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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13코스 역방향 제2부
서외마을-망해루-충무사·명량대첩비-우수영문화마을-충무마을-청룡산-우수영관광지
221022
1.우수영문화마을과 법정스님 마을도서관
해남군 문내면 서상리 서외마을에서 13코스 시작점까지 약 6km가 남아 있다. 얼마 남지 않은 거리지만 살펴 보아야 할 것들이 많다. 망해산의 망해루, 충무사와 명량대첩비, 우수영문화마을, 법정스님 생가터의 마을도서관, 옛 충무사 등을 헐레벌떡 허겁지겁 스쳐지난다. 충무사는 원래 보적산에 세워져 있었고, 명량대첩비는 충무사와 함께 있었는데 명량대첩비를 현 동외리 위치로 옮기면서 충무사도 그 옆에 새로 지었다. 충무사에는 1966년 2월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영정이 모셔져 있다. 명량대첩비는 1942년 3월 일본에 의해 강제로 철거되어 경복궁 근정전 뒤뜰에 묻힌 것을 우수영마을 유지들이 1945년 11월 명량대첩비를 찾아와 1947년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보적산에 옮겨 세웠다. 2011년 3월 17일 명량대첩비의 원래 위치인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로 이전하였다. 일본의 명량대첩비 철거에 분노한 우수영 유지들이 명량대첩비를 찾아오는 사연은 눈물겹다.
해남 우수영문화마을은 2015년부터 3년에 걸쳐 회화, 조각, 영상미디어, 설치품, 공예, 조형작품, 다양한 갤러리, 예술카페 등으로 꾸며져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마을로 재탄생하였다. 시간에 쫓기면서 갤러리 '면립상회'로 들어가 보았다. 마을 주민들의 옛 생활 도구와 낡은 흑백사진이 놓인 추억의 공간이 길손의 마음을 흔든다. 사진 속 아이들 모습에 내 유년 시절의 모습이 그려진다. 마을 주민들이 흙을 파서 논둑을 쌓는 모습은 내 부모님의 힘들었던 지난 시절의 모습과 다름없다. 시간은 흔적을 남기고 켜켜이 쌓인다. 그 시간의 지층 속으로 들어가 잠시 아득해졌다.
법정스님 생가터에 법정스님 마을도서관이 조성되어 있어 잠시 관람했다. 화려하지 않고 단순하며 아담하다. 생전에 무소유 정신과 향기롭고 맑은 세상 가꾸기에 힘쓴 그의 뒷모습이 포토존에 조성되어 있고, 송광사 일지암에서 쓰던 의자도 모형물로 설치되어 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무소유 정신이 새겨진 포토존 법정스님의 뒷모습이 맑은 향기를 날린다. 불필요한 것을 너무 소유한 내 자신은 용기 있게 비우지 못한다. 내게서는 부패한 악취가 풍겨서 살그머니 뒤돌아섰다. 법정스님 마을도서관 안에 들어가 그가 남긴 흔적들을 대충 살폈다. 그의 그림과 사색의 글들이 가슴에 여울진다. "옳거니 그르거니 내 몰라라/ 산이건 물이건 그대로 두라/ 하필이면 서쪽에만 극락세계랴/ 흰구름 걷히면 청산인 것을" 그의 글에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소중함과 사랑의 마음이 그득 담겨 있다.
우수영항으로 나갔다. 서녘으로 기우는 햇살이 바다에 눈부시게 부서진다. 바다의 양도 섬은 전라우수영 앞에서 우수영을 지키며 가로막고 있어, 우수영은 바다 외부에 노출되지 않는 천혜의 요새다. 이순신 장군이 판옥선 13척을 거느리고 우수영을 출발하여 양도 앞을 거쳐 울돌목으로 나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울돌목에서 회오리를 일으키며 울어대는 물살을 이용하여 왜선 133척을 물리치는 장쾌한 모습도 그려진다. 그의 고난과 아픔이 갯벌바다에 은빛으로 글썽인다. 삶은 기쁨과 슬픔으로 이어진다. 기쁨에 환호하는 순간이 얼마나 될까? 슬픔에 눈물짓는 시간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든다. 이순신 장군이 남몰래 흘린 눈물과 우수영 사람들이 힘겹게 살아온 고통의 눈물이 갯벌바다에 햇살로 부서져 글썽인다.
