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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강해(19) 2023. 12. 10
특별한 언약 5가지
느헤미야10:1-39
<지난 시간 요약 - 레위인들의 공중기도>
이스라엘의 역사는, 어려움이 해결되고 먹고살 만하면 하나님을 배신하여 악을 행하고(배신), 그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 심판하시고(징계), 그들이 정신 차리고 부르짖으면(회개), 하나님이 다시 용서하시는 일(구원)이 계속해서 반복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일들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불평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악을 행했고, 하나님은 그것을 공의롭게 심판하셨을 뿐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을 완전히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심판을 통하여 돌이키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은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이제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여 완공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인도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인봉하다>
레위인들의 공개적인 회개 기도 후, 자신들의 회개와 결심을 문서로 작성하여 인봉하였습니다.
느9:38 “우리가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봉하나이다 하였느니라.”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도록, 다시는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확실하게 약속하고 그것을 아예 문서로 작성하여 인봉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회개로 끝이 나면, 안 됩니다. 결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진정한 신앙에는 위대한 결단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대로 살 수 없다’, ‘이 수준에 머무를 수 없다’, ‘나는 자라나고 싶다’, ‘성숙한 삶을 살고 싶다’라는 거룩한 욕구가 있을 때 그 사람은 큰 신앙의 진보를 맛보게 됩니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 잡고 있을 때 예수께서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고 초청하셨습니다. 그때 그들의 결단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마4:20)이러한 결단이 있었기에 베드로는 ‘갈릴리 어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한 번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유명한 광고를 여러분 잘 아시죠?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번의 결단이 영원을 좌우’합니다.
오늘 이 시간 바로 이 자리, 이 예배시간에 어떻게 결단하느냐에 따라 오늘 하루가 바뀌고, 일주일이 바뀌고 한 달이 바뀌고 1년이 바뀝니다. 그리고 10년이 바뀌고 결국 인생이 바뀝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리라, 죄악과 타협하지 않으리라, 말씀대로 살리라는 위대한 결단이 여러분들의 심령 속에서 불같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서명한 사람들 – 지도자들이 대표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지도급 인사들이 이 문서에 서명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백성들을 대표하여 인(印)친 자들, 즉 언약을 준수하기로 굳게 맹세한 자들의 명단이 나옵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 인친 자는 하가랴의 아들 방백 느헤미야와 시드기야.”
느헤미야가 가장 먼저 서명을 했습니다. 또한, 시드기야가 서명을 했는데 그는 느헤미야의 직속 서기관이었습니다.
2절부터 8절까지는 21명의 제사장들의 이름입니다.
이들의 뒤를 이어 9절에서 13절까지에 기록된 17명의 ‘레위인’들이 서약했습니다.
더 나아가 이들의 헌신을 따라 14절에서 27절까지 나오는 백성의 우두머리들 44명이 도장을 찍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서명을 할 수 없으니, 각 부분의 지도자들이 대표적으로 서명(총 84명)을 한 것입니다. 즉, 민족의 지도자들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과 규례대로 순종하며 살기로 모범을 보인 것입니다.
<확대되는 개혁운동>
이렇게 지도자 그룹이 앞장 선 결과 어떤 일이 뒤따랐습니까? 개혁이 확대되었습니다.
28~29절 “그 남은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및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는 모든 자와 그들의 아내와 그들의 자녀들 곧 지식과 총명이 있는 자들은/ 29 다 그들의 형제 귀족들을 따라 저주로 맹세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종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우리 주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켜 행하여.”
여기서 “그 남은 백성”이란 비록 서약서에 날인하지는 않았으나 역시 언약을 세운 백성들을 말합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느디님 사람들”이란 성소의 각 분야에서 봉사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지식과 총명이 있는 자”는 특별한 지식을 가진 자가 아니라 언약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지능에 달한 자들입니다. 또한 그들의 아내와 그 자녀들까지도 합세했습니다.
