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원 에세이】
‘새해 달력’을 바라보며
― ‘좋은 운수’는 어떻게 만들어 갈까?
윤승원 수필문학인,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 필자의 말
내 방에는 두 가지 달력이 걸려 있다. 하나는 내 고향 청양군 장평면에 있는 사찰에서 보내온 달력이다.
장모님이 생시에 다니셨던 절인데, 장모님은 이 절에 다니시면서 초파일에는 <사위 무사 기원 등(燈)>을 다셨다. 장모님은 가셨어도 달력은 매년 만난다.
또하나 달력은 며느리가 가져온 달력인데 유난히 음력 표기가 잘 돼있다. 일진(日辰)도 상세하게 나와 있다. <이삿날>도 붉은 글자로 표기돼 있다.
나는 이 달력을 보면서 <좋은 운수>를 생각한다. 어느 하루만이 <좋은 날>이 아니라 <365일 좋은 날>을 기대한다.
<좋은 운수>를 기대하려면 어떤 마음 가짐으로 살아야 할까? 추억의 칼럼을 다시 불러온다.
― 2025년 새해 달력을 바라보며
필자 윤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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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고향 청양군 장평면 사찰에서 보내온 새해 달력 - 장모님이 생시에 다니셨던 절이다. 장모님은 안 계셔도 달력은 매년 보내온다. 이 달력을 바라보면 <자식들 잘 되길 바라면서 두 손 모아 기원드렸던 장모님> 생각이 난다.
▲ 며느리가 가져온 새해 달력 - 유난히 음력 표기가 잘 돼 있다. 상세한 일진(日辰)과 이른바 ‘손 없는 날’까지 표기돼 있다. 이런 달력을 보면 생시에 눈이 어두우셔서 큰 글자로 된 달력을 좋아하셨던 부모님 생각이 난다. 부모님을 그립게 하는 이런 달력을 매년 벽에 걸어주는 며느리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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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권 일간지 금강일보 <윤승원 칼럼> 2011년 1월 5일 - 어느 유명 역학인이 필자의 칼럼을 홈페이지에 옮겨간 것을 보고 반가웠다. 각계 각층 다양한 독자가 따뜻한 눈길을 주었던 칼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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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원의 세상風情】
좋은 운수는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
― ‘긍정’의 자기 최면 효과
윤승원 수필문학인,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시골에 계신 팔순의 장모님은 음력이 크게 표기된 새해 달력을 좋아하신다. 그 옛날 선친께서도 그러셨다. 음력이 상세히 표기되지 않은 달력은 벽에 붙여 놓지 않았다.
당시 국회의원들은 자신의 얼굴과 정치구호가 들어있는 달력을 가가호호 배포했는데, 1년 열두 달이 한 장에 들어 있는 달력이다 보니, 일자가 깨알 같아 노인들은 보기 어려웠다.
선친께서도 눈이 어둡다면서 “오늘이 음력으로 며칠이냐?”고 내게 자주 묻곤 하셨다. 음력이 표기된 달력에는 일진(日辰)이 상세히 나타나 있다.
땅과 하늘의 이치를 중시하는 농부에게는 절기와 일진이 대단히 중요했다. 무슨 특별한 일을 하기 전에는 반드시 일진을 보았다. 이를 ‘날 잡는다’고 했다.
이사를 하거나 원행(遠行)을 하거나 심지어 이엉과 용고새(용마름)를 지붕에 올릴 때도 아무 날이나 하지 않았다. 꼭 ‘손 없는 날’을 택했다.
택일(擇日)이란 좋은 날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쁜 날을 따져서 피하는 것이다. ‘손 없는 날’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해석이 있다.
사람의 한쪽 손가락은 다섯 개다. 음력 1~5일까지는 손이 있는 날이다. 음력 6~10일은 손이 없는 날이다. 음력 9일은 손 없는 날 중에서 제일 좋은 날이다. 음력 10일은 무해무득(無害無得),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날이다.
