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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강해(20)
미디안을 통한 징계
본문 : 삿6:1-10
<반복되는 악순환>
여선지자 드보라와 바락,
그리고 장막치는 여인 야엘의 활약으로
가나안 왕 야빈과 그의 군대장관
시스라의 압제에서 벗어나
40년 동안 태평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태평의 세월은 거져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과 환난을 통하여 회개한 후에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자꾸 망각하는데서 출발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습니다.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마치 우리가 일상으로 누리는
것들에 대해 감사해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공기, 물, 자연...
그러나 그러한 망각은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합니다.
은혜를 잊으면 타락하게 됩니다.
1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물론 이번에 악을 행한 세대는
드보라가 활약하던 시대의
그 세대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40년을 한 세대로 계산해 보면...
다음 세대가 하나님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다음 세대로 온전히
이어지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세대가 다른 세대가 됨).
하나님을 존중하는 마음은
반드시 부모 세대가 자녀 세대에게
가르쳐주어야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와 같은 믿음의 세대 계승에 실패하면
그 다음 세대는
또다시 악을 행할 수밖에 없게 되고,
그러면 또 다시 평안이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모태신앙’이라는 말로
자신의 신앙 이력이
결코 짧지 않음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모태신앙’이란 말은 맞지 않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신앙이 전수되는 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몇 대를 이어서 신앙생활 해 온
독실한 기독교 신앙의 가문에
태어났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신앙이 전수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부모가 목사요 장로라고 하더라도,
부모 세대가 자녀 세대에게
제대로 신앙을 가르치지 않으면,
그 ‘다음 세대’는 믿음이
‘다른 세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징계 – 미디안의 지배>
사랑하는 성도님들 !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과 평안이 깨지면,...
반드시 다른 누군가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1-5절>
1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
2절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었으며
3절 이스라엘이 파종한 때면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치러 올라와서
4절 진을 치고 가사에 이르도록
토지 소산을 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에
먹을 것을 남겨 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5절 이는 그들이 그들의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
메뚜기 떼 같이 많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낙타가 무수함이라
그들이 그 땅에 들어와 멸하려 하니.”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 자손을
미디안의 손에 7년 동안 넘겨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미디안 족속은 아브라함의 후처인
그두라에게서 난 후손들입니다.
요셉은 미디안 상인들에 팔렸습니다.
그들은 유목민이었지만
외국과도 무역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땅의 경계는 대략
엘란만 동부 지역인 아카바만 일대라고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출 애굽시 모압과 동맹을 맺어
이스라엘을 공격했지만 모세에 의해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그들이 다시 국력을 키워
이스라엘을 침략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괴롭히는
장면이 이전 다른 민족의 압제와 다릅니다.
이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이나
모압 왕 에글론이나 가나안 왕 야빈에게
압제를 당할 때에는,
그들의 군사적인 힘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미디안의 경우에는 좀 다릅니다.
군사들이 칼과 창을 들고 침입한 것이 아니라
그냥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무수한 사람들이 밀고 들어온 것입니다(인해전술).
그것을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겼다’(2절)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요즘처럼 국경선이
분명히 않았습니다.
국경선을 지키는 군대로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소수의 무리들이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점차 늘어나
이제는 그들의 약탈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주객이 전도되어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만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3절 “이스라엘이 파종한 때면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치러 올라와서.”
미디안과 함께 호전적인
‘아말렉’과 아라비아 반도의
저 먼 곳 ‘동방 사람’까지 합세하여
‘치러’ 올라왔습니다.
그냥 먹을 것만 약탈해
돌아가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쳐서 쫓아내고
그 자리를 빼앗으려고 온 것입니다.
4절은 그들이 와서 저지른 일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4절 “진을 치고 가사에 이르도록
토지 소산을 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에 먹을 것을 남겨
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그들은 작정을 하고 장막을 쳤습니다.
눌러 앉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일부만 그들에게
점령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스르엘 평원을 넘어서서
팔레스타인 남부 지중해
해안에 위치한 ‘가사’(Gaza)까지 진출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심은 곡식이 익는대로 약탈해 갔습니다.
