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계문예대학 수필창작반 10기- 1학기-4차시 합평작(2025. 3. 29 토)
1. 나트랑, 달랏 여행기 / 임선빈1
(2025.02.24~28)
1. 1일차 국제인천공항에서 밤 6시55분 아시아나 항공으로 나트랑을 향해 출발했다. 우리의 일행들은 수십년간 전국모임을 하고 있는 팀 중에 인천, 익산, 여주, 부산, 울산에서 부부동반은 전체 18명중 10명만이 참석했다. 롯데 홈쇼핑의 추전 상품을 이용하여 가는 중이었다. 중간에 이상 기류로 기체가 몹시 흔들렸지만 가끔 발생하는 현상이기도 하다면서 안심하라는 기장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기체의 흔들림이 멈춘다음 기내식 저녁식사가 닭고기 가슴살과, 쇠고기 덮밤 두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우리팀은 모두 쇠고기 덮밥을 선택했다. 포도주 반주까지 곁들여 있었고, 빵과 과일류도 넉넉히 나와 어느 호텔식 못지않는 맛있는 저녁이였다. 승객들 모두 저녁 메뉴에 만족하는 눈치다. 친절한 승무원들의 써비스도 만족스러웠다.
2. 5시간20분 비행 끝에 베트남 나트랑 깜란 공항에 도착했다. 마중나온 베트남 현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40분의 차량이동 끝에 나트랑 쉐라톤 호텔에 도착했다. 이나라 법은 우리나라 가이드가 있어도 반드시 현지 베트남 가이드가 동행해야만 관광지를 방문할 수가 있도록 법이 그렇게 만들어져 있어 가이드 2명이 안내하게 되었다. 베트남 현지인도 제법 한국말을 잘 했다. 호텔에 도착하여 숙소를 배정받은 후 여장을 풀었다.
3. 2일째 아침에 눈을 뜨니 아침6시다, 7시에 호텔식 아침 식사가 예정 되어 있었기에 밥시간 까지는 한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우리나라 보다 2시간 늦어 시간은 제법 여유가 있었다. 남편과 같이 호텔문을 나섰다. 바로 건너편 백사장이 길게 펼쳐져 있고 넓은 바다가 기다리고 있었다. 백사장을 거닐어보기 위해 도로를 건너려니 오토바이들이 무법천지로 움직이고 있다. 어쩌다 드문드문 끼여 있는 차량들이 눈에 띄였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신호등이 안보인다. 그런데 현지인들은 무질서 속에서도 도로를 사고없이 잘 건너고 있었다. 신나게 달리던 오토바이의 뜸한 틈을 타서 남편과 손을 잡고 길을 건너 백사장으로 갔다. 비가 부슬부슬 오고 있었지만 바다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이 몇몇 눈에 띄였다. 그런데 흙탕물이다. 어떻게 저렿게 탁한 물에서 수영을 할 수 있을까하고 가이드가 우리를 안내하기 위해 도착했을 때 질문하였더니 며칠전 태풍이 와서 바닷물이 뒤집혀 그렇단다. 하지만 이곳이 전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휴양지라서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온다고 했다.
3. 아침 식사 후 여장을 꾸린다음 체크아웃을 하였는데 남편이 사고를 치고 말았다. 숙소에 들기전 호텔방에서는 절대로 금연이라고 가이드가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담배를 피운 남편, 호텔측에서 벌금 200달라를 내야 한다고 청구를 하니, 여행이고 무엇이고 다 집어치우고 귀국하겠다고 노발대발이다. 간신히 우리나라 가이드의 중재로 100달러에 합의를 했다. 담배 한 개피가 15만원 비싼 담배를 피웠다. 그래도 여행중 담배를 끊지 못하고 계속 피우는 남편, 대단한 골초아저씨, 하루에 담배 2갑정도는 더피운다. 그래도 건강을 생각하여 담배를 줄이든지 끊으라고 말할라 치면 아픈데 하나도 없다면서 본인은 담배 피우는 낙으로 사니 말하지 말라며 오히려 나에게 으름장을 놓는 고집불통 아저씨다.
4. 담배가 떨어지면 어쩔 수 없이 심란해 하는 남편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마트에 들리게되면 담배부터 챙기게 되니 어쩔 수 없는 한 식구인 것 같다. 항상 건강한 몸으로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이번 계기로 담배를 피울 때 장소를 좀 조심해서 피우게 되길 기대해 본다.