2.탐방 과정
13코스 탐방 전체 거리 : 17.59km
13코스 탐방 소요시간 : 4시간 29분
왼쪽은 해남 전라우수영성곽을 발굴하고 있는 망해산이다. 서해랑길은 서외마을로 내려가지 않고 북문길로 이어진다.
정면 왼쪽은 보적산, 그 오른쪽은 청룡산이다. 우수영 앞바다를 나가면 울돌목, 오른쪽 섬은 우수영 앞을 지키는 양도이다.
오랜 연륜이 느껴지는 팽나무들이 우뚝한 북문길을 따라 직진한다.
서해랑길은 노인정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망해산 망해루로 올라간다.
서해랑길은 왼쪽 망해산 망해루 방향으로 이어간다. 오른쪽은 방죽샘 가는 길로 우수영문화마을 미술프로젝트 코스이다.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 일원인 서상리, 동외리, 선두리에 조성된 문화마을. 우수영마을은 조선시대 전라우도 수군의 본영으로 서해와 남해 바다를 지켜온 성지였다. 또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전선으로 133척의 일본군을 대파한 명량대첩의 현장이기도 하다. 우수영마을은 조선시대 구국의 성지로서 자부심이 대단하였고, 마을은 활기가 넘쳤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관공서와 학교 등이 이전하면서 크게 쇠퇴하였고 작은 어촌마을로 전락하였다.
우수영 주민들과 문내면사무소는 침체된 우수영마을의 명성과 자긍심을 회복하기 위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하는 ‘2015 마을 미술 프로젝트’에 응모하였다. 2015년 3월 최종 선정되었고, 4월부터 12월까지 “소~울(SOUL,笑鬱)”이라는 이름으로 총 5억 5000만 원이 투입되었다. 여기서 ‘소~울’이란 영문으로 정신, 혼을 의미하며, 또 다른 뜻으로는 미소의 소(笑)[웃음]와 울돌목의 ‘울’을 합성하여 ‘울돌목의 미소’라 할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벽에 우수영문화마을 2016마을미술 프로젝트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우수영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표현한 작품. 우수영의 햇살과 자연, 꽃과 바다, 우는 바다의 물결과 이순신 장군, 거북선, 방죽샘, 강강술래의 이야기 등을 문자와 상형문자 식으로 표현하였다. - 작품설명
우수영 사람들의 밝은 모습과 바다와 더불어 살아가고, 물고기를 잡아 삶을 꾸리며 살아가는 삶의 길을 마치 고분벽화와 같이 오랜 세월의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 작품설명
정면 왼쪽은 보적산, 그 오른쪽은 청룡산이다. 보적산은 충무사와 명량대첩비가 있었던 곳이나 지금은 우수영마을 동외리로 옮겨져 있다. 서해랑길은 보적산의 옛 충무사와 그 아래 충무마을을 거쳐 청룡산으로 이어진다. 맨 오른쪽 뒤에 진도의 최고봉 첨찰산과 진도기상대가 확인된다.
해남 전라우수영(사적제535호)을 정밀발굴조사하고 있으니, 발굴현장에 사고의 위험이 있어 출입금지 알림막이 붙어있다.
아래에 양도 섬, 건너편에 망금산의 진도타워와 진도대교 주탑, 왼쪽 맨 뒤에 첨찰산과 진도기상대가 확인된다.
왼쪽에 진도 섬, 중앙에 해남군 문내면 예락리 양정마을, 중앙 뒤에 신안군 상태도가 가늠된다.
망해루는 역사기록과 발굴조사를 바탕으로 2006년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망해루(望海樓)는 해남군 문내면 서상리 망해산 정상에 있는 전라우수영의 망루이다. 전라우수영 망루는 망해루 외에도 구 충무사의 남장대[정해루(靜梅樓)]와 북장대가 더 있었다. 망해루는 서상리 망해산 정상에 있는데 성과 함께 성루로 건설되었다. 건립된 시기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밝혀진 건립 시기는 1665년 무렵이다. 2004년 발굴 조사 결과 망해루의 면모가 밝혀지고 2006년 복원되었다.
