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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 객잔》
제19화 ― 두 명의 연호
검은 가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챙그랑.
가면 아래에서 드러난 얼굴을 본 순간,
객잔 안의 모든 사람이 말을 잃었다.
열두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
창백한 피부.
이마를 반쯤 덮은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연우를 닮은 눈매.
천 년의 세월을 살아온 흑월의 얼굴은 문 안에 갇힌 연호와 똑같았다.
다만 눈동자만 달랐다.
귀의 문 너머에서 연우를 바라보는 연호의 눈은 맑고 따뜻했다.
반면 흑월의 두 눈은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할 만큼 검었다.
흑월이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어느 쪽이 진짜인지 알겠느냐?”
문 너머에서 연호가 다급하게 외쳤다.
“형, 속지 마!”
“저건 내가 아니야!”
흑월은 연호의 목소리를 똑같이 흉내 냈다.
“형, 속지 마.”
“저건 내가 아니야.”
같은 목소리.
같은 얼굴.
같은 눈물.
연우는 두 소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 돌아온 기억 속 연호 역시 두 사람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 내리던 밤,
나무 검을 품에 안고 자신에게 기대던 소년.
형은 나 안 버릴 거지?
연우의 손끝이 떨렸다.
“둘 중 누가…”
백노인이 연우의 어깨를 붙잡았다.
“눈으로 보이는 것만 믿지 마라.”
흑월이 웃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을 생각이지?”
“기억?”
객잔 벽에 수많은 환영이 나타났다.
어린 연우와 연호가 함께 밥을 먹는 모습.
마당에서 장난치는 모습.
검은 비가 내리던 날 서로의 손을 붙잡고 도망치던 모습.
두 소년이 모두 같은 장면을 알고 있었다.
흑월이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연호가 좋아했던 음식도 안다.”
“아침잠이 많았다는 것도.”
“나무 검의 손잡이에 몰래 형의 이름을 새겼다는 것도 알고 있지.”
문 안의 연호가 외쳤다.
“그건 네가 내 기억을 훔쳤기 때문이야!”
“훔쳤다?”
흑월의 검은 눈동자가 문을 향했다.
“네가 버린 것을 내가 가졌을 뿐이다.”
“나는 아무것도 버리지 않았어!”
“분노를 버렸지.”
흑월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형이 손을 놓은 순간 느꼈던 원망.”
“천 년 동안 찾아오지 않은 형을 향한 증오.”
“세상이 네 존재를 잊었을 때의 절망.”
연호가 문을 세게 두드렸다.
쿵!
“거짓말하지 마!”
“나는 형을 원망하지 않았어!”
흑월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서 태어났을까?”
연호의 목소리가 멈췄다.
귀의 문에 퍼진 검은 금이 조금 더 짙어졌다.
묘묘는 흑월과 문 안의 소년을 번갈아 살폈다.
두 존재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놀랍도록 비슷했다.
영혼의 결.
기억의 파동.
심지어 연우를 바라볼 때 일어나는 미세한 떨림까지 같았다.
그러나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문 안의 소년에게서는 귀의 문의 황금빛 기운이 흘렀다.
흑월에게서는 천검성군의 푸른 검기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묘묘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상합니다.”
설화가 물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흑월에게서 주인님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연우가 흑월을 바라보았다.
“내 기운이?”
묘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동생이기 때문에 닮은 것이 아닙니다.”
“천검성군의 검기와 기억이 흑월의 영혼 깊은 곳에 섞여 있습니다.”
백노인이 부러진 검을 들어 흑월을 겨누었다.
“천검성군의 힘을 훔쳤느냐?”
흑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부정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풍백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문 안의 아이가 연호이고.”
“흑월이 그 아이의 원망이라면.”
“왜 흑월에게 천검성군의 기운이 있는가?”
청아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혹시…”
모두가 청아를 바라보았다.
청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흑월이 연호 오빠의 그림자가 아니라.”
“연우 주인님의 그림자면요?”
객잔 안이 조용해졌다.
흑월의 검은 눈동자가 청아에게 향했다.
어린 소녀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웃음이 사라졌다.
묘묘가 낮게 중얼거렸다.
“주인님의 그림자…”
흑월이 손을 들어 올렸다.
검은 기운이 칼날처럼 청아를 향해 날아갔다.
“청아!”
천휘의 황금 방울이 스스로 울렸다.
딸랑!
