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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패션 디자이너 이브 앙리 도나 마티유 생 로랑(Yves Henri Donat Mathieu-Saint-Laurent, 1936~ 2008)은 1957년 21세의 나이에 파리 최대 오트 쿠튀르 하우스인 크리스티앙 디오르(크리스찬 디올, Christian Dior)의 수석 디자이너로 혜성과 같이 패션계에 등장한 이래, 2002년 65세의 나이로 은퇴할 때까지 혁명적이고 독창적인 작품으로 20세기 후반 패션을 이끌었다. 프랑스인들이 파리 오트 쿠튀르의 황태자(Yves the Dauphin)라고 칭하기도 했던 생 로랑은 스트리트 패션을 사랑해 기성복 라인(ready-to-wear)을 런칭하고 여성에게 바지를 입히는 등, 사회의 흐름을 읽고 그에 맞는 새로운 패션을 제시한 혁명가로 불리고 있다. 이국의 문화, 문학, 예술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매 시즌 선보이는 독창적이고 새로운 디자인 영감의 원천이 되었으며 20세기 패션 디자이너 중 가장 탁월한 색채 감각을 가졌다고 평가받고 있다. 평생 우울증, 약물 중독,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던 연약한 사람이었던 이브 생 로랑은 시대를 읽는 눈과 놀라운 창조력으로 생전에도, 사후에도 전설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수줍은 소년에서 파리 쿠튀르의 황태자로
이브 생 로랑은 1936년 당시 프랑스령이었던 북부 아프리카의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부유하고 유명한 집안에서 태어난 생 로랑은 가정에서는 다정한 부모님과 두 여동생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학교에서는 연약한 몸매에운동을 못하는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동급생들로부터 끊임없는 폭력과 괴롭힘을 당했다. 이브 생 로랑은 1991년 프랑스 잡지 <피가로(Le Figaro>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공개하였는데, 어린 시절 가정, 교회, 학교와 같은 엄격한 가톨릭 커뮤니티에서는 자신의 동성애 정체성을 숨기고 다른 동성애 아랍 소년들과 몰래 교제해왔다고 고백하였다. 불우한 학교생활을 보내던 그는 파리로의 탈출을 꿈꾸었는데, 9살 무렵에는 자신이언젠가 샹젤리제 거리에서 이름을 빛낼 것이라 말하곤 했다.
부르주아 출신의 패션너블한 어머니, 두 여동생, 할머니 등 집에서 많은 여성들에 둘러싸여 지내던 그는 어머니와 함께 패션 매거진 <르 자댕 데 모드(Le Jardin des Modes)>, <파리 마치(Paris Match)>, <보그(Vogue)>를 즐겨보았고, 두 여동생의 인형 옷을 만들어 입히기도 했다. 14살이 되던 해, 생 로랑은 프랑스의 저명한 예술가 크리스티앙 베라르(Christian Berard)의 무대 디자인과 무대 의상을 접하게 된 후 연극에 매료되어 집에서 작은 무대 세트와 무대 의상을 디자인하는 등 창작에 대한 꿈을 키워나갔다.
이브 생 로랑은 당시 저명한 디자이너였던 크리스티앙 디오르, 위베르 드 지방시(Hubert de Givenchy), 쟈크 파트(Jacques Fath) 등이 심사하는 국제 양모 사무국 디자인 컨테스트(International Wool Secretariat Competition)에 참가하여 1953년에는 ‘드레스’ 부분에서 3등을, 1954년에는 18살의 나이에 1등을 수상하게 되었다. (같은 해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가 ‘드레스’ 부분 2위, ’코트’ 부분 1위를 차지했다.) 그의 뛰어난 스케치 실력을 눈여겨 보게 된 <보그> 편집장 미셸 브뤼노프(Michel de Brunhoff)의 권유로 생 로랑은 파리 의상 조합(Chambre Syndicale de la Haute Couture)에 진학하지만, 교육 과정에 흥미를 잃고 몇 달 만에 그만두었다. 이후 미셸 브뤼노프가 크리스티앙 디오르에게 생 로랑을 소개하면서 1955년부터 파리 최대 쿠튀르 하우스인 크리스티앙 디오르에서 디오르의 조수로 근무하게 되었다. 당시 이브 생 로랑은어린 나이였지만 디오르 하우스가 발표한 80벌의 드레스 중 50벌이 그의 디자인이었을 정도로 스승인 디오르에게 재능을 인정받았다. 1957년 10월 23일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갑자기 타계하자 21살의 이브 생 로랑이 디오르의 후계자로 지목되어 디오르 하우스의 아트 디렉터를 맡게 된다.
