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호주국립대학(ANU) 발행 온라인 저널 <뉴 만달라>(New Mandala) 2018-5-4 (번역) 크메르의 세계
[신간] 지도로 그려진 '태국': 태국 민족의 지정체에 관한 새로운 역사
Thailand Mapped: A New History of the Geo-Body of a Nation
(사진) 껭낏 끼띠리양랍 교수의 신간 Thailand Mapped
기고: 껭낏 끼띠리양랍 (KengkijI Kitirianglarp)
태국 치앙마이 대학 사회과학부 교수
[역주] '지정체'(Geo-Body)라는 용어는 본문에서도 소개되듯이, '위스콘신 대학'의 태국인 역사학자 통차이 위니차꾼(Thongchai Winichakul)이 자신의 저서에서 최초로 사용한 개념이다. 그는 이 용어를 통해 민족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자기 민족 고유의 영토"라는 관념을 지칭하고자 했다.
즉, '지정체'란 '영토순결주의자들'이 신봉하는 관념적 영토를 말한다. 민족주의자들은 자신의 민족국가가 하나의 신성한 영토로서 수천 년 동안 그 영역이 한 번도 바뀌지 않고 이어져 내려왔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통차이 교수는 바로 그러한 관념의 실체적 단위를 지칭하고자 '지정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한국에서는 한양대 임지현 교수가 중국의 동북공정을 비판하면서 위니차꾼의 'Geo-Body'를 '지리적 신체'로 번역 소개한 바 있으며(2014), 경희대 이정빈 교수는 한국 고대사에 관한 재야사학계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지리적 신체' 개념을 인용한 바 있다(2016).
태국에서 분과학문으로서의 인류학 및 농촌 마을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는 냉전기(Cold War) 동안 군부정권 및 미국의 영향 하에 꽃피었다. 국가(state)의 관점에서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태국 인류학의 목표는 반공 투쟁의 일환으로서 시골 마을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 태국의 사회과학자들은 '마을'(village, หมู่บ้าน[무반])을 연구 분석의 기본 단위로 사용해왔다.
이러한 점은 [북동부 지방 농민을 주력으로 하는 반(反)-군부 정치세력] 레드셔츠 운동(UDD)에 관한 저술에서도 나타난다. 그러한 저술들은 마치 '마을'이 연구 분석의 필수적 기본 단위인 것처럼 태국의 시골에서 진행되는 변화들에 착목하면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필자의 새 책 <지도로 그려진 '태국' - 태국 민족의 지정체에 관한 새로운 역사>(Thailand Mapped: A New History of the Geo-Body of a Nation)는 태국의 '마을'이라는 관념이 냉전기의 단순한 연구 분석의 단위일 뿐만 아니라 개념적으로 구성된 결과물임을 논증하고자 했다.
실재하는 공간이라는 기본적 의미에서 볼 때, '마을' 개념의 성립은 마을들의 항공사진 및 물리적 측량을 통한 지도 제작 과정에서도 형상화됐다. 미국과 태국의 사회과학자들이 채택한 지식 생산 관행 속에서, 물리적 공간으로서 '마을' 개념이 축조되는 과정은 마을의 지위를 연구 분석의 단위로 사용하는 가운데 실체화됐다. 1951년부터 1969년 사이에, 미 육군 지도창(US Army Map Service)은 태국의 [독재자] 육군원수 쁠랙 피분쏭크람(Plaek Phibunsongkhram, แปลก พิบูลสงคราม: 1897~1964)의 승인을 얻어 L708 시리즈 지도를 편찬했다. 이 지도는 태국 지도로는 최초로 1:50,000 축척으로 제작됐으며, 지도의 기본단위는 무반(마을)이었다. 이 용어는 그 이전에 제작된 시암(Siam)이나 태국(Thailand)의 지도에서는 전혀 사용된 적 없는 말이다. L708 시리즈 지도는 10년 뒤 L7017 시리즈로 개정됐으며, 이후 편찬된 태국의 모든 공식 지도는 L708과 L7017 시리즈를 토대로 하고 있다.
(사진) L708 시리즈 목록 [출처: 미 육군 지도창]
로리스톤 샤프(Lauriston Sharp)와 루시엔 행크스(Lucien Hanks)는 1963년부터 1974년까지 베닝턴-코넬 탐사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태국 북부 지방의 고산족 연구>(Bennington-Cornell Survey of Hill Tribes in Thailand)를 수행했다. 그들과 함께 일했던 인류학자 수텝 순톤파숫(Suthep Soonthronpasuch)은 이들이 당시 L708 시리즈 지도가 기밀문서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도를 들고 다녔다고 회상했다.
