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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청아카데미 54주(2010.11.17)
주자 수양론(修養論)의 화해성(和諧性) 문제
백 도 근 (영남대학교)
※요약
주자의 의식(意識)에 있어서 남송사회는 인륜(人倫)의 공간이고 왕실이나 관료계층 그리고 생산계층은 송대적 물질관계의 기초 위에, 욕망을 가진 실체(實體)가 아니라 충효(忠孝)의 의미체(意味體)일 뿐이었다.
주자학체계에 있어서 수양론(修養論)은 송대적 생산관계를 바탕으로 해서 유가전통의 인륜주의를 긍정하는 전형적 인격(人格)을 육성하기 위한 이론이다. 수양은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자신의 의식 내부에서 봉건적 의의와 대립을 야기하는 요소들을 부정하고, 모든 봉건적 의의에 대해 긍정하도록 자기를 훈련하는 것이다.
주자는 금(金)의 침략으로 국토가 양단되고 두 임금이 볼모로 잡혀가 있는 남송사회가 당한 내우외환(內憂外患)의 현실을 봉건적 군신부자(君臣父子) 간의 충효문제로 보고 조야(朝野)의 공분(公憤=天理)을 하나로 안으로 정사를 닦고(=修政事), 밖으로 전쟁을 통해(=攘夷狄) 해결할 것을 공개적으로 제안하게 되었다. 그는 이 선택의 여지가 없는 방책(方策=主戰論)이 강화(講和=主和論)에 의해 좌절되는 것은 바로 임금을 비롯한 사회지도층의 심술(心術=私心)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는데, 이 심술을 바로잡는 이론이 곧 그의 수양론이다.
주자에 있어서의 수양이란 개인(個人)이 자기자신을 - 개인주의, 이기주의, 계급주의 - 부정하고 국가유기체(有機體主義)의 부분으로 복귀하기 위한 부단한 지적(知的), 신체적(身體的) 수련이다. 그것은 부단히 유기체적 “분(分)의 계단식 긍정(모리모토 준이치로, 『동양정치사상사연구』, 김수길역, 서울, 동녘, 1985, p.109)” 의 마음을 수반한다. 이 자기를 부인하고 유기체를 지향하여 늘 깨어 있고자 하는 마음을 우리는 또한 경(敬)이라고 부른다. 주자는 경(敬)이야 말로 “성인의 말씀을 요약” 한 것이며, “일체 배움의 시작과 끝”이며, “이른바 위로 통하고 아래로 통하는 도” 라 주장하였다. 주자에게 있어서 경은, 봉건사회의 신분적 차별을 수양이라는, 주체의 자발적 훈련에 의해서 내재화시키는 원리로서 사회적 화해를 이룩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임무를 가졌던 것이다. 이 점에서 주자학은 봉건적이며, 개인적 수양이 목표가 아닌 봉건사회의 계제적(階梯的) 신분질서에 정합적(整合的)이라는 점에서 화해성(和諧性)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주제분야: 중국철학, 주자학
★주제어: 주자학, 수양론, 경사상, 봉건성, 화해성
Ⅰ. 들어가는 말
주자의 수양론(修養論)은 멀리는 선진시대 공자와 맹자의 수양설에 연원하고, 가까이는 북송유특히 이정(二程) 형제→ 양시(楊時, 龜山)→나종언(羅從彦, 豫章)→이동(李侗, 延平)으로 이어지는 계통의 수양론을 주로 하고 송유들의 수양론을 집대성하여 체계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한편으로는 불교와 도교의 수양설을 숙주(宿主)로 하여 형성되기 시작한 송유들의 수양론이 비로소 그 숙주(宿主)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고 완성된 모습을 드러난 것으로 볼 수 있고1), 다른 한편으로는 주렴계(周廉溪) 이후 봉건적 정체성을 확보해 가던 송왕조가 비로소 그 이상화된 봉건적 자아관(自我觀)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주자의 수양론은 그가 이동에게서 물려받은 “묵좌징심(黙坐澄心), 체인천리(體認天理)” 혹은 “희로애락이 아직 발하기 전의 기상이 어떠한지를 체험한다.(=驗夫喜怒哀樂未發之.前氣象何如?)”는 화두(話頭)로 시작하여 장식(張栻, 호는 南軒)과의 저 유명한 중화논변(中和論辯)을 거쳐 대체가 정해졌다고 할 수 있다. 즉 희로애락이 발하기 전의 기상(氣象)을 체험해서 이 미발의 중(中)을 경(敬)으로 보존해서 무과불급(無過不及)․불편불의(不偏不倚)하게 하고 이미 발한 이후에는 이발(已發)의 화(和)를 경으로 살펴서 무불중절(無不中節)․무소괴려(無所乖戾) 함에 이르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의 수양론에 있어서 으뜸되는 항목은 경이다. 그리고 나머지 함찰(涵察), 존알(尊謁), 극기(克己), 입지(立志), 격치(格致), 청명(聽命), 존성(存省) 등 항목들은 때로는 경과 대등하게 논의되지만 경의 아래 위치한다고 할 수 있다.
