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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의 환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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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基本現況)
개설
백두대간(白頭大幹)이 경상도(慶尙道)의 남동부로 뻗어 내리며 낙동(洛東)정맥을 이루고 낙동정맥의 한 줄기가 낙동강을 향하여 남서쪽으로 뻗어 창녕(昌寧)에 이르러 화왕산(火旺山)과 영취산(靈鷲山)을 이룬다. 다시 낙동강(洛東江)에 이르러 그 정기가 뭉쳐 구진산(九陣山)과 도초산(道草山)을 치솟게 하는데, 그 기슭에 가슴 시원하게 툭 트이며 펼쳐진 옥야(沃野)가 바로 우리가 사는 곳 낙강칠리(洛江七里) 율림청풍(栗林淸風)1)의 고장이라 이름난 남지읍(南旨邑)이다. 우리 읍(邑)은 경상남도(慶尙南道)의 중북부로 영남(嶺南) 일대의 젖줄인 천 삼백리 낙동강이 북에서 남으로 흘러오다 서쪽으로 활처럼 굽어 휘돌아 들면서 지리산(智異山)에서 흘러오는 남강(南江)과 어우러져 동으로 흐르니 강폭과 수심은 더욱 넓고 깊어지며, 물살은 완만해져 퇴적토가 쌓이니 그에 따라 풍요하고도 순후한 풍토를 지닌 창녕군(昌寧郡)의 남부이다. 강으로 이어지는 수로(水路)가 예로부터 발달되어 배를 이용한 왕래와 산물의 교류가 활발하였으며, 38개 리가 오순도순 모여 사는 남지읍은 전통적인 모습의 농촌이다. 오래 전부터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사람들이 사는 곳, 농업 기술이 발달한 마을들로 이 낙토(樂土)에서 태어나고 부지런히 일하며 살다 이 땅에 묻힌 모든 사람들은 순박하고 인정이 많은 농민들이었다. 이런 풍토와 인심은 깊고 높거나 가파른 산과 계곡이 없고 강은 유유히 넓게 흘러 기름진 들을 더욱 살찌우니 더더욱 살기 좋은 고장이라 널리 회자(膾炙)되고 있었다. 일찍이 일세를 주름잡는 명문거족의 세도가 크게 없었고, 분수를 지키고 근면하며 상부상조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살아왔던 고장이라 할 것이다. 우리 고장에 살았던 선조께서는 부지런하였고, 연구 개발하는 기술 영농으로 끊임없이 노력하며 종자를 개량하였으며, 새로운 영농기술을 다른 지역보다 한 발 빠르게 배워서 전파하였던 결과로 농사 기술이 향상되고 농산물의 수확량도 많았다. 우리 고장은 개답사업(改畓事業)이 일찍이 진척되어 수리 안전답이 많아지고 따라서 벼 생산량이 다른 곳보다 월등하게 많았으며, 밭농사도 선진적이고 밀도 있는 영농 기술의 채택으로 수익성 좋은 작물재배와 2 - 3모작을 병행함에 따라 단위당 수익성이 향상되었으며, 보리 밀 육도 등 곡류와 함께 면화 땅콩 고추 등 유명 산물과 배추 무 수박 참외 등 다양하고도 특수한 채소를 생산하여 우리 읍의 이름을 높였다. 현재는 소득이 높고 농한기가 없는 전천후 영농인 시설채소 재배가 우리 고장 농민들의 독창적인 기술 개발 보급으로 확산되고 공동 출하를 하여서 어느 지역보다 먼저 대량 출하, 높은 가격을 받게되어 고소득 농민이 되었다.
우리 읍에서 생산되는 풋고추와 오이, 수박은 대도시의 시장에서 인기 품목이 되었으며, 가을이면 출하되는 무 배추가 땅콩과 함께 명성이 드높았다. 교통은 예로부터 낙동강을 이용한 수로(水路)의 발달로 남지리의 웃개나루{上浦津}를 위시한 학계리의 도흥나루{道興津}, 용산리의 거룬강나루{岐音江津 : 岐江}, 아지리의 창아지나루(昌阿支), 월하리의 박진나루{朴只谷津}와 들붓나루, 시남리의 이이목나루{烏項津} 대곡리의 백산나루, 반포리의 반포나루 등 크고 작은 나루가 있어서 강 상.하류에서 모여드는 각종 물화(物貨)와 여기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집산과 유통이 이루어지는 장이 섰다. 이 5일장은 2일과 7일에 섰는데 웃개장{上浦場}은 웃개나루와 함께 눈부시게 번창하였다. 남쪽인 창원(昌原), 마산(馬山) 등지에서 웃개나루나 도흥나루를 건너와서 북쪽으로 대구(大邱), 서울로 가는 대로가 이 고장을 관통하며, 이이목나루나 들붓나루를 건너 의령 합천으로 가는 길이 열려 있었고, 동서로는 거룬강나루나 박진나루를 건너 의령, 진주로 갈 수 있는 등, 우리 고장은 경남 중북부의 교통의 요충지였다. 육로(陸路)로 사람들이 우마(牛馬)나 도보로 다니던 시절에는 나루가 번창하였다. 1930년대에 마산-대구간(馬邱線)의 국도가 개통되면서 낙동강을 가로 건너는 남지철교(南旨鐵橋)가 가설되어 육상 운수(運輸)가 본격적으로 개시되자 우리 고장은 수로와 육로를 겸비한 교통 요지로 급격히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강을 이용하는 교통은 요즘은 쇠퇴하여 많은 화물을 싣고 오고가던 고배(큰 규모의 木船)는 지금은 그 자취를 감추었으나 예전에는 돛단배가 웃개나루터에 가득 정박해 있기도 했고, 인근 동리를 연결시켜 주던 나룻배가 부지런히 다니기도 하였다. 진동과 남지를 오가던 나룻배는 장날이면 하류는 수산, 부곡, 본포, 북면, 멸포 등지에서, 상류는 고령, 합천, 의령, 유어와 우리 고장의 북부 등지의 장꾼을 가득 싣고 강 상 하류에서 장배들이 모여들곤 하였는데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십여 년 전부터 그것마저 뚝 끊어져 버렸다. 이것은 도로망이 확충, 포장되고 차량이 급격히 늘어 육상 교통이 편리하게 되자 나룻배 이용객이 크게 줄어 낙동강 주변 마을을 왕래하던 장배는 물론 최근에는 수 백년 역사가 깊은 웃개나루의 도선장(渡船場) 나룻배마저 그 명맥이 끊어져 버렸고 그 외의 나루터도 한산해져 버렸다. 그래서 이제는 바로 강 건너 마을에 가려면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먼 거리를 돌아가야 하며, 시대 변천에 따라 내왕이 잦던 장길도 자연히 사라지고 찻길에는 오가는 차량들이 많으나 소로(小路)에는 인적도 뜸해지게 되었다. 우리 고장은 전에는 도로 포장이 저조하여 불편이 많았지만 1977년 12월 구마고속도로 개통이후, 고속도로를 이용하고 국도 지방도 등이 잇따라 포장됨에 따라 불편이 많이 해소되었고 소통이 원활하여졌다.
또 고속도로가 4차선으로 확장되어 이를 이용한 운송도 급격히 늘어났다. 그리고 남지시가지를 관통하는 국도의 시가지 우회도로 건설과 남지철교의 노후화 등으로 인하여 창녕낙동강대교 옆인 본동 동쪽에 1989년 제3의 교량인 남지대교를 착공하여 1992년 11월에 개통됨과 동시에 특히 마구선 국도가 2차선으로 확장 포장되어 우리 읍에서 생산되는 채소를 싱싱한 그대로 짧은 시간 내에 인근 도시로 공급하게 되어 더 한층 도시와 농촌간의 중계 역할뿐만 아니라 도시 인구를 흡수하는 소도시 역할을 원활히 하여 주는 고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농산물의 가공업(加工業)도 발달되어 1940년대에는 대규모의 타면공장(打綿工場)과 도정공장(搗精工場)이 있었으며, 지금은 학계리(鶴桂里)에 학계농공지구(鶴桂農工地區)가 1988년에 조성되어 여러 공장이 들어서서 농촌 경제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으며, 아파트 건축, 도시계획의 추진으로 간선 도로의 확장과 포장 등으로 소도시의 면모를 갖추어 가고 있다. 고속도로는 옛 창녕낙동강교를 철거하고 새로운 2차선 복선 교량이 낙동강에 위에 놓여 1995년에 개통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원하게 닦인 4차선 고속도로 완공이 되었다. 이때 인터체인지 시설은 당초 계획에 빠져 있었으나 읍내 기관.단체장 유지들이 중앙 관계 요로에 건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인터체인지가 생기게 되어 읍민들이 고속도로를 원활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되어 교통의 편의는 더욱 좋아져서 도시로의 출퇴근이 아주 자유로와 졌다. 돌멩이 하나 없는 옥토에서 재배되는 고등채소와 함께 불과 22km의 거리를 두고 있는 마산과 창원의 팽창, 개발이 추진되고 있는 함안군(咸安郡) 칠서면(漆西面)의 공업단지의 조성이 이루어지고 있어 우리 고장은 쾌적한 주거 도시로 크게 발전하리라 기대된다. 또 우리 고장의 50%인 산지(山地)는 그리 높지 않은 야산들이므로 초지 조성(草地造成)과 과수원으로 개간하여 축산과 과수 영농 등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우리 고장은 보다 잘 사는 곳으로, 도시 근교 전원도시(田園都市)로 크게 발전할 것으로 전망된다.
2. 현황 (現況)
연혁 |
* 1896년(고종 33년) : 창녕군 남곡면과 영산군 도사면으로 분리되어 있었음
* 1914. 4. 1 : 남곡면과 도사면이 합해져 남곡면으로 개칭
* 1936. 4. 1 : 남곡면을 남지면으로 개칭
* 1944. 9. 18 : 고곡리에 고곡출장소를 설치
* 1963. 1. 1 : 남지면을 읍으로 승격
* 1965. 1. 8 : 도시계획 결정 고시
* 1969. 1. 13 : 도시계획 확정 고시
* 1974. 8. 14 : 도시계획변경 결정 고시
* 1984. 5. 22 : 도시계획 재고시(하폭축소)
* 1998. 9. 10 : 고곡출장소를 폐지하고 고곡지구민원연락실 설치
일반현황 |
* 면 적 : 55.24km2(군의 10.4%) 전 8.90m2,, 답 8.90km2, 대지 1.38km2, 임야 26.82km2, 기타 9.71km2 (구 출장소 - 31.3km2)
* 인 구 : 12,744명(남 : 6,193명, 여 : 6,551명)
(구 출장소 - 1,819명)
* 가 구 : 4,293세대(농가 2,230, 51% 비농가 2,063)
(구 출장소 - 706세대),
* 행정구역 : 법정 14리 행정 38리 134반 자연마을 48마을
(구 출장소 - 법정 8리, 행정 15리)
* 행정기구 및 정원 : ㅇ 기구 : 5개 담당
ㅇ 정원 : 30명 본소 - 28명, 구 출장소 - 2명
지역특성 |
* 지 형 : 낙동강 인접 - 17개리(강안 길이 22km) 수해 우심지
남부 - 평야지, 서남부 - 낙동강, 북부 - 산간지
* 생활권 : 마산지역
농업구조 |
* 시설원예 집단 재배지 : 700여세대 * 호당 경지면적 : 0.98ha
* 수리 안전율 : 89% * 경지 정리율 : 87%
주요시설 |
* 공공기관: 10개소 * 사회단체 : 19개
* 학 교 : 7개소(초등 3교, 중 3교 고 1교)
* 도서관 : 1개소(306석, 장서 8,200권) * 농산물집하장 : 2개소
* 병. 의원 : 7개소 * 약국 : 13개소
* 위생접객업소 : 262개소 * 종교시설 : 17개소
* 공 장 : 6개소 * 분뇨처리장 : 1개(1일 처리용량 35.000ℓ)
* 도 로 : 25.7km * 교 량 : 5개소(낙동강상)
1. 옛 지명과 지세(地勢)
1) 옛 지명과 구지의 기록
조선 세종때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2)에 우리 고장의 지명이 나온다. 「창녕현」(昌寧縣) 조에 「남곡리」가, 「영산현」(靈山縣) 조에서 「기음강」이 나오는데 모두 우리 고장의 지명중 가장 오래된 기록인 것이다. 또 낙동강은 태백산에서 영남의 가운데를 가르며 흘러 남지에 이르러 남강과 만나면서 북에서 남으로 흐르던 강 물줄기가 기음강에서 동으로 방향을 바꾸니 곧 낙동강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昌寧縣 - 磁器所一 在縣南南谷里下品
靈山縣 - 기音江 在縣西二十八里有龍堂春秋令守令行祭祝文稱伽倻津溟所之神
창녕현의 남곡리는 곧 우리 고장 옛 면의 이름이었던 남곡면이며, 영산현의 기음강은 지금의 용산리 기강나루(창날)의 옛 지명이다. 또 「경상도」 「대천(大川)」의 첫머리에 낙동강이 나오는데 역시 이 지역의 옛 지명인 기음강과 남지리 웃개를 지칭하는 「우질포」가 나온다.
大川三一洛東江......爲甘勿倉津至靈山又合晉州南江之流爲기音江漆原爲우叱浦
『신증 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3)에서 우리 고장과 관련이 있는 기록을 찾아보면,
창녕현 「산천(山川)」 란에는 효자암산이 나온다.4)
孝子菴山 在縣南二十五里
「효자암산 (창녕)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이 효자암산은 고곡리 두곡의 산으로 속칭 소재미라 불리며 마을 이름으로도 사용되었는데 남곡면의 대표적인 산으로 알려진 것이다.
영산현 「산천」 란에는 도초산과 기음강, 우질포, 동보포, 계성천 등이 보인다. 또 「사묘(祀廟)」 란에는 기음강용단이 기록되어 있다.5)
道草山 在縣西二十二里
岐音江 在縣西二十八里 昌寧縣甘勿倉津下流與宜寧縣鼎岩津合處 古稱伽倻津
買浦津 在縣西二十三里 一名蔑浦津 卽漆原縣亐叱浦下流
同步浦 在縣西二十里
桂城川 在桂城縣 出昌寧縣火王山 南流入買浦
岐音江龍壇 祀典稱伽倻津溟所 春秋本邑致祭
「도초산 (영산)현의 서쪽 22리에 있다.
기음강 현의 서쪽 28리에 있다. 창녕현 감물창진 하류인데 의령현 정암진과 합쳤으니 옛날에는 가야진이라 일컬었다.
매포진 현의 남쪽 23리에 있다. 또한 이름을 멸포라고도 하는데 곧 칠원현 우질포 하류이다.
동보포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계성천 계성현에 있다. 창녕현 화왕산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흘러 매포로 들어갔다.
기음강용단 사전(祀典)에는 가야진명소라고 하여 봄 가을로 본 읍에서 제를 지낸다고 써 있다.」
도초산(道草山)은 지금 마산리와 학계리, 신전리 사이에 있는 산으로 옛 도사면의 대표적인 산{鎭山}이었으며,
기음강(岐音江)은 지금 용산리 창나리로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지점 일대를 가리키는데 이곳에 가야진 명소(伽倻津溟所)라 불리는 사당이 있어 봄가을로 영산현의 현감이 나와서 강신(江神 : 龍神)에게 제사를 드리었던 곳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岐音江」은 옛날 표기인 이두식(吏讀式) 한자 표기임으로 「기음강」으로 읽기보다는 "가라, 갈, 가라" 등으로 읽어 옛 가야, 가라 나라명의 본원이 되는 곳이었다.6) 기음강용단(岐音江龍壇)은 가야진 명소(伽倻津溟所)라고도 불리었는데, 용단은 그 해의 강의 범람이 없으며, 수운(水運)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영산현감이 춘추로 드리던 곳이었으며, 날이 가물면 기우제를 지내던 사당으로 지금의 용산리 앞 용두산에 있었다고 한다.
우질포(亐叱浦)는 곧 남지 웃개를 말하는데 웃개의 표기를 「우질포」로 기록한 것인데 「매포진」(買浦津)의 설명 중에 칠원현 나루의 하나로 나오고 있으나 보통 나루터의 이름은 강 양안을 구분없이 부르는 것이었으므로 칠원현의 우질포는 곧 강 건너 영산현의 우질포와 같은 것이다.
