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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봇물 터진 듯...
물론 아직도 여전히 춥긴 마찬가진데 어쩐지 봄기운이 나는 기분이기도 했다.
'지난번 장에서 사온 상추씨를 뿌려야 하나?' 하면서 마음이 바빠졌던 기로는, 일단 밭을 살펴보기 위하여 뒷밭에 올라가 보았다.
그런데 바로 그 위 산장 할머니 밭에, 산장집 할머니와 며느리인 김 순임이... 그러니까 고부간에 나란히 그 쪽 밭에서 파를 뽑고 있었다. 그래서,
"안녕하세요?" 하고 기로가 인사를 하면서 다가가니,
"아, 화가 선생님!" 하고 김 순임이 반갑게 인사를 받았다. 그래서 그 쪽으로 가보니,
"잘 오셨어요. 근디, 화가 선생님이 접대(며칠 전)... 우리 어머니께 귤도 갖다 드렸담서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예? 아... 그거요?......" 하고 기로가 말꼬리를 감추려고 하자,
"가만 보믄, 화가 선생님은 서울 사람인디도... 아주 촌 양반 같은... 그런 자상한 맘이 많은 게벼요?" 하는 것이었다.
"아니, 그게 뭐 별 거라구요......" 하는데,
김 순임은,
"우리 집 양반도 그런 얘기를 듣고는, 퍽 좋아 허시든디......" 하는 것이었다.
순간, 기로는 어제 기로에게 인사를 해 온 박 만석의 생뚱맞던(?) 행동이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되는 느낌이었다. 자기들 집안 식구들끼리 자신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음이 분명했던 것인데, 그러면서도,
'그런 쪽에는 마음이 열리나?' 하고, 또 다시 속으로 의아해 했는데,
"파 좀 뽑아 줄 팅게, 가져가서 드셔요." 하는 것이었다.
"괜찮습니다." 하고 기로가 사양을 하니,
"아니, 갖다가 드셔요." 하면서 김 순임은 기로가 보기에도 그 중 좋은 걸로 뽑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할머니도,
"그려! 갖다가 먹어..." 환하게 웃으며 말하니,
그제야 안심이 된 듯 기로는,
"그러면 조금만 주세요. 혼자 사는데, 뭐 많아봤자 처치곤란이니까요......" 하고 김 순임의 손놀림이 빨라지는 걸 보면서, 이제 그만 멈추라는 듯 말했다. 그러면서도 어쩐지 푸근한 시골 정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싫지는 않았다.
"그려도 요즘엔 삶아서 묻혀 드시면 맛있는디..." 하고 김 순임이 말하자,
"제가요?" 하고 놀랐던 기로는, "저는 그런 걸 할 줄 모르거든요?" 하고 펄쩍 뛰었는데,
"어렵지 않아요. 그냥 마늘 넣고 간장 넣고 참기름에...."
"아이고! 저 그런 것 못합니다." 기로가 재차 손을 흔들며 말하자,
"그럼 뭘 들고 사셔요?" 오히려 김 순임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묻는 것이었다.
"예? 아, 그저 형수님들이 가져오는 김치에 밑반찬에... 그렇게만 먹어도 충분한데요." 하긴 했지만, '내가 괜한 얘길 했나 보다......' 하는 생각도 함께 하고 있었는데,
"그 집 성수(형수)들은 시아제 반찬이랑 혀 갖다 주고 그러는 게벼요?" 하고 묻기까지 했다.
"아, 예... 제가 좀, 귀찮게 하기는 하지요......" 하며 말 꼬리를 감추듯 말을 하면서도, 그런 쓸데없는(?) 얘기까지 꺼냈던 걸 기로는 후회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다행히 김 순임은 더 이상 깊은 얘기는(기로의 이혼 문제 등은) 물어오지 않았고, 결국 그렇게 엉겁결에 파를 얻어 가지고 돌아왔다.
상추 씨를 뿌릴 것인가를 생각하며 올랐던 밭에서, 산장집 시어머니와 며느리 둘 한테 파를 얻어가지고 돌아온 꼴이었는데,
'이런 게 시골 사는 맛이로구나......' 하면서 고맙기도 했지만,
얼마 전에도 산장 할머니로부터 곶감과 대추를 얻어먹었는데, 오늘 또 그래서... 고마운 건 물론 미안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생각해 보니, 그리고 어차피 어제 박 만석과 대화를 튼 뒤이기도 해서, 이제는 기로 역시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산장 집에 한 번 찾아가 보기로 했다.
작년엔가?
기로가 책을 낸 뒤 잠시 여행을 하다가 친구 상범에게 들렀을 때도 (상범은 기로가 오기만 하면 여기 둔터니로 기로를 데려왔고, 여기에 올 때마다 함께 산장 집에 들르곤 했다.), 김 순임이,
"저 친구 분은 뭐 허시는 분인디, 이따금 이렇게 한 번씩 오시는 거 같네요?" 하고 물었던 적이 있는데,
"아, 이 친구요? 화가예요. 그림 그리는 화가..." 하고 상범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음마? 그림 그리는 분이셔요?" 하고 감탄이 섞인 반가운 투로 말을 하자,
"서울서 사는데, 제가 여기 구경시켜 주려고 가끔 불러, 이렇게 오는 건데... 이런 곳을 참 좋아하기도 해서요." 하고 상범이 말하자,
"어쩌믄......" 하면서 기로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 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도 기로가 기억나는 것은, 그 다음이었다.