주자는 군부(君父)의 원수인 금나라와의 관계에 대해서 모든 상하 인민들이 마음에 주재(主宰, 곧 敬을 대동한 心)를 두어 인욕의 용사(用事)를 막고 천리(天理)가 온전히 유행하는 수양이 이루어지면, “군주가 되어서는 반드시 인(仁)하고 신하가 되어서는 반드시 경(敬)하며, 자식이 되어서는 반드시 효도하고 부모가 되어서는 반드시 자애롭게 될”2)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장군, 군민, 원근중외 사방이 모두 임금의 뜻을 알고 더욱 서로 격려하여 공적을 세우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그렇게 몇 년이 지나면 민의가 확고해질 것이며, 나라는 부유해질 것이고, 군대의 힘이 막강해져서”3) 복수의 길이 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주자의 수양론은 당시 불교나 도가의 그것처럼 - 가령 虛無寂滅論 같은 - 개인적 자아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닌, 봉건적 가치와 체제로 지향한 유기체주의적 화해성(和諧性)을 본질로 하는 수양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주자의 수양론을 먼저 그 형성배경으로부터 그 담겨져 있는 내용, 봉건성의 구축에 목표를 둔 사상으로 필연적으로 화해성을 띠고 있음을 밝혀 보고자 한다.
Ⅱ.주자 수양론 형성의 배경
주자가 태어나기 3년 전(1127년, 丁未年)에 송나라는 금(金)나라와의 전쟁으로 국토의 절반을 빼앗기고, 왕실은 소멸되었으며, 북송의 마지막 두 임금(徽宗, 欽宗)이 볼모로 붙들려 가는 일이 발생하였다. 주자가 18세(1147년)에 등과하고 이후 이동(李侗) 선생을 뵙고 묵좌징심(黙坐澄心)의 설을 듣고(1154년) 37,8세에 장식(張栻)을 만나 중화(中和) 문제를 토론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양궁(兩宮)이 볼모상태로 있었다. 더욱이 금으로부터 칭신(稱臣), 영토할양(領土割讓), 조공(朝貢) 등을 요구받고 있었으며, 안으로는 지식인과 군부의 좌절, 과중한 세금과 수탈, 상호(上戶)에 의한 토지경계 침탈 등으로 생산계층의 파산문제가 잇따라서 총체적 붕괴의 조짐이 일고 있었다. 따라서 명분상으로나 실리적으로나 일거(一擧)에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전쟁을 통한 복수(復讐) 뿐이라는 의식이 일어서 주전론자(主戰論者) 그룹을 형성하기도 했지만, 왕실과 문벌들의 방해공작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주자의 가계도 일찍이 이미 아버지 위재공(韋齋公) 주송(朱松)이 주전론자(主戰論者) 그룹의 리더 중 한 명이었다가 집권그룹으로부터 박해를 받아 도피 끝에 세상을 떠났고, 주자가 활동하던 당시에도 여전히 주화론자(主和論者)들이 조정을 점령하고 있었으므로 겨우 40일을 빼고는 외직으로 9년의 관직생활을 했을 뿐인 주자의 주화론자에 대한 타격(打擊)은 주로 상소문(上疏文)을 통하여 외곽에서만 이루어졌다. 그의 나이 33세 되던 효종 즉위년(1162)에 올린 그의 첫 상소문인 임오응조봉사(壬午應詔封事)를 보면, 임금이 도불(道佛)을 배척할 것, 강화(講和)를 폐할 것, 『대학』을 강구(講究)할 것, 근습(近習)을 물리칠 것 등 거침없이 봉건주의와 주전론의 입장이 전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주자는 수십 차례 봉사(封事), 주차(奏箚), 주장(奏狀), 강의의장차자(講義議狀箚子)를 닦았고, 그 외 『대전』과 『어류』, 저술 등의 많은 곳에서 이와 같은 입장이 피력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주자는 금(金) 나라의 침략으로 빚어진, 남송사회의 내우외환의 문제들을 “군신부자(君臣父子)”로 대표되는 봉건적 인륜의 문제로 환원시켜 해결하고자 한다. 그는 국토가 양단되고 기강마저 극도로 해이된 남송사회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오직 “정사를 닦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두 가지 일이 있을 뿐”4) 이고, 정사를 닦는 일의 급무는 휼민(恤民)이며5) 오랑캐를 물리치는 일의 급무는 “강화를 폐하는 일”6) 임에도 그것이 잘 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문제가 있고, 특히 임금의 심술(心術)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 이유는 임금의 마음은 곧 “천하의 근본” 인데7) 천하의 일이 올바름에 연유하지 않는 것은 왕이 도불(道佛)에 빠지고 시문기송(詩文記誦)에 심취하며, 기강(紀綱)을 세우는 일에 소홀히 하는 등의 마음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8) 때문에 주자는 이천(伊川)과 자신에 의해 봉건적 의의가 이입된 『대학』을 임금에게 권하여 심술을 교정할 것을 권유한다.9)