이듬해 1월에 이브 생 로랑은 어깨 폭이 좁고 아래로 갈수록 넓어지는 트라페즈 라인(사다리꼴 라인, trapeze line) 컬렉션을 선보이는데, 전통적인 우아한 스타일에 젊은 감각을 가미했다는 극찬을 받으며, 파리 쿠튀르의 구원자로 등장하였다. 큰 키에 깡마른 몸매의 수줍은 청년이었던 이브 생 로랑은 파리 언론을 매혹했고 위대한 디오르의 전통이 계속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주었다.
![]() 이브 생 로랑이 디오르 하우스에서 1958년 1월에 발표한 트라페즈 라인의 드레스. <출처: David Hilowitz at en.wikipedia.org> | ![]() 1961년 프랑스의 그래픽 디자이너 아돌프 무롱 카상드르(Adolphe Mouron Cassandre)가 디자인한 이브 생 로랑의 로고. Y, S, L 글자가 서로 얽혀 있음. |
파리 쿠튀르의 황태자로 떠오른 이브 생 로랑은 아이러니하게도 상류층들만의 오트 쿠튀르가 지루하다고 느끼기 시작하였다. 1950년대 말의 유럽과 북미는 전쟁의 궁핍에서 벗어나고 있었고경제적수입을 갖는 여성과 십대들이 등장하였다. 젊은이들은 그들만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기 시작하였고 사치스러운 상류층의 패션을 답습하는 것이 아닌, 기성세대와 차별되는 젊은이들만의 스타일, 거리 패션(street fashion)을 창조하였다. 그 역시 20대의 젊은이였던 이브 생 로랑은 패션의 선도자는 우아함과 화려함을 추구하는 상류층이 아니라 젊은 세대라는 것을 직감하고 그들의 문화와 패션에 눈을 뜨게 되었다. 1960년 이브 생 로랑은 레프트 뱅크(Left-Bank, 파리 센 강 좌안의 보헤미안이 사는 지역)의 비트 족의 거리 패션에 영감을 받은 “Souplesse, Legerete, Vie(유연하고 경쾌한 삶)” 컬렉션을 발표하였다. 밍크 트리밍의 악어가죽 재킷, 터틀넥 스웨터 등 블랙의 비트룩은 우아하고 화려한 것을 기대하던 살롱의 고객들에게 쇼크를 주었고, 언론의 혹평을 받게 되었다. 결국 이것이 디오르 하우스에서의 그의 마지막 컬렉션이 되었는데, 생 로랑은 후에 이 컬렉션이 자신의 디자인 생활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다고 회고하였다. 디오르의 소유주였던 마르셀 부삭(Marcel Boussac)의 권유로 입대를 하게 된 이브 생 로랑은 군대생활에 큰 충격을 받고 이때부터 약물과 알코올 의존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어려움에 처한 이브 생 로랑을 구원해준 이는 그의 동성 연인 피에르 베르제(Pierre Berge)였다. 베르제는 아트 디렉터를 마르크 보앙(Marc Bohan)으로 대체한 디오르 하우스를 상대로 거금 10만 불의 보상금을 받아내었고, 미국인 투자자 제스 마크 로빈슨(Jesse Mark Robinson)으로부터 투자금을 받아냈다. 이브 생 로랑과 피에르 베르제는 1961년 12월 이브 생 로랑 쿠튀르 하우스(Yves Saint Laurent Couture House)를 설립하고 1962년 대망의 첫 컬렉션을 개최하였다. 선원들이 즐겨 입는 피 재킷(Pea jacket)과 바지, 튜닉 등을 소개한 첫 컬렉션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미국 잡지 <라이프(Life)>는 “이브 생 로랑은 샤넬 이후에 최고의 슈트 메이커(Suit Maker)”라며 호평하였다. 이듬해 생 로랑은 1963년에는 보이시한 룩(Boysh look)을 발표하였는데, 선원들의 재킷, 농부들의 셔츠, 어부의 방수복 등이 트위드, 새틴과 같은 소재로 다시 태어나고 무릎까지 오는 긴 부츠와 함께 착용 되어 여성들에게 활동성과 자유로움을 선사하였다.
