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제 20장
=====20:1
하루는 - 이는 19:47의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라는 말씀과 연결하여 그 '날
마다' 중 어느 날 하루 일어났던 사건임을 암시한다. 아마도 처음 성전에서 가르치신
후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 이들은 유대의 종교 최고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파견된 자들이었다. 유대 사회에서 율법의 보전, 교수(teaching)
및 종교 의식 집행, 성전 관리와 같은 모든 종교 문제와 관할권은 이들에게 있었다.
따라서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며 그곳에서 백성들을 가르
치신 것은 그들의 권위와 고유 권한을 침해한 행위로서 마땅히 그들로부터 이의를 제
기받을 만한 행위였다. 그러나 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만일 그들이 예수가 율법을
제정하신 입법자이자 성전의 실체인 메시야(히 9:11-28)이심을 바로 알았더라면 감히
그 같은 이의(異意)를 제기하려는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백성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야 할 최고 책임자의 자리에 있던 이들 종교자들이 도리어 예수가 하나
님이심을 깨닫지 못하고 그를 대적하였으니 이는 그들 뿐 아니라 백성들까지도 함께
멸망당하고 마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낳았던 것이다(19:41-44;21:5-28).
=====20:2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 그들의 첫 질문은 성전 안에서 가르치는
권세에 대한 것과, 아울러 성전에서 장사치를 내어쫓고 독설을 퍼부었던 행위까지 포
함하여 그와 같은 언행을 할 무슨 자격이라도 있느냐는 질문이다. 사실 예수는 그들이
보기에 아무런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산헤드린(Sanhedrin)의 대표로 파송
되어 온 유대 지도자들은 성전 관리와 예배 의식을 집행하는 공인된 직책을 가진 사람
들이었지만 예수는 공인된 직함 하나 없는 사람이었다.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어
디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았고 체제나 제도 속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한 것도 하나 없
다. 따라서 산헤드린에서는 예수의 무자격을 빌미로 예수를 제거하려 했다.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 두번째 질문은 그런 언행의 자격이
있다면 누가 그런 자격을 부여했느냐고 묻는 것이다. 그들은 진정 그 여부를 알고 싶
어서 묻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공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산헤드린에서 예수에게 공적인
권한을 부여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고 공격하는 질문이다.
=====20:3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 예수께서는 대답 대신 질문을 하신다. 이는 '대
답하기 이전에 나도 한 마디 묻겠다'(I'll ask a question before I answer, LB)는 뜻
이다. 그런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이 구절에서 한가지 조건을 덧붙이고 있다. 즉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대답하겠다는 내용이다. 이런 어투를 볼 때 예수의 대응에서 만
만치 않은 저항적 모습을 읽게 된다. 반면 누가는 조건적 제안이 아닌 단순한 질문만
을 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즉, 누가는 여기서 성전 숙정 작업 때 예수께
서 의자를 뒤엎는 장면을 삭제한 것처럼 예수의 이미지에 거치른 면보다는 부드러운
면을 강조하려한 듯 하다.
=====20:4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 이 질문은 사실상 예수의 반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처럼 대답 대신에 질문을 하신 의도는 단순히 그들의
질문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1)오히려 그들 스스로가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그 권세가 어디서 왔는지'(2절)를 판단하도록 하기위한 것이었다. 예수께서 요
한을 들어 질문한 것은 이미 세례 요한의 활동이 당시 민중들로부터 대단한 호응을 얻
었고 이에 선지자로서 공인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 자신은 요한에게서 세
례를 받았고 9:7에서 언급된 바처럼 사람들은 예수의 활동을 보고 세례 요한이 부활한
것으로 이해할 정도로 예수의 활동과 요한의 활동을 긴밀하게 연관지어 이해했다. 따
라서 예수는 세례 요한의 활동과 자신의 활동을 일치시켜 유대 지도자들에게 그 권위
를 되묻고 있다. 즉 세례 요한의 세례 운동은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 받았
다는 자명한 여론을 갖고 있었기에 그 여론을 근거로 대적들의 판단에 맡기신 것이다.
(2)대적들의 음흉한 계교를 역으로 공격하시기 위함이었다. 즉 대적들이 예수께 권세
의 출처를 물은 것은 그것을 바로 알아보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의 무자격성을 드러내
어 배척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의도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는 대답하기 힘든
본문과 같은 역질문을 통해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신 것이다. 이 질문 속에는 주님의
권세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비롯되었노라고 하는 강한 암시가 들어 있다.
=====20:5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 예수의 질문에 대한 유대 지도자들의 반응은 뜻밖의 공격
에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이 구절은 산헤드린 대표들이 자기들끼리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의논하는 그들의 갈등을 묘사해주고 있다. 그들이 고민하는 가장 큰 문제는 세례
요한의 권세가 하늘로부터 왔다고 대답할 경우 자신들의 입장문제이다. 즉 세례 요한
의 활동이 하늘로부터 온 권세인줄 알았다면 왜 자신들은 세례 요한의 세례 운동에 참
여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산헤드린 대표들은 종교
지도자로서 또 국가의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했다는 불경건함을 노출시켜서
는 안 되기 때문에 세례 요한의 권세가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20:6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 그들은 자기들의 체면 때문에 요한의 권위를 하나님으
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고도 대답할 수 없었
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례 요한에 대한 민중들의 믿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
가가 표현한 바에 의하면 그들의 고민은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는 점이다. 즉 그들은 민중들의 힘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
다. 여기서 유대 지도자들이 민중들로부터 돌에 맞지 않을까를 염려하는 것은 그들이
민중들로부터 별로 신뢰받지 못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예루살렘
에 입성하여 성전을 정화하고 백성들을 가르침으로써 세례 요한이 백성들로부터 받았
던 열렬한 지지를 동일하게 얻고 있었다. 따라서 종교지도자와 산헤드린의 대표들은
여차할 경우에는 민중 봉기(民衆蜂起)의 위험가지 생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들은 함부로 예수를 대할 수 없었고 요한에 대해서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사면 초
가(四面楚架)의 위기를 느꼈으며, 이러한 위기 의식은 유대 지도자들로 하여금 예수
살해 음모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하였다.
