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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부터 난 지혜
야고보서 3:13-4:3, 7-8
들어가는 이야기
지난 19일 전 서울대 교수인 안철수 씨가 대선에 출마함으로 제18대 대선판도는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삼자 구도로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신문의 기사를 보니까 박근혜 후보를 뚝심으로, 문재인 후보를 합심, 안철수 후보를 진심으로 표현하면서 이번 대선을 마음(心)전쟁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어떤 마음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승리하게 할 것 같습니까?
대선 초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요즘, 주요 이슈 중에 하나가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유신체제에 대한 박근혜 후보의 역사인식에 대한 문제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평가는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독재정치로 민주화를 뒷걸음치게 했고 수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했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지금도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박 후보는 줄기차게 아버지와 유신체제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공과가 있고 상반된 평가가 있기에 지금 평가하기 보다는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사가 사람을 평가하고 공과를 판단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역사적인 평가만이 아닌 또 다른 평가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을 평가하는 데는 3가지의 판단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가 자신의 판단이고 둘째가 다른 사람의 판단으로 역사의 판단이라고 할 수 있고 셋째가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여기에서 제일 중요하고 정확한 판단은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판단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거나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평가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마음의 동기까지 아시는 하나님밖에 없는 줄 믿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한 부자의 비유가 나오는데요, 이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전혀 어리석지 않았고 오히려 지혜로운 사람 쪽에 속하였습니다.
농사를 풍성하게 잘 지은 것이나 풍성한 수확을 낭비하지 않고 창고에 잘 저축한 것을 볼 때 그는 지혜로웠습니다.
미래를 대비하는 지혜가 있었던 이 부자는 스스로도 심히 만족할 만큼 결코 어리석지 않았고 오히려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주님은 그를 향하여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사람은 정말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어리석다고 평가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아무리 지혜롭다고 해도 하나님이 어리석다고 하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지혜롭다고 떠받쳐줘도 하나님이 어리석다고 평가하면 그 사람은 역사의 평가가 어떠하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지혜로운 자라고 하시면 세상이 어떻게 평가를 하든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의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을 평가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속으로
오늘 본문을 보면 지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런데 여러분, 지혜에도 위로부터 난 지혜와 땅에서 난 지혜의 두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17절 말씀에 나오는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합니다.
이런 지혜가 있는 반면에 땅에서 난 지혜도 있습니다.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정말 지혜롭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지혜롭지 못하면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말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그것이 위로부터 난 지혜인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지혜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많은 재산으로 인하여 함께 살기가 어려워졌을 때 서로 헤어져서 살기로 했습니다.
헤어져 살아야 하는 그들에게 어느 지역을 차지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이때 조카 롯이 먼저 물이 있고 양을 치기에 좋은 소돔과 고모라 지역을 선정하였습니다.
언 듯 보기에 롯이 지혜 있는 것 같았지만 그 지혜는 참된 지혜가 아니었습니다.
땅위의 지혜요 정욕의 지혜요 귀신의 지혜였습니다.
롯은 그 소돔과 고모라성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성임을 알지 못하고 그저 목축하기에 좋다는 이유만으로 그곳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 결과 롯은 그 많던 재산과 부인과 사위 등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반대의 땅인 산악지역을 선정하였습니다.
이것은 지혜롭지 못한 선택같이 보였지만 그러나 그 지혜는 위로부터 하나님이 주신 지혜였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세상 사람들에게 지혜자라는 말을 들어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시면 그런 사람은 절대 지혜자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일시적으로는 지혜로운 것 같아도 그 지혜는 오래가지 못하고 자신을 유익하게도 못합니다.
저는 우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지혜로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이 인정하는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지혜로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위로부터 난 지혜는 어떤 것일까요?
먼저, 위로부터 난 지혜는 행함이 있는 것입니다.
13절 말씀을 보면,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지혜는 행동으로 선한 일을 보이는 행함이 있는 지혜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믿음의 다른 한 부분인 행함을 강조하는 서신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장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는 말까지 함으로 행함을 강조하였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장로가 지적하고 있는 대로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그저 말로만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하고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않으면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위로부터 난 지혜는, 말이 아니라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는 행함의 지혜입니다.
벳세다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실 때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설왕설래하였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이려면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필요할 것이다.’
‘그 많은 돈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니 그 돈이 있다고 해도 그 많은 떡을 어디서 살 것인가?’
그런 푸념 속에서도 안드레는 한 소년이 바친 도시락을 주님께 가지고 옵니다.
물론 그도 이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 하는 말을 하였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주님은 그 적은 도시락을 통하여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말보다는 행함이 기적을 가져옵니다.
