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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무)신교총연합회ㅡ사)한국무교협동조합 원문보기 글쓴이: 소서노
샤머니즘박물관 설립 취지 및 소장 유물
1. 들어가는 말
2. 샤머니즘박물관 설립 배경 및 취지 그리고 활용성
3. 샤머니즘박물관과 금성당(錦城堂)
4. 샤머니즘박물관 소장 유물 1) 신도(神圖)류 2) 굿문서류 3) 신복류 4) 부채류 5) 방울류 6) 명두류 7) 종류 8) 창검류 9) 부적류 10) 설경류
5. 샤머니즘박물관 소장 유물의 가치
❐ 참고문헌
1. 들어 가는 말 본 글은 샤머니즘박물관 설립 배경과 목적, 소장 유물의 종류와 형태 그리고 가치 및 활용 방안에 대해 논하는 것이다. 샤머니즘박물관에는 신도류, 신상류, 석상류, 목어류, 신복류, 신구류, 문서류, 당사주책류, 부적류, 점구류, 제기류, 제상류, 명두류, 악기류, 촛대향로류, 초향류, 부채류, 방울류, 창검류, 명다래류, 설경류, 고비전류, 지화류, 악기류, 술잔 잔대류, 상자류, 큰머리류, 옹기류, 자기류, 꼭두류 등 우리나라 무속현장에서 쓰인 각종 신구(神具)를 비롯한 네팔, 몽골, 중국의 샤먼유물 약 3만 여점이 있으며, 샤머니즘 관련 장서 및 무속 현장에서 채집된 영상, 음향, 사진, 공연행사 등의 자료가 있다. 지면 관계로 본 글에서는 박물관 소장 유물 중, 신도(神圖)류, 굿문서류, 신복류, 부채류, 방울류, 명두류, 종류, 창검류, 부적류, 설경류 등 10 여개 종류의 유물을 선별하여 논하기로 한다. 그리고 신도와 관련하여서는 명칭, 유래, 형태, 제작자, 수량 등을 중점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 특히 황해도 신도의 제작자 및 수집 경로 등을 기록화 일면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본 글은 샤머니즘박물관 소장 유물 및 형태와 그 가치에 대해 논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샤먼유산을 보존 기록하고 활용키 위한 미래적 방안을 모색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하겠다.
2. 샤머니즘박물관 설립 배경 및 취지 그리고 활용성 샤머니즘은 우주 창조와 삼라만상의 지배, 인류사회의 계승과 발전을 도모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여 왔다. 민족 정서와 감성을 키어준 영靈적 에너지의 근원 또한 샤머니즘으로부터 생성되었다. 한민족 역사와 문화 속에서는 종교, 정치, 예술을 규범화하는 중심축으로 작용하였고 그 역할은 지속되고 있다. 그래서 샤머니즘은 민족의 뿌리와 근원을 밝힐 뿐만 아니라 한인의 종교 심성과 삶의 철학을 밝히는 중요한 바탕이 되는 것이다. 이를 실증하는 것이 유형적 유산로써의 신물(神物)이다. 무속학자 양종승이 평생 수집한 샤먼유물 및 관련 장서를 비롯한 영상, 사진, 녹음, 행사자료 등 약 3만여 점이 모여 샤머니즘박물관이 조성된 것도 이런 까닥이다. 양종승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3동 산 87-1번지에 자신이 거주했던 집을 개조하여 2013년 5월 2일 샤머니즘박물관을 개관하였다. 그리고 3년 후인 2016년 5월 25일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2로 57-23 금성당(錦城堂)으로 옮겨졌다. 이를 위해 2016년 4월 6일 은평구(구청장 김우영)와 MOU 체결을 맺었고, 같은 해 4월 18일 세부약정서에 조인한 후 개관한 것이다. 주지하다 시피, 금세기는 천연자원이나 노동력이 국가 원동력이 되었던 과거와는 달리 삶의 경험과 지혜 그리고 민족의 철학과 정서가 배여 있는 문화유산이 나라의 큰 힘이 되고 있다. 문화유산은 곧 나라의 국력과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문화가 국부를 창출하는 시대에서는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전통문화의 가치를 더욱 중요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민족의 사상과 철학 그리고 종교 심성이 담겨져 있는 전통적 신앙 유산은 그 가치가 더욱 빛나기 때문에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이는 현대의 새문화 창조에 큰 틀로 역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세계화 경쟁시대에 국가의 문화 전략과도 긴밀한 연관 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샤머니즘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신앙 유물은 한민족 역사와 문화를 살피게 하는 귀중한 문화유산의 자료일 뿐만 아니라 세계화 속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진정성 담긴 한민족의 문화재이다. 따라서 우리의 민족성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샤먼유물의 보고라 할 수 있는 샤머니즘박물관 기능은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역사 문화가 깊게 서려 있는 샤머니즘 유산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이 속에 담긴 유무형적 가치를 찾아 민족신앙의 구조와 형태 그리고 의미를 정립할 수 있는 자료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샤먼유산을 보존하고 가꾸는 것은 이를 현재적 문화로 살아 숨 쉬게 하는 활용성을 꾀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문화적 청체성을 회복하는 작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편, 문화재에 있어서 보존과 기록 그리고 활용은 각각 별 개의 사안이 아니라 서로가 맞닿아 있는 상접관계에 놓여 있는 영역이다. 올바른 기록이 이루어져야 과학적 보존이 가능하며 또한 살아 있는 문화 콘텐츠로 활용이 가능 할 것이다. 이를 위한 샤머니즘박물관의 주요 사업에는 1) 샤머니즘 유물 및 자료 수집, 체계적 정리, 과학적 보존, 2) 샤머니즘 유물 및 자료에 대한 국내외 학술 조사 연구, 3) 샤머니즘 유물을 통한 전시, 교육, 교류, 문화콘텐츠 개발 등이 담겨져 있다. 3. 샤머니즘박물관과 금성당(錦城堂) 샤머니즘박물관이 들어서 있는 금성당(錦城堂)은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년∼1457)을 주신으로 모셨던 신당(神堂)이었다. 금성당 주신(主神)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은 1426년(세종 8년) 세종대왕과 소헌황후 심씨 사이에 여섯째아들로 태어나 이름은 유(瑜)이며 7살 때인 1433년에 대군으로 봉해졌다. 그는 단종의 숙부인 동시에 세조(世祖)의 아우이다. 