=====20:7
알지 못하노라 -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이 서로 토론하여 얻어낸 결론
은 '알지 못한다'는 대답이었다. 사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지혜로운 답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의 권위를 하늘로부터 왔다고 인정해도 자신들의 불신앙이 문제가 되
고 사람으로 부터 왔다고 해도 민중들의 분노가 문제가 되니 자신들의 현명치 못한 부
끄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알지 못한다고 하
는 것이 최선의 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끝내 예수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는
이 사악한 무리들이 참으로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몰랐기 때문에 이 같은 대답을 하였
다면 그들은 종교 지도자의 자리에 앉아있을 만한 자격이 없는 영적 무지자들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대신 그들이 예수의 신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누리
고 있는 종교적 기존 권익을 고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 같은 대답을 하였다면 그들
은 하나님보다 세상의 것을 더 사랑하는 탐욕자로 종교를 하나의 도구로 삼아 자신들
의 배를 채우는 사기꾼이라는 지탄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모른다고 대
답함으로써 예수와의 대결에서 완패를 시인한 셈이 되고 말았다.
=====20:8
나도...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 세 복음서가 똑같이 이와 같은 대답을 전하
고 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경우 반문하기 전에 예수께서 자신의 질문에 대답할
경우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겠다고 조건을 달았기 때문에 대답못한 그들에게 예수께서
도 대답하지 않겠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 산헤드린의 대표를 전
면 무시하는 공격적 발언으로도 이해된다. 왜냐하면 본절의 말씀 속에는 산헤드린 공
회원들과 더이상 논쟁할 가치도 없다는 의사 표시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20:9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 이 비유는 19절에서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의 입
을 통해 확인되는 바와 같이 당시 집권자들을 향한 비판적 공격이 되는 내용이다. 여
기서 '백성'에 해당하는 헬라어 '라오스'(* )는 평민층을 중심으로 하는 '오클
로스'(* )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 말이다. '라오스'는 불특정한 대중, 다수
의 사람 등으로서 이해되며 일반적인 사람들(people)을 가리키는 집단적 의미를 갖고
있다. 아마도 누가는 예수의 비유가 성전에 모인 모든 사람들과 그 자리에 함께 있는
특권층, 집권자, 산헤드린 대표 등을 포함해 모든 사람을 향해 주는 비유라고 생각했
던 것 같다.
한 사람이...농부들에게 세(貰)로 주고 - 이 비유에 등장하는 사건은 당시 팔레스
틴의 사회적 배경을 근거로 하고 있어 듣는 이들에게 별 무리없이 쉽게 전달되었을 것
이다. 당시에는 팔레스틴 본토에 토지를 소유하고서 외지에 거주하는 유대인들, 혹은
로마인으로서 팔레스틴에 땅를 사둔 자들도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부재 지주로 인한
갖가지 문제들이 발생하곤 하였던 것이다. 세(貰)로 주었다는 말은 이 세상의 소유권
은 오직 하나님께 있고 다만 성도는 이를 관리하는 청지기 내지는 종의 위치에 있음을
뜻한다. 또 타국에 갔다는 말은 주인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포도원
을 경작하라고 맡겼다는 뜻인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맡은 바
사명을 추구해 나가야 함을 시사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공동체에
게 주어지는 비유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구원사적 맥락에서도 이해되어야 한다.
=====20:10
때가 이르매 - '때'(* , 카이로스)는 시간(time) 또는 어느 한 시점
(point of time)이나 시기(period of time)를 뜻한다. 이 비유에서는 포도를 따 들이
는 추수의 때 곧 종말적 심판의 때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때는 성도에게는 풍성한 결
실과 완성의 때이지만 불신자에게는 파멸의 때이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 9절에서 언급된 사실대로 포도원의 소유권은
주인에게 있고 농부들에게는 세로 빌려준 것이기 때문에 추수 때에 소작세를 받기 위
해 종을 보냈다고 묘사된다. 이것은 소작료를 받는다는 것 자체 보다는 주인과 소작인
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비유를 풀어서 말하자면 하나님
과 인간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잘 유지되는가 하는데 관심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소작
료를 잘 내는 것은 주인과 소작인간의 관계가 좋다는 말이되고 소작료를 거부한다는
말은 주인과의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때문에 종이 온 것은 주
인과 소작인의 관계를 끊지 않고 계속 유지시키고자 함이었다.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선지자들의 주 임무 역시 백성들의 죄악을 회개시킴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데 있었다.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 농부들은 주인이 보낸 종을 때리고
빈 손으로 돌려 보냈다. 이는 주인과의 계약 관계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겠다는 의사 표
시이다. 아울러 이는 9절에서 언급된 포도원의 소유권이 주인에게 있음에도 그 소유권
을 빼앗아 자기들이 갖겠다는 것을 암시하는 행위이다. 이 비유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
에 등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다가 모욕을 당했던 선지자들을 연상시키게 한다(렘
7:25,26;25:4;슥 1:6).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의 놀라운 경험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기하고 불신앙의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물론 이 같은 비유가 직
접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종교.정치 지도자에게로 돌아가는 화살이기도 하다.
=====20:11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 마가복음과 본서는 종의 파송을 단수로 언급하고 있는데
반해 마태복음은 복수로 계속 언급한다. 아마 마태는 많은 선지자들이 역사 속에 있었
다는 사실을 나타내며 농부들의 죄악을 강조하려 했던 것 같다.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 농부들이 종을 대하는 태도가 점점 거칠고 잔인해진
다. 여기서 '능욕하다'라는 말은 예수가 체포되어 당하던 모욕을 연상하게 한다
(22:63-65;마 26:67-68;막 14:65). 마가는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했다고 묘사하는데
이것 역시 예수가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쓴 사실을 연상하게 한다(마 27:29;막 15:7).
