 따 매월 대폭포라 칭하며, 다른 이름으로 선암폭포라고도 불린다.
- 삼부연 폭포
철원9경의 하나로 폭1m에 높이 20m 규모의 명승지로 철원군 갈말읍에 위치해 있다. 폭포수가 높은 절벽에서 세 번 꺾여 떨어지고, 세 군데의 가마솥 같이 생긴 곳에 떨어진다 하여 이름 붙여진 곳이다. 철원 9경 가운데 하나이며 경치가 빼어나 조선후기의 화가 겸재 정선이 이곳을 지나다가 진경산수화를 그렸다고 한다.
- 소이산 재송평
작지만 큰 명산인 소이산은 해발 362m로 때묻지 않은 자연과 넓은 평야를 내려다보는 전망을 자랑하는 곳으로 전방지역으로는 각 고지와 태봉국도성지, 평강고원 등을 바라 볼 수 있고, 대마리 방향으로 보이는 봄철 풍광은 마치 염전에 물을 담아 놓은 것처럼 고요함을 느끼게 한다. 또한, 자연 그대로의 오솔길을 걸으며 소이산이 간직한 생태환경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생태숲길과 지뢰안전지대와 GOP를 연상케 하는 지뢰꽃길은 분단된 우리의 역사와 그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을 표현한곳으로 많은 관광객을 불러오는 둘레길(한여울길 5코스)이 되었다.
- 송대소 주상절리
송대소에 위치한 주상절리의 형태는 뜨거운 용암이 식으면서 부피가 줄어 수직으로 쪼개짐이 발생하여 만들어졌으며 대체로 5~6각형의 기둥형태가 흔하다. 철원은 옛 하천을 따라 현무암이 흐르고, 이 현무암을 하천이 다시 깎으면서 절벽을 만든 형태를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관찰할 수 있다. 철원이 자랑하는 수직적벽은 무엇보다 높이 30m 위용을 자랑하고, 그 절벽 높이보다 더 깊어 보이는 비취색 한탄강물의 조화는 보는 이의 탄성을 절로 나오게 한다. 또한, 꽁꽁 얼어붙은 한탄강의 물줄기를 따라 하류에서 상류로 거슬러 강 위로 걸으면서 보는 푸른 하늘과 반영되는 모습은 마치 굽이굽이 돌아서는 한탕강과 잘 어우러져 펼쳐진 협곡의 풍경은 신비롭기만 하다.
- 순담
하얀 천연 모래밭의 아름다운 계곡이다. 철원군청에서 북서쪽 5km정도 떨어진 순담은 한탄강 물줄기 중 가장 아름다운 계곡으로 알려져 있으며 기묘한 바위와 깎아 내린 듯한 벼랑, 연못 등이 많으며 물도 많을 뿐 아니라 계곡에는 보기 드문 하얀 모래밭이 천연적으로 형성되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연중 끊임없이 찾고 있는 명소이며 뒷편에는 래프팅 장소로 최적지인 뒷강이 위치하고 있어 래프팅 동호인들이 즐겨 찾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용양 늪
DMZ 생태평화공원은 환경부, 국방부와 철원군이 공동협약을 맺어 전쟁 ․ 평화 ․ 생태가 공존하는 DMZ의 상징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조성된 곳이다. 용양보 한가운데에는 전쟁 이후 DMZ 경계근무를 섰던 병사들이 오가던 출렁다리가 세월의 풍상에 낡고 떨어져 나가서 이제는 지지대가 되는 철선만이 앙상하게 남아철원에서만 볼 수 있는 절경이 되어있다. 지난 60년간 사람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은 용양보에는 왕버들 군락이 분포하는 아름다운 습지를 볼 수 있고, 계절별로 가마우지, 두루미, 고니 등의 철새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 직탕폭포
한탄강의 맑은 물과 풍부한 수량으로 자연미가 넘치는 곳인 직탕폭포는 한탄강 상류에 기암절벽과 자연적인 ㅡ 자형 기암으로 이루어진 폭포로서 그 웅장함과 기묘함 그리고 아름다움이 겹쳐 철원구경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한탄강의 맑은 물과 풍부한 수량 등으로 자연미가 넘치는 이 폭포는 절경 고석정과 불과 2km 정도 상류에 위치하고 있으며, 규모는 폭 80m, 높이3m로 속칭 "한국의 나이아가라"로 널리 알려져 있고 여름철 피서지로 최적지이며 이곳에서 잡은 민물고기로 끓이는 매운탕 맛은 일품으로 알려져 있다.
- 학저수지 여명
학저수지 일대에 서식하는 동식물 탐방과 주변 농촌문화를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기 위해 2013년 생태탐방로를 조성하게 되면서 4.5km 구간의 탐방로와 연결교량 1개소를 설치했다. 데크 및 돌망태, 전망정자, 안내판 등 편의시설을 갖추고, 한여울길 6코스로 조성하면서 관찰데크와 자연 길을 이은 탐방로를 따라 관광객들에겐 데크를 거닐며 여유로움을 느끼게 하고 사진작가들에겐 학저수지의 여명과 별일주를 담아내는 장소가 되었다.
또한, 겨울이면 저수지 풍경과 함께 기러기며 오리가 무리지어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철새와 주변에 식재한 수질정화용 수생식물을 관찰하며 철원의 청정자연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철원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변화했다.
8-2. 평화관광
- 노동당사
이 건물은 북한의 노동당사로 1946년 초에 북한정권하에서 착공하여 지상3층에 연건평 580평 규모의 건축물로 신축되었다. 조적식 기둥 및 벽체로 수직재를 이루고 있으며, 보 및 슬라브는 철근콘크리트 수평재로 수직재와 결구되는 구조로 되어있다. 천장은 목조 삼각형지붕틀을 사용한 흔적이 있으며, 입구의 1층에 원기둥 두개를 세워 현관을 두었으며 그 위에는 아치로 장식하여 정면성을 부각하고 있다. 이 건물은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북한이 공산독재정권 강화와 주민 통제를 목적으로 건립하고 한국전쟁 전까지 사용한 북한 노동당 철원군 당사로 악명을 떨치던 곳이다.
북한은 이 건물을 지을 때 성금이란 구실로 1개리당 백미(白米) 200가마씩을 착취하였으며 인력과 장비를 강제 동원하는 한편, 특히 건물 내부 작업 때는 비밀 유지를 위하여 공산당원 이외에는 동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멘트와 벽돌로 쌓은 3층 건물 구조인데 당시 이 건물 일대가 철원읍 시가지로써 한국전쟁 당시 여타 건물들이 모두 파괴, 인멸되었음에도 유독 이 건물만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견고하고 튼튼하게 지어졌는지 알 수 있다.
공산 치하 5년 동안 북한은 이곳에서 철원, 김화, 평강, 포천 일대를 관장하면서 양민 수탈과 애국인 사들을 체포·고문·학살 등 만행을 수없이 자행하였으며, 한번 이 곳에 끌려 들어가면 시체가 되거나 반송장이 되어 나올 만치 무자비한 살육을 저지른 곳이기도 하다. 이 건물 뒤 방공호(防空壕)에서 많은 인골(人骨)과 함께 만행에 사용 된 수많은 실탄과 철삿줄 등이 발견되었다. 2002년 5월 31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2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 멸공 전망대
멸공전망대는 1985년 11월 30일에 준공된 철원군 김화읍 소재의 관측소이다. 공산주의를 멸하고 북진통일을 완수하겠다는 백골장병의 의지를 담아 “멸공”이라 명명하였다. 중부전선의 심장부인 철의 삼각지대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2014년 8월 민간인에게 처음으로 개방되었다. 멸공전망대 바로 앞에 펼쳐진 비무장지대의 한탄천과 민들레 벌판에서는 수십여 종의 철새를 비롯한 각종 야생동물들을 볼 수 있으며, 북한 주민들이 살고 있는 ‘건천리 마을’, 영화 『고지전』으로 유명한 ‘오성산과 저격능선’과 ‘끊어진 철길’등 다양한 안보전적지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 백마고지 전적지
숙연한 영혼의 진혼비로 백마고지 전투에서 희생된 아군과 중공군의 영혼을 진혼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기념의 장' '회고의 장' '다짐의 장' 등 세부분으로 나누어 처절했던 격전현장을 재현하고 높이 22.5m의 기념탑을 세웠다. '회고의 장'에는 피아 전사지를 추도하는 위령비와 분향소가 '기념의 장'에는 통일의 염원과 전승을 기념하는 전적비와 함께 당시 백마부장이었던 김종오장군의 유품을 전시한 기념과 배치하였다. '다짐의 장'에는 전망대와 함께 자유의 종각도 건립하여 오늘날은 국민의 평화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 빛의 사원
빛의 사원(The Temple of Light)은 한국 근현대사를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철원 노동당사 앞에 설치되었다. 장소적 특수성을 반영한 이 작품은 사라져 가는 문자들에 둘러싸인 형태로, 평화와 공존, 상생의 의미를 사유할 기회를 제공하는 상징적 공공미술 작품이자 공공 문화예술 공간이다.
또한 철원의 기억과 시간을 현재적 맥락에서 재구성해 보존하는 기록관, 철원의 모습을 예술적 시선으로 돌아보는 전시관의 역할을 하며 철원 주민들이 문화예술로 소통 하는 공간 거점이다. 공공미술 프로젝트 [전환(轉換)]은 철원에 그어진 경계 너머 지켜야 할 가치, 삶, 의미를 재생하여 새로 운 기억과 시간, 평화의 의미가 전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 승리 전망대
철원군 근남면에 있는 승리전망대는 휴전선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2002년에 개관하였다. 승리전망대는 군사 전략적 요충지의 한 가운데 있는 해발 495m의 전망대로, 현재 DMZ에서 북한의 휴전서 감시 초소와 가장 근접한 곳이기도 하다. 즉 북한군의 이동모습은 물론, 경원선철도, 광삼평야, 아침리 마을 등 남북 분단의 현장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 아이스크림고지 두루미 생태 탐조대
‘아이스크림고지’로 더 잘 알려진 삽슬봉은 예전에 산 밑에 삽송리(揷松里 또는 森松里)라는 마을이 있어서 이 산을 삽송봉(揷松峰, 삽슬봉은 삽송봉의 구전 변형체)으로 불렀고, 또 그 모양이 흡사 투구 같다 해서 투구봉으로도 불렸다. 드넓은 재송평의 한가운데 솟아 있는 해발 219m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산이 갖는 입지적 이점은 많고도 크다고 해 한국전쟁 때는 처절한 쟁탈전과 포격이 극심했고 산이 마치 아이스크림 녹듯 흘러내렸다하여 ‘아이스크림고지’란 별명이 붙여졌다 한다.
삽슬봉은 김응하 장군의 빈장묘가 있는 여우산과 직선거리로는 불과 2km 지척에 있는데 김응하 장군이 임진왜란 때 13세의 어린 몸으로 돌아가신 부모의 장지를 찾던 중 어느 스님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여우산에서 삽슬봉까지 10리 길을 맨발로 쫓아가 졸라서 결국 현재의 위치에 장지를 정했다는 일화도 있다. 또한 삽슬봉은 고려시대에 산 정상에 봉수대를 만들어 북쪽 평강의 진촌산 봉수대와 남쪽의 할미산(구수봉) 봉수대를 연결하였다 한다. 이곳은 민통안에 위치한 곳으로 개별출입이 불가한 곳으로 DMZ 두루미 평화 타운에 문의하여야하고 겨울철엔 두루미생태탐조대로 운영을 하면서 두루미를 볼 수 있다.
- 월정리역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문구를 가진 월정리역은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에 있는 기차역으로 서울에서 원산까지 이어졌던 경원선의 간이역이었다. 신탄리역 다음 역으로, 남방한계선에 근접한 최북단에 위치해 있고 현재 남아있는 역사와 부속 시설 일체는 한국 전쟁 당시 소실된 건물을 현 위치로 이전하여 복원한 것이다. 또한 한국 전쟁 당시에 탈선한 열차의 잔해와 4001호 디젤 기관차가 역 구내에 유치되어 있다.
- 제2땅굴
제2땅굴은 북한군이 남한을 침략하기 위해 파놓은 땅굴로 1975년 3월 19일 발견 되었다.제2땅굴은 지하 50~160m 지점에 있고 총 길이는 3.5㎞이다. 땅굴 내부에는 대규모 병력이 모일 수 있는 광장이 있고, 출구는 세 개로 갈라져 있다. 제2땅굴은 철원군이 DMZ평화관광코스로 운영하고 있으며, 매년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찾고 있다.
