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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남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로마서 11:1~6)
본문 5절에 “남은 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남은 자”란 무슨 뜻일까요?
지하철을 타려고 기다리는데 전철이 왔습니다.
사람들이 이미 많이 타고 있습니다.
그러면 기다리던 사람들이 다 타지 못했는데 문이 닫히고 전철이 떠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타지 못한 사람들은 그대로 남아서 다음 전철을 기다려야 합니다.
겪은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렇게 남은 사람들을 말하나요?
아닙니다.
여기에서 “남은 자”는 좋은 뜻으로 쓰였을까요?
그렇지 못한 뜻으로 쓰였을까요?
어떨 것 같습니까?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로마서 11장 7절에는 남은 자라는 말이 좋지 못한 뜻으로 쓰였습니다.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7절의 “남은 자”는 택하심을 받지 못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5절에 나오는 “남은 자”는 좋은 뜻으로 쓰였습니다.
아주 좋은 뜻으로 쓰였습니다.
우선 그것부터 아셔야 합니다.
“남은 자”라는 말은 열왕기상 19장에 기록되어 있는 엘리야 선지자의 이야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2절에서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서 열왕기상 19장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870년 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890여 년 전의 일인데요,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왕 때 큰 가뭄이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심한 기근이 들었습니다.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과 갈멜 산에서 대결을 했습니다.
엘리야가 이겼지요.
아합 왕은 엘리야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아합 왕 보다도 악한 왕비 이세벨이 더 적극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엘리야는 도망을 쳤습니다.
브엘세바 광야의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죽기를 원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 19:4b) 했습니다.
엘리야가 몹시 지쳐 자포자기 상태가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지요.
엘리야는 천사의 도움으로 일어나 하나님의 산 호렙에 가서 한 굴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오직 나만 남았는데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합니다’ 호소했습니다.(왕상 19:10)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서라”하셨습니다.
처음에는 크고 강한 바람, 그 다음에는 지진, 이어서 불, 그 다음에 세미한 소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조용한 가운데 세미한 소리로 말씀하시는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아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오직 나만 남았는데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왕상 19:14)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해야 할 일을 일러주시고 이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열왕기상 19장 18절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4절에 인용되었지요.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남은 자 칠천은 우상숭배가 아주 심했던 그 때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어느 시대나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창세기 6장에는 사람의 죄악이 쌍에 가득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해서 하나님께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누가 있었지요?
그렇습니다,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인 노아가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가운데 꾸지람을 심하게 들은 교회가 있습니다.
사데교회입니다.
주님은 사데교회를 향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얼마나 심한 꾸지람입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한국교회를 향해 이렇게 꾸짖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주님은 한 걸음 더 나가서 2절에서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사데교회는 교회답지 못한 교회, 소망이 없는 교회의 본보기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4절에서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라고 하셨습니다.
흰 옷을 입은 그들, 사데교회의 남은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중세 천주교회가 심하게 타락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507년 전 이 주간의 목요일, 천주교회의 타락을 공격하는 95개 조를 비텐베르그 성당 벽에 붙였습니다.
그것이 종교개혁의 출발이 되었습니다.
마르틴 루터, 그 시대의 남은 자입니다.
일제 시대 말기, 1930년대 후반부부터 일본은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신사(神社)는 일본에서 황실의 조상이나 나라에 공이 큰 사람을 신으로 모셔 놓고 제사를 지내는 장소를 말합니다.
일본이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은 한국을 정신적으로도 일본에 굴종시키기 위해서였는데 기독교의 기를 꺾으려는 것이 아주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때 교회는 민족운동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대해 신사침배를 그토록 심하게 강요한 것입니다.
교회는 여기에 대해 손을 들었습니다.
감리교회가 먼저 손을 들었습니다.
장로교회는 1938년에 열린 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에 앞장서기로 공식으로 결의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해방될 때를 ’한국교회의 암흑기‘라고 부릅니다.
’굴종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일본에 굴복하고 순종한 시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훼절기(毁節期)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절개를 훼손시킨 시기’라는 뜻입니다.
그때도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감옥에 가거나, 순교 당하거나 물러나 숨어 산 분들이 있습니다.
그 시대의 남은 자들입니다.
