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31. 부활절, 요20:1~18, 정갑신 목사님)
예수님이 죽고 난 다음 날 새벽, 말씀에서 묘사하듯, ‘아직 어두운 때’.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그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으로 간다. 믿음도, 소망도 사라졌음 직한 그때 그녀를 어두운 무덤으로 이끌게 하는 ‘힘’은 무엇이었을까? 사람에게 큰 절망이 찾아올 때 여러 가지로 반응한다. 절망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삶을 포기하거나, 억지로 일어나거나, 좋은 기억들을 되살리며 용기를 어떻게든 얻으려 하거나, 원망을 승화시켜 원수를 용서하거나, 아예 그 원수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 일까지... 다양하게 반응한다. 얻을 것도 명분도, 자존심도 개입할 수 없을 절망의 때에 그 절망의 장소를 찾는 그 여인이나, 아리마대 요셉, 니고데모 같은 이들을 움직이게 하는 동인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절대적 ‘사랑’이 외에 설명할 길이 없다. 청에 의해 무덤에 온 믿음의 대표주자, 베드로와 요한에게조차도 예수님과 천사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베드로와, 심지어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 자신에게조차 보이지 않으신 무덤 안의 예수님, 그리고 천사가 막달라 마리아에게만 보여졌다. 막달라 마리아는 여자이기도 했고, 귀신 들린 전력이 있기에 사실 예수님의 부활을 진술할 증인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여자여’로부터 ‘마리아야’로 호칭이 바뀔 정도로 그를 특별하게 받아들였다. 도대체 누구에게나 절망적이고 어두운 상황일 수밖에 없는 그 대에 도대체 이 여인을 무덤으로 이끈 힘은 무엇인가? 그 일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또 무엇인가?
부활이 전은 죽음의 그림자가 강력하게 드리운 시간이다. 생존하나 소망과 믿음이 모두 소진된 상황이다. 그런 때에도 예수님을 향해 달려가게 하는 힘은 ‘절대적 사랑’뿐이다. 우리가 사랑을 논하거나 생각할 때 은연중에 Give and take, 또는 대가를 기대하는 마음이 항상 있다. 그러나 지금 무덤의 시기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럴 때 작동하는 사랑은 모든 단물과 껍데기를 제거한 그저 ‘맹목적 사랑’뿐이다. 마리아는 맹목적 사랑을 했다. 사람은 ‘믿어야 사랑할 수 있다.’고 당연하게, 자연스럽게 여기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믿음을 창조한다.’고 말씀하신다. 갈라디아서(5:6)에서 바울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faith working through Love’를 언급했다. 우리가 입에서 자동적으로 나오는 ‘믿음, 소망, 사랑.’ 오늘 ‘믿음과 소망이 다 사라질 때’라는 가정에서 약간 충격을 받았다. 그런 상황이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럴 때 작동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것은 우리로부터 염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만 올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샘 솟는, 온전히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오는, 누구 곳도 아닌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 사랑이 ‘이긴다.’ 내 자아와 자존심으로 견고하게 닫혀진 요새를 무너뜨리고 철저하게 돌이킬 수 있게 하는 역사가 있다는 뜻이다. 빈 무덤과 같은 내 마음, 내 자아, 혹독한 현실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사랑.’ 그러한 변화가 바로 참다운 부활의 역사이다.
이 말씀으로 목장에서 나눌 때, 나는 말씀의 요약과 관념적 교훈에 집중했었다. 그런데, 목장 모임에서 몇 분이 하신 말씀에서 충격을 받았다. 그분들이 받은 가장 큰 은혜와 교훈은 ‘막달라 마리아’의 마음이다. 막달라 마리아가 그 무덤에 가기까지 어떤 마음이었을까? 마리아는 자신에 대한 죄 용서, 그리고 베풀어 주신 은혜 외에는 어느 것도 그 마음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너무나 더럽고 추한 죄인이어서 빈 무덤과 같은 빛 한 줄기 없는 인생을 살아왔었는데 예수님의 사랑으로 구출되고 회복되었으니 그 절대적 사랑이 막달라 마리아의 영혼을 완전히 장악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녀에게 이익을 따지는 계산도, 주변의 환경과 상황도, 그 어떤 것도 주의를 끌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상황에 비추어 막달라 마리아의 심경을 읽는 모습에서, 생생한 은혜 체험이 2천 년이 지난 지금 여기에서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깨달으며 더욱 그 능력과 은혜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