어릴 적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충성심이 많았던 금성대군은 조카의 왕위를 노리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의 모함으로 1455년(단종 3년) 삭녕(朔寧)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광주(廣州)로 이배(移配)되었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핍박하여 왕위를 수선한 이듬해에는 성삼문ㆍ박팽년 등이 중심이 되어 단종 복위를 계획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그러자 그의 유배지는 다시 영주 순흥으로 옮겨졌다. 이곳에서 부사 이보흠 등과 모의하여 어린 조카인 단종의 복위를 계획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1457년(세조 9년) 사사(賜死)되었다. 당시 순흥 마을 주민들은 금성대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역적으로 몰려 수천 명이 숨지기도 하였다. 금성대군이 죽은 지 334년이 지난 1791년(정조 15년),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할 때 육종영(六宗英)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어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영주의 성인단(成仁壇), 괴산(청안)의 향사(鄕祠)에 제한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금성대군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영주 순흥 두렛골에서는 음력 정월 보름이 되면 금성대군의 충(忠)과 의(義) 기리는 대동놀이가 매년 치러지고 있다. 무속신앙에서도 금성대군이 신격화 되어 졌다. 특히 서울과 경기 일대지역의 적지 않은 무당들이 그를 영험한 신으로 모시고 있다. 그리고 무속신앙 현장에서는 그를 금성님 또는 금성왕(錦城王)님이라 부른다. 금성대군이 사후에 왕(王)으로 격상된 것은, 군주와 나라를 향한 애국심과 충의정신이 사후 민중 신앙으로 스며들면서 그 위상이 높이 칭송되었기 때문이다. 서울지역에는 원래 세 곳에 금성당이 있었다. 서울 굿 문서의 세 갈래 본거지였던 이곳 구파발 금성당(진관동 금성당)을 비롯한 마포 금성당(망원동 금성당) 그리고 각심절 금성당(월계동 금성당)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7~80년대 도시개발에 의해 자취를 감춰버렸고 오늘날에는 오직 구파발 금성당만 유일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금성대군(錦城大君)의 충의(忠義)정신을 상징하는 진관동 금성당(錦城堂) 민족 신당(神堂)으로 기능하였고 호국신당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이곳은 한 때 이곳 주민들이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들러서 안녕과 소원을 빌었을 뿐만 아니라 각지의 유명 기자(祈子)들도 때가 되고 시가 되면 드나들면서 ‘물고’를 받고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다. 그리고 서울지역 거주의 유명 악사와 만신들은 이곳에서 서울굿 문서를 전수시키기도 하였던 신당이었다. 구파발 금성당은 애초부터 이곳 은평구 진관내동 우물골에 있었다. 그러다가 2002년부터 서울시와 SH(Seoul Housing)가 진관내동과 진관외동 일대를 합쳐 뉴타운으로 개발하면서 철거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언론매체 및 무속학과 문화재 전문가들이 금성당의 문화재적 가치와 보존 당연성을 주장하면서 개발사업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SH공사 측과 문화재 보존을 주장하는 전문가들 사이에 긴 갈등을 걸쳐 합의에 도달하게 되었다. 뉴타운 사업자 측이 금성당을 사업부지 밖으로 이전하려던 계획을 바꿔 원래 위치에 존속시키기로 하게 된 것이다. 기사회생(起死回生)된 금성당은 2008년 10월 22일 국가문화재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고, 복구 사업은 2010년에 완료되었다. 금성당 내부에 있었던 무속유물 일체는 서울역사박물관에 영구 소장되어졌고, 복구 완료된 금성당은 은평구가 SH공사로부터 소유권을 넘겨받았다. 4. 샤머니즘박물관 소장 유물 무속에서 사용되는 신구(神具)는 귀물(鬼物) 또는 신물(神物)으로 호칭된다. 응달의 귀(鬼)와 양달의 신(神)이 병존적 공생관계 속에서 활용되는 귀신(鬼神) 관련의 일체 대상품[物]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귀물 또는 신물은 세상을 밝고 청청하게 그리고 환하게 비침[明]는 영검한 신령 물건임을 뜻하는 귀명(鬼明) 또는 신명(神明)으로도 통한다. 무당이 신으로부터 절대적 영검함을 얻어 내는데 필수적 의례구로써 구실하고 있는 이들은 신도(神圖)를 비롯한 창검, 신복, 부채, 방울, 종, 동경, 명두 등 신앙의례 속 일체의 유형적 내용물이다. 그리고 이들은 무속신앙의 본질은 물론이고 기능, 의미, 형태 등을 알게 하는데 중요한 정보물들로써 구실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것들은 무구(巫具), 무속구(巫俗具) 또는 무속품(巫俗品) 등의 용어로 호칭되어 지면서 의례의 부착물이나 보조물로 다루어져 왔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과거 무당세계에서는 무당이 될 사람이 신병을 앓다가 구업이를 떠오는 관습이 있었다. 구업이란 무당이 무업을 종결하게 되면 자신이 사용하였던 귀물을 산 속 어느 곳에 파묻게 되는데 이를 새 무당이 선몽이나 예언으로 알고 파가져 가는 것을 말한다. 구업이로 파묻게 되는 귀물은 주로 방울, 엽전, 칼, 명두, 동경 등 쇠붙이로 만든 것들이지만 천이나 종이로 제작된 부채나 무신도 또는 신복 등도 포함되기도 한다. 과거 무당사회에서는 구애비를 뜨면 으레 무당이 되는 것이고 또한 무당이 되기 위해선 구애비를 떠야 했었다. 그러므로 무당이 될 사람이 신병을 앓다가 구애비를 떠오는 것은 무당으로 입문하는 중요한 과정으로 삼아 졌었다. 무당이 될 사람이 구애비를 떠오면 집안에 모셔놓고 스승이 될 큰무당을 찾아가 허주굿(허튼굿)을 한다. 신을 좌정케 하여서 허튼짓을 삼가게 하기 위함이다. 허주굿이 끝나면 집집마다 걸립을 다니는데 이 때에 돈이나 곡식 등을 걸립하기도 하지만 주로 놋밥그릇, 놋숟갈, 놋제기, 놋주걱, 놋촛대, 놋요강, 놋엽전 등 놋으로 만든 쇠붙이를 걸립하게 된다. 이를 쇠걸립이라고 한다. 쇠를 걸립하는 것은 훗날 무업에서 사용하게 될 방울, 종, 칼, 명두, 동경 등의 쇠붙이 귀물을 장만하기 위함이다. 쇠걸립에서 숟갈을 걸립하면 장차 큰무당이 되어 만인간들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고 촛대를 걸립하면 만인간들의 등불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걸립으로 엽전을 내놓으면 그 사람은 평생 부자로 살게 되며 또한 무당 역시도 크게 불릴 것이라 생각한다. 쇠걸립에서 모아온 쇠붙이들은 치마로 받아 와 집안 한 곳에 쌓아 두었다가 내림굿을 하기 전 대장간에서 방울, 종, 칼, 동경, 명두 등을 제작한다. 이러한 전통은 칠팔년대 까지만해도 간간히 지켜져 왔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과거의 신법(神法)처럼 쇠걸립을 하지 않지만 가족이나 친지 또는 동네사람들로 부터 쇠붙이로 만든 촛대나 제기 또는 옥수그릇 등을 시주로 받는 풍습으로 이어가고 있다.
