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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행, 바람처럼 흐르다 원문보기 글쓴이: 초승달
흔히 사용하는 불교 용어의 원래의 의미
苛責과 呵責 ; 苛責이란 몹시 꾸짖는다는 의미이며 呵責이란 불교에서 나온 단어로 스님들이 수행하다가 잘못을 저지르면 여러 대중 스님 앞에서 죄를 낱낱이 고하고 응분의 벌을 받는다는 의미로 ‘양심의 呵責을 느낀다.’ 혹은 ‘그것은 呵責 받을 일이다’ 등으로 사용된다. 呵責 받은 스님에게는 여러 가지 자격이 박탈되며 근신해야 할 규약이 있다.
覺悟(각오) : 모르고 있던 것을 깨달아 앎. 미망에서 벗어나 진리를 깨침.
甘露 ; ‘甘露 같은 물’ 혹은 ‘甘露처럼 내린 생명의 샘’ 등으로 쓰이는 이 말은 “하늘에서 내리는 영약인 달콤한 이슬”이란 뜻이다. 또한 忉利天(도리천)에는 달콤한 영액이 있는데 이 액체를 마시면 괴로움이 없어지고 장수한다고 전한다. 그래서 감로는 不死酒(불사주)로 번역된다. 일종의 천신의 음료인 것이다.
감로(甘露) ; 예로부터 임금님이 훌륭한 정사를 베풀게 되면 하늘에서도 단 이슬이 내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부처님의 교설이 중생에게는 단 이슬, 즉 감로인 것이다. 법미(法味)가 중생의 몸과 마음을 기르는 것이기에 감로에 비유한 것이다.
감로는 천신들의 음료(天酒)이기 때문에 도리천에 있는 영약으로서 한 방울만 먹으면 온갖 괴로움에서 해방될 수 있으며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이야기 하는 甘露茶, 甘露水 하는 것은 부처님 앞에 올리는 찻물이나 깨끗하고 시원한 맛의 물을 말하는 것이다.
開眼(개안) : 불상을 조성하여 點眼(점안)함.
乾達 ; 乾達이란 하릴없이 빈둥대며, 아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모르는 것도 없이 허풍을 잘 떠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乾達의 어원 : 건달의 어원은 불교의 건달바(乾闥婆)에서 유래되었다. 乾闥婆는 須彌山의 남 쪽 金剛窟에 사는 하늘나라의 신이다. 건달은 고기나 밥 등의 음식은 먹지 않고 香을 먹고살며, 허공을 날아다니면서 노래를 즐긴다. 즉 건달은 건달답게 살아갈 수 있는 조건과 습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一部에서는 건달을 ‘中有의 人間’으로 보는 해석이 있다. 불교의 전문용어에 ‘四有’라는 용어가 있다. 四有란 태어나서 살고 있는 生命을 ㅡ‘本有’ㅡ 죽는 것을 ㅡ‘死有’ㅡ 사람이 죽어서 다음 生을 받기까지의 기간을 ㅡ‘中有’ㅡ 본유 때 지은 業에 따라서 生命을 받는 것을 ㅡ‘生有’ㅡ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건달은 확실성이 전혀 없는 불안한 존재이며 虛空 중에 뜬 存在일 뿐만 아니라 香을 먹고산다는 說 때문에 신도들은 지나치게 香에 집착한다.
말하자면 고급의 香을 많이 피워서 건달의 환심을 사려는 신도가 많다. 그러나 좋은 香을 먹었다고 건달이 좋은 生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살아 있을 때 지은 業이다. 前生의 業에 따라 來生이 결정되는 것이다. 건달의 속성이 이러하니 우리는 이 세상을 결코 건달처럼은 살지 말아야 할 것이다. 前生, 來生을 믿든 아니든, 現在에 最善을 다하는 것보다 아름답고 보람된 것은 다시없기 때문이다.
乞粒(걸립) : 佛事의 비용을 얻기 위해 화주에 나섬
乞網 (걸망) ; ‘걸망’이란 스님들이 拔羽(발우)․木鐸(목탁)․經典(경전)․대로는 施主(시주)받은 供養物(공양물)을 담아 등에 메고 다니는 일종의 背囊(배낭)이다. 걸망이라는 단어가 ‘걸’자로 시작했고 대개 스님들이 托鉢(탁발)할 때 쓰는 것을 본 사람들이 걸망을 걸식할 때 쓰는 망태기로 착각하는 예가 많다. 이는 철저한 착각이고 오해이다.
걸망 하나에 생계를 依託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스님들의 행각을 불교 전문 용어로 萬行이라고 한다. 만행은 탁발과 함께 스님들의 수행의 중요한 과정으로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전국을 이리저리 다니면서 많은 경험을 쌓고,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듣고, 많은 어려움을 몸소 겪음으로써 일반인들이 겪는 고통이 무엇인지를 직접 보고 경험함으로써 참다운 스님이 되어보자는 의도로 만행을 한다.
걸식(乞食) ; 건강과 목숨을 유지하기 위하여 밥을 얻어먹는 것을 보통 걸식한다고 한다. 본래 걸식행위는 부처님의 생존 당시부터 있었던 스님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수행의 한 가지 방식이었다.
걸식은 집집마다 다니면서 먹을 것을 얻어내는 행위로서 거기에는
첫째, 아집과 아만을 버리는 뜻이 있으며,
둘째는 보시하는 이의 복덕을 길러주는 공덕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걸식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으나, 지금도 태국에서는 아침 5시에 예불이 끝나면 발우를 들고 거리에서 탁발 걸식을 한다고 한다. 그러면 불자들은 준비해 두었던 음식물을 들고 나와서 스님의 발우에다가 공손히 담아 준다. 탁발은 한 집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몇 집이고 다녀서 절에 가져가면 공양주가 아침식사로 골고루 배분해 준다.
스님을 걸사(乞士)라고 하는데 이는 밥을 빌어서 몸을 기르고, 또 한 법을 빌어 부처님의 혜명(慧明)을 이어나간다는 뜻에서 연유한 말이다.
結緣(결연) : 불보살이 인간 세상에 나타나서 사람들로 하여금 불법과 인연을 맺게 함.
苦生門과 三苦 四苦 八苦 ; 고생이란 어렵고 괴롭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苦란 무엇인가? 苦의 개념에 깊게 파고들어 그 원인과 결과 그리고 苦를 떠나는 길에 대하여 완벽한 정리를 한 종교가 불교다.
불교는 근본적으로 四聖蹄(사성제)부터 시작한다.
사성제란 苦(고)․集(집)․滅(멸)․道(도)의 네 가지 근본 진리다.
삼고란 苦苦(고고) - 육체적 고통, 壞苦(괴고)-즐거운 것이 하나하나 무너져 가는 것을 당하는 고통 및 行苦(행고) - 일체의 無常하기 때문에 오는 괴로움을 말하는데 무상이란 항상 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는 변하기 때문에 생긴다. 이것이 삼고이다.
四苦란 生老病死가 苦라는 것이다. 즉 生苦, 老苦, 病苦 및 死苦를 말한다.
八苦란 생로병사의 四苦에 愛別離苦(애별리고), 怨憎會苦(원증회고), 求不得苦(구부득고) 및 五陰盛苦(오음성고)의 넷을 더한 고다.
愛別離苦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거나 좋아하는 것이 하나하나 줄어들거나 떠나가는 괴로움이다. 연인과의 헤어짐은 애별리고이겠지만 존경하는 스승과의 사별도 별리의 고이며 평생 몸 던져 노력하던 직장을 떠남도 별리의 고이고 사랑하는 후배와의 헤어짐도 別離苦이다.
怨憎會苦란 밉고 憎惡(증오)스러운 상대와 자주 만나는 고통이다. 그러나 미운 사람이 누구이며 증오할 대상이 누구인가? 끝내는 내 마음이 미우면 남이 밉고, 내 마음이 증오에 익숙하면 모든 사람이 증오의 대상이 된다. 증오는 나의 책임이다.
求不得苦란 구하는데 얻지 못하는 고통이다. 재산도 탐이 나고 영예도 탐이 난다. 그래서 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출세의 가도를 달린다. 이런 모든 것이 구부득고만을 더해 줄뿐이다. 구하는 것을 탓할 수 없겠지만 욕심을 줄이면 고통이 적다. 욕심을 버리면 큰마음의 樂을 얻는다.
五陰盛苦란 몸뚱이가 왕성하기를 바라는 데서 오는 고통이다. 五陰이란 五蘊(오온)의 다른 표현으로 色(색)․受(수)․想(상)․行(행)․識(식)의 다섯 구성 요소이다. 오온이 왕성하기를 바라는 것은 人之常情이다. 그러나 지나친 健康慾이 문제가 된다.
苦의 원인은 한마디로 慾心이다. 욕심이 있으면 집착이 생기며, 집착은 번뇌를 낳는다. 번뇌가 생기면 가슴이 터질 듯한 아픔이 생기고 머리가 터질 듯한 아픔이 겹친다. 苦의 원인은 따라서 잘못된 욕심이고 진리에 대한 迷惑(미혹)이다. 미혹이 지은 업은 끝내 苦를 만들뿐이다.
工夫(공부)하는 바른 법 ; 흔히 공부란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것만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어머니의 태속에서 나와 말을 배우고 문자를 익히기 시작하면 ‘공부해야 한다.’ ‘공부하라.’ ‘공부해야 산다.’ 등의 곤혹을 매일처럼 받는다. 공부는 경쟁을 수반하고 입학시험이 공부 경쟁의 대표적인 경우가 되었다. 입시 지옥을 돈으로 피해 보려는 잘못된 시도나 대리 시험, 입시 부정 등 일련의 잘못된 공부는 공부의 참 뜻을 모른 데서 시작된다.
공부의 유래는 불교에서 말하는 做工夫(주공부)에서 비롯된다. 즉, ‘공부를 하다’함은 불도를 열심히 닦는다는 뜻이다. 불도를 닦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특히 공부라는 용어를 즐겨 쓰는 수행법은 參禪(참선)이다. 그래서 禪家(선가)에서는 참선에 진력하는 것을 “공부한다.”라고 말한다.
공양(供養) ; 절에서 식사시간이 되면 "공양하세요"라고 한다. 밥을 먹는 행위를 공양한다고 하는 것이다. 공양은 資養한다는 뜻이다. 음식, 옷 따위를 준다는 것이다. 옛날부터 부처님께 향을 피워 올리고, 차나 꽃을 바치는 것을 공양한다고 했다. 또한 절에서 밥, 죽 등을 짓는 소임을 맡고 있는 사람을 공양주라고 한다.
또는 三寶에 재물을 시주하는 사람, 시주하기를 권하는 사람, 그러한 공양을 받아내는 사람 등을 공양주라고 하기도 한다. 부처님께 바치는 공양물은 신선한 것, 즉 첫 수확에서 얻어진 첫물이 제일 좋다고 하였다. 받은 선물도 일단 부처님전에 올렸다가 먹는 것이 예의라고 한다. 물은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해주기에 부처님 앞에 바치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첫 새벽에 샘물을 길어다가 석존 앞에 바친 다음 자기들도 마셨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처님 전에 공양하는 것은 깨끗한 것이면 무엇이나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觀心과 關心 ; ‘내게 관심을 가져 주십시오.’ ‘그렇게 관심이 없을 수가 있습니까?’ ‘그는 이 일에 관심이 깊다’라는 경우에 사용되는 관심은 ‘마음을 둔다.’ ‘생각을 간직하고 대한다.’등으로 사용된다. 이 때의 관심은 한자로 빗장 관(關)자 關心을 말한다. 반면 관심에는 볼 觀(관)자를 사용한 觀心이 있다. 문자 그대로 ‘마음을 관찰하여 본다.’라는 말이다.
관조(觀照) ; 일반화된 불교 용어 중 대표적인 불교 말이다. 본래의 뜻은 지혜로써 사리(事理)를 관찰하고 밝게 깨친다는 뜻이다.[俱舍論] 그런 의미에서 에술 작품을 주관적인 견해 없이 관찰하거나 미술의 아름다움을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지적인 미의식(美意識)의 직관(直觀)을 뜻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인생을 관조하다>와 같이 사색적인 뜻으로 많이 쓰이는 말이다.
觀察(관찰) : 사리를 밝게 보고 살핌.
광배(光背) ; ‘부처님의 위대함을 빛으로 표현’ 부처님의 몸에서 나는 신령스럽고 밝은 빛을 형상화 한 것으로 후광(後光)·신광(身光)·광염(光焰)이라고도 한다. 불상을 만드는 규범인 32상 80종호에는 “한길이나 되는 빛이 비친다.”라는 항목이 있는데 이것을 형상화한 것이 광배로서, 부처님의 신비함과 위대함을 장엄하기 위해 발산되는 빛을 표현한 것이다.
종류에는 머리에서 발산하는 빛을 형상화한 머릿광배[頭光]와 정신에 서 발산하는 빛을 형상화한 전신광배[身光]가 있다.
머릿광배는 간다라 불상에서 많이 유행한 형식으로, 처음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원반 (圓板)모양으로 표현되었다가 보리수잎이나 연꽃무늬·불꽃무늬·당초무늬 등을 장식한 화려한 모양으로 변신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의 불상 가운데 선방사삼존불상(禪房寺三尊佛像)이나 삼화령미륵삼존불상(三花嶺彌勒三尊佛像)의 머릿광배 등에서 나타나며, 통일신라 시대에 이르면 보주형(寶珠形) 머릿광배 등으로 보다 다채롭게 진전된다.
전신광배는 거신광배(擧身光背)라고도 하는데, 불상의 윤곽에 따라 광배를 표현한 것이다. 종류는 두 가지로서, 하나는 불상을 구획하는 구조물과 비슷하며, 그 안에 머릿광배와 신체광배를 표현한 것이다. 또 하나는 순수한 전신광배로서 머릿광배와 신체광배가 겹쳐서 표현된 것과 하나로만 표현된 것이 있다.
교만(橋慢) ; 자신을 높게 평가해 반성함이 없음. 지금은 <騎慢>이라고 쓰고 있으며, 잘 아는 바와 같이 교만 떨다가는 언제고 큰 코 다친다든가, 교만한 사람 치고 성공하는 사람 없다든가, 벼는 익을수록 머리를 숙인다는 말이 있듯이 교만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삼가야 할 마음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탁발을 한다든가 만행(萬行)을 함으로써 교만심을 없애고 하심(下心)하는 수행을 한다.
잡아함경 출요경(出曜經), 불소행찬(佛所行讚), 유가론(瑜伽論), 유마경, 무량수경 등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말이다. 뜻은 지금 쓰이는 것처럼 스스로를 높다고 생각하고 남을 깔보는 마음, 즉 잰 체 하고 뽐내며 방자함을 일컫는 말이다.
옛적 대승의장(大乘義章: 수나라 혜원이 지은 일종의 불교 용어 사전)에 [스스로를 높이어 남을 능가함이니 이를 교만이라 한다.] 구사론에는 [마음이 높아 반성하는 바가 없다]고 했다. 또 법화경 서품에 석존께서 막 법화경을 설하시려고 할 때 5백의 무리가 퇴장하는 장면이 벌어진다. 이때 석존께서 이들을 <증상만>(增上慢)이라 하시었다. 즉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 하는 교만함을 일컬으신 것이다.