5. 쉐라톤 나트랑호텔을 8시 10분에 출발하여 혼쭝으로 가 귀암절벽을 관광한후 그곳 카페에 들렸다. 10명 이상이 모이면 생음악 연주를 한다는 그곳, 가이드2명까지 12명 현지인들의 생음악 연주가 시작되었다. 우리나라 정서를 생각하여 우리나라 음악을 연주해주었다. 우리나라 거문고 같은 현악기, 피아노처럼 생긴 건반악기 암석으로 되어 있는 타악기의 연주는 독특한 음을 연주해 주었다. 3명의 연주자들이 악기를 번갈아 가며 연주했다.
6. 점심식사 후 나트랑에서 맛사지 30분을 써비스 받은 후 2시 30분에 나트랑에서 달랏으로 이동했다. 차량으로 약 3시간 30분 이상이 소요되는 꼬불꼬불한 산길 자꾸만 하늘끝과 닿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있다. 군데 군데 길은 패여있고 산에선 여러군데에서 폭포를 이루며 물이 도로로 쏟아지고 있다. 머리가 아파온다. 고산지대라 그런 현상이 있을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가이드의 안내다. 아무튼 패여진 도로를 차로 달리고 있으니 걱정이 되었다. 태풍이 왔던 얼마전에는 나트랑에서 달랏을 들릴 수 없어 그냥 나트랑에서 시간을 보낸 팀도 있다고 했다. 달랏까지 들릴 수 있는 우리는 행운아들인가 보다
7. 오후 여섯시쯤 달랏의 중심지인 쑤언흐영호수가 있는 람비엔 광장을 지나게 되었다. 쑤언흐영호수는 19세기말 베트남 남북 중앙 고원지대에 위치한 달랏을 휴양도시로 개발하면서 홍수를 조절하기 위해 만든호수라고 했다. 1893년 프랑스 탐험가 알렉상드로 에르생이 이 지역을 발견하여 본격적인 개발을 하였다고 한다. 서늘한 기후와 아름다운 자연환경 덕분에 프랑스인들이 여름휴양지와 행정중심지로 허용한후 달랏은 빌라, 학교, 병원 은행등이 건설되어 지금도 세련된 건축미를 자랑하고 있다. 달랏은 이 후 베트남 상류층의 휴양지로 발전, 현재는 관광도시로 유명하며 꽃의 도시로 불리고 있었다
8. 람비엔 광장을 지나 한식당에 들려 삼겹살로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도중 2명의 현지 초보생 가수들이 기타반주를 하면서 생음악으로 노래를 불러주었다. 물론 우리가 좋아하는 한국 노래다. 목소리가 청아하여 듣는 이들의 마음을 신선하게 해주었다. 삽겹살에 곁들여진 김치찌개가 임맛을 더욱 돋구었다. 식사도중 가이드가 어떻게 알았는지 일행중 한 사람의 부인이 전날 생일인 것을 알고 생일 축하케익까지 준비하는 센스를 보여 주었다.
9. 식당에서 나와 숙소에 들리기전 천국의 계단에 들렸다. 인위적으로 만든 꽃밭과 신발을 신고 들어갈 수 있는 네모진 인공 호수를 만들어 야경에 어울리는 신비스런 멋진 포토존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서 사진 촬영에 연출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천국의 계단에서 내려다 보니 산골짜기 밑은 비닐 하우스 천국이다. 불야성을 이룬 하우스 안에는 각종 꽃들과 딸기, 란 종류, 커피나무 들이 암막과 전구를 이용하여 순차적으로 출하 할 수 있도록 재배에 여념이 없다고 했다. 이것도 하나의 큰 볼거리를 이루고 있었다.
10. 야간 사진 촬영을 끝낸 후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달낫 야시장에 들렸다. 각종 과일들이 즐비하다. 길거리에서 현지인들이 한끼식사를 때우기 위해 식당앞 바깥 좁은 통로에 앉아 퓨전종류로 한끼 식사를 때우고 있는 장면이 이색적이다. 시장통엔 옷가게도 즐비하였는데 이곳의 서늘한 날씨 때문인지 겨울옷들이 전시되여있다. 마후라가 전시된 한집에 들려 우리일행들은 목도리와 마후라를 샀다. 물론 나도 샀는데 우리원화로도 받는 가게이고 가격도 저렴하여 별로 부담스럽지 않았다. 야시장에서 나와 공연장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미 어두음이 짙게 깔려 전구들이 별들처럼 빛나고 있다.