1) 신도(神圖)류 신도(神圖)는 무속신앙에서 섬기는 신의 형상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신도를 흔히 무신도(巫神圖)라고 하는데 이는 타 종교의 신과 구별하기 위함인 것이다. 신도를 또 다른 한편에서는 무화(巫畵), 무속화(巫俗畵) 또는 무속도(巫俗圖) 등 이라고도 한다. 무화(巫畵)라 할 때는 무속신앙에서 모셔지는 신(神)뿐만 아니라 무속신앙 전반에 관련된 무의식(巫儀式)을 포괄적으로 그려서 개념화 한 것이다. 무속화(巫俗畵)나 무속도(巫俗圖) 역시 무화(巫畵)와 같은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한편, 도(圖)와 화(畵)를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보면, 도(圖)는 인물이나 동물 또는 자연을 주제로 하여 사실적 표현에 치중하는 반면 화(畵)는 그림의 미적양상에 초점을 두는 편이다. 무속에서의 신 그림 형태는 종교 신앙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으므로 그림 내용이 특정 인물이나 동물 또는 자연에 한정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뿐만 아니라 그림에 대한 예술적 또는 미적 가치를 크게 고려치 않는 것 또한 특이할 점이다. 이러한 까닭을 보면 무속신앙에서의 신 그림은 화(畵)라고 하는 것보다는 도(圖)의 개념에 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이러한 용어들은 오늘날 세간에서도 널리 쓰이는 보통명사가 되었지만 그 시작은 무속이나 미술을 공부하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통용되었던 학술적 용어이다. 위에서 언급한 신도(神圖) 등 여타의 용어들은 무속현장의 것이 아니다. 근래에 소수 무당들이 이러한 명칭을 사용한다면 이는 무속연구자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무당들이 사용하는 현장용어에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 첫째, ‘환’이라고 한다. 그림을 뜻하는 ‘화(畵)’ 자(字)에서 변화된 것이다. 신도(神圖) 꾸미는 사람을 환[畵]쟁이라고 하는데 서도 알 수 있다. 둘째, ‘화분’이라 한다. 이는 화본(畫本)의 변음이다. 화본(畵本)이란 그림의 바탕이 되는 재료, 즉 종이나 천 또는 물감을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해석을 다른 한편에서는 화상(畫像), 즉 사람의 얼굴을 그림으로 그린 형상을 높여 이르는 말로도 통용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화[畵]에 그려진 사람을 높여 부르는 의존명사로써의 높임말 ‘분’이 ‘화(畵)’와 결합되어 붙여진 것이다. 셋째, ‘마지(麻紙)’ 또는 ‘맞이’라고 한다. 그림을 그리는 종이가 마지(麻紙)이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변음 되어 ‘맞이’라고도 부른다. 신령을 ‘맞이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맞이’라 하는 것은 근래의 일이다. 넷째, ‘신령님(神靈任)’이라 한다. 신(神) 자체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붙어진 것이다. 다섯째, ‘할아버지’라고 한다. 이 역시도 신령님이라고 하는 바와 같이 신을 높여 부른데서 생긴 용어이다. 할아버지라고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신 그림에 할아버지가 적지 않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섯째, ‘탱화(幀畵)라고 한다. 탱화란 원래 불교에서 신앙되는 부처나 보살 또는 성현을 그려 벽에 거는 불화(佛畵)이지만 무불(巫佛)습합으로 생긴 용어이다. 일곱째, ‘신명(神明)’이라 한다. 천지조화를 주재하는 온갖 영적 존재라는 뜻이다. 여덟째, ‘성수님’이라고 한다. 신명(神明)의 다른 표현이다. 주로 황해도 무당들사이에서도 통용되는 용어이다. 아홉째, 귀물(鬼物)이라 한다. 귀신(鬼神)의 물건을 뜻한다. 신도(神圖)에 대한 역사적 유래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미술사를 비롯한 생활사 그리고 신앙사와 관련된 역사적 자료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고대사회의 시대적 생활과 사상 그리고 신앙상은 물론이고 고대 미술 형식을 알게 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주지하다 시피, 고분벽화는 3세기 말에서 7세기 중엽에 걸쳐 당시의 생활풍속을 비롯한 삼라만상에 대한 숭배 그리고 사후세계의 삶을 소재로 그려진 일종의 장의미술이다. 이 그림에서 주목되는 것은 현세의 삶이 내세로 이어지는 계세적(繼世的), 내세에는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전생적(轉生的) 그리고 선불 혼합적 내세관 등이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당시 고구려인의 우주관을 비롯한 내세관을 담고 있는 이른바 시대적 정서 속에서 우러난 사상이며 신앙이고 또한 숭상의 하면이라는 것이다. 고구려인들이 신앙심이 담겨 있는 이 그림에서 나타나는 붉은색, 황색, 녹색, 검은색, 흰색(호분) 등의 오색 관념은 오늘날까지 무속신앙에서 주요하게 쓰이고 있다. 빨간색 노란색 푸른색(파란색) 검은색 하얀색이 그것이며 이는 무속을 상징하는 오방색과 동일하다. 또한 해달과 별 등 일월성수를 표현하여 천체신앙의 한 면을 제시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청룡 백호와 현무 주작 등의 동물 주제의 그림은 오늘날 호신앙이나 용신앙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그림 형상과 형태 또한 신도를 연상케 하고 있다. 이를테면, 5세기 초인 408년에 조성된 덕흥리벽화무덤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진(鎭)의 그림이 그것이다. 진은 고구려가 가장 번성하던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신하로 활약했던 역사적 실존인물이다. 검은색 내관에 푸른 덧 관을 쓰고 갈색 관복을 입고 앉아 있는 형상이 마치 신도 주인공 산신 또는 왕신 등이 위엄 있게 앉아 있는 모습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신도(神圖)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살펴 볼 수 있는 기록자료는 1241년 발간되어 1251년에 증보된 고려시대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전집 권1 「노무편(老巫篇) 병서』이다. 여기에 보면 ‘단청만벽화신상(丹靑滿壁畵神像)’이라는 글귀가 있다. 이는 단청(丹靑)으로 그려진 신상(神像)들이 벽에 가득 차 있다는 내용인데, 여기서 신도와 관련되어 주목되는 것은 신상들이 단청으로 그려졌다는 것이고, 그것들이 벽면에 부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벽면에 단청으로 그려져 부착되어 있는 신상들이 벽화였는지 아니면 오늘날까지 사용되어 지고 있는 걸게 그림 인지는 파악되지 않지만, 신상(神像)이라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분명 신의 그림이 분명함은 알 수 있다. 