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가 물었다.
성스러운 분이시여! 지각의 대상이 실재한다면, 그것은 존재하기를 그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실재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이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바시슈타가 말했다.
오, 라마여! 하지만 그것을 이겨 낸 신성한 이들이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공간과 같은 외적 대상들과 ‘나’등과 같은 심리적 요소들은 단지 이름으로만 존재합니다. 실제로는 대상적 우주도, 지각하는 자신도, 그와 같은 지각도, 공도, 둔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우주적 의식(칫)입니다. 이것 안에서 다양성, 다양한 행위들, 경험들, 속박이라는 개념과 해방을 향한 갈망을 그려내는 것은 마음입니다.
라마가 물었다.
오, 성스러운 현자시여! 마음의 원천은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이 일어납니까? 이것에 대해서 저를 자비롭게 깨우쳐 주십시오.
바시슈타가 답하였다.
우주의 소멸 후 다음 시대가 오기 전에, 온 대상적인 우주는 완전한 평형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때 거기에 영원하며 태어나지 않고 스스로 빛나는 지고한 신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이며 전능합니다. 그는 생각할 수 없으며 묘사할 수 없습니다. 아뜨만 등의 여러 이름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들은 견해일 뿐이고 진리는 아닙니다. 그는 존재하고 있지만 세상은 그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는 또한 몸속에 존재하고 있으면서도 멀리 있습니다. 셀 수 없는 광선들이 태양에서 나오듯이, 비슈누와 같은 수많은 신들이 그로부터 나타납니다. 바다 표면에서 물결들이 일어나듯이, 무한의 세상들이 그로부터 나옵니다.
그는 우주적 지성이며, 무수한 지각의 대상들이 그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는 빛입니다. 나와 세상은 그 안에서 빛납니다. 그는 창조된 모든 것의 특징을 부여합니다. 신기루가 반복해서 나타나고 사라지듯이, 그 안에서 세상들이 나타나고 사라집니다. 그의 형태(세상)는 없어지나, 그의 나는 변치 않습니다. 그는 모든 것 속에 거주합니다. 그는 가려져 있지만 그는 넘쳐흐릅니다. 그의 단순한 현존만으로도 이 외형상의 활력이 없는 물질적 세상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은 늘 활동적입니다. 그는 모든 곳에 존재하며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그의 생각들이 물질화합니다.
오, 라마여! 이 지고한 나는 지혜 아닌 다른 방법에 의해서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종교적 수행들을 하는 것으로는 그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 나는 멀리 있는 것도,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접근하기 어려운 것도, 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 안에서 희열의 경험으로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므로 자신 안에서 깨달아 집니다.
고행과 금욕, 자선과 종교적 맹세들을 지키는 것으로는 신에 대한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성스러운 이들과의 만남, 참된 경전에 대한 공부는 도움이 됩니다. 그것들은 무지와 미혹을 물리치기 때문입니다. 이 나만이 실재라는 것을 확신할 때, 그는 슬픔을 넘어 해방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고행이나 금욕들은 스스로 부과한 고통입니다. 다른 이들을 속여서 얻은 부를 가지고 행한 자선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것들은 자선의 진정한 결실들을 없앨 뿐입니다! 종교적 의식들은 허영심을 증가시킵니다. 신에 대한 무지를 처방하는 유일한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감각적 쾌락을 향한 갈망을 확고하고도 단호하게 버리는 것입니다.
라마가 물었다.
이 신은 어디에 있으며, 제가 어떻게 그분에게 갈 수 있습니까?
바시슈타가 답했다.
신이라고 묘사되는 그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는 몸 안에 거주하고 있는 지성입니다. 비록 우주는 그가 아니지만, 그는 우주입니다. 그는 순수한 지성입니다.
라마가 말했다.
어린 소년조차 신은 지성이라고 말합니다. 이 특별한 가르침을 이해하기에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시슈타가 답했다.
아, 순수한 지성을 대상적 우주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지각력이 있는 것이 우주이며, 지각력이 있는 것이 영혼(지바)입니다. 지각력이 있는 것은 인식 가능한 것을 만들며 그래서 슬픔에 빠집니다. 인식 가능한 것을 멈출 때, 인식할 수 없는 것 즉 순수한 지성을 향한 주의의 흐름이 있게 됩니다. 그때 완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슬픔 너머로 갑니다.
인식 가능한 것의 멈춤이 없이는, 그 사람의 주의는 인식 가능한 것으로부터 방향을 바꿀 수 없습니다. 단지 지바가 이 삼사라 속에 관련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지고한 신이 알려지면, 슬픔은 끝납니다.
라마가 물었다.
성스러운 분이여! 신에 대하여 설명해 주십시오.
바시슈타가 답했다.
우주가 존재하기를 멈출 때 그 안에 나타나는 우주적 지성이 신입니다. 신 안에서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중단되는 듯이 보입니다. 신은 공(空)입니다. 그 안에 우주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신 안에서는 우주적 의식조차도 산처럼 가만히 서 있습니다.
라마는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면 신을 깨달을 수 있으며, 우리가 실재한다고 여기는 우주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떻게 깨달을 수 있습니까?
바시슈타가 대답했다.