11. 비닐하우스 가장 위 계단쪽으로 각종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천막 공연장이 설치되여 있었고 공연장 위쪽으로 더 높은곳에 천국계단이 있고 천국 계단 옆쪽은 꽃밭과 커피숍이 있었다. 커피솝 밖은 우리가 앉아 공연장을 내려다 보며 즐길 수 있도록 긴 의자들이 배열되 있었다. 공연이 끝난 후 우리 일행은 테라코라 호텔에 숙소를 잡았다.(계속)
2. 문학 수업 첫날의 욕심 / 손철화 1
1. 오영수 문학관의 문예대학 강좌가 시작되었다. 작년 이맘때, 생전 처음 만나는 수필강의를 앞두고 많이 설레었는데 올해도 개강이 다가올수록 그랬다. 다만 지난번에는 불안이 많이 섞였다면 이번에는 기대가 좀 녹아있었다. 기대는 에둘러 표현된 욕심, 올해는 어떤 욕심일까?
2. 신불산 능선은 눈에 덥혔는데 화장산 솔 빛은 벌써 봄이다. 그에 맞춰 문학관도 새로 단장되었다. 난계 선생님의 발자취를 만나는 1층 전시실은 많이 달라졌다. 너무 깔끔해서 빛바랜 육필원고나 고서古書들이 엉거주춤 서 있는 듯했다. 주차장도 넓혀졌다. 비례하여 잔디광장은 좁아졌다. 기획자는 훨씬 깊이 생각했겠지만 ‘문학관에는 외관이나 편의보다는 문학의 숨결이 들어차고 흘러야 하지 않을까.’ 순간적으로 스치는 욕심이다.
3. 작년에 함께 했던 동료들이 모두 등록하기를 원했으나 빠진 사람들이 많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분, 큰 눈을 가진 문우님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절반 이상은 구면이었고 총무님의 포스는 여전했다. 옆자리와 뒷자리에서 공부했던 선생님들은 다 자리를 채워줘서 든든했다. 보이지 않는 분들에게 무슨 일이 없기를 바란다.
4. 스무 분 남짓한 새내기 문우님들, 낯선 분위기를 살피느라 두리번거리는 눈망울이 귀여우면서도 살짝 애처롭다. 나도 처음 왔을 때 아는 사람 하나 없어서 멋쩍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첫날, 따뜻한 말 한마디 걸어주는 사람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그 기억에 끼고자 그들의 손을 잡고 싶었으나 과례過禮로 비칠까 봐 주위에 있는 분들께만 인사를 건넸다. 지난 해에는 대부분 이름도 모르고 지냈었는데 올해는 ‘동문수학의 정’을 나누고 싶다.
5. Y씨는 내 사무실이 있는 건물에서 세무서비스업을 하는 세무사다. 숫자를 다루는 깐깐한 사무에 종사하면서도 틈틈이 글을 쓰고 문학회 활동을 하는 등 문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분이다. 난계수필반에서 더 벼리면 꽃을 피울 수 있겠다 싶어 이번에 그를 문학관으로 이끌었다. 그는 첫날부터 숫기좋게 자기를 소개하고 단톡방에 글도 곧잘 올린다. 그의 꽃을 기다리고 있다.
6. O.T를 겸한 첫 강의, 교수님 말씀이 제법 수월하게 귀 안으로 들어왔다. 작년 강의는 한 번 삶은 거친 보리밥이었다면 이번 강의는 어머니가 한 번 더 삶고 주걱으로 치댄, 부드러운 보리밥 같다. 농땡이 치면서 책가방만 들고 학교에 왔다 갔다 하던 친구도 졸업쯤이면 먹물이 좀 밴 듯 어엿하지 않던가. 시간의 선물이랄까, 일 년간 문학관의 언덕을 오르내린 덕분에 귀가 조금 뚫렸나 싶다.
7. 교수님께서 40회에 걸쳐 80시간을 진행하는 수필강의는 긴 시간이라는 점을 강조하셨다. 그 시간이면 수필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일가견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내 귀가 약간 뚫린 것을 볼 때 결석하지 않고 꾸준히 수업에 나온다면 분명 쌓이는 몫이 있을 거라고 이해하였다. 문학관을 오가면서 글의 주제를 찾아보고 또 작품을 구상해본다면 강의 시간이 훨씬 더 늘어나는 효과를 얻지 않을까. 자투리 시간과 메모를 십분 활용할 계획이다..