- 철원 관광정보센터
고석정 관광지 내에 위치하고 있는 철원관광정보센터는 철원 관광을 소개하고 안내하는 중심기관이다. 기존 일차원적인 홍보물(통일관 전시물)에서 IT멀티미디어, 체험 중심의 공간으로 조성하여 정체된 안보관광의 새 전환기를 마련하고 경제 활성화를 도모하였다. 관광정보센터 1층은 169.5㎡규모로 역사(태봉국의 수도 철원), 안보, 경원선, 철원평야 등으로 구성되어있고 2층은 490.5㎡규모에 근대문화유적, 철원9경 및 관광명소 체험홍보관(한탄강 래프팅체험), 철원의 문화 및 농, 특산품으로 구성하여 철원의 역사, 문화, 관광 등 철원을 한 눈에 즐길 수 있다.
- 철원 평화 전망대
철원군 동송읍 중강리에 위치한 철원 평화전망대는 1층은 전시관, 2층은 전망대, 3층은 군부대 휴게시설로 사용하고 있다. 2층에 위치한 전망대에서는 휴전선 비무장지대를 비롯하여 북한 지역인 평강고원과 선전마을을 전망할 수 있다. 초정밀 망원경 시설과 지형 축소판이 있어 민족 분단의 현실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또한 모노레일 운행시설을 갖추고 있어 편리한 이동과 더불어 주변의 비경을 감상할 수 있다.
8-3. 강/폭포/계곡
- 담터계곡
신비를 간직한 수직절벽의 불상암과 투명하고 맑은물의 계곡이다.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상노리에 위치한 담터는 초입부터 절경을 이루는데, 용정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먹바위와 신포동을 지나서 만나는 수직 절벽 불상암(높이 약100m)은 담터 절경이라 할 만하다. 담터는 산짐승을 사냥해서 잡아먹고 나서 버린 뼈가 담을 쌓을 정도여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 한탄강
최고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한탄강 강줄기로 강원 철원군·평강군, 경기 연천군을 흐르는 강으로 길이 136km에 이른다. 강원 평강군에서 발원하여 김화 ·철원 ·포천 일부, 연천을 지나 연천군 미산면·전곡읍의 경계에서 임진강으로 흘러든다. 화산폭발로 형성된 추가령 구조곡의 좁고 긴 골짜기를 지나는데, 유역에는 절벽과 협곡이 발달하여 있다. 한탄이란 ‘한여울’ 곧 큰 여울을 뜻하는 말이다.
8-4. 산
- 금학산
학이 내려앉은 산형을 가진 웅장한 산이란 별명을 가진 금학산은 해발 947m에 이르는 철원의 대표적인 명산으로서 학이 막 내려앉은 산형을 하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기 901년 후삼국의 궁예가 송학으로부터 철원에 도읍을 정할 때 도선국사의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궁전을 짓되 이 금학산을 진산으로 정하면 명산의 힘을 받아 300년을 통치할 것이며, 만일 고암산으로 정하면 국운이 25년 밖에 못 갈 것이라고 예언한바 궁예의 고집으로 금학산을 정하지 않고 고암산으로 정하여 18년 통치 끝에 멸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산세가 험준하고 웅장하여 등산 코스로 적지이며, 산중에는 마애석불, 부도석재등 유적이 있다.
- 대성산
역사가 살아있는 태백산맥의 거봉이란 별명을 가진 대성산은 철원군 근남면과 화천군 상서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우리 고장에서 제일 높은 해발 1,174m의 큰 산이다. 이 산정에서는 서북쪽의 오성산(해발 1062m)과 근북‧근동 일대, 6‧25당시의 저격능선 격전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고, 동북쪽으로는 적근산(해발 1,073m)이 지척에 있으며 남쪽으로는 복계산(해발 1,057m)이 이웃하여 있고 복주산(해발 1,152m)과 광덕산(해발 1,046m)이 위치해 있다.
대성산은 우리나라의 척량산맥인 태백산맥중의 거봉이며 과거 6‧25전쟁 시에는 이 산을 중심으로 한 치열한 전투에서 적 사살 3만의 큰 전과를 올린 금성지구 전투를 비롯해서 싸리골 전투, 육단리 전투 등 대소간에 촌보의 양보도 없는 피의 전사(전사)를 남겼던 유서 깊은 곳이다. 대성산 북쪽 기슭에는 1959년 사라호 태풍시 경북 울진에서 이주한 마현 1리와 1968년 향군출신으로 입주 조성한 마현 2리 주민들이 피땀 어린 노력 끝에 전답을 옥토로 다듬어 부농으로 탈바꿈시킨 마을이 있다.(민통선 출입통제 지역임)
- 매월대
매월대는 생육신의 한사람인 매월당 김시습 선생과 8의사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비분한 나머지 관직을 버리고 이 일대 산촌으로 은거하여 소일하던 곳으로 복계산 기슭 해발 595m 산정에 위치한 깎아 세운듯한 40m 높이의 층암절벽(일명:선암)을 말한다. 전설에 따르면 아홉 선비는 이 암반에 바둑판을 새겨놓고 바둑을 두며 단종의 복위를 도모했던 곳이라 전해오며 그 후 사람들은 이 바위를 김시습의 호를 빌어 매월대라 부르고 매월대 정상에서 동쪽으로 1km 정도에는 매월대 폭포가 있어 사계절 장관을 이루는 명소이다.
- 명성산(울음산)
궁예가 왕권의 반란으로 쫓겨난 뒤 도망치다가 이곳에서 울었다는 일화가 함께하는 울음산이란 별명을 가진 명성산은 강원도 철원군과 경기도 포천시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923m이며 ‘울음산’이라고도 하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주로 암릉과 암벽으로 이루어진 산으로 남쪽에 있는 삼각봉 분지에는 억새풀이 많아 매년 가을마다 억새꽃축제가 열리는 곳이다.
- 복계산
전망이 뛰어나며 수림이 울창한 산인 복계산은 강원 철원군 근남면에 있는 해발 1,057m의 산이다. 한 때는 출입이 통제되었을 정도로 휴전선 가까이 위치한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매월당 김시습이 관직을 버리고 이 일대 산촌에서 생활한 것으로 전해진다. 산기슭에 매월대라는 40m 정도의 절벽이 있는데, 소나무 숲과 어우러져 비경을 이룬다.
- 빈장산
나라를 지킨 여우산이라는 별명을 가진 빈장산은 지금 동송읍 하갈리에 위치한 여우산을 말한다. 여우산을 군량봉으로 부르는 것은 임진왜란(또는 병자호란)때 이 산을 우리군사들의 식량을 쌓아 놓은 것처럼 위장하여 적을 놀라게 한데서 유래한다.
- 오성산
산세가 웅대하고 수려한 산인 오성산은 옛지도에는 오신산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철원군 근동면과 근북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1,062m이다. 태백산맥에서 분기된 광주산맥의 고봉중의 하나로 산세가 웅대하고 수려하다. 산은 사방 각 5㎞에 걸쳐 있으며 중앙에 오성산 본봉(1,062m)이 쌍두봉을 이루고, 동봉(927m), 서봉(1,050m), 남봉(781m), 북봉(920m)등이 둘러싸고 있다.
- 천불산
영험과 신묘함이 있는 전설의 산이라는 별명을 가진 천불산은 철원군 근남면 양지리에 소재하며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584.8m의 이 산은 자연적으로 솟아 나온 개개의 바위마다 불상과 닮은 형체를 가지고 있다 하여 천불산이라 호칭되고 있다.
신라 때 창건 된 철불암 위에 자리한 미륵 형상의 2개 바위와 인접한 칠대암은 수없이 많은 영험과 신묘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데 애기를 못 낳는 부인이 수십길 낭떠러지의 위험을 무릅쓰고 50여척의 이 미륵바위를 안고 돌며 자식점지의 간절한 소망을 빌면 꿈속에 수아하여 자식을 얻는 예가 종종 있었다 하여 이 같은 소문으로 전국 각처에서 많은 부녀자들이 찾아 왔던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천불산 앞을 지나는 모든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하마하여 통화하는 것이 관례처럼 내려오고 있으나 이를 어긴 이들이 벌을 받은 실례가 전설에 전해오고 있다.
8-5. 저수지/호수
- 금연저수지
한국농어촌공사 철원지사가 관리하는 농업용저수지로 금학산 자락에 있어 물이 맑고 풍부하다. 인근에 자연마을로 골말, 노가지, 못골, 사래울, 초번포가 있다. 저수량은 890천톤, 인가면적은 280ha이며 오지리, 상노리 일원에 용수를 공급한다.
- 동송저수지
일명 강산저수지라고 불리기도 하는 동송저수지는 월정역에서 제2땅굴로 가는 중간의 길옆에 위치하고 있다. 수계는 평강군 남면 학전리에 있는 보양호와 가곡 등지에서 유입되는 수자원을 이용하기 위해 1971년 착공, 1977년에 완공된 농업용 저수지로서 제방길이가 2km(1965m)로 단일제당 규모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다. 만수면적74.9ha, 총 저수지량 431만 톤이며, 유역면적1,827ha,수혜면적 805.2ha로 강산리, 하갈리, 양지리 일원에 관수하는데 철원 안보관광코스에 인접하여 좋은 관광명소가 되고 있다.
- 산명저수지
일제 강점기에 축조하였으나 전쟁으로 기능이 쇠락했고 지역 수복 후 민통선 북방의 입주영농과 출입영농이 이루어지면서 1970년대의 대규모 저수지 건설(산명지·토교지·동송지)과 함께 민통선 내 수리안전답을 위해 보강한 인공저수지이다. 수혜면적 328ha, 저수량은 3,720천톤으로 산명리, 중세리, 대마리 일원에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 용화저수지
갈말읍 신철원3리에 위치한 용화저수지는 1960년도에 자연소류지를 확장해서 사력 축조한 인공저수지이다. 저수지면적 28.47ha에 저수량은 17,770톤이며, 유역면적 1,400ha, 몽리면적은 450ha로서 지포리, 군탄리 지역에 관수하고 있는데 저수지 하류에는 삼부연 폭포가 있다. 용화동 주위 산록에서 채취한 산채는 또 하나의 자랑거리이다.
- 잠곡저수지
1992년 착공, 2003년도에 완공된 농업용저수지로 저수량 437 만톤, 수혜면적 824ha이며 잠곡, 사곡, 육단, 와수, 운장, 용양지역에 용수를 공급하며 대성산과 광덕산 기로에 있다. 자연마을인 고사리덕, 구석말, 매월동이 있다. 고사리덕은 고사리가 많다는 산골짜기에 위치해 붙여진 이름이고 구석말은 구석진 곳에 있는 마을이라 생긴 이름이고 매월동은 매월대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토교저수지
양지리 마을 인근에 위치한 토교저수지는 철원평야의 안전영농 기반 일환으로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조성하였다. 일명 전천후보(全天候洑)로 불리기도 하는데, 1972년에 토축(土築)한 대규모 인공저수지이다. 면적 338.84ha, 저수량은 165,680톤이며, 유역면적 2,370ha, 몽리면적 1,553.7ha로 양지리·대위리·장흥리·오덕리 일대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철원평화관광의 중심지인 제2땅굴 진입도로변에 위치하여, 수려한 호수경관을 형성하면서, 겨울철에는 월동 철새들의 잠자리가 되기도 한다. 겨울철 새벽에 일제히 비상하는 기러기 떼의 군무광경은 탐조하는 관광객들의 탄성을 자아내기도 한다.
- 학저수지
동송읍 오덕리 대위리 관우리에 걸쳐있는 학저수지는 일제강점기 산미증산계획에 의해 토축한 농업용저수지로 오덕리 장흥리 화지리 일원 440ha를 관개한다. 다량의 수생식물과 어종이 서식하고 주변경관이 빼어나 휴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철새들의 휴식처로 유명하다.
8-6. 대교(다리)
- 철원 한탄강 은하수교
유네스코(UNESCO)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된 한탄강유역, 수십만년의 시간이 빚어낸 현무암 협곡의 청정 자연생태인 송대소에 위치한 한여울 길을 따라 국·내외 탐방객들이 자연스러운 동선으로 탐방할 수 있도록 은하수교를 계획하였다. 한탄강은 ‘큰 여울의 강’이란 뜻으로 계곡이 깊고 여울이 커서 붙여진 이름이며, ‘한’은 크다·넓다·맑다를 뜻하고 은하수를 뜻하기도 한다.
