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1장 9절에서의‘방언’은 무엇인가?
유대인의 절기인 오순절에 있은 방언과 사도 시대(초대 교회)에 이방인에게 있은 방언 및 고린도교회에서 행해진 방언에 대해 살펴보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요한계시록 11장 9절에서 보게 되는 방언에 대해서 말하고자 합니다. 혹자는 이 구절을 근거로 해서 현재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방언의 존속과 함께 그 지속성을 말합니다만 과연 그러겠는지요.
요한계시록 11장 9절입니다.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한글개역)
요한계시록 11장 9절에서의 ‘방언’에 대해 우선 직접적으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말하면, 사도행전이나 고린도전서 등에서 언급되고 있는 ‘방언’이 아닌 ‘언어’를 우리말로는 그렇게 번역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 9절의‘방언’은 원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혀'(tougue)를 의미하는 것인데, 함축적으로는 ‘언어’(language), ‘말’(speech)이란 뜻으로서 그 의미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혀’에서 발음되어 자연적으로 행해지는 ‘언어’, ‘말’이 아닌, 곧 자연적으로 행해지지 않는 언어로서의 ‘방언’이란 개념으로도 쓰여졌습니다. 그에 따라서 사도행전 2장 4절이나 고린도전서 14장 5절에서는 성령으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게 된 ‘방언’으로도 이 단어가 쓰여진 것입니다. 이 경우에서는 이‘방언’은‘표적’(표징, 이적)으로 행해진 것입니다.
이처럼 방언에 사용된 본래의 단어는 성경 여러 곳에서 쓰이고 있는데, 그 쓰임에 따라서 이것이‘언어’,‘말’을 의미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는가 하면, 성령으로 말하게 하심에 따라 말하는‘방언’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한 단어가 요한계시록 11장 9절에서의 경우에는 우리 한글(개역성경 및 개역개정성경)로는‘방언’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만, 이곳에서의 방언은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서 보는 그 ‘방언’으로서 쓰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혀에서 나오는‘언어’,‘말’의 의미로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 9절에서의‘방언’은‘표적’의 성격으로서‘방언’이라고 번역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의‘방언’으로 번역된 것은 사실은 모든 나라와 민족들이 사용하는, 또는 말하는‘언어’, 그러니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는‘언어’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1장 9절의 내용을 보겠습니다.“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한글개역)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시 번역하면 ‘백성들과 족속과 언어와 나라 중에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백성들과’‘족속과’‘방언(언어)과’‘나라 중에서’로 각각 이것들을 나열하는 것은 반복적인 효과와 그 강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언어)와 나라’에 거주하여 사는 사람, 곧‘세상 모든 나라의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을 4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그런 것인지요. 그 확인이 필요합니다. 이에 다음과 같이 우리말로 번역한 한글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글번역성경은 전에 사용하던 개역한글성경과 이것을 요즘 개정해 낸 개역개정한글성경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있습니다. 각 한글 번역성경에서 요한계시록 11장 9절에서의‘방언’을 원문의 의미를 어떻게 나타내는 것으로 번역했는가를 보겠습니다. 즉, 개역한글성경과 개역개정한글성경에는‘방언’으로 번역해 놓은 것을 다른 한글 각 번역 성경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한글개역)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한글개역개정)
백성들과 족속들과 언어들과 나라들로부터 온 사람들이 3일 반 동안 그들의 시체를 구경할 것이며 그들의 시체를 무덤에 장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말성경)
모든 나라와 민족들이 그들의 시체를 땅에 묻지 않고, 삼 일하고 반나절 동안, 내버려 둔 채 구경할 것입니다. (쉬운성경)
여러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흘 반 동안 그들의 시체를 구경할 것이며 그 시체가 무덤에 안정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공동번역)
여러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흘 반 동안 그 두 예언자의 시체를 볼 것이며, 그 시체가 무덤에 안장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여러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흘 반 동안 그 두 예언자의 시체를 볼 것이며, 그 시체가 무덤에 안장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표준새번역개정판)
또 백성들과 족속들과 언어들과 민족들 중에서 온 사람들이 그들의 죽은 몸들을 사흘 반 동안 구경하며 그 죽은 몸들을 무덤에 장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리라.(한글킹제임스성경)
백성들과 족속들과 언어들과 민족들에서 나온 자들이 그들의 죽은 몸을 사흘 반 동안 구경하며 그들의 죽은 몸을 무덤에 두지 못하게 하리로다. (한글킹제임스흠정역)
백성들과 족속들과 언어들과 나라들에 속한 자들이 그들의 시체를 삼일 반 동안 볼 것이며, 그들의 시체가 무덤에 장사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바른성경)