황금빛 장막이 청아 앞을 막았다.
검은 칼날이 장막과 충돌하며 폭발했다.
콰앙!
청아의 작은 몸이 뒤로 밀려났다.
백노인이 그녀를 받아 냈다.
“괜찮으냐?”
청아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설화는 즉시 흑월 앞을 막아섰다.
붉은 검기가 검날을 타고 피어올랐다.
“아이에게 손을 대다니.”
흑월이 차갑게 말했다.
“쓸데없는 추측을 했을 뿐이다.”
설화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쓸데없는 추측이라면 그렇게 다급히 막을 이유가 없겠지.”
흑월의 표정이 굳었다.
귀의 문이 크게 흔들렸다.
문의 중앙에서 귀(歸)와 멸(滅)의 글자가 계속 뒤바뀌었다.
귀.
멸.
귀.
멸.
두 글자가 바뀔 때마다 객잔 전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묘묘가 문 아래의 세 홈 앞에 앉았다.
“시간이 없습니다.”
그는 천(天)의 나무패와 황금 열쇠,
설화의 붉은 보석을 차례로 살폈다.
“문의 주인을 바꾸려면 세 열쇠로 의식을 열어야 합니다.”
연우가 물었다.
“연호를 새로운 주인으로 세우면 구할 수 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문 밖으로 데려오는 것은 아닙니다.”
묘묘가 귀의 문을 바라보았다.
“연호의 영혼을 문과 분리한 뒤 객잔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청아가 눈을 깜빡였다.
“그럼 연호 오빠가 객잔에서 살 수 있어요?”
“육신을 가진 인간처럼은 아닐 겁니다.”
“어쩌면 문을 지키는 영혼이 되거나.”
“객잔의 결계 안에서만 모습을 유지할 수도 있습니다.”
연우는 잠시 침묵했다.
문 너머에서 연호가 말했다.
“그것만으로도 괜찮아.”
연우가 문 가까이 다가갔다.
“괜찮지 않아.”
“형.”
“천 년을 갇혀 있었는데 이제 또 문을 지키라고 할 수는 없어.”
연호가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밖의 세상을 기억하지 못해.”
“객잔 안에서 형을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해.”
연우의 눈빛이 흔들렸다.
설화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먼저 의식의 대가가 무엇인지 들어야 합니다.”
연우도 묘묘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필요하지?”
묘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황금빛 눈동자에 망설임이 떠올랐다.
백노인이 낮게 말했다.
“숨기지 마라.”
“주인이 된다는 것은 이름과 존재를 얻는 일입니다.”
묘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려면 연호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증거가 필요합니다.”
풍백이 물었다.
“연우의 기억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평범한 기억은 문이 이미 먹어 치웠습니다.”
“더 강한 기억이 필요합니다.”
“어떤 기억이지?”
묘묘는 연우를 바라보았다.
“형제가 함께했던 기억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
객잔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연우가 담담하게 물었다.
“그 기억을 의식에 사용하면 어떻게 되지?”
“완전히 사라집니다.”
“다시는 떠올릴 수 없습니다.”
“연호도?”
“두 분 모두 잊게 됩니다.”
문 너머의 연호가 외쳤다.
“안 돼!”
연우는 문에 손을 댔다.
“괜찮아.”
“안 괜찮아!”
연호의 목소리가 울음으로 흔들렸다.
“형은 이제야 나를 기억했잖아.”
“그런데 또 잊으면…”
“전부 잊는 것이 아니야.”
연우가 부드럽게 말했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 하나뿐이야.”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잖아!”
연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제 막 돌아오기 시작한 기억들은 여전히 조각나 있었다.
어떤 날이 가장 행복했는지,
연호와 무엇을 했을 때 가장 많이 웃었는지 알 수 없었다.
묘묘가 두 손을 모아 황금빛 술식을 만들었다.
“의식이 시작되면 기억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두 분의 영혼이 가장 소중히 간직한 순간이니까요.”
흑월이 낮게 웃었다.
“흥미롭군.”
“다시 동생을 구하기 위해 동생과의 기억을 버리겠다?”
연우가 그를 바라보았다.
“기억이 없어져도 연호는 연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흑월의 발밑에서 검은 안개가 퍼졌다.
“기억이 없다면 관계도 없다.”
“함께 웃었던 날도.”
“약속도.”
“사랑도 사라지지.”
흑월의 시선이 설화를 향했다.