동보포(同步浦)는 남지리의 동쪽 일대 낙동강과 계성천 사이에 이루어진 들판으로 지금은 동포들(東浦水利), 동갯들로 불리고 있으며,
계성천(桂城川)은 우리 읍의 동부를 흐르며, 장마면, 영산면, 도천면 등과 경계를 이루는 하천이다. 이 하천 주위는 많은 늪과 저습지가 있어 농토의 역할을 못하다가 1930년대에 대대적인 개간사업이 추진되어 아주 긴 제방이 축조되고 이제는 영남수리조합의 들이 되어 영남들이라 불리는데 경남에서 이름난 곡창지대가 되었다.
위와 같이 우리 고장의 땅이름이 『세종실록지리지』와 360여 년 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 고장은 민족의 강 낙동강이 이루어낸 역사 깊은 땅이며, 우리 읍민들이 어머니의 품으로 여겼던 삶의 터전인 것이다.
우리 고장의 옛 면의 이름이었던 남곡면(지금의 남지읍 북부 지역)과 도사면(지금의 남지읍 남부 지역)은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7)) 「창녕현읍지」 또는 「영산현읍지」 「방리」(坊里) 조에 다음과 같이 각각 나와 있다.
昌寧縣邑誌 - 坊里……南谷面距官門四十里
靈山縣邑誌 - 坊里……道沙面距官門三十里
옛 지도에는 위의 지명 외에 오래된 땅이름으로는 박지곡진(朴只谷津;지금의 월하리 박진나루), 도흥진(道興津; 학계리와 마산리 앞 도흥나루) 등 나루터와 남곡면, 도사면 등 면 이름이 보인다.
또 『해동여지도』(海東與地圖)8)에는 도사면(道謝面)과 도초산, 남곡면과 효자암산 등이 보이며, 특이한 것은 대포(大浦)라는 지명이 보이는데 이는 속칭 「한개」의 표기로 지금 계성천 하류 남송교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었다.
2) 지형과 지세
『남지면지』(南旨面誌)9)에 지세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本面의 地勢는 北便은 山岳이 重疊하야 細少한 鑛脈이 有하고 南 一部는 洛東江을 挾하야 洪水 頻煩하야 沙礫地와 荒地帶가 多하드니 靈南水利 創設하야 河川工事 補强하고 土地改良 産米增殖되고 南旨堤防 竣工되면 沃野 數十里오 物皐民康 天府之地라」
우리 고장을 싸안고 흐르는 낙동강은 창녕군 유어면(遊漁面)에서 남쪽으로 흘러오다 서쪽으로 구비 틀며 우리 읍 시남리(詩南里)와 만난다. 그후 월하리(月下里), 대곡리(大谷里), 반포리(泮浦里), 칠현리(漆峴里), 아지리(阿支里)의 창아지(昌阿支)와 신전리(新田里)의 영아지(靈阿支)를 지나 남강과 합류하면서 그 흐름을 동으로 틀어 용산리(龍山里), 학계리, 남지리(南旨里) 등 크고 작은 마을과 들을 넓은 품에 안았는데, 남강과 만나 그 강폭을 넓혀 동으로 계속 흘러 부산 앞 바다로 간다.
우리 고장 북부는 중앙의 서부와 함께 300m이하의 낮고 작은 산들이 연이은 야산지대이나 남부와 계성천이 흐르는 중앙의 동부는 영남지방에서도 이름난 영남평야가 펼쳐져 있어 김해평야와 함께 답작지대(畓作地帶)로 최대의 미곡 생산지이다. 또 강변은 사질토의 모래밭이 연이어 오래 전부터 밭농사가 성하고 취락은 홍수를 피해 산을 배경으로 하거나 강변 높은 지대에 배치되어 있다.
오래 전부터 강을 따라 발달된 교통요지로 육로보다는 강을 통하여 상 하류를 오가는 길이 발달하여 웃개나루를 위시하여 도흥나루, 창나루, 창아지나루, 박진나루, 들붓나루, 이이목나루 등이 있어 각지와 통하였다. 육로는 1930년대에 남지철교가 준공되면서 마구선 국도도 원할하게 소통되어 마산-대구간을 국도를 이용한 차량 운행이 용이해졌고 그러자 획기적인 육상운송의 발전을 가져 왔던 것이다. 이제 구마고속도로 4차선 개통과 국도 확장 포장 등으로 근교 농업지대로 그 면모를 일신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우리 읍민들은 국가의 위기 때 앞장서 나섰던 지역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의병장 곽재우장군(郭再祐將軍)이 전국에서 처음으로 창의(倡義)하여 첫 승리를 거둔 곳이 기강나루(岐江津: 岐音江, 지금의 창나루)였던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다. 또 3.1운동 때도 남지장날 만세를 불렀던 곳이었으니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위치와 면적
1) 위치
남지읍(Namji Up)의 위치를 위도 및 경도 상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동단 123 30' 00" 남지리 본동 남송교
서단 128 22' 30" 월하리 월상 박진나루
남단 35 22' 30" 남지리 남포동 남지철교
북단 35 29' 00" 시남리 진골소류지 위
면적 55.28km2인 우리 읍은 창녕군에서 두 번째로 큰 읍으로 낙동강 중류 곡창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북쪽에서 흘러오던 낙동강이 서쪽으로 구비 치고 그 힘이 남으로 휘고 서부 경남을 흘러온 남강과 합해지며 다시 동으로 용트림하여 활처럼 칠백리 강물길이 굽이친 곳, 잇따른 언덕을 따라 영남들 넓은 옥토의 평야를 만들며 서북쪽에서 남으로 길게 뻗어 있다.
경계를 보면 북쪽은 우리 군 유어면(遊漁面) 진창리, 광산리 등과 붙어 있고, 서쪽은 의령군 낙서면(洛西面) 부림면(富林面) 지정면(芝正面) 등을 낙동강을 사이로 마주하고 있으며, 남쪽 역시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용화산(龍華山) 절벽의 함안군 대산면(代山面) 일부는 칠서면(漆西面) 등과 상대한다. 동남쪽은 낙동강 건너 함안군 칠서면이고, 동쪽은 남북을 길게 흐르는 계성천과 영남들을 싸안으며 우리 군 도천면(都泉面) 송진리와 영산면(靈山面) 월령리 봉암리와 이웃하고 있다. 그 위 북동쪽은 장마면(丈麻面) 유리, 대봉리와 어깨를 걸고 있다.
우리 읍에서 멀리 북쪽으로는 대구시 달성군이요, 서쪽은 의령과 합천이며 남쪽은 함안이며 마산 창원이다. 또한 동쪽에는 밀양과 부산이 있으니 바로 창녕군의 최남부이며 경남의 중부인 것이다.
관내(管內)의 거리는,남북(월하리 월평 들붓나루 - 남지리 남포동 웃개나루)이 직선 거리 12km,동서(월하리 월상 박진나루 - 고곡리 두곡 고개)가 직선 거리 5.8km인데 폭이 가장 좁은 곳은 신전리 영아지마을 앞 강변 나루터에서 성사리 황새목 성사교 사이인데 직선거리가 4.2km이다.
『대동지지』(大東地誌)10)에 보면 「창녕현」과 「영산현」의 방면(坊面) 란에 각각 남곡면과 도사면과 현청과의 거리가 나와 있는데 남곡면은 창녕현청에서 서남쪽에 있는데 가장 가까운 곳은 이십 리이고 가장 먼 곳은 사십 리라 하였으며, 또 도사면(道謝面)11)은 영산현청에서 서남쪽에 있는데 가까운 곳은 이십 리 먼 곳은 삼십 리라 하였다.
南谷 西南初二十 終四十
長嘉 西初二十終三十 道謝 西南上同
『문헌비고(文獻備考)』 「창녕현」과 「영산현」의 관내 방면에 우리 읍의 구명(舊名)인 남곡(南谷)과 도사의 기록이 각각 보이는데 다음과 같다.
남곡은 (창녕현에서) 서남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도사는 (영산현에서) 서남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행정구역으로 보면 자연마을이 48개이며 이장이 있는 행정리는 38개리, 반은 108개, 4,076세대에 13,115명(96년 현재)으로 군내에서도 범위가 넓고 큰 읍으로서 법정리는 14개리인데 다음과 같다.
남지리(南旨里) 마산리(馬山里) 학계리(鶴桂里) 신전리(新田里) 성사리(成士里) 고곡리(鼓谷里) 아지리(阿支里) 수개리(樹介里) 시남리(詩南里) 칠현리(漆峴里) 반포리(泮浦里) 대곡리(大谷里) 월하리(月下里)이들 리와 리 사이의 거리와 인접 시.군 또는 읍.면과의 거리는 다음 이정표와 같다.
이정표(里程標)
(단위 : km)
입접지와의 거리 | |||||
창녕 |
21.0 |
계성 |
11.0 |
부산 |
71.0 |
고암 |
26.3 |
영산 |
9.0 |
마산 |
26.1 |
성산 |
35.0 |
장마 |
9.0 |
대구 |
73.3 |
대합 |
33.0 |
도천 |
5.0 |
함암 |
27.5 |
이방 |
36.1 |
길곡 |
14.0 |
의령 |
33.1 |
유어 |
33.3 |
부곡 |
19.0 |
밀양 |
30.2 |
대지 |
26.1 |
|
|
합천 |
66.9 |
남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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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
마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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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0.9 |
학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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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
2.1 |
0.9 |
용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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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
3.4 |
3.0 |
3.3 |
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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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
4.1 |
4.2 |
4.6 |
3.0 |
성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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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
7.8 |
3.2 |
8.8 |
5.0 |
4.0 |
고곡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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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
6.0 |
6.4 |
6.6 |
4.0 |
3.0 |
2.0 |
아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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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
9.8 |
10.2 |
11.0 |
9.0 |
7.0 |
3.0 |
4.0 |
수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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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5 |
10.3 |
10.8 |
11.4 |
10.0 |
7.3 |
3.3 |
4.3 |
1.0 |
시남 |
|
|
|
|
13.0 |
13.0 |
13.5 |
15.0 |
10.0 |
8.0 |
4.0 |
5.0 |
5.0 |
6.0 |
칠현 |
|
|
|
14.0 |
14.0 |
14.5 |
16.0 |
11.0 |
8.0 |
4.0 |
5.0 |
5.0 |
5.0 |
3.0 |
반포 |
|
|
16.0 |
15.5 |
16.5 |
18.0 |
12.0 |
9.0 |
5.0 |
6.0 |
6.0 |
7.0 |
4.0 |
1.0 |
대곡 |
|
20.0 |
19.5 |
20.5 |
22.0 |
19.0 |
16.0 |
9.0 |
12.0 |
11.0 |
11.0 |
5.0 |
4.0 |
3.0 |
월하 |
2) 면적
면적은 55,233,201m2로 창녕군 전체 면적인 532,656,346m2에 비하면 우리 읍은 10.4%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 읍은 창녕군 14개 읍면 중 두 번째로 면적이 넓다.12)
논과 밭 등 경지면적은 17,488,885m2로 읍 면적의 32%를 차지하고 임야는 총면적의 48.7%를 차지하여 임야가 절대적으로 많으나 다른 읍면에 비하면 경지가 많은 편이다. 하천은 10.1%를 점유하고 있으며 토지 종별 이용 상황은 다음과 같다.
토지 지목별 현황 ( 단위 : m2)
지 목 |
면 적 |
지 목 |
면 적 |
지 목 |
면 적 |
전 |
8,902,371 |
답 |
8,425,146 |
과수원 |
127,551 |
목장용지 |
17,564 |
임 야 |
26,822,456 |
광천지 |
- |
대 |
1,376,793 |
학교용지 |
131,564 |
도 로 |
1,352,983 |
하 천 |
5,478,342 |
제 방 |
381,303 |
공장용지 |
53,782 |
유원지 |
- |
구 거 |
1,397,634 |
유 지 |
313,897 |
수도용지 |
1,057 |
종교용지 |
1,412 |
사적지 |
- |
묘 지 |
372,777 |
잡종지 |
84,690 |
합 계 |
55,240,921 |
자료 : 통계연보(1998)
법정리별 면적은 다음과 같다.
이동별 면적
이동명 |
면적(Ha) |
이동명 |
면적 |
이동명 |
면적 |
남지리 |
358.17 |
성사리 |
549.30 |
칠현리 |
162.26 |
마산리 |
300.57 |
고곡리 |
421.68 |
반포리 |
326.10 |
학계리 |
246.33 |
아지리 |
517.70 |
대곡리 |
384.98 |
용산리 |
317,37 |
수개리 |
300.71 |
월하리 |
498.35 |
신전리 |
489.87 |
시남리 |
550.70 |
합 계 |
5.524.09 |
자료 : 남지읍
『남지면지』의 기록에 의하면 1928년의 경지면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과 상당한 차이가 난다.13)
경지면적
지목별 |
필지수 |
면적(평) |
지목별 |
필지수 |
면적(평) |
전 |
8,126 |
4,302,640 |
답 |
3,217 |
1,111,937 |
대 |
1,247 |
182,911 |
지소 |
32 |
39,988 |
잡종지 |
87 |
126,694 |
합계 |
12,699 |
5,764,494 |
(자료: 남지면지)
위 표 외에 임야의 면적이 2,212필지 2,598정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14) 총면적의 57,7%이고 전답은 39.9%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런데 현재 우리 읍의 면적이 55.28km2인데 비하여 1928년대의 조사 면적을 비교하여 보면 10.46km2가 적은 44.82km2 밖에 되지 않은데 왜 차이가 나는지 알 수 없다. 혹시 이외의 지목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단지 현재의 전답면적과 비교하여 보면 경지정리 등 개간으로 밭이 줄고 논이 많아져 당시의 영농형태를 알 수가 있다.
3. 산천
1) 산
소백산맥(小白山脈)의 한줄기가 비슬산(琵瑟山)과 화왕산에 이르고 화왕산에서 뻗어 나온 산줄기가 낙동강에 막혀 더 가지를 못하고 그 지맥의 정기가 뭉쳐진 곳이 바로 우리 고장의 산들이다.
『취산군지』 「산천」에 다음과 같이 도초산이 나온다.
道草山 在治西南谷面二十里自火旺山來
우리 고장의 북쪽에는 높이 173.3m의 진골산{長谷山}으로부터 시작되어 두 갈래가 된다. 서쪽으로 산맥이 뻗어나가 이이목{烏項}의 말등허리{馬嶝} 160m 봉우리를 지나 강을 따라 산들이 있는데 약간 남쪽으로 가서 240.7m의 고운봉(高雲峰)과 우리 고장의 최고봉이라 할 311m의 구진산(九陣山)이 솟아 있다. 또 이 산맥은 강을 따라 가며 215.5m, 209.9m의 범골산{虎谷山}, 142m의 대곡고개를 이루며 신라 때의 나루터로 알려진 박지곡진(박진나루)에 머물렀다.
다른 한줄기는 진골산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려 읍면의 경계를 이루는데 유어면, 장마면, 남지읍 3개 읍면과 경계지점에 큰갓실산(높이 130m)이 있고, 남으로 비봉산(飛鳳山), 누부실{臥牛嶝}, 꽃티내, 큰갓만당 등이 솟아있고, 『동국여지승람』에 올라 있는 옛 남곡면의 진산 격인 효자암산(孝子庵山)을 이루고 있다. 이 산줄기는 계속 장마면 대봉리와의 경계를 이루는데 산은 낮으나 6.25때의 격전지로 유명해졌으며, 100m 내외의 산봉우리들이 이어져 오다 계성천에 다다라 평야를 이루었으며, 영남들 들 복판에 학바우{鶴岩}를 솟게 하였다.
화왕산의 정기가 효자암산에서 불쑥 솟구치며 높이 206m의 옥녀봉(玉女峰)을 만들고, 남으로 뻗어 옛 도사면의 진산(鎭山)격인 도초산(道草山)을 솟게 하였다. 이 산맥은 도초산까지 이르며 우실봉(牛膝峰)을 중심으로 200m 내외의 중부 고원을 형성하고 있다. 도초산의 동으로 120m의 말산{馬山}이 솟고 동갯들 평야가 펼쳐지며, 도초산의 서편으로 용암산(龍岩山)과 136m의 신전앞산 등을 이루고 낙동강을 만나 절벽을 십여 리나 이루며 남쪽으로 꺾어 145m의 말무덤산{馬墳山}을 만들며 우리 고장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산과 임야의 면적은 26.822.456m2로 읍 전체 면적의 48.8%를 차지하고 있다.
『남지면지』의 기록에 의하면 1928(戊辰)년도의 임야 면적이 2.212필지 2.598정 830묘보라 했다.
특기할 것은 남지리에는 산이나 임야가 없으며, 임야가 가장 많은 곳은 시남리로 371정이나 된다. 『남지면지』에 기록된 임야의 면적은 다음과 같았다.