그러던 중 역대상 9장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은 그냥 가볍게 지나갈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가 꼭 기억했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봅니다. 바로 느디님 사람들입니다. 역대상 9장 1-2절입니다. 대상 9:1-2 “온 이스라엘이 그 계보대로 계수되어 그들은 이스라엘 왕조실록에 기록되니라 유다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더니 2 그들의 땅 안에 있는 성읍에 처음으로 거주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느디님 사람들이라.” 역대상의 저자는 역대상의 긴 족보가 끝나갈 즈음에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을 말하면서 느디님 사람(Nethinim)을 말합니다. 그럼 이 느디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느디님은 히브리어로는 ‘네티님’(נְתִינִים)으로 ‘주다’는 뜻의 동사 ‘나탄’에서 파생된 말로, ‘주어진 자들’, ‘바쳐진 사람들’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성전 봉사를 위해 주어진 노예들을 말합니다(민 31:40, 42, 47). 이들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도와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에 필요한 나무를 쪼개고, 물두멍에 필요한 물을 길어 나르는 등 주로 성전에서 허드렛일에 종사했습니다. 그럼 느디님 사람들은 어디 출신일까요? 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지만 가나안의 기브온 족속 출신인 것으로 보는 학설이 많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을 정복할 때 이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는 소문을 듣고는 가나안 땅에 살지 않으면서도 먼 곳에서 왔다고 속여 멸절을 면했습니다. 그러나 그 댓가로 성막에서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야 했던 겁니다. 이런 그들이 바벨론의 침공을 받으며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인 고레스의 칙령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때 느디님 사람들이 돌아온 것을 역대기 기자가 적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느디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그들이 사람들로부터 좋은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들은 성전의 허드렛일을 하는 종들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던지는 이런저런 무시하는 말로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벨론에 남아 있는 것이 더 좋은 것 아닙니까? 예루살렘은 여우가 뛰어노는 황폐한 곳입니다(애 5:18). 그들이 거주하는 곳은 제국의 수도이고 이제는 생활 기반도 잡은 곳이니 말입니다. 돌아가도 종이고, 이곳도 종인데, 차라리 제국의 수도에서 종으로 있는 것이 더 좋은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들은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아마도 이들은 고라 자손이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라고 고백한 것처럼 바벨론에 안주하며 사는 것보다 힘들지만 하나님의 성전에서 봉사하는 것이 더욱 가치있는 것으로 여겨 포로에서 돌아온 것으로 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느디님 사람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주의 몸된 교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바로 이런 느디님 사람입니다. 비록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지 않고, 사람들이 잘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을 바라보며 묵묵히 기도하고 헌신하시길 바랍니다. |
이렇게 지도자들로부터 출발한 말씀실천운동은 위에서 아래로 넓고 깊게 확산되어 나갔습니다. 29절 첫 문장을 보시면 이들의 참여가 일시적이거나 한순간의 감정적 참여가 아니었음을 분명히 확인하게 됩니다. 29절-“다 그 형제 귀인들을 좇아 저주로 맹세하기를.”
무엇으로 맹세했다고요? 네 저주로 맹세했다고 했습니다. 서약한 대로 살지 않으면 저주를 받겠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보통 결단한 게 아닙니다. 다부지게 정말 죽기 아니면 살기로 말씀대로 살겠다고 작정한 것입니다.
<5가지 언약>
이제 구체적으로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결단을 하였는지 그 5가지 언약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이방 사람들과의 통혼을 금지하겠다고 언약했습니다.
30절 “우리의 딸들을 이 땅 백성에게 주지 아니하고 우리의 아들들을 위하여 그들의 딸들을 데려오지 아니하며.”
이것은 남자든 여자든 이방인들과의 통혼을 금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당시 상황을 보면, 앗수르에 의해 먼저 망한 북이스라엘의 10지파는 이방인과의 통혼으로 그 정체성이 사라졌습니다(사마리아).
남유다의 유다지파마저 통혼을 한다면 유대민족의 정통성은 영원히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이에 혈통적 순수성을 유지하고, 종교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이방인들과의 통혼을 금지하였던 것입니다.
이 결정으로 오늘날까지 ‘유대인’이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둘째, 안식일과 안식년을 철저히 지키겠다고 언약하였습니다.
31절 “혹시 이 땅 백성이 안식일에 물품이나 온갖 곡물을 가져다가 팔려고 할지라도 우리가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그들에게서 사지 않겠고 일곱째 해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 하였고.”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 주변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로부터 물건을 구매하지 않음으로써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겠다는 약속이며 칠 년마다 안식년을 가짐으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안식일 제도는 본래 하나님의 창조구조에 뿌리를 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6일간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째 쉬시고 그날을 복 주셨습니다(창2:3). 즉 안식이라는 원리에 의한, ‘삶의 패턴’을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도 이‘패턴’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삶의 패턴을 얼마나 강조하셨는가 하면, 아예 십계명(4계명, 출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을 통해 인 안식일 준수를 못 박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것을 얼마나 철저히 적용하셨는가 하면, 광야에서 만나를 주실 때 6일째 되는 날은 다음 날 먹을 양식을 두 배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강력하게 안식일을 지킬 것을 강조하신 배경에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숨어 있습니다.
