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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시리즈 8 )
작가/ 낭독: 김인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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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오늘 시간 되세요?
예. 별일 없습니다.
오늘 감사했어요.
아닙니다.
다음에는 제가 맛있는 걸로 대접해 드릴게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무슨 색을 좋아하세요?
글쎄요.
발 사이즈는 어떻게 되세요?
260입니다.
오늘 날씨가 참 좋아요.
미세먼지가 좋음이군요.
북한산 능선이 훤히 보이네요.
인숙이 이현수한테 자주 보낸 것은 꽃과 풍경, 카페 사진 등이었다. 이현수가 인숙에게 보낸 문자 내용은 단문으로 건조한 편이었다. 올봄부터 문자는 시작되고 있었다. 마치 프로파일러라도 된 것처럼 긴장되었다. 카톡 내용을 읽어 내려가면서 미자는 자신이 남을 의심하는 일에 흥미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남편을 방치한 죄목이 이혼 사유에 하나 추가해도 될 것이다. 남편은 미자 몰래 마음대로 살았다. 하지만 의심하고 추적하고 싸우는 관계는 더 불행할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미자는 이현수의 폰을 세면대에 올려놓았다. 미자답지 않은 행동을 중단한 것이다. 클렌징크림으로 세안을 꼼꼼하게 했다. 이현수에게 잘 보이려고 색조 화장까지 했던 자신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수건으로 얼굴과 몸을 닦던 미자는 불현듯 어떤 문구를 기억해 냈다. 미자는 이현수의 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가장 오래된 카톡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현수가 인숙에게 보낸 카톡이었다. 2024년 4월 8일의 기록이었다. 그러고 보면 인숙은 올봄부터 메카에 자주 들렀다. 미자에게 온다는 말도 없이 둘이 만나는 장면을 몇 번이나 목격했다.
‘당신은 저의 빛입니다. 영원히 제 곁에 있어 주십시오.’
이 카톡을 시작으로 둘은 빈번하게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언젠가 인숙이 어떤 남자한테 문자로 프러포즈를 받았다고 했었다. 그 남자와 재혼하기로 했다고. 미자는양팔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아, 이현수는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구나. 한 문장을 두 여자에게 보낸 이현수는 지금 만취 상태로 거실에 쓰러져 자고 있다. 분노가 일었다. 이현수는 무방비 상태였다. 폭력을 행사해도 방어조차 못 할 정도로 만취 상태였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미자는 시니컬하게 대답했었다. 제가 예수님이라도 되나요? 항상 곁에 있게요.
미자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다시 읽었다. 이현수가 보낸 문자가 맞았다. 서둘러 샤워를 끝내고 욕실을 나와 몰래 습득한 전리품을 이현수 옆에 거칠게 내던졌다. 이현수는 잠시 움찔했으나 다시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몹시 괴로운 표정을 지은 채 잠들어 있는 이현수를 지나 방으로 들어온 미자는 거울 앞에 서서 스킨과 로숀을 천천히 발랐다. 퀭한 눈, 비쩍 마른 볼품없는 양 볼. 불행한 표정을 지은 늙은 여자가 쓰러질 듯이 위태롭게 서 있었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비틀비틀 침대로 올라가 눈을 감았다. 패잔병 둘이 널브러져 있는 공간은 생각만 해도 질식할 것 같았다.
48시간 동안 겪은 일들과 충돌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앙다문 입술 아래까지 눈물이 흘러내리던 인숙, 환자복을 입은 인숙은 더없이 초라하고 불쌍해 보였다. 병실을 나오는 미자의 등 뒤에 비수 같은 말을 던지던 인숙.
“미자, 너도 그러는 거 아니다.”
미자는 눈을 꼭 감았다. 생각을 쫓아버리기 위해 몸을 돌아누웠다. 암흑 속에서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펄펄 끓는 물에 수제비처럼 동동 떠오르는 얼굴, 옆집 여자였다. 이현수 옆에 무릎을 꿇고 물수건으로 얼굴과 겉옷을 닦아주던 모습이었다. 더럽다고, 천박하다고 속으로 욕하고 침 뱉고 싶었던 여자였다. 옆집 여자의 동작은 이상하게 성스러워 보였다. 모두가 예수를 외면하고 도망가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십자가 아래에 있었던 막달라 마리아를 연상시켰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시간은 자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미자는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와 24시간 편의점으로 갔다. 헛개차와 숙취해소 음료를 사 들고 집으로 왔다. 이현수를 일으켜 음료를 겨우 입에 넣어주었다. 이현수는 미자를 알아보지 못했다. 십자가에 매달린 고독한 사나이처럼 얼굴은 온통 찡그러진 상태였다. 아들 반바지와 면티를 소파에 올려놓고 새 이불과 베개도 가져왔다. 베개를 받쳐주고 이불을 덮어주고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의 십자가를 중얼거리다가 자신도 모르게 까무러치듯이 아래로, 아래로 몸이 꺼지는 것을 느꼈다.