임야면적 단위:정(町)
里洞名 |
筆 數 |
面 積 |
里洞名 |
筆 數 |
面 積 |
南旨里 馬山里 鶴桂里 龍山里 新田里 成士里 阿支里 |
- 85 129 121 224 220 310 |
- 44.6222 67.5928 151.4809 298.4802 215.5501 335.3511 |
鼓谷里 樹介里 詩南里 漆峴里 泮浦里 大谷里 月下里 |
219 143 242 76 134 133 176 |
303.3507 204.6111 371.4603 69.4308 152.1603 195.7615 188.8429 |
(자료; 남지면지)
현재 우리 읍의 이동별 임야 면적은 다음과 같다.
임야면적 단위: Ha
이동명 |
필 수 |
면 적 |
이동명 |
필 수 |
면 적 |
남지리 마산리 학계리 용산리 신전리 성사리 아지리 |
10 128 163 196 280 343 355 |
0.32 47.85 68.92 153.83 301.56 235.98 325.85 |
고곡리 수개리 시남리 칠현리 반포리 대곡리 월하리 계 |
279 165 317 100 166 174 342 3,018 |
302.74 204.56 368.96 71.70 157.15 196.07 246.17 2,681.66 |
(자료; 남지읍)
우리 고장 안에 있는 여러 산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북쪽에서부터 시작하여 남쪽으로 크게 나누어 보면 10개의 산이 있다. 곧 장곡산, 고운봉, 구진산, 호곡산, 효자암산, 옥녀봉, 우실등, 성사산, 도초산, 마분산 등이다.
(1) 진골산{長谷山}
높이 173.3m로 우리 고장의 최북단에 있는 산이다. 남북으로 걸쳐 우리 읍과 유어면, 장마면 등 3개 읍면과 경계를 이루는데 시남리 진골{長谷}에 있다.
이 산줄기는 북쪽이 낙동강에 닿았고, 남쪽 줄기는 효자암산에 연결된다. 산의 북쪽은 유어면 광산리이고, 동쪽은 장마면 동정리와 신구리이며, 서편은 시남리이며 서남편으로 수개리 등으로 골짜기를 이루고 있다.
이 산 동편에 있는 산을 큰갓실산이라 하는데 유어면, 장마면, 남지읍 3개 읍면의 경계가 되는 지점인데 높이는 130m이다. 이 일대의 산들은 다음과 같다.
큰갓실산 - 130m 진골북봉 - 150m 진골소류지봉 - 125m, 140m
말등허리{馬嶝} - 160m 이이목 -110m 청단소류지서북봉 - 125m
비봉산 - 130m 청단남산 - 145m, 달뜬봉 - 130m
청단뒷곡봉 - 110m 와우등 - 130m
(2) (高 雲 峰 )
높이 240.7m의 산으로 우리 고장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고운봉이란 이름 외에 높은 배기, 노은봉(露隱峰 또는 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산 남쪽 아래에 고곡리가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횃불을 올리며 싸운 산이라 전해 오는데 고운봉의 동편에 갈마지라는 지명이 전해오며 마을은 시남리와 수개리가 있다. 산줄기는 남북으로 걸쳤는데 남쪽은 고곡리에 이르고 북으로는 시남리와 강에 닿는다. 강쪽의 산은 절벽으로 200여m의 고지가 이어져 강을 따른다. 서쪽은 긴 계곡으로 좁고 긴 골짜기이므로 용수골이라 한다. 이 골짜기는 고곡에서 월하리 월평과 통한다.
작은 봉우리들은 다음과 같다.
시남뫼 - 200m 시남남봉 - 90m 월평동봉 - 210m 들붓고개 - 150m 깃대망강 - 180m 고운봉북봉 - 222m, 200m 반월등 - 100m 고곡뒷봉 - 200m
(3) 구진산 ( 九 陣 山 )
높이 311m로 우리 고장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고곡리와 칠현리 사이에 있는데 산의 정상은 평평하여 토성이 쌓아져 있었는데 이 성의 이름은 구진산성이라 불리며 망우당 곽재우장군이 이 성에서 아홉 번의 진(陣)을 치고 왜군과 싸워 아홉 번을 다 승리하였다 하여 구진산성(九陣山城)이라 불리었다 하는 유래가 전해오는 곳이다. 또 산줄기가 동으로 뻗어 높이 80m의 봉우리를 이루는데 이 산은 종산이라하며 이곳에는 고곡산성(鼓谷山城)이 있어 이 두 산성은 가야시대의 고성(古城)으로 알려져 있어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산이다.
산줄기는 남북으로 뻗어 북쪽으로 월평까지 이르러 낙동강에 닿으며, 남으로는 여러 줄기로 나누어져 고곡산성 외에 우측으로 칠현 마을, 다음은 반포국민학교가 있는 큰담실, 다음 줄기는 서편으로 반포 마근으로 더 서편으로 대곡리까지 뻗어 서남쪽으로 가면서 낙동강에 닿아 대곡, 반포들을 이루고 있다. 200m 이상의 고지는 정상 주변으로 고곡 서편과 대곡리, 칠현리와 경계를 만들며 그 남쪽에 여러 마을들이 있다.
구진산은 6.25때 격전지로 유명하여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전적지 순례 때 찾아오고 있다.
꽃등만댕이 - 217m 대칭이고개 - 228m 작은재 - 150m 종산 - 83.8m 대곡앞산 - 180m 반포 북봉 - 100m
반포 동봉 - 190m 동구재 - 165m 땅골만댕이 - 165.4m 마근 뒷산 - 114m 대곡늪 동봉 - 90m
(4) 범골산{虎谷山}
월하리 동편에 있는 산인데 높이는 209.9m이다. 구진산의 서북쪽 산줄기로 남쪽은 대곡 하담으로 낙동강에 맞닿았으며, 북으로 굽으면서 서쪽 편에 낙동강과 함께 나란히 월상 월하마을 등 동리와 넓은 모래밭을 이루고, 동편에는 대곡이 있다. 북쪽 끝은 낙동강에 닿아 월평마을에 이른다.
이 산은 구진산과 함께 6.25때 격전지로 알려져 있는데 이 고지를 지키고 있던 미군이 미쳐 후퇴를 하지 못하고 집중공격을 받고 격전을 치렀던 전적지로 이 전투를 기리기 위하여 남쪽 산자락인 꽃밭등에 전승비가 서 있다.
뱀산 - 110m 범골산 북봉 - 215.5m 헌서낭댕이 - 170m 대곡고개 - 120m 꽃밭등 - 142m
(5) 효자암산 ( 孝 子 庵 山 )
높이 120m로 고곡리 두곡 북쪽에 있는 산으로 동쪽은 장마면 동정리와 경계를 이루고, 북쪽과 서쪽은 수개리이다. 남쪽에는 두곡마을이 있으며, 두 줄기가 뻗어 하나는 엄나무진고개(두곡고개)이고 또 하나는 소재미로 영산-박진간 지방도에 닿아 끝나고 있다.
이 산은 엄나무진고개와 함께 5효자의 전설이 전해오는데 따라 효자가 시묘살이를 위해 지은 암자{廬墓}의 초막이 있었다하여 「孝子의 庵」 산으로로 불리어 진 것이라 한다. 속명으로 소재미라 불리니 "소자, 서재"는 효자의 이곳 발음이며,"미"는 산(山) 즉 뫼, 메이니 소재미는 곧 효자산이란 뜻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창녕현」의 「산천」조에 「孝子庵山 在縣南二十五里」라 기록되어 있다.15)
6.25동란 때 이 산을 중심으로 이 일대 고지가 북쪽 줄기가 자루이고 세 봉우리가 (150고지, 110고지, 100고지) 마치 클로버 잎처럼 생겼다하여 격전을 벌렸던 미군들이 "클로버잎(Clover Reaf)고지"라 불렀는데 전사에 기록된 유명한 격전지 중 하나이다. 2차에 걸친 대규모 공방전이 전개되었던 곳이다.
북쪽에서부터 다음과 같은 봉우리들이 있다.
미곡 북봉 - 100m 동정고개 - 130m 아무개재 - 162m 니방골고개 - 100m 큰갓 만당 - 150m 꽃티내 - 110m
두곡 동봉 - 110m 대봉 뒷산 - 117m 두곡뒷산 - 126.9m
(6) 옥녀봉 ( 玉 女 峰 )
높이 206.8m이며, 남봉은 160m이다.
아지의 북과 서쪽에 있는데 북쪽은 고곡과 두곡, 아지 골짜기에서 흘러오는 시내로 산줄기가 끊겼고, 서남으로 창아지, 남으로는 성사 우실등과 연결되면서 160m이상 높은 봉우리를 여러 개 가지고 있다.
이 산을 분수령으로 우리 고장의 남부와 북부로 나누어져 있는 형상이다.
장구덤{蠶頭山} - 120m 아지 서봉 - 160m 산빠굼고개 - 200m
아까리고개 - 170m 창아지 뒷산 - 100m 장등(長嶝) - 140m
큰등 만당 - 169m 아지앞산(절골북봉) - 110m 영아지고개 - 150m
동박골 남봉 - 110m 음촌 앞봉 - 120m
(7) 우실등{牛膝峰}
높이 209m로 신전리와 성사리에 걸쳐 있는데 서봉은 218m이다.
이 산줄기는 동편으로 성사초등학교(폐교됨)가 있었던 민두루미 마을에 이르고, 북으로 성사고개를 이루고, 아지리와 경계이고, 서쪽으로 영아지 남으로는 신전리에 이르러 신전늪에서 끝난다. 160m의 남지고원을 이루며 우리 고장의 중부를 이루고 있다. 천지개벽으로 홍수가 났을 때 산봉우리가 소구시(구유)만큼 남았다 전한다.
신전 뒷고개(서봉) - 218m 영아지 북봉 - 110m 성사고개 - 80m
성사 앞산 - 110m 뒷골재 - 77m 갓골봉{曺陵山} - 110m
신전 뒷산 - 160m 질마산(매전서봉) - 130.4m 매전 앞산 - 65m
허리골 만당 - 165.1m 개뚜골 만당 - 170m
(8) 성사산 ( 成 士 山 )
높이 130m로 성사마을 북쪽에 있으며 성사(아지)고개의 동쪽 산으로 남북으로 뻗어 있다. 남으로는 황새목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계성천을 끼고 북으로 뻗어 대성마을을 지나 두곡마을의 엄나무진고개에 이른다. 그 줄기의 서쪽은 아지리이며 그 동쪽은 장마면 대봉리 어봉마을로 우리 읍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102, 109, 117, 143m등 봉우리가 연달아 있어 6.25동란 때 「어봉리 능선의 전투」로 전사(戰史)에 기록될 만치 미해병대와 인민군과의 치열한 피의 격전지로 유명하다.
어봉고개북봉 - 130m 성사동봉 - 90m 대성서봉 - 90m
정골만당 - 99m 두리봉 - 90.8m 새터북봉 - 60m
아래골 동봉 - 56m 황새목 북봉 - 50m 학바위{鶴岩} - 30m 성사고개 - 80m
(9) 도초산 ( 道 草 山 )
높이 172m이다.
『영산현지』(靈山縣誌)의 「산천」 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어 우리 읍의 진산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그 이름이 오른 산으로 화왕산 줄기의 하나이다.
道草山 在縣西二十二里 自昌寧火旺山來
도초산 (영산)현의 서쪽 22리에 있다. 창녕 화왕산에서 뻗어 왔다.
도초산의 남쪽은 학계리, 동쪽은 마산리, 북쪽은 신전리와 서쪽으로는 용산리까지 뻗어 있어 작은 봉우리를 10여 개나 갖고 있다. 주봉(主峰)은 학계리 덕동마을 서북쪽, 신전마을의 남쪽으로 100m 이 산의 산줄기가 용산리와 신전리 일대에 펼쳐져 있다. 말산은 마산리 이름이 유래된 산이며 남쪽 기슭에 도덕암이 있다.
이 산과 연계하여 있는 봉우리는 다음과 같다.
신전앞산 - 136m 솥고개 - 80m 용암산(龍岩山) - 90m
옥산뒷산 - 80m 남지공동산 - 80m 당포서봉 - 100m
방추산{馬山} - 120m 감말서봉 - 80m 당포앞산(기민개) - 65m
(10) 마분산 ( 馬 墳 山 )
높이 170m이다. 용산리 알개실 서쪽에 있는 산으로 일명 말무덤산이라 하며 낙동강과 맞닿아 있다.
용산리 창날에서 북으로 영아지에 이르는 산인데 험준한 절벽과 산길로 "개비리"라 불리는데 가을이면 단풍이 강물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특히 산 정상에는 임진왜란 때 홍의 장군 곽재우의 의병군이 싸웠는데 이때 공을 세우고 죽은 말을 묻은 말무덤이라 전하는 커다란 고분이 있어 이에 연유하여 마분산이라 불린다. 산자락 낙동강변 절벽에는 농지개량조합의 거대한 양수장이 있어 용산 학계 마산 남지 4개 리의 들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으며 그 옆에 남지상수도양수장이 1970 -80년대에 있었으나 최근 폐쇄되었다.
신전리 쪽으로 160m 이상의 봉우리들이 영아지까지 이어지고 있다.
창진산 - 89m 진등산 - 140m 불미골만당 - 130m 개둑골 남봉 - 150m 영아지 남봉 - 170m
2) 들
우리 고장의 북부와 중부는 대체적으로 산악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남부와 중동부는 북서부와 함께 낙동강을 끼고 있어 평평한 들판이다. 이것은 낙동강과 계성천의 흐름에 따라 오랜 침식작용과 퇴적작용으로 이루어진 들판이다.
우리 고장에서 가장 큰 들은 영남(靈南)들이다. 우리 읍을 비롯하여 계성면 장마면 영산면 도천면 등 5개 면에 걸쳐 있는 들로 우리 읍 관내는 성사리와 신전리 구역이다. 이 평야는 계성천을 따라 형성되었으며 낙동강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이다. 이 들은 일제시대 일찍 개간 구획정리가 되어 미곡의 생산지대로 오래 전부터 이름나 있다.
그 다음의 평야는 동갯들{東浦野}이다. 『취산군지』에 보면 「전야구역」(田野區域) 란에 동개평이 나온다. 곧 동갯들을 가리킨다.
東開坪 自岐音江下至松津 龍山日村馬山亭南旨松津區域
위의 기록을 보면 동갯들은 낙동강의 동쪽 들 일대를 총칭하는데 기강나루에서부터 용산리 학계리 마산리 남지리 도천면 송진리까지 이 들의 구역이라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대체적으로 남지리 마산리 관내 구역으로 일부는 학계 홍정까지 이른다고 보지만 홍포마을 동편에서 계성천까지의 수리 구역을 동갯들이라 부르고 있다.
전에는 계성천과 낙동강 물이 흘러들어 일대에 늪을 이루고 있었으므로 『취산군지』의 「강호」(江湖) 란에 동보호(東步湖)로도 기록되어 있다.
東步湖 在治南二十里今爲水利
이 동보호는 개간으로 면적이 많이 줄어들었으나 그 흔적은 최근까지 남아 있었는데 현재 고속도로 인터체인지 일대로 무닝기라 불리었던 들이다. 해방 후 제방 축조 후에는 수해 피해가 줄어들었으며, 1965년 이후 수년에 걸쳐 학계지구와 함께 경지정리가 완료되었다. 그 북쪽에 있는 당포수리 구역과 합치면 우리 고장의 대표적 곡창지대인 들판이다. 동갯들의 서쪽 남지 강변 일대의 들을 욱개둑이라 불리는데 예전에는 소나무가 무성하였으나 개간하여 호맥(胡麥)과 땅콩 등을 심게 된 들판인데 지금은 온실 재배가 성행한다.
용산리에서 학계리 명지, 홍정에 이르는 성지들은 모래밭으로 비닐 하우스 농사가 많은데 학계들이라고도 한다. 또 고곡수리들은 수개에서부터 낙동강 창아지 마을 앞까지 길게 이어진 들판으로 수침이 잘 되는 일부 논도 있었으나 경지정리와 제방 등의 시설이 되어 있다. 월하리 대곡리 반포리에 이르는 들은 대곡들, 반포들로 불리는데 환금작물인 채소를 심는 밭으로 또 최근에는 수박 온실재배로 소득이 높은 들판이다.
우리 고장의 들은 대체적으로 낙동강 연변이므로 해마다 홍수 피해가 우심 했으나 최근 안동댐과 남강댐의 수량 조절과 제방을 곳곳에 쌓은 덕으로 수해를 상당히 극복하고 있다.
