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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21) 2024. 12. 15
고난도 기뻐하는 사도들
사도행전 5:33-42
<지난 시간 요약 - 순종하는 사도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비극적인 사건 후에도 예루살렘 교회는 사그러들지 않고 더욱 부흥해 갔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이 ‘온 예루살렘에 가득’ 찼다고 표현할 만큼 영향력이 커져만 갔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사도들을 붙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 사도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만큼 자신들의 영향력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으로 사도들을 제압해보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도들의 편에 서셨기 때문입니다. ‘주의 사자가 옥문을 열고’ 그들을 끌어내었던 것입니다. 주의 사자는 사도들에게 지금 당장 해야 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20절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사도들은 주의 사자의 명령을 받은 즉시 순종하였습니다. 그 시간이 ‘새벽’이었지만 개의치 않고 순종했습니다.
사도들을 재판하기 위해, 새벽같이 모인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사도들이 없어진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 사도들이 성전에서 가르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잡아 오도록 하였습니다.
공회의 의장이었던 대제사장이 사도들에게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지 않았느냐’라고 책망합니다. 그러자 사도들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증언하였습니다.
사도들의 증언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29). 이는 자신들의 행동 원리를 천명한 것입니다.
둘째,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그분이 바로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다는 것입니다(30~31). 셋째,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분노하는 산헤드린>
자신들의 협박에도 사도들이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증언하자 산헤드린 법정의 분위기가 험악해졌습니다.
33절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 하고자 할새.”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 사도들의 같은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을 확인하였습니다.
한 부류는, 지난 2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도들의 증언을 듣고,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회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의 수가 삼 천명이나 되었습니다.
반면에, 똑같은 말씀을 듣고도 크게 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왜 분노하였을까요? 자기들의 생각과 행동은 항상 의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 객관화가 불가능한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은 하나님께로부터 택함을 받은 제사장이고(특권의식), 늘 율법을 암송하고, 가르치는 위치에 있고, 종교의식에 참여하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에, 자신들의 판단은 늘 옳다는 교만함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하면, 크게 노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율법화된 화석 같은 종교인이 되면 안 됩니다.
(나침반 - 흔들리면서 남쪽 방향을 가리킴)
늘 하나님 앞에 자신을 객화화할 수 있고, 자신도 얼마든지 죄를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늘 깨어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라>
또, 한 가지 우리가 본문을 통해 생각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사도들의 증언에 ‘크게 노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사도들을 ‘사도들을 없이 하고자’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형의 권한은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증언이 사형에 해당하는지를 증명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죽인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회를 어지럽힌다는 거짓 증언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또, 한 번의 음모를 꾸며야 합니다. 분노가 또 한 번의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생활에서, 인간관계에서 분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쳐야 합니다. 죽일 결심까지 하면 안 됩니다.
가인과 아벨(창 4장) –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으로, 분노함(창 4: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이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경고를 주셨습니다(7b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그러나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동생 아벨을 죽임(고의적이고 계획적인 살인.).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하였습니다.
엡4:26-27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그렇습니다. 살다 보면, 분노가 일어나는 일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분노의 감정이 여러분을 또 다른 죄로 인도하지 않도록 다스리시기를 바랍니다(층간 소음에도 살인).
<율법 교사 가말리엘의 등장>
바로 이때, 율법 교사 ‘가말리엘’이 등장합니다.
34절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 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가말리엘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던 바리새인이자 율법 학자(랍비)였습니다. 당시 유대 종교의 학적인 면에서 두 세력이 있었는데, 하나는 힐렐 학파이고 다른 하나는 샴마이 학파입니다. 샴마이 학파는 굉장히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학파였고, 힐렐 학파는 개혁적인 학파였습니다. 이 힐렐 학파를 이끌던 대학자가 바로 가말리엘이었습니다.
훗날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가말리엘의 문하생(제자)이었음을 밝힌 바 있습니다(행22:3).
그래서 오늘 본문 34절에서 그를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고 기록했습니다. 단순히 율법 지식만 갖춘 학자가 아니라, 인품이 훌륭하고 지혜가 많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학파나 바리새파에게만 존경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대립하는 사두개파에게도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누가 그 말을 하는가입니다.
짧고 간단한 말인데도, 존경할만한 인물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든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고 듣습니다.
우리가 평소 언행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신뢰를 잃으면 말에 힘을 잃고, 권위를 잃어버립니다.
설교를 하는 목회자인 제가 주의 깊게 들어야 할 말입니다(신뢰를 잃으면, “너나 잘해”하지 않겠습니까?”).
<가말리엘의 설득>
그럼 가말리엘은 무슨 말을 했을까요?
35~37절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36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자칭 메시아들이 많이 등장하여 사람들을 미혹하곤 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로마의 압제에서부터 유다를 해방시킬 메시아라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가말리엘이 언급한 ‘드다’와 ‘유다’도 바로 그런 종류였습니다.