은하수교는 풍광이 수려하기로 이름난 ‘한탄강’에 ‘철원’의 지명을 추가하고, 별들로 이루어진 길을 뜻하는 ‘은하수’로 이름 지었다. 한탄강주상절리길 1코스인 동송읍 장흥리와 2코스인 갈말읍 상사리를 연결하는 연장 180m, 폭3m의 “1주탑 비대칭 현수교”형식이고, 최대통행가능 인원은 약 2,311명으로 고려하였다.
- 태봉대교
철원 상사리와 장흥리를 연결하는 태봉 대교는 고석정 상류의 한탄강 계곡에 설치된 철제다리로 교통량 분산으로 지역주민들의 교통 불편을 해소하고자 놓였으며 교량 약 240m, 폭은 17.8m, 높이는 50m에 달한다.
- 한탄대교
한탄대교는 승일교를 대체하기 위해 지어진 다리로 승일교 바로 뒤에 설치되었다. 승일교의 차량 통행을 금지하면서 한탄대교가 다리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1997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교량 연장 166.8m, 폭 9.5m의 규모로 건설되었다. 한탄대교는 한탄강 협곡에 위치하여 비경이 수려하여 다리만큼이나 그 풍경을 보는 즐거움이 있다.
8-7.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한탄강 지질공원은 우리나라 최초로 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질공원으로서 북한의 강원도 평강군에서 발원한 한탄강과 그 하류에 위치한 임진강 합수부를 포함하고 있다. 지금의 한탄강과 임진강 일부 지역은 약 54~12만 년 전 화산폭발로 인해 형성되었으며, 그 당시 흐른 용암으로 인해 현무암 절벽, 주상절리와 폭포 등 다양하고 아름다운 지형과 경관을 갖게 되었다.
8-8. 철원 한탄강 주상절리 길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위치한 철원한탄강 주상절리 길은 총 연장 3.6km, 폭 1.5m로 한탄강의 대표적인 주상절리 협곡과 다채로운 바위로 가득한 순담 계곡에서 절벽을 따라, 절벽과 허공사이를 따라 걷는 잔도로 아찔한 스릴과 아름다운 풍경을 동시에 경험하는 “느낌 있는 길!”이다.
역사유적
8-9. 국가지정문화재
- 철원 도피안사 삼층석탑
도피안사 3층 석탑은 법당 앞에 건립된 높이 4.1m의 삼층석탑으로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법당 안에 안치된 철 불상의 명문에 의해 신라 경문왕5년(856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설과, 연화좌대를 사용한 것과 전체 형태의 비례감과 조성수법을 통해 신라하대 또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설이 있다. 언제 조성되었는지 여부를 떠나 방형 중흥의 신라계 일반형 석탑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탑은 방형 지대석 위에 8각의 기단이 축조되어있다. 기단의 하부에는 8각의 각 면에 안상이 조각되어있고, 그 위에 1장의 돌로 된 갑석이 놓여있다. 또한 갑석위에는 1장으로 된 8각의 연화대석이 놓여있는데 이곳에는 단엽 16판의 복련(覆蓮:아래로 향한 연꽃)이 돌려져있다. 그리고 그 윗면에는 각형 2단의 괴임으로써 위의 면석을 받게 하였는데, 면석에는 아무런 조식도 없다.
기단 상부에는 각형의 2단 받침과 단엽 16판의 양련(仰蓮:위로 향한 연꽃)이 조식된 갑석이 조성되어있다. 그리고 그 윗면에는 방형의 괴임3단을 마련하여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이와 같은 8각 이중기단위에 3층의 탑신부 형태는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힘든데 이는 법당안의 철조비로자나불과 마찬가지로 9세기경에 새롭게 일어나는 개성적인 지방 호족문화와 관련이 있다. 탑신은 일반형 석탑에서와 같이 방형이고 각 면에는 양 우부가 있으며, 옥개와 옥신은 각기 한 돌로 되어있다. 옥개받침은 각형이 아닌 반원형으로 제1층은 4단이고, 2.3층은 3단으로 되어있고 상륜부는 보반 만이 남아 있다.
-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불교에서 ‘피안’은 깨달음의 세계를 뜻하며. 도피안사라는 사찰의 이름은 피안으로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도피안사는 서기 865년 통일신라시대 경문왕 5년에 도선 국사가 지은 사찰로서 당시 철원의 향도 1,500명의 지원 속에 지어진 사찰이라는 점이 흥미롭게 보인다. 도피안사는 국보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보물 삼층석탑이 모두 있는 국보사찰로 그 중에서 국보 63호로 지정된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불상 뒤쪽에 139자에 달하는 명문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그 가운데 "咸通六年(함통육년)"이라는 紀年(기년)이 있어 이불상의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다. 불교에서 비로자나불은 태양의 빛처럼 불교의 진리가 우주 가득히 비추는 것을 형상화 한 것으로 광명의 부처를 의미 한다.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상의 높이는 91cm이며, 대좌까지 鑄造(주조)된 특이한 양식이다. 얼굴은 긴 편이고, 귀가 짧으며, 목에는 一線(일선)을 그었을 뿐으로 위엄이 적다.
通肩(통견)의 法衣(법의)에는 주름이 반복되어 형식적이고 무릎 폭은 넓으나 두 손이 인체에 비해 작은 편이다. 臺座(대좌)는 單瓣(단판) 세겹의 仰蓮(양련) 밑에 8각의 中石(중석)이 있고, 그 밑에 귀꽃이 달린 單瓣(단판) 伏蓮(복련) 있다. 개금 및 페인트칠 되어있던 불상을 문화재연구소에서 페인트를 제거하고 전면적으로 남아있던 개금층, 카슈층(옻칠), 석회층을 벗겨내고 귓볼을 고증 처리하는 등의 보존처리를 거쳐 현재는 철불 상태 원형을 되찾았다.
- 철원 철새도래지 (천연기념물 245호)
철원읍 내포리에 있는 샘통은 천연샘물이 사계절 내내 쉬지 않고 솟아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서 샘이 솟는 0.5ha 정도 크기의 연못을 말하는데, 이곳을 중심으로 반경 2㎞이내(약12만평)를 73.7.10 천연 기념물 245호로 지정해서 철새도래지로 관리하고 있다. 9세기 말 무렵 태봉국의 궁예왕이 이 지역에 도읍을 정하고 통치할 때부터 주민들이 거주해 왔다고 전해지며, 이곳은 철원역을 지나 월정역으로 가는 중간지점인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현무암 지반을 뚫고 솟아나오는 섭씨 15° 가량의 미지근한 온천이 겨울에도 얼지 않고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줄지 않기 때문에 300여 년 전부터 백로, 두루미, 왜가리 등 철새들의 도래지로 유명한 곳이다. 오늘날의 샘통은 6ㆍ25전쟁이후 샘통 주위에 울창했던 노송과 거목들이 자취를 감추었고 샘통 일대가 모두 농경지로 변했으나 지금도 겨울(매년 10월 중순경부터 다음해 3월경까지)이면 두루미와 기러기 등 수만 마리의 철새들이 떼 지어 날아와 서식하고 있으며 샘물을 이용한 크고 작은 보가 설치되어 주변 200여 정보의 농경지에 관수를 하고 있다.
- 한탄강 대교천 현무암 협곡 (천연기념물 436호)
주상절리는 용암이 굳어지면서 기둥형태를 이룬 모양을 말하는데 이와 같은 형상은 동송읍 장흥리 대교천 현무암 협곡층 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한탄강 유역은 한반도 제4기의 지질 및 지형발달사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대교천은 한탄강의 지류이나 하상에 현무암층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탄강 유로였던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을 하고 있다.
대교천이 한탄강으로 유입하는 부근의 기반암은 주라기 화강암으로 대교천 현무암 협곡의 폭은 25m~40m이고 높이는 약30m로서 협곡의 곡저 또는 하상과 곡벽에서는 화강암을 부정합으로 피복한 제4기 사력층 또는 추가령 현무암의 부정합면, 곡벽에서 관찰할 수 있는 용암류 단위와 주상절리 등이 있다. 대교천 협곡은 제4기 지질 및 지형 발달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한탄강 유역에서도 가장 수려한 자연경관을 이루고 있어 천연기념물 제436호 지정 보호하고 있다.
8-10. 국가등록문화재
- 구 철원 제2금융조합 건물 터
본 금융조합은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현재는 철근콘크리트로 건축된 금고만 극히 일부 남아있고 금고만이 철근콘크리트구조로 건축되었으며 나머지부분은 블록구조로 이루어져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곳은 1936년 이전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금융(은행) 건물로서 당시 사용된 콘크리트블록이 남아있어 건축 재료사적으로 귀중한 유적지이다. 1936년 당시 구 철원 시가에는 석산은행 철원지점을 비롯하여 동주금융조합, 철원금융조합, 철원 제2금융 조합 등 4개의 금융기관이 있었는데 본 조합은 그중의 하나로서 총자산은 49만원 일본 화폐에 대부 실적은 34만원에 이르렀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완전히 폐허가 된 상태이다.
- 구 철원제일교회 (등록문화재 23호)
철원 최초로 1920년 붉은 벽돌의 조적조 양식으로 건축을 완공한 후 1937년에 지하1층 지상3층 규모의 화산석과 화강석을 쌓아서 만든 석축 건물로 현부지에 성전을 재건축했다. 이곳은 1936년에 기공하여 1937년 건립된 지하1층, 지상3층 규모로 당시 신도수가 500여명에 달했으며 1919년 3.1운동당시, 강원도에서 제일먼저 시위의 도화선이 되었던 독립운동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1942년 강종근 담임목사가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다 사상법 예비 검속령에 의해 일본경찰에 구속되었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고문을 받다가 순교를 당하였다.
이후, 6.25전쟁때 공산치하에서 철원감리교회를 중심으로 기독교 청년학생들의 반공투쟁이 전개되기도 했으며, 전쟁당시 북한정권 치하에서는 인민군막사와 병동으로 사용하면서 교회지하실을 양민과 반공투사들을 고문하는 만행장소로 사용한 곳이기도 하다. 전쟁당시 폐허가 되어 현재는 그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이 파손되었다.
일본 오사카예술대학 건축과에서 1905년 이래 일본서 활동한 미 건축가 보리스의 자료 ‘Chulwon, 1936, Church Methodist Mission’ 와 ‘Chulwon, 1938, Methodist Mission House’에 철원감리교회와 목사관의 도면이 남아 있다고 한다. 1층은 소예배실 과 10개의 분반 공부방, 2층은 대예배실로 구성되어있다.
- 금강산전기철도교량 (등록문화재 112호)
철원군 김화읍 도창리에 있는 금강산 전기철도용 교량으로 1926년에 건립되었으며, 2004년 9월 4일 등록문화재 제112호로 지정되었다. 지하자원 수탈에 이용되기도 하였으며 금강산 관광용으로 운행되면서 강원도 개발에 큰 역할을 했다. 6·25전쟁 때는 북한군에 의해 군수물자 수송에 이용되었으며 이후 휴전선이 생기면서 철도의 사용이 중지되었다. 교량은 2007년 관광 자원화를 위해 50여 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금강산전철은 경원선의 중심역이었던 철원역을 시발점으로 종착지인 내금강까지 총연장 116.6km를 1931년에 「철춘철도주식회사」에서 부설하고 금강산 전기철도주식회사에서 별도관리 및 운영했는데 당시 금강산까지는 4시간 반이 걸렸다. 원래 일제는 창도(昌道)의 풍부한 지하자원인 유화철(硫化鐵)을 흥남(興南)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주민들의 강제 노력동원과 중국인들을 고용하여 1차로 1921년부터 1926년까지 부설하고, 2차로 1926년부터 1931년에 걸쳐 창도에서 내금강까지 부설하면서 전기시설로 전환하고 금강산 관광과 자원수송을 병행하였다.
이 전철은 매일 8회 운행하였으며 내금강까지의 요금은 당시 쌀 한 가마 값인 7원 56전으로 보통사람들은 엄두도 못 냈다고 한다. 1936년 당시 연간 이용객은 약 15만 4천여 명 정도 였다. 정연리 한탄강 계곡에 남아 있는 전철교량은 2004년 9월 4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12호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
- 철원 농산물검사소 (등록문화재 25호)
이 건축물은 1936년에 농산물검사소로 지상2층, 연면적 135㎡ (40.9평) 규모의 시멘트벽돌 조적조 건축물로 신축되었으며, 벽체는 두꺼우며, 외부 창은 상하가 긴 형태를 하고 있다. 지붕은 목조 틀로 형태는 팔작(합각)형태지붕에 시멘트기와를 올린형태로 경사도는 낮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철원 농산물검사소는 철원지방의 넓은 평야에서 나오는 각종 농산물의 품질을 검사했던 기관의 건물이다. 이 지역의 풍요로움을 보여주듯이 검사소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졌음에도 비교적 잘 구성되어있다. 이 건물은 북한정권하에서 검찰이 주로 반공인사들을 색출. 취조 하는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일제시대 (1936년 당시) 원명은 곡물검사소 철원출장소로서 현재 구 철원 시가지 유적 중에서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건물이다.
