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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여행 30일간의 아름다운 추억
인사말씀
오늘은 남미 페루에서 6일째 날인 2017. 3. 18(토)입니다. 소중한 분들과 함께한 소중한 시간 그리고 소중한 이야기를 잊어 버리지 않고 오래 오래 간직하고자 여기 일기장으로 기술해 봅니다. 저의 일기장 내용은 개인적인 감정과 주관적인 느낌을 기술하였기에 아마 여러분들과 견해가 다른 점도 많기 때문에 분명 정답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튼 함께 했던 분들께 저의 이 소감문이 다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7년 3월 18일 農心居士 올림
어제의 주요 관광내용 요약
♣ 어제 2017. 3. 17(금) 오전 Am 8시. 출근길 혼잡한 리마시내를 통과하여 리마 공항으로 이동했습니다. 공항에서 약 2시간 동안 대기하다가 드디어 Am 11시 30분 쿠스코행 비행기에 탑승하여, 잉카문명의 중심지인 쿠스코로 향했습니다. 그동안 사막 모래밭만 보다가 정작 비행기의 구름 아래로 보이는 페루의 고산지대의 모습은 참으로 경이롭기만 했습니다.
♣ 이륙한지 1시간 30분만인 한낮 Pm 1시에 쿠스코 공항에 도착했지요. 날씨는 약간 보슬비가 내렸으나 곧 화창한 가을 날씨로 변했지만 해발 3,400m의 고산지대라서 다소 으씰 으씰한 한기를 느꼈습니다. 곧바로 택시로 숙소로 향했고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페루 쿠스코 주재 ‘볼리비아 영사관’을 찾았습니다. 비자를 사전에 받아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 일행중에는 고산병 증세인지? 그동안 피로가 누적된 탓인지? 시름시름 앓은 회원들이 몇분 계셔서 호텔에서 휴식중에 유대장과 같이 중앙시장에 열대과일을 한보따리 구입해왔습니다.
♣ 저녁 노을이 질 무렵, 우리 일행은 쿠스코의 중심지인 아르마스 광장의 야경을 볼겸 민생고를 해결하고자 한국식당 ‘사랑채’로 갔고 간만에 김치찌개, 된장찌개 그리고 제육볶음으로 입맛과 컨디션을 찾았지요.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접한 잉카문명의 유적지에 그저 입이 절로 벌어졌습니다. 그중 특히 잉카인이 쌓은 돌담 길은 최첨단 기술을 동원한 오늘날에도 실현 불가능한 잉카인들의 건축기술의 백미를 보는 듯 했습니다.
D-6 : 쿠스코 지역 일대의 주요 잉카제국의 유적지 탐방
♣ 지난 밤 푹~ 숙면을 한 탓인지? 아니 어쩌면 논산 훈련소에 입소한 신병처럼 군기가 바짝 들어 기상나팔이 불지도 않았는데도 일찍 눈을 뜬 병사처럼 이른 아침 6시에 자동적으로 기상을 했습니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잉카제국의 발자취를 찾는 여행이 시작되기에 자신도 모르게 바짝 긴장을 했나 봅니다.
♣ 쿠스코는 잉카시대의 수도였고, 전성기에는 약 100만 ㎢의 면적에 1,100만명의 거주할 정도로 황금기를 구가했던 곳이라 잉카의 많은 유적들이 있는 곳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중에 삭사이와망이라는 잉카시대의 태양의 신전과 잉카 전사들의 전투태세 훈련장을 겸한 임카벨리 유적지를 비롯해 잉카시대 평민들이 거주하던 깊은 산속의 집단 거주지인 피삭(PISAC), 고산 지대의 천연염전 살리나스, 잉카인들이 씨앗종자를 개발했던 우리의 농촌진흥청과 같은 계단식 밭 MORAY를 견학한 후, 오얀타이 땀보로 이동하여 열차를 타고 아구아스 칼리엔테스 도착해 하룻밤을 묵은 후 익일 아침 새벽(2017. 3. 19 일요일)에 그 유명한 밀림 속에 숨은 잉카 왕족들이 살았던 도시인 마추픽추를 탐방할 계획입니다. 그래서 빡빡한 일정이라 서둘러야만 했습니다.