노오란 햇살이 들어와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얼굴을 간질이는 햇살은 발끝에 머물러 있었다. 늦잠에서 깨어난 미자는 눈을 감고 비몽사몽 그대로 누워있었다. 향기로운 냄새가 문틈으로 흘러들어왔다. 커피향이었다. 잔잔한 음악이 귓가에 들렸다. 캐롤 키드의 When I Dream이었다.
어제와는 다른 아침이라고 미자는 느꼈다. 현실에서 얻지 못했던 사랑이 찾아온 듯한 몽롱함이 전신을 휘감았다.
간신히 일어나 거실로 나간 미자는 아들 반바지와 흰 면티를 입고 커피를 내리고 있는 이현수를 보고 놀랐다. 처참했던 몰골은 간데없었다.
“앉으시지요.”
식탁에는 토마토와 양 상치, 치즈를 넣은 샐러드가 가지런하게 놓여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침묵의 식탁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홍차와 마들렌을 생각나게 했다. 견딜 수 없는 향수와 같은 감정이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는 것을 미자는 꾹 참았다. 만약 오늘이 이 남자와 마지막이라면 두고두고 잃어버린 시간은 향수처럼 미자를 휘감을 것이다.
이미 사기꾼의 낙인이 찍힌 남자에게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이별 통보를 할 시간이 다가왔다고 미자는 생각했다.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어. 오늘은 아니야. 미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작년 크리스마스이브의 눈 오는 날이 떠올랐다. 분노와 위안, 상실과 희망, 어둠과 밝음, 미움과 사랑이 하나가 된 짙은 커피 향기가 입안에 오래 감돌았다. 이 관계를 그만두자. 망설인다면 삼각관계의 덫에서 벗어날 수 없어. 세 사람 다 절벽에서 떨어지고 말 거야.
미자는 이 아침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는 자신을 책망했다. 원하던 시간, 원하던 사람과 맞는 아침은 꿈 같았다. 커피를 한 모금 들이마시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주방 창문으로 은행나무 이파리들이 보였다. 정물화처럼 움직임이 없는 이파리들은 9월인데도 아직 파랬다. 미자는 고개를 들어 은행나무 끝을 올려다보았다. 맨 위, 하늘과 맞닿은 이파리들이 산들산들 흔들거리고 있었다. 간밤에 내린 비바람은 설익은 은행알들을 우수수 떨어뜨렸을 터였다. 미자는 실눈을 뜨고 하늘과 맞닿은 부분을 눈이 시리도록 올려다보았다. 사랑은 아주 높은 곳에 있어. 발밑은 소란스럽고 어둡고 악취가 날지라도 저 높은 곳에 오염 되지 않은 진실이 있을 거야.
“커피 맛이 좋군요. 저를 위해서 샌드위치도 만들어 주셨군요. 감사해요. 몸은 괜찮아요?”
미자가 샌드위치를 먹으며 건조하게, 사무적으로 물었다.
“별것 아닙니다. 전 살아있는 동안 매일 아침 미자씨를 위해 식탁을 차릴 겁니다.”
“아니요, 전 싸구려 감상에 젖어 마음이 가는 대로 실컷 놀아봤어요. 생애 처음으로요. 제 자신이 너무 불쌍해서 위로받고 싶었나 봅니다. 이젠 이 더없이 재미나는 생활 모두 작별을 고하겠어요. 내 처지에 맞게 살아가겠어요.”
싱크대 위에 놓여있는 이현수의 폰에서 When I dream은 반복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미자는 캐롤 키드의 노래를 속으로 자꾸 따라 부르는 자신을 책망했다. 노래가 결심을 자꾸 방해한다고 느꼈다. 어제와 다른 아침이야, 하지만 나는 이 남자에게서 달아나야 해, 라고 미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이 관계를 끝내야 해.
“저, 한마디 묻겠어요. 정직하게 대답해 주세요.”
“정직하지 않은 적은 없소.”
“웃기지 마요! 당신은 인숙에게 프러포즈를 하고 여기 와서 날 사랑하는 척하고 있어요. 당신의 재혼녀에게 돌아가요.”
“진실은 온갖 질투로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소.”
“인숙을 사랑해요?”
“대체 우리 관계에 인숙씨가 무슨 상관이 있소?”
“인숙과 저에게 거짓말을 했잖아요.”
“그런 적 없소.”
“있어요”
“없소.”
“인숙에게 프러포즈 했잖아요.”
“내가? 미쳤소?”
“증거가 이렇게 있는데 시치미 떼다니요. 그럼 두 여자에게 프러포즈를 한 그 잡놈은 누구라는 거죠?”