따라서 종이 받는 수난은 마지막 상속자가 받는 죽음으로 집중되고 있으며(14절) 이
같은 수난의 묘사는 곧 닥치게 될 예수의 죽음과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12
다시 세번째 종을 보내니 - 농부들은 주인과의 관계를 끊고 계약도 파기하며 주인
의 종까지 모욕을 주고 돌려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그 사실에 대해 침묵하
고 세번째로 그 농부들에게 종을 보내는데 이것은 (1)주인이 농부들에게 보내는 끊없
는 신뢰이며, (2)농부들이 회개하여 다시 정상적인 관계로 회복되기를 바라는 희망의
표시이고, (3)농부들의 배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이 바로 되기를 바라는 사랑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주인을 하나님으로 비유 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
족의 끝없는 배신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상하게 하고 내어 쫓은지라 - 종이 받는 상처가 점증되고 그냥 돌려 보낸 것이 아
니라 '내어 쫓아 버렸다'는 표현은 사용함으로써 농부들의 마음이 더욱 완악해진 살기
등등한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마가복음의 평행 구절에서는 세번째 종 이 외에 많은
종들이 다시 왔음을 밝히면서 그들을 죽이기도 했다고 묘사한다. 마가의 진술이 훨씬
사실에 가깝다고 보여지는 것은 세례 요한의 죽음이 증명하듯이 보냄을 받은 선지자들
이 많이 죽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전승에 의하면 예레미야는 애굽에서의 유배
생활 중에 돌에 맞아 죽었으며 이사야는 톱에 켜여져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누가는
14절에서 상속자의 죽음을 더욱 극적으로 말하기 위해 종들을 고난 받는 것으로만 묘
사한 듯 하다. 또한 누가는 종과 상속자의 죽음을 따로 본 것이 아니라 하나로 보고
또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들이 행했던 잔인한 반역의 행위를 하나로 묶어 예수의 죽
음까지 극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20:13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 주인은 세번째 종이 상처를 입고 쫓겨오
게 되자 비로소 애절한 탄식과 함께 자신의 아들을 보내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이
같은 누가의 표현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주인의 직접 애절하게 탄식하는 모습과 자신
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겠다는 결심을 직접적으로 묘사한다. 누가에 의하면 주인이
어찌할꼬 하면서 탄식하는데 이 탄식은 소작세를 받지 못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안타까
움도 아니고, 주인이 보낸 종들의 수난 때문만도 아니다. 오히려 이는 어떻게 해야 강
퍅해진 농부들의 마음이 변하여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게 될 수 있을까 하는 탄식이다.
그래서 주인은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기로 결정하는데 사실 이것은 모험(冒險)
이었다. 왜냐하면 종을 세 번 보내기까지 횟수가 거듭될 수록 농부들의 마음은 굳어지
고 종들에 대한 수난도 갈수록 가혹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들을 모냈을 경우 이번
에는 죽게될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주인은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서 사용된 '사랑하는'(* , 아가
페토스)이라는 단어는 외아들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말이다(only-beloved). 이 단어
는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하늘로부터 들려온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에서도 사
용되었다(3:22). 따라서 이 같은 묘사는 누가의 의도적 표현으로 볼 수 있는데 즉, 주
인의 탄식과 자신의 아들을 보낸다는 이야기는 곧 하나님이 독생 성자 예수를 이 땅에
보냈다는 사실과 일치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 비유는 처음부터 일관되게 예수의 수난
과 죽음에 알레고리적(allegorical)으로 일치시켜져 왔다.
=====20:14
의논하여 - 이 표현은 (* , 디알로기조마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말하되'(* , 레고)보다 훨씬 정밀한 묘사이다. 즉 그들이 서로 모
여 자신들의 이익을 어떻게 하든 수호하기 위해 골똘히 대책을 숙의(熟議)하였다는 뜻
이다. 이 같은 누가의 독특한 묘사는 결국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서로 결탁하여 예수
를 죽이고자 하는 음모를 어떻게 꾸몄는지를 잘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 농부들이 의논한 결과는 아예 상속자들 죽여버림으로써 포
도원의 소유권을 영구히 차지하자는 것이었다. 농부들은 아들을 죽이면 포도원의 소유
권이 자기들에게 넘어온다고 믿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반증한다. 따라서 농부들은 아들
이 자기들에게로 온 것은 주인이 아들에게 소유권을 넘겨 주었다고 믿었거나
(E.Bammel) 아니면 아들이 올 때 본래의 주인이 죽었기 때문에 아들이 그 소유권을 명
확히 하기 위해 오는 것이라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농부들의 판단은 잘못된 것
이었다. 주인이 죽은 것도 아니고 상속자 아들을 죽였다고 그 소유권이 자기들에게로
넘어가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 핍박자들을 사주(使嗾)하였던 사단은 예수를 죽
임으로써 이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보장받으려 하였으나, 만물의 주인이신 예
수는 다시 살아나사 사단의 무리들을 물리치셨다. 또한 본문은 농부들의 죄악된 탐욕
을 여실히 보여준다. 9절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주인과 농부의 관계는 소유주와 소작인
의 관계이다. 이것은 서로 간의 계약으로서 농부들이 일정한 세액을 납부하기를 약속
한 것이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이 계약을 파기하고 소유권을 부당하게 자신들의 소유
로 만들려는 욕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계약을 인간이 먼저 파기했으며, 청지기적 신분을 망각한 인간의 탐욕이 온갖 범죄의
원인임을 말해준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어쨌든 이 비유는 농부로 비유된 당시의 종교.정치 지도자들 또는 백성들이 하
나님의 뜻에 따르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세상을 추구하려 한 죄악을 폭로한다.
=====20:15
있는데 마가의 표현에 의하면 아들을 죽인 다음 포도원 밖에 내어 던졌다고 되어있
다. 그러나 마태와 누가는 포도원 밖으로 끌고가 죽인 것으로 묘사한다. 이 구절은 아
들이 포도원 안이 아닌 밖에서 죽었다고 묘사함으로써 예수가 예루살렘 성 밖으로 끌
려가 처형당한 사실을 암시한다. 포도원은 상징적으로 이스라엘을 묘사한 것이다. 따
라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이스라엘 백성 및 그들에게 약속된 모든 축복으로부터
차단시키고자 하는 음흉한 계획을 추진해 나갔으며, 예수는 이 모든 궤계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받으셨던 것이다(히
13:12).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 이 구절은 청중들로부터 이 비유의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한 유도성 질문이다. 즉 결론이 어떻게 날지 자명해진 시점에서 질문을 함으로
써 청중 모두가 일치된 결론을 내릴 수 있게 하며 곧이어 내릴 결론의 효과를 강조하
기 위한 질문이기도 하다. 마태는 청중들이 결론을 직접 말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 21:41).
