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종황제로부터 한국에서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는데 성공한 미국 감리교 선교부는 곧 한국에서 일할 선교사를 물색한다. 이에 응하여 나선 사람이 바로 의료선교사 스크랜튼과 여성선교사 스크랜튼 대부인, 그리고 아펜젤러이다.
1885년 1월 14일 드류신학교의 교수들과 학생들은 한국을 향해 떠나는 아펜젤러를 위하여 성대한 환송예배를 올린다. 그들의 환송을 받으며 뉴욕을 떠난 아펜젤러 부부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 |
2월 2일 파울러 감독으로부터 목사안수를 받고 한국행의 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곳에는 이미 스크랜튼 부부와 스크랜튼 대부인이 와 있었으며, 이들 일행 5인은 1885년 2월 3일에 기선 편으로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한다.
한국 선교단 일행은 2월 27일에 일본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던 일본 주재 선교사 메클레이를 만난다. 그리하여 이들 6인은 3월 5일 도쿄에 있는 메클레이 박사 댁에서 첫 한국선교사회의를 연다. 그런데 한국은 그 전해말 갑신정변의 후유증으로 정국이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한국 선교사 일행은 정국이 진행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다 한국 정세가 다소 호전됨에 따라 이들은 서울을 향해 출발하되 분산하여 가기로 한다. 선발대로 나선 아펜젤러 부부는 3월 23일에 한국을 향해 요코하마를 떠난다.
나카사키를 거쳐 제물포로 가는 배에는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가 함께 타고 있었다. 이들이 탄 배는 우선 부산에 닿았다가 다시 제물포로 향한다. 목적지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1885년 4월 5일. 곧 부활절이었다. | |
|
|
|
의료사업과 교육활동의 허락을 받고 들어 온 세 선교사들은 각기 자기분야에서 일을 시작한다. 스크랜튼은 도착하자마자 우선 장로교의 의사 알렌을 도와 광혜원에서 일했고 9월부터는 자기 집에서 진료활동을 시작한다. 1886년 봄에는 정동에 별도의 건물을 구입하여 병원으로 개조하고 그해 6월 15일에 정식으로 문을 연다. 그는 개원 8개월만에 522명의 환자를 치료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고 이에 감동한 고종황제는 다음해 진료소 이름을 "시(施)병원" 일라 지어준다. 인술을 베푼다는 뜻과 함께 스크랜튼의 한국인 이름인 시란돈의 `시'를 딴 것으로 이해된다.
|
|
1887년 스크랜튼 대부인에 의해 정동 이화학당 구내에 설립된 최초의 부인 병원인 보구여관 (保球女館)은 하워드 여의사에 이어 1890년 10월 셔우드, 홀 의사 부부가 맡아 운영하면서 크게 발전, 1892년 대중이 많이 모이는 동대문시약소 (보구여관 동대문 분원)를 개설하고, 1899년 가을 보구여관이 옮겨오면서 1912년 한국 최대의 규모의 부인병원 건물을 완공하게 된다. 이 병원은 동대문 교회와 함께 오늘 날 이화여대 부속 병원으로 발전한다. |
|
1888년도 연례보고서에서 아펜젤러는 이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 되풀이하여 보고함으로써 그 역사적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다. 곧 벧엘 예배당에서의 첫 예배와 첫 세례식, 그리고 첫 성만찬식이 그것이다.
"10월 16일. 일요일에 28세의 젊은 부인인 최씨의 아내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는 물음에 정확하게 대답했다. 아마 그는 이 땅에서 개신교 선교사에게서 첫 세례를 받은 최초의 여성일 것이다. 우리 감리교가 안방에까지 진출하게 되어 기쁘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여성들이 또 있다. 이 첫 열매를 축복하소서." |
|
|
|
1893년 7월에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아펜젤러는 다시 정동교회를 담임하게 되며 순직할 때까지 계속 정동교회에서 목회했다. 1895년 1월에 있었던 연회는 5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서울제일감리교회의 회당을 정동에 건축하도록 결의하고 이 일을 아펜젤러에게 위임한다.
