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동요를 찾아서 20]
어린이 노래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작사·강소천 작곡·나운영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나무들 같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나무들 같이
하늘 보고 두 팔 벌린 나무들 같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나무들같이
너도 나도 씩씩하게 어서 자라서
새나라의 기둥 되자 우리 어린이
햇님 보고 방긋 웃는 꽃송이 같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송이 같이
햇님 보고 방긋 웃는 꽃송이 같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송이 같이
너도 나도 곱게곱게 어서 피어서
새나라의 꽃이 되자 대한 어린이
들어가는 글
이 동요는 아동문학가 강소천이 쓰고 작곡가 나운영이 곡을 붙인 <어린이 노래(1952)>이다.
아직 한국 전쟁이 진행중이었던 1952년, 시대는 참혹했어도 어린이들만은 곱고 아름답게 자라주기를, 그리하여 이 나라를 희망차게 이끌어갈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대로 담긴 부분 2부 합창 동요이다.
화음이 이루어지는 부분이 아름답게 진행되는 이 노래는 ‘어린이날 노래’보다는 덜 유명하긴 해도 여전히 교과서에 실려 지금까지도 불려지고 있다.
강소천은 540여 편의 동시와 동요, 동화를 남긴 아동문학가로 아동문학가협회원들과 함께 '어린이 헌장'을 발표했으며, 우리나라 아동문학 발전을 위해 평생 노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곡가 나운영은 우리나라 전통 음악과 서양음악을 조화시켜 보다 한국적인 음악을 작곡하는데 힘썼으며 천여 곡이 넘는 기독교 찬송가를 작곡한 교회 음악가이자 교육자로 우리나라 음악발전에 공헌한 분이다.
https://youtu.be/hNyrLGOwtvc
작사·강소천(姜小泉, 1915∼1963)
대한민국의 아동문학가, 시인, 소설가이다.
본명은 강용률(姜龍律)이고, 아명(兒名)은 강용진(姜龍津)이다.
소천(小泉)은 아호이며 함경남도 고원(高原) 출생이다.
함경남도 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청진여자고급중학·청진제일고급중학 등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월남하였다.
1930년 <아이생활>, <신소년> 등에 동요 ‘버드나무 열매’ 등을 발표하고, <조선일보> 현상문예에 동요 ‘민들레와 울아기’가 당선되었으며, 그 뒤 ‘닭’을 비롯한 동요·동시를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하였다.
1939년을 전후하여 동화와 아동소설도 쓰기 시작하여 동아일보에
'돌멩이'(1940), '토끼 삼형제', 매일신보에 '전등불 이야기'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월남 후 피난지 부산에서 독서 지도와 글짓기지도 등 아동문학의 보급을 위하여 힘쓰는 한편, <새벗>·<어린이 다이제스트> 주간(1952년), <아동문학> 편집위원(1962년), 한국보육대학, 이화여자대학교, 연세대학교 강사(1959∼1963), 한국아동문학연구회 회장(1960), 한국문인협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63년 문예상을 수상한 후 간경화로 사망하였다.
사후 1965년에 <소천문학상>이 제정되었다.
작곡·나운영 (羅運榮,1922~1993)
나운영은 1922년 3월 1일 서울에서 4남 1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나운영의 아버지는 생물학자로서 국악에 조예가 깊은 분으로 사랑방에서 가끔 동호인들과 제례악이나 영산회상과 같이 상당히 수준 높은 곡들을 합주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나운영은 이 사랑방에서 국악 합주를 즐겨 들었으며 5세 때 아버지에게서 양금을 배우며 음악에의 첫 발을 내딛었다.
8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사랑방에서 양금을 치거나 하모니카를 불며 지내다가 아버지의 유품 중 발견한 유성기판으로 들은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에 사로잡혀 그 유성기판이 다 해지도록 계속 들어 모든 악기 파트를 다 따라 부르면서 양악에 눈을 뜨게 되었다.
1939년 중앙중학교 졸업반 때 동아일보 주최 신춘 현상 문예 작곡 부분에 가곡 ‘가려나’(김안서 작시)가 당선되어 본격적인 작곡 전공의 길을 걷게 계기가 되었다.
일본 동경 제국 고등음악학교 본과에 입학한 나운영은 당시 일본 최고의 작곡가인 모로이 사부로 선생에게 작곡학을 사사하며 "너희 나라의 민족음악을 만들어 내라"라는 충고를 통해 민족음악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바르톡, 스트라빈스키, 힌데미트 등에 매료되어 새로운 사조인 현대음악에 심취하였다.
1942년 본과를 졸업한 후 연구과(대학원에 해당)에 진학하였으나 1943년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연구과를 다 마치지 못한 채 귀국한 나운영은 <조선 정악전습소>에서 민완식 선생에게 양금을 배우는 한편 첼로 주자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1943년 채동선 현악4중주단, 1944년 경성후생악단, 1945-50년 올포이스 현악4중주단의 첼로 주자로 활약했으며, 1946년 조선음악가협회가 주최한 <우리 작품 발표음악회>에서 홍난파와 나란히 자신의 ‘첼로 소나타’를 발표하였다.
나운영은 24세부터 정년인 65세를 넘어서까지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친 교육자였다.
1945년 모교 중앙중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1945년 중앙여자전문학교(중앙대학교의 전신) 전임교수로, 1948년 국립 서울대학교, 1952년 이화여자대학교를 거쳐 1954년 덕성여자대학교에서 한국 최초로 국악과를 창설하였다.
1955년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종교음악과 조교수를 시작으로 1976년까지 교수 및 음악대학 학장을 역임하였다.
21년을 봉직한 연세대를 사임한 후 1976년 목원대학교, 1981년 세종대학교, 1982년 전남대학교, 1985년 다시 목원대학교에서 강의를 하였으며, 1987년 정년을 마친 후에도 명예교수로, 특히 후배 작곡가 양성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https://youtu.be/jGfYG2ob-1k
느낌
이 동요는 나무와 꽃의 입장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것으로 은유하여 어린이의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느끼는 마음을 노래한 것이다.
우리는 가끔은 나무 곁에 서서 나무처럼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한다.
그러면 나무가 보는 하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길을 가다가도 하늘을 쳐다보면 새로운 느낌을 가지는 것과도 같은 느낌일 것이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더 싱그롭고 깨끗하게 보일 것이다.
아마도 나무는 가지를 뻗어 하늘을 향해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꽃밭에 앉아 꽃들 사이에서 바라보는 하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사 그대로 새나라의 기둥이 되고 꽃이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부르는 순수한 노래이다.
첫댓글 성훈: 덕분에 잊고 지낸 추억의 동요를 듣습니다^^
감사합니다 ~~
최정미: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햇님 향해 방긋 웃는 ~ 가사가 참 이쁩니다.
덕분에
내 마음도 아이같아지는 오늘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