또 법화경 상불경보살품(第二十)에는 상불경이라는 보살이 지위의 높고 낮음, 귀천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을 만나는 대로 합장하고 [나는 그대를 존경합니다]하고 합장 예배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상대가 때리거나 욕을 해도 여전히 합장 배례하고 [나는 그대를 존경합니다]라고 했다니 이 보살이야말로 하심의 본보기라 하겠다.
현대인들은 너무 교만하다. 고도의 기계문명 덕으로 편리한 생활을 하게 되고, 우주여행을 하게 되자 대자연 대우주에 대한 외경심이 없는 교만함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모름지기 현대인은 우서 대자연에 대해 하심하고 내 이웃에 대해 하심하고 나 자신에 대해 하심 하는 겸손을 배워야겠다. 교만 역시 번뇌의 씨앗임을 알아야 한다.
敎化(교화) : 敎導感化(교도감화)의 준말. 남을 타일러 바른 길로 인도함.
극락(極樂) ; 흔히 행복하고 안락한 곳을 표현할 때 의례 극락이라는 표현을 쓴다. 극락의 참된 뜻은 잘 몰라도 막연하나마 좋은 곳, 이상적인 곳이라는 것은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막연하나마 누구나 부러워하는 극락이란 과연 어떤 곳인가.
여기 좀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극락이란 범어 sukhavati라는 말(행복이 있는 곳)의 한역이다. 사바세계에서 서쪽으로 10만 억 국토를 지난 곳에 아미타여래의 국토가 있으며 그 곳은 모든 것이 원만하고, 생사, 춥고 더움, 근심 걱정 등의 모든 괴로움이 전혀 없는 세계라고 한다.
사바세계의 서쪽에 있는 청정국토(淸淨國土)라고 해서 서방정토라고도 한다. 또 이 곳에 왕생(往生)하는 사람은 그 근거에 따라 상품상생(上品上生),상품중생(上品中生),상품하생(上品下生),중품의 상중하생, 하품의 상중하생 등 9등급으로 나뉘어 진다고 한다. 그래서 구품정토(九品淨土)라고도 한다.
아미타경에 극락세계의 광경이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다. [극락국토에는 칠보로 된 연못이 있어 항상 여덟 가지 공덕수가 넘쳐흐르고 그 못 바닥에는 순금 모래가 곱게 깔려 있으며 연못에 있는 사방의 계단은 금, 은, 유리, 파려 등으로 만들어져 있고, 연못 위의 누각 역시 금, 은, 유리, 파려, 자거, 적주, 마노 등으로 화려하고 장엄하게 지어졌으며, 연못 수면에는 수레바퀴만한 청색 연꽃, 황색 연꽃, 적색 연꽃, 백색 연꽃들이 아름답게 피어 미묘한 향내를 은은하게 내뿜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극락의 광경은 지극히 황홀하고 그 곳의 생활 모습은 실로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극락이니 지옥이니 하는 것이 중생을 교화, 제도하기 위한 방편(方便)이긴 하지만 불교에서는 윤회설과 관련된 불가결의 요소이다. 또 불교를 떠나서도 인간의 도덕관을 확립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今生(금생) : 현재 살고 있는 기간. 前生 今生 來生을 三生이라고 함.
奇別(기별)과 消息(소식), 그리고 授記(수기) ; 불교에서는 奇別이란 부처님이 제자들의 수행이 무르익었음을 인가해 줄 때 기별은 준다. 기별을 주면서 부처님은 제자가 성불할 때 부처님의 이름이 무엇일 것이며 부처님의 수명은 몇 살일 것인가를 밝혀 준다. 그런 뜻에서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奇別(기별)이 소식을 전한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消息이란 ‘禪(선)을 한 끝에 부처님으로부터 내려오던 한 소식을 얻었다.’라는 말은 成佛道(성불도)의 지시판을 얻었다는 말을 뜻한다.
授記를 얻는다 함은 성불한다는 것이다. 부처님 시대에 이루어진 수기, 또는 기별이 요즘 禪房(선방)에서는 흔히 ‘한 소식’ 얻었다는 표현으로 바뀌어 사용된다.
奇特(기특) : 매우 드물고 특이함.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온 일을 말함.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 흔히들 불교를 익살스럽게 표현할 때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한다. 물론 그 뜻을 알고 하는 말은 아니고 하도 들어서 하는 말인 것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를 익살맞게 표현하거나 비아냥거릴 때 <아멘>이라고 하듯이, 그리고 우리나라 속담에 [10년 공부 도로 아미타불]이라는 말도 있다.
이 나무아미타불은,[아미타 부처님께 귀의 합니다]라는 뜻이며, 수행의 한 방법으로 아미타 부처님을 마음으로 생각하면서 되풀이 외는 염불(念佛)이다. 무릇 불교를 믿는 길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력(自力)신앙이고 또 하나는 타력(他力)신앙이다. 자력신앙이 스스로의 힘으로 깨달음을 얻고 구제되려는 데 반하여, 타력신앙은 불. 보살의 힘을 빌어 구제되고자 하는 신행의 길이다. 대개 자력으로는 힘에 부치니까 타력에 의지하는 길을 가게 되는데 이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도 타력신앙을 할 때 외는 염불이다.
이 사바세계의 서쪽으로 10만억 불토를 지나면 극락정토가 있으며 그 곳을 주재하는 부처가 바로 아미타불이라고 한다. 이 부처님은 오랜 옛적 과거세에 48 가지의 큰 원을 세웠는데 그 하나가,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가장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최고의 이상국을 세우는 일이고, 또 하나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자신과 함께 성불(成佛)하게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오랜 세월 ㅡ 한 마디로 세월이라고 하지만 실은 몇 천 겁(劫 ; 1 겁은 인간세상의 4억 3천 2백 만년)의 세월이다 ㅡ 수행한 끝에 성불하여 지금의 극락정토를 이룩하였다고 한다.
아미타경에 [만약 어떤 사람이 아미타경을 듣거나, 아미타불의 이름을 듣기만 해도 모든 부처의 옹호를 받고 깨치게 되며, 또 아미타국에 태어나기를 지극하게 원하면 아미타국에 태어나게 되며, 또 단 하루라도 아미타불의 명호를 일심불란(一心不亂)지극하게 믿고 외우면 임종 때 아미타불께서 여러 성중(聖衆)을 보내어 아미타 극락국토로 데려간다......]고 했다.
다기(茶器) ; ‘헌다 의식용 佛具’ 차를 담아서 부처님 전에 올리는 헌다의식(獻茶儀式)에 사용되는 불구, 흙으로 만든 토제 다기에서 시작해 구리와 상감청자와 같은 예술적 작품으로 발전했으나, 지금은 대부분 유기제품으로 제작되고 있다. 형태는 대부분 뚜껑이 있는 잔에 받침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청자 다기의 경우 뚜껑이 없이 잔 받침 위에 연화 형태의 잔을 갖춘 예도 많다.
맑고 신성한 성품의 차는 불교의 6공양물(향, 등불, 차, 꽃, 과일, 음식)의 하나. 따라서 다기는 향로·촛대·화병 등과 함께 불단 위에 빠져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불구이다. 부처님께 차를 올릴 때는 다기를 왼쪽 어깨 위에 눈높이 정도로 올려서 들고, 차를 부처님 앞에 올린 후에는 반배를 하고 뒤로 조용히 물러난다. 다기를 올리는 자리는 부처님 앞의 중앙에 있는 향로의 왼쪽이다. 또 차를 올리고 나면 대중이 다함께 다게(茶偈)를 염송한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대표적인 다기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청자탁잔’과 ‘청자상감국화문탁잔’ 등이 있으며 찻잔을 들고 있는 석굴암 문수보살상과 청량사의 보살상, 법주사 희견보살이 머리에 이고 있는 큰 석조헌다기 등은 불교의 차 공양 정신을 드러내고 있는 대표적 유물이다.
茶飯事(다반사)와 喫茶去(끽다거) ; 다반사는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등의 흔히 있고 흔히 생기는 일을 말한다. 본래는 항다반(恒茶飯), 항다반사이지만, 줄여서 다반사라고 한다. 이 말은 선종(禪宗)에서 나온 말인데, 참선 수행을 하는 데 유별난 어떤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즉 차 마시고 밥 먹고 잠자고 하는 이른바 행주좌와(行住坐臥)가 그대로 선이라는 뜻으로 쓰게 된 데서 비롯된 말이다.
다시 말해서 석존께서 설한 만고의 진리인 불법도 그 어떤 특별한 데, 예컨대 하늘이니 극락이니 하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생활 가운데 있다는 매우 심오한 뜻이 포함되어 있는 말이다. 흔히 불법을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하겠다. 그렇다. 진리는 평범한 데 있고, 우리의 일상생활이 그대로 불법인 것이다.
우리들은 옛날부터 밥을 먹은 다음엔 차를 한 잔 마시는 여유를 가졌다.
우리나라와 인도, 스리랑카, 중국은 차를 즐겨 마셨는데 질적으로 현저한 차이가 있다. 인도 등지의 물은 흐리고 독기가 있어 그냥 마시면 장기에 치명적인 해를 준다. 그래서 그들 지역에서는 물을 끓여 먹었는데 차 잎을 넣어 끓이면 흙탕물이 지닌 독한 냄새를 지울 수 있었기에 차(茶) 문화가 발달하게 된 것에 비해 우리나라는 여유와 道를 음미하는 의미에서 차를 즐겼다.
‘다반사의 일’을 ‘존경해서 드리는 마음’으로 승화시킨 예가 ‘茶禮(차례)’다. 우리는 한해가 시작되는 날에 조상의 얼 앞에 모여 경건히 밥을 드리고 차를 올린다. 이를 ‘차례’라고 한다. 한 해의 농사가 끝나고 수확을 거둔 뒤 감사의 마음을 위해 차를 다려 조상에 드린다. 그래서 추석이란 명절이 생겼다.
이런 모든 것은 차와 밥, 이를테면 다반사가 禮(예)의 本을 이룬 것이다. 다반사는 道를 이루기도 했다. 차를 마시는 정신과 태도와 정성을 모으면 나름대로의 道를 이룬다는 의미에서 차를 道라고 한다. 근래에는 茶道(다도)와 茶禮(차례)가 잘 구별되지 않는 것 같다.
茶禮는 형식이 우선 이고 茶道는 정신의 道를 추구한다. 불교에서는 茶禪一如(다선일여)라 하여 차 마시는 정신에 禪이 있고 禪하는 과정에 茶의 道가 통한다는 뜻이다. 趙州(조주) 從諗(종심) 스님은 다반사의 일을 禪으로 승화시킨 큰스님이시다.
從諗(종심) 스님의 喫茶去(끽다거) 화두는 널리 알려져 있다. 스님께서는 처음 온 사람에게나 두 번 온 사람에게나 열 번 온 사람에게나 ‘차드시지요.’라고 말하셨다. 시중을 들던 시봉 스님이 보니 궁금하여 그 연유를 물었다. 이에 조주 스님이 웃으며 “그럼 자네도 차 한 잔 마시지(喫茶去).” 하셨던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去는 ‘가다’로 해석하면 그 본의의 해석에 오류가 생긴다. 즉 ‘자 한잔 마시고 가지⋯.’로 해석이 되는 것이다. 去는 어조사로서 ‘가다’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합시다, ~하죠, ~할까요’로 풀어야 한다.
조주 종심 스님이 누구에게나 차 한 잔을 권한 깊은 뜻은 첫째, 차의 平等, 둘째, 평상의 일이 佛事(불사)이고 平常心(평상심)이 佛心임을 몸소 보인 것이다. 차의 평등에는 맛의 평등, 시간의 평등, 공간의 평등 그리고 마시는 사람의 평등이 있다.
다반사의 일이 사라지는 오늘 草衣(초의) 선사의 詩가 새로워진다.
無底鉢擎重香飯 (무저발경중향반) 밑 없는 밥그릇에 향기로운 밥이 가득하다.
沒根耳聽無言說 (몰근이청무언설) 고막 없는 귀로 말하지 않은 말을 듣는구나.
다비(茶毘) ; 시신을 화장함. 순수한 불교말로서 일상용어는 아니다. 그러나 근래 여러 고승들이 입적(入寂 ; 돌아가시다)했을 때 불교 의식에 따라 화장을 하게 되자 일반의 화제가 됨으로써 다비라는 말이 귀에 익게 되었다. 다비란 [화장]의 인도말이다. 팔리어의 jhapeti(연소시키다)의 음역이다.
석존께서 입멸(入滅)하기 전에 제자들이 돌아가신 뒤의 장례법을 여쭈어 보았을 때, 석존께서는 [왕 중 왕의 장례법으로 지내라, 금관에 넣어, 갖가지 향나무로 다비(화장)을 하라]고 유언한 이래 불교에서는 화장하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아마 우리나라도 불교가 전해진 이후부터 화장법이 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인도에는 매장법이 거의 없으며, 일본은 불교가 전해진 이후부터 화장을 하게 되어 옛 문헌에 천황들도 화장을 하는 등 세계적으로 인도 다음가는 화장국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가톨릭 신자들도 화장을 하고 있다. 지금 일본의 수도인 동경지역에서는 매장이 허가되지 않을 정도이다. 우리나라 국토 관리 면으로나 보건위생의 측면에서나 하루 속히 매장법을 지양해야 할 형편이지만 아직 유교적인 전통관념 때문에 쉬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근년에 이르러 국민들의 인식이 많이 달라져서 납골당도 몇 군데 건립되었고 또 건립하고 있다고 한다. 서구에서는 영국이 화장을 많이 하고 있고 소련과 미국이 그 다음가는 화장국으로서 이들은 유골을 공중이나 바다에 뿌리거나 묘지에 묻고 그 위에 화단을 만들기도 한다. 종교에 따라 매장을 고집하는 것은, 육체의 재생을 믿고 신이 재림할 때까지 보존하려는 원 때문인데 이제는 이런 전근대적인 사고에서 과감히 탈피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단말마(斷末魔) ; [단말마에 직면했다.] 이는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또 <단말마의 비명>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숨이 끊어지도록 고통스러움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렇듯 사람의 임종이나 죽음과 직결된 처절함을 표현할 때 주로 쓴다.
단말마란 본래 불교 말이다. 말마(末摩, 이때는 魔가 아님)는 범어 marman의 음역으로서 이 곳이 닿으면 즉사하는 급소(死穴, 死節)라는 뜻이다. 옛 인도 의학에서는 사람의 전신에는 이 마르만이 10곳 있다고 하며, 이 곳을 자르면(斷) 격심한 고통을 일으키고 즉사한다고 했다. 이때의 비명이 바로 [단말마의 비명]인 것이다. 그래서 마르만(末摩)을 끊는(斷) 고통을 <단말마>라고 하며 격심한 신체적 고통, 임종 등을 표현하는 말로 쓰게 된 것이다.
달의 비유 11가지 ; 농경 사회에 오랫동안 살아온 우리 민족은 달과 많은 관계를 맺고 있다. 세월의 흐름을 달의 기울고 참에 준거해 계산했다. 이것이 ‘달력’ 또는 ‘月曆(월력)’이다. 달을 보며 그 해의 농사를 점치기도 한다.
보름달이 붉으면 가뭄과 폭염이 예상되고 달이 맑으면 풍년에 태평성대가 된다고 한다. 달이 진하면 그 해는 풍년이 들고 달이 흐리면 흉년이라고도 한다. 달이 인간의 운세와 연관을 갖고 있다는 생각은 예로부터 많았다.
