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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지월(參禪指月)
참선(參禪)이 결코 선정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선정을 떠나지도 않습니다. 그 관계에 대해서는 앞서 선종과 선정 그리고 화두참구 등의 장에서 이미 대략적으로 말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사족을 달아 보충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참선을 하는 사람에게 첫째로 중요한 것은 발심(發心)입니다. 즉, 개인의 굳센 의지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만약 곧바로 무상보리(無上菩提)를 향해 나아가 돈오(頓悟)하고자 한다면 절대로 조그만 복덕이나 인연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릇 인승ㆍ천승ㆍ성문승ㆍ연각승으로부터 대승에 이르기까지의 5승도 속에 나열되어 있는 6바라밀 만행의 모든 수련법과, 복덕자량을 쌓는 일체의 선법(善法)을 모두 절실히 지키고 닦아야만 비로소 가능합니다. 달리 말하면 크나큰 희생과 노력 없이 약간의 조그만 총명이나 복보 또는 선행으로 보리를 깨닫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달마조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부처님들의 무상묘도(無上妙道)는 억겁에 걸친 정진과, 실천하기 어려운 것을 실천하고 참기 어려운 것을 참아낸 것이다. 어찌 작은 공덕과 작은 지혜, 경솔한 마음 교만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정법을 얻기를 바라고 헛된 정진수고를 하리요[諸佛無上妙道, 曠劫精勤, 難行能行, 非忍而忍, 豈以小德小智, 輕心慢心, 欲冀眞乘, 徒勞勤苦]!”
발심이 진실하고 간절한데다 복덕이 원만히 갖추어지면 적당한 기회가 이르렀을 때 자연히 바른 법을 가리는 지혜가 분명하여집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도를 배우려면 무쇠 같은 자라야 하니, 마음에 착수하여 판단해 곧바로 무상보리를 취하되, 일체의 시비를 상관하지 말라[學道須是鐵漢, 着手心頭便判, 直取無上菩提, 一切是非莫管].”
이런 포부 도량과 견식(見識) 조건 외에 또 하나 중요한 일은 진정한 선지식인 스승을 찾는 것입니다. 찾아야 할 스승은 반드시 도에 밝고 경험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런 스승을 따라 닦아 익히면서 자신의 지팡이를 찾아내면 곧바로 대도(大道)를 향하여 달려 나아갈 수 있습니다. 후회하고 물러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금생에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다음 생에 기약하며, 의지를 굳세게 하고 3생(三生)동안 노력한다면 성공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덕이 일찍이 말했습니다. “화두 하나를 꼭 껴안고 굳게 견디면서 변함이 없으면, 금생에 설사 깨닫지 못하더라도 임종 시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천상세계나 인간세계에 뜻대로 태어나 지낼 수 있다[抱定一句話頭, 堅挺不移, 若不卽得開悟, 臨命終時, 不墮惡道, 天上人間, 任意寄居].”
고덕 중 진정한 선지식은 인과응보를 깊이 알아서 절대 자기 자신을 속이거나 남을 속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그런 선지식들의 말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화두란 도에 들어가는 지팡이나 다름없고, 진정한 선지식인 스승은 길을 잘 아는 노련한 말과도 같습니다. 참선하는 사람은 손에 지팡이를 들고 훌륭한 말을 타고서, 채찍 그림자만 봐도 날듯이 달리고 호각소리만 듣고도 붙들어 맨 쇠사슬을 끊어버립니다. 제자와 스승이 서로 중시하고 스승의 세심한 지도 아래 한번 활연히 깨달으면, 비로소 자기가 본래 미혹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어디에 무슨 깨달음이 있겠습니까!
만약 ‘의정을 일으키고’, ‘화두를 들고’, ‘공부를 하는’ 등의 방법을 참선과 연계시켜 논해본다면, 그런 방법들이 참선에 영향을 미치긴 하지만, 그 영향은 결코 실법(實法)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에게 어떤 것이 법이라거나 혹은 진리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거짓말을 함과 같으며, ‘나는 마음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결국 어리석은 것입니다!
만약 그런 방법들을 척도로 삼아 자신을 인정하고 남을 평가하는 거울로 여긴다면, 최상의 우유가 곧 독약으로 변해 생명을 잃게 할 것이니 잘못은 그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방법들을 경시하여 완전히 틀린 것이라 여기는 것도, ‘섭공(葉公)이 용(龍)을 좋아했지만 진짜 용이 나타나는 것을 보자 도리어 두려워 도망갔다는 격이니 어찌 우스운 얘기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런 방법들이 참선의 바른 법인지, 사용해도 되는지, 어떻게 활용해야 되는지에 대해서는 번갈아 많이 말했으니 만약 자신이 아직도 모르겠다면 저도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청원(靑原) 유신(惟信) 선사가 상당설법(上堂說法)에서 말했다. “노승이 30년 전 참선을 하지 않았을 때는 산을 보면 산이요, 물을 보면 물이었다. 그 후 선지식을 친견하고 도에 들어가는 곳이 하나 있은 뒤 산을 보니 산이 아니요, 물을 보니 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쉴 곳을 하나 얻고 나서 이전처럼 산을 보니 그저 산이요, 물을 보니 그저 물이다. 여러분, 이 세 가지 견해가 같은가 다른가? 그 누가 이를 분명히 밝힐 수 있다면 그더러 노승을 직접 만나보도록 허락하겠다.