♣ 아침 일찍 기상하여 숙소인 El Mariscal Cusco 주변일대를 둘러보았습니다. 숙소 정원에 새들의 노래 소리가 정겨웠습니다. 오늘은 어느때 보다도 바쁜 일정이기에 아침밥도 먹는 둥 마는 둥 서둘렀습니다.
♣ 아침 조식은 7시라고 예고했는데, 우리 일행은 행여 늦을까 싶어 예정시간보다 일찍 식당에 모여 때이른 식사를 했지요. 이곳 페루 쿠스코는 수도 리마보다 더 높은 해발 3,400m의 고산지대라서 쌀쌀한 날씨에 대비해 모두가 옷을 두툼하게 입고 식당에 모였지요. 각종 이름 모를 열대 과일과 쥬스 그리고 빵과 우유, 계란 오물렛 등의 식단은 아주 푸짐했지만 고소증 증세 때문인지 일행중 여러명이 감기 몸살로과 소화불량으로 식욕을 잃고 있어 그냥 소식만 하는 실정이었습니다.
♣ 오전 8시, 출발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식사를 마치곤 모두가 짐을 몽땅 싸들고 숙소를 나왔습니다. 며칠 후에 다시 이곳 숙소로 돌아오기에 각자 세탁물을 카운터에 맡기었습니다.
♣ 우리 숙소의 출입문은 방범창으로 무장해 놓아 도난 등에는 안심은 되지만, 사실 출입시는 카운터로 인터폰을 연결해 한참을 기다려야 門일 열리기에 좀 불편했습니다. 출입문 상단 돌기둥 받침엔 1962라는 글씨을 음각시켜 놓은 것으로 보아 55년전에 건립된 건물인가 봅니다. 그래서인지 냉난방은 아예 설치되지도 않았고, 수도설비가 좀 허술해 간밤에 좀 추위에 떤 탓으로 약간 몸의 오한을 느꼈습니다만, 그저 고소 탓이라 생각하고 참았습니다.
♣ 숙소를 나설 때에 잠시 켜본 TV 뉴스에서는 스페인말로 방송되기에 말은 못알아 들어도 그림상으로 보아 오늘도 이곳 페루지역내 홍수에 관한 보도가 주류였습니다. 대절한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곳까지 무거운 여행가방을 들고 한참을 걸어 나왔는데, 높은 고도 때문에 벌써부터 숨이 헐떡 거렸습니다. 그래서 쉬다가다를 반복하며 천천히 걸었습니다. 그리고 근처의 직물공장의 담벼락의 그림이 참 예술적이어서 사진에 담기도 했습니다.
쿠스코의 요새지인 태양의 신전이 있는
삭사이와만(Saqsaywaman)을 향하여...
♣ Am 8시, 도로변에 대기중인 버스에 올랐습니다. 우리를 안내할 현지 가이드인 인상 좋은 전형적인 인디오 얼굴인 ‘빌리노氏’가 우릴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우리의 1차 목적지인 ‘삭사이와만’은 쿠스코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보는 높은 언덕에 위치해 있는데, 버스로 불과 20여분만에 도착했습니다. 가파른 언덕은 아니지만 아마도 옛 잉카제국 시대에는 지금처럼 도로가 발달되지 않아서 접근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 전세 대절한 관광전세 버스가 언덕을 오르면서 힘들게 용을 쓰고 올랐는데, 정작 정상에 도착하고 보니까 그야말로 최상의 요충지인 전투 요새지가 분명했습니다. 그저 나도 모르게 신음을 토하듯 ‘아~!’하는 감탄사 외에는 다른 표현이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었습니다.
♣ 버스에 승차한지 20여분만인 Am 8시 25분 1차 목적지인 삭사이와만(Sacsayhuaman)에 도착했는데, 맑은 가을 날씨에 기온도 섭씨 23℃로 아주 적정했고, 이곳 풍경까지 아름다웠기에 견학하기엔 최상이었습니다. 다만 해발고도가 약 3,400m로 높은 편이기에 고소증 예방 차원에서 천천히 걸어야만 했습니다. 이곳은 페루 내륙의 중심도시이고 안데스 산악지역으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계곡을 따라 평지와 언덕에 위치한 이곳 주변 도시는 잉카제국 당시 인구가 100만명이었을 정도로 번성했던 곳이라 합니다.