그래서 당시 이 그림이 벽화이었던 걸게 그림이었던 그 내용과 형식은 오늘날의 신도(神圖)와 일맥상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18세기 말,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공민왕, 무학, 나옹, 두신 등이 나오고 있는데, 오늘날 현존하는 인왕산 국사당의 신도 주인공들과 같은 신들의 명칭들이어서 이 시기에 이미 이러한 신들이 신앙의 대상으로 존재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주도에서도 무신과 관련된 기록 자료가 있어 주목되고 있다. 18세기 이전부터 있었던 제주도 내왓당(川外堂) 신도가 그것인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세조실록(世祖實錄』세조 12년(1466) 7월 27일 내왓당과 관련된 사건 기록에서 ‘천외당(川外堂) 신의 화상(畵像)이 이미 불에 타 버렸다’는 내용이 있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에 내왓당에는 신도(神圖)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문헌자료는 제주 내왓당 신도의 존재가 멀게는 세조 때인 15세기로 올라갈 수 있고, 가깝게는 18세기 초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신도는 원래 열두 폭이었지만 현재는 제석위(帝釋位), 원망위(寃望位), 수령위(水靈位), 천자위(天子位), 감찰위(監察位), 상사위(相思位) 등의 남신상 6폭과 본궁위(本宮位), 중전위(中殿位), 상군위(相君位), 홍아위(紅兒位) 등의 여신상 4폭 등 총 10폭만 남아 있다. 신도가 있었던 내왓당은 1882년 고종 19년에 헐렸고, 거기에 있었던 신도는 현재 제주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신도들이 처음 세간에 알려진 것은 1959년이다. 그리고 검증을 거쳐 1991년 6월 4일 제주도 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가 2001년 11월 30일에 중요민속자료 제240호로 지정되었다. 가로·세로 380×620㎜의 한지(韓紙)에 진채(眞彩)로 그린 이 신도들이 애초의 것인지는 확언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무속신앙에서는 신도를 새롭게 장만할 때 모본을 보고 계속 그리는 관습이 있어서, 만약 이 신도가 처음의 것은 아니다 할지라도 그 형태나 명칭 등은 애초의 것과 대동소이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어찌되었건, 이 신도에 나타난 복장과 장식품 등의 형태를 분석해 보아도 1800년보다 앞선 신도임이 확실한 것으로 판단되어 졌다. 이상과 같이 고구려 고분벽화, 고려시대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전집에 나타난 「노무편(老巫篇) 병서』자료 그리고 조선시대 제주도 내왓당(川外堂) 등을 살펴 볼 때, 무속신앙의 신도(神圖) 역사는 상당히 거슬러 올라 갈수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도(神圖)는 귀물(鬼物)이면서 또한 신물(神物)이다. 이는 귀신(鬼神)의 물건으로 신앙되기 때문에 여타의 신구(神具)나 신복(神服) 등과 함께 신성성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취급된다. 그래서 신도는 애초 제작과정에서 부터 신성한 물건으로 꾸며질 뿐만 아니라 사용될 때에도 경외스럽게 다루어지고 훗날 이를 처분할 때에도 각별한 의례를 베풀어 신중하게 처리하게 된다. 한편, 신도는 크게 세 형태로 나누어진다. 두루마리로 접을 수 있는 족자형(簇子型),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접는형 그리고 근년에 유행되는 종합형이 있다. 족자형은 두루마리에 배접하여 신당 벽면에 걸어 두는 것이다. 접는형은 좌우상하로 접을 수 있도록 되어있다. 그래서 손상이 쉽게 된다. 그러나 가지고 다닐 수 있기가 수월하다. 족자형과 접는형은 그림의 주인공이 독자적으로 그려지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종합형은 불교 탱화와 같이 여러 신들을 한 곳에 종합적으로 그려 넣는다. 신도(神圖)는 청․홍․흑․백․황색의 다섯 가지 원색으로 천 또는 종이에 그려 뒤편을 종이로 배접한 후 합판에 붙인다. 족자형 신도는 신당 벽면에 걸어 둔다. 신도 양면 귀퉁이 상단에 기다란 매듭으로 된 신개(神蓋)를 느려 드린다. 신개(神蓋)란 신도(神圖)의 주인공을 감싸 보호하는 기능을 갖는 것이지만 오색으로 된 매듭 또는 기다란 수술이나 수놓인 오색 천에 금은보석 등을 장식하여 만들어 화려한 장식품이 되게 하여 신도를 장엄하게 한다. 신도를 제작하는 사람을 화공(化工) 또는 환쟁이라고 한다. 화공은 오랜 전통에 따라 남자들이 역할 하였다. 그리고 꼭 그러하지는 않지만 많은 경우 혈통에 의해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대물림 되어온 관습이 있다. 이러한 화공은 신을 모시는 무당은 아니지만 신도를 전문적으로 꾸미고 의례에 사용하는 여러 가지 꽃과 장식구를 만드는 전문 장인이어서 무속세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샤머니즘박물관 소장 신도는 1,500여점 정도이다. 이들은 주로 서울 및 경기지역과 황해도 지역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 외에 강화도 지역, 평안도 지역, 충청도 지역의 것들이 다수 있다. 황해도 신도로써 가장 오래된 것은 삼태셩보별씨, 성슈장군, 칠성, 되장사호국장군, 감흥신령, 삼부인, 삼불제석 두 점 등 총 8점이다. 이것들은 공필손이 제작한 것이다. 그런데 1978년 양종승이 황해도 무속의례를 사사한 우옥주 만신으로부터 물려받았다. 우옥주(禹玉珠, 본명 順愛, 본관 丹陽) 만신은 1920년 11월 17일 (음력) 황해도 옹진에서 출생하여 17세 때 큰무당 김기백에게 내림굿을 받은 후, 한국동란때 월남하여 인천 백마장, 서울 상도동, 이천, 서울 모래내 등을 옮기며 무업을 하다 73세가 되던 해 인 1993년 4월 28일 사망하였다. 김기백으로 굿문서를 학습한 후 최일리 만신, 배문일 화공, 악사 및 강령탈춤 보유자였던 우옥주의 남편 박동신, 인천으로 월남한 조철물 만신, 도령만신으로 명성을 날렸던 송순복 만신, 악사 및 서도소리 명창 그리고 강령탈춤 보유자였던 지관용, 해주권번 출신의 껌둥이 상장구, 해주출신의 신림동 만신, 서도소리 명창 및 소놀이굿 전승자였던 김경복 그리고 악사 등과 함께 황해도 만구대택굿 및 소놀이굿 등을 전승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던 나랏무당이었다. 1978년 당시 양종승은 박동신(황해도 해주출신, 1909〜1992)의 제자로써 강령탈춤과 해서 예능을 배우고 있었다. 그러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박동신 부인이었던 우옥주 만신에게서도 황해도 무속의례를 배우게 된 것이다. 우옥주 만신은 양종승을 제자로 삼았고, 자신이 보관하고 있었던 신도 등의 귀물(鬼物)을 양종승에게 넘겨주었다. 이 귀물들은 그녀의 신아버지 김기백 박수로부터 물려받았고, 월남할 때 가지고 와 인천 백마장에 거주하면서 신당에 봉안하였던 것이다. 우옥주 만신이 신아버지 김기백으로부터 신도를 비롯한 신복, 군웅방울, 동경, 달비, 부적 등을 산 구업이로 떠왔던 것이다. 이 귀물들은 김기백의 신아버지였던 고 씨가 사용하였던 귀물들이었으며, 이 중 환 8점이 해주 환쟁이 공 씨가 제작한 것이다. 우옥주는 스승으로 물려받은 귀물을 신당에 봉안하고서 사용하고 있었는데, 44살이 되던 해인 봄 어느 날 꿈에 신아버지가 나타나 귀물을 감춰 두었다가 남제자가 들어오면 물려 주어라는 말을 듣고 귀물을 보자기 싸서 신단 아래에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옥주에게 귀물을 구업이로 물려준 스승 김기백(1893-1944, 남)은 황해도 신천에서 출생하여 8살 되던 해 해주로 이주해 살았다. 하루는 소풀을 먹이러 산에 갔다가 돌에 걸려 뒤로 넘어진 후 일어나면서부터 영한 소리를 하게 되어 점사를 보기 시작했다. 곧이어 옹진출신 고씨 박수로 내림굿을 받았고, 옹진으로 이주한 후 10세부터 본격적으로 무업을 전개했다. 20대가 되면서부터는 황해도 해주와 옹진 일대에서 큰 명성을 떨쳤던 나랏무당으로 활약하였다. 해방 한해 전인 1944년 옹진 북면 화산리 광대산 대동굿을 주관하면서 작두 위에 올라 “여기는 거므나 땅이요 우리는 희나 백성이다! 