우리 나라 대부분의 마을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그에 따라 우리 고장의 대부분 마을들도 산을 의지하고 강을 바라보고 있으나 강변에 위치한 몇몇 마을은 모래가 쌓인 강변 높은 지대나 들 복판에 있어 지역적인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평지에 취락을 이룬 마을로는 남지리 7개 동과 홍포 홍정 명지 바깥동과 박진나룻가 등으로 마을에는 모래만 있을 뿐 돌이나 자갈이 없는 특색 있는 곳이다.
3) 재{嶺}와 고개
산에는 사람이 오르내림에 따라 길이 생긴다. 산과 산 사이 골짜기와 산비탈을 끼고 돌며 넘어가는 곳이 바로 고개이다. 재나 고개는 이쪽 골짜기와 저쪽 골짜기, 이 산과 저 산을 연결해 주는 길로 예전에 도보 이용이 보통이었으니 자연히 우리 읍에도 이러한 산길의 고갯길이 발달하고 많이 있었다. 재는 대체적으로 높은 산에 나 있는 고개를 지칭하게 되며 야산이나 마을 인근 낮은 곳의 등성이 길은 그냥 '고개'로 통칭되었다.
지금은 도보보다 차량 이용이 많아지고 나무꾼의 왕래마저 끊겨 작은 고갯길은 그 자취마저 희미하게 사라지고 있다. 1970년도에 제작된 지도에 나오는 고갯길들이 1994년에 발행된 지도에는 많이 사라지고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크고 작은 고개는 다음과 같다.
(1) 덕고개{德峴}
학계리 홍정 남지공동묘지에서 신전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오래 전부터 남쪽 마산과 함안에서 창녕 서울로 가는 대로로 사람의 왕래가 많았던 고개이다. 또 신전 성사사람들이 주로 이 고개를 넘어 남지 웃개장을 보러 왔으며 남지의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통학로로 널리 사용된 고갯길이다. 높이가 30m로 지금은 넓게 확장되어 차가 다니고 있다. 이 고갯길 서편 쪽으로 고개가 하나 더 있는 데 보통 웃덕고개라 불린다. 이 고개는 지금은 흔적만 남았다.
(2) 황새목
성사리에 있는 작은 고개로 예전에 남지에서 고곡리로 가자면 이 고갯길을 넘어야 하였다. 매전 마을에서 학암 마을이나 영남수리들로 연결되는 고개인데 지금은 산마루에 새로운 길이 신설 포장되어 차량이 다니면서 옛 명성을 잃었다. 전에는 이곳에 주막이 있어 지나는 길손이 쉬어 갈 수 있었으며 리동협동조합이 있었을 당시 군내에서 으뜸조합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자체 시설로 도정공장, 비료보관창고, 협동이발소 등이 이곳에 있었다. 지금은 현감 조운한 선정비, 상덕사, 숭례비 등과 정부양곡보관창고와 오성당 그리고 98년에 설치된 한해방지용 양수장 등이 있어 성사리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고개 높이는 20m 이다.
(3) 성사고개
성사리에서 북쪽으로 아지리를 잇는 해발 80m 높이의 고개로 우리 읍의 중추적인 도로의 고갯길로 예전부터 험준하고 높은 고개로 이름나 있었다. 전에는 우리 읍이 이 고개를 기준으로 남쪽은 영산현 도사면, 북쪽은 창녕현 남곡면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래서 이 고개를 기준으로 남곡면 지역을 지금도 「산너메」라 부른다. 예전에 남지장을 보려면 이 고개를 넘어서 장꾼들이 다녔다.
아지리로 간다 하여 아지고개로도 불리는데 최근 도로가 확포장되면서 고개를 깎아 내려 많이 낮추었다. 정기 노선의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4) 대칭이고개{大層峴}
고곡리 북실 마을에서 서쪽으로 구진산 산등을 넘어 대곡리로 가는 높은 고개이다. 지금은 산불 방지용 임도(林道)를 개설하여 차를 이용하여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월하리와 대곡리 등이 침수되어 반포 앞 도로를 사용할 수 없을 때에는 이 고갯길을 다녔다고 한다. 대춘이고개로도 불린다. 고개의 높이는 210m 이다.
(5) 들붓고개
고곡리 북실 마을 북쪽의 긴 골짜기인 용수골에서 월하리 월평으로 가는 고개인데 들붓은 월평의 옛 이름이다. 예전부터 남지 쪽에서 의령으로 가자면 흔히 고개를 넘어 들붓나루를 건너 의령군 낙서면으로 가는 가장 많이 이용한 통행로였다. 고개 높이는 160m로 지금은 통행인이 흔치 않으며 산불 진화나 임목 관리를 위하여 임도가 개설되어 있다.
(6) 두곡고개
흔히 엄나무징이라 하기도 하는데 고곡리 두곡 마을 앞에서 동남쪽으로 장마면 대봉리 가림으로 통하는 고개이다. 지방도 1008호 영산 - 박진 간의 도로가 확포장되어 있어 영산으로 왕래하는 교통량이 아주 많으며 정기 노선의 버스가 다닌다. 그러나 1991년의 확포장 공사 시에 높이 60m의 고갯길을 많이 깎아 낮추었으므로 옛 모습을 상실하였다.
(7) 옻고개{漆峴}
칠현리 앞의 고개로 지방도 1008호 영산 - 박진간의 도로상에 있는데 고곡리와 반포리를 연결하는 고개이다. 북쪽의 작은 고개에 비해 다름재에 있는 이 고개가 크므로 큰고개라 하기도 한다. 마을의 이름이 되었으며 지금은 확포장되어 차량 통행이 많으며 정기 노선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높이가 30m인 이 고갯마루에 창녕현감 고유 선정비가 있다.
(8) 한실{大谷}고개
대곡리 한실 마을에서 서쪽으로 꽃바등과 헌서낭댕이 사이에 있는 고개로 월하리 월상(범골) 마을로 통한다. 대곡고개, 범골고개라고도 한다. 대곡리에서 월상초등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의 주 통학로 이기도 하였다. 고개의 높이는 90m 이다.
(9) 작은 고개들
다음과 같이 작은 고개들이 많이 있다. 「리동사와 지명유래」에 상세하게 기술하고자 한다.
알개실고개 가물고개 수리실고개{新田峴} 뒷골재 전골고개 신전뒷고개 영아지고개 아까리고개 산박굼고개 깐치등고개 창아지고개 장고개 어봉고개 잣고개 올창고개 진주고개 웃고개와 아랫고개 필밭고개 동정고개 니방골고개 잔고개 뒷곡 못안고개 작은재(칠현리) 담실고개 뒷고개와 앞고개(반포리)
4) 골짜기{谷}
산과 산 사이에 형성된 골짜기는 오래 전부터 사람이 의지하고 살았던 생활의 터전으로 산과 들판을 이어주며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자원이 풍부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골짜기를 근거로 취락이 형성되기도 하였으며 깊숙한 골짜기는 임진왜란 같은 난리가 일어났을 때 피란지로도 이용되는 등 항상 골짜기는 사람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오고 있었다. 우리 읍에도 깊고 넓은 골짜기가 많아 마을이 많이 자리 잡고 있으며 농토 또한 많아서 농경생활을 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크고 작은 골짜기는 다음과 같다.
(1) 큰골{德谷}
학계리 홍정 마을 북쪽에서 신전리까지 도초산 산줄기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골짜기 안에 덕동(큰골) 마을이 있고 남지공동묘지가 있다. 입구에서 안까지의 거리는 1,500m이며 학계소류지가 있다.
(2) 장골{長谷}
골짜기가 길고 크므로 장실, 장곡인데 학계리 홍정 마을 뒤에서 북쪽으로 도초산까지 이른다. 길이는 1,200m로 골짜기 안에 학계 마을이 있으며 마을 앞에 장실늪이 있고 마을 뒤 골짜기 안에도 마을이 있었다하나 지금은 없다.
(3) 알개실{阿谷}
용산리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서쪽은 마분산이고 동쪽은 용암산으로 안쪽에서는 두 줄기로 나누어져 있는데 동쪽 골짜기를 금장골이라 불린다. 이곳에서는 예전에 금을 캤다고 한다. 골짜기 입구는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지점인 기음강이며 현재 창날 마을이 있고 거대한 늪이 있었으나 논으로 개간되었으며 골짜기 중간에 알개실 마을이 있다. 길이는 1,500m 이다.
(4) 신전(新田)골
신전리가 있는 골짜기로 동서로 뻗어있는데 남쪽은 도초산이며 북쪽은 질마산과 우실봉 등에 둘러 싸여 있다. 골짜기 입구에 신전늪이 있는데 예전에는 큰 늪이었으나 지금은 많이 개간되어 축소되었다. 신전 마을은 한참 들어가 있으며 마을을 지나서도 골이 깊으며 예전에는 독립 가옥등 작은 마을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 졌다. 골짜기 안에는 소류지가 2개소 있으며 서쪽 산을 넘으면 낙동강에 이른다. 길이는 3,500m 이며, 여기에 붙은 작은 골짜기들은 다음과 같다.
우물골 개장골 도사곡 안골 솥골{鼎谷} 세창골 배미골 가물곡 성지골 서재골 불미골 개뚜골 허리골
(5) 성사(成士)골
성사리가 있는 일대의 골짜기로 동북쪽에는 성사산이 서남쪽에는 우실봉이 있어 길고 큰 골짜기로 형성되었다. 입구는 신전저수지에서 시작되며 북쪽으로 가서 성사고개에 닿는다. 마을은 지금은 개간된 저습지 장성늪을 지나면 처음에 매전 마을이 서편에 있고 맞은 편에 황새목이며, 다시 갓골이 서쪽으로 뻗어 관동마을이 있으며 폐교된 성사국민학교가 있는 민두루미 마을이 서편에 있고 서북쪽으로 골짜기가 굽이쳐 안쪽에 성사 마을이 있다. 제일 안쪽에 성사 소류지가 있으며 골짜기 입구에서부터 성사고개까지 1043호 지방도가 통과되고 있는데 확장 포장되었다. 길이는 3,000m로 다음과 같은 작은 골짜기들이 있다.
갓골 서재골 진막골(陣幕谷) 매말리골 아래골 새터골 전골
(6) 아지(阿支)골
아지리 아지 마을이 있는 일대 골짜기로 북쪽 고곡리 소재미에서 남쪽으로 성사고개에 이르는 길고 큰 골짜기이다. 골짜기 입구에 고곡리 소재미 마을이 있으며 수개 시남에서 내려오는 고곡천이 있고 남쪽으로 가 골짜기 서쪽에 아지 마을이 있고 성사고개까지 지방도 1043호 도로가 확포장되어 정기 노선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서쪽에는 옥녀봉, 동쪽에는 대봉뒷산과 성사산의 줄기가 뻗어 있으며 남쪽에는 우실봉이 높이 솟아 있어 여러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다. 골짜기 안쪽에 아지소류지가 있으며 길이는 800m 이다. 작은 골짜기들은 다음과 같다.
앞실 절골 도둑골 각골
(7) 고곡(鼓谷)골
이 곳은 사실 골짜기라 하기에는 너무 길고 광범위하다. 낙동강 입구 창아지 앞에서 고곡수리를 거쳐 칠현리, 고곡리, 수개리, 시남리에 이르는 일대의 계곡으로 고곡천을 따라 전답이 많고 골짜기의 폭이 넓다. 따라서 고곡천 일대를 편의상 고곡골이라 칭하여 이 근처의 골짜기들은 망라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이 골짜기의 길이는 창아지에서 진골못위까지 8,500m 이며 고곡천이 낙동강에 접하는 부분은 좁으나 개간이 된 저습지(고곡수리들)가 고곡 마을까지 있고, 고곡리 일대는 상당한 평지로 마을과 들이 있으며 서쪽, 동쪽과 북쪽으로 세 갈래 갈라져 있다. 양편에 있는 마을은 골짜기의 동편에 산빡굼, 소재미와 두곡, 접곡 미곡, 청단 마을 등이며, 서쪽에는 머찔, 구평, 북실 등 고곡리 여러 마을과 금곡, 수개, 시남 마을 등이 분포하고 있다. 지방도 1008호 영산 -박진간 도로가 두곡-고곡 구평-칠현으로 연결되어 정기 노선의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작은 골짜기들은 다음과 같다.
두곡(頭谷)골 시남골 청단골 진실골{長谷} 내곡 범한골 밤밭골 용수골 뒷종골 뒷징기실골 험치골 황새골 올창고개 납장골{蝶谷} 미실골{尾谷} 담배골 대리골 합장골 뒷골(청단)
(8) 칠현(漆峴)골
칠현리 일대의 골짜기로 동쪽에 있는 구진산 줄기가 남으로 뻗어내려 낙동강까지 이르러 다름재를 이루는데 이 능선의 서쪽에 형성된 골짜기이다. 서쪽 산은 땅골만댕이로 길이는 1,500m 이다. 골짜기 중간에 칠현 마을이 있고 지방도 1003호선이 옻고개를 넘어 골짜기를 횡단하고 있다.
칠현 마을 뒤 북쪽에 있는 골짜기는 장골(長谷)인데 구진산 아래에 닿는다. 골판이라고도 부른다.
(9) 반포(泮浦)골
반포리 반포마을이 있는 골짜기로 담곡 쪽의 구진산과 대곡리 쪽 동봉 산줄기 사이에 난 골짜기로 중간에 반포 마을이 있다. 골짜기 앞에 지방도가 지나가고 도로 너머 반개들과 낙동강이 있다. 계곡 입구는 반포늪으로 저습지였으나 둑을 막고 논으로 개간되었는데 길이는 2,400m 이다.
반포 골짜기의 제일 안쪽을 골안이라 하는데 마을 이름도 골안이라 불렸으며 들머리 골짜기는 서재골이다.
(10) 한실{大谷}골
대곡리 대곡 마을이 있는 골짜기로 입구에는 대곡늪이 있고 남북으로 길고 넓게 장방형으로 뻗어 있는데 길이는 2,650m 이다. 골짜기 입구 서편에 하단 마을이 있고 중간에 한실 마을이 있다. 한실에서 골짜기가 두 갈래로 나누어져 동쪽은 대칭이고개로 연결되어 구진산에 닿았으며 북쪽 계곡에는 대곡소류지가 있다. 골짜기 입구에 지방도가 횡단하고 있고 한실 마을에서 대칭이고개를 지나 북실로 연결되는 임도가 개설되었다.
(11) 작은 골짜기들
① 마산리- 용소골 가말골 가마골 야시골{狐谷}
② 용산리- 안골(內谷)
③ 신전리- 영산골 창녕골
④ 성사리- 두리봉골
⑤ 아지리- 동박골
⑥ 반포리- 땅골, 담실골{淡谷} 막골{幕谷} 말골{馬谷} 담수골
⑦ 월하리- 범골 불미골 둑자골 늪부치골 도론골 월평골
5) 강과 시내
영남의 젖줄 낙동강과 함께 계성천 장실천 용산천 고곡천 등 시내들이 있는데 하천의 면적은 읍 전체 면적 10%를 차지하고 있다. 옛날에는 매년 홍수가 연달아 계속돼 그 해 농사의 흉풍(凶豊)이 날씨나 홍수에 좌우됐으나 지금은 댐의 건설로 수량 조절이 가능해 지고 제방 축조가 완성되어 수해가 많이 줄어들었다.
(1) 낙동강 ( 洛 東 江 )
우리 고장은 낙동강의 중.하류에 속하는 유역으로 시남리의 이이목나루에서 본 읍으로 강이 흘러 들어와 북에서 남진하던 흐름을 서쪽으로 틀고 월평마을을 지나 월하마을 부근에서 흐름이 느려져서 넓은 모래사장을 이루며 남쪽으로 굽이쳐 박진나루에 이르고 창아지에서 용산 거룬강나루까지 10리에 이르게 산을 깎아 아름다운 절벽을 이루는 개비리를 지난다.
우리 고장을 통과하는 강의 길이는,
시남입구 - 박진나루 6km 박진나루 - 창아지나루 5km
창아지나루 - 기강나루 4 km 거룬강나루 - 남지철교 4km
남지철교 - 본동 끝(남송교) 3km 총 연장 22km이다.