무슨 일이었던지 신이 난듯 상범는,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이 친구는요, 그림만 그리는 게 아니고, 어릴 적부터 글도 잘 써서... 책도 내는 화가랍니다." 하더니, "그림도 지가 그리고 글도 지가 써서 책을 내는 재주꾼이예요. 요번에도 책을 냈거든요?" 하고 사전에 허락도(?) 없이 있는 대로 다 기로의 인적사항을 까발렸었다.
"아, 그려요? 무슨 책인디요?" 하고 김 순임이 호기심을 잔뜩 갖고 물었던 것이고,
"야, 상범!..." 그제야 기로는 상범에게 그러지 말라고 눈짓을 하면서 말렸지만, 이미 일은 다 벌어진 뒤였다.
어쨌거나 기로가 원하지 않았던 일이었지만,(뭐, 하도 즉흥적으로 나온 말이었고 또 말릴 틈도 없었던 건 물론이거니와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다만 기로 혼자서만 당황을 했던 것이다.) 친구 상범이 원래 그런 편이라... 나중에서야,
"야, 그런 말을 그렇게 아무 데서나 마구 하면 어떡하냐, 나는?" 하고 짜증을 냈다가,
"뭐가 어때서? 내가 거짓말 한 것도 아니고... 너는 좌우지간, 그게 병이야, 병! 책을 냈으니까 알려야 할 것 아냐? 어떤 방법으로든......" 하고 오히려 상범에게 핀잔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 김 순임이,
"아, 그런 책 좀 봤으믄 좋겠네... 우리 딸내미 하나가 참 좋아허는디......" 했던 적이 있어서,
기로는 당시엔 속으로만,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책 한 권 갖다 줄까?' 하는 생각은 해두었었다.
그리고 어차피 이번에 이사 오면서 자료로 박스째 갖고 온 책이 있으니, 그거 한 권을 갖다 주면... 이래저래 좋을 듯싶기는 했다.
그래서 그 다음 날,
기로가 책 한 권을 챙겨서 '夢想?'을 나오며 보니, 마침 산장 아저씨 박 만석이 멀리 집 언덕 호수 쪽으로 오줌을 눗고 있는 옆모습이 보였다.
어차피 그 집에 가면 그 양반을 봐야 할 것이었기에, '잘됐다'며 마을길을 따라 산장에 갔다.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일단, 기로는 김 순임을 겨냥해 인사를 했다.
"엄마? 어서 오셔!" 김 순임은 환하게 웃으며(그녀는 늘 쾌활한 편이었다.) 주방에서 손을 닦으며 나왔다.
"저, 이런 저런 고마움도 있고 해서... 그 전에 말씀 드렸던, 제 책 한 권을 가져왔습니다." 하면서 이미 사인을 한 책을 내미니,
"음마? 정말이시네? 근디, 이 일을 어쩐디야?" 하면서도, "혜숙이 아빠, 혜숙이 아빠!" 하고 박 만석을 부르는가 보았다. 그 때 기로는 박 만석이 ‘혜숙이 아빠’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또 그들 부부끼리의 호칭이 그렇다는 것도 알았던 것이다. 그러자 창고 쪽에서,
"왜 그려?" 하면서 박 만석이 나타났다.
그래서 기로는,
"안녕하세요? 저 왔습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와서... 뭐 어쩌겠다는 건가?' 하는 생각은 했다.
"아, 예..." 하던 박 만석은, 금세, "응!..." 하는 대답으로 바꾸었는데,
어쨌거나 박 만석의 태도도 그렇고 말도 좀 이상한 대답이었다. 그저께는 '어이!' 하고 불렀던 사람이.
물론 처음엔 약간 당황한 듯, 역시, ‘예’ 했다가... 이내 ‘응!’으로 바꾸는... 그러면서도 이전과는 달리 다소 친밀감 있는 표정으로 다가오는 것 아닌가.
그러니 기로 역시 마음이 놓이고 있었는데,
"혜숙 아빠! 이 책 좀 봐! 이 화가 선상님이 낸 책이랴..." 하고 박 만석에게 건네니,
"내가 보믄... 알어?" 다소 은근한 투로 말을 하면서도, 책을 받아 몇 장을 넘겨보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기로는,
'그래도 관심은 있나 보네? 근데, 글을 모른다는 저 양반은 지금 뭘 생각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물론 그림과 사진이 함께 나온 책이라, 글자만 있는 것과는... 박 만석이 보더라도 다른 느낌일 터였다. 그러면서도,
"예, 별 건 아닌데요... 그저, 인사 차 들고 온 겁니다." 하는, 다소 궁색한 변명을 하기는 했다. 그러는 사이,
"좌우지간 일로 오셔서, 좀... 앉으셔요." 산장 아주머니 김 순임은 걸레로 거기 첫 방을 훔치면서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아, 예......" 기로가 다소 머뭇거리며 방에 앉았는데,
그런 사이에 박 만석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가만 있어 봐라......" 혼잣말처럼 내 뱉더니, 슬그머니 안방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기로는,
'오늘도 저렇게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는구나......' 하면서, 역시 달갑잖은 기분으로 체념하듯 고개를 돌렸는데,
"어쩌믄, 이런 책도 다 쓰시고... 유 상범씨 말대로 선상님은 재주가 많은 게벼요? 호 호 호......" 역시 김 순임은 다소 쾌활하게 그런 말을 하면서, "커피라도 한 잔 드리까?" 묻는 것이었다.