“이미 한 번 경험했을 텐데.”
연우의 표정이 굳었다.
설화를 향한 마음의 이름과 연결을 잃었을 때,
연우는 그녀를 소중한 손님으로만 바라보았다.
기억은 남아 있었지만 마음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흑월이 속삭였다.
“연호와의 가장 행복한 기억을 내놓는 순간.”
“너는 저 아이를 동생이라 믿을 이유를 하나 잃는다.”
문 안의 연호가 말했다.
“그래서 하지 말라는 거야.”
연우는 눈을 감았다.
“그래도 해야 해.”
“형!”
“기억 때문에 네가 동생인 것이 아니야.”
연우의 목소리는 단단했다.
“내가 잊고 있던 천 년 동안에도 너는 내 동생이었어.”
연호의 울음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기억하고 싶어.”
“형과 행복했던 순간을.”
연우가 작은 미소를 지었다.
“새로 만들면 돼.”
설화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말은 얼마 전 연우가 자신에게 했던 말과 같았다.
잃어버린 마음은 다시 만들겠습니다.
처음부터.
연우가 문을 향해 말했다.
“객잔을 되찾은 것처럼.”
“다시 함께 밥을 먹고.”
“다시 웃고.”
“이번에는 네가 아침에 늦잠을 자도 혼내지 않을게.”
연호가 울면서 웃었다.
“그건 진짜야?”
“노력해 볼게.”
청아가 작게 말했다.
“안 혼내겠다는 말은 아니네요.”
백노인이 청아의 머리를 가볍게 눌렀다.
“이럴 때는 그냥 넘어가라.”
묘묘가 세 개의 홈에 열쇠를 올려놓았다.
첫 번째 홈에 천(天)의 나무패가 들어갔다.
우우웅!
푸른빛이 문 전체로 번졌다.
두 번째 홈에는 청아가 황금 열쇠를 넣었다.
딸랑!
황금 방울이 울리며 요계의 기운이 객잔을 감쌌다.
마지막 홈 앞에서 설화가 붉은 목걸이를 풀었다.
연우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겠습니까?”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설화는 붉은 보석을 홈 위에 올렸다.
“또 혼자 모든 대가를 감당하려는 것은 아닙니까?”
“기억 하나뿐입니다.”
“기억은 사람을 만드는 일부입니다.”
연우가 조용히 대답했다.
“사람을 만드는 것이 기억뿐은 아니라고 방금 배웠습니다.”
설화는 잠시 연우를 바라보았다.
“끝나고 나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핑계로 책임을 피하지 마세요.”
연우가 눈을 깜빡였다.
“무슨 책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설화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역시 아직 멀었군요.”
그녀는 붉은 보석을 마지막 홈에 밀어 넣었다.
콰아앙!
세 개의 빛이 동시에 솟아올랐다.
천장의 들보 사이로 거대한 원이 펼쳐졌다.
푸른빛.
황금빛.
붉은빛.
세 빛이 귀의 문 앞에서 하나의 의식진을 만들었다.
묘묘가 연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인님.”
“의식진 중앙에 서십시오.”
연우는 망설이지 않고 빛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발밑에 어린 연우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문 너머에서는 어린 연호의 그림자가 마주 섰다.
두 형제 사이로 가느다란 빛의 실이 이어졌다.
묘묘가 주문을 외웠다.
“잊힌 이름을 부르고.”
“지워진 존재를 기억하며.”
“돌아오지 못한 자에게 돌아갈 곳을 내어 준다.”
귀의 문의 글자가 밝게 빛났다.
귀(歸).
“형제의 기억을 증거로 삼아.”
“문의 주인을 새로 세운다.”
연우와 연호의 머리 위로 수많은 기억 조각이 떠올랐다.
비 오는 날.
나무 검.
낡은 밥상.
봄꽃이 피던 산길.
연호의 손을 잡고 시장을 걷던 날.
열이 난 연호를 업고 의원을 찾아가던 밤.
서로 하나뿐인 떡을 반으로 나눠 먹던 모습.
모든 기억이 빛나는 거울처럼 허공에 펼쳐졌다.
연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잊고 있던 삶이었다.
천검성군이 되기 전.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의무도,
월령을 잃은 슬픔도 없었던 시절.
그저 동생과 하루하루 살아가던 어린 형의 삶.
“이렇게 많았구나.”
연우가 중얼거렸다.
문 너머의 연호도 기억들을 바라보며 울고 있었다.