주자가 효종에게 『대학』을 읽기를 권했던 것은 『대학』의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규모가 제왕이 마음을 바로잡아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적합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10) 주자는 『대학』을 규정하여 “『대학』의 허다한 공부의 초점은 모두 격물치지(格物致知)에 있다.”11) 고 하였다. 격물치지(格物致知)는 사사물물(事事物物)에 있어서의 인의예지(仁義禮智) 가치의 편재성(遍在性)과 그 드러남의 통편성(通偏性)의 차이확인을 통한 봉건적 질서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으로, 의식의 봉건화의 관건이 된다.12) 또 치지(致知)를 주자는 “앎을 다하다.(吾心之所知, 無不盡也)”의 뜻으로 말하는데, 이는 의식에 대한 주관적 의미로서의 세계와 지식에 대한 봉건성을 최대한 충전함이다. 그 의의에 대해 주자는 “먼저 치지(致知)를 극진히 하지 않으면 정심성의(正心誠意) 공부는 어느 곳에서 베풀겠는가?”13)라 했는데, 이는 봉건적 질서의 의의를 인득(認得)하지 않은 막연한 ‘정심성의’는 무의미함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학문론이 오늘날 개인주의적 의의와는 다른 봉건주의에 대한 정합성(整合性)으로서의 화해성(和諧性)을 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또 “반드시 마땅히 함양을 우선해야 한다. 만약 함양(涵養)을 우선하지 않고 오로지 치지(致知)만 하게 되면 이는 헛된 사색일 따름이다.”14) 했는데, 이는 우선 “쇄소응대, 진퇴지절”같은 습관이 쌓여야 일체의 현실문제를 군신부자의 의리문제로 환원하는 사색이 가능하듯이, 인식이 사실의 구체성을 떠나서는 안됨을 말한 것이다. 그는 “함양은 모름지기 경으로써 해야 한다(=涵養須用敬)”고 하여 경(敬)을 봉건적 가치인식의 길잡이로 삼아야 함을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함양이든 격물이든 이미 공부하기 전에 경의 자세를 유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누가 ‘격물보망장(格物補亡章)’에 경(敬)의 뜻을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를 물었을 때, “경은 이미 『소학』에서 말했다.”15) 라고 하여 “쇄소응대진퇴지절(灑掃應對進退之節)”과 “예악사어서수지문(禮樂射御書數之文)”의 초입단계부터 ‘경’의 안내를 받은 것이므로 『대학』의 격물치지 단계에 이르러 새삼 경을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 『소학』의 학과(學課) 곧 함양의 단계를 거침이 없이 곧바로 격물치지를 하겠다면 그것은 헛된 사색이 될 것이다. 이리하여 주자는 “경(敬)이 일체 배움의 시작과 끝이며, 이른바 위로 통하고 아래로 통하는 도”16) 라 주장하여 경이야 말로 공자가 말한 인간의 보편성과, 송유들이 드러내고자 하는 봉건적 차별성을 결합하고 유가의 인륜성과 남송사회의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결합시킬 수 있는 키워드(key-word)임을 인식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앞서 적시한 나머지 수양에 관한 명제들(가령 함찰(涵察), 존알(尊謁), 극기(克己), 입지(立志), 격치(格致), 청명(聽命), 존성(存省) 등)은 경의 구체화 즉 세목에 불과한 것이 된다고 할 수 있다.
Ⅲ. 주자의 수양론
1. 북송유의 수양론
일찍이 송초의 정치가 범중엄(氾仲淹)이, “온 백성이 근심하기 전에 근심하고, 온 백성이 즐거워한 뒤에 즐거워하고자 한다.”17)고 하고, 주렴계는 선비들에게 “이윤이 뜻한 바를 뜻하고, 안자가 배우려던 바를 배우기를”18) 주문했으며, 장횡거(張橫渠)는“하늘을 아버지라 부르고 땅을 어머니라 부른다.......천지에 가득한 것은 나의 몸이고, 천지를 이끄는 것은 나의 성이다. 백성은 내 동포요, 만물은 나의 반려이다.”19) “천지를 위해 마음을 세우고, 생민을 위해 명을 세우며, 옛 성현을 계승해서 끊어진 학문을 잇고, 만세의 태평을 열고 싶다.”20)고 하고, 정이천이 “천하로써 자임하고, 포폄을 의론하되 거리끼는 바가 없었다.”21) 고 한 것은 왕실․귀족과 노예의 구조였던 사회였던 수당(隋唐) 사회와는 달리 이제 막 왕실․사대부(王室士大夫=上戶, 中戶, 地主)와 백성(百姓=田戶,小作人) 이라는 구조로 막 봉건사회로 접어든 송대사회에 대한 지배형태를 유가적 이상주의의 관점에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22) 송대 지식인들의 생각은 비록 백성에게 주어진 자유의 양이나 경제적 조건들이 실제로는 인색하고 가혹하기까지 했다 하더라도, 수당(隋唐) 사회의 ‘왕실귀족 ↔ 농노’ 라는 직접지배 구조보다는 모순이 덜하고, 다만 문제가 있다면 대지주들(=上戶)의 토지 무단점유나 수양되지 못한 관리들의 수탈과 관련된 것이므로 지도층이 마음을 수양하고 토지 경계(經界)를 바로 잡고 부패의 고리를 끊기만 하면 충분히 이상사회가 될 것으로 믿은 듯하다. 이는 송대사회가 그 생산관계에 있어서는 봉건주의적 모순(지주↔소작인)을 내포하고 있었지만 그 의식에 있어서는 전통적 인륜의식이 원용(援用)되어 유기체적 의식을 통하여 모순관계를 넘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23) 그들은 이 새로운 사회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임금으로부터 대소 관리에 이르기까지 지도층이 솔선해서 경(敬)으로써 수신하고 정사(政事)의 실무를 익혀서 각기의 분(分)에 따른 성(誠)을 달성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송대적 생산관계의 모순은 그들의 교육제도를 제약하고24) 이는 나아가 의식의 모순(가령 육상산의 왕도↔진용천의 패도 같은)을 가져와서 나중 사회모순이 극에 이르렀을 때에도 주자류의 지식인이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게 만들었다.25).