♣ 안데스산맥의 한 줄기에 위치한 삭사이와만은 잉카제국의 역사를 간직한 이름난 유적지중 한곳입니다. Sacsayhuaman이라는 명칭은 “잉카의 대단한 석조 기술”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이는 “바늘(혹은 종잇장, 칼날) 하나 들어가지 않을” 벽을 자랑하는 것을 뜻합니다.
♣ 잉카계곡에 위치한 삭사이와만은 거대한 돌을 갈고 맞닿게 쌓은 석축인데 아마도 인디오들이 왕의 즉위식이나 축제 또는 국가적 행사를 열던 곳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우리 가이드인 ‘릴노氏’의 말에 의하면, 여기에 더해 이곳은 잉카제국의 전사들이 전투태세 훈련을 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곳 삭사이와만은 푸마의 머리에 해당되는 곳으로 주요한 전투의 요새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넓은 초원 운동장을 바라보며 세워진 이 삭사이와만은 본래 100미터 높이로 축조되었는데 스페인 정복자들이 80미터 정도를 도시를 건설하거나 자신들의 개인적 건설 재료로 사용함에 따라 이렇게 낮아 졌다는 것입니다.
♣ 인근 멀지 않은 수 Km 지점에 석축에 필요한 재료를 공급한 채석장이 있다고 하는데, 이 엄청난 암석을 기중기나 대형포크레인을 비롯한 첨단 중장비도 없는 그 시대에 과연 어떻게 운반했을까? 그저 의문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특히 큰 돌은 무려 15ton이나 되는 무게에도 놀랐지만, 석축을 쌓는데 바위와 바위사이에 바늘조각이라도 들어갈 조그만 틈도 없고 또 돌의 모양새에 따라 끼워 맞춘 고도의 그 건축기술이 놀랍고 또 신기했습니다.
♣ 우리의 관광안내를 맡은 페루 현지인 ‘빌리노氏’의 말에 의하면, 삭사이와만이 인디오들이 왕의 즉위식이나 축제 또는 국가적 행사를 열던 곳만이 아닌, 요새적 기능이 강하다는 그 근거를 설명했는데, 이는 잉카 제국 말기에 있었던 망코 잉카(Manco Inca)의 항쟁 때를 예로 들었습니다.
♣ 즉, 아타우알파가 죽은 이후 그의 동생 투팍 와이파(Tupac Huallpa)가 잠시 제위에 올랐다가 천연두로 죽은 이후 와이나 카팍의 아들 가운데 하나였던 망코 잉카가 사파 잉카(Sapa Inca)의 자리에 올랐다고 하는데, 그는 스페인 콩키스타도르 사이의 이해관계와 반목을 잘 이용해 항쟁을 벌였고, 중간 중간에 전란에 휘말리거나 감옥에 갇히는 등의 고초를 겪으면서도 끝까지 잉카를 지켜내려고 했답니다. 망코 잉카가 쿠스코 공방전을 개시했을 때 쿠스코를 내려다보는 이곳이 주요 전투지가 되어 수없이 뺏고 빼앗기기를 반복하게 되었고 이곳이 요새로 쓰였다는 증거에는 이곳에 건물들만 있는 것이 아닌 높은 탑이 있어 감시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 했습니다.
♣ 그런데 요새지는 아니라는 반대 의견도 있는데, 이는 유적 한가운데에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광장이 있으며 삭사이와망을 묘사한 초기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 태양 신전(sun temple)이 있다는 것을 들어 삭사이와망의 존재 이유는 잉카의 의식을 위해서라고 주장을 학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견분분은 불과 수백년도 안되는 16세기 초에 잉카가 스페인의 몇몇 안되는 정복자들에 의해 멸망했지만, 위대한 문명을 탄생시킨 잉카인에게는 안타깝게도 그 당시 문자가 없었기에 때문에 역사가 묻히고 말았던 것입니다.