青原惟信禪師. 上堂法語云: “老僧三十年前, 未參禪時, 見山是山, 見水是水. 及至後來, 親見知識, 有個入處, 見山不是山, 見水不是水. 而今得個休歇處, 依前見山只是山, 見水只是水. 大眾, 這三般見解, 是同是別? 有人緇素得出, 許汝親見老僧.”
그러므로 “참선하는 사람은 반드시 참구는 진정으로 참구해야 하며 깨달음도 실제로 깨달아야 한다. 깨달은 것처럼 그럴싸하게 말만 해서는 인정할 수 없다.”고 한 고승의 말도 바로 이런 이치입니다.
참선에 깊이 들어가, 크게 한번 죽었다 홀연 크게 되살아나면 깨달음의 경계가 나타나는 것을 처음으로 봅니다. 마음의 눈으로 움직임과 멈춤 사이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찾아봐도 도무지 찾을 수 없으니, 몸과 마음이 이미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승이 말한 “마치 등불 그림자 속으로 가고 있는 듯하다.”는 경계는 하나의 실제 상황인 것입니다. “등불 그림자 속으로 가는 듯한” 경계에 이르면 참선하는 사람은 밤에 잠을 자도 꿈이 없어 ‘자나 깨나 한결같은’ 경계를 증득할 수 있습니다. 바로 삼조(三祖) 승찬(僧璨) 대사가 『신심명(信心銘)』에서 말한마음이 한 곳에 집중되어 변이(變異)하지 않으면, 온갖 법이 차별 없는 하나의 진리요, 눈이 잠들지 않으면, 온갖 꿈이 저절로 사라진다[心如不異, 萬法一如. 眼如不寐, 諸夢自除].는 것인데, 이 상황은 삼조 승찬 대사 자신의 체험으로서 틀림없는 진실이며, 결코 법상(法相)을 표현한 말이 아닙니다.
“육대부(陸大夫)가 남천(南泉) 선사에게 말했다. 승조(僧肇) 법사도 매우 특이합니다, 도에 대하여 풀이하기를, ‘천지와 나는 같은 한 뿌리에서 나왔고, 만물과 나는 한 몸이다[肇法師也甚奇特, 解道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一體].”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그러자 남천 선사가 정원의 모란꽃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부, 지금 내가 이 꽃을 보는 것은 마치 꿈과 같습니다[大夫, 時人見此一株花, 如夢相似]!”
남천 선사가 가리키면서 말한 ‘마치 꿈과 같다’ 는 것이나, 경전에서 말하는 ‘허깨비 같고 꿈과 같다.’는 비유는 모두 사실과 꼭 들어맞습니다.
수행자가 자나 깨나 한결같은 경계에 이르면 그 힘의 깊이를 살펴보면서 이미 도달한 이 경계를 보임(保任)해야 합니다. 예컨대 설암(雪巖) 선사는 도오(道吾)에게 삿갓을 보이면서 새어나가지 않도록 덮으라고 당부했는데, 이는 바로 도오에게 이미 얻은 공부의 경계를 잘 지키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리고 덮어서 잘 보임하는 공부의 도리로, 백장(百丈) 선사는 장경(長慶)에게 말하기를 “마치 소를 치는 사람이 작대기를 들고 지켜보면서 소가 다른 사람의 농작물에 침범하지 못하게 하듯이 하라.”고 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부가 여전히 다시 퇴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참선 수행자들이 일찍이 이 경계에 도달한 적이 있지만, 그것은 부지런히 닦아서 얻은 것이 아니라, ‘나무 벌레가 먹은 흔적이 우연히 글자를 이루었듯이’ 우연히 만난 것입니다. 속담에서 말한 ‘눈먼 고양이가 우연히 죽은 쥐를 만난 것’ 같은 것이어서 결코 그가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만약 수행자가 소를 치는 사람처럼 보호 유지할 수 있다면 공부는 자연히 깊어지면서 진보할 것입니다.
