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전작 <관상>과 비교할 경우, 핵심 소재인 '명당'이 플롯에 차지하는 비중이 더욱 높다. <관상>의 역술이 어디까지나 주인공측이 활용하는 수단일 뿐, 악역들의 최종 목표는 관상과 상관 없는 철저히 실질적인 목적이었던데 비해(물론 정체를 숨기기 위해 중간에 관상에 관심을 두어 가짜를 보내기도 했다.) <명당>은 시종일관 명당을 차지하고 뺏기 위한 싸움이 작품의 전부다. 주인공 측이나 악역 측이나 '상대편 무덤은 흉지에 묻고 우리 조상 무덤은 길지에 묻기'가 승리조건인 게임처럼 움직이는, 사실상
묏자리 배틀물. 이런 탓에 풍수지리에 심리적으로 몰입이 안되는 관객은 작중 인물들이 뭘 하든 시큰둥해지는 문제가 있다. 심하게는 나라를 쥐고 흔드는 고관대작과 왕손이란 이들이 고작 묏자리 차지하겠다고 사병으로 살육전까지 벌이는 모습이 한심해 보이기도. 극중에서 명당은 미래를 약속하는 절대 보증수표기 때문에, 모든 권력과 재력을 차지하고 있어도 묏자리가 나쁘면 다 의미 없는 거고 아무것도 없는 신세라도 좋은 터만 먹으면 승자라는 인식이 모든 인물에게 당연한 상식처럼 자리잡아 있다.
[참고]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극의 맨 처음 박재상의 일가족이 몰살당한 직 후 어느 흉흉한 마을의 자리를 다시 잡아주어 번성하게 해주는 장면에서는, 재법 그럴듯한 인문지리학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11]사실 중반까지만 해도 현실정치적인 성격이 없지 않아서, 장김의 묘지를 왕릉 위에 덮어씌웠다는 '대역죄'를 명분삼아 장김 세도를 끝장낼 수 있는 정치적 카드를 확보하는 것이 주인공 측의 목표였다. 그러나 정작 이 사실을 힐문한 국왕이 김좌근의 압도적인 세력 앞에 항복 선언을 하면서 영화의 내용은 '풍수지리를 수단으로 삼은 현실 싸움'에서 '천자지지 쟁탈전'으로 완전히 변하고, 이에 따라 등장인물들도 '수단방법을 불문하고 길지를 얻는 것이 최고의 승리'라는 가치관 하에 이야기가 흘러간다. 최후반부에 천자지지를 차지한 흥선은, 아직 권세도 군사력도 멀쩡한 압도적 실력자인 김병기를 상대로 마치 이미 장동 김씨가 몰락이라도 한 양 호통을 치며 김씨들의 처분을 논하는데, 그 처분이란 게 '너희 할아비들 무덤을 다 파내서 뼈를 갈고 쥐, 뱀뼈랑 같이 섞어 나쁜 땅에다 묻어서 대대손손 화를 받게 해주마!' 라는 협박인지라 '풍수'라는 소재에 이입하지 못한 관객들 입장에선 실소가 나올 법하다.
하다못해 그 자리에다 묘를 이장 완료한 것도 아니고, 했다쳐도 장동 김씨의 그 엄청난 세력이 당장에 줄어드는 것도 아닐 텐데(...).한편 악역인 장동 김씨 측도, 아래에 서술되다시피 이미 조선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쥐고 있는데도 기껏 역모라고 한다는 게 천하명당에다 묏자리를 쓰는 짓(...)이라는 게 냉정하게 바라보면 권력 낭비가 따로 없다. 어차피 관료들도 군사력도 손에 휘어잡았겠다, 민심을 신경쓰는 이들도 아니겠다, 심지어 왕도 역적인 걸 뻔히 알면서 터치를 못하는 판이니, 명당 잡는다고 아옹다옹할 바엔 차라리 지금 임금을 몰아내고 옥좌에 앉은 뒤 명당으로 묏자리를 바꾸는 게 확실하고 편하니까.