미자는 의자에서 일어나 싱크대 쪽으로 가서 이현수의 휴대폰을 거칠게 들었다. 검지로 눌러 음악을 끄고 폰을 이현수 앞에 탁, 소리 나게 놓았다. 고요한 정적 속에서 둘의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이현수는 멀뚱멀뚱 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자가 폰을 들어 카톡을 찾아 보여주었다. 이현수는 한참 동안 폰을 읽어 내려갔다. 미자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프로파일러가 범인을 지켜보듯이. 이현수가 미자를 바라보았다. 절망적인 눈빛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런 실수를 하다니. 이건 분명히 미자씨한테 보낸 거였소. 잘못 보낸 거요. 인숙씨는 이걸로 인생을 걸었단 말이오? 말도 안 되오.”
“외로운 여자한테는 말이 됩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아무리 그런 문자를 받았다 해도 친구 사이에 그럴 수 있지요? 이게 내 책임이란 말이오? 우린 미래를 약속한 적이 없소. 밀회를 즐긴 적도 없소. 사무적으로 그냥 대화를 나눴을 뿐이오. 그럼, 문자를 읽씹하라는 거요? 난 그렇게는 못하오.”
“가끔 만났잖아요. 친절했잖아요.”
“자주 매장으로 찾아온 것은 맞소. 친절했던 것도 사실이오. 난 이제 여자가 두렵소. 무섭소. 첫사랑부터 약혼녀까지, 여자는 내게 불가사의요. 다른 것과 대체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자는 기댈 수 있는 것도,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었소. 난 충분히 여자들에게 질렸소. 패배만 했단 말이오. 이 일을 인숙씨도 아나요? 문자를 잘못 보낸 걸 말이오.”
“어떻게 알아요? 저도 어젯밤 알았는데.”
“이 일은 제가 해결합니다.”
“당연히 그러셔야죠.”
이현수가 식탁에서 일어났다. 폰을 주머니에 넣고 작은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 입었다. 미자는 식탁에 앉아 있었다. 아들 반바지와 면티를 소파에 얹어놓고 이현수는 힐끗 식탁 쪽을 쳐다보더니 현관 앞으로 가서 구두를 신었다. 미자는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이현수가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다시 고요가 왔다. 미자는 주방 창문으로 보이는 은행나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가을도 오기 전에 마른 잎들은 시들어 떨어질 것이다. 사랑이 시들었듯이.
작은 방으로 가서 창문으로 출입구 쪽을 내다보았다. 이현수가 가버렸다. 이현수가 골목을 걸어가고 있었다. 이현수의 등은 고독해 보였다. 마치 몸과 마음이 지쳐 녹초가 된 동물이 도살장을 향해 끌려가는 듯한 걸음걸이였다. 미자의 마음에 무엇인가가 꿈틀거렸다. 미자는 자신이 젊어져서 이별을 고하고 돌아서 가는 남자에게 달려갈 때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자는 팔을 들어 창문을 힘껏 열었다. 견딜 수가 없었다. 다시 한번 그의 지친 몸을 한 번만 어루만져주고 싶었다. 옆집 여자처럼 무릎꿇고 이현수의 상처 난 가슴을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이현수가 가버리면 뭐가 남는단 말인가. 오직 이현수만이 진실인 것처럼 미자는 창밖을 향해 소리쳤다.
“잠깐만요.”
이현수가 얼핏 돌아서려다가 멈춰 섰다.
“가지 마요,”
이현수는 가던 길을 계속 갔다.
“돌아와요.”
이현수는 못 들은 듯 큰길로 들어서더니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가라, 가. 가고 싶으면 가.”
미자는 혼자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목까지 차오른 통곡이 울음이 되어 새어 나왔다.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어보니 옆집 여자가 서 있었다. 여자는 천박하게 껌을 씹고 있었다.
“사장님은 어디 계세요? 제가 잣죽을 좀 쑤어왔어요. 북어국이랑요.”
“갔어요, 방금.”
“예? 벌써요? 뭘 좀 드시게 했어요?”
미자는 고개를 저었다.
“참 인정머리도 없군요. 고상한척 하는 사람은 질색이에요. 인간적이지 않잖아요.”
미자가 아무 말이 없자 옆집 여자가 미자를 쳐다보았다.
“울었어요? 미안해요.”
여자는 돌아서려다가 멈춰서서 한참 동안 미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냥 대충대충 살아요? 어차피 다 똑같아요. 굼벵이도, 말도, 달팽이도요.”
옆집 여자는 보온통과 냄비를 들고 도로 나갔다. 매장으로 가져다줘야겠군, 하면서.
또 하나의 적이 나타났군, 미자는 현관문을 닫으며 중얼거렸다.
“강적이야!”
옆집 여자는 모든 것을 내던질 것이다. 이혼소송을 합의로 끝내고 포기하고 싶지 않은 다른 생활도 포기할 것이다. 아마 인숙도 그럴 것이다.
미자는 이현수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오늘 아침에 그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지극히 명백했다. 어느 틈엔가 옆집 여자도 소리 없이 사라졌다.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옆집 여자가 말한 시는 반칠환의 새해 첫 기적이었다.
첫댓글
천천히..............
자주 들려야 겠습니다.
오늘은 콕 찜만~~~~~
@박현환 작가
@젬마김영미 저도
힘 찬
박수로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