8. 사는 동안 누구나 늘 무엇을 시작한다. 젊었을 때는 큰일을, 나이 들어서는 작은 것을 시작하는 것이 보통인데 나는 노년에 큰일을 저질렀다. 남들은 하찮을지 몰라도 내 딴에는 대단한 일, 글쓰기에 입문한 것이다. ‘창작은 신의 영역’이라는 말을 빌릴 것도 없이 글쓰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시작이 반’이라 하지만 나머지 반은 지난한 자신과의 싸움이다.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엄습할 때면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리곤 했다.
“정월 초하룻날 먹은 마음 섣달그믐까지 가져가야 한다.”
이 말씀은 아무리 욕심을 내어도 지나침이 없을 것 같다.
9. 어느 분야에서나 뛰어난 사람이 있듯이 수필에서도 따라야 할 사람이 있다. 물론 저명한 수필가들이 선구자다. 하지만 그들의 글은 너무 멀어서 잡히지 않고 오히려 주눅이 들 때도 있다. 이럴 때 읽으면 도움이 되는 글을 발견했다. 바로 난계수필반을 거쳐간 선배들이 써놓은 습작들이다. ‘다움 수필세계 까페’에 들어가면 있다. 좀 어눌한 부분도 있으나 같은 과정, 같은 교실에서 공부했던 이들의 땀이 밴 글이라 훨씬 친근감이 들었다. 문학을 향한 어설픈 발걸음이 진 덴지 마른 데인지 모르고 헤매다가 차츰 선생님의 등불을 따라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었다. 완성도가 높은 글, 수필작가로 올라선 분들의 글도 있다. 배움에 있어서 왕도는 없겠지만 효율적인 길은 있다고 본다. 그 글들은 그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올해에도 소리내어 읽어보리라.
10. 문학관은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이면 따뜻한 강의실과 열정적인 교수님의 강의를 공짜로 제공한다. 그 안에서 내면이 맑은 사람들과 함께 공부한 시간은 새로운 문화와의 만남이었다. 옛날 같으면 지체 높은 양반들이나 향유 할 수 있는 신선놀음 아닌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가 정한 멘토의 인격을 닮아가는 과정을 내내 즐길 참이다.
11. 돌아보면, 마음 구석에 아무렇게나 쟁여두었던 생각들을 끄집어내어 펴고 닦아서 글로 나타내었다가 부끄러워서 도로 집어넣는 작업의 반복, 이것이 나의 수필 습작이었다. 나를 열어젖히는 용기가 한참 부족했다. ‘부족함을 알면 반쯤 이룬 것’이라 했으니 나머지를 마저 이루어내야 한다. 그 첫 번째 실천으로 사소한 일로 멀어진 친구에게 내가 먼저 긴 편지를 쓰고 싶다. 그것은 나의 버킷리스트에도 맞는 일이다. 죽기 전에 맺힌 응어리를 푸는 것이 버킷리스트 상위에 있으니 수필습작을 통하여 그 일부를 달성함은 일거양득 아니겠는가.
12. 그래그래 조금씩 성숙 되어가는 글이 교수님의 격려를 입고 문우의 공감을 얻어내고 마침내 나를 찡하게 만들고 싶다.
13. 문학수업 시작하는 날부터 욕심이 많다. 안고 가지도 못할 욕심은 내려놓는 욕심을 더해야겠다.
3. 비손 /백계순1
1. 새벽 다섯 시경, 동이 트기 전인 어스름을 열고 한 노인이 마당으로 나온다. 활처럼 굽은 허리에는 지난한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노인은 마당 중간 지점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서더니, 두 손을 가슴께에 모으고 골목을 향해 수없이 허리를 굽힌다. 다음은 왼쪽으로 몸을 돌려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이제 끝났는가 싶었는데 아래채가 있는 방향으로 돌아선다.
