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혼한 오늘보다 내일이 더 무섭다
전소민
이혼한 날보다 그다음 날이 더 무섭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헤어지기로 결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견뎠을 텐데, 도장을 찍고 돌아서는 그날이 가장 아픈 날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살아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큰일이 일어난 날에는 오히려 정신이 없다.
울어야 하고, 누군가에게 설명해야 하고, 정리해야 할 것도 많다.
그러느라 슬픔조차 제시간에 찾아오지 못한다.
정작 무서운 것은 다음 날 아침이다.
눈을 떴는데 어제까지 곁에 있던 사람이 없고, 두 사람 몫으로 살아왔던 하루를 이제 혼자 살아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그래서 이별은 헤어지는 순간보다 그다음 날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삶에는 그런 일이 많다.
기쁜 일도 마찬가지다.
너무 기뻐서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일이 생겨도 그것이 나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마음대로 말할 수 없다.
**기쁨도 상대의 허락 없이 대신 발표할 수 없다.**
젊었을 때는 좋은 일은 많이 나눌수록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되었다.
사랑에도 예의가 있고, 기쁨에도 주인이 있다는 것을.
내게는 자랑하고 싶은 일이지만 상대에게는 아직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일 수 있다.
내가 축하라고 생각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부담일 수도 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슬픔만 지켜주는 일이 아니다.
그의 기쁨을 함부로 내 것으로 만들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세월이 흐르면서 또 이상한 변화가 생겼다.
예전에는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음 달에 만나면 되고, 내년에 만나면 되고, 시간이 나면 전화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사람을 만나고 돌아서면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 또 볼 수 있을까?’
그래서 보고 싶은 사람이 생긴다.
**다시 못 볼까 봐 보고 싶은 사람.**
그리움의 이유가 달라진 것이다.
젊은 날에는 좋아해서 보고 싶었다면 이제는 시간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다음을 허락할지 알 수 없어서 보고 싶다.
전화 한 통을 미루지 않게 되고,
“언제 한번 보자.”라는 말을 빈말로 하고 싶지 않아진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세월이 지나서야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참 많은 것을 요구한다.
왜 그것을 모르느냐고,
왜 그렇게 행동하느냐고,
조금만 더 어른스럽게 생각할 수 없느냐고.
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아이도 자기 나이를 처음 살아본다.
열 살은 처음이고, 스무 살도 처음이고, 마흔 살도 처음이다.
그런데 부모라고 다를까.
부모 역시 열 살짜리 아이의 부모가 처음이고, 스무 살 자식의 부모도 처음이다.
**아이도 자기 나이를 처음 산다.
부모도 처음 부모가 된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에게 서툴 수밖에 없었다.
나는 부모니까 당연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아이는 자식이니까 내 마음을 알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구도 연습하고 그 자리에 서지 않았다.
우리 모두 처음이었다.
그 사실을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서로에게 덜 화내고 조금 더 기다려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일도 그렇다.
평생 바쁘게 살던 사람에게 어느 날 갑자기 일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말한다.
“이제 편하게 쉬세요.”
맞는 말이다.
일을 잃으면 시간이 생긴다.
아침을 서두르지 않아도 되고, 약속 없는 오후를 가질 수도 있다. 창밖을 오래 바라보아도 아무도 재촉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 한쪽이 허전하다.
나는 오랫동안 나를 설명할 때 내가 하는 일을 말했다.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어디에서 일하는지,
무엇을 만들고 가르치고 책임지는지를 말하면 그것이 곧 나를 설명하는 말이 되었다.
그런데 일이 사라지고 나면 시간이 남는 대신 질문 하나가 남는다.
**“그 일을 하지 않는 나는 누구인가.”**
일을 잃으면 시간을 얻지만, 자신을 설명하던 말을 잃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다시 자신을 부르는 연습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누구의 아내도 아니고,
누구의 남편도 아니고,
누구의 엄마나 아버지도 아니고,
어느 직장의 누구도 아닌—
그냥 자기 이름 하나로 서는 연습.
생각해 보면 삶은 끊임없이 익숙한 이름을 내려놓는 일이었다.
만남이 있었고 이별이 있었다.
아이를 품었다가 놓아주었고,
일을 시작했다가 그만두었으며,
영원할 것 같던 사람들과 헤어졌다.
그리고 그때마다 내일은 조금 무서웠다.
오늘까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서운 것은 언제나 아직 살아보지 않은 내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아이도 자기 나이를 처음 살듯이
나 역시 지금의 내 나이를 처음 살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 조금 서툴러도 괜찮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보고 싶다고 말하고,
고마운 사람이 있다면 고맙다고 말하고,
누군가의 기쁨 앞에서는 한 걸음 물러나 그 사람이 먼저 말할 때까지 기다려주고 싶다.
그리고 어느 날 내가 나를 설명해주던 모든 이름을 내려놓게 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다.”가 아니라
**“나는 나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보다 내일이 무서운 것은
내일이 나빠서가 아니다.
아직 한 번도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일도 서툴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우리 모두는
자기에게 주어진 내일을
언제나 처음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
첫댓글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는 똑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도 나는 내일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