선교본부에서도 또한 이 일을 승인함에 따라 1883년부터 4년 간 아펜젤러는 정동교회당 교회당을 위해 그의 정력을 쏟는다. 그는 미국에 있는 친지, 가족들에게 또한 한국의 유지들과 교우들에게도 건축비 헌금을 호소한다.
| |
그리하여 이에 응답한 랭카스터 제일 감리교회, 드류신학교의 친구들, 한국에 있는 외국인들 특히 한국인 신도들이 이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1895년 8월 7일에 착공하여 한 달이 지난 9월 9일에는 스크랜튼 감리사가 집례 하는 정초식으로 법무장관 서광범씨, 외무협판 윤치호씨 등이 참석하여 축하했다. 이 예배당은 1895년 중으로 공사가 끝나고 1896년에는 지붕이 씌여졌고, 1897년 6월에는 거의 완공되어 배재학당의 졸업식을 이 새 예배당에서 치뤘다. 이 예배당에 정동 교인들이 처음 입당한 것은 10월 3일이나, 헌당식은 그 해 성탄주일을 기다려 1897년 12월 26에 거행되었다.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 예배당이 이 땅위에 세워진 뜻깊은 날인 것이다. | |
|
|
|
독립협회는 정치적인 집단이고, 협성회는 계몽적인 집단이며, 엡윗청년회는 선교집단이다. 지도자들의 성격에 따라 그 관여도에 차이가 있지만 이들에게 공통된 정신적 기초는 신앙 위에 선 민족구국운동이다. 임원들 역시 동일한 인물들의 경우가 많지만, 협성회의 회장, 부회장 등의 임원인 양홍묵, 노병선, 유영석, 문경호 등이 또한 정동교회 엡윗선교회의 회장과 부회장으로 일했다.
| |
|
|
|
한국 개신교의 모 교회인 정동제일교회와 배재, 이화학당이 자리잡고있는 정동 34번지 일원은 기독교 문화 유적지로 한국 신문화와 신교육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
|
기독교 문화지로 지정된 본 교회의 일원은 초대 선교사인 아펜젤러 목사 부부가 1885년 이곳에 와 처음 머물렀던 보구여관과 시병원 건물이 있었던 곳이며 이 두 건물이 헐린 후 이곳에는 배재식당의 기숙사와 한국 최초의 민간도서관인 종람관이 있어서 한국 최초의 일간 신문인 독립신문과 매일신문이 이 곳에서 발간되었을 뿐 아니라 이광수의 무정, 심훈의 상록수 등이 이 인쇄소에서 발간되었고 이 곳 종람관(도서실)독서회에서는 이광수, 김동인, 남궁억, 주요한, 전영택, 심훈 등이 밤낮으로 모여 책을 읽고 토론함으로 한국 최초의 문예지 "백조"가 이 곳에서 발간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광수의 무정, 심훈의 상록수 등이 쓰여진 곳이기도 하다. | |
특히 이 곳에 있었던 배재학당 기숙사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아관파천 반대, 을사조약 반대에 이어 삼일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우국 충군 애국 지사들의 모임장소이며 대피소이기도 한 한국 독립운동의 발원지이다 |
|
강매(姜邁)는 최병헌 목사와 상동교회의 전덕기 전도사 등과 접촉하는 가운데 그리스도 신앙을 결단하고 정동교회의 교인이 된다. 1907년에 그는 일본으로 가서 일본대학 고등사범 수법과를 졸업하고 귀국해서는 교육과 민족운동에 헌신한다.
1912년부터 배재학당에 취임하여 20여년 간 봉직하는 한편 정동교회의 임원으로 충실하게 봉사한다. 특히 1914년 11월 현순 목사의 부흥회에 큰 감명을 받아 "믿음의 문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듬해인 1915년에 그는 「정동교회 30년사」를 집필하여 귀한 자료를 남기게 되었다 . | |
|
|
|
하란사 (河蘭史)여사는 여성교육과 민족해방을 위해 일생을 바친 정동교회 교인이다. 평양 태생인 그는 결혼한 몸으로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 여성으로서는 첫 문학사가 된다. 귀국 후에 스크랜튼 대부인이 상동교회 안에 설립한 영어학교의 교사로 취임한다.