북송유가 이제 수신이라도 잘해서 통치의 근본을 세우려했을 때, 수신이 왜 송대적 통치의 근본이 되는지 또는 본체가 되는지를 해명해야 했을 뿐더러 왜 불교와 도가 혹은 당나라 이태백(李太白) 같은 시문기송(詩文記誦)의 유자들은 관리가 되어서는 안 되는지를 해명해야만 하였다. 물론 그 답은 간단히 허무적멸(虛無寂滅)은 출세적인 것이고 부문소예(浮文小藝)는 경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은 봉건적 생산형태에 대해 방관자이거나 방해자란 점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북송유 가운데는 일찍이 주렴계(周㾾溪)가 권5 『통서(通書)』에서 무욕(無欲)을 말하고26)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는 주정(主靜)을 말하였다.27) 그는 이상적 인간상으로서의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수양의 방법과 과정으로 지(志)28), 학(學)29), 사(思)30), 문(聞)31), 개(改)32), 예(睿)33)를 말하였다. 그는 ‘치천하(治天下)’를 위한 심신수양의 방법으로 단신(端身)34), 성심(誠心)35), 순심(純心)36)을 제시하였다.37) 이외에도 『통서』에는 외지(畏知)38), 신동(愼動)39), 시중(時中)40) 등의 개념들도 나온다. 이처럼 주렴계의 수양론은 비록 유자의 그것이기는 하지만 『대학』의 팔조목(八條目)의 도식과는 상관없이 나름대로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41)
장횡거도 “배움을 시작하는 자는 역시 고요함을 중시하여 덕에 들어간다. 지극히 덕을 이루는 것은 고요함뿐이다.”42)라거나 “인(仁)을 이루기 어려움이 오래되었다. 사람마다 그 좋아하는 바에서 잃으니, 대개 사람이 저마다 가진 이욕의 마음은 배우는 바와는 정확히 서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우는 자는 과욕(寡慾)할 것이 요구된다.”43) 라고 하여 여전히 도가나 불교적 수양론의 영향이 잔재해 있음을 이 두 마디 말에서도 알 수 있다.
정명도는 주렴계의 주정설(主靜) 대신 주경(主敬)을, 무욕 대신 천리(天理)로 대체하여 그 봉건성을 강화하였다.44) 그는 다시 천리(天理)라는 개념을 창안하고, 이 천리는 곧 “‘사랑의 이치(==仁理)’와 ‘생명의 이치(=生理)’ 임을 깨닫는 것(識仁)을 수양의 목표로 삼았다.45) 이는 송유로서 처음으로 대우주의 본질과 충효의 윤리를 연결시킬 수 있는 단서를 찾은 것이 된다.46) 식인(識仁)47)은 그만큼 중요한 관념인데, 명도는 식인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 경(敬)이라 하였다.48)
이천은 명도가 찾은 충효의 우주론적 정초49) 위에서 충효윤리를 절대화하고50) 경으로써 이 기조를 유지하고자 함을 볼 수 있다. 정이천의 수양론의 큰 지주로는 ‘존천리(存天理)’, ‘멸인욕(滅人欲)’, ‘주경(主敬)’, ‘집의(集義) 항목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이 4대 항목이 송대적 질서를 담보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은 다시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한사존기성(閑邪存其誠)․징분질욕(懲忿窒欲)”51) 그리고 “주일무적(主一無適)․정제엄숙(整齊嚴肅)”52), “경이직내(敬以直內)․의이방외(義以方外)”53) 사물잠(四物箴)54)등의 항목이 있다.
2. 주자의 수양론
앞에서 우리는 북송의 위대한 정치가 범중엄(氾仲淹)이 “나라 백성이 근심하기 전에 근심하고 나라 백성이 즐거워한 뒤에 즐거워하고자 한다.”고 한 포부를 말하고, 주렴계(周廉溪)는 치자들이 범중엄의 저 같은 포부를 실현하고자 하면, 장차 치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모두 이윤(伊尹)이나 안연(顔淵)이 말한 것처럼55) 성현이 되어야 한다고 하고, 정명도는 성현들은 하늘이 부여한 어진(仁) 심체를 체인(體認)한 사람이라는 것, 정이천은 저 천리(天理)를 체인하기 위해서는 공경(=敬)의 자세가 필수적라는 것과 ‘존천리(存天理)’, ‘멸인욕(滅人欲)’, ‘주경(主敬)’, ‘집의(集義), “한사존기성(閑邪存其誠)․징분질욕(懲忿窒欲)”56) 그리고 “주일무적(主一無適)․정제엄숙(整齊嚴肅)”57), “경이직내(敬以直內)․의이방외(義以方外)”58) 등의 세못(細目)이 있음을 들었다.
주자수양론의 제설(諸說)은 이 같은 북송 제유(諸儒)의 지(志)와 학(學)에 관한 주장을 이어받아 체계화 한 것이다.
남송에 접어든 후 이정(二程)의 후계는 남검(南劍)의 양시(楊時)로부터 나종언(羅從彦)을 거쳐 이동(李侗)에 이르는 계통이 있고, 호남(湖南)의 호안국(胡安國)과 그의 두 아들, 호인(胡寅, 五峰), 호굉(胡宏)을 거쳐 장식(張栻)에 이르러 상학(湘學)을 이루는 계통, 여공저(呂公著)로부터 여조겸(呂祖謙, 東萊)에 이르는 문헌파(文獻派), 주행기(周行己)로부터 영강(永康)의 진량(陳亮, 字 同甫, 號 龍川), 영가(永嘉)의 섭적(葉適) 등에 이르는 공리파(公利派)성격의 절학(浙學), 그리고 명도(明道)의 제자 사량좌(謝良佐)로부터 나중 육구연(陸九淵)에 이르는 무학(撫學)이 있었다.59)
주자의 수양설(修養說)을 논함에 있어서 괄목할 만한 한 사건은 그가 24세에 천주(泉州) 동안현(東安縣)의 주부(主簿)로 부임하면서 연평(延平) 이동(李侗)을 만난 일이다. 이연평은 이천(伊川) 정이(程頤)→귀산(龜山) 양시(楊時)→예장(豫章) 나종언(羅從彦)→연평(延平) 이동(李侗)으로 이어지는 학통의 적전(嫡傳)이다. 그는 일찍이 나예장(羅豫章)에게 나아가서 “종일 위좌(危坐)해서 저 희로애락이 발하기 전의 기상이 어떠한지를 체험해서 얻었는데”60) 나중에 주자에게 “묵묵히 앉아 마음을 맑혀서 천리를 체득할.”61) 것을 주문하였다.