지금 북한에는 참된 의미의 기독교가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부에서 필요해서 만들어서 운영하는 교회가 둘이 있고 가정예배처소들이 있고, 성경도 발행했고, 평양신학원이라고 신학교도 하나 있고,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이라는 단체도 있는데 순수성을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4년 전부터는 이런 교회나 기관들의 소식이 거의 완전하게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몰래 모이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지하교회’라고 부르지요.
북한에 지하교회는 분명히 있고 그 숫자도 생각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이 시대의 남은 자들입니다.
남은 자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일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먼저 우리도 남은 자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남은 자를 ‘어려운 때에 영적으로 살려는 소수의 무리’라고 정의한 분이 있습니다.
좋은 풀이입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역사에서 그런 사람들을 ‘창조적 소수’라고 불렀습니다.
지금 영적으로 참 어려운 시대입니다.
영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이 매우 낮아졌습니다.
교회의 권위, 교회에 대한 호감, 교회에 대한 신뢰도가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주님을 사모하며 말씀대로 살려는 사람들은 이 시대의 남은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설교 원고에서 “나는 남은 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라고 썼습니다.
제목도 나는 남은 자입니다“라고 정했습니다.
나중에 ”우리“로 바꾸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용산교회가 남은 자들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서입니다.
용산교회, 좋은 교회입니다.
제가 좋은 교회라고 하면 틀림없이 좋은 교회입니다.
저는 교계 언론기관에서 오래 일했습니다.
언론인들은 이 세상의 여러 모습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정치부 기자들은 정치판의 내막을 잘 알고 있고, 경제부 기자들은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교계 언론기관에서 오래 일한 제가 용산교회 좋은 교회라고 하면 틀림없이 좋은 교회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영어 성경에는 “남은 자”가 “렘넌트"(remnants)라고 되어 있습니다.
교회에서 이 렘넌트라는 말을 많을 많이 씁니다.
이름을 렘넌트교회라고 지은 교회들도 여럿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았더니 ’렘넌트교회‘가 전국에 열 개 가까이 나오더군요.
실제로는 그보다 더 많을 것입니다.
용산교회는 이름은 그렇지 않지만 렘넌트교회 가운데 하나입니다.’
교회가 얼마나 크냐, 그 교회에 잘 알려진 분들,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얼마냐 출석하냐, 그 교회의 재정적인 힘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저는 교회를 볼 때 그런 것들과 함께 ' 그 교회가 얼마나 순수하냐?‘하는 것을 보기 위해 힘씁니다.
그것을 먼저 봅니다.
용산교회는 순수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어려운 이 시대에서 남은 자들의 공동체로서 굳건하게 서 있는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남은 자들이 걸리기 쉬운 병이 있습니다.
이 병의 이름은 '나홀로병'입니다.
’나홀로병‘은 어떤 병일까요?
'나 홀로 남아 있다’ ‘나 홀로 바르게 살기 위해 고생하고 있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도 이 병을 심하게 앓았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산 호렙의 굴에 머물러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해서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어기 있느냐” 물었습니다.
엘리야가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열왕기상 19장 10절,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크고 강한 바람이 지나고 지진이 지나고, 불이 지나고 하나님이 또 물으셨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야는 앞에서 한 대답과 똑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열왕기상 19장 10절과 14절은 문장이 똑같습니다.
“오직 나만 남았거늘”, 이거 나홀로병 환자들이 내는 신음 소리입니다.
‘나 힘들다 ’나 외롭다‘하는 소리입니다.
끙끙 앓는 소리입니다.
엘리야가 나홀로 병을 심하게 앓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다 세상 즐거움 따라 적당히 살려고 하는데 나만 혼자 하나님 말씀 따라 바르게 살려고 이 고생을 하네. 아이고 힘들다!'할 때가 많지요.
저는 그럴 때가 참 많았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해 왔고 지금도 하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일‘이라고 했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오래 전에 저에게 맡기신 일입니다.
통일선교, 예전에는 공산권선교라고 했는데요, 좀 특별한 분야의 일이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고, 위험한 일도 많이 겪었고, 오해도 많이 받았습니다.
'나 혼자 왜 이 고생이야!' 여러 번 투덜거렸습니다
남은 자들이 나홀로병을 앓고 있는 것, 좋은 일입니까?
아닙니다.
사실은 엘리야가 깜빡한 일이 있습니다.
그 전에, 기근이 한참 심할 때, 엘리야가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를 만났지요?
아합의 왕궁 맡은 신하 오바댜를 만났습니다..