1916년 조선연회에서 미국 감리회 4년 총회에 참석한 하란사는 총회가 끝나자 미주지역을 돌며 교포들에게 강연을 한다. 그 때에 교포들이 성금 한 돈을 모아 파이프 오르간을 구입해 동양에서 세 번째, 우리 나라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을 들여놓음으로서 1918년 정동제일교회에 설치하게 된다 . | |
|
|
|
1884년 6월 24일은 선교사 매클레이 박사가 인천에 도착함으로서 한국선교의 문이 열린 역사적인 날이다. 이날을 기점으로 1934년은 조선 감리교회의 50주년에 해당하는 해가 되므로 크게 기념행사를 갖게된다. 조선 감리교회는 1935년 4월 부활절을 기해 50주년 행사를 크게기념하는 행사를 갖게 된다. |
|
기념비에 사용된 돌은 이끼가 끼지 않을뿐더러 견고하고 화려하기로 이름난 보령 염포오석이다. 비석전면에는 "감리교회 조선선교 오십주년기념비. 기독교조선감리회교우일동건립"이라고, 후면에는 "부활주일에 조선과 만주에 있는 감리교회에서 기념 헌금한 것과 유지들의 기부로 1936년 4월 12일 부활주일에 이를 건립하였다"고 쓰여있다. | |
|
|
|
1950년은 우리 민족에게 잊을 수 없는 해이다. 6. 25전쟁으로 말미암아 주요 관공서 기관이 파괴되고 주요기관이 마비되었다. 정동교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강단이 폭격을 맞아 폭삭 무너져 내려앉았고 파이프 오르간이 망가져서 파이프가 휘고 부서져 파편이 여기저기 널려져 있었다. 교회는 절반이나 파괴되고, 목사관도 날아가고 없었다. 실로 처참한 광경이었다.
정동교회는 곧 1953년 11월 8일 임원회가 열리고 `정동교회당복흥위원회'가 조직된다. 그리고 최단시일 안에 중수할 것을 결의하면서 모은 헌금이 528,830원에 달했다. 한편 총리원에서도 보조금 70만원을 보내주어 총 수리비 1,225,000원을 조달하게 된다. 수축공사는 12월 3일에 착공하여 약 3주만에 완료된다. 그리하여 1953년도 성탄 축하예배는 새로이 복구된 예배당에서 드릴 수 있었다. | |
|
|
|
정동교회에서는 선교 75주년을 맞아 기념건축을 추진하기 위해 9명의 대표를 뽑아 연회에 참석하는 동시에 건축 건의안을 제출한다. 선교 75주년을 맞아 정동교회를 신축하는 것은 비단 정동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 감리교 전체의 사업으로 추진된다.
그러나 4. 19혁명을 계기로 상황이 급변하면서 그 계획이 유보된다. 이 무렵 젠센 부인은 개인적으로 그의 남편 젠센목사를 기념하는 젠센기념관의 건축을 추진한다. 이것이 완공되어 정동교회에 기증하게 된 것이 바로 선교 75주년을 맞이한 1960년이다. 그리하여 정동교회는 비록 자체적으로 기념 교회당을 건축할 수는 없었으나, 선교 75주년을 기념하는 젠센기념관을 소유하게 된다. |
"정동제일교회의 생명의 비결은 `믿음'으로 힘있게 모이고 `소망과 사랑'으로 세계를 섬기기 위해 흩어질 수 있는 양면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곧 힘있게 선교하기 위해 교회예배당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개방하고 교육관을 지역사회, 선교의 센터로 만들며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프로그램의 하나로 `배움의 집'을 시작한다.
