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바이처와 한국의 정부파견의사
슈바이처 엿보기
선교사이었던 독일의 루트비히 필립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는 적도 아프리카에 파견되어 '인류의 형제애'를 위한 노력으로 1952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는 1899년 철학 박사학위와 그 이듬해에는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능숙한 음악가이었다. 1905년에는 박애 사업을 실천하기 선교 의사가 되기로 하였으며 1913년 의학박사가 되었다. 그의 학창 시절 친구이었던 아내 헬레네 브레슬라우(Helene Bresslau)는 슈바이처를 돕기 위해 간호사가 되어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의 가봉의 소도시 랑바레네에서 평생을 함께 봉사하였다. 그는 봉사활동 기간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국적 문제로 전쟁포로가 되었다가 아프리카로 돌아왔고, 인류의 형제애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1952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우리는 인류애를 실천한 슈바이처의 헌신과 박애주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의 훌륭한 업적과 평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외르만은 ‘원시림의 성자(聖者)’라 불리는 슈바이처는 칸트를 연구한 철학자, 생명 존중 사상을 주창한 인본주의자, 아프리카 흑인의 고난을 덜어준 의사, 탁월한 오르간 연주자이자 바흐의 전기를 쓴 문화철학자, 한마디로 팔방미인형 천재의 전형이라고 하였다(슈바이처 : 생명을 위해 삶을 던진 모험가,외르만/엄정용). 이와 더불어 그의 헌신적인 노력이 알려지면서 ‘세계의 위인’, ‘인도(人道)의 전사’, ‘원시림의 성자’ 등으로 불리었으며 1928년 괴테 상 수상에 이어, 1952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되었으며, 수상 소식을 듣는 순간 “상 받으러 갈 시간이 없다”는 명언을 남기었다. 그러나 어느 일에나, 어느 사람을 막론하고 공과(功過)와 찬반과 존경과 비판적 평가가 공존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비록 주제넘지만 여러 사람들이 자주 얘기하는 슈바이처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비판적 평가와 아쉬운 점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슈바이처의 인류애; 슈바이처는 ‘전략적으로 행동하는 정치적 인간’이었다는 점이 지금까지 대부분 간과되어 왔다. 그는 의사로서 돌 본 흑인들을 친구로 대하기보다 측은히 여겨 의술을 베풀어야 할 하급 인종으로 여겼다. 유럽인으로서 그는 유색인에게 시혜를 준다는 의식이 있었다. 그의 인도주의적 선행에는 식민주의가 악이라는 판단이 없었다. 현지인 환자를 향한 슈바이처의 일상의 말투와 행동도 기대 이하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슈바이처가 오염된 물을 마시지 말라고 했는데도, 또다시 오염된 물을 마시려다 발각된 환자들에게 “이런 야만인들을 치료하겠답시고 아프리카까지 왔다니, 나도 참 어지간한 꼴통이로군!” 이라고 푸념을 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자 통역자 겸 조수로 일하던 조세프라는 현지인이 이렇게 대꾸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지상에서는 선생님이야말로 대단한 꼴통이죠. 하지만 하늘에서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말 저름이 슈바이처의 대화에서도 소환되었다. 어쩌면 이러한 우문현답이야말로 슈바이처에게 바칠 수 있는 최상의 찬사는 아니었을까
탁월한 전략가 : 아프리카의 수백 개 병원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던 슈바이처의 원시림 병원이 2차 세계대전 이후 그토록 유명해진 이유로 그의 탁월한 연출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슈바이처가 그 바쁜 진료 중에도 수만 통의 편지를 발송했고, 그 수신자가 아인슈타인에서부터 흐루시초프를 거쳐 존 F. 케네디까지 망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의 자서전 『나의 생애와 사상』(알베르트 슈바이처/지경자역)에서 삶의 위대한 순간과 결정을 언급하면서 그 날짜까지 자세히 기록한 것은 자신의 인생을 고상하게 꾸미려는 의도일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기차의 3등석을 타고 해진 옷을 입은 채 점잔을 떠는 슈바이처의 모습은 스스로 매력 있는 노인장으로 보이게 하려는 뻔한 연출이었듯이 그는 타고난 전략가였다고 보인다(외르만/엄정용).