푸짐한 말의 성찬보다 보잘것없는 오병이어를 바치는 정성이 기적을 가져오는 위로부터 난 지혜인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가장 적은 것이라도 실천하시고 사랑을 베푸시고 행동으로 보이시기 바랍니다.
말이 아니라 행함으로 위로부터 난 지혜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위로부터 난 지혜는 시기와 다툼이 없는 지혜입니다.
14절에 보면,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 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고 했습니다. 시기와 다툼은,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을 만드는 땅위의 지혜요 정욕의 지혜요 귀신의 지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시기와 다툼이 있는 것은 위로부터 내려온 하나님의 지혜가 될 수 없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사울과 다윗을 향하여 군중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고 외칩니다.
이 말을 듣고 시기가 난 사울왕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었는데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훌륭한 장군 하나를 잃어버리고, 자신은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불면과 공포의 삶을 살게 됩니다.
국력을 엉뚱한데 낭비하면서 나라는 점점 약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시기와 다툼은 하늘에서 내려온 지혜가 아니라 땅의 지혜요 정욕의 지혜요 귀신의 지혜입니다.
땅의 지혜는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최고여야 합니다.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남을 짓밟고 남을 죽이고 그 위에 자신을 세우려고 하는 정욕적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분명히 악마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를 보면 그럴듯한 전쟁의 명분 속에 감추어진 악마적인 요소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한 마디로 십자군 전쟁은 전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제1차 원정대는 성공적으로 예루살렘을 탈환했는데 놀랍게도 그들은 성 안과 주변의 약 1백만의 사람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대량 학살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6번 다 성공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겠습니까?
아무리 그럴듯한 정당한 명분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 시기와 다툼이 있다면 그 결과로 사람들이 죽어간다고 하면 그것은 결코 위로부터 난 지혜가 아닙니다.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는 시기하지 않으며 다투지 않습니다.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는 다른 사람을 가슴 아프게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피눈물을 흘리게 하지 않습니다.
셋째는 인간관계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17절을 보면,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내용은 모두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운 덕목들입니다.
성결하다는 말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깨끗하다는 말이고, 화평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좋은 것을 말하고, 관용은 넓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양순도 다른 사람에게 대하는 태도가 공손하다는 것이고 긍휼은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모습을 말합니다.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는 인간관계를 아름답게 하고 선한 열매가 가득한 것입니다.
십자군 전쟁이 벌어지던 13세기에, 십자군과 정 반대의 길을 걸어간 성도들이 있었는데 아씨시의 성자 프란치스코와 그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오늘도 우리가 기도하는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는 기도를 드리며 이 땅에 화해와 평화와 사랑을 간구하였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 사랑하며..
자신을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고..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입니다.
오늘 우리 주위에 미움과 분열과 오류와 다툼과 절망이 있는 곳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들 속에서 아름다운 관계를 갖게 해야 할 사명이 바로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은 지금 이웃과의 관계가 좋습니까?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로부터 자녀들과의 관계, 부모님들과의 관계, 이웃사람들과의 관계, 동료들과의 관계, 이 관계들이 좋아야 합니다.
이 관계가 좋지 않다면 여러분, 내가 혹시 세상적인 지혜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냉정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과의 관계가 좋아지는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로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이런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먼저는,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야고보 장로는 4장으로 넘어가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간구해야 할 것은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로 살게 해 달라는 간구가 되어야 하고 세상적인 지혜로 살지 않게 해 달라는 간구가 되어야 합니다.
정욕으로 쓰려고 간구하는 그런 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는 열심히 간구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기도한다고 할 때 그 기도는 대부분이 정욕적인 기도라는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위로부터의 지혜를 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적인 지혜를 구하는데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두 번째는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 유혹은 한 마디로 세상적인 지혜로 살아가라는 유혹이고 그렇게 살면 잘 살고 행복하고 네 뜻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유혹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것처럼 사단아 물러가라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마귀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끊임없이 마귀를 대적할 때 마귀는 물러가고 땅위의 지혜는 없어질 줄 믿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하나님이 원하시고 바라시는 지혜를 얻을 수 있고 지혜로운 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날마다 더 가까이 하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가는 말
에이트겐이라는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옥으로 내려가는 사닥다리에는 세계의 계단이 있다.
그 첫째계단에는 ‘세상적이요’ 라고 기록되어 있고 둘째계단에는 ‘정욕적이요’ 그리고 바로 지옥문 앞에 있는 셋째계단에는 ‘마귀적이요’ 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러분, 땅위의 지혜는 지옥으로 내려가는 사닥다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천국으로 인도하는 사닥다리요 참된 행복과 평안과 사랑으로 인도하는 사닥다리입니다.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로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행함이 있는 지혜가 참된 지혜입니다.
시기와 다툼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이웃과의 관계를 선하고 아름답게 해 나가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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