"아니요. 전 커피를 못합니다."
"음마? 커피 못 마시는 사람도 있대요?"
"그 게 아니라, 제가 속병이 있기 때문에... 커피를 끊어서요......"
"그려요? 지금도 안 좋은가요?"
"이젠, 많이 좋아진 건 사실인데... 커피, 맥주 같은 건 안 마십니다." 하자,
"그럼, 뭘 드린디야?" 하더니, "아, 사과라도 하나 깎아 드리까?" 하고 물어서,
"예, 과일은 잘 먹습니다." 하며, 더 이상 사양하는 빛이 없자,
주방에 들어간 김 순임은 큼직한 사과 하나를 금방 깎더니 듬성듬성 손이 크게도 쓸어 내왔다.
그렇게 사과 한 쪽을 집어 먹으니, 사과는 시원하고도 퍽 달았다.
그때였다.
방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조금 말쑥한 차림으로 산장 아저씨 박 만석이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또 다소 웃는 얼굴로,
"어이!" 또 다시, 어색한 듯하면서도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래도 지난번 보다는 조금은 친숙한 표정으로 기로를 부르는 것이었다.
사과를 먹던 기로가,
"저요?" 하고 역시 다소 움찔하면서 바라보자,
"나, 시방 농협에 갈 일이 있는디... 헐 일 없으믄, 같이 갈텨?" 하고 묻는 것이었다.
"예?"
너무나 뜻밖이어서 기로는 다시 놀라고 있었다. 물론 그저께 그런 일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여태까지는 기로만 보면 어디로 숨던가 입을 꾹 다물고 주변을 빙빙 도는 수줍은 아이처럼 행동하던 사람 아니었던가?
'그런데 또 책 한 권으로 이렇게 마음이 돌변했단 말인가?' 그런 의아함도 없지 않았지만, 그 어감 자체마저 상당히 친근미를 느끼게 해준 건 분명했다.
그러자 김 순임이,
"저 양반은? 지금 사과 잡숫는 양반헌티 어디를 가자고 헌디야?" 하고 눈을 흘기더니, "좌우간 저 양반은요, 무슨 일만 있으믄... 저렇게 사람의 정신을 없게 만든다니께요." 하고 이번에는 기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섞으며 말했다.
"아, 예..." 하던 기로는, "그럼, 그럴까요?" 하고, 생각할 틈도 없이 답을 해주었다. 아니, 저절로 나오듯 막힘이 없는 대답이었다.
물론, 오늘은 특별히 할 일도 없을 뿐더러, 어차피 뭔가 약간의 기대를 걸고 이 산장에 왔던 그 아니었던가. 그런데 오늘 역시 박 만석 쪽에서 그렇게 친한 사이처럼 꺼리낌없이 나오고 있다 보니, 어쩌면 기로에겐 잘 된 일 같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게 먹던 사과도 다 치우지 못한 채 기로는 바로 박 만석을 따라나섰는데, 트럭을 타고 가나 보았다.
박 만석이 바로 트럭에 오르면서,
"거기에, 타..." 하며 손가락으로 가리켰고,
기로는 자연스럽게 트럭에 올랐던 것이다.
트럭은 빠르게 마당을 벗어나 마을길의 급커브로 꺾어지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박 만석은 이 길에는 이골이 난 듯, 각도가 좁아 그리 쉽게 돌아나가지 않을 길인데도 후다닥 핸들을 꺾으며 단 숨에 호수 순환 아스팔트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기로는 그 순간에,
'이 양반은 눈을 감고도 달릴 수 있을 정도로 이 길에는 익숙한 모습이구나.'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급하게 올라온 순환도로였는데, 이제 차가 미끄러지듯 27번 국도와 만나는 ‘막은댐’을 향해 가는데,
"살기는 어뗘?" 갑작스럽긴 했지만 또 상당히 부드러운 어조로 박 만석이 물었다.
"예? 아... 그렇지요... 뭐......"
뭐가 그렇다는 건지는 기로 자신도 모르지만 그런 대답이 나왔다. 사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인가?' 하긴 했다. 갑작스런 물음이기도 했고, 또 박 만석이 그런 물음을 해올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기로는 또 바로,
"이제 며칠이나 지났나요? 앞으로 살아가면서 느끼게 되겠지요." 하기는 했다.
그러자 박 만석은,
"살믄서, 혹시... 힘든 거 있으믄... 얘기 혀! 우리, 이웃 찌린디, 내가 도울 게 있으믄 도울 께..." 하는 것이었다.