- 철원 수도국 터 급수탑 (등록문화재 160호)
강원도 내의 최초 상수도 시설로 수도국지는 일제시대에 구(舊)철원 시가지 주민의 상수도 공급을 위해 설치한 저수(貯水)탱크 및 관리소 (管理所)건물이다. 1937년에 발행된 철원읍지(鐵原邑誌)에 의하면 당시의 급수인구(給水人口)는 500가구에 2,500명이었고, 1일 급수 가능량은 1,500 입방미터로서 강원도 내 유수(有數)의 상수도 시설을 자랑했다.
수도국 터 급수탑은 6·25전쟁 당시 국군이 북진하자 북한 공산당은 패주(敗走)하면서, 노동당사와 내무서 등에 감금했던 인사들을 분류하여 반공정신이 투철한 사람들을 이곳으로 이송 조치하고, 약 30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총살하거나 지하 6미터의 저수탱크에 생매장하고 도주한 학살 현장이라는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2005년 4월 15일 등록문화재 제 160호로 지정되어 보존·관리되고 있다.
- 철원 승일교 (등록문화재 26호)
소련식유럽공법의 철근 콘크리트 라멘 조 아치교로서 교량의 조형미 가 돋보이는 교량높이 35m, 길이120m, 폭 8m 로, 철원농업전문학교 토목과 과장 김명여 교사가 설계한 것으로 1948년에 착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새로 놓여진 철교로 인해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이 다리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북한이 시간차이를 두고 완성한 남북합작의 다리이다. 큰 아치위의 상판을 받치는 작은 아치의 모습이 서로 다른 것은 시공자가 달라지면서 생긴 현상이다.
원래 이 다리가 놓여진 곳은 철원읍을 가로지르는 한탄강의 남부와 북부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예전에는 얕은 여울에 돌다리를 놓아 사용하고, 수위가 높아지면 목선을 이용하던 곳에 1948년 8월 이 도로를 군사적 연결로로 사용하려는 목적으로 북한정권하에서 교량설치공사를 시작하였다. 당시 철원 및 김화 지역주민들이 5일간 교대제의 노력공작대 라는 이름으로 총동원되어 한국전쟁 초까지 다리 기초 공사와 2개의 교각을 세워 북쪽 부분은 거의 완성되고 남쪽부분은 남게 되었다.
그 이후 이지역이 수복되어 국군에 의해 임시목조 가교가 놓여 있다가 1958년 12월 미완성된 부분이 마감되어 다리가 완공되었다. 원래 “한탄교”라는 이름으로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지도상에도 ‘한탄교“라고 명기 되어있다. 이 다리 이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북한이 절반가량 완성했다가 남측이 나머지부분을 완공해 이승만 대통령의 ”승“자와 김일성의 ”일“자를 합해 이름을 붙였다한다.
- 철원 얼음 창고 (등록문화재 24호)
이 건축물은 1946년에 건립한 얼음보관창고로서 지상1층 박스형태의 건축물로 연면적 108.68 ㎡(32.8 평) 규모의 철근 콘크리트 조 건축물로 신축되었다. 일제시대에 일본인이 식당을 운영하면서 세운 콘크리트 건물로 겨울에 인근 산명호의 얼음을 채취하여 이곳에 보관한 후 여름에 사용하던 얼음보관창고로서 한국전쟁으로 거의 파괴되어 현재는 건물 벽의 잔해만 남아있다.
8-11. 시, 도 지정 문화재
- 고석정 및 순담 (지방기념물 8호)
고석정은 한탄강변에 있는 정자로 세운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과 고려 충숙왕(재위 1294∼1339)이 여기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그 외에도 고려 승려 무외(無畏)의 고석정기와 김량경의 시 등이 있다. 전해 내려오는 유명한 이야기는 의적 임꺽정이 고석정 앞에 솟아 있는 고석바위의 큰 구멍 안에 숨어 지냈다는 일화이다.
이 바위에는 성지, 도력이 새겨져 있고 구멍 안의 벽면에는 유명대, 본읍금만이라고 새겨 있다. 현재 2층 정자는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져 1971년에 콘크리트로 새로 지은 것이다. 순담은 고석정에서 2㎞ 떨어진 곳에 있는 계곡을 일컬으며, 조선 영조때 영의정을 지낸 유척기(1691∼1767)가 요양하던 곳이다. 이름의 유래는 순조 때 우의정을 지낸 김관주(1743∼1806)가 20평 정도의 연못을 파고 물풀인 순채를 옮겨다 심고서 ‘순담’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곳은 기묘한 바위와 깎아 내린 듯한 벼랑 등으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계곡에서는 보기 드문 하얀 모래밭이 천연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 요동백김응하장군 묘비 (유형문화재 105호)
요동백 김응하 장군묘정비는 조선왕조 광해군때(1619) 명나라군 주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조선 원군의 좌영장으로 출정하여 이름을 떨친 충무공 김응하 장군의 무훈과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 9년(1683)에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향교골(전 철원부 서화전리 일봉산 밑 역촌동)에 세운 기념비이다. 화강암의 석재를 사용하여 정면을 응시한 거북이 조각 받침을 한 위에 250cm의 높이와 폭 98cm, 두께 33cm의 사면 비석으로 장군의 일대기를 현종 10년(1669) 6월 우암 송시열(좌의정)의 글과 사헌부 지평 박태유의 글씨에 영의정 문곡 김수향의 전서제자를 곁들여 제작하였다.
당초에는 화지리 향교골 포충사에 함께 있었으나 6ㆍ25전란으로 포충사우는 소실되고 비만 남아 있었는데 당시 이 고장 출신으로 육군 제3군사령관이었던 이세호 장군이 1974년 2월 사령부 연병장으로 이전 보호 중 1984년 4월 3일 철원의 유생 및 철원군수의 노력으로 원위치에서 남쪽으로 2km 떨어진 곡암산 기슭인 철원읍 화지리 산 1 –1번지에 봉안하였다.
- 철원 갈말읍 토성(鐵原 葛末邑 土城)
남대천 하류에 위치하며 이 성곽으로 인하여 토성리(土城里)라는 마을 이름이 생기게 되었으며 『대동여지도』에도 토성리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부르던 호칭임을 알 수 있다. 이 성은 우리나라에서 드문 평탄한 곳에 점토를 재료로 정방형으로 성축된 특이한 성이다. 성벽 전체 길이가 약 1km이나 경작 등의 인위적인 파손과 재료의 취약점으로 인하여 심하게 훼손된 상태이다.
성벽의 잔존한 높이는 10m이고, 하부너비는 약 9m 상부너비 약 4m이고 성내의 넓이는 62,500㎡(18,906평)로 당시에는 큰 성이었다. 성내 경지에서 당시 주거했던 흔적과 선사시대 유물들인 무문토기와 석기류등 생활용구들이 출토된 바 있고 성벽의 전체적인 평면구조는 방형이고 평지성인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읍성의 성격이 짙다. 구전에 의하면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당시 용골대 마태부의 호군이 하루 밤사이에 성축했다는 전설이 있으나 성의 축조 시기는 그 이전이 확실하다.
수복이후 수차례 문화재 전문위원들이 현지답사와 감정에 의해 삼한시대에 성축된 중요한 성지라 평했으며 그 후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현재 오랜 풍상과 경지 정리 등 변형으로 인하여 삼면의 성벽은 완폐 되었으며 일면의 성곽이 남아있다.
- 철원상노리지경다지기 (무형문화재 9호)
제40회 한국민속예술축제 및 제16회 강원도민예술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상노지경다지기”를 전승 · 보존하기 위하여 2000년 7월 1일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 9호로 지정 고시되었다. 지경다지기란 얼었던 땅이 녹을 무렵인 3-4월과 초가을 저녁에 마을사람들이 모여 횃불을 밝히고 달구 혹은 달궁이라고 하는 지격목이나 지경돌을 들어 올렸다 내렸다 하여 집터를 단단히 굳히는 전통사회의 보편적인 풍속 활동을 뜻한다.
지경다지기는 길놀이-터 잡기-개토제-가래질 작업-지경다지기-집 세우기-놀이마당, 퇴장의 과정으로 총 7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철원군 동송읍 상노2리에 연건평 100평 규모의 민속관 1동과 놀이마당을 조성하였는데 민속관에는 민속놀이과정이 대형 벽화로 제작되어 있고, 지경목 등 민속자료와 소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민속놀이를 영상시스템을 이용 감상할 수 있다.
- 철원성산성 (지방기념물 78호)
성산성은 철원군 김화읍 읍내리 성재산(해발 471m)에 위치하고 있는데, 평강 방향에서 철원·화천·회양으로 가는 길목을 매우 유리한 지점에서 감시하며 방어할 수 있는 곳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성산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현의 북쪽 4리에 있고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489척, 높이가 4척이다.’라고 나타나 있다. 또한 일제시대 이후에는 가등산성(加藤山城)으로 불렸다고 전해온다.
이 산성은 전체적으로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게 되어 있는데, 성벽의 총길이는 982m이며, 높이는 일정치 않으나 잔존부와 매몰부분을 감안할 때 7m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은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붕괴되었으나 서남쪽 성벽은 상당히 양호한 상태로 잔존하고 있다. 특히 서남쪽 문터를 비롯한 주변 구간에는 높이 5m, 길이 50m 정도의 성벽이 잘 남아 있다. 성벽은 자연석을 다듬어 사용하거나 성내에서 채석 한 성돌을 사용하였는데, 현재 성내 곳곳에 채석하여 사용하다 남은 석재가 남아 있다.
한편 동·서벽에서 중세 일본의 산성에서 흔히 나타나는 횡굴(橫堀)의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북벽 동쪽 끝과 북벽 서쪽 끝 2곳에 밖으로 돌출된 치성(雉城)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성문터는 서남쪽 문터와 남문터에 남아 있으며, 이외에 동벽과 북벽 등지에 문터로 추정되는 곳이 3곳 있다. 산성 안의 북쪽과 남쪽 부분에는 주춧돌들과 다량의 다양한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어 건물터가 있었던 곳으로 보인다.
성내 기타 시설로는 우물터, 성황당터, 채석장 등이 발견되었다. 성내에서는 다양한 기와조각과, 청자·백자 등 자기조각, 토기·도기조각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이 산성은 축조방식이나 성내에서 수습되는 유물 등을 고려할 때 최소한 통일신라 시기에는 이미 존재하였던 산성으로 그 후 후삼국시대, 고려·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계속 수리되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일본식 성곽 구축 방법인 횡굴의 흔적도 있어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주둔하였던 곳으로도 판단되는 산성으로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고, 우리나라 산성 및 축성법 연구에 학술적인 가치가 크다.
- 철원지석묘군 (지방기념물 22호)
청동기시대 축조된 거대한 탁자형인 북방형 지석묘로 원래는 7기의 지석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2기가 남아 있다. 토성리 제 1호 지석묘는 마을 한가운데 있고 제 2호 지석묘는 북쪽으로 약 1km 떨어진 밭가에 있다. 1호 지석묘는 탁자식으로 덮개돌 아래에 4개의 받침돌로 돌방을 만들어 매장시설을 준비하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마구리도 1매는 없어졌다. 개석의 크기는 410×308×26㎝이며 들어난 석실의 크기는 150×58×55㎝로 규모가 큰 편이다.
2호 지석묘는 탁자식으로 덮개돌 아래에 마구리돌 1개가 없어지고 현재 받침돌 3개만 남아있고 크기는 238×227×46㎝이고, 석실의 크기는 120×53×85㎝이다. 석실 바닥에는 잘돌 들이 깔려있으며 유적지 부근에서 마제석기류와 무문 토기 류가 출토되었으며, 석기 유물 20여점이 보관되어 있다. 이러한 지석묘군의 존재와 출토된 유물들로 추정해 보아 이 일대에 당시 사람들의 주거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철원충렬사지 (지방기념물 72호)
홍명구공은 조선조 선조29년(서기 1596년) 8월 함의 홍성익의 아들로 경기 연천에서 출생하여 23세에 과거에 급제한 후 조정의 주요 내직과 외직(경상도 평안도 관찰사)을 두루 거친 문신이며, 병자호란때 김화 진터골에서 적군을 맞아 격전하던 중 인조 15년(서기 1637) 1월 28일 42세를 일기로 장렬히 전사한 호국의 충신이다.
