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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
이성적 |
동물이다. |
종개념 |
종차 |
유개념 |
피정의항 |
정의항 |
(1) 종개념과 유개념을 한 몫 일컬어, 쉬운 말로 ‘종류’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정의’라는 글의 전개 방식도 종류를 나누어 종이 가진 본질을 규정하는 사고 작용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정의’는 상하 관계를 중시하는 글의 전개 방식이 되는 것이다. 정의는 대상이 가진 본질을 밝히는 사고 작용이다. 대상의 본질은 곧 대상이 지닌 내포(개념의 의미)를 의미하니, 개념이 가진 내포를 밝히는 사고 작용이 된다.
(2) 정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종차’이다. 종차는 ‘류’에 소속되는 다른 ‘종’이 가지지 못한, 정의되는 ‘종’만이 가진 본질적 특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가령, ‘사람은 두 발로 걷는 동물이다’는 정의가 있다고 하자. 이 때 ‘두 발로 걷는’이 ‘종차’인데 이는 정의되는 ‘종’만이 가진 본질적 특성은 되지 못한다. ‘두 발로 걷는 동물’에는 ‘사람’만이 아니라, ‘조류’도 있고 ‘유인원’도 있다.
(3) 종차는 피정의항이 부정어로 인식되지 않는 한, 부정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부정어를 사용하는 경우, 그 범주가 너무나 넓어져 피정의항이 가진 본질적 속성을 넘어서게 되는 것이다. 가령, ‘어머니는 아버지가 아닌 사람’이라고 정의했다고 해 보자. 종차인 ‘아버지가 아닌’이 포괄하는 개념은 ‘어머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집 아저씨’도 있고, ‘동생’도 있고 심지어 ‘사돈의 팔촌’도 있다.
(4) 요컨대, 정의의 글 전개 방식에서 중요한 것은, ‘피정의항=종차+유개념’이어야 한다는 점이고 종차나 유개념이 정확하게 설정되었는지 확인하는 점이다.
아래 문제를 보자.
‘사람은 이성적 동물이다’는 정의에서 비판적으로 제기될 수 있는 의문이 아닌 것은?(94년 1차 수능)
①사람은 동물인가? ②다른 동물 중에 이성을 가진 종은 없는가?
③이성적이라는 의미는 정확한가? ④이성적 동물이 아니라면 사람일 수 없는가?
⑤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해설) 정의에 의한 비판적 의문을 제기할 줄 아느냐를 평가하는 문항이다. 피정의항과 정의항이, 알맞은 종차를 매개로 하여 대등한 의미를 가지도록 연결되고 있느냐를 핵심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①은 유개념이 정확히 설정되었느냐에 대한 검증이다. ②는 종차가 피정의항에 있는 종개념의 본질적 특성을 잘 드러냈는가를 검증하는 것이다. ③도 역시 종차의 의미가 정확한가에 대한 검증이고 ④는 이성적이라는 것이 인간의 본질적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낸 것인지를 여부를 검증하는 것이다. ⑤는 구분을 한 것으로 종차나, 유개념에 대한 검증이 아니다. 그러므로 정답은 ⑤이다.
정의는 용어가 지닌 개념의 내포를 밝혀 글을 확장하는 방법으로 많이 쓰인다. 아래 예문을 보자.