수행자가 막 이 경계에 도달하였을 때는 선병(禪病)이 발생하기 쉽습니다. 소산(韶山) 선사가 일찍이 유경신(劉經臣) 거사에게 경고한 적이 있습니다. “혹 이후 보통 때와는 다른 경계가 있으면서 무한히 환희에 젖는다면 급히 이를 수습(收拾)해야 합니다. 수습하면 부처의 그릇을 이룰 수 있지만, 수습하지 못하면 마음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爾後或有非常境界, 無限歡喜, 宜急收拾, 即成佛器. 收拾不得, 或致失心].” 황룡(黃龍) 신(新) 선사가 영원(靈源) 청(淸) 선사에게 말했습니다.법공(法空)을 처음 체득한 자는 희열이 많아 어지럽게 되기도 하니 시자의 방에 가서 한숨 푹 자게 하라[新得法空者, 多喜悅, 或致亂, 令就侍者房熟寐]!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처음으로 법공(法空)의 경계에 이른 사람은 환희에 젖어 산란해 질 수 있으므로 적절하게 주의를 기울여 산란해져서는 안 됩니다. 세속과의 접촉을 피하고 보임함으로써 처음 얻은 성태(聖胎)를 배양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도과(道果)가 무르익거든 세간과 출세간 양 쪽 길을 향하여 걸어가되, “삶을 영위하기 위한 세상의 모든 산업이 실상(實相)과 서로 위배되지 않는[一切世間治生産業, 與實相不相違背]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도과가 익으면 속세에서나 속세 밖에서나 수행자는 항상 말과 행동이 일치할 수 있어서 깨달음과 실천행이 하나로 되고, 어느 한 쪽으로 치우진 변견에 떨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대의(大義)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면 불지옥이 눈앞에 있을지라도 분별심을 갖지 않고 해야 합니다. 이렇게 오래오래 단련해가다보면 생각이 있음과 생각이 없음[念而無念] 사이에서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게 됩니다.
이때가 되어도 아직은 철저한 정도가 아니며, 이 실상(實相)이 없는 경계도 버려야 합니다. 만약 버리지 못한다면 법신에 집착하게 됩니다. 열반의 열매는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어 여러 겹의 관문을 거쳐야하므로, 반드시 죽었다 살아나기를 몇 번이나 거쳐 마음과 물질이 하나가 되는[心物一如] 경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기의 마음이 만물의 현상에 미혹되지 않아 업을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心能轉物].
앞에서 말한 경계가 무르익으면, 이 마음이 마치 깨끗하고 둥근 달처럼 밝게 빛날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직은 여전히 초보적인 깨달음 경계에 속합니다. 조산(曹山) 선사가 말한 다음 한 마디는 그 의미를 자세히 음미할 필요가 있습니다.처음으로 마음을 깨달은 자는, 그 깨달음이 아직 깨닫지 못함이나 같다[初心悟者, 悟了同未悟].
그래서 남천(南泉) 선사가 달을 감상하고 있을 때 어떤 승려가 “언제 저 달과 같은 경지가 될 수 있었습니까[幾時得似這個去]?”하고 묻자 남천이 말했습니다. “왕 노사는 20년 전에도 이런 경지에 와 있었다[王老師二十年前, 亦恁麽來]!” 그 승려가 또 물었습니다. “지금은 뭐하시는 겁니까[卽今作麽生]?” 남천은 대꾸하지 않고 바로 방장실도 돌아갔습니다.
왜 이 경계에 이르러서도 마음과 물질이 하나가 되어야만 여러 겹의 관문을 지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이 문제에 대해 고승의 말을 몇 개 인용하여 해석해 보기로 합니다.
귀종(歸宗)이 말했다. “영명한 광명이 해탈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눈앞에 물질과 몸이라는 장애가 있기 때문이다[光不透脫, 只爲目前有物].”
남천(南泉)이 말했다. “이 물질이 듣거나 듣지 않는 것이 아니다[這個物, 不是聞不聞].”
또 말했다. “묘용(妙用)은 그 자체가 통하지 물질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도가 통함은 무엇에 의지하여 통하는 것이 아니다. 도는 물질을 빌려야 비로소 나타날 수 있다[妙用自通, 不依傍物, 所以道通不是依通, 事須假物, 方始得見].”
또 말했다. “생인(生因)으로 말미암아 생기하는 것이 아니다[不從生因之所生]!”
문수(文殊)가 말했다. “요인(了因)을 통해 비추어보고 깨닫는 것일 뿐이다[惟從了因之所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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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보충) 생인(生因)이란 제8식인 아뢰야식이 일체의 종자를 본래 갖추고 있어서 일체의 사물을 생겨나게 할 수 있음을 가리킨다. 마치 풀씨에서 뿌리가 나고 싹이 남과 같다. 요인(了因)이란 지혜로써 진리를 비추어 봄을 가리킨다. 마치 등불 빛이 사물을 비추면 또렷이 알 수 있음과 같다.