일제는 물러가라!”는 나랏공수를 내렸다. 이 때 관객 사이에 잠복하고 있었던 일본 순사 두 명이 별안간 나타나 칼로 내래쳐 굿판 현장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대동굿판에 함께 있었던 김기백의 신아들 이재만(남, 1915-1944)과 한연수(남, 1917-1944)도 연류 되었다고 하여 심한 고초를 겪다가 결국 사망하였다. 그리고 김기백의 신딸 우옥주만 간신히 살아남아 활동하다가 월남하였다. 우옥주는 김기백 박수로부터 산구애비를 떠오기도 했지만 스승 사망 후 방울 등 또 다른 구애비를 떠왔는데 그것들 중 하나가 아흔아홉상쇠방울이다. 이 방울은 우옥주가 신도와 함께 월남할 때 가져와 자신의 신당에 모셨던 것이다. 그러다가 무신도 8점과 몇 가지 구애비 등을 양종승에게 주었다. 그리고 우옥주 사망 후, 방울과 여타의 신구들은 그의 유언에 따라 제자 양종승과 우옥주의 팔촌 조카 우명달이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샤머니즘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황해도 신도 8점을 제작한 환쟁이 공필손(孔弼巽, 1870-1931)은 61세 사망할 때 까지 해주를 거점으로 활동하면서 황해도 일대에 널리 알려졌던 환쟁이이었다. 배문일에 의하면, 공필손은 신도 꾸미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꽃일과 장식구 제작에도 뛰어났었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 했으며 굿소리도 잘해서 만신들로부터 많은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어려서 절에서 잠깐 있었으나 환쟁이였던 아버지가 환일을 가르치기 위해 절에서 데리고 나왔다. 해주 출신으로써 해주권번에서 사범으로 있었던 박동신에 의하면, 공필손은 해주 출신 방수덕(1905-1971) 만신(일명 조철물 만신)과 고향이 같았다고 한다. 해주 조철물에서 살았던 방수덕은 조천만신이라고도 호칭되었는데, 결혼 전 10대 때 만신이 되었기 때문에 처년무당이라는 별호도 갖고 있었는데 황해도 일대에서 크게 명성을 떨쳤던 유명만신이었다. 박동신이 조철물 만신의 피리악사로 활동하였고 우옥주와 만나 결혼하게 되어 된 것도 조철물 만신 굿판에서 였다. 조철물 만신의 친딸도 무당이 되어 딱딱이 만신이라는 별호를 갖고 활동하였다. 주로 우옥주 만신 굿판에서 활동하면서 장구를 치기도 하였다. 공필손의 제자로는 유수명(劉壽明, 1895-1938)과 배문일(裵文逸, 1900-1992)이 있다. 유수명 또한 황해도 신도을 비롯한 꽃일에 능했던 환장이었다. 벽해(碧海)라는 아호를 사용했는데 자신이 꾸민 신도 뒷면에 ‘碧海’라 쓰기도 하였다. 43세에 사망할 때 까지 환쟁이로 활동하였다. 배문일 신도 꾸미는 것과 꽃일 을 배운 것은 유수명이었다. 공필손의 또 다른 제자 배문일은 황해도 연백출신 이다. 배문일은 유수명보다 다섯 살 아래였는데, 어려서 서당에서 공부하였고 14세 되던 해 아버치가 당시 황해도 일대에서 환쟁이로 유명했던 유수명을 집에 데려다가 병풍을 치는데 그림 솜씨에 반해 유수명을 따라 다니면서 화공일을 배웠다. 배문일은 유수명을 통해 공필손을 알게 되었고, 2년 후 공필손에게서 본격적으로 환쟁이 일을 배웠다. 그러다가 이대선에게서도 환쟁이 일을 배웠다. 이대선(1884-?)도 황해도 연백 출신이었으며, 신도는 물론이고 꽃일과 상여 꾸미는 일을 전문으로 하였던 전문가였다. 배문일은 20세가 되면서 독립적으로 환쟁이로써 활동하다가 한국동란 때 서울로 남하하여 황해도 만신들을 대상으로 환쟁이 일을 하였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동안 고향에서부터 알게 되었던 우옥주 만신과 재회하여 만구대탁굿 복원에 크게 관여하였다. 한편, 유수명 문하에는 자신보다 10살 아래인 박영길(朴永吉, 1905-1973)이 있다. 해주 결성면 출신으로 고향에서 유수명의 제자가 되었는데 한국동란 때 인천으로 남하하여 68세까지 활동하였다. 박영길은 환 치는 일 뿐만 아니라 지화와 뱃기도 제작했다. 부인이 굿판을 다니는 악사였으며 신복도 잘 만들었다. 박영길 제자로는 안승삼(安承三, 1909-2007)과 안승삼의 아들 안정모(安貞模, 1937년생)가 있다. 안승삼은 98세에 사망하였는데, 인천으로 남하한 후 박영길에게서 꽃일과 무구제작 기법 배웠다. 세간에는 안 씨가 신도 제작도 하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아들 안정모의 작품들이고 안승삼은 애초부터 신도는 그리지 않았다. 그러나 1987년 국가무형문화재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의 배치기, 굿청 장식으로 보유자로 인정되어 활동하였다. 안정도는 아버지와 함께 인천에서 17세부터 2년 동안 박영길 문하에서 무신도 및 꽃일을 배웠다. 아직까지도 인천에 거주하면서 무신도 꾸미는 일과 지화 및 무구 제작일을 부인과 함께 하고 있다. 한편, 인천에서 만석동에서 활동하였던 황영익(?-1975년?)과 서울 보문동에서 활동하였던 정성용(鄭成龍, 1907-1988) 평안남도 개천군 출신이었는데 고향에서 부친으로부터 환쟁이 일을 배운 후 한국동란때 남하하였다. 부인과 함께 신도 및 지화제작 일을 하였는데 성수부채와 둥굴부채도 잘 만들었다. 주로 평안도 무당들을 대상으로 일을 하였지만 황해도 무당들도 그가 제작한 신도와 꽃 그리고 부채 등을 사용하였다. 2) 굿문서류 샤머니즘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굿문서에는 필사본으로된 신가를 비롯한 당사주책, 역학책, 부적책, 첨서, 굿 의례 관련서 등이다. 이 고서들은 모두 무속현장에서 사용되었던 것들로써 500여권 정도가 된다. 이들 중, 당사주책(唐四柱冊)은 무속신앙에서 폭넓게 사용되어 졌던 점책이다. 당나라(618〜907)때 이허중(李虛中)이 하늘에 있다고 하는 천귀(天貴), 천액(天厄), 천권(天權), 천파(天破), 천간(天奸), 천문(天文), 천복(天福), 천역(天驛), 천고(天孤), 천인(天刃), 천예(天藝), 천수(天壽)의 12성을 인간 생년월일시와 관련하여 길흉을 판단하는 방법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사주는 생년월일시에 해당되는 간지(干支)의 상생, 상극과 오행의 강약, 대운과 세운의 순환에 따라 길흉이 결정되는데 반해 이 당사주는 간지의 상생과 상극에는 전혀 상관없고 오직 12성의 조우(遭遇)로 길흉을 판단하게 되는 특징이 있다. 송나라(960〜1279)의 서자평(徐子平)이 이허중 설에다 간지, 오행의 상생과 상극의 길흉을 가미하여 ≪연해자평(淵海子平)≫을 만들었고, 뒤에 당사주와 사주로 분리되어 발달하였다.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민간신앙에 영향을 끼쳐 이허중의 원문에 그림을 삽화하여 만들어져 그림당사주책이 유행하였다. 그 내용은 보면 다음곽 같다. 일생을 초년, 중년, 말년, 평생 등 4단계로 구분하고 인명(人命), 골격(骨格), 유년행운(流年行運), 심성(心性), 12살(煞), 부모, 형제, 부부, 자녀, 직업, 길흉, 가택, 신상, 관살(關煞), 수명 등 인간생활과 직간접 관계되는 사항이 거의 첨가되어 있어, 사람의 일생을 예견하고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데 참고 되게 하였다.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머리에 천귀성을 12지의 자에 붙여 순차적으로 나열하고 생년이 어떠한 성정과 만나는가를 결정하여 생년으로 초년의 운세를 결정한다. 생월의 수를 생년에서부터 정월, 2월 등 순차적으로 셈하여 생월의 수와 만나는 성정을 중년 운세로 정한다. 태어난 날의 수를 중년 운세에서부터 하루, 이틀 셈하여 생일 수와 만나는 성정을 말년 운세로 정한다. 평생 운세는 말년의 운세에서 자시, 축시 등 순차로 셈하여 태어난 시와 만나는 성정으로 정한다. 이렇게 하여 만나는 성정이 길성이면 길하고 흉성이면 흉하다고 한다. 12성 중 천귀, 천복, 천권, 천간, 천문, 천예, 천수 7성은 길성, 천액, 천파, 천역, 천고, 천인 5성은 흉성이다. 인명, 골격, 유년, 심성은 생월로 보고 그 밖의 것은 생시로 본다.