♣ 이 삭사이와만 유적지의 귀중한 문화재인 돌들은 이곳을 정복한 스페인들이 정부 청사는 물론 부유층의 석재로도 거의 80% 정도가 쓰였다는 것은 인류문화 유산의 훼손으로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훗날 기록(Garcilaso de la Vega)에 의하면 “돈과 노력, 인디언이 일하는데 들 시간을 덜기 위해 부드러운 돌들을 벽에서 빼내왔다. 이 돌들로 지어지지 않은 집은 하나도 없다, 아니 최소한 스페인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지어지지 않은 집은 없다.”라고 기술되어 있어 이곳을 처음 방문한 관광객인 객의 한사람으로도 씁쓸하기 그지 없습니다. 하물며 잉카이 후손인 이나라 페루인들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질 듯 아팠을까를 잠시 생각해 봅니다.
♣ 이른 아침에 이곳 삭사이와만 유적지를 방문한 관광객은 우리뿐인 것을 알고, 페루 원주민 몇몇이 알파카를 끌고 몇장의 사진을 찍고 수입을 얻으려 접근해 왔는데,왠지 마음이 착찹했습니다.
거대한 예수상을 눈으로 확인
♣ Am 9시, 주차장에 정차된 우리 버스에 탑승하여 바로 인접해 있는 예수님 상이 서 있는 곳으로 향했는데, 불과 5분도 안되는 거리기에 금방 도착했습니다.
♣ 예수님 像이 서있는 곳은 쿠스코 시내가 한눈에 조망되는 작은 봉오리였습니다. 이 예수님 像이 세워진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짐작컨대 스페인 정복 300년 이후 많은 세월이 지난, 페루의 독립이 이루어진 이후로 추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거대한 예수님의 像을 세운데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 자리는 피사로의 스페인 군대가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은 잉카인들을 모두 학살한 장소라고 합니다. 훗날 이에 대한 참회의 뜻으로 페루 교회 측에서 예수像을 세웠다고 합니다.
♣ 쿠스코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예수님 像의 뒤편 공터의 언덕에는 대형의 십자가 고상과 함께 좌우측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행을 당하실 때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던 두사람의 죄인들의 십자가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중 한명은 예수님께 ‘당신이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면, 우리를 구해주어 이를 입증하라라!’고 하며 예수님을 조롱했던 악한 죄인과 그의 조롱을 지켜 보며 그를 꾸짖고 ‘예수님께 용서와 구원의 기도를 했던 죄인’을 둔 것도 분명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 되었습니다.
♣ 우리 일행 15명은 예수님 상 앞에서 쿠스코 시내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촬영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신자든 신자가 아니든 이순간만은 이곳으로 인도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면서 맘 속으로 모두 깊이 묵상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 예수님像을 견학하곤 Am 9시 20분, 오늘 일정이 빡빡하기에 서둘러 다음 코스인 피삭으로 가기 위해 버스에 승차했습니다.
잉카제국시대 일반계층 인디오들의 거주지 PISAQ
♣ 삭사이와만(SAQSAYWAMAN)에서 다음 코스인 피삭(PISAQ)까지는 버스가 쉬지 않고 달리면 약 5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렇지만 도중에 볼만한 경치가 있을 경우, 자유여행이니만큼 볼꺼리가 있는 곳에는 자주 정차하기로 했습니다.
♣ 삭사이와만의 예수님상 앞을 출발한 우리가 탄 bus는 산속의 넓은 평야의 잘 포장된 도로를 거침없이 달렸습니다. 쿠스코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해발 3,300m의 고산 도시이기에 그 덕분에 지형상 자연적인 요새를 형성하게 되었고, 우루밤바 江이 흐르는 비옥한 농경지를 확보할 수 있어 잉카제국의 수도로 안성맞춤이었습니다.
♣ 우리가 탄 bus가 산의 오르막길을 막 지날 때 언 듯 보였던 돌담을 쌓은 전망대는 잉카제국 시절 쿠스코를 드나드는 사람들을 감시하기 위한 요새로 불리었던 ‘푸카푸카라(PukaPukara)’가 아닌가 생각되었으나, 시간관계상 어쩔수 없이 그냥 지나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 삭사이와만을 출발한지 약 30분 정도가 지날 쯔음인 Am 9시 50분, 우리는 산 아래의 한 작은 마을입구에서 과일을 파는 노점상 앞에 잠시 정차했습니다. 수박을 비롯한 찐옥수수 등을 판매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지역 내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직접 길거리에서 이곳을 지나는 일반 여행객과 외국 관광객들에게 파는 것이었습니다.