또 하나는 중, 고등부 학생을 대상으로 정서 순화를 목적으로 한 `노래하는 집' 프로그램이다. 100여명의 학생들이 한 달의 한 번 정도이지만 교육관에 모여 함께 노래를 부르며 친교를 갖는다. 이러한 가운데 정동제일감리교회는 뜻깊은 창립 9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새로운 탄생을 맞이하는 듯한 기분으로 가득 찼다. 1977년 바로 90년 전 아펜젤러가 한인들과 함께 첫 예배를 드린 10월 9일 주일 아침 창립 기념 공동예배에서 교인 전체가 `공동의 기도'를 올렸다. |
|
|
|
1970년대 정동교회가 지닌 과제는 교회의 부흥과 함께 새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다. 한국 감리교회의 모체인 정동교회의 예배당을 선교기념 교회로 건축하자는 운동은 이미 1950년대부터 있었다. 당초의 계획은 현재의 교회당을 헐고 그 자리를 중심으로 새 성전을 건립하기로 했으나, 1977년 들어서면서 문공부 문화재 관리위원회에서 정동교회당을 `문화재'로 지정하기로 하고 그 결정을 3월에 통지해 왔다. |
건축실행위원회는 부득이 계획을 바꿔 교육관으로 쓰고있는 젠센기념관을 철거하고 그 대지를 새 예배당 건립기지로 편입하기로 한다. 그리고 신축되는 교회당 안의 일부를 젠센 홀로 지정키로 한 다음 미국에 있는 젠센 부인의 양해를 얻기로 한다. 드디어 1977년 11월 2일 건축기성회실행위원회에서 건축공사 도급액 3억6천5백74만원으로 `대우개발주식회사'와 공사계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했다. 공사는 착공한지 1년 6개월 만인 1979년 4월 초에 준공되어 4월 15일 부활주일에 새 성전 봉헌예배를 드리게 된다.
새 성전의 특징으로는 첫째는 문화재로 지정된 옛 본당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현대화된 기능적 건물이라는 점이다. 둘째는 신도와 단상간의 원심거리를 같게 함으로써 회중 속에 있는 재단, 곧 거룩과 세속사이의 거리를 없애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제단과 강단 높이를 회중과 같은 지평에서 설치하도록 하였다.
|
[정동제일교회의 역사출간]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정동교회의 역사가 1992년 4월 5일 출간됐다. 연세대학교 유동식 교수의 저서로 지난 한 세기 우리 나라 기독교 역사와 함께 한 정동제일교회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짚어 본 귀한 서적이라 할 수 있겠다.
1999년은 21세기를 준비하는 마지막 해이다. 정동교회는 지난 한 세기동안 비단 우리 나라의 기독교 문화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친 교육, 계몽, 의료, 선교사업 등 다양한 방향에서 명실공히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지난 100년간 이루었던 일을 기초로 삼아 다가올 새 천년을 의미 있게 준비하기 위해서는다양한 부분에서 전진이 필요하다. 감리교의 모 교회로서 영성과 전도, 활발한 선교, 효과적 봉사, 문화선교의 새 도전등 장기적 계획을 가지고 앞으로 다가올 새 천년을 준비하는 교회로 우뚝 서야겠다.
|
|
|
|
|
그것은 정동제일교회의 장구한 역사와 일치합니다. 때로는 민족의 아픔과 함께 때로는 민족의 영광과 함께 정동제일교회는 언제나 민족의 중심에서 복음의 빛을 발하였습니다. | |
이 정동제일교회를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의 집 '벧엘예배당' 입니다. 1887년 9월 14일 조선을 방문중이었던 워른감독의 승인하에 아펜젤러 목사는 정동에 사방 8*16 피트의 한옥 한채를 구입하고 이곳을 '벧엘예배당' 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벧엘예배당에서 정동제일교회 최초의 예배가 1887년 10월 9일에 봉헌되었습니다. 이 벧엘예배당이야 말로 한국감리교회의 요람이요, 정동제일교회의 초석이 된 것입니다.
또한 이 예배당은 정동제일교회의 뿌리일뿐 아니라 한국감리교회, 나아가 한국기독교와 근대 이후 우리민족의 좌표가 되었습니다.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은 오늘 우리들로 하여금 시대적 사명을 돌아보게 하고 과거와 현재 미래속에서 생명이 넘치는 전통으로 우리들 가슴 속에 녹아있을 것입니다. |
|
| |
|
|
정동(문화재)예배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예배당으로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의 신앙정신이 담겨있는 영국 빅토리아풍 고딕식 붉은벽돌 건물로 이 땅에 예수그리스도의 몸된 성전을 최초로 형상화 한 것입니다. | |
한국감리교회의 창시자이며 정동제일교회의 설립자인 아펜젤러 목사는 1895년 연회에서 5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서울제일감리교회당을 정동에 건축하도록 허럭받은 후 4년동안 정동교회당 건축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습니다.