3) 신복(神服)류 샤머니즘박물관 소장 신복에서도 서울 경기지역의 신복은 조선조 궁궐에서 입었던 문무관들의 형태와 유사한 것들이 많다. 특히 서울굿에서 사용되는 신복들은 거의 조선시대 궁중복과 양반층의 의레복과 유사하다. 이러한 신복은 색상이 화려하고 꾸밈새가 우아할 뿐만 아니라 세련미가 있다. 신복과 더불어 치장되는 큰머리나 벙거지 등 역시도 조선시대의 궁중 것과 비슷하다. 평안도 신복은 고구려 복식을 따르고 있는 특징이 있다. 황해도 신복은 지방색을 나타내는 독특한 형태를 갖고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고구려시대 복식, 조선시대 궁궁복식, 불교의례 복식, 중국 복식 등의 영향을 받은 것도 있다.
4) 부채류 무속에서 사용되는 부채는 접부채(접는부채)와 방구부채(둥근부채) 그리고 둥굴부채가 있으며 방울과 함께 중요한 귀물(鬼物)로써 신을 부르고 모시고 놀리고 보내고 할 때 사용된다. 무당부채는 예술적 가치를 갖기보다는 종교적 형식을 띠면서 신앙성이 부여된다. 그리고 무당부채는 화공(花工)이 정성껏 손으로 만드는 것이 원칙이며 부채에 그려지는 그림 또한 일반적인 부채처럼 사군자나 한시 등의 그림이나 글씨체를 넣는 것이 아니라, 신 또는 무속의례과 관련되는 내용을 넣는다. 귀물로서의 부채는 지역과 무당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는데 그 종류는 접부채 형식의 칠성부채, 삼불제석부채, 만성수부채, 성수부채, 일월부채, 토인성수부채, 삼선녀부채, 감흥부채, 애기․동자씨부채, 도사부채, 광대부채 등이 있으며, 방구부채 형식의 선녀부채가 있다. 또한 둥굴부채 형식의 만성수둥굴부채, 애기․동자씨둥굴부채, 칠성․제석둥굴부채 등이 있다. 무속세계에서의 부채는 악신(惡神)은 떨쳐버리고 선신(善神)은 불러들이는 무당의 필수적 신구로써 부채 바람을 통해 잘못된 과거를 씻어내고 현재의 복을 들이며 미래의 예언적 뜻을 알게 된다.
5) 방울류 ‘방울 부채 없는 무당도 있나’ 하는 것과 같이 방울은 부채와 더불어 무당이라면 누구나 갖는 필수적인 신구이다. 방울은 둥그런 모양의 몸통이 입을 약간 벌리고 있는데 마치 고기가 입을 벌리고 있는 모양처럼 열러있어 그 모양새가 목탁과 다를 바가 없다. 또한 조개 모양을 이루고 있어서 한편에서 이를 조개방울이라고도 한다. 방울안에는 고정되지 않은 추가 들어 있어서 방울을 흔들면 추가 제멋대로 굴러다니면서 소리를 낼수 있도록 되어 있던지 아니면 몸통 안에 추가 들어있지 않고 여러 개를 한 묶음으로 묶어 각각의 방울 들이 서로를 부닥치면서 화음을 낼수 있도록 되어있다. 그러므로 방울은 하나의 방울도 소리를 내는 독자성의 음을 낼수가 있는가 하면 여러개의 방울이 서로 어울려 부닥치면서 소리를 내는 병합성의 화음도 지니는 특징이 있다. 무당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방울을 소유하게 되는데 그 과정은 대략 4가지 정도이다. 첫째, 무당이 되기 전 선몽에 의해 구애비를 떠오는 것이다. 어느 무당이 죽기 전이나 후 산 속에 구덩이를 파고 방울을 비롯한 신구와 신복 그리고 신도 등을 파묻어 둔 것을 선몽으로 알고 파오게 되는데 이를 ‘구애비 뜬다’라고 한다. 두 번째, 무당이 내리면 마을 집집마다 돌면서 공수를 주고 쇠걸립을 한다. 모아진 놋쇠로 대장간에 가져가서 신구를 제작하는데 방울을 우선적으로 제작한다. 세 번째, 신도가 만물상에서 구입하거나 방울 제작자에게 주문하여 신당에 받친다. 네 번째, 스승으로부터 산구애비를 떠온다. 다섯 번째, 본인이 직접 주문하여 제작하거나 구입한다. 무당 방울은 다음과 같은 종류가 있다. 군웅방울은 2개 또는 3개의 쇠방울을 한 묶음으로 한다. 군웅방울의 크기는 꼭 그러하지는 않지만 보편적으로 다른 방울 보다는 크게 만들어 지는 것이 보통이다. 군웅방울을 매방울 이라고도 하는 것은 무당이 매를 데리고 사냥을 나갈때 매타령을 하기 때문이다. 칠성(七星)방울은 약 20cm 정도의 놋쇠로 된 막대기 끝에 7개의 방울이 달린다. 대신방울은 열두 개의 방울이 달려있어 이를 열두대신방울이라고 한다. 아흡아홉상쇠방울은 방울 수가 총 99개 때문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를 상쇠방울 또는 상쇠라고도 한다. 99개의 방울 속에는 壽(명)쇠, 福(복)쇠, 길쇠, 명두쇠, 짝쇠, 그리고 왕쇠 등으로 수를 이루고 있다. 한개 묶음이 3개씩 짝을 이뤄 33개의 小묶음이 되도록하고 다시 3개씩 뭉친 中묶음들이 3개씩 또 다시 뭉쳐 11개의 大묶음으로 이루어 99개의 상쇠방울이 된다.
6) 명두(明斗)류 ‘명도’라고도 부르는 명두(明斗)는 신의 얼굴이며 또한 무당의 말문을 열 수 있는 귀물이다. 그러므로 무당은 명두를 통해 신의 형상을 볼 수 있고 신령과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명두 모양새는 한쪽 면(앞 면)이 마치 그릇 뚜껑처럼 배가 약간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어 움푹 들어간 다른 한쪽 면(뒷면)과 구분된다. 명두 앞 면은 어떠한 형상을 비추어 보더라도 윤곽이 드러날 수 있을 정도로 반들 반들하게 광택이 나지만 뒷 면은 해, 초생달, 별, 계수나무 등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범어(梵語)나 한자어 또는 한글로 일월명두(日月明斗), 일월대명두(日月大明斗), 칠성명두(七星明斗), 칠성대명두(七星大明斗) 등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명두는 신당 벽면에 걸어서 모셔둔 신도 상단의 중앙 부분에 걸거나 특정한 신의 형체를 만들어 그 상체 부분에 매달아 둔다. 신당에 걸어 둘 경우, 삼불제석명두는 세 개의 명두를 칠성명두는 일곱 개의 명두를 세로로 연결하여 화려한 원색 천위에 매달아 두는데 이 때에 윗 부분에 ‘예단’이라고 하는 하얀 한지를 접어 씌운다. 애기동자씨명두는 아기옷으로 만든 홍색치마와 노랑저고리 또는 바지와 저고리 위에 명두를 걸어 벽에 건다. 명두는 크기에 따라 대, 중, 소로 구분되는데 그 형태와 종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월명두는 일월신의 명두이다. ‘솟을(소슬)명두’ 또는 ‘불릴(불림)명두’라는 이칭이 있는데 ‘솟아 일어나라’라는 뜻과 무당으로써 잘 불려라는 뜻을 갖는 이칭이 있다. 뒷면에 한자어 日月明斗 또는 日月大明斗라는 글귀와 떠오름을 의미하는 초생달이 양각되어 있다. 둘째, 칠성명두는 뒷면에 일곱 개의 별과 초생달이 양각되어 있는 칠성신의 명두이다. 이 외에도 부인마마명두, 서낭명두, 성수명두, 동자.애기씨명두, 삼불제석명두, 성주명두, 산신명두, 장군명두, 군웅명두, 걸립명두 등이 있다.