일찍이 『중용(中庸)』에 “희로애락이 발하지 않은 마음의 상태를 중(中)이라 하고, 발하여 모두 중절(中節)함을 화라고 한다. 중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화는 온 천하에 통하는 도(道)이다.”62) 라고 했는데, 송유에 있어서 이 중(中)이 체험 가능한지 또는 중(中)과 화(和) 어느 단계에서 공부를 시작해야 하는지가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정명도는 인심의 본체에서 신비적 직관을 통해 본체(곧 仁, 中, 理一)를 밝히는 공부(=明體工夫)를, 이천은 여기에 매일매일 분수리(分殊理) 공부의 적습(積習)을 통하여 탈연관통(脫然貫通)하는 공부(達用工夫)를 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천이래 『중용』이 유가의 심법(心法)을 전하고 있다는 설이 있었고, 이 중 양귀산으로부터 이연평에 이르는 계통에서는 “묵묵히 앉아서 마음을 가라앉히는(=黙坐澄心)” 공부를 전하여 “희로애락이 발하기 전의 기상”을 보는 것을 목표로 세웠는데 이 계통의 학이 주자에게 전해졌다. 한 편 이천에게는 “무릇 마음이 모두 이발이다.(=凡心皆屬已發)” 라는 주장이 있었는데, 호남계인 호굉(胡宏, 五峰)은 “성은 체이고 마음은 용이다(=性體心用)”라는 주장에 근거해서 “먼저 마음의 이발에 나아가 살펴보고 나서 마음을 보존하고 성을 기르는(=先察識, 後存養)” 공부만을 주장하였다.
주자는 처음 연평에게서 ‘묵좌징심’의 설을 들었을 때는 미발기상의 체험에 대한 언급을 단지 선언적(選言的)인 것 정도로만 받아들였으나 그렇다고 크게 의심하지도 않았는데, 호오봉(胡五峰)의 제자인 장남헌(張南軒)과의 토론을 통해 이 주장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아직 발동하지 않은 미발심이란 없으며, 따라서 미발심의 기상을 알기 위한 공부도 없다.’63)는 확신을 잠시 갖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확신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與湖南諸公論中和第一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용』에서 미발이라 하고 이발이라 한 뜻이, 전에는 이것을, 이 마음은 유행하는 물건이고, 또 정(程) 선생이 평소에 심(心)이 모두 이발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으로 인하여, 심은 이발이고 성은 미발인 것으로 인정했던 것인데, 그러나 (이 설이) 정 선생의 글과 많이 다르므로 인해서 다시 보니 마침내 전일 인정했던 주장의 잘못이 다만 심성의 명명(名命)이 부당할 뿐만 아니라 날마다 할 공부에 전혀 본령(本領)조차 없음을 알았으니, 대개 잃은 바의 것이 다만 문자의 뜻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64) 즉 주자가 이연평의 “묵좌징심, 체인천리‘의 주장을 의심하고, 장남헌의 ”선찰식(先察識), 후존양(後存養)“의 공부론에 동조했던 것을 후회하는 표현이다.
주자는 오랜 공부와 각고의 노력 끝에 장횡거(張橫渠)가 심의 미발을 성(性)으로, 심의 이발의 상태를 정(情)으로 보고 심(心)이 미발과 이발, 동(動)과 정(靜), 어(語)와 묵(黙) 양자를 주재한다는 소위 심통성정론(心統性情論)을 수용하고, 드디어 다음과 같이 미발체험을 긍정하기에 이른다. “정 선생의 『대전』나 『유서』의 여러 설들을 보면 모두 사려(思慮)가 일어나지 않고 사물이 이르기 전을 희로애락 미발(未發)의 때로 여겼다. 이때를 당해서는 곧 이 마음은 적연부동한 체(體)이고, 하늘이 명한 성은 본체로서 이에 갖추어져 있다. 그 과불급이 없고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중(中)이라 하고, 그것이 사물에 감하여 천하의 일에 두루 통하게 되면 희로애락의 정이 발하여 심의 작용을 드러나게 된다. 그 중절치 않음이 없고 괴려하는 바가 없으므로 화(和)라고 부르는데, 이는 마음이 바르고 성정의 덕이 그러하기 때문이다.”65) 그러면 미발과 이발의 공부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발에 당도했으면 이 마음은 지극히 투명하여 거울의 밝음 같고 물의 고요함 같을 것이므로 마땅히 경(敬)으로 보존해서 그 조금도 치우치거나 기울지 않게 해야 할 것이고, 사물이 의식에 다가와서 이 마음에 희로애락이 발현될 때도 또 마땅히 경(敬)으로 살펴서 그 조금도 차특(差忒)함에 없게 해야 할 것이다.”66)