불교는 달을 둥글고 가득 찬 마음 즉 ‘圓滿心(원만심)’의 비유로 보거나 사물의 實相(실상), 밝고 맑은 마음자리, 수행이 완숙한 인품으로 상징시켜 본다. 달이 변화에서 그 해의 길흉․ 풍년․ 흉년을 예견하는 것은 불교의 경우 “正法念處經(정법염처경)”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1. 能破癌乳 (능파암유) ㅡ 달이 어둠을 거두어 가듯 부처님의 가르침과 佛法을 法力은 인간의 마음속에 잠든 無明의 어둠을 제거해 준다는 뜻.
2. 令見道非道喩 (영견도비도유) ㅡ 佛法의 八正道(팔정도)ㅡ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각, 바른 노력, 바른 명상, 바른 인생 경영을 향해 가는 길을 환히 밝혀 아는 것은 어두운 숲 속에 환한 달이 비춰 갈 길을 찾게 하는 것. 즉 달이 밝으면 가야 할 길(道)과 가지 말아야 할 길(非道)을 알 수 있다. 먼 길을 가다가 이라 갈 것인지 저리 갈 것인지를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달이 뜨면 갈 길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뜻을 令見道非道喩라고 한다.
3. 令見道邪正喩 (영견도사정유) ㅡ 달이 높이 뜨면 나쁜 길과 좋은 길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진리는 이와 같다. 불법은 고생으로 떨어진 행위와 쉽게 인간 완성을 얻을 길을 가르쳐 준다. 달의 이 같은 비유를 달의 令見道邪正喩라고 한다.
4. 除鬱蒸得淸凉喩 (제울증득청량유) ㅡ 달이 밝게 솟으면 암울하고 축축한 대지도 맑고 삽상해진다. 인생을 살면서 바라는 대로 되지 않고 욕심이 차지 않음으로써 오는 신경질과 짜증으로 곰팡이 쓴 마음이 많다. 이런 마음의 어둠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 한 마디가 가슴에 닿으면 어둠에 달이 뜨듯 그 어둠이 환히 걷히는 것이다. 불법이 갖고 있는 이와 같은 능력과 달의 모습을 비유하여 이른 말이 除鬱蒸得淸凉喩이다.
5. 破壞螢光高心喩 (파괴형광고심유) ㅡ 佛法이 세상에 높이 뜨면 작은 진리의 소리는 더 이상 위력을 뽐낼 수 없다. 사자가 없는 숲에는 토끼가 주인 노릇을 하겠다고 나선다. 그러나 사자가 나와 한 번 소리치면 숲은 조용해진다. 그래서 부처님의 법을 獅子吼(사자후)라고 한다. 달과 부처님의 이런 비유를 일러 破壞螢光高心喩라고 한다.
6. 息盜賊想喩 (식도적상유) ㅡ 도둑도 달 밝은 밤은 쉰다고 한다. 盜心이 일어도 달이 지기를 기다려 도둑질을 한다. 달은 도둑질하고 싶은 마음을 없애 준다. 불법이 차면 마음의 도둑이 사라진다. 마음의 도둑은 번뇌와 망상이다. 망상은 미혹한 어둠의 마음자리에서 깨달음의 菩提種字(보리종자)를 훔친다. 달과 도둑, 불법과 번뇌 망상과의 비유를 息盜賊想喩라고 한다.
7. 除畏惡獸心喩 (제외악수심유) ㅡ 달이 밝으면 밤길을 걷는 사람은 맹수로부터의 피해 걱정을 던다. 불법을 만난 사람은 무서운 번뇌의 출몰을 걱정하지 않게 된다. 이와 같은 비유를 除畏惡獸心喩라고 한다.
8. 開敷優鉢羅華喩 (개부우발라화유) ㅡ 달맞이꽃과 인도의 우담발화는ㅡ 한자로는 靑蓮花ㅡ 달이 찰 때 피는 꽃이다. 이것을 보고 인도에서는 만월은 꽃을 피우게 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같이 달의 힘처럼 불법은 마음의 꽃을 피우는 빛이 있다고 하는 비유를 開敷優鉢羅華喩라고 한다.
9. 合蓮華喩 ㅡ 달밤에 피는 꽃이 있는가 하면 달이 뜨면 꽃잎을 오므리는 식물들이 있다. 연꽃도 밤이면 꽃을 오므린다. 불법이 달이라면 중생의 五慾은 꽃잎이다. 바른 法을 얻으면 오욕의 꽃잎은 없어진다. 이런 비유를 合蓮華喩라고 한다.
10. 發行人進路心喩 ㅡ 佛法의 달을 만나 인생의 갈 길이 훤히 보이면 중생은 그 길로 가고 싶은 충동이 절로 나온다. 이런 비유를 發行人進路心喩라고 한다.
11. 많은 놀이가 달밤에 이루어진다. 강강술래, 달맞이 등 오락은 달밤에 행해진다. 달이 밝으면 노래도 하고 싶고 곡차 한잔쯤도 생각난다. 이런 취흥은 달이 주는 선물이다. 불법도 마찬가지다. 참선과 염불과 정근과 기도와⋯. 그런 수행이 무르익어서 마음에 환한 빛이 솟으면 그 해탈한 상태를 즐겨 절로 悟道(오도)의 노래가 나오고 덩실덩실 추어지는 것이다.
이상은 ‘열반경’에서 간추린 달과 여래와의 열한 가지 비유였다.
원효 스님은 ‘起信論疎(기신론소)’에 달과 달을 보는 인간의 차별상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猶如滿月一圓相(유여만월일원상) 보름달은 모두 둥근 원형이다.
隨器差別現多影(수기차별현다영) 비쳐 보는 그릇에 따라 형태가 다를 뿐이다.
승찬대사의 ‘信心銘(신심명)’의 게송이 여기에 있다.
月巢鶴作千年夢(월소학작천년몽) 달 드리운 둥지에서 천 년의 꿈을 꾸고
雪屋人迷一色空(설옥인미일색공) 눈 덮인 집 속에서 사람은 일색의 공을 모르누나.
坐斷十方猶未盡(좌단십방유미진) 앉아서 온 누리를 끊어도 아직은 다하지 못했으니
密移一前看飛龍(밀이일전간비룡) 조용히 한 발짝 나아가서 나는 용을 보려무나.
大丈夫(대장부)의 조건 ; ‘사내대장부’, ‘대장부의 기개’ 등, 호연지기가 빼어난 사람을 대장부라고도 하고 통이 큰 사람을 대장부라고 셈하기도 한다. 대장부의 조건에 대해 각양 각층의 주장이 있겠지만 불교는 7 가지 조건을 갖춘 사람이라야 대장부라고 말한다.
장부란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다 ㅡ 能制心人物 (능제심인물).
장부란 욕심이 없는 마음을 가진 자다 ㅡ 離慾心人物 (이욕심인물).
장부는 나쁜 행동을 하지 않는다. ㅡ 身無惡人物 (신무악인물).
장부는 항상 道를 지키고 있다 ㅡ 心懷道 (심회도).
장부는 德(덕)을 간직하고 있다 ㅡ 心懷德 (심회덕).
장부는 종교적인 생활에 충실하다 ㅡ 修諸梵行(수제범행).
이상이 인격을 갖춘 인물이 장부다.
장부의 조건을 장수-용모 건강-포용력-지식-위엄성-가문의 일곱 가지로 책정하기도 한다.
장부는 수명이 길다 ㅡ 長壽 (장수). 신앙이 깨끗하고 바르면ㅡ梵行(범행)ㅡ 마음이 고요하고 편해서 오래 무병장수할 수 있다.
장부는 용모가 뛰어나고 수려하다 ㅡ 妙色 (묘색). 얼굴이 환히 밝고 키가 헌걸 차며 음성이 우렁차고 행동이 단정하면서도 위엄이 서려 있는 사람으로서 범행의 모범이 되는 사람을 장부라고 한다.
장부는 無病 (무병)하다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일하거나 과로해서 신병을 얻는 것은 장부가 아니다.
장부는 주변 상황에 포용력이 있다. 두루 아는 것이 많아 상황을 잘 파악하여 그에 적합한 방안을 제시하고 해결한다.
행동마다에서 위엄과 단정함과 담박한 인품이 넘치고 말할 때는 우렁차며 句句節節(구구절절) 믿음성을 준다.
이상 두 가지 계통의 대장부 조건을 통틀어 결론지으면 “解脫 (해탈) 한 사람이 대장부다”라는 한 줄로 귀결된다. 이를 증명해 주는 경전은 “잡아함경” 24 권 614 ‘大丈夫經 (대장부경)’ 이며, “한글 대장경” 아함부 6권을 참조하면 쉽게 이해 될 수 있을 것이다.
大衆과 民衆 ; 대중이란 수가 많은 여러 사람이다. “대중 앞에서 연설을 한다.”고 말할 경우의 대중은 民衆과 동의어다. 민중이란 특수층을 제외한 대다수의 서민 계층을 말한다. 따라서 大衆과 民衆은 같은 계층이라 수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大衆은 스님과 신도를 통틀은 승단의 무리다.
오늘날 정치의식이 높아지면서 특권층이나 부유층에 대한 일반 서민을 의식하는 말로 인식하게 되었으나 불교에서 쓰는 대중은 차라리 衆生이라는 뜻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대중공양, 대중송사, 대중산림, 대중처소 등 대중이라는 말이 붙는 표현이 많다.
※ 남자 스님은 비구스님, 여자 스님은 비구니 스님이라 하며, 여자 신도는 優婆夷(우바이), 남자 신도는 優婆塞(우바새)라 부른다. 불교에는 ‘四部大衆’과 ‘八部大衆’이 있다.
四部大衆은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가 있으며, 줄여서 ‘四衆’이라고도 한다.
八部大衆 또는 八部衆
천(天) ㅡ 하늘 세계. 살아서 번뇌를 끊은 상태가 하늘의 세계라는 의미에서의 淨天(정천) 과 죽어서 태어나는 生天이 있다. 스스로 善을 쌓고 佛道를 닦아 도달하는 수행의 경지임에 불교로서의 장점이 있다.
용 ㅡ ‘佛法을 수호하는 짐승’으로 동양의 신격화된 용과는 다르다는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법화경 제4 提婆達多品 (제바달다품)에는 娑竭羅(사갈라) 용왕의 딸이 8살의 나이에 성불했다는 유명한 설법이 있다. 이는 성불의 길에는 남녀의 차이가 없으며 심지어 축생인 용왕에게도 불성이 있음을 증명해 준 것이다.
야차 ㅡ 매우 포악스런 귀신의 종류이지만 불법을 지키는 사람은 적극 돕고 불법을 해치는 무리는 무참히 공격한다.
건달바 ㅡ 제석천의 음악을 관장하는 신이다. 香을 먹고산다. ※ 앞의 건달을 참고하기 바람.
아수라 ㅡ 싸움을 일삼고 화를 잘 내며 하늘에 도전하기를 잘 하는 신이다. ‘아수라장’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가루라 ㅡ 사나운 새로 용을 잡아먹는다고 한다. 일명 금시조라고도 한다.
긴나라 ㅡ 머리는 사람, 몸은 새의 형태를 한 괴물. 노래와 춤을 즐긴다.
마후라 ㅡ 뱀신으로 몸은 사람, 머리는 뱀이다. 음악을 즐긴다.
즉 이 모든 것들이 ‘大衆’인 것이다.
道樂 (도락) ㅡ 道를 닦아 깨달음을 얻은 뒤 생기는 기쁨. 식도락 등은 잘못된 사용임.
도량(도장, 道場) ; 석가세존께서 네란자라 강가 보리수 아래서 도를 이룬 금강좌(金剛座),즉 Bodhimandala 를 번역한 한자어이다. 무량의경 설법품에 [내 일찍이 도장 보리수 아래서 단좌(端坐)하기 6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수 있었다.]고 했듯이, 본래는 세존이 법을 깨친 곳이라는 뜻이었으나, 법화경 비유품에는 [여러 보살과 성문중(聲聞衆)을 이 보배수레에 태워 곧장 도장에 이르게 하다.]라 했다.
어느 특정한 곳이 아니더라도 <도를 깨닫는 곳>이면 어디거나 그 곳을 도장이라고 하게 되었다. 또 유마경(維摩經)에는 [직심(直心)이 곧 도장이며.... 삼십칠품(三十七品) 이것이 곧 도장이니....]했는데 37품이란 37조도품(助道品)을 말하며, 열반(涅槃)의 이상경에 이르기 위해 닦는 수행의 종류를 말한다. 즉, 사념처(四念處),사정근(四精勤),사의여족,오근(五根),오력(五力),칠각분(七覺分),팔정도분(八正道分)의 37가지이다.
유마경에서는 바른 마음, 수행방법까지도 도장으로 규정짓고 있다. 따라서 이 세상 모두가 불도를 이루기 위한 도장이라는 사상이다. 그러므로 특정한 장소라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인 것이다. 그 곳을 도장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절을 청정 도장이라고 하듯이, 이런 뜻이 일반화되어 태권도, 권투, 유도 등을 연마하는 곳을 통틀어 도장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는 도장, 불교에서는 도량으로 발음한다.
도로 아미타불 ; “십년공부 도로 아미타불이 되었다.” 이런 탄식의 말을 흔히 듣는다. 이 말의 진의는 ‘工夫(공부)’와 ‘徒努(도로)’와 ‘阿彌陀佛 (아미타불)’에 있다. 공부는 학문과 기술 등을 배우고, 배운 것을 현실에 익힘을 말한다. 결국 공부란 인간이 되는 노력을 말한다. 절에서 ‘공부를 한다.’하면 參禪(참선), 念佛(염불), 祈禱(기도)함을 뜻한다.
徒努란 바람 없이 애만 쓰는 것을 말한다. ‘헛수고’와 같은 뜻이다. 阿彌陀佛은 서방 극락세계의 부처님이다. 西方淨土(서방정토)에 태어나 아미타불과 함께 사는 것을 發願(발원)하고 쉴 사이 없이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는 것을 念佛(염불)이라고 한다. 염불과 관련하여 自性彌陀(자성미타), 唯心淨土(유심정토)라는 가르침이 있다. 自性이 아미타불이고 淨土는 마음속에 있다는 깊은 가르침이 있다. 십 년 공부가 무너지기는 매우 간단하다.
한 번의 도둑질과 한 번의 싸움과 한 번의 우둔한 판단은 이내 餓鬼(아귀), 阿修羅(아수라), 畜生(축생)에 떨어지고 만다. 공부 할 때는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하여 일체의 허튼 생각이 자리 잡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임을 이른 말이다.
돌팔이와 노가리 ; 서툰 전문가를 ‘돌팔이’라고 한다. ‘돌팔이 선생’, ‘돌팔이 의사’, ‘돌팔이 무당’ 등은 전문지식을 갖지 못한 채 전문가의 행위를 하는 사람을 비아냥거려 부르는 말들이다. 영어에 pedder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는 ‘行商(행상)’이라는 의미와 ‘남의 말을 옮기는 사람’이란 의미가 있다. 돌팔이는 후자에 가깝다. 돌팔이는 경상북도 지방에서는 ‘가짜배기’라고 하고 강원도 지방에는 ‘노가리’라고도 한다. 속된 말로 ‘노가리 푼다’라는 말은 “돌팔이가 어설픈 지식을 자랑한다.”와 같은 뜻이다.
