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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
본문 : 시 49:1-20
소설가 김홍신씨가 쓴 『인생사용 설명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김홍신씨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자신은 37년 6개월 동안 담배를 피웠다고 합니다.
폐암의 위험이 있거나 간접적인 살인행위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한 번쯤 끊어볼까 생각도 했지만, 원고를 쓸 때는 하루에 보통 서너 갑의 담배를 피웠다고 합니다.
얼마나 담배를 좋아했던지 ‘죽는 날에도 담배를 입에 물고 죽겠다’는 수필까지 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좋아하던 담배를 끊었습니다.
스승께서 던지신 한마디 말씀에 정신이 퍼뜩 들었기 때문이었답니다.
“쥐는 쥐약인 줄 알면 먹지 않는데, 사람은 쥐약인 줄 알면서도 먹는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성도님들 !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듣고 깨달아야 합니다.
듣고도 깨닫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이성 없는 짐승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면 어리석은 인생이 됩니다.
물론 깨달음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 어떤 사람은 보기만 해도 깨닫는 사람이 있고..., 듣고 난 다음에 깨닫는 사람도 있습니다. - 그러나 어떤 사람은 매를 맞고 난 다음에야 깨닫고, 재산 다 날리고, 몸에 병이 들고서야 깨닫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보여주고, 말하고, 심지어 매를 맞고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사야 1장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 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사 1:2-5) ........
하나님에게 매를 맞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백성.......
망하는 길로 가고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그들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책망한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도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호 4:14)...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귀를 기울이라’(호 5:1)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끝까지 깨닫지 못하다가 결국 바벨론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노아 홍수 때에는,.... 노아의 여덟 식구 외에 .......
모든 세상 사람들은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고......
애굽의 바로 왕도 10가지 재앙이 애굽 땅에 임하고 나서야 히브리인들, 하나님의 백성들을 겨우 놓아주었습니다. 웬만하면, 재빨리 눈치채고, 한두 가지 재앙이 임했을 때 깨달아야 했는데,.....
10가지 재앙으로 애굽이 초토화될 때까지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비극입니까?
심지어 죽은 다음에야 깨달은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 나오는...한 부자는 이 땅을 사는 동안에 날마다 호화로이 즐기다가 죽어 음부에 떨어지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후회하면서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사로를 세상에 보내
내 형제 다섯에게 증언해서 그들만이라도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눅 16:27-28)라고 외쳤지만..., 그것마저 거절당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렇게 지옥에 가서야 깨닫게 될 사람이 참으로 많지 않습니까?
오늘 시편 49편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듣고 깨닫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설교의 주제를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정했습니다. 같이 해볼까요?
이 시편 49편의 표제는 ‘고라 자손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이 언제, 어떤 배경으로 쓰여졌는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시편 37편이나 73편과 매우 비슷한 ‘교훈적인 시’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이 시편을 읽다 보면, 우리는 마치 전도서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세상 재물의 헛됨과 죽음 아래 있는 인생의 허무함에 대해 노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우선 본문 1-2절을 읽어라>
“뭇 백성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모두 귀를 기울이라 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여기에 보면 ‘뭇 백성들, 세상 거민들, 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모두가 다 들으라’고 말합니다. 왜 시편 49편은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라’, ‘다 들으라’고 했을까? ......
3절에 보면,.. 그것은 ‘이제부터 내 입은 지혜를 말하고, 내 마음은 명철을 생각하고....
내가 비유에 귀를 기울이고, 수금을 타면서 나의 오묘한 말을 풀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님들 ! 시편 49편이 말하려고 하는 지혜와 명철,
그리고 그가 풀이하려고 하는 오묘한 말... 즉 인생의 수수께끼는 무엇이겠습니까?
세상 재물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첫째, 시편 49편이 모두 귀를 기울이고 들으라고 하는 지혜, 그 오묘한 말이란 바로...
‘세상 재물은 결코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같이 해 볼까요? ‘세상 재물은 결코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 ....
본문 6절에 보면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세상에는 자기 재물을 의지하고 자기 부유함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재물이 많은 사람, 돈 많은 부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자기 권력, 자기 자랑으로 삼는 자’을 말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 큰 이슈가 되었던 것이 ‘갑질’이었습니다.
성도님들 ! 대체로 어떤 사람들이 갑질을 합니까? 지위가 높거나 돈 많은 사람입니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재물을 자기 권세와 지위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나는 다른 사람보다 재산이 많다’는 것을 자랑하고,.....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이 자기 사상이요, 자기 인생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정말 돈이 전부일까요? 아닙니다.
돈이 전부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돈의 힘을 믿는 사람들은 돈이 모든 것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돈으로 할 수 않는 일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피터 라이브스(Peter Lives)라는 미국 신학자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돈으로 사람(person)을 살 수는 있으나 그 사람의 마음(spirit)을 살 수 없다.
돈으로 호화로운 집(house)을 살 수는 있어도 행복한 가정(home)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최상으로 좋은 침대(bed)는 살 수 있어도 최상의 달콤한 잠(sleep)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지위(position)는 살 수 있어도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존경(respect)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좋은 약(medicine)은 살 수 있어도 평생 건강(health)은 살 수 없다...