기로에겐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이 양반은, 사람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특징이 있네?' 하면서도,
"아, 예... 감사합니다." 라는 대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라는 단어와 ‘이웃’이란 단어가 퍽 신선하게 느껴지면서, 순간적으로 기로는 마음 역시 푸근해지면서 박 만석의 운전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속으론,
'여러 가지로 의외네? 근데, 여태까진 왜 그렇게 냉랭했다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제는... 그 과정은 벗어나는 것인가 보네?' 하는 여유로움까지 느껴져 왔다.
그러니까 그저께 인사를 해 온 것부터, 지금 농협에 함께 가고 있는 것으로 연결된 이런 상황이... 방금 박 만석이 ‘이웃 찌리(끼리)’라는 말을 했던 것처럼, 기로에게 친구거나 동료가 되고 싶어 한다는 느낌이 전달 되면서, 기로가 이 마을에 와서 마을의 한 구성원으로 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까지 와 닿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감정은, 지난 산신제에서 마을 주민들과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운암 대교를 지나고 얼마 더 달리자 면 소재지가(여기 지도 확인) 나왔고, 거기에 농협이 있었다.
박 만석은 농협에 공과금 등을 내러 왔나 보았다.
그리고 기로는 박 만석을 따라 농협에 들어가서 그가 농협 직원에게 몇 마디 얘길 나누며 이런저런 공과금을 내는 것을 다소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여직원과 웃어가며 얘길 하는 모양새로 보아, 잘 아는 사이이기도 하겠지만 박 만석이 의외로 우스갯소리도 제법 한다는 것도 지켜볼 수 있었다.
물론 기로는 그저 보이는 것을 보았을 뿐이지만,
박 만석은 뭐가 좋은지, 평소와는 달리...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그렇게 일을 끝내고 농협에서 함께 나왔는데,
날씨가 다소 풀려선지, 거기 아스팔트를 건너 보건소 앞에는 몇몇 주민들이 모여 있었는데,
박 만석은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 중 한 사람이 기로 쪽을 바라보면서,
'누군가?' 하는 눈치인 것 같자,
"아, 이 사람은... 우리 ‘둔터니’에 살러 온 양반인디... 화가랍데여." 하고 박 만석이 알아서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로 역시 고개를 약간 숙여 그 쪽에 목례를 했는데,
"이런 촌구석에 뭐 헐 게 있다고 왔대요?" 묻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예... 촌이라도 사람 사는 곳에서는 뭐든 할 게 있겠지요......" 기로가 웃으면서 대답을 하자,
"책도 쓴 양반이랴!" 하고 나선 건 박 만석이었다.
그러니,
"?......" 기로는 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양반한테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더구나 나를 ‘양반’이라고?' 하긴 했지만, 그 말에는 약간 우쭐하는 어감도 포함되어 있다는 걸 기로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기로를 데리고 오기도 했겠지만, 박 만석은 지금 기로 자신과 함께 나온 나들이(?)에 들떠있다는 뜻이기도 할 터였다.
마치 뭔가 신기하거나 좋은 것을 가진 아이가 그렇지 못한 다른 아이들에게 약간 자랑이라도 하는 듯한 태도이자 어감이라는 걸 기로도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기로는 계속,
'그런 양반이 도대체 왜 여태까지는... 그리 냉랭했다지? 그래서 나에게 쉽게 접근하지 못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또 오늘, ‘어이!’ 하고 부른 것은?' 하다 보니, 여간 헷갈리는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아무튼 저 양반은... 지금 나와 함께 하는 게 싫지 않은 게 분명하구나. 아니, 조금은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이기도 하니... 오히려 내가 좀 멋쩍어지네......' 하고,
기로는 어쩐지 다소 머쓱해진 기분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론 느긋한 마음으로,
봄날의 뜻하지 않았던 나들이에 기분이 좋아진 상태였다.
그런데 거기 보건소 앞에 있는 자판기 앞을 지나는데,
"아까 우리 집 사람허고 얘기 허는 걸 들응게, 커피는 안 마신다고 허든디... 뭐, 무슨 차라도 안 마실 거여?" 하고 묻는 박 만석이었다.
기로를 데리고 외출을 나왔는데, 뭔가 대접(?)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아까 내가 아주머니하고 했던 얘기도... 뒤에선 다 듣고 있었다는 얘긴데... 좌우간, 이 양반은 뭔가가 있다......' 하면서도 기로는,
"제가 원래 집에서 마시는 물 빼고는 그런 걸 잘 마시지 않는데요......" 하자,
"그려도 바쁜 사람을 이렇게 내가 데리고 왔는디... 뭐라도 마셔야 허는 거 아녀?"
다소 겸연쩍어하듯 하는 말이 기로를 웃음짓게 했다.
" 하 하 하... 글쎄요.. 그럼, 율무차 하나 마실까요?" 하자,
"그려, 그렇게 혀." 하더니,
또 자신이 직접 율무차를 뽑아서 기로에게 건네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로가 묻지도 않았는데,
"나는 커피를 마실 팅게..." 하고 자신의 것도 빼는 것이었다.
# 횡재(?)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나에게 그런 일이 생겼는지... 인생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기도 합니다.
