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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침체기의 경영전략
세계가 깊은 경기침체의 늪에 빠졌다. 이는 지구의 자원이 고갈되거나 천재지변, 전쟁 등의 파괴 때문에 생긴 것도 아니고 그동안 과열됐던 버블(Bubble)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질가치가 오천 원밖에 되지 않는 주식이 오만 원이 되고, 불과 5년 전에는 평당 삼백만 원밖에 안 되던 땅이 재개발이 되면서 평당 이천만 원까지 뛰어오르는 등 버블이 발생했다가 꺼지는 과정에서 경기가 침체되고 있다. 거품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경기침체는 계속될 전망이다. 주식이나 부동산 값이 하락하는 대신 금이나 원자재 값은 상승할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살아야 할까?
미국의 뉴딜정책
뉴딜정책은 당시 뉴욕 주지사이자 민주당 후보였던 루즈벨트가 1932년 시행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 내걸었던 정치공약이자 ‘경제사회의 재건’과 ‘빈궁으로 고통 받는 국민의 구제’ 등을 슬로건으로 한 새로운 정책, 즉 ‘잊혀진 사람들을 위한 뉴딜(New deal)’이라는 부제를 가진 경기부양책을 말한다.
1929년 뉴욕 주식시장의 주가 대폭락을 계기로 기나긴 경제 대공황을 맞이한 미국 시민들은 너나할 것 없이 이 루즈벨트의 강력한 공약을 지지했고, 결국 그는 당시 공화당 후보였던 후버를 큰 표 차이로 누르며 제 2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루즈벨트는 뉴딜정책을 구현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긴급은행법을 제정하여 회생 가능한 은행에 대폭적인 대부를 알선하여 은행업무의 정상화를 도모하고, 농업조정법을 통해 주요 농산물의 생산을 제한하여 과잉생산과 농산물 가격의 하락을 막았다. 한편 ‘테네시강 유역 개발공사’를 설립하여 종합적인 지역개발의 실시뿐 아니라 막대한 고용창출을 통해 경제회생에 주력했다.
이 뉴딜정책 실시를 계기로 미국은 전통적인 자유방임주의를 포기하고 정부권력에 의한 통제와 개입에 돌입하게 되었으며, 케인스의 경제학을 받아들여 미국식 자본주의를 대폭 수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7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친 뉴딜은 단순한 경제정책에 그치지 않고 정치와 사회 전체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쳐 미국의 항구적인 제도로서 확립되는 등의 역사적 의의도 갖게 되었다.
수도권 규제 완화 정책
불경기에는 누구나 이 뉴딜정책을 본받아 경기부양정책을 먼저 생각한다. 그래서 일부 정치권에서는 수도권의 규제를 완화하여 생산시설을 짓는 것을 허가하도록 주장하고 있다. 그린벨트도 일부 해제하고 주택 건설도 촉진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100년 전의 미국의 상황과 현재 한국의 상황은 사뭇 다르기 때문에 뉴딜 정책을 흉내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다.
뉴딜정책을 시작할 당시의 미국은 무한한 국토와 자원이 있는 나라였다. 그러니 원자재를 외국에서 수입할 필요도 없고, 국토가 넓어 교통체증이나 대기오염, 환경파괴가 문제되지 않았다. 반면에 현재의 우리나라는 더 이상 건설을 해서는 안 될 정도의 좁은 국토라는 열악한 환경에 처해있고 건설을 할 때는 대부분의 원자재를 수입해야 할 판이다. 단기적으로는 경기부양의 효과가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는 더욱 더 경제가 어려워질 것이다. 더구나 현재의 생산시설은 포화상태에 있다.
첫째로 공장 가동률이 80%, 70%로 떨어지고 있다. 또 텅텅 비어 있는 상가도 많고 미분양 아파트나 미입주 아파트도 유사 이래로 가장 많다. 그리고 단독주택 2층에 전세를 사는 사람들도 절반은 전세를 빼서 아파트로 이사했기 때문에 비어있는 가정집 방도 부지기수다.