실림론의 명제는 “살림은 살림이다”라고 줄여서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앞의 ‘살림’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살림입니다. 사전적으로 ‘한 집안을 이루어가는 일, 또는 그 형편’이고 내용을 말한다면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애보는 일-밥빨청애’요 일상생활에 다름 아닙니다. 한자로 표현한다면 식의주(食衣住)와 교육(敎育)으로 몸과 마음의 문제를 포괄하는데 우리의 삶이 이것을 벗어나서 달리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정리되어 있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뒤의 ‘살림’은 ‘살리는 일’이라는 의미의 살림입니다. 김지하 선생님의 수필집 중에는 동광출판사에서 펴낸 [살림]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는 서점의 서가에 꽂혀 있는 이 책의 표지제목을 보면서 ‘살림’이 ‘살리는 일’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강렬하게 깨달았습니다. 여기서 살림의 명제를 다시 정리해보면 “일상생활을 살리는 일이다”로 좀더 알기 쉬운 표현이 됩니다. (장택희 [살림의 논리] 2003)
(해설)‘살림’의 정의를 ‘살림’으로 내려놓고 피정의항 ‘살림’의 뜻을 다시 정의하고, 피정의항의 살림을 재정의해서 전체적으로 ‘살림이란 일상생활을 살리는 일이다’는 정의를 이끌어내고 있다. 이처럼 정의는 전체 글의 서두에 실려서 필자가 이끌어가고자 하는 주제를 한정하여 참주제를 끌어가는 데 많이 사용된다.
정의는 또 전체 글의 전개 방식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처음에 현상적인 정의를 보여주고 종국에는 본질적인 정의를 보여 줌으로써 어떤 개념이 가진 참뜻을 보여주려는 경우에 사용된다. 다음을 보자.
‘역사란 무엇이냐?’하면 누구나 서슴없이 지나간 일의 기록이라 대답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모든 정의가 다 그런 것같이, 이 정의도 한편에서는 설명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가리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역사를 바로 아는 일은 우선 되는 대로 하는 역사의 정의를 바로잡음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첫째, 지나간 것이라 하지만 역사는 결코 지나간 것이 아니다. 정말 지나간 것이라면 지금의 우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을 것이요, 따라서 기록할 필요도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 알 필요를 느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지나간 것이 아니다. 현재 안에 살아 있다. 완전히 끝맺어진 것이 아니라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죽어버린 단순한 과거가 아니요, 우리의 현재의 살림 속에 살아있는 말하자면 산 과거다.
다음은 일이다. 지나간 일을 기록한다 하지만 지나간 날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그대로 다시 그려놓는 것이 역사는 아니다. 우선 그것은 될 수 없는 일이다. 지나간 10년간의 일을 다시 나타내려면 적어도 10년의 세월을 들어야 할 것이니, 그렇다면 역사는 영 쓸 수 없는 일이다. 또 설혹 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필요 없는 일이다. 그 까닭은 그것은 우리의 지금 살림과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역사에 적는 일은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골라진 사실이요, 그 고르는 표준이 되는 것은 지금과의 산 관련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그 사실이 가지는 뜻이다. 뜻이 문제이다.
또 그 다음은 기록이라는 말이다. 지나간 일의 기록이라 함은 틀림없는 말이지만 몇 개의 사실을 골라 그 시작과 끝머리를 낱낱이 적는 것만이 역사는 아니다. 그 사실을 기록하되 서로서로 사이에 산 관계를 주어가지고 체계가 있게, 통일이 있게 하는 것이라야 한다. 사실과 사실 사이에 인과 관계의고리가 맺어져가지고 전체가 한 개 통일체를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함석헌, 한길사, 2001)
(해설) 역사의 정의를 현상적으로 내린다. 역사란 지나간 일을 기록이다. 이것을 다시 자세히 분석하여 ‘지나간’의 의미를 정의한다. 역사에서 ‘지나간’은 ‘지나갔지만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이라는 뜻이다. 다음으로 ‘일’을 정의한다. 역사에서 ‘일’이란 지금과의 산 관련 아래 골라진 일이요, 그것은 골라진 일이 지닌 뜻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기록’을 정의한다. 기록이란 기록하되 서실 사이에 산 관계를 체계 있게 통일이 있게 기록하는 것이라야 한다. 그래서 역사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를 가지는 일의 뜻을 체계성 있게 통일성 있게 기록한 것이라는 정의를 뽑아낸다. 현상적 정의로부터 시작해서 그 정의를 이루는 하나하나의 요소를 분석한 다음 그 요소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림으로써 궁극적으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본질적 정의를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