(자연도 짐승도... 그 시대의 약자들 보호).
미국 서부 개척시대 때 황금 러쉬가 있었습니다. 캘리포니아 도처에 황금이 널려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동부의 사람들이 광활한 대평원을 가로질러 서부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황금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은 휴식도 없이 빨리 먼저 가서 많은 땅을 차지하고 많은 황금을 캐겠다는 욕심으로 날마다 쉬지 않고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에 청교도 무리들도 끼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일은 꼭 쉬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자신들뿐 아니라, 말도 쉬게 하고 예배드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청교도들이 목적지에 도착해 보니 쉬지 않고 달렸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리해서 오다가 중간에 말이 지쳐 병이 나고 사람도 병들어 모두 뒤처지고 말았습니다.
사람과 말과 나귀를 만드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기 때문에 모두에게 안식일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적절히 쉬어야 몸이 회복되고 마음의 여유도 생겨 일을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쉼이 없는 일 중독의 상태는 영혼을 메마르고, 황폐하게 만듭니다. 쉼 없이 일의 노예처럼 사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닙니다. 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바빠도 주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이 원리가 발전하여 안식일→안식년→희년→구속으로서의 안식개념으로 성장해 갑니다.
매 7년의 안식년에 땅을 쉬게 하겠다는 말은 이른바 ‘안식년’(安息年) 규례를 잘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7일마다 안식일을 지켜야 하듯, 7년마다 안식년을 지킬 것을 명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년 규례를 명하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정기적인 땅의 휴경(休耕)을 통해 땅과 그 땅의 모든 소산물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고, 재물의 탐욕에서 벗어나 조용히 휴식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탐심이 이 명령을 준수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강제로 쉬게 하셨습니다.
역대기 기자는 안식년을 제대로 준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바벨론 포로기 70년 동안 유다 땅이 강제로 안식을 누렸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대하36:21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는 ‘주일’이 안식일입니다. 왜 요일을 바꾸었을까요? 그것은 안식일의 정신을 준수하지만, 그 안식의 중심에 ‘그리스도’를 두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이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일요일)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안식이었던 것입니다.
주일에 예배와 교제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웃과 사물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성전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기꺼이 공급하겠다는 언약입니다.
32~34절 “우리가 또 스스로 규례를 정하기를 해마다 각기 세겔의 삼분의 일을 수납하여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쓰게 하되/ 33 곧 진설병과 항상 드리는 소제와 항상 드리는 번제와 안식일과 초하루와 정한 절기에 쓸 것과 성물과 이스라엘을 위하는 속죄제와 우리 하나님의 전의 모든 일을 위하여 쓰게 하였고/ 34 또 우리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과 백성들이 제비 뽑아 각기 종족대로 해마다 정한 시기에 나무를 우리 하나님의 전에 바쳐 율법에 기록한 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에 사르게 하였고.”
그들은 ‘성전세’를 거두기로 합니다(20세 이상의 사람들이 3분의 1세겔). 사실 성전세는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32). 나라가 온전히 있을 때는 나라의 재정으로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바벨론에 의해 망했기에 별로의 재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세를 거두기로 결의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가지고 성전 건물의 유지 보수하고, 성전에서 상시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살 수 있게 하였습니다. 곧, 진설병(성소에 언제나 차려놓는 빵), 매일 드리는 곡식제물과 번제물, 안식일과 매월 초하루(월삭) 및 다른 절기 때에 바치는 제물, 주께 성별하여 바치는 예물,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씻기 위한 속죄 제물 등과 같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주께 제사 드리는 데 필요한 모든 제물입니다.
또, 34절에 보면, 제단의 불을 위한 ‘나무 벌목’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제사장의 중요 임무 가운데 하나는 단 위의 불을 꺼뜨리지 않는 것입니다(레6:12~13). 365일 24시간 단 위의 불이 꺼지지 않아야 합니다. 이 명령을 준행하기 위해서는 항상 땔감으로 쓱 나무가 있어야 합니다. 각기 종족대로(가문별로) 제비를 뽑아 순서를 정해서 번제단에 쓰이는 나무까지도 드리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저는 이 내용을 소중하게 보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헌금을 드리는 것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스스로 땀을 흘려 몸으로 봉사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를 보여준다고 할 것입니다.