=====20:16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 여기서 주인이 내린 두 가지 조
치가 언급되는데 이는 농부들이 저질러온 죄악에 대한 심판의 징벌로서 그들을 진멸시
키겠다는 선언이다. 따라서 이는 첫째, 농부들이 상징하는 산헤드린의 대표들에 대한
전면적인 응징(應懲)을 선언하는 말이 된다. 뿐만 아니라 예수를 거부하고 공격했던
모든 사람들에 대한 심판 선언이기도 하다. 두번째, 다른 사람에게 포도밭을 맡기겠다
는 가언을 하고 있는데 포도밭을 이스라엘이라고 했을 때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에 의
해 지배받게 된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같은 사실이 실제로 A.D.70년에 로마
군에 의해 지배받게 된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같은 사실이 실제로 A.D.70년
에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됨으로써 성취된 바 있다. 나아가 이 비유를 신앙의
문제로 연결지어 해석할 경우 예루살렘이라는 제한된 장소와 시간을 넘어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며 하나님의 아들(요 1:1-12)을 끝내 배척하는 자는 인간적인 파멸 뿐만
아니라 악의 세력에 노예가 될 것이라고 경고로서 이해된다.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 그와 같이 무서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소원
을 표현하는 누가만의 묘사이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메 게노이토'(*
)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는 강한 부정적 소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독특
한 표현으로서 바울이 즐겨 사용했다(롬 3:4,6,31). 즉 청중들이 안타깝고 간절한 바
램으로 요청하는 말이다.
=====20:17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 시 118:22을 인용한 문구인
데 16절에서 언급된 결론과 청중들의 반응에 대한 추가적 대답이다. 즉 성경의 본문을
인용함으로써 비유가 주는 교훈을 더욱 명료하게한다. 이 비유 역시 상징적 의미로서
건축자의 잘못된 판단에 대한 경고와 좋은 돌은 한때 버려졌을지라도 다시 발견되어
머릿돌로 쓰여지게 된다는 필연성에 대한 강조이다. 따라서 여기서 건축자는 앞에서
언급했던 비유에서 주인의 종과 아들을 배척하고 죽인 농부들을 상징하며 사실적으로
는 이스라엘의 종교.정치 지도자들과 불신앙적인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된 것은 예수를 상징하는 말로서 그들에 의해서 버림받고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머릿돌, 인류의 머릿돌이 되게 한다는 의
미(행 2:36)이다.
=====20:18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 심판과 돌을 연관지어 상징적으로 묘사하
는 격언구 형식의 이 구절은 사 8:14,15과 단 2:34,44,45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
표현은 항아리 따위의 물건이 돌 위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지듯이 사람도 산산이 부서
져 파멸에 이른다는 말이다. 문맥상으로 여기서 돌 위에 떨어져 부서지는 형국에 처해
질 사람은 예수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을 가리킨
다. '깨어지겠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쉰들라스데세타이'(*
)는 '산산이 부수다'는 뜻의 '쉰들라오'(* )의 미래 수동태 직설법으
로 예수와 그 복음에 대적하는 자들의 말로(末路)가 어떠할 것인지를 잘 나타낸다.
이 돌이...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 이 표현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반대 형식으로
묘사된 심판 계시이다. 즉 사람이 돌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사람에게 돌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앞의 것보다 훨씬 강도가 높은 것이다. 이 같은
표현은 형체를 찾아 볼 수 없도록 완전한 파멸을 강조하는 말로서 앞의 묘사에 비해
심판의 철저함과 적극성이 강조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내용은 악인들이 자기 모순 속
에서 스스로 멸망하는 심판을 나타내며 여기서 언급된 내용은 마지막 날 예수께서 친
히 불신의 세력을 철저히 파멸시키실 것을 뜻한다. 이 같은 비유는 초기 기독교인 들
에게 자신들에게 임한 핍박과 고난을 예수의 고난과 동일시하면서 인내케 하며 또한
종말의 때의 통쾌한 승리를 약속하는 복음으로 이해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20:19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들 두려워하더라 - 19:47,48에서 언급된 내용과 비슷하다.
19:47,48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유대지도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감동되어 있는
군중들 때문에 예수를 죽이지 못한다고 하는 똑같은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장면에서 확인(確認)할 수 있는 것은 예루살렘 성 안에서 예수는 일반 백성들의 열광
적인 환호를 받으셨다는 점이다. 그들은 예수의 메시야되심에 관해 본질적으로 오해하
고는 있었지만 당시로서는 전폭적인 지지의 환호를 보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교
지도자들을 위시한 기득권자들은 예수의 언행이 매우 도전적이고 선동적이라고 생각하
여 두려워했을 것이 분명하다.
=====20:20
이에 저희가 엿보다가 - 마태의 경우에는 '바리새인들'이라고 문장의 주어를 밝히
고 있는데 반해 누가는 주어를 밝히지 않는다. '엿보다'라는 말은 주의깊게 몰래 지켜
보는 것을 뜻하며 문맥상으로 볼 때 예수의 약점을 책(責)잡아 공격하려고 '호시 탐탐
(虎視耽耽)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라는 뜻이다.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 2절에서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제거
시키기 위해 처음 짜낸 묘안은 종교적 가르침의 권위를 문제삼으려 그를 책잡는 것이
었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적 문제로 예수를 문제삼았다가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1-8
절) 허다한 군중들이 예수를 추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더이상 자신들의 힘으로
예수를 처치하기 곤란하다고 판단하였다. 더욱이 당시 죄수에 대한 사형권은 로마 정
부의 고유 권한이었기 때문에 설령 유대교 지도자들이 유대법상으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을 조작한다해도 함부로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다. 따라서 유대 지도자들은 로마
총독의 정치적인 힘을 빌어 예수를 제거하고자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정탐들을 보내어...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 1,2절에서 산헤드린의 대표들이 직
접 예수를 심문하듯이 공격한 것과는 달리 여기서는 정탐이라고 표현되는 특정한 임무
를 부여받은 사람들이 예수를 책잡고자 나타난다. 공관복음서 평행 구절을 종합하면
산헤드린 대표들이 보낸 정탐꾼들은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이었다(마 22:15;막
12:13). 이 두 당파는 대개의 경우 서로 뿌리깊은 반감을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예
수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일치 단결하고 있다. 예수는 이들에게
있어 기득권을 위협하는 암적인 존재요 공통의 타도 대상으로 지목되었던 것이다. 실
로, 그들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데 빠른 발을 지닌 악인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잠 1:16).