순톤파숫에 따르면, 샤프와 행크스는 그곳 주민들 정보를 수집하러 떠나기 전 고산족 마을의 위치를 찾기 위해 L708 지도를 참조했으며, 의심의 여지 없이 여타 태국과 미국의 사회과학자들도 북부 지방(Northern Thailand)과 이싼 지방(Isaan: 북동부)의 마을을 연구하는 데 이 지도에 의존했을 것이라고 한다. (당시 순톤파숫 자신도 태국에 본부를 둔 미군 조사기관 '고등연구국'(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에 채용되어 연구를 수행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냉전 기간 동안 지도가 어떻게 권력의 기술로 사용됐는지 알 수 있다.
필자가 지도에 관해 천착할수록 다음과 같은 궁금증이 생겨났다. L708 시리즈 지도 제작 이전에는 국가 권력의 변경에 거주하던 지역 공동체들이 어떤 방식으로 편제되었을까? 루시엔 행크스의 현장 노트에 따르면, 그가 1964년, 1969년, 1974년에 5년마다 조사한 ‘마을들’은 대부분 유목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이동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 됐다. 이 ‘마을들’은 지도자, 우두머리, 또는 상시적 행정 조직이 없었음이 분명했고, 그저 유동적 삶을 영위할 뿐이었다.
필자는 여기에 또다른 궁금증을 갖게 됐다. 태국 정부가 변방 사람들의 삶에 침투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이들 유목민 집단이 영구히 정착해서, 주민등록증을 소지한 것은 언제부터이며, 심지어는 스스로를 ‘태국인'(Thai: 태국민족)이라고까지 부르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1970~80년대에 '소수민족 연구소'(Tribal Research Centre)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1970년대 이전에는 소수민족 거주 지역 사람들은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주민등록지도 없었으며, 자신들이 태국인인지 아닌지 관심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 무렵이 되자 ‘마을들’이 주민등록지로 특성이 바뀌었고, 주민들이 국적과 주소가 적힌 주민등록증을 소지하는 것이 전국적인 현상이 됐다.
냉전기의 상황에서, 태국 정부는 국가에 대한 충성과 반공 이데올로기 형성을 위해 이러한 모든 감시와 식별의 요소들을 이용했다. 반추해보면, ‘태국다움'(Thainess: 태국인다움)이 제대로 뿌리를 내린 것은 고작 1970년대 말 정도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
시암의 국가들(수코타이, 아유타야, 시암 왕조 등)은 고대로부터 영토와 백성에 대한 통제권 행사를 갈망했지만, 변경의 사람과 영역를 파고드는 데 필요한 메커니즘을 갖지 못했다. 태국 근대화의 아버지 라마 5세의 절대주의 국가조차 변경에 관한 지식이나 통치 기술이 부족하여 중앙 정부의 권력이 그들에게 온전하게 미치기를 희망했을 뿐이다.
냉전기 태국 정부의 특징은 통치 대상에 대한 시각적 지식을 구축했다는 점이다. 시골 지역이 오로지 묘사와 상상으로만 개념화되던 과거와는 대조적으로, 태국 정부는 항공사진 및 지도제작 기술, 그리고 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마을들을 ‘발견’한 후, 그들에게 ‘태국다움’을 주입시킬 방법을 고안해냈다.
필자는 통차이 위니차꾼(Thongchai Winichakul)의 저서 <시암의 지도화: 태국 민족의 지정체에 관한 새로운 역사>(Siam Mapped: A History of the Geo-body of a Nation)에 반론을 제기함으로써 결론을 제시할 것이다. 통차이는 라마 5세 시대에 작성된 지도들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태국민족을 탄생시켰다는 중요한 결론을 도출했다. 그러나 필자는 새 책을 통해 그 결론을 논파하고자 했다.
지도 제작은 라마 5세가 전제적 태국 국가의 국경을 확정짓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렇게 제작된 지도들은 실체가 없었다. 국가의 가장자리에 거주하던 사람들과 삶의 방식에 대한 상세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라마 5세 시대의 지도는 '국가의 지도'일 수는 있었지만, ‘민족의 지도’는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지도들은 당시 백성들의 마음 속에 ‘태국다움’에 대한 의식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반면,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제작된 지도들은 국가 권력이 사회의 다양한 층위로 파고들면서 습득한 여러가지 상세 정보를 반영하고 있다. 그 뒤에 이어진 것은 민족 및 ‘태국다움’ 의식을 고취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통치였다.
본서는 '태국 민족'이 19세기의 발명품이라는 이론에 의문을 제기한다. 태국의 민족과 민족주의가 국가의 주변부 사람들의 삶 속에 의식화된 것은 빨라야 최근 50~60년 전의 일이다. ‘태국’은 불과 수십 년 전에 제작된 지도로 탄생한 것이다.
첫댓글 수고했습니다~
오우티 님의 본격적인 복귀작이네요~
아래는 참조할만한 관련 자료입니다..
<조흥국 교수 논문> http://cafe.daum.net/khmer-nomad/Ex9s/4
조미아, 지배받지 않는 사람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9137723
감사합니다. 정독하겠습니다.
정말 오랜만 마실 왔는 데 역시 영양가 정보를 섭취합니다 감사합니다 종종 들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넘 잼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