서기 1636년 병자호란때는 평안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평안도 병마절도사 유림장군과 합세하여 전투조건이 양호한 김화 오성산(김화읍 생창리)의 진터골에 진지를 구축하고 의용병 삼백과 근왕병 이천여명을 지휘하여 청군대장 마부대와 용골대의 대군을 무찔렀다. 싸움이 격렬한 중에 부하 한사람이 공에 피할 것을 권했으나 공은 “군부가 위급을 당했는데, 내 어찌 목숨을 아끼겠느냐, 끝까지 전진하여 칼이 부러질 때까지 싸우다 죽는 것이 마땅하다.” 하면서 결전을 독려하다 순절하니 나라에서는 공에게 이조판서를 증하고 충열이라 시호를 내렸다.
충열비는 조선조 인조23년(서기 1645년)5월 공이 전사한 김화읍 생창리(향교골)에 유림장군 대첩비와 동일형으로 나란히 건립(충열비는 우측, 대첩비는 좌측)했는데, 높이 194㎝, 상부폭 94㎝, 하부폭 77㎝, 평균두께 20㎝로서 4개의 석초와 이중석단형식으로 된 화강암 비석이다.
8-12. 문화재자료
- 동송읍마애불상 (문화재자료 33호)
금학산(947.3m)의 중턱에 소재한 마애불상(磨崖佛像)으로 금학산 동쪽자락에 위치하며 동남향을 향해 서있는 입상이다. 이곳의 사찰과 불상 및 석탑 등의 조성연대는 문헌상에 남아 있지 않아 미상이지만 인상(印相)과 범의(法衣)형태로 미루어 볼 때 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마애불상은 큰 자연석암(화강암)을 이용하여 음각된 것으로 온화한 미소와 옷자락을 잡은 법의가 양쪽으로 퍼지는 듯한 조각미의 형태는 신라시대의 기법으로 추정된다. 머리에는 반달 모양의 높다란 육계가 있고 원통형의 굵은 목에는 삼도(三道:세 줄의 주름)가 뚜렷하게 남아 있다. 얼굴은 긴 타원형으로 둥근 눈썹에 원만한 상인데 코끝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완벽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마애불상의 전체 높이는 3m,폭은 2.5m, 머리 부분의 높이는 90cm의 큰 석불이다.
현재 이 유지에는 석탑과 부도의 조각된 유물과 1974년 태고종 여신도(손계용)가 미륵 암자를 짓고 수도했던 자리와 오랜 역사 속에 신도들이 불공을 드렸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불상 주위에는 석탑과 부도를 만들기 위한 고려시대 초기 양식의 옥개석과 탑신석등의 부재들과 와당등이 흩어져 있어 큰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84년 6월 2일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33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 이호민선정비 (석조물, 문화재자료 171호)
이 비석은 육면체의 석조물로 옆의 4면에 ‘□□□순찰사 이공호민 익영대’라는 글씨를 큼지막하게 새겨 놓아, 이호민을 기리고 있는 표석임을 나타낸다. 이호민은 조선 순조 1년 과거에 급제하여 그 이듬해에 어사가 되었고,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의정부참의를 지냈던 인물로, 순조 11년 강원관찰사에 임명되어 철원을 순찰하게 되었다.
철원 백성들은 이호민이 민심을 살펴 잘 다스리고 백성들을 고루 구제하는 등 많은 업적을 베푼 것에 대해 서울과 서북을 통하는 중요한 길목에 그를 기리는 표석을 세웠다. 이호민의 생애로 보아 1800년대 초에 만든 것으로 보이며, 철원 토성 내에 발견되었으나 지금의 자리에 옮겨 비각을 세워 그 안에 보관하고 있다
8-13. 사우, 사찰
8-13-1. 사우
- 구은사
철원군 근남면 사곡2리에 위치하는 구은사는 서기 1455년 단종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찬탈(王位簒奪)에 비분(悲憤)을 품고 산간으로 은거하여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조로 일생을 마친 아홉 선비(김시습, 조상치, 박도, 박재, 박규손, 박효손, 박천손, 박인손, 박계손)의 충절을 모신 사당이다.
아홉 선비는 근남면 육단리, 잠곡리, 사곡리 등의 산간 계곡에 초막(草幕)을 치고 은거하면서 권농(勸農)에 힘쓰는 한편 사곡리 속계천(束溪川)변 행화정(杏花亭)에 모여 바둑을 두면서 세상사를 논했는데 그 후 시운이 맞지 않아 각처로 뿔뿔이 흩어져 버리니 조선 인조 9년(서기 1631년)에 이르러 이지연(李止淵 : 吏曹參判)선생 등 여러 선비들이 뜻을 모아 사당을 짓고 매년 봄, 가을에 추모제를 지냈다. 서기 186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는 철폐의 비운을 맞았으나, 1921년 사당을 재건하고 6·25전쟁으로 다시 황폐화된 것을 지방 유지들의 도움으로 1977년 중건(重建)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정열부인 영평정씨 열녀문
정열부인 영평정씨 정막금은 현 김화읍 도창리(구 김화군 서면 도창리)에서 세거(世居)해오던 김명천(김해 김씨)의 처였다. 김명천(金明千)은 병자호란 당시인 서기 1637년 김화지구 기병으로 종군하고 있었다. 인조 14년(1636년) 호군들은 물밀 듯이 침입하여 김화읍의 자모산성을 함락하고 서울을 향해 진군하면서 현 도창리 부락에 이르러 민가에 무단침입 유숙하기에 이르렀다.
호군들의 침입으로 주민들은 물론 정막금도 시어머니와 어린 자녀를 데리고 삼갑산 깊은 산중으로 피난하였는데 그때 간직해야할 불씨를 꺼뜨리게 되어 부득이 동리(洞里)의 집에 내려와 불씨를 구하려하던 중 호군에게 그만 붙잡히고 말았다. 호군들은 젊은 막금을 보는 순간 욕정이 발하여 겁탈하려 달려들었다. 절녀인 막금은 끝까지 굴하지 않고 적도(賊徒)들에게 항거하였다. 호군들은 불응하는 막금을 단칼에 참수하고자 하는 순간 막금은 단설(斷舌)로 자결하였다.
인조 22년(1644년)에 절의(節義)와 열녀(烈女)의 행적을 가상(嘉賞)하고 정려(旌閭)하였으며, 열녀각을 세워 그의 넋을 기리도록 명하였다. 당시의 열녀각은 6.25 전쟁 때 소멸되었으며, 1991년 10월 26일 현위치에 재건립 되었다.
- 철원향교
철원향교는 태봉국 시절 왕건의 사저 자리(現 月下里)에 설립하였다 하나 건조년대는 미상이다. 조선 선조 원년(서기 1568년) 유림들에 의해 중건되었으며 임진왜란(서기 1595년)의 병화로 소실되었다. 그 후 인조 15년(서기 1637년) 유림들이 재건하였으며 일제치하에서는 군수 유흥종(柳興鍾)이 대성전과 명륜당 등을 중축하였는데 해방 후 공산치하에서 재산이 몰수돼 고아원으로 활용하던 중에 6·25전쟁으로 소실되었다.
1945년 수복 후 일시 포충사(褒忠祠)로 옮겨 모셔졌다가 유림들의 협조와 정부보조로 화지리로 이전하여 관리하다가 원위치 복원계획(종전 월하초교 부지)에 따라 2004년 12월에 포충사로 임시 이전하였다. 2009년 철원읍 화지리 284번지에 철원향교를 복원하여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 충열사
충열사는 조선 인조 14년(서기 1636년) 병자호란 당시 공을 세운 충열공 홍명구(忠烈公 洪命耉)와 충장공 유림(忠壯公 柳琳)을 모신 사당으로서 조선효종 때 (서기 1650년) 김화읍 읍내리 천동(泉洞)에 충열사 현판을 사액 받아 사당을 건립했으나 6·25 전란으로 사당이 완전 소실되어 1975년 9월 30일 지방 유지들이 근남면 육단2리에 임시로 건립하였다가 2000년도에 현위치로 이전 복원하고 일대를 성역화 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와 『평안도 병마절도사 유림』은 인조 14년 12월 병자호란시 청군대장 마부대와 용골대의 대군을 맞아 홍명구는 김화읍 내리 탑골(慈母山城)에 진을 치고 싸우다 42세를 일기로 장렬히 전사했으며 유림은 김화 백수봉(栢樹峯)에서 근왕병 2천명, 의용병 3백명으로 적군을 유인·섬멸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 후 조정에서는 홍명구에게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충열공의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유림에게는 좌의정을 증하고 충장공의 시호를 내렸다. 지금도 매년 춘추(음 2월과 8월)에 두 분의 명복을 비는 성대한 제향행사를 지내고 있다.
- 포충사
포충사는 원래 철원읍 화전리 역촌동에 있었으나, 6·25전란으로 파괴되고 군부통제 지역에 속하여 1990년 현위치인 철원읍 화지리 산 1-1번지 곡암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포충사는 광해군 11년(서기 1619년)에 여진족 건주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조선 원군의 좌영장으로 출정하여 3,000여 병력으로 6만의 적군과 접전 최후까지 용전분투, 40세를 일기로 장렬히 전사한 충무공 김응하 장군의 무훈과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현종 7년(서기 1666년)에 건립된 사당이다.
조선 현종 7년(서기 1666년)에 부(府)의 남4리 화전리 일봉산 기슭(역촌동)에 30간 규모의 사우를 건립하고, 현종 9년 포충사로 사액을 하였다. 현종 10년 (서기 1669년) 명나라 신종이 김장군을 요동백으로 추봉하고 우리 조정에서는 동년 6월 묘정비를 제작하였으며, 숙종 9년(서기 1683년) 송시열이 글을 짓고, 박태웅이 글씨를 쓰고,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전서로 제목을 붙여 제작한 요동백 김응하장군묘정비를 사내에 건립하였다.
8-13-2. 사찰
- 도피안사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에 위치한 도피안사는 통일 신라 시대에 만들어 진 것으로 유래되고 있다. 서기 865년에 도선국사가 화개산 현 위치를 발견하고 국보제63호 철조비로사나불좌상을 봉안하고 보물 제223호 삼층석타불을 조성한 후, 영원한 안식처인 피안과 같은곳에 이르렀다 하여 도피안사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통일 신라 시대에 지어진 도피안사는 오래된 세월만큼 우여곡절이 많은 사찰로서 유명하다. 조선시대에 재화를 입어 재건하였고 1941년에 사찰을 개수하여 전통 사찰로 이어오다 해방 후는 공산치하에, 6.25전쟁 때 완전 소실된 것을 1957년 육군 제 15사단에서 복원한 후 군부에서 관리 하던 중 민간 관리로 넘어온 후 다시 중건을 하여 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심원사
심원사는 신라 진덕여왕 1년(652)에 영원조사가 창건한 유서깊은 고 사찰로서 이어져 왔으나 6.25때 완전 소실된 것을 현재의 위치에 중건하였고, 본 사찰은 지장보살을 모시고 지장전의 도량으로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장보살 석상은 1948년 이전까지는 보개산 석대암 법당에 봉안되어 있던 이 석상은 신라 성덕왕 19년 (720년) 산돼지의 화현(化現)에 의해 탄생한 우리나라 제1생의 지장보살상이다.
<9. 철원의 유적지>
유적지
- 강원도립철원의원
철원읍 사요리(현재 노동당사 좌측)에 있었으나 6·25 전쟁 때 완전 파괴되어 지금은 기초 부분만 남아 있다. 1933년에 2층 벽돌 건물에 연면적 460평 규모로 건립되었으며, 60개의 병상을 갖고 있었다. 1937년 말 기준 의사는 일본인 5명, 한국인 5명, 치과의 1명, 약사 1명, 산파 1명 이었다. 당시 철원의원에 입원했던 환자는 연인원 6,630명, 외래환자 수는 연 25,947명이었다.
- 고석성
고석성은 갈말읍 군탄리 고석정 건너편 산정에 위치한다. 고석성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조선 명종시대에 임꺽정이라는 문·무를 겸비한 위인이 있었다. 일찍이 국정에 뜻을 두었으나 천인의 자식으로 당시 사회에서 등용될 길이 없고 또한 토호 및 관료들의 수탈과 조정의 부패에 불만을 품게 되어 학정에 신음하고 있는 서민들과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규합, 대적당을 조직하고 두목이 되어 관군에 항거하기 위하여 현 고석정 건너편에 석축으로 길이 876m, 높이 3m의 성을 축조하였다고 전해진다.