위의 두 마디 말은 『종경록(宗鏡錄)』 제1권 제1 표종장(標宗章)에도 나오는데 관련 부분을 옮기고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이것이 바로 여래장속의 법성의 본체인데, 그 본성은 본래부터 원만 구족하여 더러움에 처하여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도야(陶冶)로 말미암아 깨끗해지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자체가 청정하며 광명이 시방세계를 널리 비추어서 두루 덮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원만히 빛나면서도 파도를 따르고 흐름을 좇음이 마치 더러움을 받은듯하지만 처음처럼 깨끗하다. 인연을 따르면서도 자재하므로 더러움을 없애서 깨끗하지 않음이 없다. 성인에 있어서도 늘어남이 없고 범부에 있어서도 줄어듦이 없다. 비록 드러나고 숨는 다름이 있지만 본질 면에서는 차이가 없다. 만약 이것을 번뇌가 덮고 있으면 숨고 지혜가 비춰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그것은 생인(生因)으로 말미암아 생기(生起)하는 것이 아니라 요인(了因)을 통하여 비추어 드러내 깨닫는 것일 뿐이다. 이것이 중생 자심의 본체이다. 이는 영지영각(靈知靈覺)을 갖추고 있으며 고요한 체[寂]와 비추는 작용[照]이 함께 하여 빠뜨림이 없다. 이것이 화엄종의 근본일 뿐만 아니라 일체 교문(敎門)의 핵심이다.”
此即是如來藏中法性之體. 從本已來性自滿足. 處染不垢修治不淨. 故云自性清淨. 性體遍照無幽不矚. 故曰圓明. 又隨流加染而不垢. 返流除染而不淨. 亦可在聖體而不增. 處凡身而不減. 雖有隱顯之殊. 而無差別之異. 煩惱覆之則隱. 智慧了之則顯. 非生因之所生. 唯了因之所了. 斯即一切眾生自心之體. 靈知不昧寂照無遺. 非但華嚴之宗.亦是一切教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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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산(夾山)이 말했다. “눈앞에 법이 없다. 생각의식이 눈앞에 있다. 진성(眞性: 진여. 본성. 자성―역주)은 눈앞의 법이 아니기에, 눈과 귀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目前無法, 意在目前, 不是目前法, 非耳目之所到].”
고덕들의 이런 말들은 일일이 다 들 수 없을 정도인데, 이치만 알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미 그 경계에 도달했다면 반드시 저쪽으로 내던져 버려서 그 경계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그 의미가 다음의 영운(靈雲)의 법어와 통할 수 있습니다.
장생(長生)이 물었다.
“혼돈이 아직 나누어지지 않았을 때 중생은 어디에서부터 옵니까?”
선사가 말했다.
“노주(露柱)가 아이를 밴 것과 같다.”
“나누어지고 난[천지가 개벽된] 후에는 어떻습니까?”
조각구름 하나가 하늘에 점을 찍는 것과 같다.”
하늘에도 점이 찍힐 수 있는 건지 모르겠군요?”
선사가 대답하지 않았다.
“왜 중생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선사가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티 없이 완전히 맑음을 얻었을 때는 어떻습니까?”
선사가 말했다.
“진상(眞常)이 흐름과 같다.”
“어떤 것이 진상이 흐름입니까?”
“거울이 영원히 밝음과 같다.”
“향상(向上)에 또 다른 일이 있습니까?”
“있다.”
“어떤 것이 향상의 일입니까?”
“거울을 부숴버리고 오면 너와 마주보겠다.”
“그럼 거울만 부숴버리고 나면 궁극의 경지에 도달한 것인가요?”
“아직 아니다.”
“궁극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찌 듣지 못했는가? 향상의 한 길은 천분의 성인도 전하지 못한다는 것을.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잠시 가는 길을 가르쳐주마.” 그리고는 말했다.
“최초의 것이 최후의 것이며, 가장 얕은 것이 가장 깊은 것이니, 어떤 악행도 하지 말고 많은 선행을 하라.”
長生問: 混沌未分時, 含生何來? 師曰: 如露柱懷胎. 曰: 分後如何? 師曰: 如片雲點太清. 曰: 未審太清還受點也無? 師不答. 曰: 恁麼含生不來也? 師亦不答. 曰: 直得純清絕點時如何? 師曰: 猶是真常流注. 曰: 如何是真常流注? 師曰: 似鏡長明. 曰: 向上更有事也無? 師曰: 有. 曰: 如何是向上事? 師曰: 打破鏡來, 與汝相見. 然則打破鏡來, 已是到家否? 曰: 未也. 到家事畢竟如何耶? 曰: 豈不聞乎: “向上一路, 千聖不傳.” 雖然如此, 姑且指個去路, 曰: 最初的即是最末的, 最淺的就是最高深的, 諸惡莫作, 眾善奉行.