7) 종(鐘)류 종은 쇠로 만든 신물(神物)이다. 무속신앙에서는 쇳소리를 내어 신을 부르고 모시고 놀리고 보낸다. 또한 쇳소리로 좋지 못한 해로운 액을 쫒아 내기도 한다. 종 안에 추가 달려 있지 않으며, 종 윗면 중앙 부분에 나 있는 구멍에 끈을 끼어 천정에 매달게 되어 있다. 종을 신당 천정에 매달아 두었다가 소리를 낼 때는 나무 채로 종 겉면 또는 안면을 때린다. 아침 일찍 신령께 문안 인사를 올릴 때나 신도들이 방문하면 종소리를 내어 신령에게 고하고 축원을 한다. 8) 창검(槍劍)류 창(槍)과 검(劍)은 무속의례에서 주요하게 사용되는 귀물이다. 창검이 쓰이는 목적은 신의 몸체로 삼아 신당에 모시고자 할 때, 좋지 못한 해로운 기운을 제거 할 때, 신에게 제물을 바칠 때, 점을 칠 때, 신의 뜻을 알아보고자 할 때, 제물 사냥을 할 때, 신의 영험력을 과시 할 때, 신을 부르고 모시고 놀리고 보낼 때, 죽은 망자를 위해 길을 가를 때, 죽은 망자를 위해 저승문을 열 때 등이다. 창검은 주로 무쇠나 놋쇠로 만들지만 때에 따라선 벼락맞은 나무로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죽은 영혼을 위한 굿에서는 대나무로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재료를 무엇으로 사용하든지 크고 작은 것들이 두루 사용되며 의례용으로 제작되는 것이니 만큼 날을 무디게 한다. 다만 군웅칼(타살칼)은 짐승을 타살할 때 사용하기 때문에 칼날이 날카롭다. 창검에는 대신칼, 언월도, 청룡도, 칠성검, 장군칼, 신장칼, 군웅칼, 타살칼, 작두, 삼지창 등이 있다.
9) 부적류 원시시대의 사람들은 바위나 동굴에 그림을 그려 주술적 힘을 얻었다. 신라 비형랑(鼻刑郞)설화나 처용(處容)설화에는 북적 성립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三國遺事』권1 진흥왕대에 죽은 임금님의 혼백과 도화녀 사이에 태어난 비형이 귀신의 무리들을 다스렸는데 그때 사람들이 글을 지어 ‘성제(聖帝)의 혼이 나으신 아들, 비형의 집이 여기로구나, 날고뛰는 잡귀들아 행여 이곳에 머무르지 말라’라는 글을 붙여 귀신을 물리쳤다. 처용이 그의 아내를 범한 악귀를 노래와 춤으로써 감복시킨 뒤 처용의 화상을 그려 문에 붙인 곳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러한 것은 글이나 그림을 쓰거나 그려서 붙여 나쁜 잡귀나 악귀를 막고 물리치기 위한 것으로서 이는 곧 주술적인 힘으로 사용된 부적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부적이 일반화되었음을 여러 사료를 통해 전해진다. 허준이 지은 『東醫寶鑑』에는 최생부(催生符)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아기를 빨리 낳을 수 있도록 하는 부적이다. 『東國歲時記』에도 궁중이나 사대부 집안에서 액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대문에 부적을 붙였다. 동학혁명 때는 궁을부(弓乙符)를 태워 먹으면 총알과 화살이 피해 간다고 믿고 혁명군들이 놀란 만한 용감성을 보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부적은 원래 예측이 불가능한 미래에 대한 부정적 위험이나 두려움 등을 막기 위한 해소책의 일환으로 사용되고 이러한 것은 병환을 퇴치하고 예측할 수 없는 불안이나 또는 전염병을 미리 차단하는 예방책 기능이 강하였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의 가치관 변화는 부적문화의 다양성을 이루어 놓았다. 특히 긍정적인 갈망이나 기대에 부응키 위한 소망책의 일환으로 수(壽), 부(富), 재물, 건강, 또는 득남(得男) 등과 관련하여 만사대길이나 소원성취 등을 기원하는 목적수단으로도 쓰이게 된 것이다. 이는 부적이 어떠한 일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을 주게 하는데 그 기능을 하고 있는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기능이 근래에 들어서는 더욱 구체화되어서 결혼, 합격, 진학, 승진, 매매, 복권당첨 등의 목적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부적을 사용한다는 것은 악귀를 위협하거나 위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영험스런 신비적 존재를 달래어 기분이 좋도록 함으로써 해코지를 하지 않게 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 존재와 인간이 융화될 수 있도록 화합적(和合的)을 방법을 모색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러한 원리는 무속신앙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으로써 결국 초자연적 존재를 잘 대접하고 받들어서 인간과 화합될 수 있도록 하여 영적 험을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부적의 형태는 크게 종이부적과 조형부적으로 구분된다. 종이에 그리거나 쓰기도 하고 아니면 목판으로 찍는 경우이다. 종이부적은 또한 그림으로 된 것과 글자로 된 것이 있는가 하면 두 개가 혼합하여 이루어지는 것도 있다. 글자들은 日月(일월), 天光(천광), 王(왕), 金(금), 元(원), 三(삼), 鬼(귀), 弓(궁), 不(불), 出(출), 吉(길), 林(임), 神(신), 火(화), 水(수), 龍(용), 虎(호) 등이 주를 이룬다. 그림으로는 호랑이, 새, 물고기 등이 있으며 태양, 인형, 귀면 등도 있다. 탑형, 계단형, 와문형 등의 문양도 새겨진다. 글자로 만들어지는 경우에는 부적 전체가 한자로 된 것도 있지만 한자의 파자(破字)를 써서 여러 가지 문양과 결합하고 여기에 줄을 긋는 형태들이 많다. 대개의 경우, 칙령(勅令)이라 하여 임금이 내린 칙명(勅命)의 뜻 글자가 부적 상단에 적히는 경우가 보통이다. 부적의 이러한 형태들은 중국 한자문화권이나 도교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것이 있는가 하면 인도 불사에서 영향 받은 것이 있다. 반면에 우리 고유의 무속신앙에서 비롯된 것들도 적지 않다. 부적 형상은 상당히 추상적이고 상징적이어서 일반인들이 이해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괴이하고 신비적인 느낌을 갖게 함으로서 사용자들의 심리를 영적 세계에 주력토록 암시한다. 부적에 나타나는 글자나 문양은 다음의 뜻을 담고 있다. 돛대는 방위 중 중앙을 상징하고 어떠한 것을 이끌어 가는 핵심적 요소임을 뜻한다. 수(水)는 물로써 용궁을 상징하고, 목(木)은 나무로써 산을 상징하고, 금(金)은 금은보화(金銀寶貨)로써 재물을 상징하고, 원(元)은 으뜸으로서 즉 장원, 진급 또는 고위관직을 뜻한다. 문(門)은 사람이나 재물이 출입하는 공간을 넘나드는 뜻으로써 귀인이나 부귀가 들어온다는 의미이다. 궁(弓)은 활로써 나쁜 액을 활로 쏘아 보낸다는 뜻인데 이는 굿판에서 나쁜 액을 몰아내기 위해 활을 쏘는 것과도 관련된다. 삼(三)은 수명과 득남을 상징하는 삼불제석(三佛帝釋)과 삼신(三神)을 뜻한다. 귀(鬼)는 곧 신령(神靈)을 뜻하기 때문에 이 는 곧 곳곳에 신령이 깃들어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일(日)은 밝은 낮을 뜻하기 때문에 주로 밤에 활동하는 귀신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기능을 가진 글자이다. 왕(王)은 시험에 합격하여 높게 된다는 뜻이고, 군(君)은 귀신을 높여 부르는 것이고, 불(不)은 불가능하다는 뜻으로써 귀신이 나쁜 짓을 저지를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출(出)은 귀신이 나간다는 뜻이고, 길(吉)은 길하고 좋다는 뜻이다. 임(林)은 수목이 우거진 산을 뜻하고 화(火)는 불로써 화재를 뜻한다. 부적의 추상적 도안에서 둥그렇게 원을 그리면서 달팽이 모양으로 그려진 나선형(螺旋形)의 그림이 많이 보이는데 이것은 좋은 것을 몰아오는 것을 상징한다. 나선형의 중앙 부분에 재물을 뜻하는 금(金) 字가 있는 것도 큰 재물이 모아짐을 뜻하는 것이다. 미로(迷路) 상징의 문양은 귀신이 드나드는 통로를 상징화 한 것인데 이 통로로 귀신이 들어가게 되면 꼼짝 못하고 이곳에 갇혀 도망 갈수 없도록 포박된다.