수도권의 규제완화로 인해 지방은 상대적으로 더 어렵다. 국가공단으로 지목한 900만평의 영남권 공단에 누가 입주할 것인가? 수도권에 공장을 지으면 국제적 접근성도 좋고 물류비도 절약된다. 뿐만 아니라, 공장 혹은 산업부지로 사용하고 있는 땅은 점차 지가가 올라 그럭저럭 운영만 돼도 땅 부자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실제로 6년 전에 A 씨는 안양에 3억 5천만 원을 주고 아파트 60평을 구입했고, 친구인 D 씨는 대구에 3억 5천만 원을 주고 아파트 60평짜리를 구입했는데 안양에 사는 친구는 아파트 값이 매년 1억씩 올라서 시가가 9억 5천만 원이 되었으나 대구에 아파트를 구입한 D 씨는 오히려 가격이 내려서 3억 원이 되었다. A 씨와 D 씨는 똑같은 돈을 투자했으나 6년 후에는 3배의 차이가 났다.
대구시 서문로 2가에 자리잡은 과거의 한일은행은 삼성의 이병철 씨가 지은 첫 번째 건물이었다. 7년 전에 덕영치과에서 매입하여 치과병원의 일부로 쓰고 있다. 삼성의 주업(主業)이 되었던 대구의 제일모직 공장은 기업할 수 있는 여건이 부족하여 수도권으로 이전했다. 세계적인 기업 삼성이 오죽했으면 대구 시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떠나면서 어찌 기념관 하나도 남기지 않았을까? 정부는 지방에도 건전한 기업이 뿌리내리도록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지금처럼 어려운 경기침체기에 정부는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1994년 11월 한국에 IMF가 왔을 때 스탠리 피셔 IMF 수석부총재가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한국의 관리들이 부정부패가 심하여 국가 부도를 낸 것이라 생각하면서 구체적인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한국에 왔던 것이다. 그는 10년 전에 내한할 때와는 너무나 변한 한국을 발견했다. 한국에는 그 10년 동안에 엄청나게 많은 빌딩과 주택들이 지어져 있었다. 그는 “한국 사람들이 과도하게 건설을 많이 해서 부도가 났구나”라고 판단했다.
100년 전 미국의 뉴딜 정책의 신화만 믿고 시작하는 ‘제 2의 뉴딜정책’이라는 건설 경기부양책은 우리나라의 경제구조를 악화시키고 쾌적한 환경마저 파괴할 것이다. 건설은 짓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수입자재로 내부 장식을 해야 하고, 수입 가구를 채워야하고,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고, 또 관리가 필요하다. 노태우 정권 때 금융기관 설립규제를 대폭 풀고 일산과 분당 신도시를 만드는 등 과도한 건축으로 버블이 생겨 김영삼 정부 때 IMF를 신청한 것을 거울로 삼는다면 무조건 식의 부양책은 제고되어야 한다.
엿 장사 떡 장사
어느 마을에 두 소년이 돈을 벌기로 결심하고 한 명은 엿 장사, 다른 한 명은 떡 장사를 하기로 했다. 두 소년은 떡과 엿을 한 상자씩 만들어 팔러 다녔으나 전혀 팔리지 않았다. 지친 두 소년은 동구 밖 느티나무 밑에서 쉬다가 서로 떡과 엿을 팔아주기로 했다. 떡 장사 소년은 엿을 사먹고 엿 장사 소년은 떡을 사먹었다. 두 소년은 매우 배가 고팠으므로 떡 상자와 엿 상자는 곧 바닥이 드러났다. 장사는 잘 되었는데 계산해보니 남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는 경기 부양으로 내수 진작도 중요하지만 생산이나 수출과 연결되지 않을 때는 결국은 빚만 남게 된다는 교훈이 될 것이다.
경기침체 때의 경영전략
① 직업에만 전념하라.
경기가 좋지 않을 때는 증권이나 펀드, 부동산 투자 등을 삼가고 오직 직업에만 몰두하는 것이 좋다. 그 방안으로서는
ㄱ. 노사화합 분위기를 조성하고 사회가 어려울수록 회사와 종업원은 고통분담을 해야 한다.
ㄴ. 신기술이나 신 경영기법 등을 도입하고 부단히 변화를 시도하라.
② 근검절약하고 과소비적인 부분을 줄인다.
③ 사회봉사에 솔선한다.