1966년 이브 생 로랑은 혁명적인 이브닝웨어 '르 스모킹'(Le Smocking, 턱시도의 프랑스 용어)을 발표하였다. 당시 여성들은 행사를 위해 화려한 드레스를 착용하였는데, 그는 1930년대 여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남장 사진에서 영감을 받아 여성을 위한 턱시도를 새로운 이브닝웨어로 제안하였다. 여성의 몸에 꼭 맞는 긴 재킷, 일자로 떨어지는 바지와 주름 장식인 자보(jabot)가 달린 오건디(organdy) 소재의 셔츠, 헐렁거리는 넥타이, 실크 새틴의 벨트로 구성된 르 스모킹은 성의 혁명(the Sexual Revolution)시대의 새로운 여성상에 꼭 맞는 혁명적인 의상이었다. 생 로랑은 르 스모킹을 생애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불렀고 1966년 이래 2002년 은퇴할 때까지 매 시즌 새로운 스타일을 소개하며 이브 생 로랑 디자인 하우스의 트레이드 마크로 삼았다. 이후 1967년에 선보인 핀 스트라이프 무늬의 팬츠 슈트(pant suit)는 여성복의 새로운 장르가 되었으며, 여성의 파워를 드러내는 주요한 의상으로 1970년대를 풍미하게 되었다.
![]() 1966년에 봄/여름 이브 생 로랑 오트 쿠튀르 컬렉션에 발표한 르 스모킹 룩. <출처: David Hilowitz at en.wikipedia.org> 자세히 보기 | ![]() 1978년에 봄/여름 오트 쿠튀르 컬렉션에 발표한 팬츠 슈트(Pantsuit). <출처: David Hilowitz at en.wikipedia.org> |
같은 해 이브 생 로랑은 베이스 코튼 드릴(cotton drill) 사파리 재킷을 선보였는데 어깨에 견장이 있으며, 4개의 플랩이 있는 패치 포켓이 달린이 재킷 또한 여성과 남성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변화된 사회의 전형적인 예가 되었다.
남성복에서 영감을 얻어 여성들을 위한 하이 패션으로 재탄생시켜, 시대에 뒤떨어지는 성의 구분을 타파한 것은 젊은 시절의 코코 샤넬과 뜻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시대의 변화와 그에 따른 새로운 여성복에 대한 요구를 이해한 두 사람은 모두 편안하면서 동시에 우아한 의상을 선보였으며 샤넬의 블랙 리틀 드레스와 이브 생 로랑의 르 스모킹은 유행을 뛰어넘는 클래식한 패션아이템이 되었다. 실제로 1968년 코코 샤넬은 이브 생 로랑의 창조성을 높이 평가하여 프랑스의 TV 쇼 < Dim Dam Dom >에 나와 정신적인 계승자(Spiritual Heir)로 그를 지목하기도 하였고 생 로랑은 존경하는 디자이너로 샤넬을 꼽곤 하였다.
샤넬이 상류층 고객만을 위한 옷을 디자인한 반면, 이브 생 로랑은 심드렁한 백만장자들을 위한 옷을 만드는 것에 대해 질렸다고 밝혔다. 이런 생각을 가진 생 로랑은 1966년에 젊으면서도 덜 부유한 여성들을 위한 ‘생 로랑 리브 고슈(Saint Laurent Rive Gauche)’이라는 기성복 라인을 시작하였다. 자신의 차를 타고 직장에 출근하며 신문을 읽는 자신감에 찬 현대 여성이아먈로 그가 원하는 여성상이었다. 이브 생 로랑은 그의 뮤즈를 위해 베이직하고 심플한 라인의 옷을 꼼꼼한 맞음새와 아름다운 프로포션, 완벽한 원단으로 만들었고 그의 혁신적인 디자인들은 더 많은 여성들이 입을 수 있게 되었다.
시대를 읽고 새로운 여성상에 맞는 혁명적인 옷을 선보인 것 이외에 1960~70년에 이브 생 로랑의 작품들의 또 다른 테마는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였다. 북부 아프리카 알제리 출신인 그는 다른 파리 출신 디자이너들과는 달리 비서구권의 문화에 일찍 눈을 뜰 수 있었고, 이국적인 풍경, 색채감, 문화, 전통 의상에 매료되었다. 이런 경험들은 그의 독창적이고 천부적인 컬러 감각과 함께 다채로운 컬렉션을 탄생시켰다.
1967년 이브 생 로랑은 아프리카의 밤바라족(Bambara)의 예술 작품과 민속 의상에 영감을 받은 아프리칸 컬렉션(African)을 발표하였다. 오트 쿠튀르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소재인 조개 껍데기, 나무 구슬, 동물의 이빨 모양의 비즈(beads) 등을 사용하여 여러 가지 색상의 실들로 엮어 만든 드레스는 쿠튀르 장인의 기술력과 혁신적인 디자인의 결합으로 가능한 작품이었다(아프리칸 컬렉션에서 발표한 구슬 드레스 보기).
