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시사뉴스에서는 늘 독도문제를 다뤄왔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중점으로 알찬 내용을 독자여러분께 바르게 알리기 위해서 노력 하던 중 이번에 전 국민에게 애국심을 심기위해 새롭게 말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이런사람’을 통해서 애국자(독립운동가)를 소개해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특별기획 독립운동가 열여섯 번째 이야기
독립운동가 16-2 강우규 - 조선총독 처단
출생 - 사망
1855.7.14. ~ 1920.11.29.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1920년 11월 선생이 죽음을 앞두고 대한의 청년들에게 남긴 유언-
일제가 문화통치로 조선 영구식민지화를 책략하고 있음을 파악, 신임 조선 총독 처단을 결심
선생은 거사 계획을 추진하였다. 폭탄은 긴요한 때를 대비하여 이미 구입해 두었던 것이 있었으므로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일경의 눈을 피해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는 것이 문제였다. 선생은 묘안을 생각해 냈다. 폭탄을 기저귀처럼 다리 사이에 차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 방법을 이용하여 선생은 6월 14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선편으로 원산항에 도착하여 시내로 잠입 하는데 성공하였다.
명주수건에 폭탄 싸서 허리에 맨 뒤 몇 며칠 눈 여겨 봐온 남대문역에서 총독 향해 폭탄 던져
드디어 거사 당일인 9월 2일 아침이 밝았다. 이날 선생은 폭탄을 명주수건에 싸서 허리에 단단히 붙잡아 맨 뒤, 그 위에 저고리와 두루마기를 입어 손을 넣으면 쉽게 폭탄을 꺼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허형과 함께 남대문 밖 중국 요리점에서 점심을 같이한 뒤, 단신으로 미리 보아 둔 거사 위치로 향했다. 남대문역에 도착한 선생은 사이토를 폭살시키고, 그 자리에서 자작시 한 수를 읊은 다음 의연히 일경의 포승을 받을 작정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사이토 일행이 오후 5시 남대문역에 도착하였고, 환영행사를 마치고 막 관저로 떠나는 사이토의 마차를 향해 선생은 민족의 분노와 독립의 염원이 담긴 한발의 폭탄을 힘껏 던졌다. 천지를 진동하듯 터진 폭탄은 비록 사이토를 폭살시키지는 못했지만, 일제 식민통치자들과 세계 만방에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달 하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강우규 선생 피체 기사(《매일신보》1919년 10월 7일자). “투탄 진정범인 강우규 체포"라는 제목으로 선생의 사진과 함께 선생이 피체되기까지의 상황을 보도하고 있다.
의거 직후 혼비백산하는 군중의 틈을 유유히 빠져 나온 선생은 생사를 초월한 결연한 의지로 재거사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의거 16일 만인 9월 17일 서울 가회동 하숙집에서 순사 김태석에게 잡히고 말았다. 선생은 일제의 법정에서도 의연하게 대처하였다. 처음 '피고'라고 부르던 일본인 판사는 선생의 인격에 압도되어 ‘강선생’ ‘영감님’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선생은 1920년 2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이후 선생은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항소를 한 것은 결코 사형을 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최자남 등을 변명하기 위한 것이요. 그리고 검사가 나를 매명한(賣名漢)이라 하니 나는 죽어도 매명한이 아니요. (중략) 결코 사형을 면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폭탄의 위력을 몰랐소. 내가 왜 그 불쌍한 신문기자나 사진반을 죽이겠소.”
이와 같이 거사에 연루되어 고생하는 최자남·허형·김종호 등을 변호하기 위한 것이었고, 나아가 의거의 진정한 뜻을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선생은 4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도 사형을 선고 받아 경성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5월 27일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었다.
체포되어 옥중에서 매일 성경 읽으며 조석으로 기도 드려
사형이 확정된 뒤에도 선생은 매일 성경책을 읽고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올리며 편안한 마음으로 마지막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옥바라지를 하던 아들 중건이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면,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중략) 너는 나의 이 유언을 전국의 학교와 교회에 널리 알리도록 하여라”고 하면서 의기를 북돋아 주었다고 한다.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던 날에도 선생의 기개는 꺾이지 않았다. 선생은 감상이 어떠냐는 일제 검사의 물음에 짤막한 시를 남기고 의연히 순국하였다.
단두대 위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겠는가
(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
이러한 선생의 사이토 총독 폭살 의거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한 방략으로 정립된 의열투쟁 노선의 효시라는 점이다. 3·1운동을 전개하면서 일제 군경에 저항하다가 희생된 많은 독립운동가가 있었지만, 최고 식민지 통치자의 처단을 목표로 한 의열투쟁은 없었다. 그런데 선생은 처음부터 새로 부임하는 식민지 최고 통치자인 조선 총독을 목표로 의거를 계획하여 준비한 뒤, 사전 답사까지 거쳐 의거를 결행하였다. 그리고 성공하였다. 의열투쟁의 본질이 그것을 통해 조국독립의 뜻을 일제와 세계에 전달하려는데 있다고 본다면, 총독의 생사여부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선생은 의거와 그 후의 재판 과정을 통해 우리 겨레에게,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와 국제사회에 충분한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의거는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열투쟁 방식의 독립운동노선은 이후 김원봉의 의열단과 김구의 한인애국단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둘째, 독립운동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노인에 의한 폭탄 투척 의거라는 점이다. 선생이 의거를 결행한 나이는 66세였다. 즉 환갑이 넘은노객이었다. 이전의 역사에서도, 이후의 역사에서도 폭탄 투척 의거는 주로 청장년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선생은 청년 같은 노객이었음이 분명하다. 더구나 노인들의 독립운동 조직인 노인동맹단을 대표한 거사였다. 일본 제국주의와 국제사회는 3·1운동을 통해 한국의 남녀노소가 모두 식민지 지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선생의 의거를 보면서 다시 한 번 한국의 독립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민족사회의 청장년들은 이에 자극 받아 독립운동 전선으로 뛰어갔던 것이다. 그것은 그 해 11월 10일 조직된 의열단을 보아도, 그리고 선생의 의거 직후 각지에서 조직된 수많은 비밀결사를 보아도 명백하다. 이러한 점에서 선생의 의거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발췌
[네이버 지식백과] 강우규 [姜宇奎] - 조선총독 처단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제공처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