용산리 창나루(일명 거룬강나리)에서 낙동강 본류는 서부 경남 진주 쪽에서 흘러오는 남강(南江)과 합류되는데 옛날에는 홍수가 자주 있어 그 영향과 자연의 조화로 이곳에서부터 지류(支流)가 생겼는데 이 샛강은 도초산 남쪽편 산기슭을 따라 학계리와 마산리를 거쳐 계성천을 아우르며 도천면 송진리 앞 본류로 유입되었다. 또 다른 지류는 홍정마을에서 홍포마을 앞을 지나 동갯들 한가운데를 2km 가량 흘러 본동 옆에서 낙동강에 유입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류의 연장은 약 7km에 이른다. 그러나 마산리 근처에 강물이 흘렀던 흔적만이 뚜렷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샛강은 토사로 매몰되고 유역은 저습지로 변화되었다가 이제 들판으로 바뀌었다. 또한 이때 생긴 굴강이 남지리 본동 신남지교 동편에 아직도 남아 있다.
동갯들을 옥토로 만든 강은 동쪽으로 흘러 길곡면과 부곡면을 지나 밀양군과 창원시 사이를 흘러 부산 앞 바다로 유입된다.
하로(河路) 경사가 완만하고 토사가 쌓여 하상이 높아져 연안 토지가 강보다 낮아 여름철이면 홍수로 물이 넘쳐흘러 매년 막대한 수해를 입혀 사력지와 황무지를 만드니 이를 막기 위해 제방을 구축하게 되는 등 피해를 입지 않으려고 여러 가지 대책을 세웠다. 그래서 홍수량에 대한 측정과 제방 축조 계획을 추진해 왔다.
1960년대의 계획 홍수량은 남지리 본동 지점에서 남강 방수 무시 - 20,616m2/sec, 남강 방수 고려 18,425m2/sec 이다.16) 그리고 위험수위는 8m이며 평상 수위는 5m이었다. 수위의 관리에도 변동이 있어 최근까지는 평상 수위 5m, 경계 수위 8m, 위험 수위 10m, 비상 수위 11m 등으로 관리해 왔으나 지금은 평상 수위 6.5m, 경계 수위 8.5m, 위험 수위 10.5m, 비상 수위 11m이다.
1998년 8월 홍수 때 제왕담 수위가 10.5m로 월하리에서 칠현리에 이르는 일대와 남지리는 본동 남포동 일대는 물론 내수로 인하여 대신동 상남동까지 침수되는 피해를 입었다.
(2) 계성천 ( 桂城川 )
사진설명 ( 계성천 ( 桂城川 )
창녕읍 옥천리 화왕산에서 시작하여 계성면, 장마면을 지나 우리 읍 성사리 대성마을 대성교 북쪽에 흘러 들어와 영남들을 이루는데 신전리 상대포마을을 지나서는 영산면과 도천면의 경계를 만들며 흐른다. 이 내는 남지리 본동 한개{大浦} 남송교를 지나 도천면 송진리로 흘러가서 낙동강에 유입된다.
대성교 - 성사교 - 상대포교 - 남지교(고속도로) - 남송교까지 우리 고장 통과 길이는 6.2km이다. 수위 관리는 100년간 평균하여 최고 수위를 14.75m로 정하고 하수처리시설 공사를 진행중이다.
(3) 대(大) .소하천 ( 小河川 )
▼ 장실천 : 학계리 장실늪에서 홍정마을 뒤와 마산정 마을 앞을 흘러 계성천에 유입되는데 옛 낙동강의 샛강의 수로를 흐른다. 동갯들을 살찌운다. 연장은 2.5km이다.
▼ 龍山川 : 용산리 알개실 골짜기에서 시작되어 용산늪을 거친 내와 내곡에서 시작된 물이 합쳐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연장이 1.6km이다.
▼ 新田川 : 신전리 깊은 골짜기에서 시작하여 마을 한가운데를 흘러 신전늪을 이루고 계성천에 유입된다. 연장 3.3km이다.
▼ 成士川 : 성사리 성사고개 아래 소류지위에서 시작하여 마을을 지나 매전앞에서 관동 서잿골소류지 물을 합하여 신전늪에 이르고 계성천에 유입된다. 연장이 3km이다. ▼ 鼓谷川 : 시남리 장곡산 진골소류지 위에서 시작하여 수개리를 지난 물이 고곡리에서 세 갈래의 물을 합친다. 하나는 고곡리 들붓고개 아래 고곡저수지 위에서 시작하여 고곡마을 가운데를 흐르는 내이고 다른 하나는 아지고개 아래 아지소류지와 아지 앞산(우실등) 아지못 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오는 내, 또 다른 하나는 두곡 골짜기에서 흘러오는 내가 있는데 이 세 개의 내가 소재미근처에서 합쳐진다. 합쳐진 내가 고곡수리를 이룬 후 칠현리를 거쳐 창아지 마을 앞에서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연장이 8km이다.
▼ 大谷川 : 대곡리 한실 안 골짜기에서 시작하여 대곡 마을을 거쳐 대곡늪에 물을 모아 반포들을 살찌우며 칠현들을 지나 낙동강에 유입된다. 연장이 4.9km이다.
▼ 月上川 : 월하리 월상 뒷골짜기에서 시작하여 월상마을과 들 복판을 흘러 박진나루 남동쪽에서 낙동강에 유입된다. 연장이 1.8km이다.
6) 늪과 저수지 ( 貯水池)
우리 고장에는 늪과 못이 많았으나 관개용수(灌漑用水)의 이용도가 높아 늪과 못 주위의 저습지가 대부분 개간되었다. 또 농업 용수를 위한 저수지가 최근 많이 설치되어 군내에서 수리 안전답의 분포가 가장 높다. 『취산군지』에는 동보호(지금의 동포수리)와 학계호(지금의 학계리 늪)가 있다 하였다.
東步湖 在治南二十里 今爲水利
鶴桂湖 在治南二十五里
가장 큰 늪으로는 대곡늪과 신전늪이며 장실늪이나 용산늪은 상당히 넓었으나 논으로 개간되어 그 규모가 줄어들었다.
우리 고장에 있는 늪과 저수지는 다음과 같다.
◑ 늪
장실(학계)늪 용산늪 신전늪 대곡(하담)늪
◑ 소류지 . 저수지
홍정 아곡 허리골 성사 뒷골 서잿골 신전제1 신전제2 고개밑 절골 안골 고곡 수개 시남 청단 장곡 대곡 월하 험치골
4. 지질 (地質)
경상계가 80%를 피복(被覆)하고 있는 경상남도 지역의 지층의 한 지역인 우리 고장은 그 지질이 낙동통(洛東統)과 신라통(新羅統)으로 구분되는 경상계에 속한다. 주로 기저(基底)를 퇴적층 안산암질암(安山岩質岩) 및 화성암(火成巖)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중부의 낙동통과 신라통의 양대(兩帶)는 북북동으로 연장하며 동남으로 완만히 경사한다.우리 고장에 대한 구체적이며 전문적인 분석 자료는 없으나 대체적으로 남부와 동부는 충적토(沖積土)와 화강암계(花崗巖系) 사토(砂土)가 많고 북부는 점판암계(粘板巖系) 점토(粘土)와 자갈이 섞인 흙인 역토가 많아 토질이 척박하여 농사 짓기에 어려움이 많다.낙동강의 오랜 흐름과 퇴적으로 인하여 강변일대는 사질토양으로 월하 대곡 반포 칠현리 등지와 용산 학계 남지리에 이르는 평야지대는 돌이나 자갈을 구경할 수 없는 사질양토이다. 이 지역은 돌이 귀한 것이 특징이다. 시남 수개 성사 아지 신전 등에는 돌담이 있었지만 그 외 지역은 돌이 귀해 탱자 울타리나 바자 울타리가 보통이었다.『창녕군지』에 우리 고장의 지질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17)
남지리 마산리 학계리 용산리 등 남부와 동부의 평지는 주로 화강암계 사토이다. 구릉 산맥은 주로 점판암계 역토(礫土)이다. 사토의 성분은 운모 장석 석영을 주로 하고 이에 사철(砂鐵) 또는 점판암계 점토와 그 역석(礫石 : 자갈)을 함유하고 있다.북부와 중부인 신전리 성사리 칠현리 반포리 대곡리 월하리 고곡리 시남리 등의 지대는 점판암계 점토와 점판암계 역토이다.
5. 기상 ( 氣象 )
1) 기상 개황 ( 氣象 槪況 )
비닐하우스 온실재배가 성행하도록 비교적 온화한 겨울철이 있는 우리 고장은 낙동강을 끼고 있는 관계로 겨울에도 추운 날이 많이 없고 따뜻하여 온실재배 등 시설 영농이 발달되기에 좋은 기상 조건을 가지고 있다. 우리 군은 여름에는 31 - 35°C로 덥고. 겨울에는 영하 7 - 9°C 정도로 춥지만 우리 고장의 강변일대는 그보다 평균 온도가 높다. 근년 최고 온도는 87년에 31.9°C 였으며 최저는 87년에 -7.8°C 였다고 한다.대체적으로 1, 4, 5월과 10, 11, 12월에는 맑은 날수가 많아 월 25일 - 28일이며, 매년 230일 정도 맑은 날로 나타나 있다. 강과 늪지가 많아 안개 끼는 날이 매년 100여 일이 된다. 그러나 남부지방이기 때문에 눈이 오는 날은 연 7 - 8일로 극히 드물다.
낙동강의 결빙이 전에는 매년 있었으나 근년에는 지구의 온난화 또는 공해 때문인지 결빙되지 않고 넘어가는 해가 많다.서리는 보통 10월 중순에 내리기 시작하여 4월 초순을 전후하여 그친다.얼음이 얼기는 11월 중순에 시작되고 3월 중순이면 녹아 대체적으로 겨울이 늦게 시작되어 빨리 끝난다.
2) 강우량 ( 降雨量)
대체적으로 겨울은 가물고 6 - 8월에는 비가 잦다.
밭농사보다 논농사가 많은 우리 고장이므로 농가에서는 한발보다 홍수를 걱정해 왔으나 최근 제방이 곳곳에 축조되어 홍수피해가 감소하였다. 그리고 한발이 심한 해에는 다단계 양수를 하기에 힘을 쏟고 있다. 따라서 각종 수리시설의 확충으로 기상 재해에 어느 정도 대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해마다 강우량은 그 변화가 심하다. 창녕군의 평년 강우량은 연 1,000mm 내외임에 비하면 6월이 157.4mm이고 7월이 204mm, 8월이 188.9mm이어서 7, 8월에 집중호우가 많음을 알 수 있다.
『남지면지』에 의하면 을축년과 병자년에 큰 홍수가 났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폭우가 많이 쏟아진 해이기도 하였다.
3) 기상재해 ( 氣象 災害 )
기상 현상이 때때로 뜻하지 않은 이변을 일으켜 우리 생활을 위협하여 재해를 주기도 한다. 특히 농사를 짓는 우리 읍민들은 예로부터 기상 재해로 말미암아 풍년이 하루아침에 흉년으로 변하기도 하였다. 우리 고장은 범람하는 낙동강의 연변에 위치한 관계로 여러 기상 재해 중에서도 풍수해의 피해가 우심한 지역이었다.풍해(風害)와 수해(水害)는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가 허다하여 태풍이 통과하거나 장마기의 저기압과 함께 오는 호우(豪雨)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태풍은 일년에 대개 2 - 3개가 한반도에 상륙하여 피해를 주는데 일반적으로 2년에 한 번 정도는 피해를 입는 형편이다. 태풍의 발생 시기는 7 - 9월이 대부분이다. 1959년 9월 18일 새벽 4시경에 불어닥친 사라호 태풍은 초속 25m의 강풍을 동반하고 우리 고장을 통과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이때 경남도내에서만 3백여 명의 사상자와 함께 전국에서 10만 여명의 이재민을 냈다. 또 수만 동의 가옥 파괴와 농작물 피해도 엄청나 초유의 대재해로 기록되었다.18) 1960년 9월 19일에는 도내에 이틀간에 900여mm 폭우가 쏟아져 사망 . 실종이 도내 16명이나 났고, 1962년 11월 23일에는 폭풍이 불기도 하였으며, 1963년 6월 21일에도 태풍 실리가 지나가 낙동강이 범람하고 전국에서 200여명이 사망했으며, 1979년 8월 25일에도 태풍 쥬디가 내습하여 전국에서 95명이 사망하는 등 기상 재해로 인하여 피해가 많았다.저기압의 영향으로 일어나는 호우와 폭풍우는 이른 여름철부터 초가을까지 일어나는데 농작물에 큰 피해를 주며 특히 최근에는 비닐 온실에 치명적 피해를 주고 있다.장마와 홍수로 인한 수해는 해마다 2 - 3회 겪는 연례 행사 같은 재해였다. 1일 강우량 80mm 이상이면 홍수 피해가 예상되어 강변의 제방 축조가 오래 전부터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안동댐, 남강댐, 합천댐으로 인하여 그 피해는 줄어들었으나 계성천 주변의 배수시설의 확충이 더욱 필요해 지고 있다.1965년 7월 24일에 발생한 홍수로 인하여 남지리 시가지 전체가 물에 잠겼던 것이 최근의 가장 큰 홍수 피해였다.한해(旱害)는 대체로 8월에 많으나 2 - 4월 또는 6 - 9월 장기간에 걸쳐 계속되어 농작물의 피해가 크게 생기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최근 양수기의 보급으로 한발이 심할 때는 양수기의 의존이 높으며, 지하수 개발, 저수지나 소류지의 축조와 낙동강에서의 직접 취수 등이 더욱 원활하여 피해를 줄이고 있다. 최근의 한발은 1964년 4월 6일부터 8월까지, 1967년 4월부터 8월까지 있었던 것인데 1995년에도 가뭄이 오랫동안 계속되기도 하였다.1968년 3월 13일에는 폭설이 내리기도 하였다. 최근 1994년 2월 12일에는 23년만의 폭설로 교통이 두절되어 도내의 초.중.고교에 휴교령이 내리기도 하였다.우리 읍에 최근 발생한 주요 기상재해는 다음과 같았다.
호우와 홍수 |
1961. 6. 30 - 7. 1 -- 190mm내외의 호우 1962. 8. 24 - 8. 25 -- 200mm 이상의 강우
1965. 7. 22 -- 태풍과 호우 1969. 9. 14 - 9. 15 -- 600mm 강우
1970. 7. 13 - 18 -- 호우 1972. 9. 13 - 14 -- 호우
태풍 |
1961. 8. 3 - 8. 4 -- 헬렌호, 호우 1962. 8. 2 - 8. 3 -- 노라호, 강풍
1963. 6. 7 - 20 -- 실버리호, 호우 1965. 8. 24 -- 위니호, 강풍
1966. 8. 30 - 31 -- 베티호, 강풍 1968. 8. 10 -- 폴리호, 폭픙우
1979. 8. 25 -- 쥬디호, 강풍, 호우
자원 (資源)
1. 동물과 식물
1) 동물
사람과 가장 밀접한 가축인 소 말 돼지 개 닭 염소 오리 비둘기 거위 고양이 등 오래 전부터 키워 왔던 동물 외에 우리의 산야에는 많은 야생 동물이 서식하고 있었다. 우리 나라에 분포되어 있는 대부분의 동물들이 독립적인 지역을 이루어 분포하지 않으므로 우리 고장에서 발견되거나 서식하는 동물 중에서 타지방과 대동소이하여 별다른 특징이 없다. 낙동강과 계성천 등 하천과 대곡늪과 신전늪 등 조류(鳥類)의 먹이가 풍부하여 겨울철이면 철새들이 많이 날아 왔으나 현재는 많이 줄어들어 조류 분포에도 별다른 특징이 없다. 지금도 철새들이 도래하고 있으나 각종 공해와 불법 포획으로 인하여 그 수가 현저히 감소하였다.최근 병충해 방제를 위한 농약 살포와 산지 개발 등으로 자연 환경이 오염되어 서식 동물의 단순화가 가속되어 감소를 가져오고 있다.서식을 했거나 지금도 서식하는 동물의 분포는 다음과 같다.
◑ 포유류(哺乳類)
너구리 늑대 다람쥐 노루 두더지 들쥐 산돼지 산토끼 사슴 여우 오소리 고라니 족제비 쥐 박쥐
◑ 조류(鳥類)
참새 까마귀 까치 꿩 부엉이 촉새 종다리 솔개 측부엉이 멧비둘기 제비 뻐꾸기 꾀꼬리 고니 왜가리 갈가마귀 물오리
◑ 양서류(兩棲類)
구렁이 능구렁이 독사 개구리 두꺼비 자라 도마뱀 실뱀 무지치 도룡농 맹꽁이 청개구리 무당개구리
◑ 기타 곤충류
나비류 벌류 잠자리류 나방류 개미류 진디물류 깍지벌레류 메뚜기 여치 귀뚜라미 노린재류 거미류
크고 작은 산이 형성되어 있으므로 남방형 동물의 안식처가 되는데, 포유류와 조류도 풍부하였으며 기후가 온난한 관계로 각종 곤충류와 함께 농작물과 산림에 피해를 입히는 해충류도 대부분 서식하고 있다.