위에서 간단히 서술한 것들은 모두 이론적으로 정확하고 실제적으로 진실한 사례들인데, 실상은 형상이 없으니[實相無相] 모두 그림자와 메아리의 작용이 있는 설법들입니다. 도대체 어느 것이 법이고 어느 것이 법이 아닌지는 개인 스스로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근기의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다른 사람의 말에 속아 혼란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더욱 멋대로 입으로만 선(禪)을 말하거나 도(道)를 말해서는 안 됩니다. 말만 할 수 있고 행할 수 없어서 공부경계를 조금도 증득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단지 지식에 의한 이해만 가지고 스스로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어떤 사람은 고덕이 “큰 깨달음이 열여덟 번이었고 작은 깨달음은 무수히 많았다.”고 말한 것을 근거로, 그 자신이 이미 몸과 마음을 다 잊고, 아무것도 모르며, 홀연 적지(寂止)의 경계에 들었을 뿐만 아니라 크게 죽었다 다시 살아나기를 여러 차례나 거듭했지만 아직 최고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는데, 왜 그렇게 간단하게 말하는가? 라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습니다. 고승이 말한 ‘큰 깨달음과 작은 깨달음’은 결코 실제 수행공부[事相]면에서의 증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론을 통해 들어가는 문[理入之門]을 깨달았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후학들을 격려하기도 했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을 잘못 이끌기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단박에 적지(寂止)의 경계에 들어간다’거나 ‘크게 죽었다 크게 살아나기를 무수히 한다’는 것은 모두 수행 효과인 공용(功用) 방면의 일입니다. 이것은 조동종(曹洞宗)에서 스승과 제자가 말하는 공훈(功勳) 위계상의 일 같은 것입니다. 이들 일체는 공부 방면에 속하는 것으로, 공용의 일에 속합니다. 결코 선종에서 말하는 실제의 깨달음이 아니며, 단지 깨달은 후의 실천행위[行履]일 뿐입니다.
“예전 때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단지 예전 때와 실천행위가 다를 뿐이다[不異舊時人, 只異舊時行履處].” 이 말은 어떤 사람이 깨달은 후 비록 몸은 예전의 그 사람이지만 실천행위는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실천행위 공용이 곧 공훈입니다. 수행자는 공훈에 집착하지 않지만 역시 공훈을 중시합니다.
상근기의 사람이라면 근원을 살펴 바로 들어갈 수 있어, 직접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 개오(開悟)합니다. 마치 도둑이 빈방에 들어가서 홀랑 벗은 채 휘젓고 다녀도 아무런 장애가 없음과 같습니다. 이렇게 이(理)와 사(事)가 모두 해결되면 아무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말은 비록 그렇더라도 결국은 역시 온몸에 식은땀을 흠뻑 흘리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지, 눈썹을 그리거나 연지를 바르듯이 가볍고 얕게 겉치레식으로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온몸에 땀을 흘린다는 말도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땀을 흘리지 않고도 크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차례 쓴맛을 보지 않고는 제대로 체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용호(龍湖) 보문(普聞) 선사는 당나라 희종(僖宗)의 태자였다. 생긴 모습이 그림처럼 깨끗했고, 나면서부터 육식을 하지 않았다. 희종이 별의별 방법을 다 써서 바꿔보려고 했지만 끝내 허사였다. 희종이 촉(蜀)으로 순행 길에 나서자 마침내 삭발하고 은밀히 다니니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석상(石霜) 선사한테 갔는데, 하루 저녁은 방으로 들어가 간절히 말했다.
“조사가 따로 전한 일을 저에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석상(霜)이 말했다.조사를 비방하지 말라!
선사가 말했다. “천하의 종지(宗旨)요, 널리 전파된 것인데 감히 함부로 하겠습니까?
석상이 말했다. “그게 사실인가?
선사가 말했다. “스승님의 뜻은 어떤가요?
석상이 말했다. “안산(案山)이 고개를 끄떡이면 너에게 말해 주마.
선사가 듣고 엎드려 말하기를, “참으로 기이합니다!하며 땀이 흘러내렸다. 마침내 절하고 물러 나왔다. 뒤에 용호(龍湖)에 머물렀는데 신비한 행적이 꽤 많았다.
龍湖普聞禪師, 唐僖宗太子. 眉目風骨, 清朗如畫, 生而不茹葷, 僖宗百計移之, 終不得. 及僖宗幸蜀, 遂斷發逸遊, 人不知者. 造石霜, 一夕, 入室懇曰: 祖師別傳事, 肯以相付乎? 霜曰: 莫謗祖師. 師曰: 天下宗旨盛傳, 豈妄爲之耶? 霜曰: 是實事耶. 師曰: 師意如何? 霜曰: 待案山點頭, 即向汝道. 師聞俯而惟曰: 大奇! 汗下. 遂拜辭. 後住龍湖, 神異行跡頗多.
영운(靈雲) 철우지정(鐵牛持定) 선사는 태화(太和) 반계(磻溪) 왕씨(王氏)의 아들이니, 송나라 상서찬(尙書贊)의 9세손이다. 어려서부터 청빈하고 강한 기개가 있었으며 속세에 별 뜻이 없었다. 나이 서른에 서봉(西峯) 긍암(肯庵)에게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종지를 들었다. 설암(雪巖) 흠(欽) 선사를 찾아가 의지했는데, 마구간에 거쳐하면서 두타행을 했다. 하루는 흠이 대중에게 설법했다.
“형제들! 만약 7일 동안 밤낮으로 일념 상태로서 끊어짐이 없어도 들어가는 곳이 없다면, 노승의 머리통으로 오줌바가지를 만드시오!