돈으로 맛있는 음식(food)은 살 수 있지만, 마음이 동하는 식욕(appetite)은 살 수 없다.
돈으로 화려한 옷(clothes)은 살 수 있으나 내면에서 우러난 참된 아름다움(beauty)을 살 수는 없다....
돈은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돈만 가지고는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고 진정으로 만족스러운 것은 살 수 없다. 행복은 물질이 아니라 마음에서 온다.”
특히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49편은 다른 것은 몰라도......
‘죄의 문제’, ‘생명에 관해서’ 만큼은 결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본문 7-8절을 읽어라>.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라” .....
여기에 보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자기 형제를 구원할 수 없고, 속전을 바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 생명을 대신해서 바치는 벌금이나 부과금(출 21:30)....
- 남의 가축이나 물건을 훼손했을 때(출 22:10-12)......
- 종으로 팔린 친척을 다시 찾아올 때, 사용되는 돈(레 19:20)을 ‘속전’(코페르)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속전으로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생명을 속량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생명의 값이 너무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돈만 있으면 실력 있는 변호사를 사서, 무죄선고를 받거나 형량을 줄이기도 하고 죽을 사람, 살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하나님을 움직여서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돈으로 움직일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49편은 ‘아무리 대단한 부자라 하여도 하나님께 속전을 지불하고 생명을 속량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생명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생명을 속량하는 값은 너무 엄청나기 때문에, 평생 벌어도 다 마련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뭇 백성들’ ‘세상의 모든 거민들’ ‘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듣고 꼭 깨달아야 할 것은, 바로 ‘세상 재물로는 결코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49편이 말하려고 하는 지혜와 명철, 그리고 그가 풀이하려고 하는 오묘한 말... 즉 인생의 수수께끼는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시편 49편이 모두 귀를 기울이고 들으라고 하는 지혜, 그 오묘한 말이란 바로...
‘세상 재물은 결코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은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둘째, 시편 49편이 모두 귀를 기울이고 들으라고 하는 지혜, 곧 오묘한 말은...
‘인생이란 결국 죽음으로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같이 해볼까요? “인생이란 결국 죽음으로 끝이 난다!”
성도님들 ! 세상 재물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능력 있고, 지혜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죽음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 결국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9-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좀 길지만, 같이 읽습니다>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그는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 그러나 그들의 속 생각에 그들의 집은 영원히 있고 그들의 거처는 대대에 이르리라 하여 그들의 토지를 자기 이름으로 부르도다” ........
여기에 보면 ‘모든 인생은 죽음을 피하고 영원히 살 생각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돈 많은 부자라 할지라도, 지혜롭고 똑똑하다는 사람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땅을 차지하고는 자기 이름으로 등기하면서,... 속으로 이 집은,....
이 땅은 영원히 내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영원히 머물 곳은,.....
자기 이름으로 등기한 그 집, 그 땅이 아니라, 오직 무덤뿐이라는 것입니다.
간혹 부자들 중에는 돈만 있으면 죽지 않을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제정신이 있는 사람이면, 그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마치 자기는 죽지 않을 사람처럼.....
오늘이 계속될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9장 27절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경고합니다.
맞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실존이요, 운명입니다.
아무리 좋은 약을 먹어도, 좋다는 운동 다 해봐도 죽음 앞에는 장사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죽을 것이고, 그가 그토록 자랑하는 세상 재산 다 두고 가야 합니다.
저는 목사니까 임종을 앞둔 사람을 만날 기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아직 자기는 죽을 때가 아니다’ ‘다시 살 수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
‘나는 죽을 준비가 다 되었다’라고 하는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끝까지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살겠다고 몸부림칩니다.
오래전, 부교역자로 경찰병원에 심방하러 갔다가, 거기서 간암에 걸린 사람을 만났습니다.
복수가 배에 가득 차서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는데, 이분이 저를 붙들고는.....
‘목사님, 저 좀 살려주세요! 지금 죽으려니까 너무 억울해요. 평생 일만 하다가 20억 벌어 두었는데, 그것 하나 써보지 못하다고 죽다니... 정말 억울해요, 억울해요!“ .....
그런데 성도님들 ! , 그게 인생입니다.
그래서 본문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같이 읽어볼까요?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같도다” .....
여기에 보면, 사람을 ‘존귀하다’라고 밀합니다.
‘존귀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בִּיקָר(비카르)’라고 합니다. ‘매우 값진 존재’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고귀한 존재로 지었다고 말합니다.
다윗도 시편 8편에서...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 8:5)라고 노래합니다. 사람은, 짐승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존귀하게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제아무리 존귀하다고 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사람이나 미련한 짐승이나 다 똑 같습니다.
사람도, 짐승도, 결국 다 유한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래서 13-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
그들은 양 같이 스올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그들의 목자일 것이라... 그들의 아름다움은 소멸하고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되리라”
무슨 말입니까?