“나도…”
“다 잊고 있었어.”
기억 조각들이 천천히 움직였다.
의식진은 두 형제의 영혼 깊은 곳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찾기 시작했다.
빛들이 하나씩 어두워졌다.
불타는 마을의 기억이 사라지고,
아픈 날의 기억도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남은 기억 하나가 두 사람 사이에 떠올랐다.
작은 초가집.
눈이 많이 내리던 겨울밤이었다.
어린 연우는 낡은 화로 위에서 국수를 끓이고 있었다.
면은 굵기가 제각각이었고,
국물은 지나치게 짰다.
어린 연호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밥상 앞에 앉아 있었다.
“형.”
“왜?”
“이거 먹어도 안 죽어?”
어린 연우가 국자를 들고 연호를 노려보았다.
“먹기 싫으면 굶어.”
연호는 급히 젓가락을 들었다.
“먹을게.”
소년은 조심스럽게 국수를 한입 먹었다.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연우가 불안하게 물었다.
“맛없어?”
연호는 잠시 입안의 국수를 씹었다.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맛있어.”
“거짓말.”
“진짜야.”
“얼굴이 이상하잖아.”
“뜨거워서 그래.”
연호는 그릇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형이 처음 만들어 준 국수니까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어린 연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다음에는 더 맛있게 만들어 줄게.”
“내일도?”
“내일도.”
“모레도?”
“모레도.”
“평생?”
어린 연우가 웃었다.
“그래.”
“평생 만들어 줄게.”
두 형제가 눈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국수를 먹었다.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화로의 불도 약했고,
바람은 낡은 문틈으로 계속 들어왔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함께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던 밤.
연우는 그 기억을 바라보며 숨을 삼켰다.
천하제일 객잔에서 국수를 만들기 시작한 이유.
누구에게 배웠는지도,
왜 국수를 끓일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지도 몰랐다.
모든 것은 그날에서 시작되었다.
동생에게 평생 국수를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던 밤.
문 너머의 연호가 울면서 말했다.
“이 기억은 안 돼.”
연우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 기억이 사라지면,
연우는 자신이 왜 요리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영원히 알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천검성군의 검보다 오래된 기억.
객잔 주인 연우를 만든 최초의 마음이었다.
묘묘의 목소리가 떨렸다.
“주인님.”
“이 기억이 제물로 선택되었습니다.”
연우가 눈을 감았다.
설화가 그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의식진의 빛이 막아섰다.
“다른 기억으로 바꿀 수 없습니까?”
묘묘가 고개를 저었다.
“두 영혼이 함께 가장 행복하다고 여긴 기억이어야 합니다.”
연우가 허공의 기억을 바라보았다.
어린 연호의 웃음.
서툰 국수.
평생 함께하자는 약속.
손을 뻗으면 닿을 듯 선명했다.
연우가 기억을 향해 손을 올렸다.
“가져가십시오.”
“형!”
연호가 문을 세게 두드렸다.
“그 기억이 사라지면 형이 국수 만드는 이유도 잊을 수 있어!”
연우가 웃었다.
“이유를 몰라도 만들 수 있어.”
“객잔도 달라질 수 있어!”
“그러면 다시 배우면 돼.”
연우가 기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네가 옆에서 맛을 봐 줘.”
“싫으면 맛없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연호가 울며 외쳤다.
“그때도 맛있었어!”
“국물이 너무 짰잖아.”
“그래도 맛있었어!”
연우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고맙다.”
그의 손끝이 기억 조각에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잠깐.”
설화의 목소리가 의식진을 가르며 울렸다.
연우의 손이 멈췄다.
설화는 의식진이 아니라 흑월을 바라보고 있었다.
흑월은 객잔 구석의 어둠 속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연호와 완전히 같았다.
그러나 기억 속 어린 연호의 모습이 나타난 순간부터,
흑월의 왼쪽 눈 아래에 희미한 푸른 문양이 생겨나고 있었다.
작은 검 모양의 흉터.
설화가 그 흔적을 가리켰다.
“저 얼굴.”
모두의 시선이 흑월에게 향했다.
흑월이 본능적으로 손으로 흉터를 가렸다.
설화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연호의 기억 속에는 저 흉터가 없습니다.”
백노인이 흑월을 바라보았다.
“흉터 하나가 무엇을 뜻하지?”
“저것은 흉터가 아닙니다.”