이 예배당은 길이 77척 너비 40척 높이 25척으로 회당안에 좌우로 좁은 방 하나씩, 그 길이는 28척 너비는 14척 11평으로 설계되어 1895년 8월 7일에 착공된 후 하나님의 축복속에 순조롭게 건축이되었습니다.
그해에 기초공사를 끝냈고, 1896년에는 지붕을 얹었습니다. 1897년 6월에는 거의 완공되어 배재학당의 졸업식을 이 첫 예배당에서 하였으며 정동교인들이 입당한 것은 10월 3일 주일이었으나 1897년 12월 26일 성탄주일을 기해 하나님과 이 민족앞에 봉헌하였습니다.
이 예배당은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당시 최대의 건물이었으나 1914년 대부흥운동으로 교인수가 2천명 이상으로 늘어나자 1926년 모퉁이 주춧돌을 종각 남쪽 모퉁이 서편으로 옮겨놓고 동으로 10자, 남으로 14자, 합 60평형을 증축하여 175평 건물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
|
| |
|
|
우리나라 근대 교육의 효시이기도 한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은 선교사로 이땅에 온 아펜젤러 목사와 스크랜톤 대부인이 선교의 일환으로 교육활동을 먼저 하게된 것으로 정동제일교회와는 한울타리(우리)에 있는, 말 그대로 "우리"이며 선교공동체 입니다. | |
아펜젤러 목사가 배재학당을 세운것은 이 학교를 한국 복음화의 원동력으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배재하는 말이 뜻하는 것처럼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는데 있었고 그가 목표한 유능한 인재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거듭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봉건적 사고에 갇혀있는 이 땅의 여성을 신교육을 통해 참되고 착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이화학당도 복음의 생명력을 입증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신교육은 복음과 함께 생기 발랄한 신문화, 예컨대 문학과 음악, 미술, 체조, 율동등을 이 땅에 도입했고 생활문화 또한 이에 편승하게 됨으로 정동제일교회를 중심한 배재, 이화학당은 이 땅의 개화를 선도한 한국 신문화의 산실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정동제일교회는 깊숙이 관여했습니다. 정동제일교회의 정신은 어두운 시기에 젊은 청년들의 교육과 민족의식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는 계속된 역사에서 줄기차게 조국과 민족을 이끌어가는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
|
아펜젤러 선교사와 최병헌 목사는 요한 웨슬리 출생지명을 딴 감리교 청년선교단체인 '엡?' 청년회를 근간으로 당시 민족 지도자인 윤치호, 이상재, 서재필, 이승만 등과 함께 독립협회와 협성회를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서재필과 윤치호는 그들이 추진하는 민족운동의 기반을 민중과 함께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에 두고 있었습니다. | |
서재필이 아펜젤러 목사집에 우거하면서 윤치호와 함께 배재학생들을 가르치며 학생운동을 지도했던 것이 독립협회의 행동조직인 협성회를 태동하게 했고, 협성회는 회장 양흥묵과 함께 정동제일교회 노병선 전도사가 부회장으로서, 문경호 전도사와 함께 실질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896년 조직된 독립협회의 독립신문은 협성회보와 함께 정동삼문인쇄소에서 제작되었으며 11월 21일에 있었던 독립문 기공식에는 아펜젤러 목사의 기도와 배재학생들의 애국가 합창 순서등 공개된 기독교 의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독립협회는 정치적인 집단이었고 협성회는 계몽적인 집단이었으며 엡?청년회는 선교집단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세 단체의 공통된 정신적 기초는 기독교 신앙 위에 세운 민중구국 운동이었고 세 단체가 다 같이 순한글 신문을 발행, 민족문화의 주체성 확립과 민족을 대변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
|
| |
|
|
정동제일교회의 애국청년운동은 기미년 3.1 독립운동의 핵심으로 거사전인 2월 26일 기독측 인사 10명이 정동제일교회 담임 이필주 목사 사무실에 모여 독립선언문 초안에 동의하고, 이 자리에서 기독교측 민족대표 16명을 확정했으며 또한 3.1 독립운동 당시에는 시위대의 주동력인 배재학생 동원을 김진호 전도사가 이화학생은 하란사 교수가 맡아 주도했으며, | |
선언문과 격문의 등사와 전달은 정득성 전도사가 전담하는 등 거사의 주거지가 되었습니다. 이필주 목사와 박동완 전도사가 민족대표 33인의 반열에 현순 목사와 손정도 목사는 중국 상해로 건너가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일을 주도하여 각각 외무차장, 의정원 부의장으로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기초를 마련하였습니다.