이브 생 로랑은 1976년 발표한 러시안 룩(The Russinan Look)은 후에 러시아 혁명(Russian revolution)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뉴욕 타임스>는 이 컬렉션을 세계적 패션의 미래를 바꿀 혁명적인 컬렉션이라고 극찬하기도 하였다. 누빔 재킷, 페전트 블라우스, 긴 스커트 등 러시아와 모로코,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의 전통 의상이 오렌지, 핑크, 보라색, 노란색, 그린, 빨강색과 같은 강렬한 컬러와 함께 새로 창조되어 화려함을 더했고 이브 생 로랑에게 20세기 패션 디자이너 중 가장 훌륭한 색채 감각을 지녔다는 평판을 주었다. 후에 생 로랑은 이 컬렉션을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컬렉션으로 꼽기도 하였다(러시안 룩에서 발표한 드레스 보기).
생 로랑은 이 밖에도 옷을 통해 스페인, 고대 중국, 페루, 모로코, 중앙아프리카, 몽골, 터키, 베네치아의 전통 의상과 문화를 소개하였고, 1960년대 후반, 70년대 에스닉 룩의 유행의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그의 비서구권 문화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모델로도 이어져 패션쇼에 흑인과 동양인 모델을 기용한 첫 번째 쿠튀르 디자이너로 1980년대에는 기니 출신의 프랑스인 흑인 모델 카토우차 나이안(Katoucha Niane)을 뮤즈로 삼아 작업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 1965년 이브 생 로랑이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Matryoshka)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웨딩드레스. <출처: David Hilowitz at en.wikipedia.org> | ![]() 1965년 발표한 이브 생 로랑의 몬드리안 드레스. |
이브 생 로랑을 예술의 세계로 눈뜨게 한 것은 연극 [ 아내들의 학교 (L’Ecole des Femmes)]였다. 이브 생 로랑과 피에르 베르제는 모던 아트와 현대 예술 작품의 열렬한 수집가였다. 이런 문학과 예술에 대한 열정은 패션 디자인의 원천이 되어 독창적인 패션 디자인으로 창조되었다. 이브 생 로랑은 다른 예술가들과 활발한 교류와 협업을 통해 새로운 컬렉션을 완성하기도 하고, 평소 존경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소재로 삼아 오마주한 컬렉션을 창조하는 등 예술가와 예술 작품으로부터 얻은 영감을 정교한 재단, 쿠튀르의 수공예 기술, 천부적인 색채 감각으로 걸어다니는 예술 작품, 입을 수 있는 예술로 재탄생시켰다.
이브 생 로랑의 예술작품을 소재로 한 컬렉션의 첫 신호탄은 1965년 가을에 발표한 몬드리안 드레스였다. 신조형주의화가였던 피트 몬드리안 (Piet Mondrian)의 [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 ]의 회화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울 저지 시프트 드레스(shift dress)는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미국의 <우먼즈 웨어 데일리(WWD)>는 이를 두고 ‘패션의 왕 자리에 올랐다’고 평가하였다.
1966년에는 앤디 워홀 (Andy Warhol)의 영향을 받아달, 해, 여성의 몸 등을 이용한 강렬한 색상의팝 아트(Pop Art) 의상을 선보였다. 앤디 워홀은 이브 생 로랑이 즐겨 어울리던 예술가 중 하나로 후에 이브 생 로랑을 찍은 폴라로이드 스냅 사진을 가지고 초상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이브 생 로랑은1969년 조각가 클로드 라란느(Claude Lalanne)와 함께 조젯 크레이프 (Georgette Crepe) 소재의 드레스에 청동 ‘가슴’ 조각을 단 드레스와 ‘허리’ 조각을 단 드레스를 발표하였다. 옷으로 감추어져야 하는 인체 부위가 청동으로 만든 인체 조각으로 역설적으로 드러나는 초현실주의적인 이미지의 드레스는 놀라운 아이디어의 산물이었다.
이후 1979년 ‘ 피카소 , 댜길레프 ’ 오마주 컬렉션을 시작으로, 1980년 ‘ 기욤 아폴리네르 , 장 콕토 , 루이 아라공 ’, 1981년 마티스 & 페르낭 레제 ’, 1987년 생 로랑 리브 고슈 라인에서 ‘ 데이비드 호크니 ’, 1988년 ‘ 조르주 브라크 ’ 오마주 컬렉션까지 거장 예술가와 작가들의 작품들이 이브 생 로랑을 통해 아름다운 의상으로 탈바꿈되었다. 특히 1988년 반 고흐 의 해바라기 그림을 모티브로 한 재킷은 오트 쿠튀르의 자수 대가 장-프랑수아 르사주(Jean-Francois Lesage)와의 협업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해바라기 문양은 35만개의 스팽글과 10만 개의자개가 600여시간에 걸쳐 수놓아져 화제에 오르기도 하였다.