임꺽정은 이 성을 근거지로 함경도 지방에서 이 지점을 거쳐 상납되는 조공물을 약탈하여 서민들에게 분배하였으며 조정에 항거하였다. 조정에서는 관군을 동원하여 수시로 토벌을 하였는데, 이들은 이 성에서 관군과 항전하다 중과부적으로 관군에 쫓기게 되면 임꺽정은 변화무쌍한 기재를 부려 꺽지(어류의 일명)로 변하여 강물 속에 숨어 버렸다고 전한다. 현재 오랜 풍상으로 인하여 성은 많이 붕괴되고 일부 석축만 남아 있다.
- 구 철원경찰서
철원경찰서 건물은 노동당사의 좌측에 연접해 있었는데 1936년 당시에는 34명의 경찰병력을 갖고 있으면서 철원역 파출소에는 4명의 별도 경비원을 배치했었다고 한다. 해방 후에는 소련군 주둔 사령부로 사용되었으며, 6·25전쟁 당시 공산당은 이 건물 지하실에서 수많은 양민과 반공투사들을 고문·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 곳으로 알려져 있다. 6·25전쟁으로 건물은 완전 파괴되어 현재는 건물터 일부만 남아 있다.
- 구 철원읍사무소
철원읍 관전리 16번지에 있으며, 부지 387평에 연건평 96평의 단층 기와집이었다. 인구는 1936년 19,693명이었으며, 광복 당시는 37,855명이었다. 읍 재정은 1937년 148,805원이고 직원은 40여명이었다. 공산치하에서 읍 인민위원회로 사용되었고, 6.25전쟁으로 소실되어 지금은 농경지로 변모해있다.
- 김화군민 망향탑
근남면 사곡리 들판의 일명 “모기동산” 정상에 서 있는 김화군민 망향탑은 미수복 김화군민들의 망향의 애절함이 담겨 있다.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을 맞이했으나 김화군은 3.8선 이북으로 공산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6·25전쟁 후 12개 읍면 중에서 3개 읍면의 일부만 수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에 경향 각지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실향 군민들은 국토통일과 향토의 완전 수복을 기원하며 선영을 추모하는 애달픈 심정에서 군민의 뜻을 모아 1980년 6월 1일 이탑을 건립하게 되었다. 탑의 전체 높이 5.2m로 삼단기단위에 화강암의 자연석으로 건립되었으며 매년 가을 미수복김화군민들이 모여 망향제를 지내고 있다.
- 김화지구 반공합동순의비
근남면 사곡리 당고개 기슭에 위치한 이 묘역은 1948년 12월 23일부터 1950년 11월 20일 사이에 공산당에게 희생된 78위의 반공인사와 그 가족들의 합동묘역으로서 1984년에 철원군에서 묘역정비 공사를 하였다. 당초 이 지역은 3.8 이북으로 공산당 치하에 있어 공산독재에 항거하는 지하반공 활동과 화랑공작대원들의 반공투쟁이 활발했는데 1950년 11월 20일 새벽 인민군 패잔병과 중공군의 대거 재침 기습작전에 포위되어 주민 70명이 이 곳에서 무차별 집단학살을 당하였다.
당시 구사일생으로 생환한 박림환씨(화랑공작대원:작고)가 단독으로 야음을 이용하여 가매장 해놓은 것을 1955년 4월 20일 이 지역 기관장과 유지들의 성원으로 분묘를 조성하고 매년 가을 (음9.30)추도식을 거행하였다. 희생자 78명중에는 1948년 10월 23일 김화 근남 지역에서 희생된 화랑공작대원 1명과 1949년 3월 원산감옥에서 피살된 공작대원과 반공인사 7명 및 1950년 11월 20일 새벽에 집단 학살당한 70명으로서 남 56, 여 22명 가운데는 15명의 아동이 포함되어 있다.
- 대성산지구 전적비
철원군 근남면 마현리(대성산)에 위치하며 1983. 10월 육군 제 8305부대에서 건립하였다. 대성산 지구 전투는 1951년 6월 9일 국군 2사단 2, 3대대가 1041고지에서 활동 중인 중공군 제20군 58사단 177연대의 적군 병력을 섬멸하기 위해 선제공격을 개시하여 1041고지와 신월동 및 865고지를 탈취한 후 6월 14일까지 6일간 연이어 계속된 전투에서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승양고개 삼천봉 비로봉 일대를 확보하면서 김화지역을 적으로부터 사수한 전투이다.
- 동주최씨 망배단
동주최씨의 始祖는 최준옹(崔俊邕)으로 본래 신리인(新羅人) 이었으나 昌原(현재의 鐵原)에 살았으며,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 개국에 진력하였으며, 왕건이 고려 太祖(서기918년)가 된 후 개국공신 삼중대광(開國功臣 三重大匡)太師에 이르렀다. 고려말의 충신이요 명장인 최영장군(崔塋將軍)의 본관은 東州이며, 고려의 개국공신 최준옹(崔俊邕)의 후손으로, 벼슬이 벽산삼한삼중대광 문하시중 상장군(壁山三韓三重大匡 門下侍中 上將軍) 겸 판중방사 팔도도통사(判重房事 八道都統使)에 이르렀으며,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해졌다.
현재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둔지산(頓地山)에 동주최씨 시조의 4세손으로 고려조의 문종(文宗), 순종(順宗), 선종(宣宗)의 삼조(서기1047~1084)에 걸쳐 벼슬을 지낸 예숙공(譽肅公) 최석(崔奭)의 묘가 위치하고 있다. 예숙공의 묘역이 위치한 둔지산(頓地山)은 뱀의 형상을 하고 있어, 일명 뱀산이라 일컫어지고 있다. 동주최씨 대종회에서는 이곳 둔지산에 시조(始祖) 최준옹과 2세 최은숙(崔殷叔), 3세 최원립(崔爰立)의 유덕(遺德)을 추모하고, 효친애족(孝親愛族)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2002년 10월 20일 동주최씨 망배단을 세웠다.
- 명성산성(울음산성)
명성산성은 철원평야의 동남단에 위치한 해발 922.6m의 『명성산, 鳴聲山』에 조성된 석성(石城)이다. 성축된 유래는 궁예가 905년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태봉국을 통치하던 중, 심복부하들이 그를 배반하고 신숭겸, 홍유, 복지겸, 배현경 등이 왕건을 추대하게 되자 서기 918년 궁예는 그를 따르던 군졸들과 야음에 궁중을 빠져 나와 최후로 명성산에 은거하면서 이 산의 팔부능선 협곡에 70여미터의 석성을 쌓고 왕건군과 대결하였다 한다.
그러나 결국 쇠퇴해진 궁예는 부득이 이 산중에서 군사를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궁예를 따르던 군졸들이 너무나 슬피 울었다 하여 그 후 사람들은 이 산을 울음산(명성산)으로 불렀다 하는데 오늘날은 많은 등산객들이 즐겨찾는 명소가 되었다. 현재 이 산정에는 당시 궁예와 군졸들이 은거 생활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일부 성지가 남아 있다.
- 미수복지구 망배단
실향의 설움과 아픔을 함께하는 강원도 미수복 군민들이 힘을 모아 한 맺힌 소망인 조국통일의 의지를 굳건히 다지고 조상에 대한 흠모와 애틋한 향수를 달래고자 1989년 4월 철원군 철원읍 외촌리 331번지에 이 합동망배단을 세우게 되었다. 사각 단기단 위에 육각형으로 1.1m의 석대와 그위에 높이 3m, 두께 73㎝의 화강암 비신으로 조성되어 있다. 강원도 미수복 군민회에서는 매년 6월에 합동제례를 지내고 통일의 그날이 오기를 기원하고 있다.
(강원도 미수복군민회 : 통천, 회양, 이천, 김화, 평강)
- 바위그늘유적
군탄리 바위그늘 유적은 43번 국도에서 순담 계곡으로 들어가는 길 오른편(현 갈말농공단지 입구)에 위치한다. 한탄강의 동쪽 단애를 따라 형성된 해발 200m정도의 야산에서 남으로 갈래 뻗은 구릉의 끝에 있다. 화강섬록암의 기반암이 풍화하여 이루어진 바위그늘 유적으로 입구는 동남향으로 열려있고 동굴의 최대폭은 13m이며, 최대 높이는 3.1m, 최장 길이는 5m 정도이다.
굴의 입구에서 약 7m 앞에는 군탄 개울이 흐르고 이 하천을 따라 제방을 쌓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유적의 많은 부분이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굴의 입구 바로 앞에 쌓인 제방으로 인해 물 빠짐이 원활하지 못하고 또 제방을 쌓으면서 유구 내 퇴적층이 교란되거나 파괴되었다. 유적의 상부에는 농공단지가 들어서 있다. 지표하 20~30cm에서 4점의 빗살무늬토기조각이 출토되었는데 입술부조각 1점과 나머지 3점은 몸통부분이다. 몸통조각 1점은 파도점줄무늬로 다른 조각들과 문양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서해안의 연평도(延坪島)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와 닮은 것이어서 주목된다.
- 백마고지 위령비와 기념탑
백마고지 위령비는 백마고지 전투에서 희생된 아군과 중공군 등 17,535명(아군 3,146명 중공군 14,389명)의 영혼을 진혼하기 위하여 건립한 위령비이다. 1985년 6월 6일 육군 제 5사단 장병과 지역주민들이 백마고지 후방에 세운 3.6m높이의 현무암 비석은 오랜 풍상으로 훼손되고 대규모의 위령제를 봉행하는데 장소 협소 등의 어려움이 있어 1990년에 철원군에서 위령비 일대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새롭게 단장하였다.
위령비 앞쪽 좌·우로 연결된 기념관은 홍익대 강건희(姜建熙)교수가 설계한 것으로 회고의 장, 기념의 장, 다짐의 장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 처절했던 격전의 현장을 재현하고자 설립하였다. 『회고의 장』 에는 피아 전사자를 추도하는 위령비와 분향소가, 『기념의 장』 에는 통일의 염원과 전승을 기념하는 전적비와 함께 당시 백마부대장이었던 김종오(金鍾五)장군의 유품을 전시한 기념관도 배치하였다. 『다짐의 장』 에는 전망대와 함께 자유의 종각도 건립하여 오늘날은 국민의 안보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 백마고지 전투
백마고지 전투는 6.25전쟁 기간 중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들고 1952년 10월초 판문점에서 포로회담이 해결되지 않자 중공군의 공세로 시작된 1952년도의 대표적인 고지쟁탈전으로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 3km 북방에 위치한 무명의 한 작은 고지를 놓고 한국군 보병 제 9사단과 중공 제38군 3개 사단이 전력을 기울여 쟁탈전을 벌인 끝엔 국군의 승리로 매듭지어진 전투를 말한다.
1952. 10. 6일부터 10일 동안 해발이 불과 395m 밖에 되지 않는 고지 하나를 빼앗기 위해 아군과 적군 2만 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전투기간 중 발사한 포탄은 적측 5만5천발, 아군측 22만발, 피아간 12차례의 공방전으로 24회나 주인이 바뀌기도 했다. 혈전사투의 초연이 걷힌 다음 처절하게 변모한 산용(山容)이 흡사 백마가 누워있는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백마고지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백마고지전투는 한국군의 방수능력(防守能力)을 높이 평가받은 일전으로서 보(步), 전(戰), 포(砲), 공(空)의 협공이 긴밀하게 이루어진 고지공방의 범례(範例)가 되는 결전이기도 하였다. 6·25전쟁 중 치열한 대표적 전장의 하나로서 철의삼각지전투의 상징이라 할 만한 백마고지 전투는 당시 휴전을 앞두고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고자 하는 피아의 공방으로 처절함을 더 했는데 백마고지 확보의 전략적 중요함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철원평야를 감제(瞰制) 함으로써 철원 및 김화를 제압
② 서울로 통하는 UN군의 주 보급로 확보
③ 휴전회담의 흥정에 유리한 차기작전의 발판 굳히기
- 삽슬봉(아이스크림고지)
아이스크림 고지로 더 잘 알려진 삽슬봉은 예전에 이 산 밑에 삽송리(揷松里 또는 森松里)라는 마을이 있어서 이 산을 삽송봉(揷松峰 : 삽슬봉은 삽송봉의 구전변형체)으로 불렀고, 또 그 모양이 흡사 투구 같다고 해서 투구봉으로도 불렸다. 드넓은 재송평의 한 가운데 솟아 있는 해발 219m의 얕으막한 산이지만, 이 산이 갖는 입지적 이점은 다대(多大)하여 6·25전쟁 때는 피아간에 처절한 쟁탈전과 포격이 극심했고 산이 마치 아이스크림 녹듯 흘러 내렸다 하여 아이스크림 고지란 별명이 붙여졌다 한다.
