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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 이평면 창동리(倉東里) |
본래 고부군(古阜郡) 궁동면(宮洞面)구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송산리(松山里), 소송리(小松里), 광기리(光己里,廣基里), 주산리(舟山里) 및 신송리(新松里) 각 일부를 병합하여, 속칭 창골(倉洞)의 미화된 이름인 창동 (倉東,創州의 東쪽으로 中國-朱子故事-의 약칭이다)리라 하고 정읍군 이평면에 편입되었다. 이 마을의 선비 김택술(金澤述)이 그 스승인 전우(田愚)의 가르침에 쫓아서 중국 주자(朱子)의 옛일(故事)에 따라 마을 이름을 창동이라 했다 한다. 이 마을에는 서쪽에서 천태산으로 넘어가는 ‘당실미재’가 있으며 창골 서쪽에 있는 '북두덜미둥’이라는 등성이가 있고 이곳에서 영원 운학동으로 넘어가는 ‘창골재’가 있다. 서남쪽에서 영원면 운학리로 가는 ‘부엉이골모퉁이’가 있으며 마을 가운데에 ‘노손이나무새암’이 있다. 후송은 뒷멀로 분리(分里)하였으며 그 뒤 신송마을 샛터라고 불러오다가 1940년대에 일부는 지금의 소송마을이 되고 나머지 일부는 마을로 새로 만들어졌다고 하여 신송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한다. *창동서원(倉東書院, 全羅北道 文化財資料 第78號)이 있다. 신송은 새로 만들었다고 하여 신송이라 했다. 소송은 소수의 사람들로 만들어졌다해서 소송이라 불려지기 시작했다 한다. 1950년대부터 원래의 소송마을과 너무 거리가 떨어져 있어 마을일에 불편을 느껴 자연부락으로 분리하였다. 옛날에는 ‘뒷머리’라고도 하였다 한다. 마을의 동쪽에 ‘두더지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동쪽으로 2km지점에 이평면사무소가 있고, 남쪽으로 2km지점에 영원면사무소가 있으며, 북쪽으로 2km지점에는 부안군 백산면이 있는 살기가 좋은 마을이다. 양간다리(舟山,陽橋)라 했다. 주산마을은 옛날 마을앞에 바다가 있었고, 마을의 형태가 배가 떠 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주산이라 했다고 한다. 양간다리 남쪽에 ‘양간다리방죽’(舟山堤)이 있다.
창동서원
창동서원(滄東書院)
창동서원은 정읍시 이평면 창동리에 있는 부안김씨 김택술(金澤述)을 모신 사우이다.
1903년 낙요당(樂要堂)을 건립하여 벽봉공 (壁峰公)을 모시고 강학계몽(講學啓蒙)을 하였다.
1940년 늑삭령(勒削令)과 창씨개명령(創氏改名令)에 불응하여 일제의 감시와 핍박을 받으면서도 왜적을 타도할 일을 엿본다는 뜻으로 천태산(天台山) 아래에 불망실(不忘室)을 짓고 일생동안 고절을 지키며 후생들을 교육하였다.
1964년 문인(門人)과 유림(儒林)들이 선생의 도덕(道德)을 숭모(崇慕)하여 창동서원을 건립하여 향사하여 오고 있다.
1)주벽-김택술(金澤述) 김택술(金澤述)은 본관이 부안(扶安)이고, 자 종현(鍾賢)이며 호는 후창(後滄)이다.
부(父)는 벽봉 낙진(碧峰 洛進)이며, 모(母)는 전주최씨(全州崔氏)이고, 배(配)는 성주이씨(星州李氏)이다.
1884년(고정 21년) 6월 6일 고부군 궁동면(현 정읍시 이평면) 창동리에서 출생하여 1954년 2월 18일 향년 71세로 영면하였다. 묘소는 전북 완주군 소양면 명덕리 산수동 231번지이다.
7세에 여숙(閭塾)에서 수학(修學)을 시작하여 15세경에 사서오경(四書五經)을 통달하였으며 1900년 부안(扶安) 변산(邊山)의 월명암(月明菴)의 선비들 중 우뚝하니 간재선생(艮齋先生)이 크게 경탄하여 특별히 귀로에 창동(滄東)을 왕방(往訪)하여 격려하였다.
이해 10월에 천안(天安) 금곡(金谷)으로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을 찾아 뵙고 집지(執贄)의 예(禮)를 거행하고 학문(學問)의 대도(大道)에 들었다.
1902년에는 스승 간재(艮齋)로부터 후창거사(後滄居士) 창동처사(滄東處士) 벽립만잉(壁立萬仍) 독서작성(讀書作聖)이라는 수필대자(手筆大字)와 후창(後滄)이라는 호(號)를 하사받았다.
창동(滄東)이라는 뜻은 중국(中國) 주자(朱子)의 고향인 창주의 동(東)쪽이란 뜻으로 이때부터 마을 표기(標記)를 창동(滄洞)에서 창동(滄東)으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
1906년 23세 때에는 태인에 머무는 면암 최익현(崔益鉉)의 의병진중(義兵陣中)을 방문하여 창의군(倡義軍)의 위국지충(爲國之忠)을 위로하고 간재(艮齋)의 서한(書翰)을 전하고 위문(慰問)하였다.
1915년 32세 왜적(倭賊)들의 유화정책(宥和政策)으로 일본에게 배타적(排他的)이며 반일적(反日的)인 명망(名望)있는 선비집을 골라 이른바 은사금(恩賜金)을 주고 고령의 노인에게 은사배(恩賜盃)를 주었으나 단호히 거절하였다.
1924년 동문 오모(吳某) 등이 간재(艮齋)의 유훈(遺訓)을 어기고 총독부의 승인 아래 문집을 간행하자 다사(多士)의 선봉(先鋒)이 되어 반대(反對)한 성토문(聲討文)을 지어 현동묘하(玄同墓下)에서 동지 59명과 함께 오모(吳某)를 성토하였다.
이 때문에 배일당(排日黨)으로 지목되어 전주검사국 (全州檢事局)에 수차 호출(呼出)되었고 일차 피랍(被拉)되어 무수한 고문(拷問)을 당하였다.
1940년 천태산(天台山) 아래에 불망실(不忘室)을 짖고 왜인(倭人)의 배급(配給)을 일체 거절하면서 창씨개명(創氏改名) 등에 결사반대(決死反對)하였고 자녀(子女) 손(孫) 누구도 일본교육을 받지 못하게 하였으며 동성동본(同姓同本)의 혼인이 불가(不可)함을 철저히 지키면서 조용히 은거(隱居)하였다.
선생(先生)은 평소 당시 학계(學界)의 논쟁거리였던 이기설(理氣說)에 대해 깊이 연구(硏究)를 하였으며 일생(一生)의 도의(道義)와 학문(學文)이 간재(艮齋)의 적통(嫡統)을 이었다 하여 계화도(界火島) 간재사당(艮齋祠堂)에 수제자(首弟子)로 스승과 함게 배향(配享)되었다.
주요 저서(著書)로는 후창집(後滄集) 16冊 31卷과 후창속집(後滄續集) 4冊 8卷을 남겼으며 간재선생 서거 후 간재선생문집 간행문제로 인한 동문간의 변무대의(辨誣大義)의 주장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사백록(俟百錄) 1冊 2卷을 남겼다.
건축물 서원(書院) 경내(境內)에는 위패(位牌)를 모신 사우(祠宇) 3間, 講堂 4間, 西齊 4間, 內三門 3間, 外三門 3間, 不忘室 1棟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