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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6:7-11(812)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2021. 5. 30.
전 세계 유대인들이 성경만큼이나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탈무드(Talmud) 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믿음이 신실한 청년 한 명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깊은 산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합니다.
한 달, 두 달, 그리고 일 년의 시간이 흘러도 자신이 하나님을 만났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계속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금욕의 생활을 하였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자 ‘자기가 하는 행동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또는 아까운 시간만 낭비하면서 헛짓거리 하는 것은 아닌지?’ 회의가 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수도원을 나와서 해답을 찾기 위해 당대에 최고로 유명한 랍비를 찾아갑니다.
랍비에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고충과 고민에 다 말합니다. 그러자 랍비는 물이 가득 들어 있는 그릇을 주면서 “물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마을 한 바퀴를 돌고 오라”고 말합니다. 청년은 랍비의 지시가 이해되지 않지만 마을을 돌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물이 가득 찬 그릇을 들고, 물을 흘리지 않은 상태에서 마을 한 바퀴를 돈다는 것이 어떨까요? 그리 쉽지 않아요. 생각보다 무척 힘이 듭니다. 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긴장을 하다 보니, 땀을 뻘뻘 흐릅니다. 그리고는 결국 힘들게 마을 한 바퀴를 돌고 왔습니다.
그러자 랍비가 물었습니다. “물이 가득 든 그릇을 들고 마을을 도는 동안 몇 번이나 하나님을 생각하였는가?” 청년은 엉뚱한 지시를 내린 것도 불만인데, 이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랍비에게 눈을 부라리며 말합니다. “물이 흘러넘치지 않도록 하는 것에만 집중해서 신경을 써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어요?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랍비가 웃으며 다시 말합니다. “물이 든 그릇 하나가 자네가 하나님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도록 사로잡지 않았는가? 그만큼 세상에는 우리의 정신을 빼앗아 버리는 것이 많이 있다네. 자네가 이것을 기억한다면, 하나님을 더 쉽게 만날 수 있다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내용일까요?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에게만 집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 중에 기도 많이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랑으로 기도를 하는 분들 역시 많습니다. 성경 많이 읽는 것도 본 받을 만 한데, 이 역시 성경을 많이 읽은 것을 자기자랑으로 삼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기도를 많이 해도, 성경을 많이 읽어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누미노제(독, Numinose)’라는 신학용어가 있습니다. 그 뜻은 “순수하게 비합리적이고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성스러움을 이르는 말”이라 사전에 나옵니다. 독일의 신학자인 루돌프 오토(Otto, R.)가 사용한 용어인데,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인간의 오감과 자아를 뛰어 넘는 신비로움이 등장한다는 말입니다.
중세시대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을 드러내고, 온전히 살아가는 삶을 표현 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은 라틴어로 ‘코람 데오’(Coram Deo)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또는 하나님의 눈 앞에서’ 내 삶을 거룩한 모습으로 다듬어 나가고 생활하고자 하였던 중세 성도들의 염원이 담긴 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6편은, 다윗이 지은 예언시로서 여호와 유일 신앙을 가진 자가 받는 복락을 노래합니다. 그래서 시편 16편은 다윗의 신앙고백이라고 표현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8절,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다윗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행동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다윗의 신앙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내가 항상 여호와를 내 앞에 세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항상 내 앞에 세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무슨 일을 하든지 오로지 하나님이 먼저 행동하시고, 하나님이 먼저 드러나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다윗 자신은 하나님의 뒤에 머물러 있으면서 오로지 하나님만 높이겠다는 표현입니다. 다윗은 항상 이렇게 행동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임재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여호와를 항상 앞에 모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를 항상 앞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어떻게 된다고 다윗은 고백할까요?
1. 요동하지 않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8절,“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예전 한글성경에는 ‘요동하지 아니하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두 가지 번역 다 맞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시고 살아갔던 다윗이었습니다. 고난과 위기의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계셔서 다윗은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골리앗과 같은 제 아무리 큰 위협이 다가와도,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였기에 다윗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골리앗을 가볍게 제압하였습니다.
중보기도 사역자 체리 힐(Cherie Hill)이 저술한 ‘흔들리지 마’라는 책의 프롤로그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상황이 힘들다고 혼자 힘으로 하려고 하지 말라! 숨이 턱에 찰 만큼 힘든가? 지금이 당신의 믿음을 보일 때다. 하나님은 절망적인 상황에 우리를 가두시는 것으로 우리의 믿음을 테스트하고 단련하신다.”