열왕기상 18장에 기록되어 있지요.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선지자 백 명을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습니다.
오바댜는 이 사실을 엘리야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너무 힘들어서 그랬는지 그것은 잊고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 거듭 하소연했습니다.
엘리야가 ’나 혼자 남았습니다‘ 했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너 혼자가 아니야!‘ 했습니다.
'엘리사가 있어!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해!' 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읽어드린 열왕기상 19장 18절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여러분, 나홀로병에 걸려 있으면 내가 만났던 오바댜들을 생각하고, 엘리야를 생각하고, 칠천 명이 남아있음을 생각하고 그 병을 물리치기 바랍니다.
여기에서 칠천은 육천구백구십구 다음의 숫자일 수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칠(7)은 완전 수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남은 자가 된 것은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본문 가운데 5절을 다시 봅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저희가 남은 자로 택하심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는 본문의 정확한 뜻을 알기 위해서 원어성경을 봅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말로 기록되었는데 그리스말에서는 ’남은 자‘를 ’레엠마(λείμμα)‘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남은 자의 영어 렘넌트가 나온 것 같습니다.
외국어성경도 참고해야 합니다.
NIV 영어성경은 “So too, at the present time there is a remnant chosen by grace”라고 하였습니다.
한글의 여러 번역도 보아야 합니다.
『공동번역성서』는 5절을 ”이와 같이 지금도 은총으로 뽑힌 사람들이 남아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전서』는 ”이와 같이 지금 이 시기에도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남아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가장 최근에 나온 『새한글성경』은 “그러므로 그처럼 지금 이때에도 은혜로 선택하여 남겨 두신 사람들이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중에 여러 번역이 남은 자는 은혜로 택함을 받은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모두 남은 자들은 은혜로 선택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남은 자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가 나이가 좀 많은 편에 속하지요.
지나온 80년을 되돌아 볼 때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의 고백을 나도 드리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은 자기가 사도로 부름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찬송가 301장을 저절로 부르게 됩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복음성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가사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 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 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오늘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축복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여러분 은혜를 입었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갚아야지요.
적어도 갚기 위해서 애는 써야 하지요.
세상에 “은혜를 모르는 놈”이라는 욕보다 더 심한 욕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나를 남은 자로 택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갚은 것입니까?
본문에 그 답이 있습니다.
4절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이 은혜를 갚으며 사는 삶입니다.
바알은 고대 중근동의 우상 가운데 대표적인 존재였습니다.
원래의 뜻은 ’풍요의 신‘인데 나중에는 생활의 거의 전 영역을 지배하다시피 했습니다.
성경에 바알이라는 이름이 여기저기에 나옵니다..
현대에도 바알은 참 많이 존재합니다.
물질주의, 물질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생각, 물질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생활, 현대의 바알입니다.
쾌락주의도 그렇습니다.
남녀 관계에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깨뜨리는 풍조, 현대의 바알입니다.
지금이 문제 때문에 이 사회가 얼마나 어지럽습니까?
교회도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많은 이단들, 현대의 바알입니다.
이단들이 너무 성행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이단이라고 하면 통일교, 박태선 전도관, 여호와의 증인, 구원파,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이름을 가지고는 잘 알 수 없는 이단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이단들일수록 이름아 더 멋집니다..
이제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목사의 직분을 가지고 있고,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교계 언론기관에서 오래 일한 제가 모르면 다른 분들은 더 모를 것입니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을 하나님은 남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 ’나는 남은 자이다‘ 하는 깨달음을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나홀로병‘에 걸려 있으면 ’너 저리 가!‘ 걷어차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현대판 바알이라고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에 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주님을 모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지 않는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더 그랬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지극한 은혜로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우리는 천하고 무능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귀중한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써 일해서 많은 것을 남기셔서 주님께 넘기시기 바랍니다.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남은 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으시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은혜로 우리를 불러주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은혜로 저희를 택해서 불러주신 주님,
이 시대의 남은 자로 살게 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남은 자로서 살아가는 삶이 쉽지 않음을 고백합니다.
조롱, 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의문, 절망감, 외로움, 때로는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경험합니다.
엘리야도 그랬는데 부족한 우리는 더욱 그렇습니다.
주님, 이길 힘을 주옵소서.
용산교회는 남은 자의 공동체로서 이 시대의 소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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