♣ 이는 마치 우리가 여름철 서울에서 강원도 동해안으로 여행을 떠날 때, 홍천과 인제의 길거리에서 찐옥수수와 감자 등을 파는 것과 똑 같았습니다. 이 지역에서 생산된 수박과 옥수수의 맛은 우리나라의 것과 똑 같았습니다.
♣ 산속의 작은 농촌마을의 뒷밭에는 페루사람들의 주식인 ‘끼누아’를 많이 재배하고 있었고, 특히 감자농사를 많이 짓는 것 같았습니다. 감자는 가지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로 이곳 남아메리카가 원산지라고 하는데, 감자의 꽃도 보라색, 흰색, 붉은색 등 아주 다양했는데, 원산지답게 감자의 종류도 수백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우리 일행은 다양한 색깔의 꽃을 자랑하는 감자밭에서 감자꽃을 배경으로 여러 가지 포즈를 취해 보았습니다. 아~! ‘세상에 감자 꽃밭’에서 기념 사진을 찍는 넘은 아마도 우리 뿐일 것입니다.
♣ 떡본김에 제사 지난다는 말도 있듯이 우리는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화장실을 이용하기도 했고, 또 장거리 여행을 위해 bus에도 기름을 만땅꼬 채우곤, Am 10시 10분 버스에 승차해 오늘 2차 목적지인 피삭(Pisaq)으로 향했습니다.
♣ 산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가운데 Am 10시 30분, 이번에는 큰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전망대(MIRADER TARAY의 표지판)에 잠시 정차했습니다. 멀리 높은 산 아래 ‘성스런 계곡“의 사이엔 우루밤바 江이 급류로 흐르는 것이 보였고, 마을의 뒤편 높은 산 8부 능선상에는 많은 ‘테라즈’가 보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동안 말로만 들었던 그 유명한 잉카제국시대에 만들어진 계단식 밭들이었습니다.
♣ 가을이라고는 하나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은 곳이라 사시사철 곷들이 만발한다고 합니다. 자연 속에서 자생한 이름모를 들꽃들이 마음껏 스스로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남미 최고의 문화유산으로 손꼽히는, 페루의 상징이요 또 잉카문명의 대표 유적지로 불리우는 ‘마추픽추(Machu Picchu)’가 이곳 근처에 있는 관계로 쿠스코市의 주변에는 잉카제국 시대의 유물들이 널리 산재되어 있고, 지금도 계속 발굴되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 Am 10시 40분, TARAY 지역 전망대에서 보았던 성스런 계곡 쪽에서부터 흘러 내려온 우루밤바 강가의 마을을 잇는 철교를 건넜습니다. 교량의 좌우편에는 낡은 옛건물의 주택과 새로 붉은 벽돌로 지은 빌라형태의 집들도 눈에 많이 띄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이틀전 페루 수도 리마의 외곽 가난한 마을에서 보았던 집의 형태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리마는 사막지대 이기에 대부분 가옥들은 붉은 벽돌로 축한 주택엔 지붕도 없고 창문에는 창틀만 덩그랬는데, 정작 이곳은 사막지역이 아니라서 그런지 가옥의 형태도 지붕이 있고 또 창문이 있는 일반적인 주택의 형태였습니다.
♣ 피삭으로 오르는 길은 비포장도로였습니다. 앞차가 도로를 휘집는 바람에 날리는 흙먼지 길을 따라 꼬불 꼬불한 피삭(Pisac)으로 향하는 산길을 올라 매표소 앞에 도착했습니다. 산아래 내려다 보이는 마을의 전경도 그림처럼 아름다웠습니다. 피삭의 입구에는 좌판을 벌려 놓고 기념품을 판매하는 원주민 복장의 장사치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 피삭은 산 입구를 막으면 외부인들이 침입을 못하는 요새지라 할 수 있는 외부와 차단된 잉카의 일반 인디오들의 집단 거주지 입니다.