드다에 대해서는 알려지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가말리엘의 말이 전부입니다. 드다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던 사람들이 4백 명이나 되었지만, 드다가 잡혀서 처형되고 난 후에는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갈릴리 사람으로, 수리아 총독 구레뇨가 세금 조정을 위한 인구 조사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오직 그에게만 세금을 바쳐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곳에 세금을 내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라고 사람들을 선동했습니다. 그러나 그 또한 처음에는 세력을 불렸지만, 처형되고 난 후에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가말리엘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38~39절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39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아마도 가말리엘의 눈에는 예수님이 ‘드다’와 ‘유다’ 같은 ‘자칭 메시아’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만 놔두어도 결국 사그라질 것으로 취급했습니다.
공연히 끼어들어 혹시라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름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그들의 분노를 잠재웠습니다.
제가 좀 아쉬운 것은, 이 존경받는 랍비 가말리엘이 좀 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집중했더라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참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것을 알아차렸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이 사람을 통해, 사도들이 지금 죽임을 당하는 것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이는 아직 사도들이 해야 할 사명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즉, 초대교회를 든든히 세워야 할 사명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공중에 나는 참새 한 마리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마10:29)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저와 여러분이 오늘 살아서 이 자리에서 예배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아직 사명이 남아 있어서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채찍질 당하는 사도들>
가말리엘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회원들은 모두 그 말을 옳게 여겨 사도들을 풀어주기로 했습니다.
40절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물론 그냥 풀어주지는 않았습니다.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고, 예수의 이름을 말하는 것을 금하여 놓았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채찍질’은 모세의 율법에 명시된 태형을 의미합니다. 그것에 대한 규정이 신명기에 나옵니다. 직접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신25:1-3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2 악인에 태형이 합당하면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앞에서 그의 죄에 따라 수를 맞추어 때리게 하라/ 3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
태형은 최고 40대까지는 때릴 수 있다고 되어있습니다만, 실제로는 39대까지만 때렸습니다. 그 이유는 잘못하여 그 한계를 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고후11:24).
아마도 사도들도 그렇게 매질을 당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것은 지난번 베드로와 요한이 처음 재판을 받았을 때와 비교했을 때에 그 강도가 세진 것입니다. 지난번에는 구두 경고만 받았었는데, 이번에는 호되게 매질한 다음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여 그들을 쫓아냈던 것입니다. 점점 박해의 강도가 세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난도 기뻐하는 사도들>
그런데 태형을 받고, 풀려난 사도들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41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다’고 합니다.
죄를 범하고 잘못한 것이 있어서 채찍을 맞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선한 일을 하고 채찍을 맞는다면 억울하고 원통한 일입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파한 것 때문에 채찍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억울하게 생각하거나 원통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뻐하면서’ 공회를 떠났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기뻐하게 했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치욕 당하는 것을 ‘영예’(honor)로 생각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아마도 제자들은 주님께서 팔복에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5:10-12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주님께서 예고하셨던 대로 박해를 받게 되었으니, 주님께서 약속하신 상을 받을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때문에 박해를 받을 때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그들은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훗날 베드로는 그의 편지 베드로전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벧전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벧전4:12-14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아무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사람들만이 감당할 수 있는 시험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내가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형편없는 신앙생활을 하면 절대 욕을 먹거나 핍박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려다 보면 반드시 핍박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3:12)고 말씀합니다.
세상을 거슬러 살기 때문입니다. 핍박받을 것이 두려워서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핍박이 따르더라도 올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다시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
자 그렇다면 사도들이 산헤드린 법정에서 풀려난 후에 어떻게 지냈을까요? 산헤드린의 경고처럼 입 다물고 조용히 있었을까요?
42절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위협이나 채찍이 사도들의 전도 열정을 꺾어 놓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잠시도 쉬지 않고, 성전과 집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치고 전했습니다. 욕을 먹고 조롱을 당하고 위협과 협박을 받아도, 그들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지금까지 해오던 사역을 계속 수행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히11:38)고 밝힙니다. 막말로, 그들은 ‘못 말리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들을 죽인다고 달라질까요? 실제로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예루살렘 교회에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많은 그리스도인이 세계 각국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도피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와 같은 세상 사람들이 감히 ‘말릴 수 없는 사람들’을 통해서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곧 핍박을 의미했습니다. 저들은 죽음도 각오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고, 듣지 못하면 믿을 수가 없고, 믿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 것이 바로 자신들의 책임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그렇게 전도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조그만 일에도 자존심 상하고 상처받는 우리의 나약한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 전하는 것을 주저하는 이유는,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무시당하면 어떻게 하나’, ‘핀잔을 받으면 어떻게 하나’, ‘손가락질 받으면 무슨 창피이지?’ 하는 생각들이 우리의 입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사도들처럼 치욕 당하는 것을 영예로 생각하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여야 합니다.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님이 임해야 담대하게 주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성령 충만하여, 말과 행실로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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