비호감적 평가: 슈바이처는 정식 학위 과정을 거쳐 의사가 되었으나 그가 진료했던 랑바레네의 병원은 빈약한 시설과, 의료 수준, 그리고 슈바이처의 진료 실력은 수준 이하이었고, 과대평가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현대의학의 수준이 아닌 당시 수준으로 비교하더라도 과대평가 되었다고 하는 것인데 아프리카라는 특수 환경을 감안하여야 할 것이다. 빈약한 시설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그 많은 기부금은 어디로 갔나 싶을 수준이었다고 한다. 어쩌면 슈바이처가 의도적으로 랑베르네의 병원을 일부러 열악하고 형편없어 보이도록 방치했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입장도 있다.
한편 슈바이처의 병원에서 장기간 자원봉사를 한 일본인 사쿠라자와(櫻澤) 부부의 회상에 따르면 놀랍게도 현지인들 중에는 손발이 잘려 나간 사람이 많았다. 이것은 한센병에 걸린 환자들의 손발을 잘랐기 때문이다. 아마도 한센병이 많이 퍼진 이유 중 하나는 서양식 음식 때문인 듯하다. 슈바이처의 병원은 항상 만원이었고, 기침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환자들에게 맞지 않는 음식이 천식을 일으킨 듯하다. 훗날 논란을 불러일으킨 슈바이처의 태도는 “한센병 환자를 수술하여 장애인을 양산하는 것이 슈바이처의 치료법”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냉혹한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 밖에도 비호감적 평가는 다음과 같다(알베르트 슈바이처/지경자역).
“슈바이처의 병원에 가느니 차라리 죽겠다.”
“세계 각국에서 보낸 기부금을 도대체 어디에 썼나?”
“슈바이처와 직원들은 흑인을 무시했고, 식사도 형편없었다.”
제국주의의 첨병 역할: 혹자는 슈바이처를 두고 “제국주의를 합리화하는 일에 가장 앞장선 서양인”이라는 평가를 한다. 본인들이야 선교와 봉사라는 훌륭한 목적으로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였다 하더라도 정치가들은 그들을 제국주의의 정찰 또는 침투병으로 이용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인도주의적 선행에는 식민주의가 악이 동반될 수 있다는 판단이 없었다. 이러한 당대의 의식은 리빙스턴도 마찬가지이다(위키백과). 그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자신과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기독교 전파로 계몽해야 인종으로 여겼다. 이러한 맥락은 아프리카를 검은 대륙이라고 부르고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제국주의 시대 유럽인들의 사고방식이었다.
슈바이처는 자신에 대한 성자적 평가나 헐뜯기식 비판이야 어떻든지 아프리카를 사랑한 마음을 자신의 묘비명으로 아래와 같은 글을 남기었다. 그는 소중한 삶을 아프리카 흑인들을 위해 살았고 죽으면서 자신의 몸도 기꺼이 바치겠다는 그의 진심을 묘비에 남긴 것으로 보인다.