세상이 아무리 ‘네 자신을 믿으라’ ‘네 인생은 네 것이다’라고 해도,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자신을 믿는 인생, 자기 돈, 자기 주먹을 믿는, 어리석은 인생의 마지막은 שְׁאֹול, 스올(지옥)이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그런 인생의 끝은 양처럼 스올로 끌려가고, ‘죽음’이 그들의 목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이 무슨 큰소리를 치며, ‘자기 믿으라’고 어떻게 교만할 수 있겠습니까?
시편 49편이 말하려고 하는 지혜와 명철, 그리고 그가 풀이하려고 하는 오묘한 말... 즉 인생의 수수께끼는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시편 49편이 모두 귀를 기울이고 들으라고 하는 지혜, 그 오묘한 말이란 바로...
‘세상 재물은 결코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시편 49편이 모두 귀를 기울이고 들으라고 하는 지혜, 곧 오묘한 말은...
‘인생이란 결국 죽음으로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재물을 의지하지 말고 인생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셋째, 시편 49편이 모두 귀를 기울이고 들으라고 하는 지혜, 곧 오묘한 말은,..
‘그러므로 세상 재물 의지하지 말고,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같이 해볼까요? “세상 제물 의지하지 말고,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 두려워하지 말라!”
성도님들 ! 대부분은 사람은 죽으면 끝인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재물을 부러워하지 말고 죽으면 끝인 인생을 두려워하지 말고 ....
당당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아무리 돈 많은 부자라 할지라도 .....
죽음이 찾아오면 그 모든 것을 다 놓고 가야 하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본문 16-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여기를 보면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죽으면 끝인 사람, 돈을 많이 벌어도, 권력을 가졌어도, 명예를 얻고 성공했어도, 그런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 또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실제로는 불쌍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본문 15절 말씀입니다. 찾아서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
여기에 보면, 시편 49편의 저자는 너무나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나는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אַךְ 아크)’,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신다’....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주신다’라고 한 것입니다.
성도님들 ! 놀랍지 않습니까?
세상 재물도, 지혜롭다는 사람도 지옥의 권세에서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고 노래하던 시편 49편 저자는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내 목숨을 건져주시며, 스올의 세력에서 나를 건져 주실 것이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기에 나오는 ‘건져낸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יִפְדֶּה(이페데)’라고 하는데.....
이 말은 ‘값을 치르고 사 온다’는 의미, 즉 ‘구속하다’, ‘용서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도님들 ! 누가 우리를 구속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주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영생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저와 성도님들은 예수님을 주로 믿어 생명,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영생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육체의 생명이 끝나 죽는 순간, 모든 것이 다 무너지지만.....
우리는 아닙니다. 우리에겐 영생이 있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삽니다.
지옥? 가고 싶어도 못갑니다. 이미 끝났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는 죽음에 대한 생각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예수 믿은 우리에겐 죽음이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영생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기억이 납니다만, 1980년 3월 프랑스 파리의 부르셰 병원에 한 세기를 떠들썩하게 하던 최고의 지성인이라고 불리던 한 사람이 입원했습니다.
폐수종을 앓았던 그는 한 달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그 기간동안 자기를 돌보던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고함을 지르고,... 병문안 온 사람들에게도 욕설을 퍼부으며 발악했다고 합니다.
‘20세기 최고의 지성’이라는 이름에 전혀 걸맞지 않은 동물 같은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죽음의 공포에 빠져 짐승처럼 소리쳤던 이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실존주의 철학자 싸르뜨르 (Jean Paul Sartre)였습니다.
그가 죽고 난 후에 프랑스의 학자들과 신문들은 ‘대 철학자요 최고의 지성인 싸르뜨르가 왜 이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야 했는가? ........
과연 그가 그토록 주장하던 인간의 자유와 인간실존의 참모습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그때 한 무명의 독자가 싸르뜨르의 비참한 죽음에 대해 쓴 글이 한 신문사의 독자투고란에 실렸습니다. 이 글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싸르뜨르의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던 이유는 그에게는 돌아갈 본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 지방 신문도 그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싣고는 “심판의 하나님을 만난다는 사실이 싸르뜨르를 공포로 몰아넣고 그토록 죽음을 거부하게 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성도님들은 구원받았습니까?...
하나님이 성도님들을 영접하시고 죽음의 권세에서 건져주실 것을 믿습니까?
1934년에 태어난 루마니아 기독교 지도자, 요시프 톤 목사님은 차우셰스쿠 독재정권 하에서 비밀경찰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위협하였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최대 무기는 죽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최대 무기는 죽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겐 더 이상 죽음이 위협이 아닙니다.
누군가 ‘죽여버리겠다’라고 위협해도 우리는 끄떡없습니다.
그러니 평생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마귀에게 사로잡혀 사는 어리석은 삶을 살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 죽으면 사라져 버릴 것을 붙잡고 사는 것이 두려운 일이고......
- 죽으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부러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49편 마지막,.... 이 시의 결론은......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성도님들 !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어도, 그 재물이 죽음에서 우리를 건져주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재물이 자기를 구원할 줄 알고, ‘돈, 돈’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재물을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삶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재물보다, 죽음으로 끝나는 불쌍한 인생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