사회봉사를 열심히 하면 많은 인적 네트워크를 가지게 되어 어려움이 닥칠 때는 사람들이 돕는다. 또 광고비를 들이지 않고 홍보를 할 수 있다. 필자는 어떤 사람이 열심히 봉사를 하는데 그 기업이 망하는 경우는 아직 보지 못했다. 기업에 어려움이 닥칠 때도 열심히 봉사를 하면 우회적으로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요즈음 경기가 침체가 되니 무료급식소나 자선단체에 기탁하는 돈이 줄어든다고 한다. 사회가 어려울 때일수록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한다. 과거에 우리의 선조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논밭 떼기를 기증하고 쌀섬을 팔아 학교를 세우는데 지원을 했다.
구제금융 얻으러 전용기타고 오다
파산위기에 놓인 美 자동차 빅3 CEO 릭 왜고너 GM 회장, 로버트 나델리 크라이슬러 회장, 앨런 멀럴리 포드 사장 세 사람이 2008년 11월 19일 미 상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의 청문회에 회사 소유 전용기를 타고 갔다가 혼쭐이 났다. 이들은 250억(한화 약 35조 원) 규모의 구제 금융을 타러 갔는데 그 모습을 본 민주당의 게리 에커먼 의원은 “무료 급식하는 식당에 턱시도를 입고 나타난 꼴”이라고 몰아붙였다. 자가용으로 왕복하는데 드는 비용은 2만 달러인데 비해 일반 여객기를 타면 1등석을 타도 837달러밖에 안 든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들의 도덕적 해이 때문에 미 상원위원회에서 구제금융이 부결되고 말았다. 기업이 어려울 때는 사장이나 직원이나 모두 고통분담을 함께 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기업이 어려울 때 돈을 빼돌리고 고의로 부도를 내는 자들이 많다.
국제 로타리
오늘날 천연두를 없애는데 큰 공헌을 하고, 소아마비 근절을 99.9% 달성한 국제로타리는 이 땅에 봉사의 이념을 표방한 첫 국제단체이다. 조선의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일본에 예속시키려는 일제의 계략에 맞서 1907년 2월 대구에서 일어난 국채보상 운동 역시 가장 어려운 위기의 때에 백성들이 모두 함께 힘을 모아 어려움을 극복한 것처럼, 이 국제로타리 역시 104년 전 세계가 극심한 공황기를 겪을 때 시카고에서 탄생되었다. 국제로타리의 이 같은 철학은 전 세계에 확대되어 현재 125만 명의 회원이 세계도처에서 소아마비 근절운동을 비롯한 청소년 지도자 양성, 직업연구단 교환, 세계평화 봉사단 운영, 불우이웃돕기, 장학생 지원 등의 수많은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경주 최 부잣집 이야기
17세기 중반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최국선에서부터 20세기 중반 일제강점기 때 독립자금을 지원한 독립 운동가이자 최 씨 가문의 마지막 부자 최준에 이르기까지, 10대 300년을 유지한 경주 최 부자 댁의 이야기는 노블레스 오블리제 정신을 가장 잘 반영한 사례다. 경주 교동에 터를 잡았던 최 부자는 단순히 돈을 많이 모은 거부(巨富)여서가 아니라, 집안이 대대로 자선과 사회공헌을 통해 가진 자의 모범을 보였다는 이유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최 부자 댁에는 대대로 엄격한 가훈이 전해져 왔는데 그것은
흉년에는 재산을 늘리지 마라.
사방 백 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와 같은, 타인에게는 덕과 긍휼을 자신에게는 절제와 청빈의 가치를 엄격히 적용하는 가르침이었다. 춘궁기가 되면 한 달에 약 100석, 흉년에는 800석의 곡식을 나눠주면서 동쪽으로는 동해바다를 접하는 감포 일대, 서쪽으로는 영천, 남쪽으로는 울산, 북쪽으로는 포항에 이르는 사방 백리에 배곯는 자가 없도록 했다. 또 권세의 자리에 있음은 칼날 위에 서 있는 것과 같아 언제 자신의 칼에 베일지 모른다 생각하여 후손들에게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마라’는 당부를 했다 전한다.