=====20:21
우리가 아노니...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 정탐꾼들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
이 예수를 '당신'이라고 호칭했던 것과는(2절) 달리 '선생님'이라는 정중한 말을 사용
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들어 칭찬한다. 그러나 이 말
은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간교한 술책(術策)의 일환이었다.
사람을...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 이 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
는데 첫째는 20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자신들이 의인인 것처럼 행세하기 위해 하는
말이다. 즉 자신들이 예수의 말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특히 예수의 가르침이 참으로 정
직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평가함으로써 자신들이 민족과 하나님을 사랑
하고 참된 진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하는 위선적인 말이다. 둘째는 이 같은
칭찬의 말을 통해 예수를 인정하고 추종하는 사람인 것처럼 위장하여 예수를 안심시키
고 자기들의 의도대로 이끌어 가려는 유도성 질문을 하기위한 연막(煙幕)이라고 할 수
있다.
=====20:22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 - 여기서 특별히 가이사(Caesar)에게 바치는 세금에 관
하여 질문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유대인들이 자기 나라를 무력적으로 지배하면서 높은
세금을 징수하는 로마 제국에 대해 깊은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 같은
민족 감정에 대한 예수의 입장을 말하게 함으로써 예수를 로마 쪽이나 유대 쪽으로부
터 미움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고안된 진퇴 양난식(進退兩難式)의 교묘한 질문이다.
민족 감정으로 첨예하게 드러나 있는 지배국에 대한 세금 납부 문제는 초기 단계에 이
미 유대인의 저항을 불러 일으킨 바있다(I.H.Marshall). 예수 당시에 유대인의 반(反)
로마적 감정은 세금 징수 문제에 있어 큰 반발심으로 표출되었다. 그래서 정탐꾼은 자
신들이 민족주의 운동을 하는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인 것처럼 가장하여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주의적 측면에서 말하자면 당연하게 세금을 내지 말아야 한다는
대답이 나올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반대로 친로마적 발언을 한다면 예수를 환호
했던 대다수 무리들로부터 배척당할 것이라는 기대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20절의 내
용으로 보아 그들은 반로마적 대답을 기대했음이 분명하다. 여기서 언급된 '가이사'
(Caesar)는 '시이저'라고도 발음되는데 로마 황제를 가리키는 말로서 로마 초대 황제
인 아우구스투스(Augustus) 때부터 유래되어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유대인
들이 납부해야 할 세금은 인두세, 관세 등 각종 세액이 있었는데 그 세금은 수입의
1/3이상이 되었다고 한다. 특히 로마가 요구하는 세금 중 인두세(人頭稅)가 악명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 인두세는 14-65세까지 해당되는 모든 남자와 12-65세까지
이르는 모든 여자에게 한 사람당 한 데나리온씩 부과되었다.
=====20:23
그 간계(奸計)를 아시고 - 예수의 판단 형식을 빌어 질문하는 자들의 의도를 말해
주는 이 구절은 20절의 설명을 상기시키며 사람의 깊은 의중을 간파하시는 예수의 전
지성을 보여준다. 마가는 '간계'대신 '외식'으로 또한 마태는 '악함'으로 표현한다.
이 표현들은 공통적으로 예수를 책잡으려는 정탐꾼들에 대한 평가라고 볼 수 있다. 그
리고 마가와 마태는 이 같은 평가 후 예수가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라고 반문하
는 것으로 묘사하여 공개적으로 그들의 불순한 의도를 폭로하신 사실까지 언급하였다.
=====20:24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 이같은 예수의 요구는 로마에 납부하는 세금의 정
당성에 관한 질문에 대한 첫 대답인데 이 요구로 보아 한 데나리온은 일상적으로 지니
고 다닐 정도에 해당하는 액수의 화폐인 것으로 보인다. '데나리온'은 신약 성경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로마 화폐이다. 헬라 화폐 '므나'의 1/100에 해당되며 유대 화폐
'세겔'의 1/4정도에 해당되는 단위인데 노동자의 하루 품삯으로 당시에 사용되었다.
또 잘 알려진 헬라 화폐 '달란트'의 1/6,000에 해당되는 가치를 갖고 있었다. 예수가
여기서 한 데나리온을 요구한 것은 아마도 당시에 로마에서 부과하던 인두세가 백성
한 사람당 한 데나리온씩 부과되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염두에 두시고 로마에 세금을
납부하던 데나리온 하나를 보이라고 하셨던 것같다.
뉘 화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가이사의 것이니이다 - 당시에는 어느 나라가 새로
세워지거나 왕이 새로 즉위하면 새 왕의 화상(畵像)을 넣은 돈을 만들었다. 또한 그것
들이 유통되는 곳에서는 세금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데나리온 주화에
는 당시 황제 가이사 디베리우스(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그
주화의 글귀는 황제의 이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그의 어머니가
여신으로서 묘사된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이 로마 주화에 그려진 황제의 얼굴은 종교
적 권위가 부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E.Stauffer).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화폐를 종
교적인 이유를 들어 몸에 지니고 다니기를 꺼려했었다.