나는 아직도 그 흥분을 감출 수가 없는데요......
오늘 이 마을의 터줏대감인 ‘산장 아저씨’와 면에 나들이를 가는 일이 나에게 벌어졌습니다.
내가 이 마을에 이사 온 뒤로 줄곧 '소 닭 보듯' 지나치던, 아니... 냉랭하기까지 하던 분하고요.
물론 이미 약속되거나 계획에 잡혀 있던 일이 아닌 즉흥적인 일이었다는 게 더 놀라운 일이었었는데,
요 며칠 사이로 산장 집 할머니와 아주머니에게 이런저런 고마움이 있어서, 내 책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쓴 편지’ 한 권을 갖다 드린 일로부터 시작되었는데요,
어떻게 여태까지는(허기야 이미 우리는 몇 년간 몇 차례의 인사를 나누기도 했던 구면이긴 했었지만)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을 가리거나, 아니면 '일부러 피하는 건 아닌가?' 할 정도로 찬바람이 씽씽 돌던,
이 마을 주민의 대표격(?)이랄 수 있는 '산장 아저씨'가 날더러,
함께 면에 좀 가자고 해서, 엉겁결에 따라나간 일로부터 생긴 일인데요......
다시 마을로 돌아오는 길에, '운암대교'를 건너면서 나는 호수 건너편에 있는 삼각형의 산에 대한 궁금증을 산장아저씨께 물어보았는데,
"응, ‘노적봉’이라고 허는디..." 하고 대답을 하시던데,
사실 난 그 산 이름이 ‘노적봉’인 줄도 여태까지는 모르고 있었거든요?
아무튼, 그 일로부터... 내가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벌어집니다.
"예, 근데, 그 산에 가려면... 여기 운암대교까지 걸어와서도, 또 한참을 저 쪽으로 걸어가야 하나 보네요...... 그러고 보니, 굉장히 먼데요? 우리 마을에서 보면, 바로 호수 건너편에 있는 산이......" 하자,
"노적봉은 왜?" 하고 산장 아저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묻는 것이었습니다.
"글쎄요... '둔터니'에 살면서, 언젠가 한 번은 저 산에 올라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호수를 빙 돌아서 와야 된다는 말인데... 상당히 먼데요?" 하고 다시 말하자,
"내 배 타고 가면 되잖여?"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예에?"
나는 깜짝 놀라면서(놀라 자빠지면서), 고개까지 돌려 그 양반을 바라보자,
"내 배 타고 가, 내가 빌려 줄팅게!" 하고 아주 쉽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예?" 하고 내가 여전히 어리둥절해 하자,
"왜, 배 탈 줄 모르는가?" 하고 묻기에,
"예? 아, 예...... 배를 타본 적이 없어서요......" 하고 내가 말끝을 흐리자,
"그거, 어렵지 않여... 내가 나중에 노 젓는 법을 가르쳐 줄 팅게, 내 배를 타." 하고, 의외로, 너무나 의외로... 나는 그 분으로부터 자신의 배를 타라는 말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갑작스럽기도 한 데다, 생각지도 않았던 긍정적인 상황으로의 발전(?)에,
나는 다소 흥분되기까지 했습니다.
왜냐면요,
내가 지난 겨울엔가 둔터니에 왔을 때, 그 때가 주말이었던가 본데... 우연히 호수를 보다가 나는,
'야, 이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풍경이네!' 하고 감탄하면서, 서둘러 카메라를 꺼내 사진까지 찍어두었던 일이 있었답니다. 그리곤 그 광경에 넋을 잃고 말았는데요,
무슨 광경이었냐구요?
그러니까, 그 배에 타고 있던 장본인이 바로 이 산장 아저씨였는데요,(본인은 어떤 심정이었는지 모르지만 그 걸 바라보던 나는 감동까지 했었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학교 문제로 전주에 산다는... 산장집 막둥이 아들이 부모를 뵈러 왔나 본데(당시에 상범이 그렇게 얘길 했었지요.), 그 양반이 자신의 아들을 배에 태워, 그런데 아들만이 아니고 개 한 마리도 함께 태워... 그러니까 산장 아저씨는 노를 젓고 있었고, 아이와 개가 그 배 위에 타고 호수 건너로 가고 있는 광경이었답니다.
근데 나는 그 풍경이 너무 아름답고 감동적이기까지 해서, 부랴부랴 카메라를 꺼내 사진까지 몰래 찍어두었고, 지금도 제 사진첩엔 그 사진이 남아 있는데요,
그 순간 나는,
'저 양반이, 이 시골에서 살기는 하지만... 아주 멋드러진 삶을 즐길 줄도 아는구나......' 하고 혼자서 감탄까지 했었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진 속의 광경 같은 생활'을 나에게도 가능하게 해 주겠다는(?), 그 장본인의 제안을 받고는,
아, 어쩌면... 믿을 수 없는 꿈같은 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 양반이야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내막까지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쉽게 던진 약속이었는데,
내 입장에서는... 더구나 며칠 전에 '격'까지 생긴 마당이라,
아, 마치 그런 일들이 미리 정해져 있다가 기다려 왔다는 듯... 순서대로 내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
어찌 아니 꿈 같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내가 그 분께 나서서 부탁한 것도 아닌데, 장본인인 산장아저씨 입에서 직접 그런 얘기가 술술 풀어져 나왔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호박이 넝쿨 째 굴러들어온다'고 하더니,
'나에게도 이런 일이 생기나?' 하고,
나는 배를 타기도 전부터, 벌써 감동까지 하고 있었답니다.