설화가 검을 들어 흑월의 얼굴을 가리켰다.
“검혼인입니다.”
묘묘의 황금빛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천검성군이 자신의 기억을 봉인할 때 사용했던 표식…”
연우는 흑월을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에 또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월령을 봉인한 뒤.
천검성군은 무너진 사당 앞에 홀로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머리에 손을 얹고 푸른 검기로 기억을 잘라 냈다.
동생의 손을 놓쳤던 순간.
동생의 울음.
문을 열지 못한 무력감.
그리고 가장 깊은 죄책감.
천검성군은 그 기억을 견딜 수 없었다.
이 기억이 남아 있으면 나는 다시 문을 열 것이다.
그는 잘라 낸 기억을 검은 달이 비치는 우물 속에 버렸다.
푸른 기억 조각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작은 눈이 떠졌다.
연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내가…”
흑월이 소리쳤다.
“보지 마라!”
검은 기운이 폭발했다.
설화가 붉은 검기로 그것을 막아 냈다.
“역시 맞군.”
그녀가 흑월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 사람은 연호의 그림자가 아닙니다.”
흑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설화가 분명하게 말했다.
“천검성군이 버린 기억입니다.”
객잔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문 너머의 연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형이 버린… 기억?”
묘묘는 흑월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을 다시 살폈다.
이제야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다.
흑월이 연호의 모든 기억을 알고 있는 이유.
연우를 증오하면서도 끊임없이 집착했던 이유.
천검성군의 검기와 연호의 감정을 동시에 가진 이유.
“천검성군이 잘라 낸 기억 안에는 연호에 대한 모든 것이 들어 있었습니다.”
묘묘가 천천히 말했다.
“사랑도.”
“죄책감도.”
“아이를 구하지 못한 분노도.”
풍백이 흑월을 바라보았다.
“그 기억이 오랜 세월 무명겁의 기운을 먹고 하나의 존재가 된 것이군.”
백노인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면서 자신을 연호의 원망이라 믿게 된 것이고.”
흑월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의 목소리가 거칠게 떨렸다.
“나는 연호다.”
설화가 차갑게 말했다.
“아니.”
“당신은 연호를 잊기 위해 천검성군이 버린 상처다.”
흑월의 검은 눈동자가 분노로 번뜩였다.
“입을 다물어라!”
그가 손을 휘둘렀다.
수십 개의 검은 칼날이 설화를 향해 날아갔다.
연우가 의식진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빛의 벽이 그를 막았다.
“설화 씨!”
설화는 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붉은 검기가 반달처럼 퍼지며 검은 칼날들을 부쉈다.
콰콰쾅!
백노인과 풍백, 묘묘도 설화의 앞에 섰다.
청아는 황금 방울을 높이 들었다.
“설화 언니 혼자 아니에요!”
황금빛 장막이 모두를 감쌌다.
흑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희가 무엇을 안다고!”
그의 몸에서 푸른빛과 검은빛이 동시에 폭발했다.
“나는 천 년 동안 저 아이를 기다렸다.”
“저 아이 때문에 고통받았다.”
“저 아이를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했다!”
문 안의 연호가 조용히 말했다.
“아니.”
흑월이 문을 돌아보았다.
연호의 얼굴에는 두려움 대신 슬픔이 떠올라 있었다.
“너는 나를 구하려 한 게 아니야.”
“네가 버려졌다는 사실을 인정받고 싶었던 거야.”
흑월의 몸이 흔들렸다.
“닥쳐.”
“형이 나를 잊은 만큼.”
“세상도 형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기를 바랐어.”
“닥쳐!”
“그래야 네가 혼자가 아니니까.”
흑월이 귀의 문을 향해 검은 기운을 쏟아 냈다.
콰아앙!
문 전체에 거대한 금이 갔다.
귀(歸)의 글자가 멸(滅)로 바뀌기 시작했다.
묘묘가 외쳤다.
“의식이 무너집니다!”
연우와 연호 사이를 이어 주던 빛의 실이 검게 물들었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 흔들렸다.
눈 내리던 밤의 초가집이 검은 불길에 휩싸였다.
어린 연호가 들고 있던 국수 그릇이 깨졌다.
“안 돼!”
연우가 기억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흑월이 웃었다.
“그 기억은 내 것이다.”
“네가 버렸던 모든 기억은 내 몸을 만들었다.”
연우가 흑월을 노려보았다.