삽슬봉은 김응하장군의 빈장묘가 있는 여우산(如愚山)과 직선거리로는 불과 2km의 지척에 있는데 김응하장군이 임진왜란때 13세의 어린 몸으로 돌아가신 부모의 장지를 찾던 중 어느 스님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여우산에서 삽슬봉까지 10리길을 맨발로 쫓아가 졸라서 결국 현재의 위치에 장지를 정했다는 일화도 있다. 또한 삽슬봉은 고려시대에 산정상에 봉수대(烽燧臺)를 만들어 북쪽의 평강의 진촌산 봉수대와 남쪽의 할미산(구수봉) 봉수대를 연결하였다 한다.
- 성제산과 자모산성
광주산맥(廣州山脈)에 속하는 성제산(城濟山)은 현 김화읍 읍내리 좌측 오성산 전면에 위치하며 해발 471m이다. 성제산을 자산(慈山) 또는 자모산(慈母山)등으로 달리 부르는 것은 시대별로 주민들이 산명(山名)을 정해 불렀기 때문인데 『해동명장전』에는 병마사 유림(兵馬使 柳琳)이 김화의 자산(慈山)에서 호군(胡軍)을 맞아 싸웠다는 기록이 있고, 『국사대사전』에는 관찰사 홍명구(觀察使 洪命耉)가 김화의 자모산성(慈母山城)에서 적을 맞아 싸웠다는 기록이 있는 것 등으로 보아 자산, 자모산, 성제산은 공통된 지명일 것으로 추측을 한다. 성제산 정상에는 전장 982m, 높이 12m 규모의 석성(石城)이 남아 있어 이 성을 성제산성 또는 자모산성이라 한다.
축성시기(築城時期)는 고려시대에 외침을 막기 위해 주현군(州縣軍)과 주민들이 조성한 것으로 추정을 하는데 이 산성이 유명해진 것은 병자호란(서기 1636년) 당시 관찰사 홍명구공과 병마절도사 유림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이 이 산성을 본거지로 하여 청나라 침략군을 무찌른 김화 진터골 싸움이 있고 나서부터이다. 청군(淸軍) 일만여 기병(騎兵)과 조선군 2천여 명이 접전한 진터골 싸움은 결국 청군에게 패퇴의 쓴잔을 안겨 주었으나, 조선군 1천여 명과 홍명구공이 전사하는 희생을 입었다. 성제산 기슭에 모셔져 있는 전골총은 그때 희생된 우리 군사들의 공동분묘로 추정하고 있다.
- 애국선열 추모비
애국선열 추모비는 철원읍 화지리(철원고등학교 교정내)에 위치하는데 1967년 4월 철원 애국선열기념사업회에서 건립했고, 탑신 높이 5m, 기단 높이 2m규모로서 화강암과 대리석을 같이 사용하였다. 철원은 독립만세 운동이 가장 활발하였던 고장의 하나로서 기미년 3.1운동 당시 이 고장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의 불길은 진실로 죽지 않는 민족혼의 절규였으며 동시에 자손만대에 던진 일대 경종으로서 영세에까지 이어질 자랑이다.
우리 고장이 낳은 애국선열 여러분들이 도피안사에서 애국단을 조직하여 사재를 바쳐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때로는 민족혼을 계승시키기 위하여 육영사업 등으로 몸과 마음, 온 정성을 다 기울이며 애국운동을 펼쳤고, 이 지사들의 업적과 얼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 고장 유지와 여러 인사들의 헌금으로 이 비가 세워지게 되었다.
- 월정리역
경원선의 간이역이었던 월정리역은 남방한계선에 최 근접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철원안보관광의 대표적인 경유지이다. 현재는 객차잔해 일부분만 남아 있는데,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강렬한 팻말과 함께 분단된 민족의 한을 여실히 증명하여 주고 있다. 원래 경원선은 한일합방 이후 일제가 주민들을 강제동원하고 당시 러시아(구소련)의 10월 혁명으로 추방된 러시아인을 고용하여, 1914년 8월 강원도 내에서 제일 먼저 부설되었다.
서울 ↔ 원산간 221.4km를 연결한 산업 철도로서 철원에서 생산되는 농산물과 원산의 해산물 등을 수송하는 간선철도 역할을 했다. 현재의 월정역사는 철원안보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1988년 복원하였다.
- 장방산교회와 신문화운동
박완이 저술한 실록 “한국기독교 백년사”에 의하면 성결교회가 1914년 철원읍에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다. 1889년 미국인 장로교의 선교사인 “해리영”이 원산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종교탄압에 의해 지금의 갈말읍 지경리에 은거하면서 선교활동을 한 것이 우리고장에 전래된 시초로 전해지고 있다.
그 후 해리영은 현 장흥리(장방산)지역을 선교대상지역으로 정하고 1900년 초기부터 선교활동을 해왔다. 1920년 장방산에 김성유가 교회를 설립하고 주민들에게 新문화운동을 통해서 싹튼 근대적인 민족사상을 주입시키며 배일사상과 신앙심을 불어 넣어 주었다. 6·25전쟁으로 교회가 파괴되었고 수복이후 중수되었으며 인공치하에서 반공투쟁하다 순직한 故 서기훈 목사의 순교비가 세워져 있다.
- 저격능선 전적비
저격능선 전투전적비는 6·25 당시 김화 저격능선(現 오성산 우측능선) 전투를 기념하기 위하여 1957년 7월 1일 육군 5군단(군단장 김종오)에서 김화읍 청양 1리 남대천변 산록에 건립한 전투기념비이다. 기단높이 1.8m, 기단 둘레 20m에 콘크리트이며 탑신은 높이 3m, 둘레 2m의 자연석 화강암 재료를 사용했다.
- 철원공립 보통학교
철원공립보통학교는 1906년 4월 20일 철원읍 사요리에 위치한 강원도립철원의원 전 부지에 목조교사 1동(2학급 8교실)을 신축하고 4년제로 설립 개교하였다. 1910년 3월 20일 한일합병 당년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었으며, 1911년 8월 일제가 공포한 조선 교육령에 의해 교육 통제 하에 놓였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일본의 교육정책이 수정되어 사립학교에 대한 탄압과 폐쇄를 서슴지 않았다. 1922년도 다시 교육개정령이 공포되면서 학제가 보통학교(4·5·6년) 고등보통학교(5년)로 개편되었으며 1922년 3월 4년제의 13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학군내의 인구 증가에 따라 사요리 338번지의 부지에 목조 교사옥 3동(18학급)과 부속건물을 신축하고 1924년도 이전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당시 6년 과정의 24학급 2,600여명의 학생을 자랑하는 도내 굴지의 학교였다. 북한치하에서 37, 38, 39회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6·25전쟁으로 학교수업은 중단되고 시설물도 전소되었으며 현재는 지뢰지대로 변하였다.
- 철원역사(舍)
철원역은 경원선의 중심역 이며 금강산전철의 시발점이 되는 역으로, 원래 역이 위치한 곳이 일제강점기 시대에는 춘천과 맞먹을 정도로 번성했던 구철원 시가지라서 기본적인 수요가 큰데다가, 이 역에서 금강산선이 분기되기 때문에 기본적인 철도 시설 외에도 금강산선의 조차장, 사무실, 전기시설, 여관 등이 밀집하여 당시에는 서울역과 비교 대상이 될 정도로 경원선에서 손꼽히는 역 중 하나였다. 남아있는 기록에 의하면, 1928년에 역사를 신축하였고 1934년 3월 9일에는 구내 과선교와 승강장 지붕까지 설치했다고 한다.
경원선은 한일병합 이후 일제가 주민들의 강제 동원과 10월 혁명 이후 추방된 러시아인들을 고용하여 부설하고, 1924. 9.16 원산에서 전(全)노선 개통식을 가졌는데 총연장 221.4km 중 철원역에서 서울(용산)까지 97.3km(2시간), 원산까지는 124.1km(3시간)였으며, 철원역에서 내금강까지 운행된 금강산 전철은 116.6km로 4시간 반이 소요되었다.
철원읍 외촌리 철원평야 한가운데 위치했던 철원역의 전체부지는 5만여 평으로서 1930년 무렵에는 역장(서기관급)을 포함하여 80여 명의 역무원이 근무하였다고 한다. 6.25전쟁 중 승강장이 없어지고 급수탑은 폭파되었으며 선로도 대부분 흔적만 남기고 사라지면서 폐역 된 후 방치되었으나 역 구내의 토지는 복원에 대비하여 보전관리지역으로 지정되었다. 2006년 5월 3일 역 구내에 통일염원의 침목이라고 쓰인 상징탑이 건립되었다.
- 태봉국 철원성
성의 위치는 현재 비무장지대인 철원군 철원읍 홍원리이며, 성축 년대는 서기 903 ~ 904년경으로 추정된다. 궁예는 효공왕 8년(서기 904년)에 국호를 마진으로 고치고 서기 905년 송악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천도당시에 도선의 도참설에 “금학산을 진산으로 정하면 300년을 지속할 것이며, 고암산을 진산으로 정하면 30년밖에 유지하지 못한다.”는 설이 있었는데 궁예는 이를 무시하고 고암산을 진산으로 정하고 이곳에다 903년부터 궁전을 크게 짓기 시작하고 외성, 내성도 튼튼히 축조하기에 이르렀으며, 10여개의 외곽성도 함께 구축하면서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 도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이중 축조된 특이한 성인데, 밑 부분은 석축으로 상단은 토축으로 외성의 둘레는 4,370m. 내성은 577m의 큰 규모이다. 내성에는 궁예만이 사용하였던 어수정과 석등 등 많은 유적이 있었으나 오랜 풍상으로 대부분 파괴되었으며 현재 휴전선 비무장지대 내에 유지가 일부 남아 있다고 하나 출입통제 지역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10. 철원의 전설>
전설
- 말 고개 전설
근남면 마현리에 있는 말 고개는 5번국도로 철원군과 화천군의 경계에 있는 높은 고개인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전한다. 임진왜란 때 왜군 장교가 군졸을 대동하고 말 고개[馬峴]를 넘어 화천방면으로 가려 했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는 노변(路邊) 부근에 있는 천불암 앞을 지나갈 때 말을 끌던 안내인이 “이 곳은 신성한 곳이니 하마(下馬)하여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하였으나 왜군장교는 이를 거절하고 강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타고 가던 말의 말발굽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왜군 장교는 이에 화가 나서 자기 애마의 머리를 장검으로 내리쳤다. 왜군장교는 쓰러진 말의 피를 천불암에 뿌렸다고 한다. 그 때 안내인의 말을 무시하고 고개를 넘어가던 왜군 장교는 벌을 받아 계곡으로 떨어져 죽었으며, 그 후 왜군들은 수시로 이 말 고개를 넘다 계곡으로 떨어져 죽었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현재는 도로확장, 포장사업으로 굴곡을 많이 직선화하여 쾌적한 기분으로 고개를 넘나들게 되었다.
- 불상과 암소고개
신라 경문왕 5년(865년) 도선국사가 현 도피안사에 봉안한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제조하였다. 철원읍 율이리에 위치하고 있는 수정산에 자리잡은 안양사로 이 불상을 봉안하기 위해 여러 승려들과 같이 이 불상을 암소등에 싣고 먼 길을 재촉하면서 안양사가는 지름길을 통해 도착한 곳이 현 화지리에 있는 암소고개 마루터였다. 해는 이미 저물고 먼 길을 재촉하느라 승려들은 물론 암소 역시 지쳐 있었다. 이들은 잠시 이 고개 마루터에서 쉬기로 하였다.
하지만 출발 직전, 이상한 일이 생겼다. 암소등에 실렸던 불상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 승려들은 당황해 밤새 주위를 찾아 헤맸으나 불상은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다음 날 아침부터 각 승려들은 분산하여 마루터 부근 일대를 찾기 시작했다. 한 스님이 현 동송읍 관우리 450번지에 위치한 도피안사 자리에 이르렀을 때 어제 암소등에 실렸던 불상이 이곳에 안좌한 자세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도선국사는 이 불상을 안양사에 봉안할 것을 포기하고 불상이 안좌했던 그 자리에 사기 865년에 조그마한 암자를 짓고 이 불상을 모셨다 한다. 당대 철조불상이 피안에 도했다 하여 사명이 도피안사로 명명되었으며 동명 역시 도피동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또한 불상이 자취를 감추었던 고개를 그 후 사람들은 암소고개라 부르고 있다 한다.