주자가 미발에서 본 것은 봉건성을 띈 인의예지의 본근성이다. 일찍이 『시경』 탕(蕩), 증민(蒸民)의 “民之秉彛 好是懿德”을 주자는 “백성의 타고난 마음은 아리따운 덕을 사모하는 것”67)이라고 해석하였다. 백성은 봉건적인 덕을 사모하고, 치자는 그러한 덕을 갖추고 있다는 전제에서 양자를 부절처럼 합하는 관계로 보려고 하는 것이 송대 주자류 지식인들의 의식의 한 특점이다. 마치 성서(聖書)를 원용해서 서구의 봉건주의가 유지되듯이 삼경(三經)이 송대의 봉건주의에 원용되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사상은 궁극적으로 그것을 낳은 사회에 근거를 두는”68) 바 그것이 『대학』이든 『시경』이든 주자가 해석한 것은 송대적 의의를 지닐 따름이다. 주자는 미발의 기상에서 희로애락 미분화(未分化)의 중(中)을 체험하게 되는데, 이 중(中)은 남송사회의 원초적 자아이고 이는 곧 발현되어서는 왕공대부의 각각의 의식으로 분화되는데, 이 때 경(敬)은 봉건적 가치인 인의예지가 의식에 내재하여 스스로를 인식하는 인식(認識)이다. 이 때 함양(涵養) 공부는 사회적 가치를 내재화하는 작업으로서의 성격을 띤다. 내재화된 봉건적 가치는 존양공부(存養工夫)에 의해 내적으로 길러진다. 이 과정에서 함양과 존양 그리고 경 공부는 순환적으로 이루어지지만 “경공부야 말로 진실로 유학의 강령이며, 존양 공부의 핵심인”69) 것이다. 이리하여 주자는 경을 “성인의 말씀에는 본래 요약한 것이 없었으나 정(程) 선생에 이르러 처음으로 요약하여 ‘경(敬)’ 이란 한 글자로 사람을 가르치게 되었다.”70) 고 하고, 다시 “경자 공부는 진실로 유학의 강령이며, 존양 공부의 핵심”71) 이라고 표현하게 된다.
주자의 ‘경’은 이천의 그것보다 그 의미가 훨씬 풍부해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전목이 『주자신학안』에 열거해 놓은 바에 의하면, “두려워하다(=畏)”, “수렴하여 조금의 사욕도 용납하지 않다(收斂, 其心不容一物)”, “일을 따라 전념하다(隨事專一, 혹은 主一)”, “오로지 일을 따라 마음을 점검하다(=須隨事點檢)”, “정신이 항상 또렷이 깨어있게 하는 방법(=常惺惺法)”,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고 태도를 엄숙하게 하다(整齊嚴肅)” 등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주자에게 있어서 “경 공부는 유학의 시작과 끝을 이루는” 72) 공부이다. 심지어 지적 탐구 영역도 예외가 아니다. 다음 말들이 이를 증명해준다. “주경 두 글자는 반드시 안(=意志)과 바깥(=지적 탐구)이라는 양자를 함께 기르는 개념이다.” 73) “주경의 일과 궁리(窮理)의 일은 분명히 다른 영역의 일이지만 그 실은 하나에 근본을 둔다.” 74) “지경(持敬)은 궁리의 근본이다.” 75) 라고 한 말들이 다 이를 입증한다.
주자가 봉건적 질서목적의 경공부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격물치지니 하는 사물에 대한 객관적 인식의 영역조차 끝내 그 독립성을 유지시키지 못하고 봉건적 의식의 통제 아래 위치시킴을 본다. 이것이 송대 봉건사회의 전문지식이 봉건적 이데올로기의 통제 아래 놓이는 한계이기도 하고 주자철학이 근대적 경험을 내부에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이 이 후 팔백여 년이나 제 자리 걸음을 하게 한 원인이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Ⅳ. 주자 수양론의 화해성
일찍이 북송유 주렴계는 『태극도설』에서 “성인이 중정인의(中正仁義)로써 규정하여 정(靜)을 주로 하여 사람의 가치표준을 세웠다.”76)라고 했는데, 송대의 신유학이 비로소 봉건성을 근본으로 하는 사상임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77) 그러나 그의 학문은 수당(隋唐) 시대 불교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개념들을 혼용해 있고, 이는 전체사회를 피라밋드식의 쌍무주의(雙務主義) 관계로 묶어 내지 못하고, 군신부자의 의리나 의무관계를 느슨하게 방치해 두었다는 점에서 송대 봉건적 질서에 꼭 맞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장횡거의 기일원론(氣一元論)도 봉건적 가치체계의 전일성(專一性)을 담보해 주지 못한다. 다르게 말하면 유교를 절대적인 위치에 놓고 불교의 가치를 전적으로 부정하거나 화이(華夷)를 분간하고 철저히 중화주의로 나아갈 동인(動因)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정 형제의 주리주의야 말로 송대사회의 요구에 정합적(整合的)이라고 할 수 있다.