=====20:25
땅의 권위와 하늘의 권위를 대립시켜 말하고 있다. 이 같은 양극적 언급을 정교 분
리(政敎分離)의 이론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정교 분리의 이론
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라, 롬 13:1-7과 더불어 그리스도 인들이 지녀야 할 국가 또
는 사회 권력에 대한 합당한 자세를 언급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질
서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권위의 통치 구조가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성도는 삶의 실제적인 모든 영역에서 권위에 원칙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와 종교가 서로 별개의 것으로서 서로 아무런 상
관이 없는 것처럼 설명해서는 안 된다. 이 같은 논리들은 하나님의 영역과 권위를 훼
손시키는 일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
다. 당시 유대는 철저하게 로마로부터 지배받아 사회.문화.종교 문제까지 위협을 받았
다. 뿐만 아니라 A.D. 70년에 이르러서는 로마 군대로부터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정신
적. 종교적 뿌리인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본다면 예수
의 이야기를 로마의 것과 유대의 것은 분명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해 볼 수도
있다. 즉 로마의 것은 로마에게로 돌려주고 유대의 것은 유대에게 돌려 놓으라는 말이
다. '데나리온'이라는 화폐도 역시 로마 황제의 소유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데나리
온도 가이사에게 돌려주라는 말이다. 그리고 유대의 전통, 유대의 정신을 유대인의 것
으로 돌려 놓으라는 뜻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예수의 발언은 양 극을 피해가는 기회
주의적인 말이 아니라 지극히 민족주의적이면서도 범세계적인 입장에서 하신 말로 이
해된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민족주의의 한계속에 제한된 말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
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바치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돌려놓으라는 강
조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것을 빼앗았다면 또는 '가이
사'로 불려지는 황제의 권위가 하나님의 권위를 넘어서는 무례를 범하고 있다면(사실
당시 '가이사'의 권위는 가히 신적이었다) 그 권위를 하나님에게로 돌려 놓고 가이사
의 것만 가이사에게 주어야 할 것이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유대인의 사상
이나 성경이 보도하는 바처럼 천하 만물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으며 이 세상의 돌하
나, 풀 한 포기라도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결국 가이사의 왕국 조차도
하나님의 것이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가이사에게 돌아갈 것이란 아무 것도
없는 셈이 된다. 이러한 예수의 응답이 갖는 비판적 의미 때문에 예수를 고발했던 사
람들은 예수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선동한 사람이라고 증언하게 된다
(23:2).
=====20:26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기이히 여겨 잠잠하니라 - 예수를 제거시키기 위
한 또 한 차례의 노력과 음모가 실패로 끝나는 장면이다. 그들이 예수를 책잡을 수 없
었던 이유는 첫째, 예수의 답변이 책잡기 위해 질문했던 자들의 수준을 크게 넘어섰기
때문에 그들이 당황하였고 둘째, 예수의 답변이 단순히 세금을 내고 안내고 하는 문제
를 넘어서 원천적으로 해결해야 될 근본적 문제를 언급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셋째, 주
위에 함께한 무리들이 예수의 발언에 대해 긍정적으로 경청하고 있었으며 그 분위기가
압도적인 것이어서 더이상 말을 붙일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예
수의 답변에 기이히 여겼다고 언급되는데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다우마조'(*
)는 '놀라다'혹은 '칭송하다'의 뜻이다. 따라서 예수의 답변이 합리적이며
반론의 여지가 없어서 청중들 가운데 긍정적으로 수용되면서 그 지혜에 놀랐다는 말이
다.
=====20:27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개인 - 본문의 사두개인들이 산헤드린의 명을 받고 고의
적인 공격 의도로 왔는지 아니면 종교상의 진지한 논의를 위해 왔는지는 밝히지 않는
다. 그러나 전후 문맥으로 보아 그들도 예수께 대한 공격적 의도로 질문해 온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태는 '그 날에'라는 단어를 사용해 앞서 소개되었던 세금에 관한 논쟁
과 같은 날에 이 사건이 있었음을 시사한다(마 22:23). 한편 사두개파는 다윗과 솔로
몬 시대의 제사장 사독에게 기원된(삼하 8:17) 집단으로서 하스모니안 시대 때
(B.C.166-163) 구체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이들은 특히 모세 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면서 다른 전승 문서들은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유대 사회내의 소수
집단이었지만 부유한 지배 계층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적 세력을 갖고 있었다.
특히 현실주의자라는 별명과 함께 로마의 통치에 협력하여 자신들의 이권을 유지했던
무리들이었는데 예루살렘 함락(A.D. 70)과 함께 몰락했다. 이들이 주장하는 교리 중
독특한 것은 부활과 영(spirit)을 믿지 않았다는 점이다(Josephus, Antiq., 13.10.6).
=====20:28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 이 사람들도 역시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적대적 감정이 없는 듯이 말문을 열고 있지만 실상은 이어지는 질문을 통해 선생으로
서의 주님의 권위를 깡그리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사두개인들은 예수께서 부활을 인
정하신다고 판단하고서 나름대로 철저한 반대 논리를 펴고자 했다. 기실 그들은 부활
에 관한 문제를 놓고 바리새인 등 견해를 달리하는 집단들의 논리에 대항하기 위해 첨
예한 이론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 대해서도 자신만만한 투로 접근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논거로서 언급한 내용은 신 25:5-10에 나타난 계대 결혼(繼代結婚)에
관한 법이다.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남편이 자식 없이 죽을 경우 시동생과 그 과부
가 재혼하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재혼을 통해 죽은 남편의 이름으로 자손을 잇게 하
였던 것이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모세 율법과 부활 교리와의 모순점을 신랄하게 드
러내기 위해 이러한 관습을 근거로 들고 나왔다.
=====20:29,30,31,32,33
부활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 그들이 계대 결혼과 부활의 모순을 말하
기 위해 전제된 이야기가 29-32절의 내용이다. 즉 일곱 형제가 있는 집안에서 결혼한
맏형이 죽게되자 전통과 율법에 따라 동생이 형수의 남편이 되었는데 그러기를 일곱
회나 반복하여 이 여인은 일곱의 남편이 생긴 셈이되었다. 마침내 이 여인도 죽었는데
문제는 모두 죽어서 다시 부활했을 때 한 여인이 일곱의 남편을 만나게 되는데 있다.