돌팔이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설이 있다. ‘돌아다니는 파리’로부터 돌팔이가 생겼다는 해석이 있다. 사실 돌팔이의 어원은 ‘돌바리(回巫)’에서 찾는 것이 가장 근접한 주장일 것이다. ‘돌바리’를 일명 돌무당이라고 한다. 돌바리는 여러 지방을 두루 다니며 여러 사람을 많이 만났고 여러 가지의 사건을 보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깊지는 못하나마 다양한 지식을 갖고 있다. 소위 무슨 이야기에도 끼어들어 한 마디씩은 참견한다. 다니면서 여러 환자를 보고 그들의 처방에 관해 관심을 두다 보니 간단한 의료 행위도 한다. 시골의 無醫村(무의촌)에서는 돌바리에게 환자를 맡기는 예가 많다. 그러는 과정에서 오히려 더 큰 화를 빚는 결과도 종종 보게 된다. “선무당이 생사람 잡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돌바리는 ‘돌다’와 ‘바리’의 합성어다. 항간에 돌팔이 칭호를 받는 사람이 많음을 본다.
動鈴 (동냥) ; 쉬운 일일지라도 협력하면 좋다는 속담 등의 말들을 만들어 내는 ‘동냥’은 스님이 시주를 얻으러 돌아다니는 일에서 유래된다. 글자 그대로를 풀면 動鈴(동령)이 동녕으로, 동녕이 동냥으로 변해 오늘에 굳어진 것이다. ‘동령’이란 ‘搖鈴(요령)을 흔들다’, ‘요령을 들고 다닌다.’이다. 搖鈴(요령)의 원말은 金剛鈴(금강령)에서 나왔다.
금강령이란 밀교의 의식에서 쓰던 法具(법구)로 이 방울을 흔들어 번뇌를 깨뜨리고 불심을 더욱 강하게 불러일으키는 데에 사용한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動鈴’ 자체를 천한 계급이 하는 짓으로 생각했다. 조선시대의 스님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托鉢(탁발)에 나설 때 요령을 흔들고 다니게 됨에 따라 동령을 ‘구걸’과 같은 뜻으로 받아들였다.
동령이 동냥으로 변음 되면서 오늘날 ‘동냥하다’, ‘동냥 주머니’, ‘동냥 물품’ 등의 단어가 사전에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두타행 ; 두타란 범어로 (Dhuta)입니다. 한문으로는 頭陀, 杜多, 投多라고도 씁니다. 두타가 뜻하는 바는 닦고 털고 버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의식주에 대한 탐착을 버려서 심신을 닦는 것을 뜻합니다. 두타수행에는 12항의 생활규범이 있어서 이것을 12두타행이라고 합니다.
1. 인가를 멀리 한 조용한 곳에 머물고
2. 항상 걸식하며
3. 빈부를 가리지 않고 차례로 걸식하고
4. 하루에 한 번 먹으며
5. 절도를 지켜 과식하지 않으며
6. 오후에는 먹지 않으며
7. 헌 누더기 옷을 입으며
8. 옷은 3벌만 가지며
9. 묘지에 머물고
10. 나무 밑에 머물고
11. 빈 땅에 앉고
12. 항상 앉아 수행하고 눕지 않는 것입니다.
이 두타행은 부처님 당시의 인도스님들의 생활규범이었는데, 후세에 와서 두타는 산과 들을 다니며 고생을 견디며 행각 수행하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고행하며 행각수행하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가섭 존자는 가장 모범적으로 두타수행을 하셨다 합니다.
마(魔,惡魔) ; 보통 살인마, 색마(色魔),병마(病魔)등 악마라는 뜻으로 쓰이는 접미어이며 악마는 악(惡),불의(不義),재앙(災殃)을 객체화(客體化),의인화(擬人化)시킨 말이다. 이 말은 본래 불교의 mara를 음역한 <魔羅>로서, 석존은 사람들 의식 속의 미망(迷妄).집착. 잠재된 무명(無明).숙업(宿業)등을 마 또는 악마라고 했다.
석존이 보리수 아래에서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마궁(魔宮)에 사는 마왕(魔王; 이름은 파피야스)이 석존의 선정을 방해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요염한 마녀를 보내 유혹도 하고, 12마군(魔軍)을 보내 갖가지로 훼방을 했다. 그러나 석존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모든 마군을 항복시켜 마침내 붓다가 된 것이다.
위의 12마군이란 석존 내면의 갈등, 의혹 등을 상징하는 것이지 객체로서 있는 존재하는 악마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살인을 한 자의 소행이야말로 악마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악마가 된 과정을 차근차근 되짚어보면 그 발단은 극히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
빈 집을 털러 들어갔다가, 그 집안사람이 나타나자 엉겁결에 자신의 얼굴을 본 그 사람의 목을 졸랐다. 훔친 돈을 유흥비로 탕진하고, 돈이 떨어지자 다시 도둑질을 하고 또 죽이고 또 탕진하고......그래서 악마로 변신하는 것이다. 그가 죽인 사람에게 그는 아무런 원한도 없다. 죽일 마음도 없었다. 그러나 내가 살자니까, 내 몸에 애착한 나머지 악마 같은 소행을 저지르고 마는 것이다. 사회악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 사업으로 돈을 벌어야겠다던가 혹은 부실한 회사를 정상화시켜야겠다는 욕심으로 산업폐기물을 하천이나 바다에 남몰래 버리기도 하고 ㅡ 정상적인 처리시설을 설치하자면 많은 비용이 드니까 조금이라도 지출을 줄여보겠다는 비뚤어진 마음 때문에 ㅡ 인체에 해로운 색소. 방부제 등을 섞어서 폭리를 꾀하고 ㅡ 인체에 해롭지 않은 재료는 원가가 많이 먹히고 방부제를 넣지 않으면 제품이 쉽게 부패해서 손해를 볼 테니까, ㅡ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병에 걸리고 심하면 목숨까지 잃게 되니 이런 사업자야말로 악마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이 마군들과 함께 살고 있는 셈이다. 바르고 청정하던 사람이 극히 사소한 계기로 걷잡을 수 없이 악마로 변해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의 정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외도(外道)와 이 <마>를 불도수행의 크나큰 장애로 꼽는다. 이런 마의 개념이 후세로 내려오면서 인간들은 어떤 객체가 있어서 어떤 일이 잘 안되고, 재앙을 가져다주고, 괴로움을 당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악마, 악신(惡神), 악령(惡靈), 사신(邪神)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만자(卍字) ; ‘부처님의 성덕(聖德)과 길상(吉祥)의 상징’ 만자(卍字)는 불교를 상징하는 표식으로 부처님이 지닌 성덕(聖德)과 길상(吉祥)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기원과 내용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보통 태양이나 흐르는 물의 상징으로 보기도 하고 둥글게 선회하는 모발의 형상이라고도 하며, 신령한 빛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많은 학자들은 이 표시가 인도불교에만 있었던 고유 상징이 아니고, 인도 고대신화 속에 등장하는 태양의 신 비쉬누(Vishnu)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실제, 이 표지는 유럽·아프리카 등 전 세계 전역에서 그 모양을 찾아볼 수 있다.
《화엄경》 제48권에서는 만자에 대해 “여래의 가슴에는 훌륭한 분의 특징인 ‘만자’모양이 있다. 이것을 길상해운(吉祥海雲)이라고 부른다. 조화가 자재로운 마니보주(摩尼寶珠)로 장엄되어 온갖 아름다운 빛깔을 내고, 가지가지의 광염을 둥글게 뿜어내면서 온 누리를 깨끗하게 하는 묘음(妙音)을 내어서 온통 세계를 진리의 바다처럼 넘실거리게 한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불상을 조성할 때 부처님만 갖추고 있는 32상 80종호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원래음은 ‘슈리밧사’인데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파되면서 역경승이나 주석가들은 만(萬)이라고 통일하여 부르게 되었다. 중국에서 이 표지를 최초로 언급한 사람은 화엄학의 대가인 혜원(慧苑)이었다. 그는 《화엄경》의 한역본과 범본(梵本)을 대조한 뒤, 만자는 덕 있는 사람의 상(像)이요 길상만덕(吉祥萬德)이 모이는 곳이며, 한역본에는 17번, 범본(梵本)에는 28번이나 언급되어 있다고 하여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망상(妄想) ; 사람이 망상에 사로잡히면 마침내 패가망신하게 된다. 무지하거나 고집스러운 데서 오는 망상도 있으나 대개는 병적인 망상이 대부분이라 하겠다. 즉 피해망상, 과대망상, 죄과 망상 그리고 망상광(狂)등이 모두 망상증이다. 이처럼 병적이 아니더라도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거의 모든 사람이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하겠다. 즉 이 세상 모든 것은 무상하여 집착할 것이 못되는데도 인간들은 그것들에 집착하는데서 갖가지 고뇌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근원적으로 망상에 빠져 있다고 하겠다. 이것을 뚜렷이 밝혀 주신 분이 바로 석존인 것이다.
불교에서는 [실로 당치 않은 것을 망]이라 하고 그 [당치 않은 망으로 분별한 갖가지 상(相)]을 망상이라 한다고 했다. 대승의장(大乘義章)에 [범부들의 미(迷)한 마음은, 제법(諸法)의 상(相)을 일으키되 그 상에 집착하고 그 상에 이름을 붙여, 그 이름에 따라 상을 취하니 얻는 바가 모두 부실(不實)하다. 고로 이를 망상이라 한다.]고 했다. 또 능엄경에 [일체중생은 무시(無始) 이래로 생사윤회를 계속한다. 이는 갖가지 망상에 사로잡혀 상주하는 청정 본성을 모르기 때문이다.]라 했다. 또 능엄경에 [망상은 스스로를 결박한다. 마치 누에가 고치를 짓듯이]라고 망상을 경계했다.
모름지기 바르게 배우고 올바른 분별로서 언행을 바로잡아 망상에 빠지지 않아야 참다운 인간으로서의 바른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갖가지 비리. 불의. 불행 그리고 악이 팽배하는 까닭도 모두 이 망상 때문인 것이다.
面目(면목) 없다 ; ‘면목 없다.’, ‘진면목을 보여줬다’ 이렇게 사용되는 면목이란 ‘체면’, ‘남에게 드러낼 얼굴’ 등으로 쓰여 지고 있다.
무진장(無盡藏) ; 엄청나게 많은 것을 표현할 때 [무진장 많다]고 말한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본 뜻을 제대로 알고 쓰는 이가 몇이나 될까. 대승의장(大乘義章)에 [덕이 넓고, 궁(窮)함이 없음을 무진이라 한다. 이 무진한 덕을 포함하는 것을 장(藏)이라고 한다]고 했다. 또 유마경 (維摩經) 불도품(佛道品)에는 [모든 빈구한 자에게는 무진장으로 나타나 그로 하여금 불심을 내게 하고]라고 했다. <무진>이란 범어의 의역으로서 다하지 않는다는 뜻이고<장>은 곳간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불교를 무한한 보배를 수장한 곳간에 비유한 말이다.
이런 의미가 변하여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을 만큼 많다는 표현으로 쓰게 되었다. 또 옛적 중국에 서민들의 구제활동의 일환으로 신도들의 보시금을 절에서, 기금으로 오늘날의 서민금고와 같은 저리융자기관을 개설해 이를 무진장이라고 하기도 했다. 이로써 절이 타락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으며, 이것이 후세 고리대금의 원류가 되었다고 한다. 옛적에는 상호 신용계(相互信用契)를 무진이라고 했다. 오늘날의 상호신용금고를 한때 무진회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무참(無斬) ; 끔찍하고 참혹함을 무참하다고 표현하고, 무참한 죽음이니 무참한 최후니 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참자를 <慘>으로 흔히 쓰는데, 본래는 <斬>으로 썼었다. <斬>은 <慙>자와 같은 글자이다. 다만 심방변(心)의 위치가 다를 뿐이며 부끄러워할 참, 부끄러울 참자이다. 따라서 무참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뜻의 불교말이다. 즉 죄를 저지르고도 스스로 마음에 수치를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다.
구사론(俱舍論)에 [지은 죄에 대해 스스로 관(觀)하고 수치를 모르는 것, 이를 이름하여 무참이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범어를 의역한 한자어로서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뜻에서 부끄러움을 모를 만큼 방만(放慢)함을 가리키게 되었고, 그런 방만을 비난하는 기분이 대상에 대한 동정심으로 변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가엾은 모양을 일컫게 되었다.
바라지 ; 바라지는 순수한 우리말이다. 일반적으로는 어떤 일을 돌봐주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면, 해산바라지 따위이다 또 음식이나 옷 같은 것을 대어주는 것도 바라지라고 한다. 옥바라지, 자식바라지 등 이런 것들을 통틀어 (뒷바라지 한다)고도 한다.
또 바람벽 위쪽에 낸 작은 창을 바라지라고 한다. 이 바라지창에는 쌍바라지창과 약겟 바라지가 있는데 약겟 바라지란 약방(한약방)의 바라지창을 일컫는다. 바라지를 혹 <破羅之>라고 쓰기도 하는데 이는 순 우리말을 발음이 같은 한자로 표기[取音]한 것이다. 불교적으로는, 절에서 영혼을 위해 시식(施食)할 때 시식법사가 경을 읽으면 옆에서 그 다음 송구(頌句)를 받아 읽는 사람을 바라지라고 하며, 또 그 시식을 거들어 주는 사람을 바라지라고 한다.
발(鉢) 또는 발우(鉢盂) ; 우리나라 절에서는 흔히 바리때. 바루. 바룻대라고 한다. 승려들이 동냥 다닐 때나 평상시 공양(식사) 때 쓰는 밥그릇을 일컫는 말이다. <발>은 범어 patra를 음역한 것을 약해서 발이라 하고, <우>는 사발 우(盂)자이다. 따라서 범어의 밥그릇이라는 말과 한자어의 사발이라는 말이 겹쳐서 된 말이다.
끼니때마다 늘 일정한 양의식사를 하는 그릇이라는 뜻에서 응량기(應量器)라고도 한다. 비구 육물(六物;대중. 중의. 하의 - 이상 삼의 - 발우. 좌구. 물 거르는 주머니)중의 하나이다. 우리나라의 주발(周鉢)도 이 발우에서 유래된 말로 생각된다. 인도에서는 본래 철발우와 도기(陶器)발우를 썼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목발우를 써 왔으며 지금도 목기로 유명한 전라도 지방의 발우가 유명하다.
옛적부터 스승이 법을 전수하는 상징으로서 가사와 발우를 제자에게 물려주는 것이 전통처럼 되어 있다. 지금도 입적한 옛 고승들의 발우가 그 제자들에 의해 전해지는 경우가 흔히 있다.
방편(方便) ; 방편이란, 보살이 중생을 깨침으로 인도할 적에 사용하는 상대편에 알 맞는 편의적 수단이라고 간략하게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은 각인각색이기 때문에 그들을 진실한 교법 안으로 들어오게 하려면, 적절한 법문을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方은 방법이요 便은 편리라 할 수 있으니, 깨침으로 인도할 중생에게 살아있는 얘기, 즉 그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부합하는 방편을 펼쳤던 것이다. 부처님은 여러 가지 방편을 강구하여 그때 그때마다 알기 쉽고 듣기 쉬운, 쏙쏙 들어오는 법문을 진솔하게 이용하셨던 것이다. 평이 하지만 돋보이는 언어로써 방정하게 진리를 나타내 보였던 것이다.