망해루는 『해남읍지(海南邑誌)』와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 “우수영 진산에 있다.”라고 하였다. 우수영 진산은 해남군 문내면 서상리에 있는 망해산[73.7m]을 가리킨다. 망해루는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언급되었으며, 『해남읍지』[1872]와 『조선환여승람』에 망해루는 “우수영 진산에 있으며 절제사 유비연이 건립하였다[望海樓 在水營鎭山頂節制史柳悲然建].”라고 하였다. 유비연은 전라우수사로 1665년 8월부터 1667년 7월까지 재직하였다. 이때 건립된 망해루는 이의승(李宜繩)[1665~1698] 이 쓴 『원옹집(圓翁集)』과 김진상(金鎭商)[1684~1755]이 쓴 『퇴어당유고(退漁堂遺稿)』에 기록되어 전한다. 1872년 『조선후기지방도』에는 우수영성 외측에 망해루를 기록하고 있다.
망해산 망해루 터는 2004년 명지대학교 한국건축문화연구소에서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12개의 초석과 경계석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와와 많은 백자편이 출토되었는데, 그중 1679년[강희 18년(康熙十八年)] 명 명문 망와(望瓦)[지붕의 마루 끝에 세우는, 와당이 달린 암막새]가 출토되어 망해루의 건립 시기를 추측할 수 있다. 2004년 발굴 조사를 근거로 망해루는 2006년 복원되었다. 망해루는 조선 시대 누정으로 전라우수영의 성격을 잘 보여 주는 유적이다. 망해루는 서남단 섬과 울돌목을 비롯한 전라우수영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있으며 교육과 관광 자원으로 가치가 크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망해루를 내려와 왼쪽 쉼터정자를 거쳐 앞쪽 아파트 건물이 보이는 곳으로 서해랑길은 이어진다. 바로 아래 삼거리에 서해랑길 이정목과 해남 전라우수영 설명안내판이 있다. 오른쪽 길은 우수영 본영으로 가는 길이다.
아래 길은 해남 전라우수영이 있는 곳으로 내려간다. 중앙 왼쪽 뒤에 진도기상대와 첨찰산, 중앙에 망금산의 진도타워, 그 앞쪽에 진도대교의 주탑이 모두 보인다. 오른쪽 섬은 전라우수영 앞을 지켜주는 양도,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은 전선 13척을 거느리고 양도 앞을 거쳐 진도대교의 울돌목으로 나가서 왜선 133척을 물리쳤다.
해남 전라우수영(海南 全羅右水營)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해남현으로부터 서쪽으로 67리[약 26㎞] 떨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해남 전라우수영의 현재 위치는 해남군 문내면 남문길 25-2[서상리 407-1]이다.
1377년(우왕 3) 전라북도 옥구(沃溝)[현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 선유도 부근]에 전라수영이 설치되었다. 태종 때 왜구의 침입이 전라남도로 집중되면서 적극적인 대응이 어려웠다. 1407년 전라도 수군도절제사는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함평군 대굴포로 수영을 옮기자고 제안하였고, 1408년(태종 8) 현 전라남도 함평군 학교면 곡찰리 대곡마을인 대굴포(大堀浦)에 수군처치사영(水軍處置使營)이 설치되었다. 1432년(세종 14) 목포[현 목포시 하당 부근 추정]로 이전하였으며, 1440년(세종 22) 현재 위치인 해남군 황원곶(黃原串)[해남군 문내면 우수영]으로 옮겨 왔다. 1465년(세조 11) 전라수군처치사에서 전라수군절도사영(全羅水軍節度使營)으로 이름을 고쳤고, 이어 1479년(성종 10) 전라우도수군절도사영으로 개편되었다. 정유재란 당시 명량대첩의 배후 기지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1481년에서 1510년 사이에 태평정(太平停)이 건립되었고, 1576년(선조 9) 절도사 이발(李潑)에 의해 대대적으로 중창(重創)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왜구에 의해 초토화되었고, 1632년(인조 10) 황직(黃溭)에 의해 객사인 복파관(伏波館)이 중건되었고, 1644년(인조 22) 남두병(南斗柄)이 남루(南樓), 격량고(格糧庫) 중건, 1664년(현종 5) 전동흘(全東屹)이 객사 중창, 1665년(현종 6) 유비연(柳斐然)이 망해루(望海樓), 1669년(현종 10) 이간(李旰)이 남장대(南將臺)와 제언(堤堰)을 영건(營建)하였다. 1895년(고종 32) 칙령 제140호에 의해 폐영되었다.