♣ 입구부터 눈에 확~ 들어오는 높은 산 중턱 양지바른 곳에 잘 조성된 테라즈(계단식 밭)는 잉카인들이 이 고산지대에서 농사를 짓는 곳인데, 정교한 돌 석축을 계단식으로 수십 수백개를 쌓아 조성한 이 영농장은 오늘날 유적지로 남아있지만, 그 옛날 잉카인들이 지혜를 모아 지역특성과 환경에 알맞은 곡식물의 생산성을 최대한 높이는 과학영농의 현장이었습니다.
♣ 계단식 영농장의 축대(석축)를 쌓은 돌벽은 하나도 마치 예술작품 같았습니다. 농작물을 재배하는 밭의 넓이도 山의 높이와 경사도에 따라 달랐지만 평균 30m 이상으로 작물을 재배관리하는데 적합했습니다. 이곳 피삭에 거주하는 인구들이 충분히 먹고도 남을 양(量)의 농산물을 생산하였고 또 수년간 비축할 수 있는 보관 창고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 우리 일행은 잉카인들이 거주하였던 돌벽으로 쌓은 주거지와 종자보존 및 곡식보관 창고를 비롯해 농경지의 수로시설 등을 둘러 보았습니다. 잉카인들의 놀라운 과학적 지혜와 그들의 문화의식에 그저 탄복할 따름이었습니다.
♣ 고산지대에 어떻게 사시사철 이렇게 콸~콸~ 흘러 넘치는 수로시설을 만들 수 있었는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 수로시설의 돌축대는 견고하게 하기 위해 돌에 홈을 파서 돌과 돌을 끼워 맞춘 건축기법을 사용했기에 그동안 많은 지진이 일어난 지역이지만 오늘날까지 원형 그대로 보존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 마추픽추(Machu Picchu)가 잉카의 왕족중심의 귀족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곳에 비해 피삭((Pisac)은 잉카의 일반 인디오들이 집단 거주하던 곳입니다. 현장을 직접 방문해 본 후의 느낌은, 외부의 침입을 받지 않을 곳에 요새를 구축하고 평화롭게 살았던 그들에게 만약 스페인의 침약만 없었다면 오늘날 잉카문명은 얼마나 우리 인류를 빛났을까?하는 그런 안타까움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정작 그들의 후손인 이곳 페루의 원주민 인디오들은 얼마나 억울한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피삭의 인디오들의 무덤은 뒷산의 절벽 지대에 있었는데, 그들은 매장문화가 아니었습니다. 즉, 옛 우리의 고려장(高麗葬: 나이든 노인을 다른지역이나 나라에 버려두고 오는 일)과 비슷하긴 하나 이와는 전혀 다른 병든 노인을 절벽에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사망 시에 그 시신을 절벽의 두어 자연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외부의 침입자들이 쉽게 들어 올수 없는 곳인 깊은 산속에 위치한 잉카 인디오들의 집단 거주지인 이곳 피삭(Pisaq)은 잉카 유적지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도로가 뚫리고 여행자들이 찾기 시작하면서부터 유명한 마을이 되었습니다. 특히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마추픽추(Machu Picchu)가 스페인 식민지 300년 동안에도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 그 이후에도 수백년이 흐른 1911년에 깊은 산속 밀림에서 발견된 이래 같은 지역권 내에 있는 피삭(Pisaq)도 더불어 함께 쌍벽을 이루는 잉카 유적지로 각광 받으며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되었지요.
♣ 약 1시간 정도의 견학을 마치고 아쉬운 발걸음으로 유적지 입구 주차장으로 향했고, Am 12시, bus에 승차하여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우루밤바(Urubanba)로 향했습니다.
내용이 길어서 오전의 이야기는 여기서 마치고
이어 곧 다음 2편을 기술하겠습니다.
2편에서는 우루밤바의 페루식 뷔페식당에서 점심식사 후, 다음 코스인 산속 깊은 곳에 위치한 천연소금 생산지인 살리나스 염전에서 느낀 점, 이어 잉카시대 농업연구소로 불리우는 씨앗 재배(종자개량 등)지인‘MORAY’에서 경험한 감동 깊은 일 그리고 산속의 어둠을 뚫고 오얀타이땀보역으로 갔고 그곳에서 아슬아슬하게 야간열차를 타고 ’아구아스 칼리엔테스‘에 도착했던 내용들을 기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