방편바라밀, 방편보리, 방편법신, 방편반야 등은 보살이 행하는 방편들이다. 보살들은 시장에서나, 길거리에서나 만나는 각각의 사람들에게 그 수준에 따라 알맞게 이야기를 이끌어 갔던 것이다.
번(幡) ; 번에 어쩌면 귀에 설은 말일 것이다. 이 말은 범어 pataka의 음역이다. 한자어로는 증번(繒幡) 또는 당번(幢幡)이라고 하며, 불-보살의 위덕을 나타내기 위해 장식하던 깃발을 일컫는 말이다. 또 이것을 만들어 달면 (시주하면) 복을 받는다고도 한다. 그 모양은 여러 가지이며 혹은 세로가 길기도 하고 혹은 가로가 길기도 하며 혹은 여러 가지 모양의 장식물을 길게 늘어뜨리기도 한다. 유부니타나(有部尼陀那)에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가 석존을 찾아뵙고, [제가 지금 섬부영상(贍部影像)을 지어 달고자 합니다. 허락해 주십시오.]하고 여쭙자 석존께서 허락하시었다.
그 장자는 허락을 받긴 했으나 어찌 짓는지를 몰라 [세존이시여, 어떤 번을 지어야겠습니까?] 하고 다시 여쭈었더니, 세존께서 [다섯 가지 번이 있으니, 사자번. 막갈라번(莫鞨羅幡). 용번. 게로다번(揭路茶幡). 우왕번(牛王幡)이 그것이오.]하고 가르쳐 주셨다고 했다. 그 밖에 옛 기록에 의하면 관정번(灌頂幡).속명신번(續命神幡).천망번(薦亡幡).명과번(命過幡).신번(信幡) 등이 있다고 한다.
번뇌(煩惱) ; <煩>자는 신열이 나고 가슴이 답답한 <번역증 날 번>자라고도 하고 또는 번민할 번이라고도 한다.<惱>자는 괴로워할 뇌 또는 괴로움 뇌자이다. 즉 번민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번뇌라고 한다. 이 말도 범어 klesa의 의역이다.
이른바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의 삼독(三毒; 貪心, 瞋心, 癡心)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번민이 생겨 괴로워하는 것을 말한다. 지도론(智度論)에 [번뇌란, 마음이 번거로워 괴로움을 지어내므로 이름 하여 번뇌라 한다.]고 했으며, 또 [번뇌를 약설(略說)하면 곧 삼독이며, 넓은 의미로 설명하면, 삼계(三界)의 구십팔사(九十八使 ; 사는 번뇌의 다른 이름 즉 98 번뇌)이다.]고 했다. 이로써 번뇌는 바르지 못한 마음 때문에 모든 진실을 바르게 받아들이지 못해 아음과 몸을 괴롭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번뇌의 근원인 바르지 못한 마음을 산란심(散亂心)이라고 한다. 산란하다는 말도 불교에서 마음의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지금은 보통 잘 정돈되지 못한 상태를 산란이라고 한다. 마음이 안정되지 못한 까닭에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치달아 마음에 갈등이 생겨 괴로워지는 것이다. 곧 미혹(迷惑)인 것이다. 인간은 한 찰나에도 8억 4천이나 되는 생각이 명멸하며 그것이 모두 번뇌가 된다고 하니 인간이란 번뇌의 결정(結晶)인 것이다. 이 번뇌 중에서도 가장 근본 되는 것이 탐심(탐내는 마음).진심(성내는 마음).치심(어리석은 마음).만심(교만한 마음).의심(의심하는 마음).악견(삿된 견해)의 여섯 가지이다.
악견의 예로 귀자모신(鬼子母神)을 들 수 있다. 즉, 포악하여 남의 자식들을 잡아먹던 귀자모신을 깨우쳐주기 위해 석존께서 귀자모신의 자식을 감추었다. 자기 자식을 잃고 비탄과 분노에 싸여 자식을 찾아다니다 석존의 설법을 듣고 지금까지의 악견을 참회하고 발심하여 안산(安産). 육아(育兒)의 신이 되었다. 번뇌를 <마음에서 새어나오는 더러움>이라는 뜻에서 누(漏)라고도 한다.
복장물(腹藏物) ; ‘불상에 봉안되는 불교적 상징물’ 불상을 조성하면서 불상의 몸 안에 사리·불경 등을 넣는 것으로 넓은 의미로는 불상 즉, 불·보살이나 나한상 등의 여러 존상 내부에 봉안되는 여러 가지 불교적 상징물 또는 그것을 넣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처음 탑에 봉안하여 숭배되던 사리는 점차 외경의 대상이 되어 사리신앙이 크게 유행된다. 그래서 탑뿐만 아니라 불경이나 불화에도 봉안하였고, 불상의 배안에도 장치하게 되었다. 《조상량도경》에 의하면, 초기에는 불상의 머리 부분에 사리를 장치한 것으로 믿어지지만, 점차 배안에 넣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불상 복장 안에는 사리와 사리통, 5곡이나 오색실, 불경과 외복, 다라니와 만다라, 복장기나 조성기 등을 머리와 배의 빈 부분에 가득 채워 넣었는데, 대개 조상경(造像經)의 법식을 따르고 있다. 복장 유물은 그 불상이 제작될 당시의 사회적 배경과 함께 인성(人性)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됨은 물론 역사학·민속학·미술사에 결정적 자료를 제공하기도 한다. 특히 발원문의 내용 가운데는 불상이 봉안된 절의 이름과 함께 승명(僧名)과 관계인명이 나와 있어 불상의 조성 연대를 밝히는 단서로 삼기도 한다. 따라서 복장 유물은 당시 불교신앙의 경향, 사경(寫經) 미술, 불상 조성 의 유래, 그것을 만든 장인, 발원자들의 신분 등을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불감(佛龕) ; ‘불상 봉안한 이동식 법당’ 불상이나 경(經) 등을 안치하는 장치로 주자(廚子)·두자(豆子)라고도 하는데 때로는 불감과 보각(寶閣) 그리고 주자를 구별해서 부르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대체적으로 그 쓰임새들은 서로 비슷하다.
목재나 금속으로 집·통(筒)의 모습을 만들고 그 정면에다 여닫이문을 달아서 철이나 금박 등을 바르고 장식한 것인데 주로 나무로 된 것이 많다. 중국의 경우 《관홍명집》 제 6에 실린 중국 양(梁)나라 간문제(簡文帝)가 쓴 《여승정교(與僧正敎)》를 보면 “때로 십존오성(十尊五聖)이 함께 한 감(龕)에 있기도 하며 혹은 여래와 함께 하나의 궤(櫃)에 놓여지기도 한다.”라는 글이 있다. 이것은 양나라 때에 이미 불감제도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기록이다.
불감을 주자라고도 한 것은 주자는 본래 부엌에서 조미료를 담던 그릇이었는데 훗날 그 모양이 마치 불감과 비슷하게 바뀌면서 그것을 불상 봉안의 장치로 삼았기 때문인 듯하다. 한국에서는 이동하기 쉽도록 여닫이문을 닫으면 동그랗게 되는 작은 것도 있고 또 집 모양으로 된 것도 있다.
승주 송광사 불감이나 동국대 박물관 소장의 불감 그리고 전남 광양의 상백운암 불감 등은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며, 또 천은사(泉隱寺) 불감이나 간송미술관 소장의 불감 등은 구리(銅)로 만들어진 것인데 모두 미술적으로 훌륭한 작품들이다.
사리(舍利) ; 사회 일반에서는 쓰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근래 들어 불교계는 물론 일반에게도 이 사리란 말이 퍽 귀에 익은 말이 되었다. 이 말은 범어 sarira의 음역으로 보내는 부처의 신골(身骨)또는 일반적으로 시신(屍身)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이 말이 변해서 화장한 유골을 사리라고 했으며, 특히 석존의 유골을 불사리라 부른다. 또 계(戒).정(定).혜(慧) 삼학을 지극하게 닦아 수행이 청정한 승려를 화장하면 사리가 나온다고 한다.
금광명경(金光明經) 사신품(捨身品)에 [이 사리란, 곧 무량한 육바라밀 공덕으로서 소중하며....] 했고 또, [사리란, 계. 정. 혜를 닦은 바 있어야 하며 매우 얻기 어려운 최상의 복밭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화장한다고 해서 아무나 나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근세에 몇 고승에게서 사리가 나와 화제가 된 일이 있다. 또 붓다의 사리를 생신(生身)사리, 경전을 법신(法身)사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자후(獅子吼) ; 사자를 백수의 왕이라고 한다. 이 백수의 왕이 한번 크게 소리 내면 크고 작은 짐승들이 승복하듯이 석존의 설법은 외도(外道 ; 異敎徒)들은 물론 악마들까지도 절복(折伏)시키고 모든 중생들을 감화시킨다는 뜻이다. 따라서 사자후는 곧 만고불변의 진리를 설하는 석존의 설법이라는 뜻이다.
석존께서 대중에게 결정적인 설법을 하되 두려워함이 없음을 상징하는 말이다. 열반경(涅盤經)에 [법을 설함에 두려움이 없으니 마치 사자의 포효와 같다.] 고 했다. 지금은 일반적으로, 열변을 토하거나 멋진 웅변을 사자후라고 한다.
삭발(削髮) ; 머리를 박박 깎는다는 뜻이다. 즉 승려들이 머리를 깎는 것을 일컫는 말인데, 일반적으로도 머리를 깎는 것을 삭발이라고 한다. 불교에서 머리를 깎는 것은 외형적으로 청정하게 한다는 뜻도 있지만, 머리를 번뇌초(煩惱草)라고 해서 마음의 교만과 번뇌를 깎아버린다는 상징적인 뜻도 있다. 불교에서는 체발(剃髮)이라고도 한다. <剃>는 <깎을 체>자이다. 경에 수염과 머리를 깎고 염의(染衣)를 입는 것은 석존의 제자의 출가 모습이니 교만을 버리고 외도와 구분하기 위함이며 이것이 삼세 제불(諸佛)의 의식이라고 했다.
인과경(因果經)에 [이때 태자 날이 선 칼로 스스로 머리와 수염을 깎고 곧 발원하여 말하되, 바라건대 지금 떨어진 수염과 머리로써 일체의 번뇌와 습장(習障)이 끊어지고 없어지이다.]라고 했다. 석존이 궁에서 나와 출가하던 순간의 정경을 묘사 한 것이다. 이로써 석존의 제자들은 출가할 때 머리를 깎게 되었다. 또 지도론(智度論)에 [머리를 깎고 염의를 입고, 발우를 들고 걸식하는 것, 이것이 곧 교만을 파(破)하는 법이다.]라고 했다.
삼매(三昧) ; 독서삼매니 해서 흔히 쓰고 많이 알려진 말이다. 예컨대, 어떤 일에 마음을 듬뿍 쏟아 일심불란한 경지를 일컫는 말로서 쓴다. 이 말도 범어 samadhi를 음역한 말이며, 마음을 한곳에 집중시켜 흔들림이 없는 평등심(平等心)을 뜻한다. 그래서 이를 <정>이라고 의역하기도 한다.
선정(禪定)삼매니, 독경(讀經)삼매니, 염불(念不)삼매니 해서 수행승이 어떤 수행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 또는 그 경지를 뜻하는 말이다. 지도론(智度論)에 [선심(善心)을 한 곳에 머물러 움직이지 않는 것, 이를 삼매라 한다.]고 했다. 또 [일체의 선정(禪定),이를 정(定)이라 이름하며 또 삼매라 부른다]고 했다.
불교에서는 삼매에 들고자 하면, 바른 관(觀)으로서 법을 바로 지니고 마음을 조절하고 비뚤은 마음을 곧게 하는 것, 즉 마음과 행동을 법답게 해야 한다고 한다.
수행(修行) ;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을 만큼 잘 아는 말이다. 역시 불교에서 유래된 말이다. 신(身).구(口).의(意)의 삼업(三業)을 삼가하고 닦는 노력하는 것을 수행이라고 한다. 즉 도를 닦고 법에 따라 행한다는 뜻이다. 정진(精進)이란 말고 같은 뜻이다. 불교를 관념으로서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불교를 믿는다고 할 수 없고, 신-구-의를 통해 불도를 실천하되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을 수행해야 한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행보다는 신(信;믿음)을 강조 했으며 믿음에 철저함으로써 깨달음의 세계로 바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믿음도 관념화할 위험이 있다. 어쨌든 수행과 깨달음은 둘이 아닌 하나이며 수행이야말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다.
신통(神通) ; 이상하고 묘하거나, 어떤 일에 시기할 만큼 통달한 것을 <신통하다>고 한다. 그리고 약효 등이 신기하게 나타날 때 <신통한 효과>라고 한다. 이 말도 범어의 아비주니아를 의역한 불교 말이다. 불보살의 초인간적인 걸림이 없는 자재(自在)함을 신통이라고 한다. 불교의 교학에서는 삼통(三通)-오통(五通)-육통(六通)의 신통이 있다고 하는데 보편적으로 육신통을 든다. 즉,
천안통(天眼通);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신통
천이통(天耳通); 보통 귀로는 들을 수 없는 것을 듣는 신통
타심통(他心通);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자세하게 아는 신통
숙명통(숙命通); 지나간 세상의 일들을 자세하게 알 수 있는 신통
신족통(神足通); 부사의하게 경계를 변하여 나타내기로 하고 마음대로 날아다니기도 하는 신통. 이를 여의통(如意通)이라고 한다.
누진통(漏盡通); 번뇌를 자재(自在)하게 끊는 신통. 단, 기독교나 혹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기적과는 그 개념이 다르다.
실상(實相) ;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진실한 모습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참모습. 실제 모습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이 말은 궁극적으로 압축해서 한마디로 말하자면 붓다께서 깨달은 내용이다. 붓다께서 깨달은 내용이란 곧 연기의 법으로서, 우주 만유는 공인 것이다. 유마경(維摩經) 중생품(衆生品)에 [부처님께서 실상법인 사람을 위하여.....]라 했고, 열반경(涅槃經)에는 [무상(無相)의 상(相)을 이름 하여 실상이라 한다.]고 했다.
지금 여기서 우리 인간의 실상을 살펴보자. 인간이란 <지. 수. 화. 풍>(地水火風)이라는 사대(四大)가 인과 연에 따라 화합(化合)되어 육신과 정신을 갖춘 인간으로 되었고 생. 노. 병. 사의 가정을 거쳐 마침내는 다시 사대로 흩어져 공으로 돌아간다.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몸과 입과 마음으로 업(業)을 짓고 그 지은 업(因)에 따라 다음의 과정(果)을 밟게 된 다. 이렇게 육도(六途)ㅡ 천계․인간계․수라계․축생계․아귀계․지옥계ㅡ를 윤회라 한다. 이것이 인간의 실상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무상한 삶 속에서 무상함을 모르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빚는 온갖 악업을 지어가며 살아간다. 모름지기 실상을 잘 파악하여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선업을 짓고 살아가야겠다.