10) 설경류 설경은 우리나라 대전ㆍ충청지역의 굿에서 중요하게 쓰이는 신구로서 이 지역 무속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어느 지역에서나 굿을 하려면 종이로 꽃을 만들거나 또는 신이나 의례에 관련된 상징적인 형체의 문양을 만들어 사용한다. 그러나 그러한 형태의 것들은 대전ㆍ충청지역 무속에서 중점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설경과는 동일한 것이 아니며 의례 보조품이나 부분적 의식구로 사용될 뿐이다. 설경은 굿에 있어서 의식구의 중요한 장식품으로서 기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은 신의 형상이나 무신이 영험을 행사하기 위해 필요한 식물, 동물 등을 문양화 한 것으로서 경읽기와 함께 이 지역 무속의 대표성 갖는다. 한편, 설경은 신들의 세계를 설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질서와 기능을 나타내기도 하며 신과 인간 사이에 가교(架橋)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악연(惡緣)을 끊을 수 있는 장벽(墻壁)의 상징을 지니고 있다. 좁은 의미의 설경은 경문(經文)을 대부적처럼 오려 각 방위의 요소에 붙이는 것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굿을 하기 위해 신당에 배치되는 전반적인 무의식구(巫儀式具)를 총체적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설경은 부적의 기능을 하면서도 굿에서 사용되는 모든 무의식구를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하며 또한 무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설경을 보여주는 축원문(祝願文)으로서 제일(第一)의 독경이라고 하듯이 경문의 뜻을 지니고 있는 다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설경을 설위설진설경(設位設陳說經)이라고도 하는데 그 의미는 신령을 위목(位目)하고 음식을 진설하며 경문(經文)을 설경의 문양으로 나타낸다는 뜻이 되겠다. 설위설진설경의 또 다른 의미는 굿하는 공간에 필요한 여러 가지의 음식과 무신(巫神) 및 무의식구(巫儀式具) 들을 설치한다는 뜻도 있다. 5. 샤머니즘박물관 소장 유물의 가치 주지하다 시피, 한국의 박물관 역사는 지난 2009년에 이르러 개관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1909년 11월 한국 최초로 개관된 근대적 박물관인 제실박물관이 그 시초였다. 이제 전국 국․공립 및 등록 사립․대학 박물관 및 미술관은 600관 이상이나 운영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박물관은 과거 역사적 유물을 중심으로 ‘오래된 자료’를 소장․전시하는 인식에서 벗어나 역사성 외에도 독특하고 다양한 테마와 시대적 콘텐츠를 중심으로 한 전문박물관으로써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집, 전시, 보존 등 고유기능 외에도 체험, 교육, 공연 등 문화관련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변화되어 졌다. 이러한 것은 각 전문박물관 등장의 시대적 필요성과 더불어 이용자 중심의 박물관으로의 변화를 뜻하는 것이다. 샤머니즘박물관도 이와 같은 시대적 요구와 필연 속에서 창설되어졌으며 시대가 요구하는 역할을 수행해 나가려 하는 것이다. 한국 샤먼 자료가 박물관이나 수집가들에게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약 100여년 가까이 된다. 초창기에는 민족지학 자료로 수집되었지만 근래에는 예술품 목적으로도 수집되고 있다. 샤먼유물들이 수집되어져 박물관에 전시되는 목적은 샤먼 행위의 총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샤머니즘의 세계적 권위자 로렐 켄달 박사는 샤머니즘박물관 개관이 유물을 조사 연구하고 전시하게 된 것도 중요하지만 샤먼들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대변자로서도 역할 할 것이라고 했다. 이는 샤머니즘박물관이 유물 전시 이외에도 샤머니즘을 신앙하고 이를 전승하여 온 샤먼들의 역사와 삶 또한 중요한 역사로써 그리고 문화로써 이야기 될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주지하다 시피, 금세기 들어서면서는 많은 국가들이 세계화를 부르짖으면서 급속히 다문화 사회로 탈바꿈되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 패러다임 전환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것이 바로 민속성이 깃든 신앙유물인 것이다. 따라서 샤머니즘박물관은 우리나라 민족성과 역사성을 가장 잘 드러내 보이는 샤먼유물의 보고로써 민족 고유 신앙 양식과 관습을 조사 연구하면서 그에 따른 유무형 유물을 수집 보존 전시 교육 교류하기 위한 문화의 장으로서 역할 할 것이다. 샤머니즘박물관 소장 유물과 자료에는 신도류, 신상류, 석상류, 목어류, 신복류, 신구류, 문서류, 당사주책류, 부적류, 점구류, 제기류, 제상류, 명두류, 악기류, 촛대향로류, 초향류, 부채류, 방울류, 창검류, 명다래류, 설경류, 고비전류, 지화류, 악기류, 술잔잔대류, 상자류, 큰머리류, 옹기류, 자기류, 꼭두류 등이 있다. 이와같이 우리나라 무속현장에서 쓰인 각종 신물(神物)을 비롯하여 네팔, 몽골, 중국의 샤먼유물 등도 있다. 그리고 샤머니즘 및 민족 신앙 관련 장서를 비롯한 무속 현장에서 채집된 영상자료, 음향자료, 사진자료, 공연행사자료 등 총 약 3만여 점이 있다. 샤머니즘박물관은 샤먼 유물만을 전시하는 동시에 은평뉴타운 거주민을 위한 문화체험, 강좌, 공연 등을 개최하여 지역 문화 활성화에 이바지하려는 깊은 뜻을 갖고 있다. 그리고 금성당의 주신 금성대군의 충절을 기리는 ‘금성대군축제’와 금성당굿을 개최하여 지역민의 대동단결을 도모하기 지역민들의 문화향수권을 높이려 한다. 이러한 사업을 위해 샤머니즘박물관 소장 유물의 상설 및 기획전시를 개최하고 샤머니즘 및 금성당 관련 도서자료, 영상자료, 사진자료 등의 열람 및 정보를 공유하며, 민속체험교실, 문화생활강좌이 될 것이다. 더불어 세계샤머니즘연맹을 창설하고 한국 샤머니즘의 체계화를 비롯한 관광화 및 세계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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