최준은 해방 후인 1947년에 경주의 집과 땅을 처분하여 영남대의 전신인 대구대학과 계림학숙을 설립했다. 독립운동 사실이 일제에 발각되어 만석꾼 재산을 거의 날리게 된 그는 이와 같은 결정으로 현대교육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되었다.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Bill n Melinda Gates Foundation)은 2000년 마이크로 소프트의 창업자인 빌 게이츠와 그의 부인 멜린다 게이츠가 설립한 세계 최대의 자선재단으로, 세계 최고의 투자전문가이자 이들의 절친한 친구인 워렌 버핏이 2006년 자기 재산의 86%인 360억 달러를 기부하면서 천문학적인 숫자의 운용기금을 마련하게 됐다. 이들 부부는 기업의 이윤추구라는 경제적 논리에만 국한되지 않고 적극적인 사회 환원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가진 자의 고결한 윤리 정신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자 하였다.
현재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은 개발도상국에서 발생하는 전염병 예방백신의 보급과 에이즈 치료제의 개발 같은 질병퇴치, 제 3세계의 빈곤구제, 장학사업과 같은 교육기회의 확대, 노트북과 인터넷의 보급 같은 정보통신 혜택 증진 등의 사업들을 추진하고 있다.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은 최근에 국제로타리에 1억 불의 기금을 출연(出捐)하여 로타리안과 손을 잡고 소아마비 퇴치에 박차를 기하고 있다.
덕영치과의 대책
덕영치과는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인원을 증가시켜 현재 150여 명의 직원들이 일을 하고 있다. 94년 11월 IMF가 왔을 때 처음은 매우 당황해했지만 “위기를 기회로!”라는 슬로건을 걸고
① 아침마다 20분간 조회 실시
② 10시에 진료시작하고 1시~2시에 점심식사하고 저녁 7시에 퇴근하던 것을
→ A조, B조 두 조로 편성하여
A조:9시에 진료시작, 12~1시 점심식사, 6시 퇴근
B조:10시에 진료시작, 1~2시 점심식사, 7시 퇴근으로 바꾸었다.
A조, B조로 나누어 시간을 편성한 결과 9시~10시와 1시와 2시 사이에 진료를 할 수 있어 두 시간 더 병원시설을 이용하게 되고, 환자로서는 오전 9시에서 오후 7시까지 언제라도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에 많은 증원을 하여 원활한 진료를 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두 달 후인 1월에는 최고 수입기록 갱신을 했으며, 3월에 또 다시 최고 수입기록 갱신을 했다.
금년의 어려운 시기도 잘 넘기기 위해 “위기를 기회로!”라는 슬로건을 걸고 평소 때 태만하고 방만했던 부분들을 개선시키고 직원들에게 위기의식을 심어주고 역동적으로 대처하도록 하고 있다.
경기가 좋을 때는 지각이나 결석도 하고 이동도 많지만 경제가 어려울 때는 출근도 잘하고 통솔도 잘 되고 각종 연수회 참석률도 높아진다. 그러므로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낭비를 줄이고 군살을 뺌으로서 효율적인 진료를 할 수 있다.
덕영치과병원에서는 금년에는 최대의 시설 투자를 하고 신입 직원 수도 역사 이래로 최고 많은 20명을 뽑았다. 주위의 사람들이 필자에게 묻는다. “그 많은 식구를 어떻게 먹여 살립니까?”
나는 대답한다. “그들이 먹을 것은 그들이 버는데 무슨 걱정입니까?”라고.
치과병원은 다른 공장 직원에 비하면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다. 매출도 보잘 것 없다. 그러나 치과의사라는 특수성이 있고 환자관리라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너무 편리하게만 살려고 하지 말고 고통을 분담하고 공생을 한다고 생각하면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니가타의 봄
필자는 한국바둑학회 임원 9명과 함께 일본 니가타의 ‘8번개발주식회사’ 이이즈까 에쯔헤이 사장의 초청으로 바둑교류전을 위해 일본을 다녀왔다. 10년 전 그와 교분을 가진 후 필자는 니가타를 네 번 방문했고, 한국에서도 그만큼 만났다.
그와 함께 8년 전 벚꽃 동산에 기념식수를 하였는데 이번에 다시 찾아가보니 그 나무가 잘 자라고 있었다. 그때가 2001년 5월 5일, 고베에서 개최한 세계로타리 바둑대회에 참석한 후 이이즈카 씨가 있는 니가타로 향했다. 그때 마침 겹사쿠라가 만발해있었고, 음달 계곡에는 눈이 서럭서럭하게 녹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맥주를 눈 속에 박아 넣어두고 괭이와 삽을 들어 깊은 구덩이를 파서 벚나무를 단단히 심었다. 날씨가 따뜻하여 벚꽃이 피었는데도 음달에는 입자가 굵은 눈이 있는 정경을 잊을 수 없어 필자는 이를 ‘니가타의 봄’이라고 불러본다.
