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나라에서 생산되는 음식 중에서 가장 좋은 것들만 먹고 마시고, 최고의 의료진과 비서진으로 구성된 건강관리시스템을 누렸던 조선시대 왕들의 평균수명은 의외로 46세밖에 되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환경 속에서 생활한다 하더라도, 스스로가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사실인 것이다.
그 스물 일곱 분의 왕들 중에서 유난히 우리 시선을 끄는 왕이 있으니 바로 영조임금이다. 영조는 83세에 사망하여 조선시대 최고로 장수한 왕인데, 다른 왕들의 평균 수명보다 거의 2배 가까이 오래 살았으며, 또한 특별히 큰 질병을 앓은 적도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우리는 그 무병장수의 비결을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영조의 장수 비결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선천적인 부분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의 노력에 따른 후천적인 부분이다.
그 중에서 선천적인 부분은 바로 어머니의 출신성분이라 할 수 있는데, 아시다시피 영조의 생모는 무수리 출신이다. 야사에 의하면 영조의 생모는 장희빈의 음모에 의해 폐비되었던 인현왕후의 복귀를 빌며 밤에 치성을 드리다가 마침 순시를 돌던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게 되었다고 한다. 영조는 다행히 대대로 부실했던 아버지보다는 건강한 어머니를 닮았으니, 무수리 출신인 영조의 모친은 영조에게 튼튼한 건강을 물려주었던 것이다.
비천한 신분 출신의 영조가 경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권력 있는 신하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영조는 그 원죄를 공유하며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배경을 이루고 있는 권신들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 급기야 그 당쟁의 여파로 아들인 사도세자 마저 죽이게 된다. 그러나 그 대신에 영조는 평생을 살면서 생사를 넘나드는 질병을 크게 앓아본 적이 없을 정도의 튼튼한 건강을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필자는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나, 2세를 준비하려는 새내기부부에게 일단 먼저 장차 부모가 될 자신들의 건강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 놓을 것을 주문한다. 부모에게서 선천적으로 물려받는 건강의 중요성이 무척이나 중요하기 때문인데, 말 그대로 정자와 난자를 만들어내는 아빠와 엄마의 건강상태가 태어날 아가의 평생운명을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다행히도 요새 새내기 부부들은 가족계획을 하기 전에 먼저 한의원부터 찾아오시는 분들이 늘어나 무척 다행스러운 일로 생각하고 있다.
<왕조실록>에 의하면 영조는 다른 임금들에 비해 주색을 멀리했고, 비교적 검소한 생활을 했다. 이것이 바로 영조의 탁월한 건강에 대한 후천적인 요소이다. 영조는 앞서 언급한 체질적인 강인함과 아울러서 스스로의 건강관리에도 남달랐다고 전한다.
일단 식사는 거르지 않고 반드시 꼬박꼬박 챙겨먹었다고 한다. 심지어 회의를 하다가도 식사시간이 되면 먼저 밥부터 먹고 다시 회의를 시작하였다고 하니 규칙적인 생활이 몸에 배었음을 알 수 있다. 규칙적인 생활과 식습관은 건강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흔히들 군대에 가면 건강해진다는 이유가 바로 이 규칙적인 생활과 식습관이라고 생각하면 올바른 생각인 것이다.
또한 경종이 즉위한 18세 때부터 궁궐 밖에서 백성들과 어울리며 검소하게 살았으며 밥도 잡곡밥을 더 좋아했다고 하니, 사치와 향락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실제로 주색에도 분명한 경계가 있었다고 한다. 왕이 최고의 수라상을 받은 이유는 백성들이 편안히 잘살 수 있게 좋은 정치를 하라는 의미였다. 때문에 가뭄이나 홍수가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면 왕은 수라상에서 반찬의 수를 줄이고 허름한 곳으로 거처를 옮겨 백성들과 고락을 함께 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영조는 그렇게 가뭄이 들면 간장만으로 수라를 받기도 했는데, 평소에도 영조는 검박(儉朴)하여 하루 다섯 번 먹던 식사 중에서 오식(午食)과 야식(夜食)을 두 번 줄여서 하루 3회로 하였다고 한다. 역시 소식하면서 규칙적인 식사를 하는 것이 건강유지의 비결임을 알 수 있다. 자고 이래로 장수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식하며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탕평채’라는 음식에서 우리는 영조의 마지막 건강비결을 찾아볼 수 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1725년 경 영조가 당쟁을 뿌리뽑기 위해 탕평책(蕩平策)을 실시하였는데, 이것을 논하는 자리의 상에 처음 올랐던 음식이라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붕당정치의 폐해로 아들을 잃은 영조는 정치적 화합을 실현하는 구심점으로 탕평책을 고안해냈다고 하는데, 대신들과 탕평책의 경륜을 펴는 자리에서 그 의미를 환기시키기 위해 탕평채란 음식을 선보였다고 한다. 어느 쪽에도 치우침 없이 고르다는 뜻을 지닌 탕탕평평(蕩蕩平平)이란 말에서 유래한 탕평채는 오색의 고명과 더불어 청포묵의 밝은 흰색이 어우러져 색깔에서도 조화를 이루며, 매끈한 묵의 감촉과 사각거리는 야채의 질감과 맛으로 인해 맛으로도 조화를 이루고, 영양학적으로도 완벽한 균형을 갖춘 음식이다.
따라서 특정음식에 치우쳐 편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음식을 골고루 균형되게 충분히 섭취하는 것이 영조의 마지막 건강비결이라 하겠다. 이렇게 탕평채가 모든 음식을 골고루 균형되게 먹으라고 권장하는 의미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혹시라도 부득이하게 음식을 가려먹고 싶다면 반드시 전문 한의사와 상담하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