이브 생 로랑은 패션 디자인뿐만 아니라 발레, 오페라, 연극 무대와 무대의상 디자인, 영화 의상으로 활동영역을 넓혔다. 1957년 롤랑 프티 발레단(Roland Petit’s Ballet)의 [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Cyrano de Bergerac)]의 무대 의상을 디자인하였고 이후 롤랑 프티 발레단과 꾸준히 협업하여 무대의상을 디자인하였다. 1963년 영화 [ 핑크 팬더 ]의 배우 카퓌신(Capucine)의 의상, 1966년 영화 [ 아라베스크 ]의 소피아 로렌 (Sophia Loren) 등 프랑스 최고의 여배우들과 함께 작업하였다. 늘 아름다운 여인들에 둘러싸여 있었던 이브 생 로랑이 실제로 진정한 우정을 나눈 사람은 여배우 까뜨린느 드뇌브 (Catherine Deneuve)였다. 생 로랑은 그녀를 뮤즈로 삼아 주요작 [ 세브린느 ](Belle de Jour, 1967), [열애](La Chamade, 1968), [ 미시시피의 인어 ](La sirene du Mississipi, 1969), [ 리자 ](Liza, 1972), [ 악마의 키스 ](The Hunger, 1983) 등의 영화 의상을 디자인하였다.
이브 생 로랑은 “나는 2류의 아트(minor art)를 했으나 그것은 결국 결코 2류의 것이 아니었다”고 밝히기도 하였는데, 그의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디자인은 패션을 예술로 격상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실제로 그의 작품들은 예술성을 높이 인정 받아 1982년 12월부터 1984년 9월까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이브 생 로랑: 25년간의 디자인(Yves Saint Laurent, Twenty Five Years of Design)’라는 제목으로 전시되었는데 생존 패션 디자이너로서는 처음으로 열린 회고전이었다. 이후 베이징, 파리, 모스크바, 도쿄,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전 세계에서 전시가 이어졌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에는 결승전 게임 전 스타디움에서 펼쳐진, 각국에서 선발된 모델들이 300벌의 의상을 선보이는 대규모 패션쇼가 전세계로 생중계되기도 하였다. 프랑스 정부는 그의 공로를 인정해 2000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했다(코망되르 등급, Commandeur de la Legion d'honneur). 이브 생 로랑은 2002년 파리의 퐁피두 센터 에서 이브 생 로랑 디자인 하우스의 40주년을 기념하는 패션쇼를 마지막으로 65세 나이에 은퇴하였고 2008년 6월 1일 지병인 뇌종양으로 영면하였다.
![]() 후기 인상주의 작가인 반 고흐의 그림에 영감을 받아 자수사 장-프랑수아 르사주(Jean-Francois Lesage)와 협업해 선보인 슈트(1988). | ![]() 이브 생 로랑의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동성 연인이었던 피에르 베르제. 현재는 피에르 베르제-이브 생 로랑 재단을 운영. <출처: Studio Harcourt at en.wikipedia.org> |
이브 생 로랑의 신화는 사후에도 계속되었는데, 평생의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전 연인이었던 피에르 베르제는 그들이 평생에 걸쳐 수입했던 미술품 컬렉션 700점을 전부 경매로 처분하였다. 2009년 ‘세기의 경매’라고 불렸던이 컬렉션의 총액은 3억 7천 3백 50만 유로(한화 7,290억원)에 달해 단일 경매 사상 최고의 낙찰액으로 화제가 되었다. 그 수익금의 반은 피에르 베르제-이브 생 로랑 재단으로 나머지 반은 에이즈 연구에 기부되었다. 2002년에 설립된 피에르 베르제-이브 생 로랑 재단(the Foundation of Pierre Berge and Yves Saint Laurent)에서는 5,000여 벌의 이브 생 로랑의 오트 쿠튀르 의상과 150,000장의 그림, 스케치, 액세서리, 그밖의 잡화 용품들과, 생 로랑 리브 고슈(Saint Laurent Rive Gauche) 디자인 1,000점을 특별한 습도와 온도에서 과학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이 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이브 생 로랑의 작품들은 파리, 미국, 스페인 등을 돌며 전시되면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이브 생 로랑 쿠튀르 하우스는2002년 구찌 그룹에 인수되었으며, 2004년부터 이탈리아 디자인 스테파노 필라티 (Stefano Pilati)가 이끌어가고 있다.
출처: 네이버 캐스트-이브생로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