십우도(十牛圖) 또는 심우도(尋牛圖) ;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본성을 깨닫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일에 비유해서 그린 선화(禪畵)로 그 과정을 10단계로 구분하고 있어 십우도 (十牛圖) 또는 심우도(尋牛圖) 혹은 목우도(牧牛圖)라고도 한다. 심우도에는 송나라 때 곽암(廓庵)이 만든 것과 그와 같은 시대 보명(普明)이 만든 것의 두 종류가 있으나 한국에서는 곽암의 심우도가 주로 그려졌다. 심우도 10단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심우(尋牛)는 처음에 사람이 들에서 뛰어 다니는 소를 찾으러 가는 모습을 그렸다. 즉 수행자가 사람에게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원성(圓成)인 마음의 소(心牛)를 잃어버린 뒤 그것을 찾으러 나선 것을 비유한 것이다.
② 견적(見跡)은 수행자가 이제 소의 발자국을 발견한 것을 그린 것으로서, 이제 점차 심의(心牛)의 자취를 보기 시작했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③ 견우(見牛)는 수행자가 소의 울음소리를 듣고 소가 있는 곳에서 소의 모습을 어렴풋이 본 것을 그렸다. 즉 문법수학(聞法修學)의 공에 의해 마음의 소(心牛)를 발견한 것을 비유한 것이다.
④ 득우(得牛)는 수행자가 소를 잡았지만 아직 길들여지지 않아 소에 채찍질하는 모습을 그렸다. 즉 이제 본성을 찾았지만 아직 번뇌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더욱 열심히 수련해야 한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⑤ 목우(牧牛)는 소에 고삐를 물리고 돌아오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깨달음 뒤에 오는 방심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비유했다.
⑥ 기우귀가(騎牛歸家)는 길들여진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며 돌아오는 모습을 그렸다. 즉 드디어 망상에서 벗어나 본성의 자리에 들었음을 비유한 것이다.
⑦ 망우존인(忘牛存人)은 집에 돌아왔지만 소는 간 데 없고 오직 자기 혼자만 남아 있는 것을 그렸다. 즉 본각무위(本覺無爲)로 돌아왔으나 쉬지 않고 수련해야 한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⑧ 인우구망(人牛俱忘)은 소를 잊고 또 자기를 잊는다는 것을 뜻하기 위해 텅 빈 원 만을 그려놓았다. 즉 정(情)을 잊고 세상의 물(物)을 버려 공(空)에 이르렀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⑨ 반본환원(返本還源)은 티끌 하나도 없는 수록산청(水綠山靑)의 광경을 그렸다. 즉 그의 본심은 본래 청정하여 아무 번뇌가 없어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보게 되며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참된 지혜를 얻었음을 비유한 것이다.
⑩ 입전수수(入廛垂手)는 중생제도를 위해 자루를 들고 자비의 손을 내밀어 중생 있는 곳으로 향하는 모습을 그렸다. 즉 이타행(利他行)의 경지에 들어 중생제도에 나선 것을 비유한 것이다.
아귀(餓鬼) ; 생전에 저지른 악업이 무거워서 아귀도에 빠진 귀신을 말한다. 몸뚱이는 태산집채만한데 목구멍은 바늘구멍 같아서 제대로 먹을 수가 없어 굶주림과 갈증으로 몸서리치는 귀신이라 한다.
아귀도란 아귀 귀신들만이 모여서 살아가는 세계로 음식을 먹으려 하면 불로 변하니 굶주릴 수밖에 없고, 늘 매를 맞는다고 한다. 이곳을 지옥도, 축생도와 함께 3악도라 부른다.
아귀는 죽은 자라는 의미도 있다. 즉 죽은 자의 영혼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손이 선조의 영혼에 봉사하지 않아서 그 영혼이 아귀도에 떨어져 고통을 받는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경전에 의하면 탐욕과 질시가 원인이 되어 아귀로 태어난다고 한다.
염치없이 먹을 것을 탐하거나, 싸움을 잘하는 사람을 칭하여 아귀 같다거나, 아귀다툼을 벌인다 하여 아귀 귀신에 비유하기도 한다.
아만(我慢) ; 범어 Atmana를 의역한 말이며, 자신을 으뜸으로 믿으며 스스로를 높이고 남을 낮추어보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유식론(唯識論)에 [아만이란, 집착하는 <나>를 믿고 마음을 높이는 것]이라 했고, 법화경(法華經) 방편품(方便品)에 [아만과 자존심으로 마음이 굽고 의심을 품어 진실하지 못하며]라고 했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에는 독립되어 존재하는 <나>(我)라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은 연기에 따라 성립되어 상주성이 없다(無常)]고 한다. 따라서 <나>에 집착하는 것(我執)이나 <나>를 믿고 스스로를 높이고 남을 업신여기는 것(莪慢)을 악으로 꼽는다.
아비규환(阿鼻叫喚) ; 아비지옥의 고통을 못 참아 울부짖는 소리를 아비규환이라고 한다. 또 그처럼 참혹한 광경을 아비규환이라고 한다. 아비는 범어 avici의 음역이며 지옥의 이름이다. 즉 아비지옥을 일컬으며 <무간지옥>(無間地獄)이라고 의역한다. 규환은 울부짖는다는 뜻이며, 규환지옥이라는 팔열지옥(八熱地獄)중의 하나이다.
불교에서는 육도(六途)중에 지옥계(地獄界)가 있다고 하며, 그 지옥은 죄를 지은 중생들이 가서 나는 지하의 감옥이라고 한다. 남섬부주(南贍浮洲)의 2만 유순 아래에 무간(無間 : 阿鼻)지옥이 있다. 사방이 2만 유순이며, 위로는 1만 9천 유순이다. 가운데에는 층층으로 대초열(大焦熱) 지옥. 초열지옥. 대규환지옥. 규환지옥. 중합(衆合)지옥. 흑승(黑繩)지옥. 등활(等活)지옥이 있어 이들 지옥과 무간지옥을 합해서 팔열지옥이라고 한다. 각 지옥마다 사방에 4개의 소 지옥(16游增)이 있다.
또 팔열지옥 주변에는 팔한(八寒)지옥이 있고 이 지옥을 염라대왕이 다스리며 지옥으로 떨어진 중생들에게 고통을 준다.
오역죄(五逆罪)를 지으면 무간(아비)지옥에 떨어진다. 이 곳에서는 옥졸들이 가죽을 벗기고, 그 가죽으로 죄인을 묶어 불 수레에 싣고 훨훨 타는 불 속에 넣어 태우고, 야차(夜叉)들이 큰 쇠창을 달구어 죄인의 목을 꿰고 입. 코. 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지기도 한다. 또 쇠매가 눈을 파먹기도 한다고 한다. 어쨌든 이 지옥의 광경처럼 처참한 광경을 두고 아비규환이라고 표현한다. 이런 지옥이 무서워서라기보다도 인간은 인간답게 선행을 짓고 살아야 마땅하리라.
사람들은 조그마한 이익만 있어도 그 이익을 얻기 위해 온갖 짓을 다한다. 뒤에 어떤 과보가 닥칠지는 생각도 안한다. 마치 잡혀 죽을 것은 생각지도 않고 덫에 매달린 살코기에 끌리는 짐승처럼, 지은 업에는 물체의 그림자처럼 결코 떨어지지 않는 그 과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아수라장(阿修羅場) ; 아수라를 줄여서 '수라'라고도 한다. 호전적이며 공격적인, 불교를 수호해 주는 신장인 八部衆의 하나이다. 생전에 몹시 공격적이고 시기심과 교만심이 강한 사람들이 죽어서 업장에 따라 가는 곳을 아수라라고 한다. 그래서 항상 서로 싸우고 헐뜯고 미워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곳을 가리켜 아수라장이라고 한다.
아수라는 원래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귀신으로 호전적으로 싸움을 좋아 하는 존재였다. 그러다가 후에 불교의 수호신으로 수용되어 귀의하면서 불교에 대하여는 순종하는 신이 되었다.
야단법석(野壇法席) ; 불교에서 나온 말의 대표격인 숙어이다. 본뜻은 글자 그대로 야외에 단을 만들고 법을 설한다는 뜻이다. 즉 야외 법회(法會)다. 석존 당시는 물론 그 후에도 인도는 더운 나라였기에 아무 곳에서나 법회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옛적에는 이런 야회법회가 매우 성행했었으며, 그 야외 법회에 많은 인원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었던지 여러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왁자지껄한 모양을 <야단법석>이라고 표현하게 되었다.
언어도단(言語道斷) ; 어미가 없는 말을 듣고 기가 막힐 때 또는 무경우(無境遇)한 말 등을 할 때, 당치도 않다는 뜻으로 쓰인다. 본래는 불교에서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심오한 진리]라는 뜻으로 쓰인 말이다.
법화경(法華經) 안락행품(安樂行品)에 [일체의 법은 공하여, 말(言語)도 도(道)도 끊어져서(斷), 불생(不生). 불출(不出). 불기(不起)하여, 상도 없고 실로 있는 바가 없으므로....]라고 했다. 즉 말도 도도 다 끊어진 경지라는 뜻이다.
유마경(維摩經) 아촉불품(阿促不品)에 [일체의 언어도단이니....] 했고, 또 지관(止觀)에는 [언어도단, 심행처멸(心行處滅)이므로 이를 일러 불가사의경이라 한다.]고 했고, 또 인왕경(仁王經)에는 [심행처멸, 언어도단은 곧 진제(眞際 ; 진리를 탐구하여 끝 간 데)와 같다. 따라서 법성(法性)과 같다.]고 했다.
즉 언어도단의 경지는 곧 실제(實際)인 깨달음의 경지를 일컫는 말이다. 지금 일반적으로 쓰는 말의 뜻과는 큰 차이가 있다. 하기야 언어도단이니 더 갈 데도 없는 막판의 상황이다. 더 말해 무엇 하리.
업경대(業鏡臺) ; ‘전생을 비추는 거울’ 불구의 하나로 업경륜(業鏡輪) 혹은 업경(業鏡)이라고 한다. 업을 나타내는 거울이라는 뜻으로 명도(冥途)에서 죄인의 업을 비쳐 나타낸다고 하는 거울이다. 《사분율행사초자지기(四分律行事 資持記)》권하에는 “1년에 3회 정월과 5월, 9월에 명계(冥界)의 업경륜이 남섬부주를 비치는데, 만약 선악업이 있으면 거울에 모두 나타난다.”고 하였고 또 《지장보살발심인연시왕경(地藏菩薩發心因緣十王經)》에는 “사방팔방에 업경을 달아두어 전생에 지은 선과 복, 그리고 악과 죄업을 나타낸다.
모든 악업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 현세에서 목전에 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 같은 경전의 설에 따라 지장전 안에는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업경대를 설치하는 경우가 많다. 또 지장전 뿐만 아니라 일반 법당에 안치되기도 한다.
보통 업경대는 나무로 제작하고 경륜(鏡輪)은 금속, 또는 나무로 만들어 채색하기도 한다. 거울은 원형이 보통이며 타원형도 있다. 거울 주변에는 불꽃 문양을 사실적으로 나타내 명도의 분위기를 나타낸다. 크기는 50~60cm의 것이 보통이고, 어떤 것은 1m가 훨씬 넘는 것도 있다. 그 중에서 조각이 우수하여 조선시대 목조공예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도 있다. 특히 법당 안에 설치된 업경대는 예로부터 서민 대중에게 권선징악의 표본이 되었고, 또 명계를 대변하는 한 상징이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는 업경대에 얽힌 설화가 많은데, 이 같은 설화는 불교의 내세관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의주(如意珠) ; 절에 가면 불상 위의 닷집에 용의 조각이 있고 그 용들은 모두 입에 구슬을 물고 있다. 그 구슬이 여의주이다. 그 구슬만 구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뜻대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한다. 이 여의주는 용왕이 가지고 있다고 한다. 또 한 설로는 불사리(佛舍利)가 변해서 여의주가 된다고 한다.
지도론(智度論)에 [여의주는 불사리로부터 난다. 법이 멸진(滅盡)되었을 때 모든 사리는 변하여 여의주가 된다. 비유하건대, 천년을 묵은 얼음이 변하여 수정(水晶)이 되는 것과 같다...]고 했으며, 또 [염부제 사람들의 빈궁함을 보고 여의주를 구하고자 하여 용궁에 이르러....]라 했다. 또, [어느 사람이 말하되, 이 보주(寶珠)는 용왕의 뇌에서 나오며, 혹 이 보주를 얻으면 독약도 능히 해치지 못하며, 불에 들어가도 능히 타지 않으며, 이와 같은 공덕이 있어 이는 제석천이 지닌 금강이라 일컫는다...... 이는 과거 구원(久遠)의 뭇 부처님의 사리이니, 이미 법이 멸진(滅盡)되자 사리가 변하여 이 여의주가 되었다. 중생의 이익을 위함이라..... 이 보주는 언제든지 능히 일체의 보멸을 낳고, 의복. 음식이 뜻에 따라 수시로 나오되 그치지 않는다.....]고 했다. 또 잡보장경(雜寶藏經)에는 [세존께서 이르시되, 이 보주는 마갈대어(摩竭大漁)의 뇌 안에서 나온다. 이 고기의 몸길이가 28만리이다. 이 구슬을 금강견(金剛堅)이라 한다.]
본래 여의(如意)란 등을 긁기 위해 나무나 뿔로 사람의 손가락처럼 만든 것이었으나, 불교에서는 승려들이 법요(法要)나 설법 때 또는 경을 강의할 때 손에 들던 도구로 사용했다. 이때 여의에다 중요한 것을 적어 두고 보면서 했다. 말하자면 비망록(備忘錄:memo)구실을 한 것이다.
좀 짖궂게 말하자면 컨닝 페이퍼라고나 할까. 여하튼 손이 안 닿는 곳을 마음대로ㅡ 如意하게ㅡ 긁을 수 있어서 여의라고 한 것일까? 여하튼 일반적으로 여의주는 뜻과 같이 되는 보배구슬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지극하게 불법을 닦으면 여의주를 얻게 된다고 한다.
오탁악세 ; 오탁이란 5가지 장애요인을 말한다.
첫째는 겁탁(劫濁)인데 시대가 오염되어 이 시대에 들면 기근, 역병 등 천재나 전쟁 등이 발생하여 사회가 악해지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견탁(見濁)인데 모든 삿된 사상이나 견해가 번창하여 세상이 어지러운 것이고,
셋째는 번뇌탁인데 중생들이 탐심, 진심 등 온갖 정신적 폐단이 왕성하다는 것이고,
넷째는 중생탁인데 중생의 신심적 자질이 저하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명탁(命濁)인데 수탁(壽濁)이라고도 합니다. 인간의 수명이 짧아집니다. 이 오탁설은 인간수명이 짧아지면서 오탁현상이 나타나고, 처음에는 오탁이 희박하다가 차차로 성장하여 치열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탁현상은 원래 인간수명이 8만 세에서 2만 세가 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 합니다만 전체적으로 볼 때 인간의 지혜가 협소해져서 그에 따라 사회적, 정신적, 생리적 혼돈현상을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지견에 의지해서 굳세게 닦는 사람은 오탁현상에 상관없이 청정을 이룰 수 있는 것이며 구체적 예로 석가모니 부처님도 오탁악세에서 성불하시고 교화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시대와 환경을 탓하지 말고 바른 믿음을 세워 견고하게 정진함으로써 길이 청정한 자성을 빛내고 국토를 밝힐 결의가 있어야 하리라 생각됩니다. 반야바라밀법문에서는 이 점에 대해서 더욱 강한 자신감을 주고 있음은 다 아는 바입니다
옴 ; 진언은 번역하지를 않는 것이 관례입니다. 진언은 범어이므로 당연히 뜻이 있습니다. 수행 상 번역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므로 예부터 번역하지 않았는데 뜻도 여러 가지를 지니고 있어 한말로 번역하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옴자에 대해서 참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옴은 범어 <om>의 음사입니다. 기도할 때에 쓰는 말로 신성한 뜻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여 인도에서는 불교 이전부터 기도어로써 쓰이고 철학 종교서의 첫머리에 두었다고 합니다. 원래의 음은 아(a)-우(u)-움(m)의 합성된 것으로써 브라만교에서 특별히 존중하는 3신을 뜻하기도 하였습니다.