해남 전라우수영은 2004년 명지대학교 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에 의해 망해루 및 북문지 발굴이 있었으며, 2010년 11월과 12월 2차례에 걸쳐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전라우수영 일원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현재 전라우수영 유적 내에는 우리나라 수군진성 중 가장 큰 규모인 석축 성곽[1,872m]과 현재도 남아 있는 원문을 비롯한 동서남북 4개의 성문터, 객사, 동헌과 함께 영창터 등 각종 군사 시설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멀리 왼쪽 뒤 산봉이 보이는 곳인 해남군 화원면 산호리 학상마을회관 옆에서 출발하여 이곳까지 왔다.
서해랑길은 아파트 건물 뒤 우수영5일시장이 있는 고갯길로 이어진다. 오른쪽 길은 우수영관광지로 바로 내려가는 길이다.
망해산 망해루를 내려와 쉼터정자와 서상저수지 앞을 거쳐 동영길 고개를 오르며 뒤돌아보았다.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東外里)는 우수영성(右水營城)의 동문 밖에 있어서 ‘동문밖’, ‘동밖’ 또는 ‘동외’라 불렀다. 본래 해남군 문외면 지역에 속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동외리, 일정리, 신창리, 난대리, 남외리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로 개설되었다. 현재 동외마을, 동영마을, 동내마을, 남외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동외마을은 1600년경 김해김씨 김남율(金南律)이 진도에서 건너와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동외리는 전라우수영성이 있던 마을이다. 동영마을은 1720년경 함평 이씨가 입향하였다고 전한다. 동내마을은 1400년경 전주 이씨 이강근(李康根)이 우수영이 설치되자 전주에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1700년경 경주 김씨 김환성(金煥成)이 나주에서 이주하였다고 전한다.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에는 황일면에 속한 마을로 동문외(東門外), 동문내(東門內), 남문외(南門外)로 나온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매월 4일, 9일, 14일, 19일, 24일, 29일 시장이 열린다고 한다. 영대장간과 그 오른쪽에 화장실, 우수영시장번영회가 있다.
우수영5일장은 매월 4일, 9일, 14일, 19일, 24일, 29일에 열린다. 문내뿐만 아니라 진도, 화원, 황산, 목포 등을 잇는 서남권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해 있으며, 해초류와 수산물 및 야채류, 잡화 등이 거래되는 전형적인 재래시장으로 우수영관광지, 우수영문화마을 등과 연계되어 있다.
우수영5일장에서 나와 수영약국, 새마을금고 앞을 거쳐 우수영로로 나왔다.
우수영로를 따라 우수영중학교 입구와 해남군수협 우수영지점 앞을 거쳐 우수영안길로 넘어간다.
우수영중학교 입구와 그 옆 해남군수협 우수영 지점을 지나면 도로명이 우수영로에서 우수영안길로 바뀐다. 우수영안길을 따라 동외마을회관 앞을 지나 충무사와 명량대첩비 방향으로 간다.
충무사(忠武祠)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영당으로 문내면 동외리 마을 안쪽 우수영안길 경사지에 있다. 충무사는 1964년 해남 명량대첩비가 있던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에 건립되었다. 2011년 해남 명량대첩비와 비각이 동외리의 현재 위치로 이전되었고 2017년 충무사도 이전되었다. 보물 제503호인 해남 명량대첩비는 원래 1688년(숙종 14)에 현재 위치에 건립되었는데 일제강점기인 1942년 강제로 뜯겨져 경복궁 근정전에 묻히게 되었다. 광복 이후 1947년 해남 명량대첩비를 주민들의 노력으로 되찾아오는 과정에서 원래의 위치가 아닌 학동리 청룡산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후 1964년 충무공 현창 사업이 활발해지면서 해남 명량대첩비가 자리잡은 학동리에 충무사를 건립하였다. 2017년 충무사도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다. 충무사 신실은 앞면 3칸, 옆면 1칸의 규모로 맞배지붕집이고 동재와 서재, 삼문을 갖추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1966년 2월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영정이라고 한다.