2) 식물
우리 고장은 난대성(暖帶性) 식물과 온대성 식물의 분포의 경계를 이루는 북위 35도 부근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두 식물들이 함께 분포하고 있다.특이한 식물은 조사된 적이 없으며, 인근 지방의 것과 다를 바 없다.임산자원(林産資源)은 많지를 않다. 북부는 산지가 있으나 높은 산이 없고, 농지로 개간된 야산이 많아 임목이 적어 목재의 생산은 적은 편이다.산림 수종(樹種)은 소나무가 많은데 재래종 육송 외에 리기다 소나무와 해송도 있으며, 대나무 밤나무 같은 경제 수종도 있으나 대부분은 경제성이 뒤떨어지는 오리나무 도토리나무 등이다.해마다 상당량의 식목으로 산이 푸르고 연료 채취가 중지되어 머지 않아 임목의 생산이 증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 고장 전역에서 분포하는 식물로서 야산과 들에서 자생하거나 심거나 재배되어 쉽게 관찰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 침엽수(針葉樹)
육송 해송 리기다소나무 낙엽송 오엽송 잣나무 등 각종 소나무류 측백나무 히말리야시이다 향나무류
◑ 활엽수(闊葉樹) . 과수(果樹)
가시나무 느릅나무 느티나무 상수리나무 닥나무 사방오리나무 산오리나무 개옻나무 등 옻나무류 버드나무(미류) 이태리포풀러 양버들 수양버들 땅버들 갯버들 가죽나무 오동나무 홰나무 감나무 은행나무 밤나무 참나무 뽕나무 플라타너스 단감나무 복숭아나무 사과나무 대추나무 살구나무 매실나무 호도나무 자두나무 은사시나무 아카시아 싸리 등 일반 수목들, 모과류 딸기나무 왕벚나무 백도 복사 앵두나무류 머루 포도 등의 과실수 오죽 송대 왕대 등의 각종 대나무류
◑ 화훼류(花卉類) 및 관상수(觀賞樹)
영산홍 철쭉 진달래류 후박나무 라일락 종려 당종려 금목서 은목서 호랑이발톱 자목련과 목련류 꽝꽝나무 세열단풍나무외 단풍나무류 황금측백 편백 등의 측백류 둥근 향나무 후피향나무 가이스가향나무 등의 향나무류 천리향 박태기나무 회양목 석화양목 회산나무 사철나무 무궁화 동백나무류 위성류(渭城類) 팔손이 은행 주목 벽오동
◑ 초생식물(草生植物 : 야산 분포)
자운영 토끼풀(클로버) 질경이 엉겅퀴 씀바귀 고들빼기 고비 각종 고사리 젖가락풀 피 별꽃 벼룩나물 게모시풀 쐐기풀 꽃다지 갓냉이 가는기린초 둥굴딸기 민들레 꿩밥 대시풀 산국 개국화 칡 갈키등굴 이외 잡초류 수초류
3) 어류
수산자원은 낙동강을 끼고 있어 과거에는 풍부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공장 폐수와 생활 오수로 낙동강의 오염이 급격히 심화되어 많은 고기가 폐사하는 사례가 늘고 있어 수질 오염을 막아야 하고 수산 자원의 보호를 위한 정책적이고도 근본적인 대책이 요망되고 있다. 강에서 많이 잡히는 고기{江漁}는 잉어 붕어를 비롯하여 숭어 장어 웅어 등 그 종류도 다양하였다. 특히 피라미 정거리(빙어) 같은 비린내가 나지 않는 어종들도 많았다.최근 양식어업(養殖漁業)이 시도되어 좋은 성과를 얻고 있으며 민물 생선회가 우리 고장의 특미(特味)로 이름나 있다.계성천과 대곡늪 신전늪 등 규모가 큰 저수지가 있어 담수어(淡水魚)의 서식은 다양하여 낚시꾼의 발길도 잦았다. 대표적인 어류로는 미꾸라지 붕어 모래무지 피라미 새우 잉어등이 있는데 어업을 주업으로 삼고 있는 세대는 10여 년 전부터 사라져 버려 어획고는 거의 없는 실정이며 최근 양식 어업을 하는 어가(漁家)가 생겨나고 있다.
2. 부존자원 ( 賦 存 資 源 )
땅속에 귀한 광물이 많아 광산이 많은 곳도 있으나 우리 고장에는 현재 채광되는 특별한 광물이 없다.형석(螢石 : Flourite)광산인 남지광산이 우리 고장에 있었다 하나 폐광되고 없어 채굴량이나 규모 등은 알려지고 있지 않다.19) 또 금광이 용산리 아곡에 있어 1930년대에 금을 캤다고 하나 채금량이 얼마 되지 않아 채산성이 맞지 않아 폐광되었다고 한다. 광구가 20여m 잔존하였는데 지금은 많이 무너져 굴이 막혔으며 동북 골짜기에 금장골이란 이름만이 남아 있다.현재 우리 고장에는 부존자원으로 들 수 있는 자원은 빈약하여 조사 자료는 없다.비금속 광물로 건축재로 쓰이는 모래와 자갈이 소량 생산되었으나 최근 채취가 중지되었고, 온돌판 석재(구들장)로 쓰인 판상(板狀)점판암 패암(貝岩)도 소량 산출되기도 했었다. 또 마산리 당포수리 일대와 계성천변 상대포 아래에서 도자기 재료인 질 좋은 백토(白土)가 생산되어 수년 간 채취하기도 하였다.
3. 관광자원 ( 觀 光 資 源 )
1) 유명 산물 (有名 産物 )
한 지방을 대표하는 특산물이나 널리 알려진 유명 산물은 그 지방 산업의 흥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한 많이 생산되던 산물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명맥이 끊기거나 겨우 그 이름만 유지되기도 한다.우리 고장의 특산물은 주로 밭에서 생산되는 것이 많았다. 해방 전후에는 땅콩을 위시해서 쌀과 보리쌀 참깨 붉은 고추 무 배추 참외 담배 면화 삼베 누에고치 대두(콩) 홍도(복숭아) 등이 꼽혔다.최근까지 남지땅콩의 명예는 살아 있어 우리 고장에서 땅콩의 생산량이 점점 줄어들고 있으나 그 가공공장은 늘어나면서 전국의 땅콩이 일단 이곳으로 모이는 집산지로 발달하여 남지에서 껍질을 깐 후 선별(選別)하는 등 1차 조제 포장되어 전국으로 출하되고 있다.쌀은 미질이 좋아서, 참깨는 기름이 많이 나와서, 붉은 고추는 색깔이 곱고 달고도 매워서 여전히 인기가 높아 장날이면 무 배추와 함께 농산물을 구입하기 위해 도시민들이 모여들고 있다. 그러나 담배 면화 누에고치와 삼베 등은 시대적 기호도 달라지고 재배 환경도 달라져서 그 종적이 사라지고 없으며, 다만 누에고치 생산은 10여 년 전까지 대량 생산되었으나 이것마저 중국산에 밀려 사양길에 접어들어 산을 개간하여 만들었던 뽕밭이 묵혀져 있는 실정이다. 복숭아의 생산도 많았으나 점차 사과나 단감이 재배되면서 그 면적도 줄어들었고, 우리 고장에서 생산되는 사과 맛이 상큼하고 단맛이 많아 인기가 높다.대두는 메주콩도 많이 생산되지만 8월경 수확하는 조생종인 "유월태"는 단경기(端境期)에 출하되어 콩나물용으로 크게 시중에 인기를 끌고 있다.최근 남지의 특산물이라면 단연 비닐 하우스에 재배되어 사시사철 공급되고 있는 오이와 풋고추, 수박일 것이다. 농협 공판장에서 직접 소비자에게 계통 출하되는데 우리 고장의 대표 산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할 것이다. 아울러 우리 고장에서 양식되는 잉어 향어 등의 생선회도 별미로서 외지인을 불러모으고 있음도 강마을의 운치와 함께 관광자원으로서 그 부가 가치가 높다 하겠다.
2) 자연적 자원
자연 경관이 아름답고 역사적인 향취가 있는 명승지나 관광할만한 곳을 어느 곳이나 몇 곳씩 갖고 있다. 역시 우리 고장도 이 고장을 흐르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제왕담과 남지철교, 백사장, 오여정, 구진산성과 고곡산성, 개비리와 말무덤, 박진나루와 전승비 등 많은 자연적인 관광자원이 있다. 남지 팔경을 흔히 다음과 같이 꼽았다.20)
洛江七里 岐江斷崖 上浦歸帆 白沙落鴻
道草慕雲 靈南沃土 東步滿月 栗林淸風
① 낙강칠리 - 낙동강 칠백리의 아름다운 경관은 남지에 와서 절정에 달한다. 시남리의 오여정에서부터 대곡리 앞의 절벽, 창아지-용산에 이르는 개비리 절벽, 합강정, 용화산 구구봉, 제왕담, 우강의 창암까지 남지에는 낙동강의 정수(精髓)가 모여 있다. ② 기강단애 - 기강은 남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지점이니 용산리에서 창아지까지 뻗은 절벽은 바로 절경이다. 특히 절벽의 녹음, 가을 단풍은 합강정과 함께 아름답기로 소문이 났다.
③ 상포귀범 - 상포는 곧 웃개이니 예전에는 우강쪽에서 배가 올라오면 강이 깊어 멀리서 보면 돛단배의 돛 끝만 가물가물 보였다고 한다. 지는 해 석양을 돛폭에 가득 안고 돌아오는 배에는 고기도 실렸고, 하류쪽 상품들도 실려 있었다.
④ 백사낙홍 - 강가 흰모래 사장은 넓고 넓으며 겨울이면 무더기로 내려앉는 기러기 떼의 군무(群舞)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⑤ 도초모운 - 도초는 곧 도사면의 진산격인 도초산이니 남쪽에서 보면 완만하고 부드러우나 북쪽에서 보면 험산준령이다. 저녁 노을이 산봉우리에 걸리면 마산리에서 용산리에 이르는 강마을의 올망졸망 초가집 집집마다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올라 구름을 이루며 산허리를 감으니 풍요롭고 평화로운 정경이 펼쳐진다.
⑥ 영남옥토 - 영남들은 바로 신전과 성사리 들판이다. 상대포 둘, 또는 황새목 높은 산허리에 올라 바라보면 도천 송진, 영산 월령, 장마 유리 땅이 모두 우리 남지들이요 기름지고 광대한 우리 전답이라 가을이면 황금 물결이 넘실대 풍년가가 드높다.
⑦ 동보만월 - 동보호는 지금은 개간되어 동갯들이 되고 말았지만 낙동강과 어울려 보름달이 둥실 하늘 높이 뜨면 모여 든 시인 묵객들이 호수에 뜨는 달을 바라보며 시를 읊었다 한다.
⑧ 율림청풍 - 어디 밤나무 숲이 있었나 지금 사람들이야 모르겠지만 지금의 상남, 대신동 일대는 밤나무 밭이라 여름 한철 그 그늘이 좋았고 강 쪽에서 불어오는 그 바람 냄새는 향기로와 바로 신선들이 마시는 청풍이었더란다. 해방 후 한참까지 밤나무 고목들이 그곳에 많았다.
자연적인 자원으로서 경치가 좋은데 필경 사람이 많이 모여들어 그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도록 사람들이 정자를 짓거나 인위적인 손질을 더하기도 한다. 우리 고장에서 관광지로 개발 가능하거나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은 다음과 같다.
(1) 오여정 ( 吾與亭 )과 이이목나루
시남리 이이목나루는 6.25전쟁 때 인민군이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기 위해 최초로 도강(渡江)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의령군 낙서면과 통하는 이 나루는 우리 고장의
제일 북쪽에 있는데 시남마을에서 고개를 넘으면 강 건너 넓은 백사장과 함께 들이 펼쳐져 있어 전망이 아주 좋다.
나루터 왼쪽 절벽에 있는 재실이 바로 진사 양훤(楊暄)이 만년을 유유자적 보냈다는 오여정(吾與亭)이다. 오여정은 낙동강 푸른 물결과 여름이면 빨갛게 꽃피는 절벽의 백일홍 숲이 아름답다. 여름 백일홍의 붉은 꽃 무리와 앞뜰의 은행나무 등의 경치는 한 폭의 수채화라 할 것이다.
(2) 남지철교와 제왕담 ( 帝王潭 )
남지철교는 마구국도를 연결하는 340m의 다리로 전국에서 보기 좋기로 유명한 철교이다.
함안쪽 용화산(龍華山) 절벽은 봄 여름 가을 푸른 잡목 숲과 단풍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며 남지공원으로 불린다. 철교 동편 바위 위에는 우리 고장 출신 거유(巨儒) 조간송(趙澗松)이 심은 은행나무가 거구를 자랑하며 산책하는 사람들을 불러모은다.
제왕담은 웃개나루를 건너 있는 절벽으로 지금은 마산 광역 상수도 취수장이 들어섰는데
강물 이 그 아래 흘러 그 깊이가 수 백 길이나 되어 알 수 없다고 한다. 절벽에 괴암괴석이 즐비하여 강물 위에 배를 띄우고 뱃놀이를 하며 올려다보면 가슴이 서늘해지며 철마다 바뀌는 모습과 함께 강물 깊은 속에 산다는 용왕님의 이야기는 아이들의 상상력을 키우기도 한다. 강 하류 쪽에 있는 작은 제왕담과 함께 잉어를 낚는 낚시터로 유명하였으나 지금은 강물의 오염으로 낚시꾼의 발길이 끊어졌다. 그러나 새 다리인 남지대교가 이곳 하류에 가설 개통되면서 새로운 풍물을 제공하고 있는데 철교와 제왕담을 둘러보고 백사장을 바라보며 잉어회 한 접시를 먹는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일 것이다.
강과 함께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모래뜸질이었다. 한없이 넓게 펼쳐진 백사장이 남강과 낙동강이 합쳐지는 용산리 기강에서부터 남지리 본동 끝 송진들판까지 십 여리에 광대하게 있었다. 여기에 여름이면 모래뜸질이 크게 성행하였다. 모래뜸질은 햇볕에 달아 뜨끈뜨근 해진 모래에 온 몸을 파묻고 한 두 시간씩 지내고 나면 신경통을 비롯하여 각종 만성 질병이 신기하게도 완치되기도 하였기 때문이었다.
(3) 박진나루와 6.25 전승비
월하리 월상의 박진나루는 역사성이 깊은 곳이다. 가야 때부터 나루터였을 뿐만 아니라 신라 때는 경주와 진주를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이기도 하였으며, 임진왜란 때는 곽망우당의 의병군이 강목을 지키며 왜병을 친 곳이기도 하여 역사성이 있는 사적지이기도 하다. 또한 6.25때 치열한 전투가 이 나루 일대에서 한달 이상 벌어져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결국 낙동강을 사수하게 됨에 따라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가 되어 전승비가 월상마을 앞산에 세워져 후세의 역사교육에 한몫을 더하고 있다. 또 교량 가설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새로운 경치를 제공할 것이다.
(4) 개비리 절경과 말무덤
아지리 창아지 마을에서 시작하여 남강과의 합류지점인 용산리 기강나루까지 낙동강 동안(東岸)은 험준한 절벽의 연속이다. 절벽 중턱에 난 길은 꼬불꼬불 험하여 겨우 개가 다녀 길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십 여리 되는 절벽의 길은 제법 넓게 닦여져 있어 여름 한 철 피서를 위해 강바람을 쏘이며 보낼만한 곳이다. 낚시터도 여러 곳 있었다. 또 양수장 북쪽 강과 맞닿은 절벽에는 여러 가닥의 밧줄이 찍힌 흔적이 남아 있어 소풍을 온 아이들이 신기해하기도 한다.
이 개비리 절벽이 있는 산 이름이 마분산(馬墳山)이다. 산 위에 있는 큰 고분이 말무덤이라 전하기에 붙여진 것이다. 임진왜란 때 첫 전승지인 용산리 거룬강나루{岐江津}가 지척이어서, 의병군이 이 산의 절벽 개비리에 은신 매복하여 왜병과 격전을 벌려 승리를 거두었는데 공을 세운 말이 죽자 그 용맹을 기리기 위해 말을 묻어주었다는 말무덤이 이 산 정상에 있기 때문이다. 고분은 잡목 숲에 가려져 있으나 낚시와 등산 코스로 권할만한 곳이다.