“내가 버린 것이니 네가 태어난 것은 맞다.”
흑월의 표정이 잠시 멈췄다.
연우는 계속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가짜라는 뜻은 아니다.”
설화와 묘묘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흑월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슨…”
“기억에서 태어났든.”
“그림자에서 태어났든.”
연우가 손을 내밀었다.
“천 년 동안 생각하고 선택하며 살아왔다면 너도 하나의 존재다.”
흑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를 불쌍히 여기지 마라.”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다.”
연우는 고개를 저었다.
“책임지려는 거다.”
“네가 내 버려진 기억이라면.”
“너를 만든 사람은 나니까.”
흑월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의 검은 얼굴에 처음으로 두려움이 떠올랐다.
“다가오지 마라.”
연우는 의식진 안에서 흑월을 향해 손을 뻗었다.
“너는 연호가 아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도 아니다.”
“이름이 없다면 새로 지으면 된다.”
“과거가 없다면 지금부터 만들면 되고.”
흑월이 머리를 움켜쥐었다.
“닥쳐…”
“객잔에는 갈 곳 없는 손님도 받아들인다.”
“나는 손님이 아니다!”
“그럼 객잔 식구가 되어도 된다.”
흑월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폭발했다.
“입을 다물어!”
그의 분노와 함께 귀의 문이 크게 흔들렸다.
문 안쪽에서 무명겁의 기운이 솟아올랐다.
수천 개의 검은 손이 연호의 몸을 붙잡았다.
연호가 비명을 질렀다.
“형!”
연우가 문으로 달려갔지만 의식의 빛이 그를 붙들었다.
묘묘가 외쳤다.
“지금 의식을 중단하면 문이 완전히 멸문으로 변합니다!”
설화가 물었다.
“기억을 제물로 바치면 막을 수 있습니까?”
“현재 상태에서는 부족합니다.”
“흑월 역시 같은 기억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묘묘의 얼굴이 굳었다.
“한 개의 기억을 두 존재가 붙잡고 있습니다.”
풍백이 말했다.
“그렇다면 기억을 누구에게 줄지 정해야 한다는 뜻인가?”
흑월이 손을 뻗었다.
“내게 내놓아라!”
문 너머의 연호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필요 없어!”
흑월이 연호를 노려보았다.
“네가 무엇을 안다고!”
연호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말했다.
“형과 행복했던 기억은 사라져도 돼.”
“형이 나를 다시 찾아왔다는 지금의 기억이 있으니까.”
흑월의 표정이 굳었다.
연호의 말은 자신과 정반대였다.
흑월은 과거의 기억을 붙잡기 위해 천 년을 살아왔다.
연호는 앞으로 만들 기억을 위해 가장 행복했던 과거를 놓으려 하고 있었다.
연우는 눈 내리던 밤의 기억을 바라보았다.
그 기억 속 어린 자신이 연호에게 말했다.
평생 국수를 만들어 줄게.
연우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이 기억을 제물로 쓰지 않겠습니다.”
묘묘가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의식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과거의 기억으로 연호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기 때문에 흑월도 그 기억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겁니다.”
연우는 문 너머의 연호를 바라보았다.
“연호가 앞으로 존재할 증거를 만들겠습니다.”
풍백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앞으로의 기억을 어떻게 제물로 쓰지?”
연우가 객잔을 둘러보았다.
불에 그을린 식탁.
뒤집힌 의자.
금이 간 그릇.
검은 기운에 오염된 화로.
그러나 여전히 그곳은 그들이 함께 지켜 낸 객잔이었다.
연우가 말했다.
“약속을 제물로 쓰겠습니다.”
묘묘의 눈이 커졌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기억을 문에 맡기겠다는 겁니까?”
“귀의 문은 세상에서 사라진 존재를 되돌리는 문이라고 했지.”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겁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실패하면 주인님의 미래 일부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설화가 연우를 바라보았다.
“어떤 미래를 내놓으려는 겁니까?”
연우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문 안의 연호에게 말했다.
“연호.”
“응.”
“객잔으로 오면 무엇을 하고 싶어?”
연호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눈을 깜빡였다.
“나는…”
그는 문 너머로 객잔을 바라보았다.
“형이 만든 국수를 먹고 싶어.”
연우가 웃었다.
“다른 것은?”
“청아랑 놀고 싶어.”
청아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제가 객잔 구경 다 시켜 줄게요!”
“백 할아버지 술도 숨길래.”