불교에서는 진언 첫머리에 두는 것은 다 아는 바입니다. 수호국계다라니경에서는 옴은 부처님의 법신·보신·화신의 3신을 나타낸 것이라고 하여 옴자를 관할 것을 권하고 있고 그 공덕으로 무상보리를 이룰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옴자에는 귀명, 공양, 3신(三身), 깨달음, 섭복(攝伏)의 5가지 뜻이 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옴자가 법신, 보신, 화신 3신을 포함한 큰 뜻을 지닌 것으로 안다면 옴자를 염하고 관하는 방법도 얼마간 이해가 될 줄을 압니다.
요사(寮舍) ; 스님들이 생활하는 건물을 통틀어서 요사라 한다. 지혜의 칼로 무명을 벤다는 심검당(尋劍堂), 말없이 명상한다는 적묵당 (寂默堂), 참선과 강설의 복합적 의미의 설선당(說禪堂), 올바른 행을 하는 곳이란 해행당(解行堂), 참선하는 곳이란 수선당(修禪堂), 불전에 올리는 공양은 향나무를 때 밥을 짓는다는 향적전(香積殿), 조실 스님이나 대덕스님이 머무는 염화실, 반야실 등의 다양한 명칭이 있다 . 법당은 일반적으로 불·보살님을 모시는 상단,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을 모시는 중단, 영가를 모시는 영단의 삼단구조로 되어 있다.
유명무실(有名無實) ; 이름만 있고 영원한 ㅡ 무상하지 않은 ㅡ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모든 물체는 그 이름은 있으되 인연이 다 되면 그 이름조차 없어진다는 것이다. 가령 여기 수레가 있다고 하자, 이 수레는 사람의 손으로 나무를 켜고 깎고 다듬어서 지어놓고 이름 하여 수레라 하지만 이것이 어느 때건 부서지고 망가지면 수레라는 이름조차 없어진다는 것이다.
불교용어로 인연가화합(因緣假和合)인 것이다. 그래서 이름은 있으되 실체가 없음을 뜻하는 말이다. 일반적으로도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유명무실한 것이 많이 있다. 예컨대, 가정의례준칙 같은 것이 그러한 예이다. 결혼식을 가정의례준칙에 따라 간소하게 하도록 규정되어 있으나 실천되지 않고 있어 초호화판 결혼식, 사치를 극한 혼수, 현란한 화환 등이 성행하고 있다. 이런 것이 곧 유명무실인 것이다.
유야무야(有耶無耶) ; 마음이 유(有).무(無) 양 변에 쏠리어 주저주저하고 결정을 못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또 불교에서는 사구분별(四句分別)이라 해서 어떤 현상을 관찰함에 있어 네 가지의 논리방식이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상(事象)에 대해 있다(有)고 보는 견해와 없다(無)고 보는 견해, 있으며(有) 또한 없다(無)고 보는 견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견해다.
그래서 결국 있느냐 없느냐고 물으면 형이상학적인 명제(命題)에는 대답을 안 한다. 즉 <유야무야>인 것이다. <유야무야>란 [있느냐? 없느냐?]는 선적(禪的)인 질문이다. 이른바 선문답인 것이다. 이런 뜻에서 일반적으로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결론 없는 상태를 유야무야라고 하게 된 것이다. 즉 일반적으로 흐지부지되고 만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인과응보(因果應報) ; 우리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격언이 있다. 인과의 법칙도 이와 같아서 온갖 행동, 행동하려는 의도, 태도 등은 그 자체가 열매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생을 통하여 작용하는 보편타당한 인과응보의 법칙을 중요시한다. 중생의 마음에는 악과 선이 쉴 사이 없이 교차하고 있다.
악한 마음으로 행동하면 불행한 결과가 오고, 선한 마음으로 행동하면 좋은 결과가 오는 것이다. "자기가 지은 업, 즉 악업이건 선업이건 그 업은, 천 마리의 어미 소를 풀어놓아도 송아지는 틀림없이 자기 어미를 찾듯이, 세세생생 찾아온다."는 말이 경전에 있다. 이와 같이 업보란 피할 수 없는 인과응보의 법칙인 것이다.
자비(慈悲) ; 자비는 어둠속의 중생에게 광명을 주고 괴로운 자에게 즐거움을 주는 활동을 말한다. 자비를 베풀 때는 냉철한 판단으로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행하여야 하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순수하게 행해야 하며, 끝까지 완벽하게 행해야 한다.
자비는 지혜를 바탕으로 한 인간애의 표현이다. 부처님은 그를 비방하고 모략했던 사촌동생 데바닷타를 무한한 자비로 감싸 용서하셨다. 이와 같이 모두가 스스로를 낮추고 인욕으로써 자비심을 베풀 때 불교의 진리는 바로 가까이 있을 것이다.
자업자득(自業自得) ; 이 말은 인과응보라는 불교의 교리. 사상에 바탕을 둔 말로서 자신이 지은 업(業)에 따라 반드시 그 과보(果報)를 받게 된다는 뜻이다. 업이란 우리가 말(口)로나, 생각 혹은 행동으로 짓는 짓거리를 일컫는 불교 말이다.
범어 Karma의 번역이며 <짓는다.>는 뜻이다. 이 업은 선업과 악업으로 크게 나눈다. 인간은 어떤 일(상황)을 당해서 정신작용을 통해 뜻이 확정되면 그것이 외부로 표현되며(表業), 혹 외부로 표현은 되지 않더라도 마음속에 계속 그 감정을 지니고 있는 경우(無 表業)도 있다. 이러한 일련의 작용을 업이라고 하며 이 업이 선하든 악하든 반드시 그 결과가 있게 되므로 이를 업인(業因)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 업과 과보의 연계관계는 눈에 드러나게 분명치가 않다. 지금 지은 업(現業)의 과가 바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고 지난 생에 지은 업(宿業)의 과보가 지금 나타나기도 한다. 이렇듯 자신이 지은 업(原因)은 반드시 과보가 있다는 것은 진리이다. 이를 자업자득이라고 하는데, 흔히 좋지 않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어떤 좋지 않은 일을 꾸몄다가 실패해 서 곤경에 처했다던가, 평소 남에게 인색하고 못되게 굴던 사람이 불행해졌을 때 이를 두고 자업자득이라고 한다.
이 말에는 다분히 경멸하거나 경책(警責)하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여하튼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적선(積善)은 할지언정 적악(積惡)을 해서는 안 된다. 불교에 바탕을 둔 말은 아니지만 이와 비슷한 뜻의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는 말이 있다.
자유자재(自由自在) ; 임제록(臨濟錄)에 [만약 진정한 견해(見解)를 얻으면 생사에 물들지 않고 거주(去住)가 자유하다.]고 했다. 참다운 깨달음을 얻으면 어떤 변화에도 마음을 빼앗기거나 흔들리는 일이 없고 가고 머물고 하는 것이 모두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이다. 즉 자유란 [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自)에 말미암아(由) 존재하고 행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나, 인간이 집착하는 자아(自我)에 의존해서 방종하다는 뜻이 아니라 나를 떠나 우주의 대생명과 하나가 되었을 때 아무 걸림도 없이 <뜻대로>되는 것이다. 이것이 자유이며, 자재인 것이다.
법화경에 [마음의 자재를 얻다.]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부처를 <자재인>(自在人)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쓰는 영어의 freedom이나 리버티와 같이 권리를 함축하는 의미의 자유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말이다. 그야말로 아무 걸림 없이 대우주와 함께 하는 것을 자유자재라고 한다.
점심(點心) ;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낮 끼니로 먹는 식사를 일컬으나 본래 불교에서 ㅡ 특히 선종에서 ㅡ 정식(正食) 사이에 먹는 간식을 점심이라고 했다. 공복에 점을 찍듯이 먹는다는 뜻이다. 이 점심에 얽힌 재미있는 선문답(禪問答)이 있다.
옛적 중국 사천 땅에 덕산 선감(德山宣監)이라는 스님이 있었다. 율장(律藏)을 깊이 공부했으며, 특히 청룡법사의 <금강경소초>(金剛經蔬秒)를 깊이 연구하고 자주 강의했으므로 주금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이 덕산이 남쪽지방에 선풍이 매우 번성하다는 말을 듣고 분개하여 이렇게 외쳤다. [수많은 출가인인 수많은 세월동안 부처의 위의를 배우고 계행(戒行)을 지키느라 애썼어도 성불하지 못했거늘 남방의 도깨비 같은 놈들이 감히 직지인심(直指人心)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한다고 떠들고 있다니 내 가서 그놈들의 소굴을 습격하여 그 종자들을 없애 부처님의 자비로운 은혜에 보답할 것이다.] 그리고는 <금강경소초>를 둘러메고 사천에서 호남으로 길을 떠났다. 도중에서 떡장수 노파를 만났는데 이때 그는 피곤하고 배도 고파 보따리를 내려놓고 떡으로 점심 요기를 하려 하였다. 노파는 그 보따리의 책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것은 무슨 책입니까?] [<금강경소초> 입니다.] [어느 경(經)을 풀이한 책이지요?] [<금강경>의 소를 낸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노파는 이렇게 말하였다. [한 가지 물어봅시다. 내 질문에 대답을 주시면 점심을 거저 드리겠소만, 만일 그렇지 못할 때는 다른 데 가서 사먹어야 되겠어. <금강경>에 과거심(過去心)도 얻을 수 없고 현재심(現在心)도 얻을 수 없고 미래심(未來心)도 얻을 수 없다 하였는데 당신은 어느 마음에 점을 짝을 것입니까?] 덕산은 이 질문에 말문이 꽉 막혔다. 그래서 그는 선을 공부하겠다고 결심하고 용담으로 발길을 돌렸다. <點心>을 먹겠다고 하니까 어느 마음에 점을 찍을 것이냐고 물은 떡장사의 마음공부가 주금강보다 훨씬 앞서 있었던 것이다.
점안(點眼) ; ‘신앙적 기능’ 부여하는 의식 불교신앙의 대상에다 생명력을 불어넣는 의식. 개안식(開眼式)이라고도 한다. 불상·불화·만다라·석탑·불단 등을 만들거나 개수하였을 때, 이에 공양하고 그 불구(佛俱)의 근본서원(根本誓願)을 개현(開顯) 하게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나무나 돌·종이 등에 조각되고 그려진 대상에 점안식을 행함으로써 비로소 영험을 나타낼 수 있는 신앙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흔히 거행되는 점안식으로는 불상점안·시왕점안·사천점안·조탑점안·불화점안·가사점안 등이 있다. 이들 점안식은 점안의 대상이 지니는 신앙적 기능에 따라서 그 의식내용도 달라진다. 불상점안은 부처님이 가진 32상(相) 80종호(種好) 의 장엄을 나타내게 해 달라는 것이다. 32상 80종호는 부처님이 지닌 상호로서, 불상을 제작할 때 이미 이와 같은 특징을 조각하거나 그리기도 하지만, 점안식은 이 들 상호가 지니는 신앙적 의미에 생명을 부여하는 의미를 지닌다.
점안식의 절차는 먼저 점안의식을 행하는 도량을 정화한 뒤, 새로 조성한 불상이 32상 80종호의 특징과 여래 10호의 전지전능한 능력을 구족한 불상이 되어줄 것을 발원하고 권공(勸供) 예배한다. 그 뒤 불상의 눈을 붓으로 그리기 전에 이 불상의 눈이 육안(肉眼)·천안(天眼)·혜안 (慧眼)·법안(法眼)·불안(佛眼)·십안(十眼)·천안(天眼)·무진안(無盡眼)을 성취한 청정하고 원만한 눈이 되길 기원하며, 또는 육신통(六神通) 등의 불상이 되기를 발원한 뒤 개안광명진언(開眼光明眞言)·안불안진언(安佛眼眞言)·관욕진언(灌浴眞言)·시수진언(施水眞言)·안상진언 (安相眞言) 등을 외워서 부사의한 힘을 가지게 한다.
지혜(知慧) ; 이 말은 불교에서 가장 많이 쓰며, 그런 만큼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는 말이다. 범어 prajna의 번역이다. 불교에는 육바라밀이라는 여섯 가지의 바라밀(paramita)이 있다. 파라미타란, 저 언덕을 뜻한다. 저 언덕이란, 이상의 세계 이상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보살들의 수행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즉 육라바밀이란 6가지 수행법이라는 뜻이다.
지혜는 이 육바라밀 중의 하나로서 모든 도리를 밝히어 봄으로써, 미망(迷妄)을 벗어나서 깨달음을 성취하려는 힘이다. 어두운 방에 촛불을 밝히면 방 안의 어둠이 사라지듯이 지혜를 갖춤으로 써 번뇌가 사라진다고 한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지>는 상대적인 세계의 진리를 아는 작용이며, <혜>는 절대적인 세계를 깨닫는 작용이다. 다시 말하면, 상대적인 세계란 세속이며 절대적 세계란 대우주의 실상을 밝혀 미망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법화경(法華經) 분별공덕품(分別功德品)에 [보시.....선정의 5가지 바라밀은 반야(지혜)바라밀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라고 했을 만큼 지혜는 중요한 의의가 있는 말이다.
착안(着眼) ; 눈을 주의하라는 뜻이다. 즉 마음을 써서 주의하라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착>(着)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마음이나 사물에 집착하여 떨어지지 않는 것을 <착>이라고 한다. 애착. 집착. 탐측(貪着)등. 법화경(法華經) 방편품(方便品)에 [내가 성불한 이래로, 갖가지 인연 갖가지 비유를 들어 널리 설하여 가르치는 등 무수한 방편으로 중생을 인도(引導)하여 모든 <착>에서 떠나게 했다.]고 했다. 이처럼 상(想)에 집착하면 <착상>, ㅡ 지금은 어떤 일의 실마리가 될만한 좋은 생각이라는 뜻 ㅡ 마음에 집착하는 것을 <착심>, 법(法)에 집착하는 것을 <착법>이라고 했다.
착안은 좋은 의미로서 어떤 일을 주의해서 마음 쓰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예컨대, 학자들이 어떤 사실에 착안해서 연구한 끝에 큰 성과를 거두는 경우도 많다. 뉴턴이 사과 떨어지는 것에 착안해서 만유인력을 발견했고, 에디슨이 번개 치는 것에 착안해서 전기를 발명하는 등 모든 것을 유심히 관찰 착안하면 뜻밖의 큰 성과를 거두게 된다.