명도는 일찍이 봉건주의의 결구(結構)로서 리(理) 라는 천인(天人)에 소통되는 개념을 창안하였고, 이천은 이제 적극적으로 봉건적 인륜성을 절대화하여 “부자군신(父子君臣)은 ‘천하의 정리(定理)’ 이므로 천지 사이에 도망갈 곳이 없다.” 78)고 하고 “부자군신은 떳떳한 도리이므로 바꿀 수 없다.”79) 라고 하였다. 그가 군신부자의 도리를 ‘천하의 정리(定理)’ 라거나 ‘떳떳한 도리(=常理)’ 라고 한 것은 그것이 “완전히 천리를 닮은 것”80)으로 동물계에서조차도 입증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81) 그의 ‘주경’ 사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천리를 보존하고(存天理)’ ‘인욕을 멸하는(滅人欲)’ 것이다. 그가 ‘주일(主一)’이라고 한 것은 ‘천리’를 보존하는 방법이며, ‘무적(無適)’은 ‘인욕’을 멸하는 방법이다. 그에게 있어서 ‘천리’의 큰 것은 ‘신자(臣子)로서 북송 왕실에 대한 순수한 충심이자 효심이고, ‘인욕’은 사심(私心) 이다. 그렇다면 ‘주경’의 최대 의의는 왕실에 대한 순수한 충효의 마음을 보존하면서 사심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그가 또 주창한 ‘집의(集義)’의 뜻은 ‘의를 모은다’는 것인데, 이러한 도리를 알아서 이떻게 하여야 자기의 분수(分數)’에 맞춰 실천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그 적중(適中)의 지점을 확인해 나가는 것이다. 이리하여 이천의 수양론은 임금을 비롯한 치자계층으로 하여금 마치 “북신이 제자리에 있는데, 뭇 별들이 그를 향한다.”고 한 『논어』의 구절처럼 이상적으로 그려진 봉건사회라는 밑그림 위에 퍼즐 맞추기처럼 위치시키고자 하는 데 뜻을 둔 것으로 화해성(和諧性)을 띠고 있다.
주자의 수양론도 다른 것이 아니다. 다만 집권가문 출신인 이천의 수양론이 스스로가 속해있는 문벌과 왕실의 의식을 대표하여 제출된 것인 데 비해, 남송의 주자의 그것은 어느 정도 집권층에 대한 저항의식을 담아 제출된 것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자학이 비록 복잡다기(複雜多岐)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남송사회이라는 특수한 사회의 한 지식인이 봉건적 생산관계(지주↔소작인, 形勢戶↔佃戶, 上中戶↔下戶, 佃戶)와 전통 유가의 인륜주의를 절충하여 고안한 특수한 인간전형을 형성하는 이론에 다름 아니다.82)
주자학체계에 있어서 수양론은 송대 봉건주의적 물질관과 유가 전통의 인륜주의의 이념이 결합된 세계관 위에 사회집단을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다시 계제적(階梯的) 신분질서를 구축해서 완정된 사회로 영속시키고자 했던 이상론이다.
주자가 보는 세계는 기본적으로는 선악(善惡), 빈부(貧富), 귀천(貴賤), 요수(夭壽), 행불행(幸不幸)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이는 그의 이기론(理氣論)의 기본 이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마땅히 봉건사회적 가치를 담보하는 선(善)이 봉건주의를 방해하는 불선(不善)을 이겨야 한다고 보기 때문에 그의 이기론은 리선기후(理先氣後)의 주리론이 된다. 그의 심성론도 심(心)의 선과 불선을 본래적인 것이거나 비 본래적인 것, 리와 기로 대립시켜 설명한 것이며, 수양론은 심의 주체성 확립이야말로 본래적인 선으로 하여금 비 본래적인 불선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점과 여하히 해서 심의 주체성을 확립할 것인가를 논한 이론이다. 그리고 정사론(政事論)은 치자가 봉건사회적 가이드라인 안에서 정사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사회에 어떤 문제들이 있고,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기준에서 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며, 어떤 인재를 뽑아 써야 하고 어떤 통치를 펼친 것인가를 논한 것이다.
국가사회에 대하여 봉건적 의식의 송유 혹은 주자의 공통된 인식은 국가는 충효의 공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며, 그들에게 있어서 왕실이나 관료계급 그리고 생산계층은 실체(實體)가 아니라 충효의 의미체(意味體)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충효 이념의 실체성을 담보할 실질적인 주체는 언제나 사대부계층 출신의 지식인인 자신들이었다. 수양론은 사대부 계급이 자신들의 계급적 실체성을 부인하고 충효의 주체임을 선언하는 -저 성인식(成人式)과 같은 -세리머니였다.
유가 혹은 송유들에게 있어서 수양 곧 마음공부는 그냥 마음을 착하게 가지자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맡았을 때 봉건적 충신(忠信)의 마음으로 사심 없이 유능하게 처리하자는 것이다. 이리하여 예비 치자의 공부는 충효의 실질적 담임자로서 장차 맡을 일을 봉건사회적 가이드라인을 따라 처리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연습하는 것이다. 때문에 나중에 그들이 아무리 수양을 해도 봉건적 가치의 울타리를 넘어 오늘날 우리의 합리적 이성이 판단하는 사회적 선으로 방향을 잡지 못한 것은 그것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공자가 가르친 유가의 본령은 오직 효제충신(孝弟忠信)의 인륜성과 예악의 규범성에만 치중해 있는데 비해, 주자가 당면했던 문제는 금나라에 빼앗긴 국토를 수복할 것과 손상된 국가의 명예를 회복할 것은 물론이고 그러기 위해서 우선 해이된 기강을 바로 세우고 흩어진 민심을 수습해야할 뿐더러 무너진 경제제도를 시급히 복원해야 하는 일들도 있었다. 국내적인 문제라면 모든 것을 윤리로 귀결시킬 수 있지만 대외적인 문제는 윤리를 넘어 부국강병의 원대한 계획도 필요하게 된다. 이에 주자는 남송사회가 안고 있던 모든 문제에 대해서 보다 심원한 해법을 도출하기 위하여 이기론(理氣論)→ 심성론(心性論)→ 수양론(修養論)→ 정사론(政事論)으로 연속되는 대체계를 수립하였다.