해남 명량대첩비(海南鳴梁大捷碑)는 현재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 955-6[우수영성 동문 앞]에 있다. 명량대첩비는 해남 우수영문화마을 한가운데 높다란 바위 언덕에 있으며, 옆에는 2017년 신축된 충무사가 있다.
해남 명량대첩비(海南鳴梁大捷碑)는 1688년(숙종 14) 명량대첩(1597)을 승리로 이끈 충무공 이순신(李舜臣)[1545~1598]의 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1942년 3월 일본에 의해 강제로 철거되어 경복궁 근정전 뒤뜰에 묻힌 것을 1945년 해방이 되자 우수영 유지들이 명량대첩비를 찾아나섰다. 주민들은 ‘충무공유적복구기성회’를 조직하고, 1945년 11월 명량대첩비를 찾아 1947년 전라남도 해남의 해안 지역[문내면 학동리 1186-7]으로 옮겨 세웠다. 당시 미군정청 협조를 받아 명량대첩비를 서울역에서 목포까지 기차로 옮겼고, 목포에서 배를 이용하여 우수영 항구로 가져왔다. 2011년 3월 17일 현재의 위치인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로 이전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건립 경위] 해남 명량대첩비는 임진왜란 당시 명량대첩에서 승리를 이끈 충무공 이순신의 공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로 1685년(숙종 11)부터 1688년(숙종 14)까지 3년에 걸쳐 세워졌다. 해남 명량대첩비의 재질은 돌이며, 높이 2.67m, 폭 1.14m이다. 직사각형의 비 받침 위에 비 몸돌을 꽂고, 위로 구름과 용을 장식한 머릿돌을 얹은 형태이다.
[금석문] 해남 명량대첩비는 가로로 통제사충무이공명량대첩비(統制使忠武李公鳴梁大捷碑)라 적혀 있다. 12자 전액(篆額)은 김만중(金萬重)이 썼고, 문장은 이민서(李敏敍)가 쓰고, 글씨는 이정명(李正明)이 해서체로 썼다. 문장 끝에 비문을 쓴 날짜인 1685년과 세운 날짜를 각각 명기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1597년 9월 이순신이 우수영의 건너편에 있는 진도 벽파정(碧波亭) 아래에 진을 치고, 우수영~진도의 해협을 흐르는 급류를 이용하여 왜군 선단(船團)을 격파한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명량대첩은 충무공 이순신이 재기한 직후 큰 기적을 올린 대회전(大會戰)으로 충무공이 세운 전공의 중흥이라 일컬으며, 충무공의 용병과 지리(地利)에 뛰어남은 귀신도 감동하였고, 또 공의 난을 당해 적을 토벌함에 있어 책략을 결정함이 특출함은 옛 명장들도 이에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충의의 분발은 해와 달을 꿰뚫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문은 1686년(숙종 12)에 쓰였으나 비는 2년 뒤인 1688년 3월 전라우도수군절도사 박신주(朴新胄)에 의하여 세워졌다.
[현황] 해남 명량대첩비는 이충무공유적보존회에서 소유하고 있으며, 해남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국민들의 모금 운동으로 1950년 비각이 재건되었고, 현재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에 비각이 세워졌다. 비각이 세워진 곳은 해남 우수영마을에서 500m 남쪽 언덕 위로 과거 우수영 남창대(南蒼垈)로 알려진 곳이다. 1966년 사당이 지어졌고, 1969년 6월 16일 보물 제503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충무공탄신일인 4월 28일과 명량대첩 기념일인 10월 29일에 해마다 제를 올리고 있다. 2017년에는 충무사가 해남 명량대첩비 옆으로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강강술래마당 건너편에 옮겨온 충무사가 자리하고 있다.
동문 상징의 성벽과 오랜 시간의 흔적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곳에서 잠시 동헌터를 다녀온다.
동헌이란 조선시대 지방 관서에서 정무를 보던 중심 건물을 일컫는다. 동헌은 객사, 향교와 함께 지방 관아의 핵심 건물로 중요한 의의를 가진 것이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이후 대부분 훼철되거나 소실되어 현존하는 것은 매우 드물다.