찰나(刹那) ; 범어의 ksana, 쿠샤나의 음역이다. 아주 짧은 시간 -순간 이라는 뜻이다. 정확히 계산하면 75분의 1초라고 한다. 그래서 찰나의 21,600배가 수수(須搜 ; 48분)이며 수수의 30배(1,440분)가 1주야라고 한다. 따라서 찰나는 물질의 소입자처럼, 시간의 최소단위로 보면 된다. 생명은 난자와 정자가 결합되는 <찰나>부터 시작되어 그로부터 <찰나찰나>마다 끊임없이 생멸을 거듭한다고 한다.
현대과학이 인체의 수없는 세포들이 생멸하는 것을 구명하고 있지만 2,500년 전에 석존은 직관(直觀)으로써 이를 꿰뚫어보고 찰나마다 생멸한다고 했으니 얼마나 위대한가. 우리 몸의 세포만 이처럼 찰나마다 생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생각 역시 찰나마다 일어났다가 스러진다고 석존께서 설했다. 이러한 마음의 생멸이 그친 자리인 것이다.
참회(懺悔) ;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의 하나가 부끄러움을 알고 참회하는 것이라고 한다. 범어의 ksama 를 번역한 한자어이다. 참회의 <참>은ksama의 음역인 <참마>(懺摩)를 약한 말이며 <회>는 참마를 의역한 한자어이다. 즉 같은 뜻의 범어와 한자어가 하나의 낱말을 이룬 것이다. <발우>도 이와 같은 똑같은 경우이다. 발우(鉢盂)란 승려들의 식기이다.
발은 범어 patra의 음역으로 그릇이라는 뜻이고, 우는 파트라를 번역한 말(사발우)로서 범어의 그릇과 한자의 사발이라는 두 말이 합쳐서 발우라는 한 낱말을 이룬 것이다. 남의 발을 밟았을 때 [미안합니다]하는 마음이 참이며, 나쁜 짓을 하고 뉘우치는 마음이 회이다. 인간이 인간다우려면 이러한 참회가 있어야 하는데, 참회를 할 줄 모른다. 악인이 스스로 악인임을 알면 그는 이미 악인이 아니다. 그래서 석존은 [이미 낳은 선(善)은 더욱 키우고 아직 나지 않은 선은 나게 하고.... 이미 낳은 악은 참회하고 아직 나지 않은 악은 나지 않게 하라]고 설했다.
죄를 짓는 것보다, 죄를 짓고 참회하지 않는 것이 더 나쁘며, 악을 짓고 참회하는 것보다는 미리 악을 짓지 않도록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이것이 사람답게 사는 사람의 도리이다. 불교에서는 매달 보름달과 그믐날 승단의 대중들이 모여서, 계율을 한 조목씩 읽고 그것을 범한 사람은 고백하는 의식 ㅡ 이것을 포살(布薩)이 라고 한다. ㅡ 이 있었고 도 하나는 안거(安居)가끝나는 날 스스로 잘못한 것을 대중 앞에서 고백 참회했다. 지금은 거의 이 포살을 하지 않는 것 같다.
탁발(托鉢) ; 발은 발우(鉢盂 ; 범어 발다라의 음역)의 준말이다. 석존 당시부터 출가자는 걸식으로 명을 유지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보시 받은 음식을 담는 그릇을 발이라 했고, 그 발 ㅡ 발우ㅡ에 의탁(依托)해서 산다는 뜻으로 탁발이라 한다. 걸식(乞食)과 같은 뜻이다.
출가자가 걸식을 하는 것은 생산이나 상행위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출가자에게 생산이나 상행위를 금하는 것은 이익추구를 금하기 위해서다. 이익추구란 궁극적으로 남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걸식은 출가자의 중요한 수행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직접 음식을 탁발하기도 하지만 주로 곡식이나 재물을 탁발해서 절 운영이나 특정한 불사(佛事)에 충당했다. 그러나 지금은 탁발을 빙자한 비행을 방지하기 위해 불교 종단에서는 원칙적으로 탁발을 금하고 있다. 동남아의 소승 불교권에서 지금도 전통적인 탁발을 하고 있다.
탐욕(貪欲) ; 지나치게 탐내는 욕심, 분수에 넘치는 욕심을 내는 것을 탐욕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마음의 세 가지 독(三毒) 중의 하나로 탐욕을 꼽는다. 삼독이란 제일 먼저 탐욕이고, 둘째 성내고 성미를 부리는 것(瞋心)이고, 셋째는 어리석음이다.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은 탐욕에서 비롯된다. 탐욕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자연 조급해지고 난폭해져서 성내고 짜증을 부리게 되고,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을 바로 보고 바로 판단하지 못하니까 점점 어리석어지고 어리석은 판단을 하게 된다고 한다.
법화경(法華經) 비유품(譬喩品)에 [여러 고(苦)의 원인은 탐욕이니....]라고 했다. 석존께서 인간의 탐욕을 표현하여 [저 수미산을 모두 금으로 화(化)한다 해도 단 한 사람의 탐심도 채우지 못한다.]고 했다. 근간의 모 해운회사의 사건, 이른바 <큰손>이라는 경제사범, 저명 정치인들의 독직사건 등에서 그 금액의 액수가 일반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천문학적 숫자임을 볼 때 과연 인간의 탐욕은 끝도 없고 한도 없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석존께서는 또 탐욕은 불길 같아 모든 것을 태우고 만다고 했다. 모름지기 자신의 분수를 알고 적은 것(小欲)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모든 사람이 고루 행복해질 것이다. 불교에 <오유지족>(五唯知足)이라는 말이 있다. 그 뜻을 곰곰이 새겨 보고 <오유지족>하는 슬기로운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이것이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인 것이다.
탑(塔) ; 불교하면 탑, 탑하면 불교를 연상할 만큼 불가분의 관계이며 불교신앙의 상징이다. 본래 stupe라는 범어의 음역인 탑파(塔婆)의 준말이다. 탑의 내력은 이러하다. 석존께서 입멸했을 때, 각국의 왕들이 서로 석존과의 연고를 내세우고 그 유골(이른바 舍利)를 단독으로 모셔다 봉인하려고 다투어 자칫 전쟁이 일어날 위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왕들이 서로 협의하여 유골을 8등분하여 각각 탑을 짓고 모시게 되었다. 이것이 탑의 시초이다.
지금 남아있는 탑으로는 <산치의 대탑>이 유명하다. 산치탑에서 보듯이 큰 봉분 ㅡ 우리나라의 산소 모양의 봉분 ㅡ 위에 상륜(相輪)을 세웠던 것이, 중국에서 오늘날 보는 것과 비슷한 석탑으로 변했으며 그것이 우리나라에 와서 발달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에 목탑을 지었으나 차차 석탑으로 변했고 더러 전탑(塼塔 ; 벽돌탑)도 생겨났다.
우리나라의 경우 황룡사의 9층 목탑이 유명하다. 중앙박물관을 새로 개관하면서 황룡사의 모형과 그 거대한 목탑(추정높이 약 70m)의 모형이 만들어져 전시되고 있다. 탑 형식의 건물로는 법주사의 팔상전(捌相殿)이 유명하다. 석탑으로는 불국사의 다보, 석가탑이 대표적이며, 전탑으로는 분황사의 9 층 목전탑(지금은 3층만 남았음), 안동의 5층 전탑, 신륵사의 전탑이 유명하다.
최근 지어진 탑으로는 전통기법으로 쌓은 서울(삼선포교원)의 3층 전탑이 볼 만하다. 서울 탑골공원의 10층탑은 대리석으로 만든 탑의 대표적이다. 탑은 이처럼 불교신앙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상징이기도 하다.
탱화 ; 종이나 비단 또는 베(布) 바탕에 불 보살의 모습이나 경전 내용을 그려 벽에 걸도록 만들어진 불교 그림이다. 현재 전하는 고려·조선시대 불화 가운데 대부분이 이 탱화의 범주에 드는 그림들인 까닭에 탱화 하면 곧 불화를 떠올리거나 같은 뜻으로 쓰고 있지만 이는 불화의 한 형식일 뿐이다. 벽화의 종류는 그려진 주제의 내용에 따라서 상단(上壇)·중단(中壇)·하단(下壇) 탱화로 구분된다.
[상단탱화] 전각의 상단 즉 불전(佛殿)의 중앙에 모셔진 불 보살상의 뒷면에 거는 탱화로서 다음과 같은 종류가 있다.
석가모니불탱화 : 대웅전 후불탱화로서 영산회상도를 바탕으로 해서 아미타불과 관음보살·대세지보살 그리고 약사불과 일광보살·월광보살 이 각각 좌우에 협시한 구도가 일반적이다.
아미타불탱화 : 극락전 탱화로서 서방정토에서 아미타여래가 설법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 보통이지만 대웅전 후불탱화와 같은 영산설법도의 내용을 그린 것도 있다.
비로자나불탱화 : 대광명전·대적광전 후불탱화로서 《화엄경》의 설법장면을 그린 것이다. 대웅전이 주불전일 경우에는 비로전이나 문수전·화엄전 중앙에 배치된다.
약사불탱화 : 약사전 후불탱화로서 약사정토의 특성을 묘사했다. 일광·월광보살을 협시보살로 하고 사천왕이 호법신중을 하고 있다. 단독으로 배치되기보다는 삼불 탱화의 하나로 많이 그려졌다. 국립박물관 소장의 회암사(檜巖寺) 약사삼존탱화가 유명하다. [중단탱화] 불단의 좌우측에 있는 영가단(靈駕壇)에 거는 탱화로서 주로 신중(神衆)이나 호법신(護法神) 등을 그린 탱화이다.
칠성(七星)탱화 : 중국 도교의 북두칠성에 대한 신앙이 칠성신앙으로 불교에 습합되면서 그려진 탱화이다.
산신(山神)탱화 : 토속신앙의 산신신앙이 불교에 습합되어 독립된 신앙체계를 이루게 되면서 산신각에 봉안된 탱화로 산신과 그의 화신인 호랑이를 그렸다.
[하단탱화]
명부전의 지장보살·시왕상 뒤에 거는 탱화이다. 대체로 불전의 좌우측 벽면에 설치되는 하단의 전면에 영가의 위패나 사진을 봉안하고 그 뒷면에 탱화를 건다.
피안(彼岸) ; 글자 그대로 저쪽 강 언덕이다. 인류가 사는 세계, 고통스러운 이쪽에서 바라본 고가 없는 이상의 세계를 피안이라고 한 것이다. 범어 파라미타(波羅密多)를 도피안(到彼岸)이라고 번역한 말이다. 이쪽은 미망이 있는 그래서 고통이 있는 서계이고, 저쪽 언덕은 깨달음의 세계, 그래서 낙만 있는 세계인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러기 위한 실천이 따라야 하며 그런 실천덕목을 성취한 상태를 도피안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대승불교에선, 이런 실천덕목으로 <육바라밀>을 든다. 즉 물질적인 베풀음, 진리를 깨우치도록 이끄는 베풀음, 두려움과 어리석음을 덜고 안온을 누리게 해주기 위한 베풀음 등의 보시. 그리고 수행상의 규율을 굳게 지키는 지계, 박해나 어려움을 참고 이겨내는 인욕, 몸과 마음의 이완을 막고 진실을 실천하는 정진, 마음의 동요를 안정시켜 진실한 세계를 향해 집중하는 선정, 진리와 정의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의 여섯 가지가 그것이다. 말하자면 육바라밀이 이쪽에서 열반언덕인 피안으로 건너가는 뗏목인 셈이다.
[금강 반야 배를 타고 돛을 펼치자, 이 언덕은 고통 많은 생사의 바다. 저 언덕은 부처님의 광명의 나라, 아제 아제 바라아제 어서들 가세.]
이런 불교적인 뜻이 담긴 말이 일반화되어 동경하거나 이상으로 여기는 목표를 피안이라고 표현하게 되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 ; 좋은 일에는 이런 저런 장애가 생기기 쉽다는 뜻이다. 그래서 옛적에는 귀한 자손일수록 천한 이름을 붙여 마장(魔障)이 끼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벽암록(碧巖錄) 86칙에 [호사불여무](好事不如無)라 했다. 호사란 예불. 경 읽기 등 수행을 위한 좋은 행위를 말한다. 즉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그런 일에 집착하기가 일쑤이므로 오히려 없는 쪽이 더 낫다는 뜻이다. 우리의 일상생활 자체가 불보살의 가피 안에서 하는 것인데 별달리 또 무슨 좋은 일을 할까보냐는 뜻이다.
이것이 부처의 광명이고 저것이 불보살의 가피라 하고 한정을 짓는 일 자체가 이미 장애라는 뜻이다. 이렇듯 호사 자체가 마장이라는 뜻으로 쓰이던 말이 바로 <호사다마>다. 그것이 차차 후세로 내려오면서 오늘날과 같은 뜻으로 쓰이게 된 것이다.
화신(化身) ; 불보살이 중생을 제도(濟度)하기 위해 여러 모습으로 몸을 바꾸어 나타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관세음보살은 33가지 모습으로 변한다고 한다. 때에 따라서는 브라만 등 이교도의 몸으로도 나타나 중생을 교화 제도하며 혹은 야차(夜叉),아수라(阿修羅) 등 비인간의 모습으로도 나타난다고 한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불보살의 화신일 수도 있다.
이런 뜻에서 어떤 일에 외곬으로 전념해 온 사람을 화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예를 들면 헌신적이고도 자비로운 간호원을 일컬어 <관음의 화신><자비의 화신>이라고 하는 따위다. 또 지극히 순결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미의 화신>이라고 하고 사악한 짓을 많이 하는 사람을 <악의 화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희사(喜捨) ; 아무 후회 없이 기쁜 마음으로 재물을 내놓는 일을 희사라고 한다. 어지간한 사람은 흉내도 내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보시(布施)를 수행덕목(육라바밀)의 첫째로 꼽는다. <보>(布)는 <普>와 같은 <널리>라는 뜻이며, <시>(施)는 베푼다는 뜻이다.
보시는 재물을 베푸는 <재시>(財施)로 나눌 수 있다. 이 보시야말로 아무런 반대급부나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마음의 베풀음이다. 희사도 이런 뜻이어야 한다. 그러나 타산적인 속셈이 있는 희사는 참다운 희사가 아니다.
인간사회란, 서로 베풀고 혜택을 받고 사는 것이다. 크게는 자연이 베푸는 혜택으로 생물이 살고 있으며, 생물은 어떤 형태로든 받은 만큼의 혜택을 자연에 돌려주면서 살아간다. 인간사회도 마찬가지여서, 작게는 부모 자식 등 가족끼리, 넓게는 이웃끼리 나라와 나라끼리 서로 베풀고 받고 공존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주고받음에 있어 공평치 못하거나 일방적일 때, 다시 말해서 이해관계의 평형이 깨졌을 때 반목하게 되고 다툼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있는 자는 사회를 위해 희사할 줄 아는 풍토가 조성되어야겠다.
이는 굳이 불교적, 윤리적인 면을 떠나서 소득의 균등한 분배라 는 경제적 측면으로도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가끔 희사하는 분들의 미담을 듣고 가슴 뭉클함을 느낀다. 평생 동안 잘 먹지도 못하고, 잘 입지도 않고 모은 전 재산을 불우한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희사하는 경우, 머리가 숙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