백노인이 기침했다.
“그것은 하지 않아도 된다.”
“풍백 아저씨한테 부적도 배우고.”
풍백이 자랑스럽게 가슴을 폈다.
“아주 훌륭한 선택이군.”
설화가 차갑게 말했다.
“먼저 제대로 된 부적부터 배우십시오.”
연호가 웃었다.
“묘묘 형 꼬리도 다시 만져 보고 싶어.”
묘묘의 표정이 굳었다.
“그 부분은 의식에서 제외하십시오.”
마지막으로 연호는 설화를 바라보았다.
“설화 누나는…”
설화가 물었다.
“저는 무엇을 해 주면 됩니까?”
연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형이 이상한 짓 하면 혼내 줘.”
설화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건 이미 하고 있습니다.”
연우가 조금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그렇게 자주 이상한 짓을 합니까?”
모두가 동시에 연우를 바라보았다.
연우는 대답을 포기했다.
잠시나마 객잔 안에 따뜻한 웃음이 번졌다.
연우는 그 순간을 마음에 담았다.
“이것을 증거로 삼겠습니다.”
그가 귀의 문에 손을 올렸다.
“연호가 이 객잔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갈 미래.”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우리가 반드시 만들 기억.”
문 중앙의 귀(歸) 자가 황금빛으로 빛났다.
묘묘가 놀라 외쳤다.
“문이 약속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연우와 연호 사이를 잇던 검은 실이 다시 금빛으로 변했다.
눈 내리던 과거의 기억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대신 아직 존재하지 않는 장면들이 나타났다.
객잔 식탁에 함께 앉아 국수를 먹는 연호.
청아와 마당을 뛰어다니는 모습.
백노인의 술병을 숨기고 웃는 모습.
묘묘의 꼬리를 잡았다가 혼나는 모습.
연우와 함께 주방에서 면을 뽑는 모습.
미래의 기억들이 귀의 문을 감싸기 시작했다.
흑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안 돼.”
그는 그 미래 안에 없었다.
연호에게는 돌아갈 객잔이 생겼지만,
흑월은 여전히 문밖에 홀로 남아 있었다.
“나는…”
흑월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어디로 가지?”
연우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래의 장면 속에 손을 뻗었다.
객잔 구석의 빈 의자 하나.
연우는 그 의자를 식탁 가까이 끌어왔다.
“자리 하나 더 놓으면 됩니다.”
흑월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나까지…”
“연호의 자리를 빼앗지 않는다면.”
연우가 말했다.
“당신의 자리도 만들겠습니다.”
흑월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발밑에서 무명겁의 검은 기운이 솟아올랐다.
수천 년의 원한은 그가 망설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검은 손들이 흑월의 몸을 휘감았다.
문을 열어라.
세상을 지워라.
너를 버린 모든 것을 없애라.
흑월이 머리를 움켜쥐었다.
“조용히 해…”
연우가 손을 내밀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흑월은 연우의 손을 바라보았다.
한 걸음.
그가 천천히 앞으로 움직였다.
그 순간,
검은 손 하나가 흑월의 가슴을 꿰뚫었다.
흑월의 눈이 크게 떠졌다.
문 안의 무명겁이 그의 몸을 강제로 끌어당겼다.
“안 돼!”
연호가 외쳤다.
흑월의 몸이 귀의 문을 향해 날아갔다.
연우가 의식진을 뚫고 달려 나왔다.
“잡아!”
설화가 연우의 허리를 붙잡았고,
백노인이 설화의 팔을 잡았다.
묘묘와 풍백, 청아도 서로의 몸을 붙잡았다.
연우의 손이 흑월의 손목을 붙잡았다.
흑월은 놀란 얼굴로 연우를 바라보았다.
“왜…”
연우는 이를 악물었다.
“객잔의 손님을 문 앞에서 잃을 수는 없습니다.”
“나는 네 적이다!”
“방값과 식사비는 나중에 받겠습니다.”
흑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울음인지 웃음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문 안의 연호도 흑월의 다른 손을 붙잡았다.
두 명의 연호가 처음으로 서로의 손을 잡았다.
문 안의 소년이 말했다.
“너는 내가 아니야.”
흑월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연호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나 때문에 태어났다면…”
“너도 내 형제일 수 있어.”
흑월의 눈에서 검은 눈물 한 방울이 흘렀다.
“형제…”
그 순간,
귀의 문의 글자가 눈부시게 빛났다.