아프리카와 한국의 슈바이처들
이러한 슈바이처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바라보며 한국의 아프리카 슈바이처들은 그와 어떻게 다른가 생각해 본다(한국국제협력단/심의섭 외),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 2011). 국제협력사업의 하나로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현지인들에 대한 의료봉사로 헌신한 ‘한국의 슈바이처’들도 많이 있다. 정부파견의사(정파의) 사업의 일환으로 아프리카에서 슈바이처와 같은 역할을 하였던 훌륭한 의사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아프리카에서 생의 대부분을 봉사한 몇 분을 예로 들자면 사하라사막 중남부에 있는 니제르에서 무더위와 전염병을 무릅쓰고 1968년부터 19년간 인술을 펼쳤던 김대수·조규자 부부 의사를 빼 놓을 수 없다. ‘코트디부아르의 슈바이처’로 불린 안순구 박사도 1969년부터 31년간 사랑의 의술을 펼쳤고 그의 은공에 대한 보답으로 현지 부족의 명예 추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1972년부터 23년간 말라위와 레소토의 가난한 환자들을 돌본 김명호 등 수많은 한국의 정파의 들의 활동은 재조명되어야 한다. 특히 부르키나파소(오트볼타)와 보츠와나에서 1970년부터 30년간 인술을 펴고 보츠와나에서 생을 마감한 김 정 박사의 헌신은 슈바이처의 헌신에 비견될 수 없을 정도의 고귀한 헌신이었다. 이 밖에도 아프리카에서 정파의로 10년 이상 봉사를 하였든 분들은 23명에 이른다. 삼가 그들의 봉사와 헌신에 옷깃을 여밀 뿐이다. 물론 아프리카 정파의와 시대와 결을 달리하지만, 남수단 톤즈 마을에서 의료 봉사를 했던 이태석 신부의 숭고한 사례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참고: 심의섭, 곰곰이 생각하는 隨想錄 3, 우민화의 떡밥, 노답의 타령, 한국문학방송, 2021.10.5.: 132~144]
정부파견의사와 대한민국*
대한민국 정부가 해외협력사업의 하나로, 1968년부터 2008년까지 40년 동안 의료 환경이 매우 열악한 아프리카를 비롯한 개발도상국의 오지에 국비로 파견하여 의료 활동을 하였던 의사를 정부파견의사라 한다. 그들은 계약에 따라 수년 또는 30년 이상을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며 현지인들을 치료하였다. 총 파견의사수는 115명에 이른다.
의사를 요청한 수혜국에서는 건강증진과 삶의 질의 개선을 기대하였고, 우리나라는 의료 활동을 통하여 인도적 국제협력의 일환으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제고와 우호증진이란 민간외교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정부파견의사들은 한편으로 의료 활동으로 인도주의를 실천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간 외교활동도 활발히 수행하였다. 정부파견의사 사업은 1968년 서부 아프리카의 감비아를 최초로 니제르, 가봉, 코트디부아르에 본격적으로 의료단원을 파견하면서 시작되었다.
정부파견의사의 활동분야는 수혜국의 요청하는 분야가 대부분이고 수혜국에 병원관련 프로젝트형 사업이 원하는 경우 병원 운영에 필요한 분야의 의료단원을 파견하기도 한다. 구체적인 파견분야는 내과, 외과, 치과, 산부인과, 이비인후과, 방사선과, 소아과, 비뇨기과, 가정의학과, 신경과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으며, 1995년부터는 한의사도 파견하였다.
의료단 파견 사업은 2006년까지 10년이상 근무한 정부파견의사는 16개 국가에서 23명의 의료단이 활동하였으나 2007년 이후부터 파견희망 의료 인력의 부족현상이 나타났고, 2008년에는 10여명만 활동하였다. 또한 1995년부터 의료단 파견사업과 병행한 국제협력의사 제도를 통하여 의료인력 공급이 가능해짐에 따라 KOICA는 2008년 12월에 의료단 파견 사업을 종료하였다.
그 동안 정부파견의사의 역할이 막중하였는데, 이러한 제도의 폐지의 배경에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국내외적인 여건의 변화 때문이다. 내적으로는 파견 희망 의사의 감소와 관리문제, 국제협력사업의 종류가 다양하면서 협력사업간의 효율성 문제, 오지에서 일하는 정부파견의사는 협력의사보다 수혜계층이 한정되는 등 효율성에서의 재검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 이글은 <한국국제협력단(심의섭 외),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쳐들, 2011> 부록에서 발췌
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