선사는 묵묵히 듣고 단단히 결심 분발했다. 이질을 앓고 있었으나 약이나 죽, 물 등을 일체 끊어버리고 잠도 자지 않고 오직 정념(正念)으로 7일을 버텼다. 그러던 마지막 날 깊은 밤중에 이르러 홀연히 느꼈는데, 산하대지가 온통 눈으로 뒤덮인 가운데 당당한 몸이 나타났다. 얼마나 큰지 하늘과 땅도 그것을 다 둘러쌀 수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서 활연개오하였다. 온 몸에 땀이 흘렀고 이질 역시 완전히 나았다. 방장에 나아가 흠에게 보이자 흠이 반복해서 힐난하고 마침내 승려가 되라 명했다. (『속지월록(續指月錄)』에서)
靈雲鐵牛持定禪師, 太和磻溪王氏子. 故宋尚書贄九世孫也. 自幼清苦剛介, 有塵外志, 年三十, 謁西峰肯庵剪發, 得聞別傳之旨. 尋依雪岩欽, 居槽廠, 服杜多(頭陀)行. 一日, 欽示眾曰: 兄弟家! 做工夫, 若也七晝夜一念無間, 無個入處, 斫取老僧頭做舀屎杓. 師默領, 勵精奮發, 因患痢, 藥石漿飲皆禁絕, 單持正念, 目不交睫者七日. 至夜半, 忽覺山河大地, 遍界如雪, 堂堂一身, 乾坤包不得. 有頃, 聞擊木聲, 豁然開悟, 遍體汗流, 其疾亦愈. 且詣方丈舉似欽, 反複詰之, 遂命爲僧.
오조(五祖) 법연(法演)이 백운(白雲) 수단(守端)을 찾아가 뵈었다. 마침내 어떤 승려가 남천에게 물었던 마니주 화두를 들어 물었다. 수단이 꾸짖자 선사가 깨달았다. 그리고 다음의 투기게(投機偈)를 지어 올렸다.
산 앞의 한 뙈기 농토가 왜 묵혀지고 있는지
두 손 맞쥐고 할아버지께 재삼 물었더니
팔았다 스스로 되사기를 몇 번이나 한 것은
솔과 대가 맑은 바람 끌어옴을 사랑해서라네
山前一片閒田地 叉手叮嚀問祖翁
幾度賣來還自買 爲憐松竹引清風
수단이 기특히 여기고 인가했다. 수단이 선사에게 말했다. “여산(廬山)으로부터 여러 명의 선객(禪客)들이 찾아왔는데 모두 깨달아 들어 간 곳이 있다. 저들에게 말을 하게 해보면 하는 말에는 유래(由來)가 있고, 공안을 들어 물어봐도 알고 있으며, 전어(轉語)를 내려 보라 해도 역시 꼭 맞게 내린다. 그렇지만 아직 대철대오에는 들어서 있지 않다!” 선사가 이에 크게 의심이 일어나며 혼자 말했다. “이미 깨달았고, 말로도 할 수 있고, 알기도 하는데 왜 대철대오에 들어서 있지 않다는 건가?” 마침내 며칠을 참구하더니 홀연히 깨닫고는, 종전에 보배처럼 아끼던 것을 일시에 놓아 버리고 수단에게 달려가 뵈었다. 수단이 그를 위해 손발로 춤을 추었다. 선사 역시 한바탕 웃고 말았다. 선사가 나중에 말했다. “내가 온몸에 식은땀을 한 번 흘린 적이 있기 때문에 맑은 바람의 아래 부분을 이해한다.”
五祖演參白雲端. 遂舉僧問南泉摩尼珠語請問. 雲叱之, 師領悟. 獻投機偈曰: 山前一片閑田地, 叉手啶嚀問祖翁. 幾度賣來還自買, 爲憐松竹引清風. 雲特印可. ……雲語師曰: 有數禪客自廬山來, 皆有悟入處; 教伊說亦說得有來由; 舉因緣問伊, 亦明得; 教伊下語, 亦下得, 只是未在! 師於是大疑, 私自計曰: 既悟了, 說亦說得, 明亦明得, 如何卻未在? 遂參究累日, 忽然省悟, 從前寶惜, 一時放下. 走見白雲, 雲爲手舞足蹈. 師亦一笑而已. 師後曰: 吾因茲出一身白汗, 便明得下截清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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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보충) 마니주 화두[摩尼珠語]
종남산(終南山) 운제(雲際) 선사가 처음 남천 선사 밑에서 참선하고 있을 때 물었다. “‘마니구슬[摩尼珠]을 세상 사람들은 다 모르지만 여래장(如來藏) 속에 간직되어 있다.’고 말했는데, 무엇이 ‘장(藏)’입니까?” 남천이 말했다. “너와 함께 오고 가는 자가 ‘장’이다.” 운제가 물었다. “오고 가지 않는 자는 어떠합니까?” “역시 ‘장’이다.” 또 물었다. “어떤 것이 ‘구슬[珠]’입니까?” 남천이 불렀다. “사조(師祖)야!” 운제가 “예!”하고 대답했다. 남천이 말했다. “가거라! 너는 내말을 이해 못한다.” 이에 운제는 이로부터 믿고 들어갔다.