근데요, 그래도 도무지 그 상황이 믿겨지지 않아서 나는,
"그래도 돼요?" 하고,
여전히 어리둥절해 하면서 다시 묻기까지 했답니다.
그렇잖아도 이 냉랭하기 그지없던 양반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날더러, '면에 나들이를 가자'는 것도 어리둥절한 상황이었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내 배를 타'라니요......
내가 '夢想?'으로 이사 온 뒤, 한 달 만에... 하늘에서 커다란 선물이 떨어진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답니다.
이런 걸 '횡재'라고 하나요?
오죽했으면,
'내가 어젯밤에 무슨 꿈을 꾸었다지?'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겠습니까?
그렇게 흥분된 상태로, 어쩌면... 어안이 벙벙한 채로 산장집에 돌아왔는데,
이 양반, 이제는 밥까지 먹고 가라고 강제로(?) 나를 잡지 않겠습니까?
'근데, 이 양반이... 오늘 왜 이러시나? 여태까지는 얼음장 같던 사람이......'
물론 시골 인심에, 밥 한 끼 나눠 먹는 일은 별 게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나는 이 마을로 이사 온 이래... 처음으로 남의(이웃) 집에 가서 밥을 먹는 일도 벌어진 날이었답니다.
참내!
그런데 오늘 나에게 벌어졌던 일련의 그런 일들이, 아직도 여전히... '꿈인가?' 할 정도로, 나에게선 그 흥분된 감정이 쉬 사라지지 않고 있답니다.
근데, 어떻게 그런 일들이... 한꺼번에 예고도 없이 우루루 몰려 왔는지......
3 . 28
그렇게 생각지도 않았던 산장 아저씨 박 만석과의 나들이가,
기로가 여기로 이사 온지 한 달 정도 만에 벌어진(꽤나 더딘) 것이었는데,
무엇보다도 배를 탈 수 있다는 사실에 기로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갑작스럽게 닥치고 있는 오늘의 일들이 다 좋은 쪽으로만 가고 있는 게, 이제는... 어쩐지 불안하기도 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하면서 기로는,
'혹시나, 만약 내가 너무 경망스럽게 군다면...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 황금 같은 기회가 사라지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정신을 바짝 차리자! 그리고 너무나 좋아하지 말기로 하자......' 하는 자제심까지 드는 것이었다.
산장 아저씨 한테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이 상황을... '좀 침착하게 받아들이자.'고 자신을 다그치고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뒤로는 말도 아꼈고,
그들은 또 금방 산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계속 이어지는데,
그러니까 그것도 모자라, 집에 도착하자마자 박 만석은,
"혜숙 엄마!(아마 이집 큰 딸 이름이 혜숙인가 보았고, 산장 아저씨 역시 아주머니를 부를 땐 그렇게 부르나 보았다. ) 점심 차려! 장 기로씨 왔응 게... 손님이 왔응 게, 점심은 대접혀얄 것 아녀?" 하고 목청을 높이는 거 아닌가. 더구나 아주 자신감에 찬 목소리이기도 했는데,
그러니까 기로에겐 묻지도 않은 채, 어느새 당연시 여기며 점심까지 먹고 가라는 뜻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니 기로에게는,
'이 양반이, 지금 나를 데리고 여태까지 숨겨놓고 있던 ‘깜짝 쇼’를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스치는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어쩐지, 이제는 박 만석의 그런 행동마저도 조금은 자연스럽게 보여졌고, 또 왠지... 싫지가 않았다. 아니, 그런 게 시골스런 정이고 맛이라... 기로의 마음은 계속 푸근하기만 했는데,
이번에는, 또 처음으로... ‘장 기로씨’라는 제 3자(자신의 처)에게 전달하는 호칭도 들으면서는,
피식!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아니, 전... 괜찮은데요? 지금 집에 가서..." 하고 사양하려는데, 기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신 소리여! 왔응게 점심은 먹고 가야지." 하는 말까지 하자,
"아이, 그러고 말고요! 근디, 화가 선생님은... 뭘 좋아 허셔요?" 하고 이제는 김 순임까지 한 술 더 뜨면서 쾌활하게 묻는 것이었다. "우리 집 메뉴 중에, 사람들이... '붕어찜'이 맛있다고들 허는디..." 하기에,
기로는 얼른,
"아이.. 죄송한데요... 저는 민물고기는 안 먹는데요... 식성이 좀..." 하면서 곤란한 표정을 짓자,
"엄마? 그러셔요? 우리 애들 아버지도... 입에도 안 대는디... 그리고 저 양반은요, 새우젓도 물고기라고 안 먹는 요상스런 사람이거든요? 호 호호..." 하면서도, "그럼 다른 건요?" 하고 다시 묻는 것이었다.
