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방언과 표준어와 문장
어느 말에든지 방언(方言)과 표준어가 있다. 방언이란, 언어학상으로는 얼마든지 복잡한 설명이 있겠지만, 쉽게 말하면 사투리다. 어떤 한 지방에서만 쓰는 (말소리로나 말투로나) 특색 있는 말이다.
“아매 계심둥.” (함경북도 지방)
“할메미 기시는기요.” (경상남도 지방)
“클마니 계십네께.” (평안북도 지방)
“할매 계시유.” (전라남도 지방)
“할머니 계십니까.” (서울지방)
이렇게 모두 다르다. 모두 다른 중에 어느 도(道) 사람이나 다 비교적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서울 지방 말인 ‘할머니 계십니까’다. 서울은 문화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지리로도 중앙지대다. 동서남북 사람이 다 여기에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서울말은 동서남북 말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또 동서남북 말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어느 편 사람 귀에도 가장 가까운 인연을 가진 것이 서울말이다. 서울말의 장점은 이것뿐이 아니다. 인구가 가장 많은 데가 서울이니까 말이 가장 많이 쓰이는 데도 서울이다. 그러니까 말이 다른 곳보다 세련되다. 또 제반 문물의 발원지이며 집산지이기 때문에 어휘가 풍부하다. 또 계급의 층하가 많고 유한(有閑)한 사람들의 사교가 많은 데라 말에 품위가 있기도 하다. 그러니까 어느 편 사람이나 다 함께 표준으로 삼아야 할 말은 무엇으로 보나 서울말이다.
그렇지만 서울말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조선어학회에서 표준어를 사정(査定)할 때 서울말을 본위로 하되 중류 이하, 이른바 ‘아래대 말’은 방언과 마찬가지로 처리한 것이다.
그런데 문장에서 방언을 쓸 것인가 표준어를 쓸 것인가는,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첫째, 널리 읽히자니 어느 도 사람에게나 쉬운 말인, 표준어로 써야겠고,
둘째, 같은 값이면 품위 있는 문장을 써야겠으니 품위 있는 말인 표준어로 써야겠고,
셋째, 말과 글의 통일이라는 큰 문화적 의의에서도 표준어로 써야할 의무가 문필인에게 있다 생각한다.
그러나 방언이 문장에서 전혀 문제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방언이 존재하는 날까지는 방언이 방언 그대로 문장에 나올 필요가 있기도 하다.
만날 복녀는 눈에 칼을 세워가지고 남편을 채근하였지만 그의 게으른 버릇은 개를 줄 수는 없었다.
“벳섬 좀 치워달라우요.”
“남 졸음 오는데 님자 치우시관.”
“내가 치우나요?”
“이십 년이나 밥 먹구 그걸 못 치워.”
“에이구 칵 죽구나 말디.”
“이년, 뭘.”
이러한 싸움이 그치지 않다가, 마침내 그 집에서도 쫓겨나왔다. 이전 어디로 가나? 그들은 하릴없이 칠성문 밖 빈민굴로 밀리어 나오게 되었다.
-김동인의 「감자」에서
여기서 만일 복녀 부부의 대화를 표준어로 써보라. 칠성문(七星門)이 나오고, 기자묘(箕子墓)가 나오는 평양 배경의 인물들로 얼마나 현실감이 없어질 것인가?
작자 자신이 쓰는 말, 즉 지문(地文)은 절대로 표준어일 것이나 표현하는 방법으로 인용하는 것은 어느 지방의 사투리든 상관할 바 아니다. 물소리의 '졸졸'이나 새소리의 '뻐꾹뻐꾹'을 그대로 흉내 내어 효과를 내듯, 방언 자체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요 그 사람이 어디 사람이란 것, 그곳이 어디란 것, 또 그 사람의 리얼리티를 여러 설명 없이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그들의 발음을 그대로 흉내 내는 것으로 봐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니까 어느 지방에나 방언이 존재하는 한, 또 그 지방 인물이나 풍정(風情)을 기록하는 한, 말소리를 흉내 내기 위한 효과로서 문장은 방언을 묘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아래대 예전에 서울 성안의 지역을 일컫는 말로, '우대'에 상대되는 곳. 그곳이 어딘지는 견해가 엇갈리는데, 동대문과 광희문 쪽이라는 설이 있음.
-이태준 『문장강화』 중에서
2025.3.15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