그렇다면 부활 후 어느 한 사람이 진짜 남편이 되어야 하는데 일부일처제가 옳다고 생
각되는 상황하에서 일곱 명의 형제 중 누가 그 여인의 남편이 되겠느냐하는 질문이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었는지 가상적인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동생이 미망인인 형수
의 남편이 되어야 하는 고대 이스라엘의 수혼(嫂婚) 제도의 상황하에서 이 질문은 상
당히 진지하고 흥미있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이러한 질문을 던진 사두개인들은
논쟁의 승리를 확신하고서 아마 속으로 예수를 비웃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질문에
따라 일곱 형제 중 어느 한 명을 택하여 그의 아내가 되어야 한다는 대답이 나오면 그
것은 무리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 거리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활 때에
는 어떻게 되겠느냐'는 식의 객관적 자세에서 나온 진지한 물음이 아니라 '그 중에 누
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아예 단정적인 물음을 던졌다. 이 물음에는 마치 그 미망인
이 부활시에는 반드시 일곱 형제 중 한 사람의 아내가 되어야 된다는 것처럼 윽박지르
는 느낌이 담겨 있다. 그것은 현세의 삶과 동일선상에 두고자 하는 전제 자체의 오류
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20:34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 이 부분은 타공관복음서에서는 발
견되지 않는 문장인데 대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예수가 사두개인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성경을 잘못 알아 부활을 오해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신 것으로 묘사된다.
본절에서도 예수는 대적들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시지 않고, 곧 그들의 질문에 끌려다
니는 입장에서 벗어나사 부활후 상태에 관한 진실을 본질적으로 설명하심으로써, 대적
들의 무지와 악한 계교를 자연히 그리고 적나라하게 드러나게끔 하는 방법을 취하셨
다. 문제의 핵심을 파고 들어 전제 자체의 오류를 지적하고 올바른 진리를 선포하는
이 놀라운 신적 지혜 앞에서 대적들은 말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40절). 한편
본문의 사두개인들은 당시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일반적 부활관을 염두에 두고 예
수를 시험하려 했던 것 같다.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 부활관에 따르면, 사람들은 죽
은 후에도 이 세상에서의 삶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성경은 부활
이후의 삶을 현세의 삶과 다른 차원의 것으로 묘사한다.(고전 15:35-49;빌 3:21;요일
3:2).
=====20:35
저세상과...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 부활하여 새롭게 사는 세계를 저세상
으로 표현한다. 즉 이세상과 저세상을 명확히 구분함으로써 사두개인이 질문한 내용이
일차적으로 잘못되었음을 말한다. 부활한 새로운 세계는 이세상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이다. 여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이라는 말은 부활 후 거
하게 될 세계 곧 천국이 모든 사람의 세계가 아니라 제한된 사람들의 세계임을 암시해
준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에 의해서도 지적되는 바, 행 13:46에서 영생을 얻기에 합당
한 자와 합당하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고 있는 내용과 맥을 같이 한다(I.H.Marshall).
여기서 언급된 합당한 자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의 의(義)로 옷입
게된 자들을 가리킨다(롬 1:17).
=====20:36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천사와 동등이요 - 이는 앞절에서 언급된 바 곧 부활한
저세상에서는 결혼이 없다는 말에 대한 보충 설명이다. 결혼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가
출산을 통한 종족(種族) 보존에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새생명을 받아 불멸의 존재로
새로 탄생하는 성도들로서는 더이상 결혼이나 출산을 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천사들의 수효가 창세때로부터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듯이 부활의 생명을 받는 자들의
수효도 만세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더이상 수효를 보충해야 하는
부족함이 야기되지 않는다. 아울러 본문은 부활한 성도의 삶의 양태가 현세의 그것과
는 차원이 다를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20:37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칭하였나니 - 사두개인들이 모세 율법을 근거로 삼
아 예수를 시험하였듯이 예수께서도 이에 대해 하나님이 친히 자신을 증거하신 말씀을
통해 부활신앙을 변호하셨다. 즉 본문은 출 3:6에서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들었던 음
성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며 야곱의 하
나님이라고 현재형으로 말씀하신 것에 유의해야 한다. 이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과 같은 신앙의 선조들이 몸은 비록 죽었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새
생명에 참예케 될 것임을 뜻한다. 하나님이 이들과 맺은 언약은 영원한 구속력을 가지
고 있다. 따라서 유한한 인생의 눈으로 보면 육신의 죽음이 곧 존재의 끝으로 보이지
만 신령한 믿음의 안목으로 보면 그것은 새로운 시작일 뿐인 것이다.
=====20:38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 결론부에 해당되는 이 말은 인
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는 관계임을 역설한다. 즉 하나님은 살아있는 사람에
게만 하나님이 된다는 말이다. 육적인 몸을 지니고 이 세상에서 살아 있다 해도 영적
으로 거듭나지 못하여 구체적 삶이 변혁되지 못한 채로 살아 간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 있다고도 할 수 없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
님은 산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육체적으로 죽었다 해도 중생한 사람이라면
(36절)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누가는 마가나 마태와 달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살아 있다고 덧붙이는데 살아 있는 사람은 하나님안에 있
다는 말이고 하나님 안에 있으면 모든 사람이 죽어도 산다는 말이다. 이것은 이미 죽
음을 넘어서는 이야기이며 부활 역시 육체적 의미의 죽음과 부활이 아니라 그것을 넘
어서는 다른 차원을 말하는 것이다. 회개를 통해 영생을 얻게 되며 그 영생은 죽음 후
에 오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여기서부터이며 어느 한 시점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로
서 영생, 부활이 있는 것이다(요 11:25,26).
=====20:39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 - 서기관들은 대부분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부활과 영생에 대한 믿음이 강했으며 사두개파 사람들과는 경쟁적 차원에 있었다. 이
러한 신학적 견해 차이로 말미암아 예수를 올무에 빠뜨리려 했던 일(27-40절) 외에는
이 두 그룹은 항상 마찰을 빚어왔다. 본 구절에서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자신들과 사상
적 숙적(宿敵) 관계에 있던 사두개인들의 그릇된 주장들을 여지없이 훼파해 주신데 대
하여선 크게 기뻐하였다.
=====20:40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 이 진술 역시 누가만 언급하고 있는데 사두개인들이
주장했던 논리가 예수 앞에서 단번에 무너지는 장면이다. 결국 본장에서 등장한 산헤
드린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 그리고 사두개인 등 모두가 예수
와의 논쟁에서 패하게 되었다. 이들은 당시 유대 민족의 지도층으로서 한 민족을 이끌
어가는 주도 세력 또는 집권 세력인데 그들이 예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은 하
나님께로부터 비롯된 예수의 신적 지혜와 권위를 더욱 부각시킨다.