그래도 이와 같은 부분, 즉 명당 하나에 목숨을 걸고 사생결단을 내려는 작중 인물의 심리야 역술을 핵심 주제로 하는 본 시리즈의 근본 특성상 이해할 수 있다고 하지만,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천자지지 쟁탈전'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 개연성이 심히 떨어진다. 명당을 두고 하룻밤 만에 스피드게임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땅이 발이 달려서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 건 누구네 집안 사람이 거기 묻히느냐지 누가 달려서 명당에 먼저 도착하느냐가 아니기 때문. 이미 절터인 명당에다 묏자리를 잡으려면 절간을 헐고 다시 거기에 묘를 조성해 관을 이장하는 긴 작업을 필요로 하며, 이 이장 작업이 완료될 때까지는 그 누구도 승자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천자지지의 위치를 파악한 시점에서 흥선군이든 김병기든 쓸 수는 얼마든지 달리 있었다.
흥선군의 경우, 가장 좋은 대책은 위치를 들은 시점에서
자신 이외의 현장에 있던 이들을 모두 제거하는 것이다. 정보면에서 확실히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방법이니까. 가장 이상적인 것은 살인멸구 뒤 아버지 남연군의 관을 최대한 서둘러 확보하고 잠적, 불시 혹은 몰래 관을 이장하는 것이다. 장동 김씨가 가야산이 천자지지라는 것을 모르는 이상, 부하를 대리인으로 삼아 신분을 숨긴 채 사찰과 협상 또는 회유를 해서 묘터를 손에 넣는 것도 가능하다. 또 설혹 들이닥친 김병기 일당에게 당하더라도 '오직 자신만이 위치를 안다는 사실'을 협상 카드로 이용해 시간을 벌 수도 있다.
반대로 흥선군이 가야산으로 갔다는 사실을 확인한 시점에서 김병기는, 굳이 먼저 출발한 흥선군과 스피드게임을 벌일 필요가 없다. 어차피 흥선군에게 뿅 하고 아버지 무덤을 텔레포트시키는 재주는 없는 바, 차라리 흥선군이 절에서 소동을 일으키면 '천 년 고사찰에서 칼 든 왈자들을 거느리고 행패를 부렸다'는 등의, 팩트에 근거한 죄목을 명분으로 삼아 느긋하게 모은 충분한 병력을 가지고 그를 체포하거나 사살할 수도 있다. 흥선군과 장동 김씨가 지닌 세력의 총력은 게임이 안 되니 승패는 분명하고, 거기다 '백성에게 행패를 부린 망나니 왕족을 조정 집정대신의 권한으로 처단한다'는, 민심에도 거스르지 않을 자연스러운 제거의 대의명분도 얻을 수 있다. 만약 흥선군이 절터를 돈으로 사려고 했다면, 역시 자금력에서 우월한만큼 훨씬 웃도는 금액을 제시해 무산시키면 그만. 또 다른 방법으로 묏자리가 아니라 그 자리에 묻힐 시신에 수작을 부릴 수도 있다. 흥선군이 가야산으로 간 사이에 그의 아버지 남연군의 관을 못 쓰게 만들어 버리기만 해도 흥선군은 전혀 득을 볼 수 없다. 이미 김조순의 묘가 파묘되어 명당에 다시 묻어도 효험을 못 받는다는 말을 들었으니 김병기가 못 할 발상도 아니었고, 파묘만으로 충분치 않으면 아예 관을 빼돌리거나 부숴버릴 수도 있다. 당장 왕릉도 누차례 범한 장동 김씨가 일개 방계 왕족의 묘 따위를 파헤치는 게 부담이 될 리도 없다.
한마디로
흥선군에게나 김병기에게나 '가야산으로 닥돌+깽판'은 전혀 현명한 해결책이 아니었음에도, 그들은 스피드게임을 했다. 정면대결로 승산이 없는 흥선군은 천자지지의 위치도 누출하고 본인의 행로도 훤히 보이는 악수를, 인력·병력·자금력 모두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는 김병기는 위의 수를 하나 혹은 여럿을 병행할 수 있었음에도 졸속히 모은 일부 군사만으로 직접 흥선의 사병과 맞싸움을 벌인다는 하지하의 대응을 한 것이다. 게다가 영화는 마치 '맨몸으로든 뭐든 그냥 명당에 당장 알박는 사람이 승리'라는, 차분히 생각하면 심히 의문시되는 결론을 당연하다는 듯 관객에게 제시하고 있다.