終南山雲際禪師在南泉座下參禪, 問: 「摩尼珠人不識, 如來藏裡親收得, 如何是藏?」 南泉云: 「與汝來往者是藏.」 師云: 「不來往者如何?」 南泉云: 「亦是藏.」 又問: 「如何是珠?」 南泉召云: 「師祖!」 師應諾. 南泉云: 「去!汝不會我語.」 師從此信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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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열거한 몇 가지 예들은 아주 친근감이 들면서 우리도 깨달음을 빨리 성취할 수 있겠다는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만약 ‘크게 죽고 크게 살아난다’, ‘고목에서 꽃이 핀다’, ‘식은 재속에서 콩이 튄다’, ‘벽력같은 한 소리’, ‘정수리에서 나는 우레 소리’ 등과 같은 형용과 비유를 실재하는 법문[實法]이라 여겨 그런 구체적인 현상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 생각한다면 선종의 무상심법(無上心法)은 꿈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며, 전문가가 본다면 실소를 금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형용 어구들을 순전히 비유로만 여기고 사실과 조금도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할까요? 그렇게만 보는 것도 어리석은 사람이 꿈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꿈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란 걸 모르는 격입니다.
그렇다면 참선으로 깨달은 사람이 계속 정(定)을 닦아야 할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 닦아야 한다와 닦을 필요가 없다는 양쪽의 대답을 할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은 두 게송으로 설명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잡지도 않고 놓지도 않으며 편안히 머물고
옴도 없고 감도 없이 움직임에 자유롭게 맡긴다
不擒不縱坦然住 無來無去任縱橫
날마다 밥 먹고 옷 입지만 쌀 한 톨도 씹은 적이 없고 실 한 오라기도 걸친 적이 없습니다. 마치 새가 허공을 나는 것 같고 차가운 연못에서 달을 움켜쥐는 것 같아서 마침내 어떤 진실한 사상(事相)도 얻지 못합니다.
만약 이 단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안정되지 못하고 흔들린다면, 일체의 법문은 모두 실상(實相)과 같으니 자신이 임의로 사색 탐구해보고 처음부터 해 보는 것도 무방할 것입니다. 임제(臨濟) 선사는 열반할 때 다음 게송을 남겼습니다.
망상의 흐름이 멈추지 않으니 어찌 할까요 묻기에
참된 비춤은 무량무변하니 도 같다고 말해주지만
모양과 이름을 떠난지라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네
지혜 보검은 쓰고 나면 급히 갈아두어야 하네
沿流不止問如何 眞照無邊說似他
離相離名人不禀 吹毛用了急須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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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보충) 임제 선사의 열반게송에 대한 남회근 선생의 간략한 풀이를 그의 『원각경 강의』 중에서 뽑아 소개합니다.
우리들의 생각은 마치 흐르는 물처럼 영원히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 잡념망상을 멈추게 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할까요? 잡념망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공중속의 먼지와 같습니다. 마음이 고요해지기만 하면 당신은 잡념망상이 많다는 것을 아는데, 그 ‘앎[知]’은 바로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오온이 다 공함을 비추어본다[照見五蘊皆空]”에서 ‘비춤[照]’에 해당합니다. 그 ‘아는 것’ 그 자체에는 잡념망상이 없으며 그것은 허공처럼 무량무변합니다. 그 ‘아는 것’은 형상이 없고 명칭이 없습니다. 그것을 ‘부처[佛]’라고 불러도 좋고 ‘도(道)’라고 불러도 좋고 ‘원각(圓覺)’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인식하지 못합니다. 설사 당신이 인식하였고 깨달았다 하더라도 공부가 도달하여 더 이상 일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취모용료급수마(吹毛用了急須磨)” 구절에서 ‘취모’는 대단히 예리한 보검을 가리킵니다. 머리털을 하나 뽑아 그 칼날 위에 놓고 입으로 한 번 훅∼ 불면 털이 끊어져버립니다. 우리는 수행에 주의를 기울여서, 우리의 생각을 쓰고 나면 바로 버리고, 언제나 지(止)의 상태에 있으며, 언제나 정(定)의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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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여전히 좌선만 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이 무슨 말입니까! 일상생활에서 걷거나 멈추거나 앉거나 눕는 가운데 언제 어디서나 정(定)에 들 수 있어야 하므로, 단지 좌선만이 정이라고도 말할 수 없고, 좌선이 정이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명심견성(明心見性)하여 도를 깨친 사람이라면 어떻게 노력해야 할지 자연히 압니다.
“두 다리 쭉 뻗고 한 잠 자고, 깨어서보니 천지는 여전히 그대로구나!.”했는데 어느 곳엔들 그렇지 않겠습니까? 황룡(黃龍) 심(心)이 호구(虎丘) 융(隆)을 꾸벅꾸벅 조는 호랑이라고 불렀는데 어찌 우연히 그랬겠습니까!