2. 드디어 얼굴이 보인다. 다시 두 손바닥을 마주하고 수없이 비손한다. 노인의 연세에도 불편한 허리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움직임에 탄력이 있다. 매일 그렇게 해왔다는 증거이다. 내 가슴에 짠한 물결이 인다. 그러는 동안 새벽 어스름이 걷힌다. 놀랍게도 화면에서 눈송이가 휙휙 눈앞을 스친다. 바라보는 내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걱정하는 나와는 달리 기도에 몰입하는 노인은 차가운 바람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3. 하루를 시작하기 전과 마무리하는 저녁에 의식처럼 행하는 내 어머니의 모습이다. 눈이 소복이 쌓인 마당에 새벽녘 달빛이 함께 하기도 했고 저녁 별이 내려다볼 때도 있었다. 이런 어머니의 행동을 알게 된 건 집에 CCTV가 생기고 나서다. 처마 밑에 둔 호미나 괭이 등 농기구가 없어진다고 불안해하기에 자식들이 의논해 설치했다. 골목과 바깥이 보이는 두 곳에도 외부인 출입을 확인할 수 있도록 카메라를 달았다.
4. 물건이 없어진다는 것은 깜박깜박하는 정신에 어디 두고도 찾지 못해서일 가능성이 컸다. 가끔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오기도 했고, 화면을 봐도 도둑이 들어온 흔적은 없었다. 대신 우리 네 남매는 비손으로 하루를 밝히고 하루를 접는 어머니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머니의 비손은 멈추지 않았다.
5. 사실 어머니의 이런 행동은 오래되었다. 내가 여학교 졸업 후, 집을 떠날 때까지 훤한 보름달이 떠올랐을 때, 장독 위에 물사발을 올려놓고 간절한 기도를 바치거나, 부뚜막에 정화수를 떠 놓고 머리를 조아리며 비손하는 모습을 익히 보았다. 그럴 때의 어머니 모습은 경건한 의식을 치르는 제사장 같았다. 그 의식을 네 남매 모두 가정을 이룬 지금까지 이어왔다는 걸, 자식들은 하나같이 까맣게 몰랐다. CCTV를 통해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만난 네 남매는 눈시울을 붉히며 자신을 돌아봤다.
6. 우리가 미성년일 때, 어머니는 집을 떠나있는 식구의 생일에도 더욱 신경 썼다. 아래 남동생은 일찌감치 도시로 공부하러 갔었다. 그의 생일에 어머니는 동생이 좋아하는 귀한 조기와 잡채, 찰밥에 미역국을 끓여서 정성스럽게 상을 준비했다. 아무리 침을 꼴깍꼴깍 삼켜도 어머니의 의식이 마무리되어야 우리는 숟가락을 들 수 있었다. 귀동냥으로 들은 어머니의 소원은 늘 한결같았다. 어디에서든 배곯지 말고 무탈할 것. 눈 안에 있어도, 객지에 나가 살아도 생일상을 차려놓고 비는 이유였다.
7. 지금은 자식들 모두 출가해 밥 먹고 사는 데 어려움이 없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무엇이 그리 간절한 걸까? 손바닥 지문이 닳도록 염원하는 게 무엇일까? 어린 네 남매 두고 일찌감치 세상 떠난 남편이었다. 그때는 자식들 밥 굶기지 않는 것이 어머니의 소원이었을 것이다. 남자도 버거운 농사일에, 남보다 더 이른 새벽부터 들에 나가도 힘든 살림살이는 좀체 가벼워지지 않았다지. 논두렁에 모든 짐을 벗어 던지고 훌훌 날아가고 싶은 마음 왜 없었을까. 우리가 먹은 음식만이 어머니의 눈물이고 피땀이었을까. 그게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남편 잃은 빈자리의 슬픔이 오죽이나 컸을까.
8. 친정에 갈 때마다 어머니는 첫새벽이 오기도 전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혹여 자는 내가 깰까 부스럭 소리도 조심하며 주섬주섬 겉옷을 챙겼다. 몰래 문을 열고 나가려다 재빨리 방 안으로 들어오는 거실 공기에 발목을 잡힐 때도 있었다. 설핏 잠이 깬 나는 날이 새지도 않았는데, 어디 가냐고, 무섭지도 않냐고 몇 마디 던지지만, 이내 다시 잠이 들곤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 일은 까맣게 잊었다. 자식들의 단잠을 지키려고, 어머니는 새벽바람을 맞으며 기도했다는 사실을 CCTV를 통해 비로소 알아챘다.