현재 전라우수영 유적 내에는 우리나라 수군진성 중 가장 큰 규모인 석축 성곽[1,872m]과 현재도 남아 있는 원문을 비롯한 동서남북 4개의 성문터, 객사, 동헌터와 함께 영창터 등 각종 군사 시설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옛 문내면사무소였던 곳으로 현재는 문내면생활문화센터가 있는 이곳에 해남 전라우수영 동헌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왼쪽 뒤에 보적산과 청룡산, 보적산 앞에 국도제18호선 관광레저로의 우수영교가 보인다. 서해랑길은 우수영교 아래를 통과하여 보적산 옛 충무사 건물로 올라간다. 중앙 오른쪽 뒤에 진도기상대와 첨찰산이 확인된다.
동헌길을 따라올라가 동헌터를 본 뒤 우수영안길 사거리로 되돌아와서 오른쪽 우수영안길을 따라간다.
앞에 걸어온 우수영안길 사거리가 보인다. 우수영안길을 따라가며 우수영문화마을의 작품을 감상한다. 벽화는 해남우수영의 곡식 창고인 영창의 모습을 재현하고 곡식을 운반하는 마을 사람들의 풍경을 밝은 모노톤의 분위기로 제작하였다.
우수영문화마을은 3년에 걸쳐 회화, 조각, 영상미디어, 공예, 조형 작품, 다양한 갤러리, 예술 카페 등으로 꾸며져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지붕 없는 미술관으로 재탄생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영업이 중단된 현대부동산은 ‘복덕방’이라는 강강술래를 체험할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조성되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병력은 분명 일본군에 비해 적었고, 국가적 지원도 일본군에 비해 형편없었으며, 일본군의 주병력들은 전투를 통해 단련된 병사들이었다. 허나 이런 것들을 뒤집을만한 힘이 이순신 수군에는 분명히 있었다. 이순신이 아닌 조선을 지킨 수군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誓海魚龍動(서해어룡동) 바다에 서약하니 물고기와 용이 감동하고
盟山草木知(맹산초목지) 산에 맹세하니 풀과 나무도 아는구나
讐夷如盡滅(수이여진멸) 원수를 모조리 멸할 수 있다면
雖死不爲辭(수사불위사) 비록 죽음일지라도 사양하지 않으리라.
울돌목의 소용돌이로 왜군을 격파하신 이순신 장군의 업적과 민족의 기상을 우수영 숭어로 작품화하였다.
'면립상회'는 1940년대 문내면에서 관리, 운영하였으며 포목이 주 품목이었다고 한다. 이 '면립상회'를 지역민들의 생활유품들을 전시하고, 쉼과 소통의 공간으로서 주민들 사이의 정보도 공유하는 문화적 공간으로 복원한 공간이 갤러리 '면립상회'다.
갤러리 '면립상회'로 들어가 보았다. 마을 주민들의 낡은 흑백사진이 놓인 추억의 공간.
마을 주민들의 옛 생활 용품이 전시된 공간
물레를 사용하여 면화에서 실을 뽑아내는 장면을 재현하였다.
오른쪽에 태극기가 게양된 남하마을회관이 있다.
우수영문화마을 쌈지공원과 정재카페 앞을 거쳐 우수영문화마을 책방&관광안내소 앞으로 간다.
빈 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 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마음이다. 무언가 채워져 있으면 본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 있는 것이다. - 법정(法頂)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 포토존 조형물에 적힌 법정스님의 글
1970년대 송광사 불일암 시절 설해목의 나무를 주어다 겨우살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비교적 상태가 좋은 것을 골라 스님이 손수 만들어 사용하셨던 일명 빠삐용 의자이다.
법정스님 마을도서관 안으로 들어가 잠시 관람하였다.
법정스님 생가터에서 나와 우수영안길을 따라나가면 우수영항에 이른다.
노란색 거북선을 울돌목 거북선이라 이르는 듯. 퀸스타2호는 우수영-추자도-제주도 구간을 운항한다.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에서 우수영과 제주도 및 추자도를 배편으로 연결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해남군에서는 2013년에 우수영항의 여객선 접안시설과 여객선 터미널 등을 준공하였다. 우수영 명칭은 1479년(성종 10)부터 여수에 좌수영이 개설되면서 생기게 되었다. 우수영항은 서해안고속도로와 목포에서의 연결성이 뛰어나다. 무료 주차 공간이 넓은 편이다. 2018년 11월 현재 해남우수영여객선터미널은 임시터미널 건물로 세워져 있다.