토지소산을 ‘멸할’ 정도로
싹쓸이해갔습니다.
토지 소산 뿐만 아니라
소나 나귀 등 가축들도 약탈해 갔습니다.
그럼 왜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들에 대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바보처럼
당하고만 있었던 것일까요? ...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에
그 심판을 그냥 달게 받기로 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5절 “이는 그들이 그들의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
메뚜기 떼 같이 많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낙타가 무수함이라
그들이 그 땅에 들어와 멸하려 하니.”....
마치 메뚜기 때의 습격과 같았습니다.
적당히 들어와야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텐데,.....
이건 ‘메뚜기 떼 같이’ 쏟아져 들어오니
손쓸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펄 벅의 ‘대지’(영화로도 만들어짐)
- 메뚜기 떼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메뚜기 떼가 한 번 지나간 곳은
남아나는 것이 없습니다.
‘메뚜기 떼 같이’ 쏟아져 들어오는
미디안 사람들에게 그냥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자손을 산에 마련한
임시 거처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었으며”(2절)).
이러한 기간이 7년이나 지났습니다.
7년은 지금까지의 여러 경우와 비교해보면
가장 짧은 기간입니다.
그러나 그 심판의 강도는
앞의 경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했습니다.
<부르짖는 이스라엘>.....
그제야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6절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궁핍’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차라리 전쟁에 지고 조공을 바치면서
사는 것이 백번 낫습니다.
그러면 최소한 굶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건 당장 먹을거리가
없는 지경이니,
어떻게 사람답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어렵기 전에, 궁핍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찾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날마다 깨어 기도하며 정신차리고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매 맞고 돌이키기보다
아예 매 맞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병든 후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것보다....
처음부터 병에 걸리지 않도록
관리를 잘 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지혜롭지 못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늦었더라도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하나님의 응답 – 한 선지자를 보내심>...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셔서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7-9절>
7절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었으므로
8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시니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9절 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
사사시대 역사의 순환적인 사이클에 의하면
‘부르짖음’ 다음에는 무조건
‘구원’이 따라와야 합니다.
물론 ‘구원’은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심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는 한 사사를 세우시는 것이
마땅히 하셔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사사’가 아니라 ‘한 선지자’를
보내셨던 것입니다.
왜 ‘사사’(구원자)가 아니라
‘선지자’(대언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해주기에 앞서서.....
그들이 왜 고통을 받았는지를
깨닫게 하실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신 것입니다.
보다 근본적인 치료를 위한 것입니다.
병원에서 의사가 환자를
만났을 때 바로 고치지 않습니다.
의사는 환자의 통증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 그 원인을 밝히는데 집중합니다.
원인을 알지 못하고서는
결코 몸의 고통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폐암 사망률이 높은 이유는
통증이 없어 조기 발견이 어렵기 때문이랍니다.
빨리 깨달아야 빨리 고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름 없는 한 무명의 선지자(대언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신 말씀을 이것입니다.
“이 땅을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분은
이스라엘을 애굽의 학대에서 건져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다”(8-9)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있게 한 분도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지금 이 땅에서 살게 하신 것도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 사실을
잊거나 아니면 무시할까요?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보다
본능대로 살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첫째,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둘째, 눈앞의 작은 이익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공동체의 이익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게 됩니다.(아이성의 아간)
셋째,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결국 교만하게 됩니다.(사울 왕)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약화되면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가 발동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에
지배당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기 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채워다 줄 것으로
기대하는 이방 우상들을 섬긴 것입니다.
‘한 선지자’는 이 사실을 분명히 고발합니다.
10절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너희가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은
곧 ‘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듣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가 바로 ‘샤마’(shama)입니다.
이 단어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듣다’(hear)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따르다’(obey)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청종(聽從)하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을 듣지도 않았고,
지키지도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삿3:7).
이러한 그들의 불순종이
미디안의 침입이라는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원인을 분명히 집어준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하는 이유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정체성을
확립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의 회복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가 확실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죽을 수밖에 없던 죄인이었고,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였으나.....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정체성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 정체성을 잃는다면
우리도 책망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잘못하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성도님들이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
하나님의 징계로부터 자유로운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