9. 어머니는 CCTV가 도둑을 지킨다는 것만 안다. 자식들이 당신의 사생활을 훔쳐본다는 것은 모르는 듯하다. 우리 역시 누구 하나 어머니 앞에서, 비손하는 모습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어머니의 성역을 지키려는 마음은 네 남매가 똑같다. 동영상만 서로가 공유할 뿐이다. ‘어머니가 어제보다 마당을 나오는 시간이 조금 이르네’ ‘오늘은 모자를 썼네’ ‘현관문 앞에서 멀어지지 않는 것 보니 거기는 비가 오나 보다’ 서로 말없이 미소만 짓는다. 굳이 날도 좋지 않은데 왜 그러세요, 개입하려 하지 않는다. 자식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믿는 어머니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이리라도 평탄하게 사는 게 어머니의 비손 덕분이라고 알고 있다. 무엇보다 어머니 마음 편안하면 다 좋은 것이다.
10.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해서일까. 아니면 손주들을 위한 기도가 보태져서일까. 어머니의 기도는 더 길어졌다. 새벽 찬바람이 걱정되기도 하지만, 카메라를 통해서라도 어머니 모습을 매일 볼 수 있어 참 좋다. 현관문을 열어 어둠을 헤치고, 비손으로 하루를 여는 어머니의 모습이 우리에겐 오늘도 축복처럼 느껴진다.
4. 사랑은 음악으로 기억된다/남경수1
1 내 나이 마흔을 넘긴 어느 날 오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너무 놀랐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 온 목소리는 내 첫사랑 그 아이였다. 평생 다시는 만날 일은 없을거라고 생각했는데.
2 그 아이를 처음 만난 것은 고3 학력고사를 치고 난 후이다. 금곡에서 고3 학생 간부들 수련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공부한다고 고생한 수험생들을 위한 일종의 힐링 행사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우연히 간은 조에 배치되어 그는 사회자, 나는 총무를 맡게 되었다.
3 첫 눈에 반한다는 게 이런 것일까? 처음 본 순간 후광이 비치면서 세상이 환해졌다. 그 아이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중, 여고를 다녀서 이성 간에 만남이 전무 했던 나는 이성에 대해 어떤 기준이 없었다. 그런데 그냥 끌렸고 그냥 좋았다. 그런 스타일의 남자를 좋아하는지 나도 몰랐던 일이었다.
4 큰 키에 잘생긴 얼굴, 기타를 맨 그 뒷모습에 그만 마음을 빼앗겼고 중저음의 목소리에 가슴이 설렜다. 조 자랑 대회에서 그는 해바라기의 ‘이젠 사랑할 수 있어요’와 Harry Nilsson의 ‘without you’를 불렀다. 기타 치며 노래 부르는 모습에 여학생들이 난리가 났다.
5 중학교 때부터 방송부 활동을 해서 노래를 좀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나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다. 사실은 ‘without you’라는 노래를 몰라서 나중에 레코드 상점에 가서 들은 대로 직접 불러 알아낸 노래다. 여자 친구가 될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였고 자신도 없었다. 가슴은 터질 것만 같고 친한 사이가 되고 싶은데 내가 다가갈 수 있는 자리는 없었다. 우리 조의 지도를 맡은 동아대 학생의 대학교 축제 초대로 만남은 이어졌고 우리 조끼리 따로 만나기도 했다.
6 하지만 만남의 목적이 사라지면 만날 이유가 없어진다. 만남을 계속 이어 나갈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하다 용기를 내어 편지를 썼다. 좋은 친구가 되고 싶다고. 친구로서라도 가까이에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의 짝사랑은 시작되었다.
7 그는 아는 노래들이 많았다. 형이 음악을 좋아해서 pop의 매니아였고 그도 형 때문에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들려준 음악 이야기는 너무도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그로 인해 새로운 음악의 세상을 알게 되었다. 내가 음악을 좋아하니 노래가 녹음된 테이프를 선물로 주었다. 거기에는 70~80년대의 팝의 명곡들이 잔뜩 수록되어 있었다.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듣고 또 들었다.
8 너무 좋은 노래들이 많았지만 ‘보헤미안 랩소디’가 특히 좋았다. 강렬한 기타 사운드가 좋았고 오페라 같은 묘한 매력이 있었다. 금지곡이라고 하고 내용이 뭔가 섬뜩하긴 했지만, 멜로디 라인과 노래가 너무 좋으니 별 상관이 없었다. 남포동에 있는 음악감상실 무아에 자주 갔었다.