"예, 다른 건 대충... 남들 먹는 대로는 먹습니다. 뭐, '개고기' '추어탕' 같은 것도 먹지 않습니다만......" 하고,
기로는 순간적으로, 여기는 시골이라 혹시 개고기가 있을지도 몰라, 그 얘기는 해두었다. 그러자,
"그럼 됐네요! 우리 집 양반도 돼지고기만 좋아혀서, 돼지고기는 괜찮을 거 아녀요?" 하기에,
"그럼요!" 하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은 했다.
그러면서 기로가 가만히 보니, ‘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아니, 이래저래 산장 아주머니 김 순임이 오히려 박 만석보다 훨씬 화통한 편이라서,
'저 양반은, 개인 일은 잘 할지는 몰라도... 장사를 잘 할 사람은 못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 집의 그 큰 장사를 김 순임이 다 하고 있다는 것도 이해가 되는 기분이었다.
물론 기로도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김 순임의 그 쾌활하고 환한 목소리와 웃음이 손님들을 끌어 모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렇게 기로는 산장 집에 놀러 갔다가,
산장 아저씨와 함께 면에 나들이를 했고, '배를 타라'는 깜짝 놀랄 횡재를 한 것도 모자라, 점심까지 얻어먹고 '夢想?' 으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기로가 이 둔터니에 이사 온지 한 달이 넘은 시점이긴 했지만, 이제야 옹골지게(?) 이 마을의 정식 주민이 된 기분이 들던 날이기도 했던 것이고,
그동안 막혀있었던 박 만석과의 '혈(穴)'이 봇물 터지듯 터진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오후에 기로는 병원에 있는 옆집 할머니를 모시러 다시 전주에 나가야만 했다.
그런데 돌아올 때는 친구 상범의 차를 빌어타고 오기로 얘기가 돼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전 날 밤 상범으로부터 상수도 연결 작업하러 '둔터니'에 온다고 했기 때문에, 그 기회를 이용하기로 했던 것이다.
사실은 그런 일로 굳이 상범의 신세까지 지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 기로의 형편으로는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절약해야만 할 입장이기도 해서였다.
그래서 병원에 갔더니,
할머니는 벌써 접수처 앞에 준비를 하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손에는 9 만원이 들려있기에,
"할머니, 무슨 돈인데요?" 하고 기로가 물으니,
"병원비가 그렇게 나올 것여..." 하는 것이었다.
"아니, 어제 담당의사가... 무료로 해준다고 했는데......"하면서, 기로가 접수처로 가 보니,
접수처의 여자는 영수증을 보더니 할머니 말씀대로 9만원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제 담당 의사 선생님이 무료로 해주신다고 했는데요?" 기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하자,
"그래요?" 하고 놀라기에,
"예... 한 번, 확인해 보세요." 기로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을 하자,
그 여자는 바로 전화 통화를 했다. 그러더니,
"그렇네요......"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그러니,
'하마터면 할머니 돈을 내시게 할뻔 했네...' 했던 기로는, '이 전에 수술했던 다른 쪽 눈도 9만원이었다고 하시긴 했는데, 그러고 보니... 그 돈은 할머니께서 직접 내셨나 본데? 나는 교회에서 해준 걸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하면서 보니, 할머니는 이 번에도 그 돈을 준비해 오신 모양이었다. 그래서 기로가,
"할머니, 무슨 돈이 있으시다고요?" 하고 묻자,
"저 번에 손자가 와서... 20만원을 주고 갔어. 그 돈이여..." 하는 것이었다.
"예, 그렇군요. 아무튼 그 돈은 그냥 잘 간직하고 계시면 되겠네요." 하면서 기로는 처방전을 들고 그 앞의 약국에 가서 3일 분의 약을 타왔다. 그러면서 혹시나 해서 기로는 담당의사에게 면담을 요청했고, 진료중의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할머니 수술은 잘 됐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월요일에 오시면 된다면서,
"앞으로 몇 번은 그렇게 하셔야할 것 같아요." 라고도 했다.
그래서 할머니한테 그 말을 전하면서 기로가, 다음에도 모시고 온다고 하자,
"아녀! 이제는 나 혼자서 올 수 있어... 그리고, 내일 모레 일요일 교회에 가서 하룻밤을 자면, 다음 날 교회 차로 병원에 데려다 줄 거여... 그렁게 집이 일이나 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로는 병원의 여 근무자에게,
다음 월요일 할머니께서 오시면 잘 관찰했다가, 혹시 돌아가는 교통편이 원활치 않을 경우엔... 자신에게 연락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랬더니 그녀는, 기로의 이름을 물었다.
그래서 기로는,
"할머니 진료카드의 연락처에 내 핸드폰 전화 번호가 적혀있습니다." 하고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상범 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자신은 중앙우체국에 있다며 어디냐고 묻는 것이었다.