힘든 상황이 닥쳐와서 흔들릴 때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더 굳게 잡으라는 말입니다. 힘든 와중에도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더 굳건하게 신뢰해야 합니다. 그렇게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 한다면, 하나님께서 연속적인 믿음의 단계들을 밟아나가게 하시고, 궁극적으로 시련과 환난을 극복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7절 보세요.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7절은 아주 쉬운 내용의 말씀인데, 한글 번역은 이해가 약간은 어렵게 해 놓았습니다. 나를 훈계하시는 하나님을 송축한다고 말합니다. 훈계(訓戒)라는 말은 ‘타일러서 잘못이 없도록 주의를 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훈계라는 말은 고압적이고 수직적인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원어의 뜻은 일방적이며 고압적인 훈계의 의미가 아닙니다. 선생님이 학생들을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모습으로 훈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아래의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에서 나의 어려움을 들어 주고 도와주는 조언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직역하면 ‘나에게 조언하시는 여호와를 찬양 한다’는 말씀입니다.
피를 나눈 부모 자식 간에도 부모가 자녀에게 일방적으로 하는 훈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일방적인 모습으로 훈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내가 힘들어할 때에 내 곁에 서서 나에게 조언하시면서 나를 이끌어 나가시는 분입니다.
내가 수렁에 빠져 있을 때에, ‘왜 네 힘으로 올라오지 못하느냐?’라는 말로 비난하고 책망 하는 분이 아닙니다. 힘들어 하는 나를 보시고 조언하시면서 손을 내밀어 이끌어 올리시는 분입니다. 다윗은 이런 하나님의 모습을 찬양한 것입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정요한집사의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이 분은 원래 대한민국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정집사님은 북한 평양에서 태어난 북한사람입니다.
평양음악대학과 러시아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을 졸업한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 세계음악 콩쿠르에서 수차례 입상하였고, 그 결과 김정일 음악단의 악장으로 8년간 활동을 합니다. 당의 인정을 받은 그는 남부러울 것 없이 모든 것을 누렸고, 동유럽 대학의 교환교수로 해외에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에게 변화가 생긴 건 그때였습니다. 같은 학교 외국인교수가 그를 보고 ‘교회에 나가서 예수를 믿어 보라’고 말을 건넵니다. 예전 같으면 귓등으로 들었을 말이 그날따라 그의 가슴을 울립니다. 그는 교수에게 비밀 하나를 털어놓게 됩니다. “내 할아버지는 장로이며, 어릴 적 나를 안고 늘 기도를 해주셨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내려오는 예수쟁이 집안이고, 기독교 박해로 인하여 목숨을 잃은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북한 감시자 몰래몰래 대학구내에 있는 교회에 다니게 됩니다.
얼마 후 북한대사관에서 눈치를 채게 됩니다. 교회에 다니고 있으며 자유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다는 것이 밝혀졌기에 강제로 북송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자 과감하게 신앙의 자유를 찾아 탈출을 결심하고 남한으로 왔습니다. 이때가 2009년입니다. 한국에 와서 북한 이름을 버리고 이름도 ‘요한’으로 바꿉니다. 그리고 역시 평양음악대학을 졸업하고 월남한 아내를 만나게 됩니다. 이후로 정요한집사는 바이올린으로 아내인 김예나 집사는 피아노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북한 선교에 대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9절.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9절 말씀은 정집사님이 가장 좋아하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여기의 ‘기쁘고’는 “참을 수 없는 기쁨”을 의미합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내 영혼도 즐거워하고 내 육체도 안전하게 살게 됩니다. 무엇 때문에 마음이 즐겁고, 영혼이 즐거워하며 육체도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것인가요? 바로 하나님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믿는 신앙 때문입니다.
정집사님은 북한에 있을 때 김정일 음악단 단장, 평양음악대학 교수 등 직함으로 인해 모든 것을 누렸던 엘리트였습니다. 하지만, 완전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였습니다. 나름 물질의 풍요로움은 있었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기쁨과 즐거움의 신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시간 9절 말씀을 가지고 나의 신앙고백을 해 보도록 합시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나의 마음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기쁘고, 나의 영혼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이 고백이 하나님에게 드려지는 우리 모두의 진실한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 생명의 길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이상혁 선교사라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선교사라고 하면, 대한민국보다 못 살고 낙후된 나라로 가서 기독교를 전파하는 분으로 판단합니다. 그런데 이상혁 선교사님의 사역지는 미국입니다. 기독교의 나라로 대변되는 미국에서 사역합니다. 그런데 그냥 미국에서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인디언 호피부족을 상대로 사역하시는 분입니다.