세상의 모든 나라와 백성들이 버려진 두 시체를 사흘 반 동안 보면서도 시체를 매장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그들의 시체는 사홀 반 동안 예루살렘의 큰 거리에 널려 있을 것입니다. 이 도시는 소돔이나 애굽에 비길 만한 곳으로 주님도 이곳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아무도 이 두 예언자의 시체를 장사 지내 주지 않을 뿐더러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구경 삼아 그곳에 모여들 것입니다. (현대어성경)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곧 “사람들” 이들이 말이죠. 이 구절에서 말씀되고 있는 버려진 두 시체를 사흘 반 동안 보면서도 시체를 매장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두 시체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두 증인’을 일컫는 것입니다. 이 두 증인은 죽임을 당함으로써 역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에 의해서 철저하게 패배당한 듯이 보입니다. 이 두 증인의 시체가 장례조차 치러지지 못하고 큰 성 길에 그대로 내버려져 방치되어 있으며, 이것을 사람들이 목격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사도 요한이 강조하여서 말하는 것은 그들의 죽임 당함이 모든 사람들에게서 배척과 대적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에게서 수치를 당하는 듯이 보입니다. 사람들은 이들의 시체를 향하여 손가락질을 하며 희롱하고 기뻐하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두 증인의 증거가 이렇게 됨으로써 끝 날 때는 그 때가 세상 마지막 때이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의 영광을 입게 됩니다. 이를 저희 원수 또한 똑똑히 구경하게 됩니다(계 11:11-12). 그럼으로써 두 증인에게 돌렸던 수치가 저희의 머리에로 그대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상으로 보는 대로, 요한계시록 11장 9절에서 언급하고 있는‘방언’은 사도행전 2장 4절과 고린도전서 14장 5절 등에서 언급하고 있는 그‘방언’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방언으로서 요한계시록에서도 같은 방언을 다루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각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쓰는‘언어’요‘말’이란 것이며, 이것을 통해서 사실은 각 나라의 모든 ‘사람’을 지칭하고 있는 표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1장 9절에서의‘방언’에 대한 그릇된 이해, 곧 오해가 없어야 하겠습니다.
방언에 대해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방언은 그쳤다고 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이는 서로 다른 견해가 있음에 대해 각각 그 견해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해하여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성경에서의 방언이 존재하게 된 이유와 존재하고 있는 목적에서 그 가르침을 보게 되면 우리에게서의 방언의 말함은 이 방언이 말해온 기록인‘성경’의 증거에 있기에 이것에서 방언의 온전함을 대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방언의 온전함이 옴으로 인해서 이전까지 있어온 한시적이요 부분적이었던 것은 완성됨에 의해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으므로 사라짐으로 없습니다.
방언의 그침을 학자들이 말하는 것은, 방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계시적 수단으로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기록 계시인 성경이 완성되어 종결됨으로써 더 이상의 계시의 수단인 방언이 말해지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서의‘표적’이었던 방언이 고린도교회에서‘은사’로 다루어질 때도 교회적 은사로 주어진 방언은 당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워나가시는 것에서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는 계시적 수단으로서의 표적의 성격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으며, 여기에는 그에 따라서 통역이란 것이 함께 따랐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에 이어서 사도, 그리고 사도에 속한 사람들에 의한 분들에 의해서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인 기록 계시(문서 계시), 곧 성경을 요한계시록으로 최종 완성시키심으로써 더 이상 이 과정에서 교회에 필요하여 은사를 나타내셨던 방언은 더 이상 행하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방언이 지시해온, 곧 방언이 가리켜온 계시의 온전함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계시의 책, 곧 성경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전파해 나가십니다. 이 성경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충족되었으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드러내 전파하시기에 충분하며, 아주 명료합니다.
그러함에도 이 온전한 성경 계시 외에 이것이 주어지기까지에 주셨던 다만 한시적이요 부분적이었던 방언을 지금도 추구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신앙일 뿐만 아니라, 더욱이 온전한 은사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분적인 은사를 추구하며 의지하는 것은 그 자신 스스로가 온전한 은사를 거부하는 불신앙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에, 방언에 대한 바른 이해에 있음으로써 바른 신앙으로 주님의 교회를 바르게 이룰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