겹사쿠라를 심는 이유는 새들 때문이라고 한다. 보통의 벚꽃은 4월에 피는데 니가타는 매우 추워 4월에 새들의 먹이가 없기 때문에 벚꽃을 다 먹어 치운다는 것이다. 그러나 겹사쿠라는 꽃이 5월초에 늦게 피기에 그때는 벌레가 많아 새들이 꽃을 먹지 않기 때문에 겹사쿠라를 심는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목수로서 나무로 집을 지으면서 가업을 일으켰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가 벤 나무를 다시 자연에 돌려주기 위해 억새풀만이 지키고 있는 황무지인 남의 땅 3만 평에 해마다 벚나무를 심는다고 한다. 해마다 200그루를 심는데 지역주민들로부터 한 그루에 만 엔씩 기부를 받아서 어려운 청소년들에게 나무 심는 아르바이트를 제공해준다.
그의 이야기는 문득 2007년 6월에 간 캐나다의 부차드 가든을 생각나게 한다. 남편이 채석 장사를 하여 재벌이 되었는데 돌을 떼어낸 산이 너무나 볼품없어 그의 부인은 그곳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엄청난 정성과 돈을 투자하여 세계 여러 나라의 정원을 만들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든을 만들었다.
이이즈까 사장은 이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기 위해 자기의 땅도 아닌 남의 땅 황무지에 나무를 계속 심어가고 있다. 그 산에서 멀리 보이는 산이 요네야마(米山)이다.
요네야마 장학금이라면 아마 로타리인은 다 알 것이다. 이는 외국의 대학생들이 일본의 대학에서 학비와 생활비로 충당할 수 있는 큰 액수를 매달 지불해주는 대단히 큰 장학회이다.
부르봉 여사
일본의 4대 제과제당 부르봉 회사의 회장 부인인 요시다 마리 여사는 그날 바둑대회를 위해 많은 지원을 하고 필자의 문학 강연을 듣기 위해 찾아왔는데, 그녀는 또 다른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행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4대째 제과회사를 한다는 부르봉 제과의 본사는 원래 동경에 있었는데, 동경 대지진 때를 기점으로 해서 니가타로 공장을 옮겼다. 위험을 분산하고 지역에 고용을 창출하기 위해 니가타로 옮겼다고 한다. 연 매출 2조 5천억 정도인데 우리나라 사람 같으면 의당 서울의 강남에 살아야 할 터인데 우리나라의 강원도와 비슷한 니가타에 사는 것부터가 검소하게 느껴졌다. 저녁에 귀가할 때 자가용을 타지 않고 콜택시를 이용하는 것만 봐도 얼마나 그녀가 검소하게 사는 지를 입증해준다.
요시다 여사는 인간 내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여 이를 일본 전통 시로 쓰는데, 대부분의 주제는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애정을 담고 있었다. 어머니가 먼저 이야기를 하고 아이가 답을 하는 식으로 쓴 그녀의 글을 한편 소개해본다.
어머니 수고했습니다, 대단하구나.
위로하며, 격려하며
겨우 여기까지 왔습니다.
아이 창문을 연다. 훌륭한 소리
정원을 돌며 꽃을 피운다. 구두를 정리한다.
훌륭한 소리
요리, 바느질, 가정살림
어머니에게는 여러 가지 소리가 있다.
타인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다하고
타인을 위해서 들려주는 소리
만물을 향하여 들려주는 소리
귀 기울인다. 그 눈앞에 마주앉아
타인의 마음에 마음 기대어, 풀 소리
정적, 이라는 소리가 있다.
소리 중에서도 음이 없는 것이 있다.
어머니에게는 정적, 이라는 소리가 있다.
- 요시다 마리 <어머니의 기도> ‘7월’
요시다 씨의 명함 앞뒤에도 자신이 쓴 글이 적혀있다.
앞면 ‘아름다운 지구환경’과 ‘풍요로운 정신환경’을
미래의 모든 어린이들에게 남겨주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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