연우.
연호.
그리고 흑월.
세 사람의 손이 하나로 이어졌다.
묘묘가 외쳤다.
“지금입니다!”
“문의 새 주인을 정하십시오!”
연우는 문 안의 연호를 바라보았다.
연호는 흑월을 바라보았다.
흑월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주인이 될 수 없다.”
“왜?”
연호가 물었다.
“나는 돌아가고 싶은 곳이 없다.”
연우가 손에 힘을 주었다.
“방금 만들었습니다.”
흑월이 연우를 바라보았다.
미래의 환영 속 객잔 식탁.
빈 의자가 하나 더 놓여 있었다.
흑월의 입술이 떨렸다.
그러나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객잔 아래 깊은 곳에서 거대한 목소리가 울렸다.
세 명의 주인은 허락되지 않는다.
귀의 문이 검게 변했다.
황금빛 문 중앙에 세 개의 이름이 떠올랐다.
연우.
연호.
흑월.
그 아래에 새로운 문장이 새겨졌다.
한 사람만이 돌아갈 수 있다.
청아가 얼굴을 굳혔다.
“또 선택하라는 거예요?”
풍백이 이를 악물었다.
“이 문은 정말 성격이 고약하군.”
묘묘는 문장을 살피다 얼굴이 창백해졌다.
“문의 법칙이 아닙니다.”
“무명겁이 마지막으로 개입하고 있습니다.”
문 안에서 검은 파도가 솟아올랐다.
수천 개의 눈이 일제히 떠졌다.
무명겁의 본체가 세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연우가 돌아오면 두 동생이 사라진다.
연호가 돌아오면 연우와 흑월이 사라진다.
흑월이 돌아오면 지금의 세상이 사라진다.
세 사람의 발밑에 각각 다른 문이 열렸다.
설화가 검을 들었다.
“선택하지 마세요!”
무명겁의 웃음이 객잔 아래에서 울려 퍼졌다.
선택하지 않으면 모두 사라진다.
연우는 연호와 흑월의 손을 놓지 않았다.
“또 같은 방식이군.”
흑월이 힘겹게 물었다.
“무엇이?”
“두 가지나 세 가지 선택만 내놓고.”
연우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다른 길이 없다고 믿게 만드는 것.”
연호가 울면서 웃었다.
“형은 또 세 번째 방법을 찾으려는 거야?”
“이번에는 네 번째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어.”
흑월이 처음으로 아주 작게 웃었다.
“정말 오만하군.”
연우도 웃었다.
“자주 듣습니다.”
세 사람의 손이 더욱 단단히 맞잡혔다.
무명겁의 검은 파도가 그들을 삼키기 시작했다.
마지막 순간,
설화는 귀의 문 위쪽에서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작은 글자를 발견했다.
첫 번째 객잔 주인이 남긴 문장이었다.
돌아가는 자가 하나라면, 돌아갈 곳이 문이 되어라.
설화의 눈이 크게 떠졌다.
“연우!”
검은 파도가 세 사람의 허리까지 올라왔다.
설화가 문장을 가리키며 외쳤다.
“사람을 고르는 것이 아닙니다!”
“객잔 자체를 귀의 문의 주인으로 세우세요!”
연우가 고개를 들었다.
객잔 전체가 낮게 울렸다.
오래된 기둥과 화로,
식탁과 처마의 방울에서 따뜻한 빛이 피어올랐다.
천 년 동안 수많은 이에게 돌아갈 곳이 되어 준 장소.
천하제일 객잔.
연우의 눈에 희망이 떠올랐다.
그가 두 사람의 손을 붙잡은 채 외쳤다.
“귀의 문의 새로운 주인은…”
검은 파도가 세 사람을 완전히 삼키기 직전,
연우의 목소리가 객잔을 울렸다.
“천하제일 객잔이다!”
다음 화 예고
제20화 ― 돌아갈 곳
귀의 문의 새로운 주인으로 선택된 천하제일 객잔.
문은 연호와 흑월을 모두 받아들이려 하지만,
두 존재가 동시에 객잔으로 돌아오려면 하나의 육신이 필요하다.
청아가 요계의 비술로 몸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 순간,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월령이 깨어나 뜻밖의 진실을 밝힌다.
“연호에게는 이미 몸이 있어요.”
“천 년 전, 누군가 그 아이의 육신을 문 밖으로 빼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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