- 월정리의 슬픈 전설
"아주 먼 옛날 이곳 어느 산골에 이름모를 병으로 고생하는 홀아비와 그를 지성으로 봉양하는 딸아이가 살고 있었는데 그 처녀는 아버지 병환을 낫게 해 달라고 밤마다 달님께 빌었다. 어느 날 밤 달님께 빌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백발도사가 나타나서 ‘나는 달의 화신인데 너의 정성이 지극하여 집 옆 바위 위에 가보면 물이 고여 있을 것이니 달이 지기 전에 너의 손으로 천 모금을 길어 아버님께 드리면 병이 나을 것이다’ 고 일러 주는 것이었다.
처녀는 허둥지둥 꿈에 들은 곳을 찾아가서 물을 길어다 아버지의 입에 넣기를 기 백번 얼마 남지 않은 달은 서편으로 기우는데 가련하고 효성이 지극한 딸은 온 몸을 바위에 부딪쳐 찢겨지고 피가 흘렀으나 가냘픈 손으로 드디어 천 번째 물짓기를 마치자 서천의 달도 지고 그 덕분으로 아버지 병환은 나았으니 그 효녀는 영영 회생되지 않았다. 그 후 물이 고였던 자리를 달의 우물이라 불렀고 마을 이름 역시 월정리라 불리게 되었다.
- 임꺽정
홍명희의 소설에 나오는 임꺽정은 경기도 양주땅 백정(白丁)의 장자 출신으로 서기 1559년경을 전후하여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일대를 무대로 활동한 대도적으로서 실존인물이다. 타고난 재주가 비상하여 과거등용에 뜻을 두었으나 천민출신으로 출세 길이 막히고, 조정의 부패와 양반, 관료들의 수탈은 물론 토호들의 행패에 불만을 품어 당시 학정에 신음하고 있던 서민들과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대적당(大賊黨)을 조직하고 그 두목이 되었다.
지금 고석정 건너편 산 정상에 길이 2,892척(868m)의 석성을 쌓고 이 곳을 웅거지로 하여 함경도 지방에서 이 지점을 거쳐 상납하는 조공물을 약탈해서 서민들에게 분배해 주는 활빈당 활동을 전개하다가, 조정 관군에 쫓기게 되면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가곤 했는데 빠져나가는 재주가 흡사 꺽지와 같다 하여 임꺽지(임꺽정)로 불렸다는 전설이 있다. 임꺽정은 그후 1562년 조정의 토벌사 남치훈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쫓겨 황해도 구월산에 숨어들었다가 부하의 밀고로 관군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고석정 경내에 있는 인물상은 1998년 12월 5일 조각가 이원경선생의 작품으로 방문객들의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11. 철원의 축제>
철원의 축제
- 태봉제
1982년부터 매년 10월경에 강원도 철원군에서 열리는 지역축제로 1982년부터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가 강원도 철원군에 태봉국을 세웠음을 기념하고, 지역민의 화합과 단합을 도모하며 향토문화의 계승발전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매년 개최되어 왔다. 6·25 전쟁 때 철원군을 수복한 10월 21일을 ‘철원 군민의 날’로 정해 1982년부터 개최되었다. 1991년 제9회 행사부터는 궁예가 건립한 태붕국의 국호를 따서 ‘태봉제’로 명칭을 바꾸어 행사를 개최하였다. 이후 1994년부터 본격적인 제례절차를 마련했으며 대표적인 지역축제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개막행사, 본행사, 문화행사, 특별행사 등이 있다. 개막행사에는 태봉제례, 태봉가요제, 개막식 공식행사, 연예인 축하공연 및 불꽃놀이 등과 함께 궁예왕 어가행렬 및 즉위식이 재현되고, 본 행사에는 읍면 입장식 퍼레이드, 생활체육경기, 민속경기 등의 군민한마음대회가 개최된다. 문화행사로는 태봉 휘호대회, 백일장 및 사상대회, 특별행사에는 통일기원 합수제, 철원오대쌀 축제, 농특산물 판매 및 시식회 등이 열린다. 2000년 제18회 태봉제에서는 궁예왕 어가행렬이 추가되었고, ‘태봉국과 궁예왕 재조명’이라는 주제로 학술행사가 처음 개최되기도 하였다.
2016년 제34회를 맞아 ‘판 1,100년 태봉의 신명과 큰 울림’라는 주제로 거행되었다. 행사는 철원군이 주최하고, 철원군축제위원회가 주관하며, 10월 중에 3∼4일간 철원종합운동장과 관내 일원에서 열린다. 철원군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태봉국 및 궁예왕과 관련되는 행사이기에, 지역적 가치와 역사적 가치가 뚜렷한 행사로 평가된다. 지역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호응을 끌어내어 이 지역만의 특징을 뿌리내리고 알려야 할 과제를 갖고 있다.
- 21-22 철원 한탄강 물윗길 트레킹
천혜의 비경을 가진 한탄강은 2020년 7월 유네스코 세계 지질공원으로 인증되었다. 한탄강의 물윗길을 걸으며 봄, 가을을 대표하는 야생화와 주상절리, 기암절벽 등 화산절경이 즐비한 신비한 협곡을 물 위에 조성된 부교 길을 걸으며 경험하고 감상할 수 있는 생태관광 프로젝트이다.
- 철원 한탄강 얼음 트레킹
2013년부터 매년 1월 중순에 강원도 철원군 한탄강 일원에서 한탄강 현무암 협곡 트레킹을 주제로 하는 지역축제 주상절리 등 생태가치가 우수하고 경관이 수려한 자연을 한탄강을 따라 강 위를 걸으며 볼 수 있는 기회는 철원 한탄강 얼음트레킹 축제 기간뿐이다. ‘동지섣달 꽃 본 듯이’라는 주제로 2013년 시작된 겨울철 트레킹 행사로 한탄강 협곡의 뛰어난 기암절벽과 주상절리를 직접 체험할 수 있으며, 자연환경을 활용한 차별화된 축제로 개최되고 있다.
겨울철 탐방코스로 많은 산악동호인들의 높은 호응에 부응하고 관광 상품화 하고자 2013년부터 한탄강 태봉대교를 출발하여 승일교에 도착하는 5.5km 구간을 체험코스로 개발하였으며, 2016년부터는 태봉대교를 출발 송대소, 마당바위, 승일교를 경유하여 고석정까지 6km구간으로 연장하였다. 태봉대교에 지역주민 및 관광객이 모여 함께 출발하는 철원 한탄강 얼음트레킹의 개막행사로 개막 소공연과 트레킹 코스마다 펼쳐지는 버스킹 공연, 행사장일대에서 열리는 전시체험프로그램으로 눈썰매, 개썰매 체험, 열기구, 연날리기와 대형 얼음조각, 눈조각, 이글루 등 다양한 볼거리 즐길 거리가 있다.
2017년 제5회를 맞은 철원한탄강 얼음트레킹과 함께 제1회 똥바람 알통구보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얼음조각, 눈조각, 얼음분수를 제작 설치하여 포토 존을 만들었고, 많은 산악동호회와 가족단위가 참석하여 겨울철 트레킹행사로 각광받고 있다. 전국에서 유일한 얼음트레킹 행사로 다양한 볼거리와 자연이 주는 감동까지 더하여 산악회 동호인뿐만 아니라 가족단위 관광객과 외국인관광객을 비롯하여 매년 참가하는 인원이 늘고 있으며, 전국적인 겨울철 대표축제로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 철원 화강 다슬기 축제
2007부터 매년 8월 초에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화강에서 열리는 가족 관광형 축제로 2007년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구 체육공원 및 남대천(現 화강) 일대에서 김화 남대천 주민연구발전회가 주관하여 시작된 여름축제로 지역주민과 가족단위 관광객을 대상으로 개최해 왔다. 김화 남대천 주민연구발전회가 주관이 되어 시작된 마을축제는 2009년부터 철원 화강 다슬기 축제추진위원회가 조직되어 지역주민과 가족단위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축제로 발전하였으며, 제3보병사단의 가족과 함께 하는 신병수료식, 군 장비 전시 프로그램 등 다양할 볼거리, 즐길 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지역을 대표하는 여름축제로 발전하였다.
지역 문화공연, 연예인 가수초청 축하공연, 민 · 관 · 군 화합의 밤, 3사단 신병수료식 등 개막행사가 있고, 본 행사로는 관광객들이 즐길 수 있는 다슬기잡기 체험, 황금 다슬기를 찾아라, 토마토 속 보물을 찾아라, 백골 한마음 축제(군장비 전시), 워터 챌린지 등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활동을 할 수 있다. 2017년 11회를 맞아 철원군 주최, 철원군축제위원회의 주관으로 철원군 김화읍 화강 일대에서 8월 초 4일간 개최되었다.
(사)한국축제콘텐츠협회가 주관하는 대한민국축제 콘텐츠대상(축제관광부분)에 4년 연속 선정되어 DMZ지역의 청정한 화강수변을 배경으로 다슬기잡기 체험, 토마토 속 보물찾기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과 군 장비 전시 등 군사문화를 축제와 연계 개최함으로써 접경지역 만의 차별화된 콘텐츠 접목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2. 마무리: 내가 경험하고 보고 느꼈던 철원>
12-1) 철원을 처음 접한 계기
처음에 철원이란 지역을 알게 된 건 우연히 TV에서 철원 오대쌀과 토마토에 관련된 광고 영상을 본 이후였다. 그 광고를 본 이후 철원이라는 지역을 처음 인식하게 되었고 2014년에 철원 안보관광을 가기 전까지 나에게 철원은 쌀과 토마토 등이 재배되고 있는 지역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12-2) 세 번의 철원 방문(2014년, 2018년, 2019년)
2014년 11월 철원에 안보관광을 하러 갈 일이 있어서 살면서 처음으로 철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백마고지역에 도착해서 단체로 전세버스를 이용했고, 바로 점심을 먹으러 대마리로 가서 철원 오대쌀로 지은 밥을 처음 먹었다. 이후 관광해설사의 말을 들으며 노동당사, 철원 평화 전망대, 월정리역, 백마고지 등을 돌아다녔다.
특히 안보관광은 백골부대라 불리던 3사단을 방문하는 일정이 있었는데, 거기서 나오는 구호를 들으면서 이곳이 최전방 지역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관광을 하며 여러 전적지를 둘러보면서 철원이란 지역이 일제강점기 때 강원도 내에서 제일 큰 도시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듣고 그 당시에 놀랐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철원이 지금의 모습을 보이게 된 걸 보며 분단과 전쟁이 철원이란 지역에 얼마나 악영향을 끼쳤는지 새롭게 알게 되는 시간이었다. 안보관광을 끝내고 다시 서울로 돌아온 뒤, 철원이란 지역을 잠시 잊으면서 지내다가 2018년에 다시 철원에 갈 일이 있어서 또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이 당시에는 평화관광이라는 명칭이 있어서 그런지 예전에 안보관광을 했을 때 방문했던 백골부대는 가지 않았다. 하지만 관광을 하면서 느꼈던 건 명칭이 바뀌었어도 4년 전에 방문했을 때와 별로 차이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다만 방문했을 때 날씨가 너무 추웠고 밤에는 엄청 조용했던 걸로 기억한다. 이후 2019년에 철원 노동당사에서 행사를 해서 갔었는데, 예전에 방문했던 것에 비해 기억에 남는 방문은 아니었다.
12-3) 정리
내 인생에 있어서 철원이란 이미지는 여러 가지 형태로 기억되었다. 처음엔 농산물이 재배되는 장소로서,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분단이 극명하게 나타나고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던 장소로서, 현재는 농산물이 재배되고 분단과 전쟁 등 두 이미지가 혼합된 형태로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철원이란 지역은 한국사에 있어서 두 시기 정도 역사의 흔적을 남겼다.
첫 번째는 궁예가 철원을 도읍지로 삼았을 때였고 두 번째는 일제강점기 때 강원도 내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던 장소와 일제의 토지 개간 등으로 인해 넓은 평야가 형성되었고 동시에 도시가 형성돼서 한때는 강원도 내에서 제일 큰 도시 중 하나였다는 역사를 가지고 있었으나 앞서 설명했듯이 분단과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게 황폐화되고 말았다.
이렇듯 철원은 현재 분단과 전쟁이 강원도 내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났던 장소였고 이런 요소들은 80여 년이 넘도록 철원의 발전에 방해가 된다고 본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철원은 한반도 내에서 저평가되어 있고 잠재력이 높은 지역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통일이 된다면 철원은 분단과 전쟁의 흔적을 제일 많이 가진 지역이자 일제강점기 때처럼 강원도 내에서 제일 큰 도시 중 하나로 발전할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진 지역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