이상혁 선교사님의 책 “채워 주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미국 애리조나 북동쪽 사막 지대에 있는 인디언 호피 부족을 대상으로 선교할 때 일입니다. 보스턴 지역의 한인교회 선교팀이 짝을 이루어 마을 전도를 마치고 저녁 집회에 호피 부족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예배 시간에 인디언들로 교회가 넘칠 것을 기대했지만, 고작 다섯 명이 교회에 왔고, 둘째 날도 많이 오지 않았습니다. 셋째 날 아침, 선교팀은 침통하게 기도회를 시작합니다. 선교팀에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형제 한 명이 있었는데, 그 형제가 눈물을 흘리며 성령이 주신 깨우침을 나눕니다.
그가 인디언 호피 부족 사람들을 전도하다가 깨달은 사실을 말합니다. “호피 인디언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닫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선교를 자랑거리로 삼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마음의 문을 닫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오늘은 그들에게 먼저 복음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회개의 고백을 합시다. 비단 우리뿐만 아니라 먼저 와서 전도했던, 그보다 더 오래전에 선교했던 사람들이 인디언들에게 끼쳤던 해악에 대해 우리가 회개의 무릎을 꿇읍시다.” 그렇게 기도회 시간이 회개의 시간이 되고 맙니다. 이 시간에 성령의 임재가 임합니다.
이후 선교팀들은 문화적 우월감에 빠져서, 인디언들을 우습게 보았던 자신들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바꾸게 됩니다. 호피 인디언들을 찾아다니며 자신들의 무례함과 영적 교만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날 저녁 집회에 을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무례함에 대해 잘못을 빌었습니다. 저녁 집회는 호피인디언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게 됩니다.
이상혁 선교사는 그 날의 경험을 말합니다. “내 마음에도 그동안 십자가에 못 박히지 못한 십자군적 선교 태도가 숨어 있었다. 하나님은 십자군적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다. 복음전파는 십자군적인 모습이 아니라, 십자가의 모습으로 임해야 한다.”
중세시대에 무슬림에게 점령당한 성지 예루살렘을 회복하려고 십자군이 창설 되었습니다. 이것을 두고 십자군전쟁(1095-1291)이라고 말합니다. 십자군 원정은 총 8차례 있었고 기간은 200년 동안 일어난 전쟁이었습니다.
이교도 무슬림에게 기독교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이 알라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유럽 전역에서 십자군이 만들어졌고, 예루살렘으로 원정을 떠났습니다. 십자가가 그려진 방패를 앞세우고, 가슴에 십자가 휘장을 달고 예루살렘으로 보무당당하게 진격합니다.
하지만 정도를 걸어갔던 올바른 십자군보다는 잘못된 길로 걸어갔던 십자군들이 더 많았습니다. 십자군들은 수많은 학살과 약탈, 그리고 입에 담기 어려운 추한 행동으로 인해 민심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였지만, 개인 호주머니를 채우는 도적질과 노략질에 충실했습니다. 그 결과 십자군전쟁은 세계사에서 인간의 욕심이 만든 실패한 전쟁이라 말합니다.
11절 보십시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여 주신다’고 말합니다. 나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 주시고, 나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누구인가요? 바로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참된 생명의 길을 보여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성도라면 하나님이 주시는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즐거움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을 확인시켜 주는 말씀이 11절의 내용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생명의 길을 벗어나서 다른 길을 찾아 떠나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운전을 하다 보면 가끔 겪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갔을 때에는 그 길이 가장 빠르고 좋은 길이었는데, 어느 사이에 새로운 도로가 만들어져서 예전에 갔던 길이 뒷전으로 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사 돌아가는 것은 이런 것이 다반사입니다.
하지만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길을 바뀌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즐거움보다 더 귀하고 좋은 즐거움이 대체되어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믿고 믿음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참된 신앙인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마틴 루터 (Martin Luther)가 종교개혁을 하다가 보름스 의회에서 재판에 참석하게 됩니다. 천주교회에서는 이미 루터를 파문하였고, 누구든지 루터를 죽여도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하명까지 하였던 상태입니다. 루터의 생사여탈권을 법적으로 결정하는 엄중한 회의가 바로 보름스회의였습니다. 루터는 회의장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하늘을 쳐다보며 크게 외칩니다.
“Oh, God. Here I stand(오, 하나님! 제가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다루는 사람들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루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고백이었습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생명이 끝나는 순간까지 여호와 하나님을 항상 앞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힘든 일로 고민하고 있나요? 어려움 가운데 놓여 있습니까?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항상 내 앞에 모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온전한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지혜롭게 사는 비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