하늘의 푸름이 실재하지 않듯이, 우주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확고히 자리를 잡을 때만 신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원론은 단일성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이원론은 이원론을 암시합니다. 창조물은 전혀 존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때만 신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라마가 물었다.
성스런 분이시여! 이것은 어떤 방법으로 알 수 있으며, 무엇을 알아야 인식 가능한 것들의 정지가 옵니까?
바시슈타가 대답했다.
잘못된 생각이 지속되기 때문에, 이 세상이 실재한다는 잘못된 개념이 깊게 뿌리내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스러운 이들과 함께 하고 신성한 경전을 공부하는 날, 그 잘못된 생각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모든 경전 중에서도 이 마하라마야남이 가장 좋습니다. 이 경전에서 알려지는 것은 다른 곳에서도 알려집니다. 또 이 경전에서 알려지지 않는 것은 다른 곳에서 알려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공부하고 싶지 않다면, 다른 경전을 공부해도 좋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개념을 물리쳐 진리가 깨달아질 때, 그 깨달음은 완전하게 그 사람에게 스며듭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며, 그것에 대하여 말하고, 그것 안에서 기뻐하며, 다른 이들에게 그것을 가르칩니다. 그런 이들은 때로는 지반묵따라 불리며, 때로는 비데하묵따라 불리기도 합니다.
라마가 물었다.
신이시여! 지반묵따(살아 있을 때 해방된 자)와 비데하묵따(몸이 없는 해 방된 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바시슈타가 대답했다.
보통의 삶을 살면서 온 세상을 공으로 경험하는 자가 지반묵따입니다. 그는 깨어 있지만 깊은 잠이 주는 평온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는 쾌락과 고통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는 깊은 잠 속에서는 깨어 있지만, 이 세상에 대해서는 결코 깨어 있지 않습니다. 그의 지혜는 잠재된 경향성들에 의해 흐려지지 않습니다. 좋아함, 싫어함, 두려움을 겪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 그는 공간처럼 자유롭습니다. 그에게는 자아와 의지가 없습니다. 활동할 때나 활동하지 않을 때도 그의 지성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누구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도 누구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때가 되어 몸을 버릴 때, 그는 비데하묵따가 됩니다.
하지만 비데하묵따는 존재도 존재하지 않음도 아니며,‘나’도‘다른 이’도 아닙니다. 그는 빛나는 태양이며, 모두를 보호하는 비슈누이고, 모든 것을 파괴하는 루드라이며, 모든 것을 창조하는 브람마입니다. 그는 공간, 공기, 불, 물과 땅입니다. 사실 그는 모든 존재의 본질인 우주 의식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 있는 모든 것이 그이며, 오로지 그일 뿐입니다.
라마가 다시 물었다.
신이시여! 저의 지각은 왜곡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이 말한 그 상태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바시슈타가 답했다.
오, 라마여! 해방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것 그 자체입니다. 오로지 그것만이 존재합니다. 여기서‘나’,‘너’로서 지각되는 것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브람만이 이 모든 세상들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오, 라마여! 나는 금으로 된 장신구에서는 금만을, 파도들에서는 물 만을, 공기 속에서는 움직임만을 봅니다. 나는 공간 속에서는 공(空)만을, 신기루 속에서는 열기만을 보지, 어떤 다른 것은 보지 않습니다. 이처럼 나는 절대자, 브람만만을 볼 뿐이며, 세상들은 보지 않습니다.
‘세상들’에 대한 지각은 시작이 없는 무지입니다. 그렇지만 진리에 대한 탐구로 그것은 없어질 것입니다. 존재하게 되었던 것만이 존재하기를 그칩니다. 이 세상은 실제로는 결코 존재하지 않고 있지만,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창조에 관한 이 장 속에서는 이 진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우주적 소멸이 일어났을 때, 존재하는 듯이 보였던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그때 무한함만이 홀로 남았습니다. 그것은 공도 형태도 아니고,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존재한다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귀도, 눈도, 혀도 없지만 그것은 듣고, 보며, 먹습니다. 그것은 원인도 없고, 창조도 없습니다. 물이 물결들의 원인이듯이, 그것이 모든 것의 원인입니다. 이 무한하고 영원한 빛이 모든 것의 가슴 안에 있습니다. 그것의 빛 안에서 삼계가 하나의 신기루와 같이 빛납니다.
무한한 것이 진동할 때, 세상은 나타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무한한 것이 진동하지 않을 때, 세상은 잠겨 있는 듯 보입니다. 횃불이 빠르게 회전하면 그것은 불의 원처럼 나타나며, 가만히 있으면 불의 원은 소멸합니다. 진동하는 것과 진동하지 않는 것은 항상 어디서든 같습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할 때 그 사람은 미혹을 겪게 됩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모든 갈망과 고뇌는 소멸됩니다.
무한한 것으로부터 시간이 옵니다. 무한한 것으로부터 지각 가능한 대상에 대한 지각이 옵니다. 행위, 형태, 맛, 냄새, 소리, 촉각, 사고 등 그대가 알고 있는 이 모든 것은 오직 무한한 것입니다. 무한한 것으로 그대는 이 모든 것을 압니다! 무한한 것은 보는 자, 봄 그리고 보이는 것 안에 존재합니다. 이것을 알 때 그대는 그대의 나를 깨닫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