"거기서 얼마 안 가면 '00 안과'가 있으니, 그 앞에 차를 대라." 고 하니,
"무슨 일인데?" 하며 다소 놀라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응, 와 보면 알아......" 하고 구체적인 얘기는 하지 않은 채 전화를 끊었는데,
곧, 상범의 차가 병원 앞에 섰고,
"이 할머니를 모시고 가야 한다." 는 기로의 말에,
그는 잠깐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곧 눈치를 챘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기로가 할머니를 부축해 상범 차에 올랐는데,
상황이 그렇다 보니, 상범도 할머니도 말이 없었고... 기로 역시 마땅히 할 말이 없어서,
"이제는 봄이 멀지 않았나 보네......" 하는 생뚱맞은 소리를 했을 뿐,
거의 말없이 둔터니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옆집 할머니의 이번 '전주 안과행'은 오며 가며 별로 말도 없이,
그렇지만 차편만큼은 편하게 일을 치른 것이다.
그렇게 상범이 와서, 통나무 집에 상수도 연결 일을 하는 사이,
기로는 인터넷에 들어가서 일을 좀 보다가 나와 '격'에게 밥을 주니, 배가 고팠는지 금방 다 해치우는 것이었다.
"내가 너를 위해, 얼은 돼지고기를 녹여 찌개를 끓인 건데... 잘 먹는구나." 하면서 개를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는데, 아무튼 그게 효과가 있었던지 잘 먹어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개는 역시 주인을 알아보는 것 같았다.
상범도 바쁘게 오가면서 새로운 개가 생긴 것을 보고는 상당히 관심을 보였고, 가끔 친해지려는 듯 개를 부르곤 했는데... 그가 부를 땐 겁을 먹고 뒤로 피하는 눈친데, 기로가 부르면 땅바닥에 기듯 꼬리를 흔들며 친근미를 보이는 것이 분명히 기로를 주인으로 알아보는 눈치였던 것이다.
그런데 상범이,
"야, 근데... 저 개는 생김새도 아주 독특한 것 같어?" 하며 신기해했는데,
"검은 진돗개가 그리 흔한 건 아니지......" 기로는 그 정도만 대답해주었다.
자신의 개를 너무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것도 좋지만은 않을 것 같아, 그저 덤덤하게 말을 해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로는 오늘도 마당을 조금 골랐다.
그러면서 상범에게,
마당에서 빼낸 커다란 돌들은 부엌으로 가져가 메우라고 하자,
상범은 기로의 말에 따라 하나 둘 옮겨갔는데... 그럴 때마다 마당이 한결 정돈돼 보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큰 돌이 없어지면서 이제 4 분의 1 정도만 더 고르면 마당은 그런대로 정리가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서 보니, 이제 기로의 손도 많이 거칠어져 있었다.
노동 일을 해 본 적이 없는 기로의 부드럽던 손이 이제는 손톱사이에 때가 낀 건 물론이고, 어떤 곳은 딱딱하게 굳은 살도 박혀있어... 조금 둔탁하거나 까칠까칠한 감촉마저 느껴졌던 것이다.
네 시 반경에 기로가 옆집에 불을 때러 갔더니, 할머니는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제서 점심 먹는 거여."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로는 식사 후 약을 꼭 드시라고 알려드렸다. 그리고 할머니가 식사하는 사이 불을 때겠다고 했더니,
"귀찮게 그런 일 하지 마." 하시는데,
"오늘 불을 때야, 내일 하루 더 견디고... 모레 교회에 가셔서 하룻밤을 주무시고 글피 병원에 가셔야 하니까, 오늘은 불을 때야합니다." 하면서 기로는 부엌으로 건너가 나무를 아궁이에 넣고 불을 지폈다.
할머니 부엌의 나무는 말라서 불이 잘 붙어 주었다.
화력이 세게 그리고 아궁이 깊숙이 나무를 밀어 넣어 불을 잘 때는데 식사를 끝낸 할머니가 왔다.
"이런 귀찮은 일까지 혀줘서 고마워."
"예..."
"집의 불은 땠어?"
"아니요. 지금 가서 때야지요."
"그럼 어서 가. 내가 마저 보고 있을게."
"예, 이제 나무는 그만 넣으시고, 불이 꺼지는 것을 보시고 들어가시면 돼요."
"알았어. 고마워."
"그리고 할머니, 식사하셨으니... 약 드셔야 해요......"
"응, 방에 들어가서 먹으께."
그런 뒤 기로는 '夢想?'에 돌아와 불을 지폈다.
그런데 나무가 시원찮아서 불이 잘 붙지 않았다. 그래서 애를 먹다가, 겨우 불이 붙어주어... 웬만큼 땠는데,
"에이, 오늘 새벽처럼 방이 식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기로는 푸념처럼 혼잣말로 한 마디 내 뱉었다. 그러면서 보니 '격'이 뭔가를 계속 파 씹는 모습이었다.
배가 고픈가 보았다.
'허기야 점심때 밥이 그리 많지 않았었지?' 하면서,
저녁으로 먹을 또르띨야 한 쪽과 상범이 허기진다며 라면을 끓여 달라기에 두 개를 끓여서 주었는데 남긴 걸 주니,
'격'은 정말 배가 고팠던 듯, 그 것도 금방 해치우는 것이었다.
'너는, 가난한 주인을 만나서, 배곯이를 할지도 모른다......' 하는 생각도 드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