물질뿐만 아니라, 시간을 드리고 재능을 드리고, 몸을 드려 헌신하는 모든 성도님께 감사드립니다.
넷째, 처음 익은 열매는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언약입니다.
35~36절 “해마다 우리 토지 소산의 맏물과 각종 과목의 첫 열매를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로 하였고/ 36 또 우리의 맏아들들과 가축의 처음 난 것과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율법에 기록된 대로 우리 하나님의 전으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에게 주고.”
처음 소산 및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성전의 봉사 일을 맡은 봉사자들에게 음식을 공급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첫 열매를 드린다는 것은 전 소유를 바치는 것의 상징적 행위였으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고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장자를 살려주셨기 때문에 율법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든 초태생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규정을 했습니다(출13:1~16, 레27:26~27) 이렇게 맏아들과 가축의 첫 새끼를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약속은 생명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전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맏아들을 드리는 방법(민18:16)
다섯째, 십일조를 온전히 드리겠다는 언약입니다.
37~39절 “또 처음 익은 밀의 가루와 거제물과 각종 과목의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들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의 여러 방에 두고 또 우리 산물의 십일조를 레위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였나니 이 레위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성읍에서 산물의 십일조를 받는 자임이며/ 38 레위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한 사람이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곳간의 여러 방에 두되/ 39 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자손이 거제로 드린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그릇들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려 두지 아니하리라.”
십일조의 용도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활이 안정되므로 그들이 성전 일에 충성하고 떠나지 않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모든 백성은 그의 소산의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주었고, 레위인은 다시 십일조의 십일조를 제사장들에게 드렸습니다(39).
39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에 있어서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신앙생활의 중심지이며,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었습니다. 이제 다시는 자기 일에 바쁘다는 핑계로 예루살렘 성전을 내팽개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전과 레위인을 위한 헌신 서약은 하나님 중심으로 똑바로 서겠다는 강력한 신앙선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정립을 최우선시하겠다는 믿음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면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십일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단순히 율법의 명령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율법 이전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십일조 정신’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창14장에 보면 이방 왕들의 침입으로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의 가족이 사로잡혀가고 그 재물까지 노략당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람이 구조대(318명)를 조직하여 구조하러 갑니다. 다행히 조카 롯을 구출하고 모든 빼앗겼던 재물을 되찾는 데 성공합니다. 돌아오는 길이 아브람은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을 만납니다. 멜기세덱이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창14:20) 하자 아브람은 그에게 십일조를 드립니다.
창28장에 보면, 야곱이 하란으로 피신하던 중,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잤는데, 꿈에 사닥다리가 하늘에 닿았는데 그 위에서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5). 잠에서 깬 야곱은 그곳 이름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짓고, 만일 자신이 이곳으로 무사히 돌아오게 되면 하나님께 10분의 1을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이 내용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과 재산은 자기의 능력과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내 삶과 재산의 주인이시다 하는 고백으로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단순한 의무감으로 드리시지 말고, 참된 신앙고백으로 드리십시오.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면서 드리십시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서명해야 할 계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입니다.
요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봉인된 문서에 서명하듯, 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새 계명’을 두고 서명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성경 본문을 찾아 사인하게 함).
이 예수님의 사랑은 ‘보편적인 자연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 사랑은 누구나 합니다. 나에게 잘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합니다. 누구나 내 가족은 철저히 보호하고 사랑합니다. 나와 친한 이웃에게는 누구나 친절히 대합니다. 그런 평상적인 사랑은 전 세계인 누구나 하는 인류의 보편적인 자연적인 사랑이다.
예수님의 사랑하라는 계명은 그런 인류 보편적인 사랑보다 한 차원 높은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 인간에게 베푸셨던 사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죄인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할 수 없는 자들도 품으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고발하고 십자가에 죽게 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처절하고 간절한 인간에 대한 그 예수님의 사랑에 머리를 숙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실천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고 말씀하셨습니다.
말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아니라 삶의 내용에서 예수 믿는 향내가 진하게 풍겨나는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십자가 목걸이를 목이나 차에 걸고 다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고난의 삶을 사는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성경을 액세서리로 들고 다니는 자가 아니라 성경대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하고 몸부림치는 자가 진정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의 실천자가 되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온 세상에 드러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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