씨월드고속훼리주식회사에서 우수영~추자도~제주도 간 퀸스타2호를 운행하고 있다. 탑승 정원 규모는 1층 좌석 281명, 2층 좌석 163명이다. 소요 시간은 우수영~추자도까지는 2시간, 제주도까지는 3시간이다. 출항 시간은 매일 오후 2시 30분이다. 매월 둘째 주, 넷째 주 수요일은 휴항이다. 일반 요금은 38,000원이다. 주말과 공휴일 및 특송 기간에는 10%의 할증 요금이 적용된다. 2018년 11월 현재 퀸스타2호를 예매하였을 시 목포로 가는 셔틀버스를 무료로 탈 수 있다. 퀸스타2호는 차량 탑재가 거의 안 되며, 승객 외 자건거와 약간의 화물만 실을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차세대 해상교통관제를 설치한 여객선 터미널이다. 무료 주차 공간이 넓은 편이다. 2018년 11월 현재 해남우수영여객선터미널은 임시 터미널 건물로 세워져 있다. 2016년 한 해 동안 해남우수영여객선터미널을 이용한 관광객은 3만 9736명이었다. 한편 해남 우수영문화마을주민협의회는 2019년 6월 8일 해남우수영여객선터미널 내 체험장에서 보리숭어 맨손잡이 행사를 개최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우수영문화마을 입구에 설치된 작품으로 명량대첩의 생생한 현장 모습이 우수영문화마을의 주제를 단적으로 나타낸다.
서해랑길은 해안뎈을 따라가다가 명량로에서 국도제18호선 관광레저로 우수영교 아래를 통과하여 보적산으로 오른다.
망해산과 우수영문화마을이 보인다. 우수영문화마을은 문내면 서상리, 동외리, 선두리 지역을 포함한다. 왼쪽의 섬은 양도, 여객선터미널의 거북선 배를 울돌목거북선이라 이르는 듯.
오른쪽에 전라우수영을 지켜주는 섬 양도가 있고 앞바다를 통하여 울돌목으로 나간다.
왼쪽에 진도대교 주탑과 그 뒤 망금산의 진도타워가 보인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은 전라우수영을 출발하여 전선 13척을 거느리고 우수영 앞바다를 통하여 진도대교 아래 울돌목으로 나가 왜선 133척을 물리쳤다.
명량로에서 국도제18호선 관광레저로 우수영교 아래를 통과하여 보적산에 있는 옛 충무사로 올라간다.
예전에 충무사와 그 뒤에 명량대첩비가 보적산에 있었는데 현재는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로 옮겨져 있다.
예전에는 이 비각 앞에 충무사가 있었고 충무사 뒤에 명량대첩비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앞뒤 위치가 불분명하다.
보적산 옛 충무사를 거쳐 내려와서 왼쪽 충무마을로 향한다. 서해랑길은 왼쪽의 청룡산으로 올라가 쉼터정자로 이어진다.
쉼터정자 옆에 충무마을회관이 있다. 보적산 옛 충무사에서 내려와 앞에 보이는 하남모텔 앞을 거쳐 이곳으로 왔다.
시멘트 농로 끝에서 왼쪽으로 이어가서 청룡산 능선으로 오른다.
오른쪽 뒤에는 진도의 벽파진, 맞은편은 해남의 옥매산 지역이라고 가늠한다.
망해산과 그 아래 전라우수영 본영 그리고 우수영마을, 우수영여객선터미널이 모두 조망된다.
청룡산에서 내려와 오른쪽 우수영유스호스텔 방향으로 내려간다.
땅끝해남 자전거길 3코스 우수영길 안내도 기둥 아래에 서해랑길 13코스 시작점 표지가 붙어 있다.
뒤쪽에 우수영유스호스텔, 오른쪽에 강강술래전수관, 왼쪽에 강강술래기념비, 그 왼쪽 앞에 서해랑길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학상마을회관-예락마을회관-임하도입구-전라우수영지망해루-우수영5일장-충무사와 명량대첩비-법정스님생가터-울돌목거북선-우수영여객선임시터미널-우수영국민관광지, 13코스를 역방향으로 탐방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