당시 이화학당 학생이자 정동제일교회에 열심히 출석했던 유관순의 일화는 오늘 대다수의 국민들의 마음속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태극기를 품에 안고 정동(문화재)예배당의 파이프 오르간 뒤에서 간절하게 기도했던 유관순의 모습에서 신앙과 조국의 운명을 끌어 안았던 정동(문화재)예배당의 기품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독립선언의 이념과 내용, 3.1 운동의 진행 방향 등이 모두 정동예배당에서 시작되었고, 정동제일교회의 정신과 함께 살아 움직였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습니다. |
|
| |
|
|
1945년 광복을 여러 국제 정치적 관점에서 조명할 수 있겠지만 그 핵심 내면에는 신앙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젊은이들을 교육하고 민족을 위해 봉사했던 정동제일교회의 흔적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정동제일교회가 배출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공적도 간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 |
독립과 해방, 그리고 해방 직후의 정국에서 정동(문화재)예배당의 정신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1950년 민족의 비극, 한국전쟁과 함께 정동예배당의 절반이, 그것도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과 제단이 있던 곳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허망한 이념 때문에 동포의 가슴에 서로 총부리를 겨누어야했던 이 전쟁에서 하나님은 공산주의를 극복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당시 파괴된 정동예배당의 복구 사업은 비단 정동교회 교인들만의 과제가 아니라 감리교 전체의 과업이었습니다. 피난 생활 후 극심한 궁핍의 상황 속에서도 수축 공사는 한국 감리교회의 지대한 관심속에 순조롭게 진행되어 1953년도 성탄 축하 예배는 새롭게 복구된 예배당에서 성대히 치를 수 있었습니다.
계속된 역사의 격동기인 조국 근대화 속에서도 정동제일교회는 중추적역할을 하였습니다. 신앙과 교육의 병행을 목적으로 삼는 정동제일교회의 정신은 양적으로 급격하게 확대되는 한국 교회의 전반적 분위기 속에서도 그 기본 정신을 영성운동과 교육과 선교와 봉사라는 측면에서 발전시켰습니다.
|
|
| |
|
|
이와 같이 정동(문화재)예배당은 1887년 건축, 봉헌될 때부터 한국 감리교회와 민족의 흐름 속에서 그 중심축 역할을 담담히 감내했습니다. 봉건적 신분 차별과 여성 차별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을 때 정동(문화재)예배당은 새로운 빛을 던져 준 것입니다. | |
정동 예배당에서 남녀를 가르는 휘장이 벗겨졌을 때 낡은 봉건적 사고는 이미 깨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일제의 억압도, 공산주의의 도정도 정동교회는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수 많은 기독교 정신을 갖춘 인재를 배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정동(문화재)예배당의 벽돌 하나하나에 민족과 믿음의 선배들의 숨소리와 땀이 정결하게 배어 있습니다.
정동 예배당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지금,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들리는 아름다운 예루살렘 성전의 영광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됨을 맛보게 합니다. 문화재예배당은 다가오는 21세기 에는 한국 교회와 민족의 등불이 될 것이며, 어머니의 포근한 품과 같이 한국 교회와 사회를 껴안는 어머니 교회의 면모를 영원히 간직 함으로써 우리의 감동과 사명은 영원히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