=====20:41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 이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이 단
지 혈통적인 자손을 가리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다
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시리라는 예언은 구약성경 곳곳에서 나타난다(삼하 7장;시
89:20-37;사 9:2-7,11:1-9;렘 23:5-6;33:14-18). 이러한 예언을 곡해한 그 당시 대다
수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지상적이고 민족적 차원에서 이해하여 다윗왕 시대와 같은 번
영된 이스라엘을 복원시킬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메시야이신 예수는 다
윗의 혈통을 따라 오셨으나 본체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서 온 인류의 구원과 우
주적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성육신하셨다는 점에서(빌 2:6), 그들의 메시야관
은 치명적 오류를 드러낸 것이었다. 이에 관하여선 사도 바울이 잘 이야기하고 있는데
곧 예수께서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언급한다(롬 1:3,4).
=====20:42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 시 110:1을 인용하여 다윗이 메시야를 주님이라고 부른
사실을 언급한다. 한편 마가와 마태는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말한 것으로 묘사하여
다윗의 말에 신적인 권위가 부여되었음을 강조한다. 한편 본문의 구약성경 전체가 메
시야를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단적 실례를 보여준다. 구약성경은, 선지자들이
직접적으로 언급한 수많은 메시야 예언들(사 7:14;호 11:1) 외에도 구약의 실재 인물
을 통해(창 14:18-20), 구약의 역사적 사건을 통해(호 11:1), 구약의 각종 의식과 규
례를 통해(히 8-10장) 혹은 선지자들의 상징적 행동을 통해(슥 11:12,13) 메시야를 예
언하였던 것이다. 이 모든 예언들이 바로 예수를 통해 성취되었다.
=====20:43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때까지 - 마태와 마가는 '발아래 둘 때까지'라고
표현했다. '발등상'은 헬라어로 '휘포포디온'(* )으로서 '발판' 곧
발을 올려 놓는 '대'(footstool)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예수께서 마지막 날
심판주로서 임하게 되실 것을 시사한다. 그리고 '원수'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
를 꾀어 범죄케하고 세상 끝날까지 세상을 미혹케할 사단을 지칭하며, 따라서 이 사단
이 심판주의 발 아래 짓밟히게 됨으로써 창 3:15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에 관한 예언
이 완벽하게 성취되는 것이다.
=====20:44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 다윗이 메시야를 주님으로 불렀는데 어떻게 그 주님
이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반문이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으
로 오신다는 그 '인성'에 대해서는 알았으나 그의 '신성'에 대하여는 알지 못했다. 시
110편을 인용한 주님의 지혜로운 질문은 그의 대적자들을 침묵케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신성을 밝히 드러내기 위한 목적도 내포한다. 예수가 그의 성육
신하신 몸으로는 다윗의 후손이었으나 다윗의 주가 되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으로서
사실상 다윗에게 생명을 부여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같은 예수의 반문은 당
시 바리새인들이 갖고 있던 형식주의 신앙과 이방인에 대한 배타적 감정및 왜곡된 선
민 의식을 깨뜨리려는 의도까지 포함하고 있다. 예수는 이미 한 가문이나 한 민족을
구원하고자 온 것이 아니라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온 것임을 밝히는 것이다.
=====20:45
이 같은 교훈은 이미 앞에서 주어진 것(11:39-52)일 뿐 아니라 마 23:5-7;막
12:38-40에도 나와 있는 내용이다. 본문의 내용은 다른 평행 구절의 내용보다 훨씬 축
약된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이 말씀이 직접적으로는 제자들에게(45절) 주어진
것이나 유대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로 주어진 것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
고 있을 당시 주위에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몰려든 많은 무리들과 줄
곧 예수를 따랐던 자들뿐만 아니라 산헤드린에서 파견된 무리들도 섞여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4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 이 표현은 서기관들의 위선에 대한 묘사이다.
대부분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던 서기관들은 율법 교사로서의 위엄과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고위 성직자들의 권위를 내세우는 행위는 율법에 대한 지
식이 남보다 월등하다는 우월 의식과 함께 교만스러운 자기 과시욕의 표현이었다.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 시장은 대중적 장소로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인데
그곳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한다는 말은 자기의 권위가 여러 사람들 앞에서 높임 받기
를 좋아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서기관들의 허영을 비판하는 말이다.
회당의 상좌(上座)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 서기관들이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
로나 항상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명예욕에 대한 비판인데 높이 되고자 하면 끝
이 되어야 하며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예수의 가르침(막 9:35)에 반대되는 것이
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을 삼가라는 경고의 말씀은 비단 서기관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의 욕심을 향해 꾸짖는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
=====20:47
저희는 과부의 가산(家産)을 삼키며 - 서기관들에 대한 비판에 이어 구체적 죄상을
폭로하는데 그들은 과부의 재산을 착취하는 자로 묘사된다. 당시 과부들은 고아들과
함께 경제 능력이 없는 자로서 보호 대상자였다. 본문은 약자의 재산을 착취하는 행위
가 흔히 있었던 것임을 반증해 준다. 이 구절이 뜻하는 구체적 사실은, 서기관들이 그
들에게 위임된 율법적 판결권을 남용하였거나(Jeremias), 또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과
부들의 재산에 손실을 가한다거나(T.W.Manson), 타인의 재산을 관리해 주는 법적 대리
인으로서 착취한 사실을 뜻할 수도 있다(J.D.M.Derrett).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 그들의 위선적인 행위 중의 하나가 기도를 길게 하는 것
이다. 유대교에서는 형식적으로 짜여진 기도문이 많았으며 길게 기도하는 것이 좋은
기도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래서 서기관들은 율법적으로 가장 정통한 율법학자라는 칭
호에 걸맞게 기도를 오해하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이 같은 기도는 하나님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외식으로 하는 기도였을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예수는 그들의 약점을 정확히 찌르고 있다. 물론 이 비판은 오늘날
의 기독교인을 향한 말씀이기도 하다.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 지식을 남용하고 권력과 종교적 율법을 악용하여
자기의 욕심을 충족시키려는 행위는 다른 죄보다 더 무거운 죄가 된다는 말이며 더욱
이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악행을 범하면 하나
님 앞에 더 중한 판결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
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기 때문이다(1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