사실 이 상황에서 두 사람이 서둘러 명당에 도착하는 게 자연스러울 수 있는 흐름은 한 가지뿐인데, 땅에 무슨 수작을 부려서 명당의 효험을 잃게 만드는 방법이 있어서 흥선군이 너죽고 나죽자식으로 명당을 망쳐놓으려 드는 경우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은 영화 안에서 한번도 나온 적이 없는 만큼 개연성이 떨이지기는 마찬가지. 차라리 '인위적인 방법으로 명당을 흉지로 만드는 방법'에 대한 떡밥을 극중 던져 보인 뒤,
천자지지를 듣자마자 광기에 사로잡혀[12] 달려나가는 흥선군 → 김조순 묘 사건에서 힌트를 얻어 남연군 묘를 파묘하는 방법으로 대응하려는 김병기 → 아직 흥선군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은 박재상이 그 '방법'을 김병기에게 말해주고 흥선군이 명당을 자폭시킬지 모른다고 선동함 → 유리한 위치에 있던 김병기가 조급한 마음에 무리수를 택하도록 유도하는 식의 전개가 나왔다면 이전과 이후의 플롯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훨씬 치밀하고 그럴싸한 스토리가 되었을 것이다. 더불어 주인공 박재상이 후반부에 무력하게 사태에 휩쓸려 끌려다니지 않고 자신이 사태를 주도하는 그림도 그릴 수 있었을 것이고, 차마 친구를 죽이지 못해 악수를 택한 흥선군의 인간성의 일단도 강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김조순의 시신이 부정탔으니 새로 시신을 만든다며 김좌근을 죽인 것도 애매하다. 김조순의 시신이 효과가 없는 것은 단순히 이장을 하려 했기 때문이 아니라 파묘 과정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장이 문제라면 흥선이 남원군의 묘를 이장한 것도 효과가 없어야 한다. 즉 김조순 이전 조상의 시신을 이장했으면 이대천자지지의 효과를 받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물론 김병기가 이를 미처 생각지 못할정도로 멍청했거나 왕이 되려는 욕심 때문에 패륜을 저질렀을 수도 있지만 딱 떨어진다기엔 설득력이 부족하다.
한편으로는 결국 악역인 장동 김씨는 권력과 병력을 거의 온전히 보전한 채 작품 최후반까지 이르렀음에도 마지막에 와서 자막으로 '몰락했다'고만 나올 뿐인 것도 상당히 허술하다. <관상>과 마찬가지로 소재에 대한 몰입도에 따라 호불호가 극명히 갈릴 영화지만, 관상을 배제하고 봐도
계유정난이라는 훌륭한 정치스릴러적 소재를 다루고 있는 <관상>과 달리 아예 풍수 자체가 모든 걸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그 호불호의 격차가 더 클 것으로 보인다. 물론 <관상>에서도 인물들의 운명이 그들의 관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관상>의 수양대군은 '역적의 상이어서 역적질에 성공한' 것이 아니다. 수양대군의 정권 탈취 과정을 적어도 실제 역사에 근거해서 자세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반면 <명당>의 흥선대원군은 도대체 무슨 수로 대소신료, 군사, 왕실 친위세력까지 죄다 발밑에 둔 장동 김씨를 몰락시킬 수 있었던 건지 극중 나온 내용만으론 전혀 알 수 없다. 극중 모습만 보면 왕 따윈 당장 점심밥 먹기 전에 갈아치울 수 있을 것같은 천하무적 안동 김씨가, 마치 '천자지지에 묏자리를 쓰니까 귀신같이 저절로 무너졌다'는 듯 느껴질 정도로 과정 묘사가 없다. 아무리 묏자리를 빼앗겼기로소니 그들이 '아 흥선이 명당 가졌네.
우린 안 될 거야 아마. 니가 이겼다, 니 아들 왕 해라' 라고 고분고분히 나왔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영화는 이 부분은 '이대천자지지의 힘으로 흥선군은 아들을 왕으로 만들었습니다'라고 과정도 없이 간단히 정리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