주자도 “인륜과 천리는 천지간에 지극한 것이므로 (이를 외면하고) 천지사이에 달아날 곳이 없다.” 83) 라고 하였다. 이는 그가 1163년 효종 2년 때 상주한 글로, 여기서 ‘인륜’ 이니 ‘천리’니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는 남송의 왕실과 북송의 왕실 간의 관계를 의미하는 용어들이다.84) 다시 말하면 남송의 왕실이 망해버린 북송왕실을 위한 복수(復讐)와 설욕(雪辱)을 외면하고서는 어떤 새로운 윤리적 명분도 세우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이천이 스스로 속한 계층과 왕실과의 밀접한 관계를 확인하기 위하여 ‘인륜’과 ‘천리’를 확인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송대적 의미의 잘 화해된 봉건국가에 대한 그림이라는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주자는 이천의 설을 수용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주자의 수양론이 ‘경’ 으로 시작하여 ‘경’으로 끝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85) 이 때 이 ‘경’이 하는 역할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이에 대해 일인학자 모리모토(守本順一郞)는 경(敬)을 “마음을 지키기 위한 분(分)의 계단식 긍정” 86) 이라 하였다. 그는 나아가 "성인은 사회적 ‘분’으로서의 ‘오상(五常)을 체득하여 실현한 사람이고 우인(愚人)은 이 오상을 체득치 못하여 사회적 ’분‘인 오륜을 문란케 한 사람“ 87)이라 하였다. 봉건사회의 선악문제는 비록 그것이 본질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현실적으로는 이 분의 문제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주자의 ’경‘은 바로 보통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안의 오상을 자기 분수로 재단하는 지속적인 정신활동이라 할 수 있다. 주자가 이정형제의 경을 ”성인의 말씀에 대한 요약“ 이라고 하여 칭찬한 것은 경이야 말로 보편적 가치로서 선언(宣言)된 오상의 문제를 ‘경’에 의해 봉건사회의 차별 속으로 위치지어 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주자에게 있어서 경은, 봉건사회의 신분적 차별을 수양 이라는 주체의 자발적 훈련법에 의해서 내재화시키는 원리로서 사회적 화해를 이룩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임무를 가졌던 것이다. 이 점에서 주자학은 봉건적이며, 개인적 수양이 목표가 아닌 봉건사회의 계제적 신분질서에 정합시키려는 목표를 두었다는 점에서 화해성을 띈다.
Ⅴ. 결론
현대의 민주사회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서 훌륭한 인격자가 환영받지만 과거 봉건사회처럼 인격이 강조되지 않을뿐더러 특별히 본받아야 할 어떤 전형적(典型的)인 인격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전형(典型)이 설정되기 위해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추구하는 목표가 비슷해야 하는데, 이미 개성시대를 표방하는 현대사회에서는 봉건사회에서처럼 동일한 절차와 목표를 향한 유일한 교과서나 동일한 등용문(登龍門) 따위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총생산이 거의 고정되어 있던 봉건사회는 봉건체제의 수요를 위해 필요한 만큼의 전형을 -가령 효자효부, 열녀충신 같은- 설정하고, 사람들을 그 전형을 따라 배우게 함으로써 체제를 유지했던 사회였다. 송대사회도 점차 봉건사회로서의 체제를 갖추어감에 따라 이정(二程) 형제의 철학에 이르러서는 특별히 인의와 충효가 강조된 것을 볼 수 있다. 송대 유학의 특질 중 한 부분이고 주자학체계에 있어서도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수양론(修養論)의 구성도 이정 형제에게서 그 근간(根幹)이 갖추어졌다. 이리하여 수당(隋唐)의 불교적 지배로부터 양송(兩宋)의 유교적 지배로의 전환은 주자의 철학에 이르러서는 외피(外皮) 뿐만 아니라 그 근골(筋骨) 조차도 확연하게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그 부정(否定)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주자가 수양문제에 관해 언급한 분량은 『대전』와 『어류』에 매우 많은 만큼, 중요하게 취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수양’ 이란 한 항목이 없다면 그의 모든 철학은 체계를 잃고 단순히 평면적 나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주자의 수양론은 먼저 심의 희로애락미발에서의 중의 기상을 체험하고 경으로 이를 보존해서 심이 이미 발한 이후에 이르러서도 치우치거나 기울거나 하지 않고 온전히 중절하여 화(和)를 이루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 때 그의 수양공부의 전 과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본론에서 논했던 것처럼 경(敬)이다. 때문에 그의 수양론은 경에 관한 이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그의 함찰(涵察), 존알(尊謁), 극기(克己), 입지(立志), 격치(格致), 청명(聽命), 존성(存省) 등 모든 명제는 물론 독립성을 잃지는 않았지만 경공부의 세목(細目)이 된다고도 할 수 있다.
주자의 수양공부는 송대라는 특정 봉건사회를 지지하기 위한 지식인들의 정신적 수련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송유들이 목소리를 높여 굳이 불노를 배척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이 점에서 그것은 의심할 것 없이 봉건적 정체(政體)에 기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에 이르러 주자의 공부 방법이 전혀 의미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자를 그대로 모방할 수도 없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는 일정한 시대사회적(時代社會的)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 거리는 주자 수양론에서 봉건적 시대성을 털어 내야만 좁혀질 수가 있다. 오늘날 우리가 주자학을 공부하는 것은 주자학에 있어서의 보편성(普遍性)은 무엇이고 봉건성(封建性)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그 비본질적인 것을 걷어내기 위함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충분히 그렇게 하고서야 주자학이 그 고색창연한 모습을 일신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이 시대에 거듭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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