임제가 깨달은 후 승당(僧堂)에서 앉은 채 자고 있었습니다. 황벽이 들어와서 보고는 지팡이로 선판을 한번 쳤습니다. 임제가 머리를 들어 황벽임을 보고는 다시 잤습니다. 황벽이 다시 선판을 한번 쳤습니다. 그리고 위 칸으로 가서 수좌가 좌선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말했습니다. “아래 칸 후생은 오히려 좌선하고 있는데 그대는 여기서 망상을 하며 무얼 하는가?”
철우(鐵牛) 정(定) 선사가 깨달은 후 언젠가 때마침 설암(雪巖) 흠(欽)이 선당을 순시하였습니다. 그 때 정 선사는 닥나무 이불로 몸을 둘러싸고는 누워 자고 있었습니다. 흠은 정 선사를 방장실로 불러놓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내가 선당을 순시하는데 그대가 자고 있었다. 만약 한 마디 이를 수 있다면 용서하겠지만, 이르지 못하면 이 길로 하산하라.” 선사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답했습니다.
쇠 소가 힘이 없고 밭 갈기 귀찮아서
고삐와 쟁기 챙겨 눈밭에 자러 갔네
대지가 온통 흰 은(銀)으로 덮여 있으니
덕산이 금 채찍을 때릴 곳이 없네
鐵牛無力懶耕田 帶索和犁就雪眠
大地白銀都蓋覆 德山無處下金鞭
흠이 말했습니다. “좋은 쇠 소로다!” 이로 인해 ‘철우(鐵牛)’가 호(號)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석상(石霜) 선사의 참선 단체에서는 20년 사이에, 배우는 대중가운데는 항상 나무 등걸처럼 우뚝이 앉아 잠을 자지 않고 참선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고목중(枯木衆)’이라 꾸짖었지만, 그렇다고 잠을 자야 옳다고 표시하지도 않았고 잠을 자야 비로소 도(道)가 된다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현사(玄沙) 선사가 죽은 승려를 보고서 대중을 향해 말했습니다. “승려는 죽었지만 그의 본래의 보리는 어디에나 드러나 있으며, 만 리(里)의 신성한 광명이 그의 몸을 에워싸고 있다. 배우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 한다[亡僧面前, 正是觸目菩提, 萬里神光頂後相, 學者多溟滓其語].” 그리고 또 게송 하나를 읊었습니다.
만 리(里)의 신성한 광명이 죽은 몸을 에워싸고 있네
그 광명 에워싸고 있지 않다면 어디서 바라볼까
일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마음도 쉴 지라
이것이 온 자취는 어디에나 있기에
지혜로운 자는 한 점만 건드려줘도 전체를 취하니
잠간 사이 기다리다 머리를 잃지 말라
萬里神光頂後相 沒頂之時何處望
事已成, 意亦休 此個來踪觸處周
智者撩著便提取 莫待須叟失却頭
이 속에 담겨있는 도리는 자세하고 절실히 참구해야지 멋대로 대충 해서 바르지 못한 견해인 단견(斷見)이나 상견(常見)에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선문(禪門)의 선정에 대해서는 『육조단경』이나 조사들의 어록 속에 이미 언급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더 이상 인용하지 않고, 다만 남천 선사의 말로써 끝맺겠습니다.
“경론에 의하면, 10지(十地)보살은 수능엄(首楞嚴)삼매에 머물면서 모든 부처님들의 비밀 법장(法藏)을 얻어서, 자연히 일체의 선정과 해탈을 얻는다. 그리고 신통 묘용으로 일체의 세계에 색신(色身)을 나타내어서, 혹 등각(等覺)과 정각(正覺)을 이루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며, 큰 법륜을 굴리고 열반에 들어간다. 무량한 세계를 털구멍으로 들어가게 하고, 경전의 한 구절만을 풀이하는데도 무량겁 동안 그 뜻을 다하지 못하며, 한량없는 천억 중생을 교화하여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게 한다. 이와 같이 성취하고서도 오히려 극히 미세한 어리석음을 불러 일으켜서 도(道)와는 완전히 어긋난다고 하니,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몸조심들 하기 바란다.”
據說十地菩薩, 住首楞嚴三昧, 得諸佛秘密法藏, 自然得一切禪定解脫, 神通妙用, 至一切世界, 普現色身, 或示現成等正覺, 轉大法輪, 入涅槃; 使無量入毛孔, 演一句經, 無量劫其義不盡;教化無量千億眾生, 得無生忍, 尚喚作所知愚, 極微細所知愚, 與道全乖. 大難! 大難! 珍重.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말한 법은 비유하면 뗏목과 같다. 법도 오히려 마땅히 버려야 하는데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我所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이상 말한 것 모두를 잠꼬대로 여기고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실재의 법으로 여기고 취한다면 최상의 우유가 변해 독약이 될 것입니다. 말하는 사람은 무심하지만 듣는 사람은 그 말에 속아 화(禍)를 당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원환선 남회근 공저 송찬문 번역 선정과 지혜 수행 입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