또한 창나루에는 월주(月柱)놀이가 음력 칠월 보름 백중날에 있어 가근방 사람들이 창나루에 모여들었다 한다. 창나루에서 합강정 쪽으로 바라보면 마침 떠오르는 보름달의 달그림자가 강물이 비치는데 그것이 마치 달 기둥처럼 보여 월주라고 사람들이 부르며 그 절경을 감상하고 보름밤을 즐겼다 한다.
(5) 上大浦둘
신전리 성사리 일대에 있는 영남수리제방을 흔히 상대포 마을 근처에 있다하여 상대포둘21)이라 불린다. 영남수리 양.배수장과 함께 펼쳐져 있는 수 십만 평의 옥답 영남들을 보호하기 위해 축조된 제방의 잔디밭이 한없이 넓고 부드러워 많은 사람들이 찾아든다.
특히 이 제방은 봄과 가을 학생들의 소풍지로 인기가 높다. 영산면 송진리에서 장마면 동정리까지 수 십리 길고도 넓게 펼쳐진 제방의 잔디밭은 푹신하고도 완만해서 아이들이 멋대로 뛰고 뒹굴어도 다칠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누워 하늘을 보며 풀 냄새에 흠뻑 젖으면 도시의 공해로 찌든 오장육부가 맑아 질 것이다.
1. 인구의 증감추세
1) 구지 ( 舊誌 )의 인구
『昌寧縣誌』와 『靈山縣誌』의 기록(1832년간)을 보면 현의 전체 인구와 호수가 있을 뿐 우리 고장의 인구에 관한 기록은 전연 없다. 창녕현은 원호(元戶)가 5,921호이며 인구는 32,791명이라 하였고,22) 영산현은 신묘년(1831년) 때 원호가 3,526호이며 인구는 17,423명이라 하였다.23)『鷲山郡誌』에는 우리 고장의 인구가 나와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호구(戶口) 인구 신증(新增)」란 경오년(1930년)에 남곡면의 호수는 2,048호, 인구는 남자 4,900명 여자 4,731명 계 9,631명24)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 고장의 인구 추세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이다. 왜정 시에 발간된 『昌寧郡地誌』(1928년간 : 창녕군)의 기록도 군 전체의 인구만 나와 있어 아쉬움이 많다. 이때의 인구 밀도가 171명이라 했으므로 미루어 보면 약 9,500여명이 되므로 『취산군지』의 기록과 근접하고 있다. 이때 창녕군 전체 인구가 90,714명의 10.47%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15개면 중 가장 인구가 많았다.(당시 창녕읍은 창녕면과 창락면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지방에서 간행된 각종 현지나 지지의 기록이 군 전체에 치우쳐 일개 면의 숫자에 소홀했던 반면 정조 때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다행스럽게도 면별 인구가 상세히 나와 있다.25)
◈ 남곡면(南谷面)
호수 526호 인구 남자 1,169명 여자 1,785명 합계 2,954명
◈ 도사면(道沙面)
호수 535호 인구 남자 1,249명 여자 1,249명 합계 2,498명
위 기록에 의해 2개 면의 호수는 1,061호 인구는 5,452명임을 파악할 수 있는데 1930년대에 9,631명이었으니 정조시대의 인구보다 무려 4,179명이나 증가하였다. 급격한 인구 증가는 해방 후 까지 계속되었는데 1959년 말에는 18,402명으로 1930년대보다 배가 불어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30년만에 8,770명이 증가한 것이다.
2) 1930年代의 인구추세
왜정(倭政) 35년간 식민지 착취시절 인구조사는 세금부과를 위한 기초자료 이기도 하였는데 5년마다 조선 국세조사라는 미명아래 실시되었다. 요즘 5년 내지 10년에 실시하는 인구센서스와 비슷한 조사이기도 하였지만 식민지 수탈을 위한 조사였다. 조선총독부에서 발간된 『조선국세조사보고』26)에 의하면 1930년부터 5년 간격으로 조사된 것으로 상기의 구지 기록이나 『창녕군지지』와는 달리 상세한 면별 인구와 연령별 본적별 배우관계별 직업별 통계 등도 조사되어 현대적 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 조사서에 의하면 1925년 우리 읍은 2,043세대 10,632명(남 5,419명, 여 5,193명)으로 창녕군 총 인구 95,583명의 11.1%였는데, 5년 후 1930년에는 387명이 증가한 11,019명, 1935년에는 1,819명이 증가한 12,838명이었으며, 해방되던 해인 1945년에는 14,078명(남 6,856명 여 7,222명)으로 1925년에 비하면 3,446명이 증가하였다.
이때 일본인들이 남지로 이주해와서 많이 살게 되었는데 1925년에 창녕군에는 일본인이 681명, 중국인(支那人)27) 등 외국인이 263명이라 조사되고 있다. 1930년에는 군 전체 일본인이 604명인데 그중 창녕면에 186명이 거주하고 남곡면(당시 면이름)에 203명(남 103명 여 100명)이었고 중국인이 7명(남 7명)이어서 군내에서 일본인이 우리 고장에 가장 많이 살았음을 나타내고 있다. 1935년에는 군 전체 일본인이 크게 불어나 741명인데 그 중 창녕면이 228명인데 남곡면은 283명(남158명 여 125명)이었고 중국인이 13명(남 12명 여 1명)이었다.
3) 현대 인구 추세
인구의 급증 추세는 1960년대에 계속되어 1961년에 2만명을 넘어선 20,201명이 되었고 1960년대에 계속 2만명을 넘어서 1964년에는 최고 21,902명이었다. 이렇게 인구가 불어나자 읍 승격의 요건이 갖추어져 1963년에 읍으로 승격된 것이다. 인구 증가 추세는 1964년 21,902명(남 11,025명, 여 10,877명)을 정점으로 내림세로 돌아서 1971년 10월 조사시에는 20,190명(남 10,095명, 여 10095명)으로 2만명 선을 위협하기 시작하여 1980년에는 17,324명(남 8,595명, 여 8,729명)으로 10년 사이에 2,866명이나 감소되었다. 1989년에는 다시 줄어 15,053명이니 또 10년 사이에 2,271명이 줄어들어 최고 인구수 21,902명에 비교하면 6,849명이나 감소되어 해방 전후의 규모로 줄어들었다.비록 읍 전체의 인구는 줄어들었으나 남지리와 인근 마을은 별 변동이 없거나 늘었고, 그 이외의 리동 인구는 감소하여 농촌 인구의 도시 진출현상이 심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감소추세는 1990년대까지 계속되어 1990년에는 3,850세대에 12,682명이었다. 그러나 인구 감소 추세가 멈칫하여져 1993년 인구는 13,789명으로 90년보다 1,107명이 증가하여 아파트 건립등 남지리 일대의 인구가 점점 불어남을 반영하고 있었으나 1996년에는 남자 6,317명, 여자 6,592명 계 12,909명으로 줄어들었다.1925년 인구 10,632명을 100% 기준으로 하여 그 지수를 보면 30년 후인 1965년의 인구가 21,813명으로 205.2%가 증가했다. 그러나 우리 읍의 최고 인구수인 1964년의 21,902명을 100으로 기준 하여 보면 1980년에는 17,324명으로 79.9%로 급감 하기 시작하여 1993년에는 읍 인구가 13,389명이니 1964년보다 61.1%에 불과해 인구 증가 추세가 뚝 떨어졌다. 연도별 증감 추세를 보면 1959 - 1960년간에 1,803명으로 증가를 계속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때는 6.25동란으로 출산율이 저조했던 때를 만회하려는 듯 출산율이 급증했음을 반증하고 있다. 그러나 1960년 중반이후부터 시작된 가족계획사업의 영향으로 출산율이 점점 낮아졌음도 알 수 있다. 호적신고 상황을 보면 1995년에는 출생 170명, 사망 142명, 혼인 218건, 이혼 48건, 1996년도 출생 163명, 사망 130명, 혼인은 223건, 이혼은 28건, 1997년에는 출생 140명, 사망 151명, 혼인 156건, 출생이나 사망은 제자리 또는 줄어들었지만 이혼은 48건으로 점차 느는 추세에 있다.1996년도 인구 이동 상황을 보면 주민등록 전입자가 남 526명 여 526명 계 1,052명으로 전출자는 남 639명 여 633명 계 1,272명이었다. 1990년 11월 1일, 전국 인구 및 주택총조사가 실시되었는데 그때의 인구는 남자 6,166명 여자 6,517명 계 12,683명으로 상당히 인구가 줄어들고 있었다.28) 1997년 말 현재 우리 읍의 인구는 4.260세대, 12,972명으로 남자 6,311명 여자 6,661명인데 이중 고곡지구의 인구는 705세대, 2,030명이었다. 1998년 12월 31일 현재 주민등록 세대 및 인구를 보면 전년도보다 세대수는 33세대가 증가한 4,293세대이며, 인구수는 228명이 감소하여 12,744명(남 6,193명, 여 6,551명)으로 핵가족화 하는 경향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다.
인구 및 세대수의 증감상황과 추세
연도 |
창녕군인구수 |
인 구 |
세 대 수 |
세대당인구 |
km2당 인구밀도 | ||||
계 |
남 |
여 |
계 |
농가 |
비농가 | ||||
1925 1927 1930 1935 1940 1945 1949 |
95,583 90,714 97,924 103,503 96,454 103,345 134,711 |
10,632 9,631 11,019 12,838 - 14,078 14,122 |
5,439 4,900 5,541 6,608 - 6,856 - |
5,193 4,731 5,478 6,230 - 7,222 - |
2,043 2,048 2,113 2,411 - 2,561 - |
|
|
|
|
1955 1959 1960 1961 1962 1963 1964 1965 |
123,595 137,865 148,091 145,751 150,411 157,561 159,802 159,865 |
12,955 18,402 20,205 20,201 20,772 21,593 21,902 21,813 |
- 9,074 10,075 9,952 10,335 10,850 11,025 11,007 |
- 9,328 10,130 10,249 10,437 10,743 10,877 10,806 |
|
|
|
|
233.1 279.3 364.0 363.9 374.2 389.0 394.6 393.0 |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1973 1974 1975 |
156,744 156,343 151,867 미실시 146,757 143,754 145,087 143,929 141,691 137,805 |
21,364 21,541 21,364 - 20,505 20,190 20,357 20,503 20,579 19,587 |
10,727 10,904 10,855 - 10,160 10,095 10,194 10,260 10,334 9,804 |
10,637 10,707 10,509 - 10,345 10,095 10,163 10,243 10,263 9,783 |
- - - - - 3,529 3,516 3,559 3,723 3,759 |
- - - - - 2,485 2,414 2,403 - 2,570 |
- - - - - 1,044 1,102 1,156 - 1,189 |
- - - - - 5.7 5.8 5.8 5.5 5.2 |
384.9 388.1 384.9 - 369.4 366.0 372.3 375.0 375.0 355.4 |
1976 1977 1978 1979 1980 1981 1982 1983 1984 |
136,276 132,963 128,513 124,561 115,850 115,746 115,701 114,376 112,837 |
19,261 - 18,665 18,345 17,324 18,435 18,177 17,793 17,349 |
9,538 - 9,227 9,018 8,595 9,177 9,093 8,907 8,679 |
9,723 - 9,438 9,327 8,729 9,258 9,084 8,886 8,670 |
3,711 - 3,617 3,529 3,788 3,759 3,803 3,771 3,729 |
2,330 - 2,363 2,334 2,452 2,452 - - - |
- - - - 1,336 1,307 - - - |
5.2 - 5.2 5.2 4.6 4.9 4.8 4.7 4.7 |
349.5 - 335.8 330.1 312.1 332.1 327.0 320.1 312.2 |
1985 1986 1987 1988 1989 1990 1991 1992 1993 |
99,598 96,183 92,786 90,946 89,653 84,166 87,289 85,225 83,529 |
- 14,109 13,888 14,357 15,053 12,682 14,306 14,170 13,789 |
- 7,002 6,871 7,050 7,431 6,171 7,031 6,981 6,760 |
- 7,105 7,017 7,307 7,622 6,511 7,275 7,189 7,029 |
- 3,712 3,664 3,725 3,821 3,850 3,990 4,030 4,065 |
- - - - - 1,804 - - - |
- - - - - 2,046 - - - |
- 3.8 3.8 3.9 3.9 3.3 3.6 3.5 3.4 |
- 255.2 249.9 249.9 270.9 229.0 258.9 256.3 249.0 |
1994 1995 1996 1997 1998 |
81,509 79,307 78,307 77,124
|
13,451 13,115 12,909 12,984 12,744 |
6,574 6,425 6,317 6,320 6,193 |
6,877 6,690 6,592 6,664 6,551 |
4,074 4,076 4,103 4,271 4,293 |
- - 1,449 2,230
|
- - 2,654 2,041
|
3.3 3.2 3.1 3.0 2.9 |
243.3 236.9 233.7 234.8
|
* 90년도까지 상주인구조사결과, 91년부터 주민등록인구임
2. 인구분포와 인구밀도
1) 리동별 인구
1998년 12월 31일 현재 리동별 인구(주민등록 인구) 분포는 다음 표와 같다.
남지리가 가장 인구가 많고 농촌지역으로 갈수록 인구 분포가 낮다. 이를 보면 같은 읍 지역이더라도 농촌 마을에서 읍 소재지로 인구 이동이 많이 있었다고 할 것이다. 특히 동포리와 대신리는 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에 아파트와 연립주택이 건립되는 바람에 단기간에 큰 폭으로 인구가 증가하여 읍 전체 인구중 18%(2,303명)를 차지하고 있으며 남포리가 13%인 1,609명이 살고 있다. 남지리 외 마을은 인구 감소추세가 멈추지 않고 소폭 감소하거나 변동이 없다.
이동별 세대수 및 인구
행 정 구역별 |
세대수 |
인 구 수 |
행 정 구역별 |
세대수 |
인 구 수 | ||||
계 |
남 |
여 |
계 |
남 |
여 | ||||
남지읍
본 동 동 포 남 포 서 동 대 신 상 남 신 남 마 산 홍 포 당 포 학 계 홍 정 명 지 옥 산 용 산 신 전 상대포 영아지 |
4,293
357 719 541 266 344 205 81 110 117 29 42 117 147 80 79 75 30 14 |
12,744
1,070 2,303 1,699 815 1,071 677 253 332 368 67 120 401 466 257 231 201 86 26 |
6,193
486 1,150 812 399 510 335 121 178 186 34 54 203 227 124 109 93 41 8 |
6,551
584 1,153 887 416 561 342 132 154 182 33 66 198 239 133 122 108 45 18 |
성 사 관 동 매 전 학 암 대 성 아 지 창아지 고 곡 두 곡 수 개 시 남 청 단 칠 현 반 포 담 곡 마 근 대 곡 월 상 월 하 월 평 |
77 49 44 40 24 35 32 80 44 78 41 23 71 49 44 40 68 56 29 16 |
156 99 94 77 56 73 74 231 99 199 109 44 176 154 95 134 175 153 68 35 |
75 40 44 35 24 38 34 122 49 89 57 19 90 79 48 71 86 75 34 14 |
81 59 50 42 32 35 40 109 50 110 52 25 86 75 47 63 89 78 34 21 |
(자료 : 남지읍 1999)
2) 외국인 인구
외국인의 거주 분포를 보면 1927년 창녕군내에는 일본인이 597명, 기타 외국인(주로 중국인)이 10호에 28명으로 조사되었는데 창녕에는 주로 행정 관료들이었던 반면 우리 고장의 외국인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는 일인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 퇴거하고 외국인은 1명도 없다고 조사되었다.
1996년 말 현재 외국인은 2세대 남 2명 여 1명 계 3명이었고, 97년말 현재는 11세대, 12명(남 9명, 여 3명)이 거주하고 있다.