또 하나 해석은 이렇다. 원래 ‘손’이란 말은 궁핍한 시대에 부담스러운 손님을 고민했던 데서 유래됐는데, 이것이 ‘두렵다’는 뜻으로 쓰여 멀리 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의미한다.
우리 민속에서 ‘손’이란 날짜에 따라 사람들이 가는 쪽을 따라다니며 심술을 부리는 귀신을 말하기도 하는데, ‘손’은 손님을 줄인 것으로 ‘두신(痘神)’을 가리킨다. 두신은 천연두다.
시대가 바뀌었고 생활방식도 크게 달라졌다. ‘손 없는 날’을 따져 일을 행하는 것은 나약한 마음을 위로받기 위한 방편이라는 시각도 있다.
인생만사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하지만 여전히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 택일이다. 혼사 날, 개업 날 등 기왕이면 나쁘지 않은 날을 택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다.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 흔히 ‘토정비결을 믿느냐’ 하지만 살아가면서 좋지 않은 일을 겪게 되면 “저 이는 정초에 토정비결도 보지 않았나?”라고 안타까워한다.
무슨 달에는 물가(강과 바다)를, 무슨 달에는 윤화(輪禍, 자동차)를 조심하고, 무슨 달에는 설화(舌禍, 말)를 조심하라는 등의 삼가야 할 대목도 많다.
지난 해 유명 정치인 중에 잇따른 설화(舌禍)로 곤욕을 치르는 것을 보고 어떤 이는 “한 해 운세만 보았더라도 저런 실수를 거듭하지 않을 텐데…”라고 말했다. 한 해 운수가 아니라 재미로 보는 ‘오늘의 운세’만 눈여겨보았더라도 연거푸 실수하지 않았을 것이다.
띠별 운세에는 황당한 미신으로만 여길 수 없는 삶의 지혜도 들어있다. 때로는 생활지침이 되기도 하고, 새겨들어야 할 잠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믿거나 말거나’가 아니라 내게 좋은 뜻이면 받아들이면서 하루를 산다면 후회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매사 분수를 지키는 자제력과 자기 통제는 인격수양에서 나오는 것이고, 인간의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재수 없는 날’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하늘의 뜻’ 인지도 모른다.
새해, 한 가장으로서 소망은 세 가지다. 국가는 강하고, 사회는 건강하고, 개인적으로는 부드러워졌으면 좋겠다. 첨단 미디어시대에 말과 글의 영향력도 커지고 있다. 살아가면서 화가 나는 일도 많은데 늘 도덕군자처럼 좋은 말만 하고 살 수는 없다. 가시 돋친 말도 하고 산다.
그러나 가려야 한다.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피해를 주는 표현은 없는지, 한 밤중에도 벌떡 일어나 퇴고(推敲)를 하듯 자신을 가다듬어야 한다. 돌이켜 보면 필자는 등단 초기 내 글에 대한 평자(評者)의 말 한마디에 최면이 걸렸다.
『‘만원버스에 이골이 난 사람은 구두가 밟혀도 옷 단추가 떨어져 나가도 화를 내지 않고 그날의 운수소관으로 돌리고 만다는 사실이다.’(수필 「만원버스에서」 끝 문장)라고 한 것도 긍정적인 삶의 태도이고, 달관된 여유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삶의 지혜와 진실성을 찾아내는 것이 아주 밝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라는 문학평론가의 덕담 한 마디에 ‘최면의 인자(因子)’가 들어 있었다.
가족의 반응도 고무적이었다.
“성공적인 글을 쓰려면 비관보다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뜻이지요.”
최초 독자인 가족의 반응에 최면이 걸려 글을 쓸 때마다 ‘긍정의 요소’ 찾기에 지금도 여전히 골몰하고 있다. 긍정에는 늘 좋은 운수가 따르는 법이니까. ▣ (금강일보 2011.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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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페이스북에서 방경태 작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