9 같이 영화를 보러 간 적도 있었다. 부산극장에서 상영하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였다. 보답으로 선물을 주고 싶어서 문구류를 샀는데 예쁘게 포장해서 주려니 마음이 들킬 것 같았다. 애써 예쁘게 만든 포장을 뜯어버리고 다시 누런 종이봉투에 둘둘 말아 무심히 주었던 기억이 난다. 나란히 앉아서 보겠거니 기대하고 갔는데 세상에 자리가 앞뒤가 아닌가? 앞뒤로 앉아서 영화를 보고 있자니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심정이었다.
10 둘 다 재수를 하게 되었다. 그는 단과반 위주로 공부했고 나는 종합반에 들어가서 만날 일은 없었다. 서면 근처 학원가에서 우연히 길을 걷다 그를 마주쳤는데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늘 생각하다 보니 이런 일도 생기나 싶었다. 그때 유행했던 해바라기와 이문세의 사랑 노래는 모두 나의 노래가 되었다.
11 언젠가 부산대 앞에서 만나서 헤어지던 날 밤.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역에서 Black sabbath의 ‘she’s gone’ 노래가 흘러나왔다. 어찌나 그때 내 마음과 비슷한 느낌이었던지. 늦은 밤 역에서 쓸쓸하게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 내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이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12 그는 여자 친구와 갈등이 있을 때마다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나는 늘 상담역할을 해주었다. 그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내 마음도 모르고 남자 이름이라서 전화가 와도 엄마가 의심하지 않는다면서 좋아했다.
13 그렇게 시작된 짝사랑은 대학교 4학년까지 이어졌다. 그는 서울로 진학하고 나는 진주로 갔기 때문에 자주 만나지 못하고 편지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관계가 이어졌다. 대학 생활의 이모저모를 이야기하고 서로의 변화에 대해서 응원해주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도 글쓰기를 좋아했는데 단편소설을 한 편 서서 보내 준 기억이 있다. 그 편지들을 버리지 못하고 아직도 가지고 있다. 더 나이 들어 읽어보면 어떤 느낌이 들까?
14 너를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관계를 정리하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으나 친구로서의 그를 잃을 두려움이 너무 커서 말하지 못했다.
15 드디어 대학 4학년 여름. 군에서 마지막 휴가를 나오던 날, 포장마차에서 술을 함께 마셨다. 그땐 이미 마음을 정리한 상태였다.
“ 내가 너 좋아한 것 알았나?”
“ 알고 있었다. 예전부터……. 그래서 더욱 조심스러웠어”
16 깜짝 놀랐다. 이미 알고 있었다니? 알고 있으면서 시치미를 뗀 거였나 하는 배신감이 들었다. 그걸 모를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나도 참 어리석은 여자였다. 그도 친구로서의 나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나를 위로했다.
17 그렇게 오랜 짝사랑은 끝이 났고 더이상 친구 사이로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그 이후에 몇 번 연락은 했지만 잊고 살았다.
18 왜 전화를 한 것일까? 그는 피아노를 전공한 여자를 만나 서울에서 금융 일을 한다고 했다. 인터넷 블로그를 통해 그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19 몇 년 후에 추석 명절에 부산 가는 길에 잠깐 들린다고 해서 만난 적이 있었다. 아! 청춘이란 얼마나 짧고 허무한 것인가? 살도 많이 찌고 변화된 삶에 날카로워진 얼굴이 보였다. 이혼을 했단다.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던 이미지와 너무 달라져서 놀랐지만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힘들어서 연락한 거였구나.
20 이제 그 옛날의 절절했던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다. 흘러가는 세월에 나도 변했고 그도 달라졌다. 순수한 나이에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마음껏 느끼게 해준 사람이 되어 준 것에 감사한 마음이다. 그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21 그 나이에만 할 수 있었던 사랑이었고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하고 지나갈 수도 있다. 그런 감정은 인생에 몇 번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짝사랑이였기에 어쩌면 사랑이라는 감정, 그 자체를 사랑했던 것 같다.
22 사랑은 잊혀지고 노래만 남았다. 나는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어 행복한 사람이다. 감정은 사라지고 기억도 나지 않고, 이젠 느낄 수도 없지만, 그 노래들은 늘 그때의 나로 데려다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