3) 인구밀도의 변화
창녕군의 인구밀도가 1993년에 157명, 97년 145명인데 비하여 우리 읍은 1960년에 395명 선을 최고로 1980년에는 312명, 1993년에는 249명, 97년 234명으로 매년 줄어들고 있으나 군 전체 인구밀도에 비하여 상당히 조밀(稠密)한 편이다.1927년 군 전체 인구밀도가 171명이었을 때 우리 읍은 173, 5명이었고, 1960년에는 364명으로 높아졌다. 우리 읍의 최고 인구였던 1964년에는 395명으로 읍이 생긴 이후 최고였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369명으로 하강하였으며, 1981년에는 332명, 1990년에는 229명으로 점점 낮아 졌으나 군 인구밀도보다는 높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참고로 전국의 인구밀도를 볼 것 같으면 1987년에는 419.5명이었고 1994년에는 443.6명이었는데 우리 군이나 우리 고장은 전국 평균 밀도보다 낮은 현상을 보이고 있다. 1983년말 서울의 인구밀도는 13,836명, 부산이 7,507명, 목포가 6,472명, 인근 마산시가 5,822명이었으니 농촌의 인구가 도시로 얼마나 전출하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1997년에는 우리 고장의 인구밀도는 하강곡선이 멈추어져 234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1997년 말 현재 인구는 남자 6,320명 여자 6,664명 계 12,984명이었다. 주민등록에 의한 인구 이동 상황을 보면 1997년 전입이 1,266(남 607명, 여 659명)이며 전출이 1,189명(남 575명 여 614명)으로 이동 인구가 많았다. 호적에 의한 인구 동태를 보면 출생이 140명, 사망이 156명, 혼인이 162명, 이혼이 48명이었다. 세대당 인구는 1927년에는 1세대당 4.7명이었으며, 1971년에는 급속히 늘어나 5.7명을 보이고 있어 1960년대의 6명과 함께 6.25동란 후의 높은 출산율과 대가족제도 유지세대 증가 등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81년 4.9명으로 줄어들기 시작하였으나 여전히 농촌지역에는 핵가족화의 추세가 느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90년대에는 세대당 인구도 3.3∼3.0명으로 감소되어 젊은이와 출산기의 청.장년층이 이농하고 노인층이 대부분 고향을 지키는 세대가 늘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
3. 인구 구조
성별, 연령별, 직업별, 종교별 등 여러 기준에 의하여 인구 집단을 분류하는 것이 인구 구조로, 이를 통하여 그 지역의 사회적 발전과 경제적인 발전 단계 등 총체적인 지역의 특성을 가늠해 볼 수 있다.
1) 년령별 구조 ( 年齡別 構造 )
총 인구를 연령별로 구분하여 그 속성을 밝혀 보려는 것을 연령별 구조라 하는데 3개층으로 구분하는데, 14세 이하는 유소년층 인구, 15세 이상 60세 미만은 생산 연령층으로 60세 이상은 노인층으로 구분하고 있다. 또 연령별 인구를 참고하여 교육청에서는 학교나 학급의 증설 등 학교 수용계획을 수립하는 등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하는데 기초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1935년의 우리 읍의 연령별 인구 분포상황은 다음과 같았다.29)
연령별 인구
구분 |
0 |
1-5 |
6-13 |
14 |
15-19 |
20-24 |
25-44 |
45-59 |
60-64 |
65이상 |
총 수 | |||
0-14 |
15-59 |
60이상 | ||||||||||||
1930 |
남 |
197 |
946 |
1,138 |
138 |
563 |
378 |
1,014 |
874 |
117 |
176 |
4,710 |
5,663 |
646 |
여 |
210 |
853 |
1,083 |
145 |
489 |
444 |
1,363 |
538 |
117 |
236 | ||||
1935 |
남 |
219 |
995 |
1,430 |
188 |
604 |
492 |
2,359 |
138 |
183 |
5,450 |
6,697 |
691 | |
여 |
213 |
1,028 |
1,231 |
146 |
540 |
520 |
1,506 |
676 |
126 |
244 |
(자료 : 조선국세조사보고 1935년)
배우관계별 인구
구분 |
미 혼 |
유 배 우 |
사 별 |
이 별 | ||||||||
총수 |
남 |
여 |
총수 |
남 |
여 |
총수 |
남 |
여 |
총수 |
남 |
여 | |
1935 |
6,594 |
3,707 |
2,817 |
5,443 |
2,706 |
2,737 |
752 |
155 |
597 |
49 |
40 |
9 |
(자료 : 조선국세조사보고 1935년)
1971년 우리 읍의 연령별 성별 인구는 다음과 같았다.
연령별 성별 인구 (1971. 10. 1현재)
구분 |
총수 |
0 |
1 |
2 |
3 |
4 |
5 |
6 |
7 |
8 |
9 |
계 |
20,190 |
257 |
299 |
420 |
516 |
529 |
516 |
573 |
586 |
578 |
562 |
남 |
10,095 |
130 |
160 |
212 |
263 |
283 |
254 |
300 |
285 |
320 |
353 |
여 |
10,095 |
127 |
139 |
208 |
253 |
246 |
262 |
273 |
301 |
258 |
299 |
구분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계 |
647 |
650 |
710 |
688 |
586 |
602 |
539 |
465 |
435 |
352 |
362 |
남 |
340 |
344 |
378 |
379 |
291 |
331 |
266 |
257 |
231 |
164 |
187 |
여 |
307 |
306 |
332 |
309 |
295 |
271 |
273 |
208 |
204 |
188 |
175 |
구분 |
21-24 |
25-29 |
30-34 |
35-39 |
40-44 |
45-49 |
50-54 |
55-59 |
60세이상 |
계 |
987 |
990 |
1,171 |
1,144 |
1,044 |
1,006 |
804 |
673 |
1,409 |
남 |
522 |
503 |
545 |
543 |
503 |
463 |
397 |
337 |
554 |
여 |
465 |
487 |
626 |
601 |
541 |
543 |
407 |
336 |
855 |
(자료 : 통계연보 창녕군 1972)
1971년 10월 통계를 보면 14세 이하의 유소년층 인구는 8,207명으로 40.6%를 차지하고, 15세에서 59세에 이르는 생산 연령층 인구는 10,574명으로 52.4%를 차지하고 있으며, 60세 이상 노인층은 1,409명으로 7.0%를 차지하고 있다. 전국의 구조와 비교하면 전국 34%, 59,9%, 6.2%에 비해 유소년층은 6.6%, 노인층은 0.8%가 높아 생산 연령층은 7.5%나 낮게 나타나 우리 고장의 유소년층인 유아와 학생, 노인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곧 생산 연령층인 청년과 장년층이 많이 이농으로 도시 진출을 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선진국과 비교하여 보면 유소년층이 25% 내외이므로 우리 고장이 자연 증가가 높은 것이며, 노인층의 비율이 선진국이 10% 수준임에 비하여 우리 읍은 7.0%이니 평균 수명이 선진국에 비해 큰 차가 남을 알 수 있다.
1990년 11월 1일을 기준으로 하여 실시된 인구 주택총조사에 의하면 연령(5세 계급) 및 성별 인구는 다음과 같았다.30)
연령(5세계급) 및 성별 인구 1990. 11. 1 현재
구 분 |
합 계 |
0-4 |
5-9 |
10-14 |
15-19 |
20-24 |
25-29 |
30-34 |
35-39 |
40-44 | |
연령별 |
계 |
12,683 |
671 |
1,028 |
1,210 |
1,174 |
1,023 |
772 |
856 |
792 |
684 |
남 |
6,166 |
370 |
521 |
568 |
630 |
656 |
370 |
444 |
370 |
340 | |
여 |
6,517 |
301 |
507 |
642 |
544 |
367 |
402 |
412 |
422 |
344 | |
구성비 |
계 |
100 |
5.29 |
8.11 |
9.54 |
9.26 |
8.07 |
6.09 |
6.75 |
6.24 |
5.39 |
남 |
100 |
6.00 |
8.45 |
9.21 |
10.22 |
10.64 |
6.00 |
7.20 |
6.00 |
5.51 | |
여 |
100 |
4.62 |
7.78 |
9.85 |
8.35 |
5.63 |
6.17 |
6.32 |
6.48 |
5.28 |
구분 |
45-49 |
50-54 |
55-59 |
60-64 |
65-69 |
70-74 |
75-79 |
80-84 |
85이상 | |
연령별 |
계 |
780 |
942 |
848 |
702 |
566 |
310 |
191 |
91 |
43 |
남 |
347 |
410 |
368 |
292 |
245 |
123 |
82 |
22 |
8 | |
여 |
433 |
532 |
480 |
410 |
321 |
187 |
109 |
69 |
35 | |
구성비 |
계 |
6.15 |
7.43 |
6.69 |
5.53 |
4.46 |
2.44 |
1.51 |
0.72 |
0.34 |
남 |
5.63 |
6.65 |
5.97 |
4.74 |
3.97 |
1.99 |
1.33 |
0.36 |
0.13 | |
여 |
6.64 |
8.16 |
7.37 |
6.29 |
4.93 |
2.87 |
1.67 |
1.06 |
0.54 |
(자료 : 인구 주택총조사 통계청 1991)
2) 성별구조
우리 읍의 성별 구조를 보면 1927년대에는 96,31명 총인구 중 남자가 5,400명 여자가 4,731명으로 남자가 669명 많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1959년에는 여자가 254명 많아 남녀 구성비가 50.7%로 여자가 우세하였다. 이 여자 우세 경향은 1960년대에 지속되다가 1970년에는 공교롭게도 50 : 50으로 평준화되는 추세였다.
그러나 남아 선호 사상이 전 사회에 물결치면서 출산 조절 등의 영향을 받아 저연령층을 보면 남자가 많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1971년 조사를 보면 0세에서 20세까지 사이에 남자가 많은 계층이 다수임을 볼 수 있다.
최근 남아 선호 사상과 젊은이의 이농과 탈농 현상이 두드러져 그러한 사회적인 현상이 반영된 탓인지 1990년 11월의 인구 주택총조사 때의 통계를 보면 남자가 ㅇ세 - 4세의 성비는 122.92%로, 5세 - 9세 사이는 102.76%로 높아 졌다. 1990년 11월의 성비(性比) 통계는 다음과 같았다.
연령별(5세 계급) 성별 성비 1990. 11. 1 현재
구분 |
계 |
0-4 |
5-9 |
10-14 |
15-19 |
20-24 |
25-29 |
30-34 |
35-39 |
40-44 |
성 비 |
94.61 |
122.92 |
102.76 |
88.47 |
115.81 |
178.75 |
92.04 |
107.77 |
87.58 |
98.84 |
구분 |
45-49 |
50-54 |
55-59 |
60-64 |
65-69 |
70-74 |
75-79 |
80-84 |
85이상 |
|
성비 |
80.14 |
77.07 |
76.67 |
71.22 |
76.32 |
65.78 |
75.23 |
31.86 |
22.86 |
|
(자료 : 인구 주택총조사 통계청 1991)
위의 표를 보면 가장 남자가 많은 연령층은 20세 - 24세 층으로 178.75%로 1,023명중 남자가 636명으로 여자보다 남자가 289명이나 많았으며 그 외 15세 - 19세 층이 115.81%로 높고 30세 - 34세 층도 107.77%로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연령층이 높아질수록 여자의 성비가 높아 60세 이상일 때는 최고 71% - 최저 22.86%로 여자의 수명이 남자보다 길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산업별 구조 산업별 취업자 성별 인구 1968. 10. 1. 현재
구분 |
총수 |
농어임업 |
제조업 |
건설업 |
전기위생 수도가스 |
상업 |
운수통신 |
서비스업 |
계 |
10,668 |
8,750 |
138 |
41 |
73 |
973 |
86 |
612 |
남 |
5,275 |
4,101 |
91 |
35 |
41 |
415 |
75 |
517 |
여 |
5,393 |
4,649 |
47 |
6 |
32 |
558 |
11 |
95 |
(자료 : 통계연보 창녕군 1972)
산업별 구조는 취업자를 대상으로 1차, 2차, 3차 산업별로 취업자의 인구수나 비율에 의해 구조상 특성을 밝혀 해당 지역의 산업의 특색이나 경제적 발전 단계 등 지역의 특징을 파악하는 것이다.우리 읍의 총 취업인구가 1968년 당시 10,668명으로 총 인구 21,364명의 49.9%에 해당되는데 이중 1차 산업 종사자가 82.0%이고 2차 산업 종사자는 1.7%, 3차 산업은 16.3%로 나타나 단연 우리 고장은 농경지대 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1990년의 농가 인구를 보면 농가수는 1,804세대, 농가인구는 5,886명(남자 2,868명, 여자 3,018명)으로 조사되어 있어 위 표의 1968년 통계와 대조하여 보면 1차 산업인구가 2, 3차 산업으로 대폭 옮겨져 갔음을 알 수 있다. 1996년의 농가 인구를 보면 농가수는 1,449세대, 농가인구는 4,222명으로 90년에 비해 크게 줄었다. 농가 인구의 연령별 구조는 다음과 같았다.
연령별 농가 인구
총 계 |
15세 미만 |
15세 이상 | ||||||
계 |
남 |
여 |
계 |
남 |
여 |
계 |
남 |
여 |
4,222 |
2,044 |
2,178 |
515 |
267 |
248 |
3,707 |
1,777 |
1,930 |
(자료 : 통계연보 창녕군 1997)
1968년 조사된 학력별 인구는 다음과 같았다. 학력별 성별 인구 1968. 10. 1. 현재
구분 |
총수 |
대졸 |
대재 |
고졸 |
고재 |
중졸 |
중재 |
국졸 |
국재 |
미취학,무학 |
계 |
21,364 |
144 |
99 |
1,109 |
421 |
2,730 |
770 |
7,604 |
4,569 |
3,918 |
남 |
10,772 |
134 |
89 |
928 |
354 |
1,805 |
532 |
3,303 |
2,365 |
1,262 |
여 |
10,592 |
10 |
10 |
181 |
67 |
925 |
238 |
4,301 |
2,204 |
2,656 |
(자료 : 통계연보 창녕군 1972)
1) 洛江七里 - 낙동강 칠백리, 栗林淸風 - 옛날 남지에는 낙동강 칠백리 큰 강물이 흐르고 강변에는 밤나무 숲이 많아 항상 맑은 바람이 불었다고 하여 생긴 남지팔경중 하나
2) 세종실록지리지 : 세종실록 중에 실린 지리지로 단종 2년(1454년) 편찬된 책으로 동국여지승람의 연원이 되었다.
3) 新增 東國輿地勝覽은 朝鮮 중종 25년(1530년)에 刊行된 地誌이다. 國譯本은 民族文化推進會 發刊本(1971년)을 使用하였다.
4) 新增 東國輿地勝覽 卷27 昌寧縣
5) 新增 東國輿地勝覽 卷27 靈山縣
6) 古歌硏究(梁柱東) p349
7) 경상도읍지 : 경상남북도 71읍에 관한 책으로 순조때 이를 합책하였다.
8) 昌寧郡誌 p68 鄭尙驥著 海東與地圖
9) 南旨面誌는 馬山里 鴻浦에 살았던 安鳳權이 1953년도에 쓴 筆記本 地誌인데 總 17面이다.
10) 大東地誌 : 고종때(1864년) 김정호가 지은 지리책
11) 大東地誌와 新增文獻備考에는 道沙面을 道謝로 기록하고 있는데 邑誌에 기록된 道沙를 본 읍지에서는 사용한다.
12) 통계연보(1997년도) : 昌寧郡
13) 남지면지의 경지면적 합계 5,764,494평이라 했으나 다시 계산해 보면 5,764,170평으로 324평이 차이가 난다.
14) 3. 山川 1) 山의 林野 面積 參照
15)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7 昌寧縣 山川
16) 경상남도지 上 p18
17) 창녕군지(1984) p50
18) 慶南年鑑(1996 慶南新聞社) p101, 및 경남도지(177년간) p 86
19) 慶尙南道誌(1977年刊) p1060
20) 남지팔경은 한말 남지리에 살았던 학자 洛原 金昌璡(충의위 참봉)의 글에서 유래되어 전해온다. 昌寧郡地名史 p213,
21) 이 지방에서는 제방이나 둑을 「둘」이라 한다.
22) 邑誌一, 慶尙南道編 「昌寧縣誌」(韓國地理誌叢書 : 서울亞世亞文化社刊)
23) 鷲山郡誌에는 신미년(高宗 8년)에 같은 숫자가 기록되어 있다.
24) 鷲山郡誌 - 1934年 嶠南書社 發刊. 原文에는 9,758명으로 記錄되었다.
25) 戶口總數 - 정조 13年 1789年
26) 朝鮮國勢調査報告 (朝鮮總督府著, 配布處 1990. 4 서울 民俗苑)
27) 支那人 - 일제시대 중국인을 지나인이라 불렀다. 이때 우리 읍에 와 있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만주 사람들로 영남수리공사 인부로 왔던 남자들이었다 한다.
28) 인구 주택총조사(통계청 1991년간) p111 통계연보(창녕군)의 숫자보다 1명이 많다. 아마 조사 시점의 차이인가 싶다.
29) 朝鮮國勢調査報告 (朝鮮總督府)
30) 인구 주택총조사(통계청 : 1991년) p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